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2부 사랑은 용광로처럼
명기의 사랑법과 일본 유학생의 낭만 - 강명화
1923년 6월 15일자 <동아일보> 3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었다.
강명화의 자살. 내막은 매우 복잡. 가명을 명화라 하야 일시 경성 화류계에서 이름이 있다하는 평양 태생의 강도천은 경북 재산가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의 애첩이 되야 동경으로, 경성으로 그 남편과 같이 왕래하더니 최근 온양 온천에 그 남편과 함께 가서 유숙하든 중 12일 온천 여관에서 남편이 없는 틈을 타서 자살할 결심으로 독약을 먹었으므로 즉시 의사의 치료를 받았으나 회생치 못하고 인하야 절명하얐는데, 시체는 작일 경성으로 운반하야 매장할 터이며 자살한 원인은 장씨의 사정과 기타 복잡한 내막이 있다더라.
신문에 그와 같은 기사가 실리던 날 오전 10시, 강명화는 그녀의 유언대로 이태원 공동 묘지에 묻혔다. 신문에는 25세로 되어 있었으나 한국 나이로 그녀는 23세였다. 그야말로 꽃다운 나이에 강명호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셈이었다. 1901년(고종 38년) 6월 12일 평양 시외에서 태어난 강명화는 금정에 미친 아버지 강기독의 가산 탕진으로 소녀 시절을 가난과 불운 속에서 지내야 했다. 명화란 그녀의 기명이고 호적상 이름은 도천이었다. 아버지는 금점도 금점이려니와 노름판이다, 색주가다, 온갖 못된자리는 다 찾아다니는 떠돌이요, 건달이었다. 어머니 윤씨 부인이 임신했을 때 아버지는 집안에 잠시 다녀간 일이 있었는데, "아들을 낳거든 도천이라구 지어!" 하는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또다시 사라져 버렸다.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도 윤씨 부인은 이름을 도천이라 지었다. 한데 두어 달에 한 차례씩 집을 다녀가는 아버지도 도천이의 성장을 예사로 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고것 참 에미는 잘생기지도 안았는데 도천이는 이쁘단 말야!" 그런 말이 아니면,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던데 우리 집 밑천이 되겠는거!" 하고 귀여워하는 눈치였다. 어머니 윤씨 부인은 남편의 그 같은 부성애가 싫지 않았다. "여보, 우리 도천이를 훌륭하게 키워 봅시다." "암! 평양으로 데리고 나가서 키워 보자고." 남편은 어린 도천이를 데리고 아내 먼저 평양으로 나갔다. 세간을 처분하고 뒤따라 윤씨 부인도 평양으로 나오기로 되어 있었다. 도천이 바로 밑에 남동생 도선이가 있었으나, 윤씨 부인은 맏딸 도천에게 정이 더 가는 터였다. 얼마 뒤 윤씨 부인은 남편과 도천이 먼저 나온 평양집으로 뒤따라 왔다. 그러나 응당 평양집에 있어야 할 남편은 그 집에 있질 않았다.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적어 준 평양집 주소는 그들 가족이 살 집이 아니라 기생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천이를 데리고 있는 산호주라는 기생에게 물어보았으나, 남편의 소식은 모른다고 했다. "우리 도천이를 내어주오!" 윤씨 부인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무슨 소릴! 제 아비가 몸값 받아간 아이를 내어주다니 당치도 않소!" "뭐예요? 그럼 우리 도천이가 동기가 되었단 말이오?" "우리 도천이, 우리 도천이 하지 마오! 이젠 내 수양따이니까!" 기생 산호주는 매몰차게 따돌리고 대문을 안으로 닫아걸었다. 양모 산호주는 도천이의 이름을 갈아 버렸다. '확실이'. 무엇이 그리고 확실하다는 뜻인가. 확실히 동기는 동기란 뜻인가. 도천이란 아명도 별스러웠지만 확실이란 동기 이름도 평범하지만은 않았다. 술 따르고 노래 부르는 나날이 어린 확실이의 세월이었고 보람이어야 했다. 장구치고, 춤추고, 노래 부르고....... 배우겠다는 부푼 희망이 한 가닥 꿈으로 멀리 사라져 버린 지도 오래였다.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조차 저주스러운 아버지 강기덕은 이따금 산호주 집에 나타나 기생충처럼 용돈을 뜯어가는 눈치였다.
