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3. 탕평과 선비들의 의리
눈과 코가 베어졌어도 역신을 꾸짖은 이술원
이술원(1679~1728)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선숙, 호는 화촌이다. 부사 이중길의 손자이다. 영조 4년(1728)에 거창의 좌수로 있었다. 동계 정온의 종손 정희량이 처음에 이름 난 조상의 후손으로 학행이 있다고 일컬어져서 사뭇 경상우도에서 명성이 있었다. 그는 효경(어미 잡아 먹는 올빼미와 아비 잡아 먹는 파경 짐승, 악인의 비유)의 성품으로 감히 하늘을 쏘는 계획(역모)을 내어 군사를 일으켜 이인좌에게 호응하였고, 먼저 흉칙한 격문을 띄워 거창에 출병하였다. 현감 신정모가 이술원을 추천하여 고조로 삼았는데, 이튿날 적(정희량)에게 포박당하였다. 이술원이 분하게 여기며 꾸짖어 말하였다.
"네가 이름 있는 조상의 후손으로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나라가 너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이 역모를 거사한단 말인가?"
정희량이 노하여 칼을 휘두르니 이술원의 눈과 코가 함께 떨어져 나갔으되 꾸짖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고 죽었다. 그의 아들 이우방이 그 시체를 거두어 염을 하여 침류정에 안치하고 울며 말하였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내가 어찌 살겠는가."
이어서 백의로 군사를 일으켜 적과 우두령 아래에서 싸울 적에 이우방이 앞장서서 힘껏 싸우고, 밤에 언덕에 올라 소리쳐 부르며 말하였다.
"거창의 군사와 백성들아! 나의 말을 들으라. 너희들이 만일 나라의 적을 따르면 며칠 못 가서 망할 것이고, 너희들 중에 적을 포박하여 우리 진에 바치는 자가 있으면 이전의 죄를 용서하고 공훈을 책록할 것이다."
이렇게 두루 다니며 소리 높여 외치니, 적의 장교 수삼 명이 마침 적의 진영에 있다가 밤에 정희량을 포박하여 진중에 바쳤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다음과 같았다.
"가두어서 서울에 보내는 것이 가하다." 그런데 이우방이 울며 말하였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어찌 일시인들 같이 살 수 있겠는가."
이에 칼로 그 배를 갈라 간을 내어 자기 아버지의 널 앞에서 제사 지냈다. 이 일이 나라에 알려지자, 임금이 감탄하여 말하였다.
"이술원이 안녹산에게 포박당하여 항복하지 않고 안녹산을 욕하며 죽은 당의 충신 안고경의 일을 능히 행하였다."
집의의 벼슬을 추증하고 정려각을 세워 표창하였으며, 본군 웅양면에 사당을 세워 표충사라는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우방은 승전(선전관)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현감에 이르렀다.
막하의 비장으로 인하여 아들 하나를 보전한 - 이사성
이사성(?~?)은 영조 4년(1728) 무신란의 적당 중의 한사람이다. 반역을 꾀하려는 뜻이 있어서 자청하여 평안 병사가 되었다. 임지로 떠나려 할 적에 당시 여러 사람이 앞을 다투어 막하의 비장을 추천하니 이사성이 그 자리에서 취사하기가 어려워서 모두 추후에 병영으로 보내게 하였으니, 사람을 가려 쓰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병영에 이르자 추천한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차례로 추천된 사람에게 물으니, 각각 천주(추천한 사람)를 말할 적에 모두 당대의 유력한 재상이었다. 홀로 뒤에 한 사람이 말하였다.
"모는 가난하고 또한 미천하여 시로 추천해줄 사람이 없어서 자천하여 왔습니다." 이사성이 자세히 보고 말하였다. "전국시대 조나라의 인걸 모수가 자천한 것이 참으로 옳다."
