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를 뒤흔든 여인들 - 구석봉
제 3부 개화와 항쟁
한국 최초의 멋쟁이 문학사 - 하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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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래의 성은 김해 김씨이옵니다. 그러나 남편의 성을 따라 하씨라 부르기로 하였나이다. 이러한 나의 정신적인 변모를 두고 개화한 여성이라 부르는지도 모르옵니다만....."
어떻든 그녀는 하란사란 이름으로 우리 개화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기고 있다. 1875년 평양 태생. 얼굴이 남달리 아름답고 신체 조건이 뛰어난 데다 성격은 활달하여 남의 이목을 집중케 하는 그런 여인이었다. 간혹 그녀를 두고 예가 출신이라는 말도 떠돌지만, 어쨌든 인천 감리 하상기가 아직 별감으로 있을 때 그녀는 나이 어린 소녀로 1남 4녀를 가진 하상기의 후취가 되어 들어갔다. 남남 북녀라는 말에 어울리게 하란사는 용감한 여인이었다. 그녀가 용감하다는 것은 1남 4녀나 되는 전실 자식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정부인으로서의 용기가 아니었다. 남편의 벼슬이 올라가면서 생활에 여유가 생겼으나, 그녀는 호사스런 생활에 만족지 않고 담장 밖으로 흘러가는 개화의 물결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거듭 용감했다. '미래를 개척하여 선도자가 되리라. 이 시대의 문명의 선도자가. 그러기 위하여 나는 이 가정을 뛰쳐나가야 한다.' 가정을 뛰쳐나간다는 의미가 가정을 버리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1남 4녀의 전실 자식을 남겨 두고 어디를....... 그녀의 용기란 한국적인 부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가지는 만용이 아니었다. 배움. 하란사의 머리는 배움의 욕망으로 가득 찼다. '이화 학당에 들어가 나도 남들처럼 배우고 싶어.' 그녀는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화 학당의 첫 학생이 중전 민비의 영어 통역을 하여 세도를 잡아 보려고 스크랜턴 부인에게 영어를 배우러 왔던 무슨 벼슬아치의 소실 김씨라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도 몇 사람 뜨내기처럼 다녀간 기혼여성이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1890년대부터 이화 학당의 규칙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결심을 했다.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가 담판을 내자.' 어느 날 밤, 사방등에 촛불을 켜서 하인에게 들게 하고 그녀는 프라이 학당장을 찾아 나섰다. 학당장과 마주앉아 하란사는 들고 있던 등불을 훅 꺼 버렸다. "아니, 왜 등불을 끄시오?" 학당장이 어리둥절해하자 하란사는 사이를 두지 않고 말했다. "학당장님, 우리가 캄캄하기가 이 등불 꺼진 것과 같으니 우리에게 학문의 밝은 빛을 주세요." 학당장은 결혼을 한 이 젊은 여성을 다시 바라보았다. 하란사는 프라이 학당장을 잡고 애원했다. 애원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였다. "좋소. 부인, 입학하시오!" 프라이 학당장은 그녀가 암흑의 한국 땅에서 선각자가 될 자질이 충분히 있음을 깨닫고 입학을 허락했던 것이다. 이화 학당 재학중에 하란사는 첫 딸을 낳았다. 남편은 관리이고 부자였지만 인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당돌하지만치 대화 감각에 예민한 어린 아내를 후원해 주었다. 깊은 이해와 끝없는 사랑으로....... 하란사는 어린 딸 자옥을 전실 아들 구룡의 새 아내인 며느리에게 맡기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구룡의 첫 번째 아내는 매사에 게으르고 잠꾸러기여서 그는 게으른 아내와 이혼해 버리고 바지런하고 집안일에 열심인 새 아내와 재혼해 있었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남편이 자청하여 학비 부담을 하고 이해와 사랑으로 아내의 학교 생활을 돕기란 드문 노릇이어서 하란사는 말하자면 그만큼 선택받은 여성인 셈이었다. 남편은 학교에 간 젊은 아내가 학교 일로 식사 시간에 귀가하지 못하면 하녀를 불러 분부했다. "냉큼 학교로 밥을 날라다 마님 잡수시도록 하여라!" 분부가 떨어지면 하녀는 따끈한 음식을 차려 큰 목판에 담아 시기를 덮고 보자기에 싸서 이고는 학교로 간다. 어린 딸도 집안에서 보살펴 주었고, 남편이 이처럼 마음을 써 주었으니 그녀는 남편과 가족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를 해야 했다. 하란사는 멋쟁이였다.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하란사는 어찌 보면 법도에 어둡고 사치스러운 것 같았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다.집안에서는 남편, 자식들 모두가 하란사에게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엄하고, 화목하고, 법도 있게, 그것이 그녀의 생활 신조였다. 1896년 하란사가 이화 학당을 떠나 외국 유학 길에 오른 기록은 그녀를 뒷날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B.A 학위 수여자로 만들어 놓는데, 1896년 하란사는 박 에스터와 함께 이화를 나온다. 이화에서는 초창기의 학생들에게 학년 구별없이 영어에 힘을 기울였고, 산술과 국문, 성경 창가, 한문, 먹글씨, 지리등을 가르쳤는데 혼인할 나이가 되면 학교에서 주선하여 독실한 신자 중에서 적당한 배우자를 골라 부모의 협의를 거쳐 결혼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혼인식을 올린 다음 졸업장 대신 혼인 증서를 교부하면 그것이 곧 졸업이 되었던 것이다. 