한권으로 읽는 조선인물실록 - 김형광
진정한 공직자의 사표 황희 (2/3)
어느 날 황희의 집에 손님이 찾아와 조촐하게 술상을 받아놓고 담소를 하고 있었는데 어린 아이 몇 명이 갑자기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황희를 보자,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면서 상투를 만지고, 수염을 당기기도 하는 것은 물론 상 위의 음식까지 마구 집어 먹는 것이 아닌가. 황희는 "아이구 이놈들 보게. 오냐, 오냐" 하면서 나무라지도 않은 채 "손님이 계시니 너희들은 나가 놀아라" 하고 아이들을 달래서 내보내고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화를 계속하였다 한다.
손님은 내심으로는 "정승 집에서 아이들을 버릇없게 키우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며, "대감께서는 손자들을 굉장히 귀여워하나 봅니다."하고 나무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황희는 "아까 그 놈들은 우리집 노비의 자식들인데 나를 아주 잘 따른다네. 결레가 되었다면 미안 허이" 하고 대답하였다.
황희의 말을 들은 손님은 종의 자식에게까지 친어버이처럼 자상한 그의 모습에 감복했다고 한다.
또 하루는 당대의 명필인 이석형이 황희의 집에 들러서 담소하던 중에 황희가 통감강목이라는 책을 꺼내놓고 새로 책표지를 만들었으니 제목을 써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석형은 하도 참람스러워 몇 번 거절을 하다가 황희가 하도 정중히 요청을 반복하는지라 차마 더 이상 거절하기 어려워 새로 제본된 책의 제목을 써주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한 아이가 방안으로 들어와 저 혼자 놀다가 금방 제목을 써 놓은 책 위에 오줌을 싸고 말았다. 이를 본 황희는 노여운 기색도 없이 아랫사람을 부르지도 않고, 직접 방바닥과 책에 묻은 오줌을 닦고 아이의 옷을 벗겨 둘둘 말아서 아이의 손에 쥐어주면서, "괜찮아, 괜찮아, 이제 엄마한테 가서 옷을 갈아입혀 달라고 하거라"하고 말하며 창졸간에 오줌을 싸고 민망스러운지 우는 아이는 달래서 내 보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이석형이 오히려 안절부절한 심정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자 황희는 미안한 기색으로 이석형에게 사과를 하였다. 그런데 조금 있으려니 방문 밖에서 여종이 황망한 목소리로 죄를 청하는 것이 아닌가. 황희의 방에서 오줌을 싼 아이는 제 어미가 일하는 틈에 그 방으로 들어온 종의 아이였던 것이다. 황희는 사죄하는 여종에게 오히려, "철없는 아이가 한 일이니 신경 쓰지 말아라" 하고 따뜻한 말투로 위로해 주었다. 그 후 이석형은 황희에 대한 존경심이 더욱 깊어져 그 앞에서는 항상 머리를 숙이고 예를 다했다고 한다.
사실 황희는 천인들의 처지를 가엾게 여겨서 천역을 가볍게 해주는 방안에 골몰하였고, 면천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귀천을 구분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으로 타인을 대하고자 하는 그의 삶의 태도는 그 시대의 일상 개념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의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그의 열린 자세로 인하여 당시에는 노비 출신 중에서도 여러 사람이 그 능력을 인정받아 관직에 발탁되기도 하였는데, 조선이 엄격한 신분사회 였음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실제로 황희는 자기 집에서 부리던 어린 노비 중에서 학문의 뜻과 능력을 보이는 아이를 면천시키고 경제적 도움까지 주면서 이르기를, "너는 열심히 공부하면 나라의 동량이 될 수 있으니, 너를 알아보지 못하는 곳으로 멀리 가서 학문을 연마하여라. 그리고 지금부터 너와 나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니, 후일에 상면하더라도 절대 아는 체를 하면 아니된다" 하고 다짐을 하여 내보냈다.
그 뒤 십수년이 흐른 후 그 노비는 학문에 정진하여 실제 과장에서 시험관으로 나와 있던 황희와 만나자, 반갑고 고마운 심정에서 황희에게 자신의 본색을 밝히고 인사를 하려고 하였다. 황희는 젊은 선비의 태도에서 사태를 짐작하고, 짐짓 시험관에게 잘 보이려고 인사를 하는 것은 받아줄 수 없다는 듯이 먼저 나무라서 내쳐 버렸다. 젊은 사람의 10년 공부가 공염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심모원려의 뜻이었다. 다행히 노비 출신의 젊은 선비는 그 시험에 급제하였는데, 황희는 발표 후 따로 불러내서는 "다시는 나를 아는 체하지 말 것이며, 나도 너를 잊었노라. 그러니 앞으로도 더욱 열심히 정진하여 오로지 나라를 위한 일에 노력을 다하라" 하고 재차 당부한 후 돌려보냈다고 한다.