드디어 그 사람을 호비(호조에 관한 일을 맡은 비장)로 삼고 오래도록 그를 살펴보니 사뭇 일을 처리하는 재간이 있어 하는 일마다 법도에 맞았으므로 손발처럼 신임하였다. 이인좌의 역모가 밝혀지고, 역적의 초사에 이사성이 자주 나오자 의금부는 금부도사를 보내어 이사성을 잡아 오게 하였다. 여러 막하의 비장은 그 소문을 듣고 서로 몰래 달아났으되, 호비만은 남아 있었다. 밤에 이시성에게 물었다.
"지금 듣건대 나명(체포 명령)이 장차 떨어지게 되었다 하는데, 공이 과연 죄를 지은 바가 있습니까?" 이사성이 말하였다. "과연 그렇다." 호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공은 장차 죽게 될 것입니다. 뒤에 혹 신원할 길이 있습니까?" 이사성이 말하였다. "그 일 또한 어렵구나." 호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공은 과연 역적입니다. 남아가 천지간에 태어나서 어찌 손을 묶어두고 포박을 당하여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습니까. 이 평안 병영이 비록 작기는 하나 오히려 휘하의 군사가 5백여 명이 있으니, 도사가 병영에 도착하거든 먼저 그 도사의 머리를 베어 성문에 걸어 보이고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향해 곧바로 서울을 범하면 서남지방이 호응하여 열읍이 바람에 따라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공의 의향은 어떠합니까?" 이에 이사성이 말하였다. "힘도 모자라고 담력도 작아서 이 일을 거행할 수 없으니 차라리 앉아서 죽느니만 못하다." 호비가 말하였다. "슬프다, 공이여! 소인은 이제 공을 위해 일을 도모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공에게 은혜를 받은 것이 많으니 마땅히 공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아들 하나를 보전해 주겠습니다." 마침내 호비가 이사성의 아들을 업고 밤을 틈타 성문을 나가 간 곳을 모르게 어디론가 가버렸다. 당시 역적의 집에 오직 이사성의 아들만 그 목숨을 보전하였다 한다.
못쓰게 된 한 푼을 위하여 두 푼을 들인 정홍순
정홍순(1720~1784)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의중, 호는 호천이다. 영조 21년 (174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홍순은 언제나 갈모(입모라고도 함.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던 기름종이로 만든 것임) 두 개를 가지고 다녔는데, 하나는 자신이 비를 맞지 않기 위한 대비였고, 하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여벌이었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기 전에 당시 임금인 영조가 동구릉에 행차한 일이 있었다. 그 때 정홍순도 동대문 밖에 나아가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다가 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로 돌아간 뒤에 구경하던 사람들이 제각기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데, 마침 비가 내렸다. 곁에 있던 젊은 사람이 갈모가 없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기가 막힌 듯 혀를 차므로, 정홍순이 여벌로 가지고 있던 갈모를 주고 함께 걸어오다가 회동의 병문에 이르러 그 사람에게 갈모를 되돌려 달라고 하였더니, 그 젊은 사람이 말하였다.
"비가 아직 개지 않았으니 내일 당신 집으로 꼭 갖다 드리리다."
정홍순이 자기 집의 위치를 상세하게 가르쳐주고, 또 그가 혹시라도 갖다주지 않을까 싶어 그의 주소를 물으니, 남대문 밖의 어느 동네라고 대답하였다. 이튿날 그 사람이 끝내 나타나지 않으므로 괘씸한 생각이 든 정홍순은 그가 가르쳐 준 곳으로 가서 그의 집을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세월은 흘러 20여 년 뒤에 정홍순이 호조 판서가 되었는데, 좌랑 한 사람이 새로 임명되어 인사차 왔기에 정홍순이 그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말하였다.
"자네가 그전에 임금의 동구릉 행차 때 나에게 갈모를 빌려 갔었는데 기억나지 않는가?" 좌랑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놀라면서 말하였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정홍순이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가 선비의 갈모 하나도 돌려주지 않았으니 신의가 없다는 것은 알만한데 어떻게 나라의 관직을 차지할 수 있겠는가? 곧장 사직서를 올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사람은 그만 그 길로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영조의 효성이 지극하여 육상궁(조선조 역대 왕 중, 정궁 출신이 아닌 군주의 사친을 모신 궁정동의 사당)을 창건하게 되었는데, 정홍순이 당시 호조 판서로 있었으므로 임금이 하교하였다.
