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니체의 운명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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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1844년 10월 5일 독일 라이프치히 근교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했으며, 24살에 이미 스위스 바젤대학의 고전문헌학 교수가 되었다. 10년간을 재직하다가 병고로 사직한 것이 그의 경력의 전부이다. 그럼에도 니체가 죽은 1900년을 현대 철학사의 시점으로 잡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현대인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이미 니체에 의해서 모든 검토를 끝낸 것 이라고 말한 독일의 시인 벤에게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니체는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불행한 철학자였다. 그러나 분명 20세기의 문학과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를 가리켜 우리는 생의 철학자 혹은 실존철학의 선구자 라고 말한다. 그는 전통적인 이성철학에 대립하여 의지 철학 을 정립한 것으로 평가되며, 삶 그 자체를 절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하여 그것의 배후에 어떤 원리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해 왔었다. 그가 열세 살 때, 쓴 <자전>에는 이런 것이 언급되고 있다.
인간의 생애는 하나의 거울. 그속에서 자신을 끝까지 지켜본다는 것. 이것이야 말로 첫째의 일. 우리들은 애써 이 일을 하리라.
여기에 그의 모든 관심사와 사상이 이미 요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끔찍한 병고를 치르면서도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신뢰하는 일은 무엇인가? 여기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필연적인 일을 참고 견딜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숨겨서도 안된다고 말한다.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자기애와 운명애 를 강조하면서 그는 영겁회귀 라는 사상의 실타래에서 그것을 풀어내고 있다. 인간은 그저 막연히 생사의 세계를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똑같은 모습, 그대로 영원히 몇 번이고 회귀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정신과 육체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제3의 무엇이다. 나는 완전히 온몸 전체로 병을 앓고 있다.
니체는 그의 말대로 평생을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10대부터 심한 두통으로 고생을 하였다. 두통과 발작이 되풀이 되었다. 1년에 200일이나 두통으로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었고, 쓰는 일, 읽는 일을 할 수 없어 방에 틀어박혀 고통을 견딜 뿐 이라고 말했다. 그외에 각혈을 동반한 위경련, 편두통, 신열, 식욕부진 등 니체의 몸은 그야말로 고통의 둥지였다. 뇌매독을 앓기 전 열두 살 때부터 두통으로 괴로움을 겪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유전적인 요소로 보는 견해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가 정신병(뇌경화증)으로 층계에서 굴러 떨어져 한 1년간을 앓다가 36세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니체의 나이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1865년 니체에게 류마티즘과 같은 통증을 동반한 최초의 격한 두통 발작이 일어났다. 그가 취임했던 바젤대학의 한 진료소에서 2도에 해당하는 뇌매독에 감염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평소 작은 목사 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엄격했던 니체에게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단 한번의 실수로 해서이다. 니체가 스무살 때 홀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긴 여행에 지친 몸을 이끌고 낯선 땅에 도착한 그는 안내인에게 허기를 달랠 레스토랑을 하나 소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니체가 도착한 곳은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이 아니라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곳은 사창가였다. 집안에 들어선 니체를 둘러싼 여인은 무려 여섯 명이나 되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는 여섯명의 여자에 둘러싸여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1822년 말, 니체가 발작한 뒤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달려온 친구 오하헨스크는 그가 긴 의자의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니체는 큰 소리로 노래하고 날뛰며 춤을 추는 등 소란을 피워댔다. 다른 말은 없이 음울한 어조로 죽은 신의 후계자 가 자신이라고 자기를 지칭하며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는 차마 설명할 수 없는 두려운 일들을 마구 지껄여댔다. 고 오하헨스크는 회고했다. 1865년 니체는 매독에 감염되어 조기 매독성 골수막염을 앓고 있었다. 강단에 설 기력조차 없어 그는 학교를 사직하고 바닷가로 요양을 떠났다. 도리노 광장에서 니체는 죽은 사람처럼 쓰러져 있었다. 마흔세 살 때였다. 혼수상태에서 병원으로 옮겨져 이틀 만에 깨어난 그는 알 수 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그 후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내가 신이다. 이렇게 변장하고 온 것이다 라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신은 죽었다 라고 과감히 외치던 니체,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목사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정신적 광증은 나날이 심해져만 갔다. 어머니와 누나의 간호를 받으며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것은 그의 나이 56세 때였다. 니체는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는 친구들의 고별사가 몇 마디 있었을 뿐, 목사의 말씀은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니체의 유언 때문이다. 그가 미쳐 버린 마흔네 살 무렵, 꺼져가는 촛불이 반짝하듯 자기 도취의 황홀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긴 했으나 가장 체계적이고 니체의 본질을 잘 드러내 보인 것은 역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병고에 시달리며 사람에게 버림받아 그야말로 허무와 고뇌의 심연 속에 있으면서도 생의 비약과 환희,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는 애썼다. 고통을 껴안고 운명을 필연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고통을 통해서 그는 비로소 초인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짜라트스트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뭔가를 믿는다는 사실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대들은 아직 자신을 탐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연히 나<짜라투스트라>를 발견했다. 신도란 언제나 그러한 것이다. 그러니까 믿는다는 것은 하찮은 것이다. 이제 나는 명령한다. 나<짜라투스트라>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발견할 것을. 그의 실존은 여기서부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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