세월이 흘렀다. 강확실은 한 사람의 여인을 성숙해 갔다. 아름다운 꽃에게는 벌과 나비가 날아드는 법인가. 해가 바뀔수록 용모와 마음이 아름다워져 가는 확실이 주변에 평양의 명문 자제들이 벌과 나비처럼 모여들었다. 확실이는 그녀의 꽃을 꺾으려 드는 호색가들에게 다져진 결심이 하나 있었고, 그 결심을 언제나 서슴없이 펼쳐 보이고는 했다. "난 정절을 굳게 지켜 뒷날 멋진 남자와 혼인할 테다." 말하자면 그것이 확실이의 바람이었고 꿈이었으며, 현실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확실이 아버지에게 돈을 주고 그녀를 사들인 기생 산호주는 생각이 달랐다. "저것을 빨리 머리 얹어 주고 돈을 두둑하게 긁어 봐야 할 텥데........" 산호주의 생각은 정말이지 '엿장수 마음대로' 확실이를 어디엔가 팔아 보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웬걸 처녀 강확실의 지조는 그 아무도 꺾을 수도, 이용할 수도 없었다. 동기 생활 몇 년에 그녀는 세상을 알기 시작하였고, 돈을 알게 되었다. 기왕 이 길에 들어섰으니 불쌍한 어머니와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호강시켜야겠다는 결심도 섰다. 돈을 벌기에는 평양이 너무 좁다고 판단되어 그녀는 서울(당시 경성) 쪽으로 눈을 돌렸다. 동기 강확실의 나이 열아홉 살로 접어든 봄, 그녀는 어머니 윤씨와 남동생 도선을 데리고 서울로 오고 말았다. 양모 산호주가 확실이를 놓지 않으려고 온갖 앙탈을 다 부리고 나왔으나 이제는 성장할 대로 성장한 그녀의 계획을 막을 수더 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에 오자마자 그녀는 평양 시절의 동기 때를 씻어 버리고 이름을 갈아 새 출발을 하기로 했다. 밝을 명, 꽃 화 '밝은 꽃'이 그녀의 제 2의 이름이었다. 강명화란 이름으로 기적에 오른 도천은 이제 한 사람의 직업 여성으로 서울 사회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몸에는 예쁘고 깜찍한 명함도 들어 있었다. 손님이 그녀의 이름을 물어올 땐 허리춤에 손을 넣어 그 작은 명함을 꺼내 주게끔 되었다. 명함에는 이렇게 박혀 있었다.
조선 권번 강명화 경성부 다옥정 165, 전화.강화문 2170
동경 유학생 장병천이 강명화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송별연 자리에서였다. 장병천은 영남 갑부의 외아들이요, 미남 청년에다 그 당시 서울에서 몇 명 안되는 동경 유학생 가운데 대학 배지를 달고 다니는 젊은이. 전문 학교가 태반이던 시대에 그의 대학 모표는 그만큼 인기가 있었고, 1920년에 설립을 본 경일 은행은 그의 아버지 장길상이 주동이 되었다는 점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부잣집 자식이었나 짐작이 가는 일이다. 장병천은 여름 방학을 끝내고 도경으로 들어가기 전 명월관에서 친구들과 송별련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강명화를 처음 대하게 된 것이었다. 십여 명의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한 명월관에서 강명화의 인사를 받았을 때 장병천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물론 장안의 인기 있는 명기 강명화란 이름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나, 저렇게 아름답고 귀여울 줄이야.....' 짓궂은 친구들은 장병천을 강명화 곁에 앉도록 했다. 술이 거나해졌다. 한 손에는 술잔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명화의 손을 꼭 잡고 병천은 말했다. "오늘 밤차로 나는 부산을 거쳐 동경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어쩐지 떠나고 싶지 않아......" "그래두 떠나셔야죠." "우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음 겨울 방학 때 오시면 만날 수 있잖아요." "겨울 방학까진 너무 길어, 그 안에 다시 만날 순 없을까......." 명화의 손을 쥔 병천의 손은 술기운 탓만도 아닌 듯 열기가 있었다. "나 오늘 밤에 떠나고 싶지 않네." "또 그 말씀. 술이 깨시면 곧 그 말씀은 잊어 버리실 거예요." "무슨 소릴. 내가 취한 줄 알어?" 병천은 손에 든 술잔을 비워 내고 또다시 술을 받았다. "약주가 과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 "난 선생이 아니구 학생이야." "아이, 대학생이니까 제겐 선생님 격이죠." "그보다 내가 동경에 간다면 명환 나한테 편지하겠어?" "그럼요, 선생님 공부에 방해가 안 된다면야." "아니, 내가 먼저 편지할 테니깐 주소 하나 적어 주게." 명화는 명함을 꺼내어 병천의 손에 쥐어주었다. "어? 기차 출발 시간이 임박했네, 일어서자고." 병천의 친구가 시계를 보더니 먼저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강명화와 장병천은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 했다. 명화는 집으로 돌아와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만 병천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부잣집 외아들이라는 점에 내가 끌린 것일까?' 