"궁문의 궤도는 한결같이 종묘와 같게 하라."
정홍순이 육상궁의 궁문터를 깎아 내려 평평하게 하여 문을 세웠으므로 지세가 낮고 우묵하여 문이 다소 초라하게 보였다. 공사가 모두 끝난 뒤에 영조께서 그곳에 행차하여 궁문의 모양이 너무 낮게 보여 종묘의 문과 같지 않음을 보고 급히 정홍순을 불러 물었다.
"궁문 모양이 종묘의 문과 비교하여 매우 낮은데 경이 어떻게 감히 나의 뜻을 거역하는가?" 정홍순이 부복하여 이렇게 아뢰었다. "전하께서 당장 가까이 있는 신하를 시켜 종묘로 달려가서 재어보고 비교하게 하소서."
영조가 그의 말대로 그렇게 하였더니 정말 틀리지 않았으므로 영조의 노여움이 그제야 풀렸다. 그가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예조 판서를 겸임하게 외었는데,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상사를 당하여 초상 때부터 졸곡 때까지의 모든 절차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수의에서부터 두건 그리고 대와 신발의 자질구레한 물품에 이르기까지 각각 한 조각씩 베어 그 당시 사용한 장부와 함께 단단한 궤짝 속에다 넣어 조심스럽게 봉하고는 담당 관리에게 말하였다.
"이 궤를 잘 간직하라. 그렇지 않으면 후일 큰 화가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궤를 여는 열쇠는 정홍순이 항상 지니고 다녔다. 몇 해가 지나 정조가 즉위한 이듬해에 이르러, 임금의 생부인 장헌세자의 초상과 장례를 후하게 치렀는지 박하게 치렀는지를 알고 싶어 하문하였다.
"그 당시 예조 판서가 누구였는가?" 좌우에서 이렇게 아뢰었다. "정홍순이었습니다."
정조의 생각으로는 초상과 장례에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야박하고 소홀히 한 데가 있으면 즉시 국문하여 죽이려고 정홍순을 불러다 물었다 그러자 정홍순이 그 자리에서 담당 관리에게 분부하여 깊이 숨겨두었던 그 궤짝을 대궐 뜰로 가져오게 하여 차고 있던 열쇠로 궤를 열어 임금 앞에 보였다. 임금이 낱낱이 점검해 보니 물자와 의식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므로 정홍순을 대단히 칭찬하고 즉시 우의정으로 임명하였다.
정홍순에게 못쓰게 된 돈 한 푼이 있었는데, 주조하는 사람을 시켜 그것을 녹여 다시 만들게 하니 그 삯이 두 푼이 되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두 푼을 들여 한 푼을 얻었으니 한 푼이 오히려 손해인데 대감께서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나는 한 푼을 손해보았지만 나라로서는 한 푼을 덕보게 되었으니, 국록을 먹는 자로서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게을리 하겠는가." 사람들이 그의 넓은 도량에 탄복하였다.
정홍순에게 과년한 딸이 있었다. 장차 시집 보내려고 하면서 부인에게 물었다.
"포백이며 써야 할 돈이 얼마면 되겠소?" "8백 냥은 필요합니다." 또 물었다. "잔치 비용은 얼마나 들겠소?" "4백 냥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정홍순이 말하였다. "내가 며칠 후에는 장만하겠소."
그 며칠이 되었으나 표백이 장만되지 않자, 정홍순이 말하였다.
"내가 벌써부터 장사꾼에게 부탁을 해놓았는데 장사꾼이 따라주지 않으니, 내가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 일을 가지고 어떻게 장사꾼을 죄줄 수 있겠소. 차라리 그 전에 입던 옷을 세탁하고 입혀서 시집 보내야겠소."
