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이 북산을 보며 웃네 - 역사 속으로 찾아가는 죽음 기행 : 맹란자
제5장 죽음보다는 철저한 삶을
서양 철학자의 적극적인 삶
동양의 철학가들은 안심입명을 한 탓인지 모두 죽음 앞에서 담담하였다. 그들은 대부분은 정좌한 채 영면에 들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공자와 맹자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었으며, 송대의 공자라고 칭했던 주렴계와 장횡거도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었다. 퇴계와 우암까지도 전부 과부의 손에 양육되었다. 주렴계는 56세, 장횡거는 50세, 정명도는 53세, 서화담은 58세로 모두 아까운 50대에 죽고 말았다. 육상산은 54세, 그의 심학을 전수 받은 왕수인은 57세에 폐질환으로 죽었다. 최소한 70은 넘겨 살아야 학문이 원숙하고 자기의 무엇이 나올 수 있지 않겠느냐고 김충렬 교수는 말했지만 그러나 어찌하랴. 토정 선생의 말씀대로 인명은 하늘에 있는 법 인 것을. 그러나 동양의 철학자와는 달리 서양 철학자들은 오래 살았다.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소식을 생활화하였고 엄격한 섭생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볼테르는 84세를 살았다. 실제로 볼테르는 워낙 약골이어서 모두들 오래 못살 것이라고 했었다. 30년도 살기 어렵다고 한 칸트는 80세의 장수를 누렸다. 야스퍼스는 어릴 때부터 협심증과 천식의 불치병을 갖고도 스피노자의 조심 을 좌우명으로 삼았기 때문인지 86세까지 살았다. 조산아로 태어난 홉스나 뉴턴 같은 이도 규칙적인 생활로 자기절제를 잘한 탓에 각각 91세, 84를 넘겼다. 1년도 넘기기 어렵다고 한 데카르트는 허약 체질로 54세까지 살았다.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 동양 철학자들에 비해 독신자가 많았으며 훨씬 장수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이들이 대부분 80-90세까지 살았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플라톤, 뉴턴, 존로크, 아담스미스, 벤담, 키에르케고르, 칸트, 니체,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쇼펜하우어, 스피노자 등은 독신이었으며, 결혼한 철학자는 희극에 속한다 고 말한 이는 니체였다. 철학자답게 마음의 평정을 중시한 것은 모두 동서양이 같았다. 제자를 위해 마지막까지 수업을 계속한 점도 공통된 모습들이었다. 그러나 고요하게 앉아 죽음을 초탈하는 동양의 도학자나 선사들의 마지막 모습이 정적이라고 한다면 서양 철학자들의 경우는 동적이며, 훨씬 적극적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생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생에 대한 찬사 또한 아끼지 않았다. 에피쿠로스는 72세가 되자 자신의 종말을 예감하였다. 그는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노예들을 풀어주며 친구 미도메데스에게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생에 있어서 행복한 나날을 체험하고 동시에 그것을 마칠 때에 즈음하여 당신에게 이 편지를 써둔다. 오줌이 나오지 않는 괴로움이 자주 엄습하고, 이 고통보다 더 지독한 것은 없을 정도의 설사로 고통받고 있다. 그러나 나의 정신속에는 내가 쟁취할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상기시키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지병인 요도염 때문에 욕탕 속에 들어 앉아 온수욕을 하며 포도주를 마시다가 그대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이렇긋 정신은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나보다 즐겁고 착한 생애를 지낸 인간이 있다고는 보지 않는다 고 자신에 대해 만족해 하며 죽었다. 20대에 일찍 부모를 잃고 떠돌이로 살면서 나중에는 귀까지 먹었건만 존 로크는 자신의 비문에 이렇게 썼다.
길가는 나그네여, 잠시 그대들의 발을 멈추어라. 여기 존 로크가 누워 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묻는 이가 있으면 그는 자기 운명에 만족하고 산 사람이라고 대답해 주어라.
노예로 태어난 현자 에픽테토스는 그의 주인에게 고문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졌을 때에도 주인님 그렇게 비틀면 부러진다고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마치 뜰 안의 나뭇가지가 부러진 일 이상으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영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가진 것은 없고 절름발이였지만 그는 자기를 가진 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다. 소유는 인간을 노예화하고, 존재는 인간을 자유화한다고 믿었다. 비록 노예였으나 그의 80여생은 이러한 평정속에서 생을 즐겁게 보낼 수가 있었다.
파스칼은 병의 고통을 통해서 오관의 쾌락을 끊을 수 있으며, 정욕도 끊을 수 있으나 병은 오히려 환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언제나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있던 칸트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로 죽는 순간 야! 참 좋다 는 말을 남겼다. 독일의 플라톤이라고 지칭한 슈라이에르마허는 70세가 되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에게 말했다. 지금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방황하고 있지만 내 속에서는 천국을 즐기고 있소.
이처럼 생을 적극적으로 살고 죽음을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던 것이다. 네 살 때 시를 짓고, 작곡을 즐긴 천재 소년 니체. 그는 어려서부터 두통에 시달리고 눈병과 매독으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과 운명을 끝까지 사랑한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를 실존철학자라 부르며 생의 철학자 라고 부르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으리라, 비참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굴하지 않고 현재의 삶 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니체의 후계자로 실존주의 작가인 카뮈는 인간의 운명을 시지프시적 비극에 비유하였다. 시지프스는 산꼭대기에 올려놓은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 다시 올려놓아야 하는 벌을 받은 신이다. 영원토록 반복되는 이 고통 속에서도 그는 그런 노력이 허사라는 사실에 대해 아무런 불만조차도 갖지 않았다. 카뮈는 오히려 그러한 순간이 바로 행복하다 고 선언했다. 인생의 행복이란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이듯이 살아 있음의 생 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리라. 참된 철학자는 결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자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삶에 대한 명상이다 라고 말한 이는 스피노자였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보다 현실적이며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행동 반경의 보폭도 크고, 사회에 참여의식도 높았다. 임금이 벼슬자리를 내주며 불러도 쉽사리 응하지 않았던 동양의 도학자들에 비해 서양 철학자들의 사회진출은 매우 진취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을 네 번씩이나 하고 영국 최고 문화 훈장과 노벨 문학상을 탄 러셀은 싸움이 터질 때마다 케네디, 흐루시초프, 주은래 등에게 전쟁방지를 촉구하는 편지를 부지런히 보냈다. 98세까지 살면서 그는 러셀국제전범법정 을 창설하여 명예회장이 되기도 했다. 에딘버러대학의 총장이 된 카알라일, 프라이브르쿠대학의 총장이 된 하이데거, 하이델베르그대학 총장이 된 야스퍼스, 미국교육연맹 총재가 된 존 듀이, 베를린 대학의 총장이 된 헤겔, 프라하대학의 총장인 슈라이에르마허, 칸트는 두 번씩이나 모교의 총장직을 맡았다. 노벨 문학상을 거절한 사르트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베르그송,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슈바이처, 모교의 총장이 된 아담스미스 등. 존 로크, 야스퍼스, 프로이드, 슈바이처, 칼 융 등은 의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