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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실천이성비판>을 출판하던 해인 1788년에 자유의 도시 단찌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칸트의 저술과 인도의 성전, 그리고 플라톤에 얻은 바가 많다. 고 밝혔다. 그래서 자신의 철학에는 칸트의 잎과 플라톤의 꽃, 우파니샤드의 열매가 아름답게 맺었다고 말했다. 이 열매가 바로 그의 저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로 나타났다. 그는 한 때 헤겔을 미워하고 또 여성들을 이렇게 비난한 적이 있다. 여성들이란 음악이나 시뿐 아니라 회화에서도 참되고 진정한 의미나 감정을 갖지 못하며, 그들이 뽐내거나 둘러댈 때 교태를 빙자해 꾸며대는 소견머리 없는 견해만 있을 뿐이다. 여성들이란 정신병에 가까운 낭비벽 본능적인 교활함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러한 인간 경멸은 그의 전 사상을 관통하고 있는 염세주의에서 기인된다. 인간의 삶을 다층적 고뇌이며 철저하게 불행한 상태 라고 생각한 그는 모든 인간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자기의 어머니조차 혐오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단찌히의 한 의원의 딸로 태어나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작가였으나 아버지가 죽은 후 정부와 놀아났기 때문에 어머니와도 24년간이나 소식을 끊고 지냈다. 할아버지는 호상으로서 대단한 재산가였고, 할머니는 네델란드의 귀족집 딸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할머니는 정신병이 있어서 금치산 선고를 받았고, 아들 네 명 중 첫째는 자살을 했고, 둘째는 결핵으로 죽고, 셋째는 백치였고, 넷째는 탕아로 유곽에 미쳐 돌아다니다가 결핵으로 길가에서 쓰러졌다. 자살한 첫째 아들이 바로 쇼펜하우어의 아버지였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자기 집 곡창 곁의 물 속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때 그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인생이란 본래가 불안한 것이다. 이 불안의 해명이야말로 내가 평생을 걸어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 아니고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현재의 나로서는 철학으로 가는 길 이외에는 살길이 없다. 그리하여 그는 철학의 길을 택했다.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옮겨왔다. 거기에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를 보완하여 출판해 보았으나 눈여겨 보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의와 은거로 40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자는 물론 부모도 없었고 가정도 없었다. 나이 칠십 세가 되어서야 그에게 겨우 봄이 찾아왔으니 베를린 학술원이 그를 회원으로 추대한다고 통지해 온 것이 그것이다. 그는 복잡한 마음으로 거절해 버렸다. 그의 저서는 삼판이 거듭되었고, 프랑스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70회의 생일에는 정중하게 씌어진 승복하는 편지들이 책상에 수북히 쌓였지만 그러나 때늦은 감이 없지 않았다. 1860년 8월, 쇼펜하우어는 졸도하였고 9월 6일에 다시 한번 쓰러졌다. 그를 병석에 눕게 하였던 폐렴이 조금 나은 듯 했으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9월 18일 저녁, 유언장 집행인 빌헬름그비너와 마지막 면담이 있었다. 그는 이태리 여행을 다시 한번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21일 아침 쇼펜하우어는 밥상을 받았다. 하녀는 가만히 창문을 열어주고 물러갔다. 잠시 후 의사가 들어왔을 때 이미 그는 죽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댄 채, 얼굴에는 아무런 고통의 흔적도 없어 보였다. 72세였다. |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6-12-12 07: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