그럭저럭 혼례일을 하루 앞두게 되었는데 잔치 비용도 준비되지 않자, 정홍순이 또 이렇게 말하였다.
"장사꾼이 내가 청구한 것을 또 따라주지 않으니, 도리어 서민들이 제 나름대로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만 못하니, 술과 안주를 조금만 준비하는 것이 낫겠소."
부인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따랐다. 그의 사위는 명문 재상의 자제였는데, 장인의 고집이 세고 인색함을 이상하게 여기다가, 어느 날 아침에 장인을 찾아뵈었다. 그런데 마침 비가 주룩주룩 내리자, 정홍순이 사위에게 삿갓과 나막신을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자네 집에 가서 밥을 먹게. 우리 집에는 자네를 위해 준비한 밥이 없다네. 자네 집에는 이미 지어 놓은 밥이 있을 터이니 지어 놓은 밥을 놔두고 아직 준비도 되지 않은 밥을 기다릴 필요는 없네."
사위는 그 길로 원망하며 돌아가 다시는 처가에 가는 일이 없었다. 몇 해가 지난 뒤에 정홍순이 그 사위를 불렀지만 오지 않으므로, 마침 내 사돈에게 편지를 보내고서야 찾아온 사위와 딸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인사를 마치고 사위와 딸을 집 뒤편의 깊숙한 정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그곳에 아담한 집 한 채가 있고 방이며 창문이 말끔하고 가재도구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정홍순이 그 딸에게 말하였다.
"지난날 너를 시집 보낼 떼 혼수 비용을 네 어머니에게 물었더니 1천 2백냥이 든다고 대답하였다. 어떻게 엄청난 액수의 돈을 쓸모없는 비용으로 내버리면서 남의 이목을 위해 꾸밀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가 그 돈으로 해마다 이자를 늘려 이 집을 짓게 하고 또 시골에다 전지를 사두었으니 해마다 상당한 수확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일생동안 굶주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이곳에서 살도록 하여라."
정홍순이 평안 감사가 되었을 적에 수청 들던 기생이 감사가 감영에 나간 틈을 엿보아 합 속의 담배를 조금 꺼내어 피웠다. 정홍순은 평소에 사물을 정확하게 헤아렸는데, 감영에서 돌아와 담배가 줄어든 것을 보고는 그 기생을 잡아다 태형 30대를 때리게 하였다. 그 뒤에 통인들이 감사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그만 장난을 치다가 체경을 깨뜨리고 말았다. 통인들이 앞서 수청 들던 기생이 태형 당한 일을 생각하고 덜컥 겁이 나서 도망쳐 버렸다. 감사가 돌아와 보니 체경은 깨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감영의 종들을 시켜 통인들을 모두 불러오게 하여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는, 체경 한 조각씩 나누어 주고 죄주지 않았다. 그를 지켜 보던 비장 정기가 말하였다.
"오늘 동인들이 체경을 깨뜨린 사건은 지난날 기생이 담배를 몰래 꺼내어 피운 것보다 죄가 무거운 듯한데, 지난번에는 처벌하고 이번에는 처벌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 입니까?"
정홍순이 대답하였다.
"기생의 경우는 고의로 범한 것이고, 지금의 경우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과실인데 어떻게 처벌할 수 있겠는가?"
그가 10년 동안 호조 판서로 있으면서 국가의 재산에 대해서는 아주 작은 것까지 반드시 몸소 살펴보고 챙겨서 국고가 채워졌다. 그러다가 정승이 되어 자기 집을 수리하면서 수리공들과 노임을 다투니, 그의 자제들이 민망하게 여겨 여쭈었다.
"아버지께서 정승의 지위에 계시면서 미천한 수리공들과 노임을 가지고 다투시니 체면이 손상되지 않겠습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한 나라의 정승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하니 내가 노임을 올려 주게 되면, 그만 그것이 나라의 기준이 되어 나라의 다른 일에서나 백성들이 일을 시킬 때 노임이 올라 그만큼 서민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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