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3. 탕평과 선비들의 의리
영조의 육상궁 참배를 반대하다 처형될 뻔한 조중회
조중회(1711~1782)의 본관은 함안이고 자는 익장이다 도암 이재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나이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조가 세초에 먼저 육상궁(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 등을 모신 사당)에 거동하려 하였다. 조중희가 대신으로 상소하였다.
"새해에 태묘를 배알하는 예를 행하지 않고 사묘(사친의 사당)에 먼저 거동하시는 것은 예법에 불가합니다...."
그러자 영조가 크게 노하여 도보로 곧장 홍화문을 나갔다. 이때 창졸간에 당하여 시위와 모시고 따르는 관속과 필요한 준비를 모두 갖추지 못하여 야현을 거쳐 육상궁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하교하였다.
"불초한 나 때문에 별세한 어버이에게 욕이 미쳤으니, 무슨 면목으로 다시 신민을 대하겠는가. 내가 자결하겠노라. 군병으로 하여금 창을 잡고 빙둘러 호위하게 하여 대신 이하 조신들을 일체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만일 그들을 들어오게 하면 어영대장은 중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또 이어서 혼자 말하였다.
"80 노인이 만일 얼음판 위에 앉아 있으면 오래 못 가서 죽게 될 것이다."
이어서 손발을 눈과 얼음이 얼어붙은 앞 연못의 물에 담갔다. 때가 정월 초라 얼음과 눈이 풀리지 않고 북풍이 매우 차갑고 매서웠다. 백관들이 뒤따라왔으나 군병들의 저지를 받아 들어가지 못하였다. 정조가 당시 세손으로 혼자 모시고 서서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간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조금 뒤에 영조의 옥체가 덜덜 떨리므로 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다시 간하니 주상은 말하였다.
"조중회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오면 내가 환궁하겠다."
세손이 급히 문밖에 나가서 대신을 불러 명을 내렸다.
"조중회는 죽을 만한 죄가 없으니 어찌 엄명에 부대끼어 죄없는 신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저하께서는 애써 성의를 다하여 하늘의 뜻을 돌리시도록 하소서."
그러자 세손이 발을 구르고 울며 말하였다.
"종사의 위태로움이 목전에 임박했는데, 대신이 어찌 신하 한 사람을 아껴서 명령을 봉행하지 않소?"
세손과 김상복이 서로 버티고 있는 동안 주상이 냉기를 견디지 못하여 다시 하교하였다.
"조중회의 문제는 차치하고 먼저 정청(세자나 의정이 백관을 거느리고 궁정에 이르러 큰일에 대하여 하교를 기다리는 일)을 열어 계사(논죄에 관하여 임금에게 올리는 글)를 들이도록 하라."
대신이 제신들과 함께 계사를 초록하여 드리니, 주상이 그 계사를 보고 찢어서 땅에 던지며 말하였다.
"이것은 바로 조중회의 행장이로구나." 제신들이 계사의 초를 고쳐 입계하였다. "어서 나라의 형벌이 바르게 시행되도록 하소서."
그러자 주상이 명하기를 조중회를 멀리 흑산도로 재촉하여 위리안치하게 하고 그날로 떠나보내게 한 후, 이어서 환궁하였다. 그러나 배소인 흑산도에 이르기 전에 조중회를 석방하라는 명이 있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특별한 배려로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시호는 충헌이다.
관아에 불을 질러 잃어버린 병부를 찾은 이만원
이만원(1651~?)의 본관은 연안이고 자는 백춘, 호는 이우당이다. 평안감사로 있을 적에 서윤(한성부와 평양부에 두었던 종4품의 벼슬로 좌, 우윤보다는 아래임)과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 하루는 병부(군사의 움직임을 신중히 하기 위하여 임금과 지방관이 나누어 가졌던 신표)가 없어졌는데 그 어머니에게 고하였다.
"제가 병부를 잃었으니 그 죄가 죽음에 해당합니다. 어찌하겠습니까?"
이를 듣고 어머니가 대책을 일러 주었다. 이튿날 서윤, 도사와 더불어 연광정에서 풍악을 울려 잔치를 벌였는데 갑자기 감영 내아에서 불이 일어났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일어나서 보니, 연기와 불꽃이 이미 하늘에 자욱하였다. 감사가 급히 병부 주머니를 끌러 서윤에게 주며 말하였다.