그게 아니었다. 몇 안 되는 동경의 대학생이라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쾌남아에 대학 사각모를 쓴 병천의 모습은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고 뻔질나게 찾아오는 한량들 속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머리를 얹고 들어앉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정말로 그이는 도쿄에 가서 나에게 편지를 할까. 편지가 오면 답장을 해 주는 게 도릴까. 갑부의 외아들이 한 차례 술을 마시며 귀엣말을 한 걸 가지고 난 철썩같이 믿고 기다려야 하는 걸까.' 밤이 깊어 갔다. 깊어 가는 밤 속에서 그녀는 눈 뜬 정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이게 사랑이라는 것일까. 사랑은 이렇게 열리고 사랑하는 마음은 이렇게 성숙해 가는 것일까. 정병천을 머리 속에 접어두고 이것저것 곰곰이 생각하느라 그녀의 심신은 지쳐 있었다. 그 때 대문 밖에서 사람 소리가 났다. 인력거 닿는 소리였다. "아씨, 손님이 찾는데요." 방문 밖에서 부리는 아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명화는 짜증이 났다. "아씨, 손님이 보자는 데요!" "없다고 그래!" 취객이 일쑤 밤중에도 찾아오고는 하여 그 때마다 명화는 없다는 말로 따돌리기 예사였다. "만나 뵙구 가시더라도 가시겠다는데요, 아씨." 대문께로 나갔다 들어온 아이가 권하는 소리였다. 명화는 신경질적으로 신발을 끌고 대문께로 나갔다. "대체 누구야........?" "나, 정병천이오!" "에엣? 아니......" 동경으로 떠난 장병천이 자기 앞에 서 있다니, "어찌된 일이세요?" "명화가 보고 싶어서..... 명화를 두고 떠날 수가 없어서...." "믿어지지 않아요. 꿈만 같아요." "꿈이 아닐세, 명화. 기차를 타고 가다 용산역에서 내려 버렸소. 명월관과 조선 권번에 전화를 걸어도 명화가 없다고 그러더군. 인력거꾼한테 물어서 가까스로 이 집을 찾았지." "들어오세요......." 그날 밤부처 장병천은 강명화의 집에서 묵었다기보다, 강명화의 사랑 속에 파묻힌 것이다. 동경의 대학은 어떻게 하고 이렇게 명화의 집에 눌러앉아 있는 걸까. "대학에는 1년간 휴학계를 내고 집에는 무사히 동경에 닿아서 공부하는 것처럼 편지를 내고...." "그렇게 하셔두 되나요?" "명화 곁에 있으려면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지." 정병천의 본가에서는 매월 동경으로 학비를 보냈는데 그 학비는 도로 명화의 집으로 우송되게끔 각본을 짜 놓고 살림은 시작되었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권번에는 나가지 않고 장병천과 사랑의 밀어만을 속삭이는 명화는 비로소 생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오래갈리 없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윤씨 부인이 딸의 생활을 간섭하고 나섰다. 살림을 차릴 게 아니라 부잣집 외아들이니 돈을 뜯어내라는 것이었다. 다음엔 장병천의 본가에서 그만 알아 버렸다. 생활비와 학비가 끊겼고, 무엇보다 살길이 막막했다. 두 사람은 동경으로 뛰었다. 이목이 없는 낯선 고장에 가서 막벌이라도 하면서 그들의 사랑을 이어 보자는 계산에서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부잣집 외아들이 막벌이에 수월할 리 없었고, 게다가 동료 유학생들의 질시가 몸에 따가웠다. "이새끼, 기생첩 데리구 살면서 공부를 한다구? 유학생 망신시키지 마 새끼야!" 동료 유학생들의 위협은 매질을 가하는 것보다도 더 아픈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도로 발길을 되돌린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장병천이 거부의 외아들이란 점이었다. 장의 집에서는 아들이 고생하는 것을 보다 못해 한옥 한 채를 사 주었다. 종로 6가 32번지. 그러나 그들의 보금자리는 또다시 깨어져 버렸다. 이번에는 명화 아버지 강기덕이 돈을 요구하기도 하고,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사랑과는 관계없이 명화 아버지와 병천의 본가는 완전히 남이 되어 버리고, 그들의 사랑도 그 이상 지속하기가 어려운 상태로 악화되어 갔다. 명화는 결심했다. "선생님, 나 옥양목 치마 저고리 한 벌 하고 백구두 한 컬레 사주세요." "어디, 떠나게?" "아뇨. 선생님하고 온천에 다녀오구 싶어요." "........"
그들은 나란히 온양으로 떠났다. 1923년 6월 10일, 음력으로 4월 26일이 되는 이날은 명화의 생일이었다. 온천 여관에 투숙한 명화와 병천은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 길고 깊은 사랑의 밀어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비가 요란한 여관에서 명화는 미리 준비해 간 약을 먹었다. 6월 12일의 일이었다. 얼마 뒤 장병천도 명화의 뒤를 따랐다. 유학생들과 사회와 그의 본가의 질시를 떠나 병천은 죽어서 명화 곁에 나란히 누울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