강직하고 합리적인 공무 수행
사적으로는 항상 타인을 배려하는 자세로 일관한 황희도 공적인 일에는 엄격하기가 서릿발 같았는데 그에 대항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백두산 호랑이라고 일반에 회자되던 김종서가 북방의 6진을 공고히 하고 병조판서로 영전한 후인 어느 날, 황희는 병조에 축하차 들렀다가 정승이 찾아왔는데 영접도 없이 자리에 비스듬히 기대고 앉아 있는 김종서를 목도하게 되었다. 김종서가 미처 못 본 것인지도 보고도 못 본 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큰공을 세우고 돌아온 그의 태도에 자만하는 빛이 역력하자, 황희는 김종서의 면전에서 수행하던 병조의 관리들에게, "너희 판서께서 앉아계신 의자의 다리가 잘못된 것 같다. 한쪽이 기울어졌으니 속히 고쳐드리도록 해라" 하고 일갈하였다. 이 말을 들은 김종서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황망히 일어나서는 황희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소인이 미처 대감께서 오시는 것을 뵙지 못하고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라옵니다" 하고 사죄하였다. 사실 김종서에 앞서 북방을 살피고 돌아온 사람은 칠순에 가까운 황희로서 6진 개척의 적임자를 세종이 하문할 때 김종서를 추천한 것도 바로 그였다. 황희는 김종서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그릇임일 알고 그를 중용하도록 건의하였으나, 김종서의 성격이 다소 거칠고 자신감이 지나친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한바탕 혼을 내준 것이다. 김종서는 후일 이때의 일에 대하여, "내가 한창 북방을 경영할 때는 오랑캐의 화살이 코앞에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는데, 황 정승의 일갈에는 오금이 저리고 등에서 진땀이 다 흘렀다"고 회고하였다 한다.
인간에 대한 황희의 남다른 이해를 알 수 있는 일면 중에서 공적인 사례 몇 가지를 더 살펴보자. 한번은 조정에서 관리의 행실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기생들을 모두 없애자는 의견이 있었다. 주요 대신들 간에 의견의 합치를 보고, 왕에게 건의하기 전 황희에게 마지막 결재를 올렸다. 모두들 평소 황희의 곧은 자세로 보아 틀림없이 허락이 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노재상은 뜻밖에도 반대의 의견을 내놓았다. 모두들 예상 밖의 태도에 놀랐지만, 황희가 반대하는 이유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 젊은 관리들이 집을 떠나 외지에 나가 홀로 있으면 기본적 욕구를 해소 할 수 있는 제도상의 대상이 관기였는데, 이를 모두 없애면 젊은 관리들이 자연히 여염집 여자들을 엿볼 것이고 또한 부정한 방법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할 수도 있어, 오히려 윤리를 더 상하게 하고 선비의 도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지방관으로 전출하면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족을 동반하지 못하게 하였다. 가족을 동반했을 때 민폐가 발생될 수도 있고 공적인 부담도 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당시 관리들은 경기 일원의 과전을 부여받아 경제적 기반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 외 지방은 개인의 수조권이 인정되지 않아서 가족을 동반한다면 자연히 별도의 비용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황희는 명분에만 집착하지 않고 인간의 본능까지도 통찰하는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으며, 큰일에는 엄중하였으나 사소한 일에는 오히려 허허롭고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원칙에 충실한 업무 자세
큰일에 닥쳤을 때 개인의 신상을 걱정하거나 사욕을 버리고 당당하게 맞서는 공직자로서 황희의 참모습을 보여준 주요한 사건 두 가지도 재조감 해 보자. 먼저 민무구,민무질 형제 제거 사건이다. 태종의 왕후 민씨는 역사의 격랑기에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동지적 내조를 통하여 이를 뒷받침한 일등 공로자였다. 무인정사 때도 병장기를 숨겨 놓았다가 내준 이도 그녀였고, 우물쭈물하는 남편을 말에 태워 거사에 내몬 것도 그녀라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이방원 못지 않은 강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부부간의 갈등이 심했다. 또한 민씨의 남동생들인 무구, 무질 형제는 자신들이 공신의 처지이기도 하였고, 누이인 민씨의 후광까지 등에 업고는 조정에 갈등을 야기하고 있었다. 이에 당시 형조판서로 있던 황희는 태종 8년(1408년)에 이들을 벌하여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사실 이것은 민씨 형제의 누이가 왕후로서 눈이 시퍼렇게 살아있고, 세자도 어려서 외갓집에서 자란 탓인지 외숙부들을 따르는 상황이라 생사를 초월하지 않고는 감연히 앞장설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외척의 발호를 걱정하던 왕의 심중과 조정의 인심이 이미 민씨 형제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삭탈 관직 후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어쩌면 지신사로 수년 동안 왕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황희로서는 태종과의 교감을 통하여 이 일을 추진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무조건 왕의 뜻에 따라 일을 진행시켰다기보다는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정국의 화근이 된다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세자의 폐출과 관련된 사건이다. 이번에는 왕의 의견에 끝까지 반대하다가 그의 정치적 생명까지 끝날뻔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세자 제(양녕대군)는 파행적 행동으로 아버지 태종의 미움을 사서 결국에는 폐세가 되고 말았지만, 이 과정에서 황희는 폐세자가 큰 화를 불러 올 수 있다 생각하여 극력 반대하였다. 세자를 바꾸려는 왕의 결정을 거두어 달라는 황희의 논지는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첫째는 국초에 태조가 세자를 잘못 세워서 골육상쟁의 비극을 초래한 일이 있는 것처럼 세자 변경은 공연한 화를 자초할 수 있으며 태종 자신이 그 당사자로 피해를 보지 않았느냐는 지적이고, 그 둘째는 지금부터라도 적장자 승계의 엄정한 전통을 세워나가야 향후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발생할 수 있는 말썽을 차단하는 본보기가 되어 국가 백년대계의 기틀을 튼튼히 할 수 있고, 그 셋째는 세자가 아직 나이가 어리나 근본이 영리하고 총명하니 제대로 훈육한다면 충분히 군왕의 자질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의 결심이 워낙 공고하여 결국 세자는 태종의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으로 바뀌었고 황희 좌천되었다가 유배의 길을 가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