"내가 먼저 불난 곳에 가서 불을 꺼야 할 것이니, 이 병부를 함께 태울 수 없으므로 귀관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것이다."
말을 마치자 곧바로 가버리니, 서윤이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감사가 감영에 돌아와서 불을 껐는데, 이 불은 일부러 질러서 끈 것이었다. 이어 서윤을 불러 병부 주머니를 찾으니 병부가 과연 들어 있었다. 감사는 태연히 통인을 시켜 병부를 내어 다시 봉하며 말하였다.
"이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므로 아무렇게나 관리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자 그만 서윤의 얼굴빛이 질려 버렸다 한다.
삼종제수의 꿈 징조로 문과에 급제한 이태중
이태중(1694~1756)의 본관은 한산이고 호는 삼산이다. 평안도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최진해는 현임 선천부사이고, 이인강은 현임 중화부사였는데, 최진해는 영조의 외가이고 이인강은 정조의 외가였다. 이태중의 행차가 중화에 당도하니 중화부사가 들어와 뵈었다. 이태중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고?" 이인강이 대답하였다. "동궁(정조를 가리킴)의 외사촌입니다." 이태중이 눈을 부릅뜨고 말하였다. "누구의 누구라고?"
이인강은 또 전처럼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이인강을 물러나게 하고 곧 장계를 써서 아뢰었다.
"중화부사 이인강은 아직 철이 들지 않아 세상 물정을 분별하지 못하니 파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평양에 당도한 뒤에 선천부사 최진해가 나와 뵈었다. 이태중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고?" 최진해가 대답하였다. "하관은 선천부사입니다." 이태중이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내가 어찌 선천부사인 줄 모르는가. 그대가 어떠한 사람인지 묻노라." 최진해가 대답하였다. "하관은 문벌이 낮고 미약하되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이에 이르렀으니 이 소임이 하관에게는 분에 넘칩니다. 사또께서는 선천부사 최진해를 아시면 될 뿐이옵지, 그 나머지는 물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하관의 일족과 친척이 시정의 사람이 아니면 곧 서리의 무리입니다. 비록 누구 누구 이름을 들어 대답하더라도 사또께서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이태중이 빙긋이 웃고 속으로 흡족하여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그리고 다른 수령과 달리 돌봐주어 일마다 말하는 것은 들어주었으니, 한마디로 뜻이 맞았던 것이다. 이인강과 최진해 주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이태중이 문과에 급제하기 전에 결성에 우거하였다. 삼종제 이덕중이 서학현에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정시의 과장에 나가게 되어 새벽밥을 준비하기 위해 그 부인이 이웃집에서 쌀을 꾸었는데 한 되가 차지 못하였으므로 나무합 안에 넣어 두었다. 그날 밤 부인의 꿈에, 그 쌀을 쌀알마다 모두 작은 용이 되어 나무합 속에 가득 차는 것이었다. 다음날 그 부인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끼어 일어나서 쌀을 씻어 정성껏 밥을 지을 무렵에 밖에서 문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태중이 들어왔다. 이덕중이 놀라 일어나서 맞이하며 말하였다.
"형님이 어디에서 이렇게 일찍 오십니까?" 이태중이 말하였다. "결성에서 도보로 오다가 해질녘에 성밖에 이르러 여관에서 자고 이제서야 도착했네."
이덕중이 안에 들어가서 부인에게 부인에게 말하였다.
"밥을 지어 사랑으로 내와서 결성의 형님과 같이 나누어 먹게 하오."
그러자 부인이 말하였다.
"밥이 적어서 한 사발도 되지 않고 또 이 밥은 결코 나누어 먹을 수 없소."
이덕중이 그 까닭을 물으니, 부인이 간밤의 꿈에 있었던 일을 고하였다. 이덕중이 부인을 꾸짖으며 말하였다.
"어찌 이 때문에 밥을 혼자 먹고 형님을 배고프게 할 수 있소. 만일 이와 같은 마음이 있으면 천신이 반드시 돕지 않을 것이니, 밥을 내오도록 하시오."
부인이 부득이 밥을 사랑에 내보내고 창문 틈으로 엿보니 이태중이 그 반을 이덕중에게 주어 나누어 먹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과장에 들어갔는데, 방을 부를 적에 두 사람이 함께 급제하였다. 이덕중은 벼슬이 부제학에 이르고 이태중은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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