이미 혼인을 하여 가정을 가지고 있던 하란사에게는 그러한 과정도 이제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앞서 1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친다. 그녀가 유학을 떠날 때 자옥은 새문안 교회의 신자가 젖을 먹여 기르기로 되어 있었고, 전실 아들 구룡의 아내가 양육에 힘을 기울였다. 남편의 헌신적인 외조, 며느리의 이해, 집안 사람들의 협조가 그녀를 무사히 미국으로 건너가게 하여 1900년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하란사는 마침내 B.A 학위를 받는다. 이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하란사를 우리 나라 여성 최초의 학위 수여자로 기록하는 쾌거이기도 하려니와, 그녀가 국내 여성에게 끼친 영향을 개화의 선각자로서 영구 불멸의 별이 되게 한 점이기도 했다. 귀국 후 하란사는 양장에 자가용 자동차를 타고 정동 예배당에 나타났다. 검정 갓에 기다란 검정 새털 깃을 꽂고 검정 원피스를 입은 지적인 부인. 하 부인이라면 이제 서울 장안에서 몰라보는 이가 없었다. 하 부인은 미국에서 돌아와 스키랜던 부인고 함께 달성 이궁에서 기거하며, 상동 예배당 건립에 힘을 기울였다. 예배당이 세워지자 그녀는 거기서 영어반을 개설, 여성 교육을 실시했는데, 하란사의 지도로 뒷날 이 땅의 교육 사업에 봉사하게 될 신 알버트, 손 메레, 양 우러더 등이 배출되었다. 그녀는 또 미국인 선교사 미스 알버슨과 함께 정동 이화 학당 옆에다 부인 성서 학원을 창설하고 3년 동안 경영한다. 그 후 부인 성서 학원은 후임을 정하여 일임하고 그녀는 자신을 이화 학당에 입학시켜 준 미스 프라이 선생에게 간다. 이화 학당 교사 겸 기숙사의 초대 사감이란 직함이 그녀의 이름위에 붙게 된 것이 바로 이때이다.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 서양 선교사들 틈에서 영어 회화를 가장 능숙하게 할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한국 선생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녀의 영어는 직원이나 학생들의 의견을 선교사들에게 전달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었고, 오랫동안 이화 학당을 총감독하는 직책이 부여되어 '총교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총교사 하란사에게는 또 다른 이름이 학생들간에 불려지고 있었다.
-호랑이 어머니. 엄격한 인상에 욕설을 잘 퍼붓기도 하는 총교사에게 학생들은 그같은 별명을 붙에 주었다. 그 당시 이화 학당 학생치고 하란사 선생의 꾸중을 듣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그녀의 욕은 개화로 가는 과정과도 같아서 운동장에 나와 노는 것만 보아도 욕이었고, 치마 주름이 터진 것을 보아도 욕이었다. 뎅기를 머리 끝에 물려 드리웠어도 욕이었으며, 대답 소리를 크게 하거나 너무 작게 해도 욕이었다. 그러나 욕을 잘하는 버릇은 하 부인, 하 교사의 성격이었지 학생이 미워서 하는 소리가 물론 아니었다. 공부를 잘하고 학교 규칙을 잘 지키며 옷맵시를 단정히 하고 다니는 학생이 있으면 하란사는 그 학생을 자기 방으로 불러들여 자기 수양딸 노릇을 해 달라는 말을 하여 친부모가 쏟는 애정을 부어 넣기도 했다. 이화 학당 재직 중 하 교사는 미국을 내왕하는 일이 잦았다. 그녀는 그 때마다 한국을 소개하기도 하고, 연설을 하여 돈을 얻어내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그 돈으로 오르간을 사서 모교에 보내기도 한다. 언젠가 시카고와 로스엔젤레스에서 교포들로부터 700달러의 찬조금을 받아 온 적도 있었다. 학교 사감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기숙사로 오는 편지를 일일이 검열하는 일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남자한테서 온 편지가 있으면 절대로 내어주지 않는다. 그 학생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품행 점수가 60점 이하가 되어 버린다. 하 교사는, 엽서에 먹칠을 하여 연필로 비밀스럽게 써보내는 연애 편지까지도 햇빛에 비춰 밝혀내고야 마는 극성이었다. 기숙사 학생들은 하 교사의 그 같은 완벽성이 늘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하 교사와 이성회 선생이 후원하고 육성하는 자치 학생 단체에 게으름을 피우는 학생은 없었다. 하란사는 또 전도사로도 한 시대를 기록할 만한 여성이었다. 서울 교외 아홉 개 교회를 돌아가며 주일 예배에 참석한 그녀는 몇 년 동안 1,426호를 호별 방문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1911년, 250명의 새로운 교인을 얻게 되었다. 하 전도사는 각 교회 안에 세워진 이화 부속 보통 학교 단위로'어머니 교실'이란 것을 설치하였다. 1주일에 1회쯤 어머니 교실에 나가서 육아법과 선진 외국의 문명 등 계몽 강연에 열을 오였다. 강연 기간 동안 어머니들은 그 학교 교직원들로부터 매일 밤 국문과 산수 등 야학 공부를 하였다. 하란사는 집안일보다 교회와 사회 일에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았다. 부지런한 그녀는 고종과 엄비의 자문에도 나섰으며, 1908년 4월에는 고종의 분부와 사회 유지의 발기로 경희궁에서 관민 합동 환국 축하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 자리에는 한국 여성으로서는 제일 먼저 미국에서 현대 의학을 전공하고 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박 에스터도 동석했다. 박 에스터와 하란사는 여러 가지 선각자로서의 공통점이 있는 여성이었다. 개화된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1920년 우리 나라가 국권을 일본에 빼앗기게 되자 하란사도 이른바 국권 회복이라는 독립 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1916년의 일이었다.
미국 뉴욕 사라토가에서 감리교 세계 총회가 개최되었다. 하란사는 이 자리에 신흥우와 함께 참석한다. 1개월간의 총회 일정이 끝나자 그녀는 미국에 남아 해외 동포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순회 강연을 통하여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린 사실을 널리 알려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그녀는 이화 학당 안에서 국내외의 모든 비밀 연락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석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1918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 자결 주의가 발표되자 온 세계 약소 국가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자유를 부르짖으며 민족 저항 운동을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식민지로 압박을 당해 오던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국내외의 애국 지사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일을 성취시키기로 되어 있어 하란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편 하상기는 어디를 가나 아내의 활동이 자랑스러워 전보다 더 큰 열성으로 아내의 일을 돕고 나섰다. 당시 고종은 거족적인 민족 저항 운동에 앞서 의친와을 해외에 내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항간에는 일본인들 들을세라 엄청난 소문까지 나돌았다. "전하하구 의친왕께서 일본인의 눈을 피해 변소에서 밀의 하셨다는구려." "부자분이 변소에서 무슨 비밀 얘기를 하셨을까?" "의친왕을 해외로 내보내어 독립 운동에 앞장서게 한다는 얘기라는군!" 고종은 깊이 숨겨 두었던 이른바 한일 의정서 등 굴욕적인 외교 문서 원문과 외국 의원들에게 보낼 호소문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내어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호소하려 했다. 그 중대한 임무에 하란사가 발탁되어 일은 추진되었다. 하 부인이 미국 유학 당시부터 의친왕과 교분이 있는 것을 알고 고종은 하 부인에게 궁중 패물을 군자금으로 주어 일을 착수시켰다. 하 부인은 용기가 솟았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면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그녀의 가슴을 뛰었다. 일의 시작에서부터 운명은 하란사와 국운 쪽에 이로운 것 같았다. 그러나 운명은 끝내 돌아서고 말았다. 1919년 1월 하순, 고종께서 갑작스럽게 승하하시고 만 것이다. 이화 학당에서 미스 프라이와 신홍우 박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하란사는 황제의 급보를 듣고 그 자리에 나타났다. 궁중의 공식 발표가 있기 전 하란사는 의친왕을 통하여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이 한 가지 점만 보더라도 그녀가 의친왕이나 궁중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나 짐작이 갈 만하다. 하란사의 그 같은 활약은 그녀를 국내에 머물러 있게 하기보다 국외로 나가 독립 운동을 하도록 요청해 오기에 이르렀다. 고종 황제가 승하한 지 얼마 안 되어 하란사는 북경을 향해 떠난다. 2월 중순, 동경 유학생 황 에스터는 프랑스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여성 대표로 하란사를 출국시키려고 서울에 왔으나 하란사가 이미 북경으로 떠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동경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하란사가 국가를 대표할 만한 여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북경에 도착하자 그 곳에 있던 교포들의 환영이 대단했다. 하란사는 어느 교포가 개최하는 환영 만찬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만찬회가 생애에서 마지막 가져 보는 자리였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만찬회에서 먹은 음식이 빌미가 되어 하란사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회복되지 못하고 죽음의 세계를 향해 치달았다. 마침내 그녀는 폭약을 먹고 죽은 사람처럼 그렇게 갑작스럽게 죽어 갔다. 그녀의 시체는 시커먼 색으로 변질되어 독살의 의혹을 짙게 했다. 장례에 참석했던 성서 공회 책임자 베커의 말이 독살당했으리란 심증을 굳게 하였다. 하란사의 남편 하상기도 북경을 다녀와서 아내가 독립 운동을 방해하는 친일배에게 독살당했으니라 단정했다. 일제의 스파이로 활약했던 배정자가 하란사의 뒤를 미행하여 독살시켰다는 소문을 남긴 채 그녀는 45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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