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2. 기사환국과 신임사화
학질이 떨어질 정도로 위엄이 높던 이광좌
이광좌(1674~1740)의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상보, 호는 운곡이다. 백사 이항복의 현손이다. 숙종 24년(1694)에 장원급제하고 대제학을 지냈으며, 경종 2년(1722)에 정승에 임명되어 영의정에 이르러 나이 많은 이유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효행이 뛰어나 부모의 병환에 부모의 똥을 맛보고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부모의 입에 넣어드리기도 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게 되자, 죽으로 연명하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송인명이 정려문을 세웠다. 인품이 장중하고 위망이 있어 조정이나 초야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두려워하여, 소민으로서 학질을 앓는 자의 등에 그의 성명을 써서 붙이면 학질이 곧바로 나았을 정도라고 한다.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의 욕심을 꺾은 신임
신임(1622~1678)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화중, 호는 한죽당이다. 효종 8년 (1657)에 진사가 되고 숙종 12년(1686)에 문과에 급제하여 연안부사로 나갔다. 연안부의 남쪽에 큰 못이 있는데 그 밑에 일반 백성의 토지가 3천 평이 되었다. 당시 어느 후궁이 욕심을 내어 그 땅을 떼어 받으려고 내수사의 사람들이 임금의 분부라며 와서 협박하였다. 부사가 이를 불가하다고 고집하니 서너 차례나 문서가 왔다갔다 하였다. 이에 임금도 억지로 강요하지 못하고 말았다.
경종 2년(1722)에 좌참찬으로 소를 올려 임금과 신하의 의리를 아뢰고 이어서 동궁(영조)을 보호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사상이 갖은 방법으로 얽어 모함하여, 마침내 사형만을 면하고 제주에 위리안치 되었는데, 이 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영조 1년(1725)에 가장 먼저 사면하여 석방을 명하니, 3월에 처음 배에 올랐다가 비바람이 몹시 휘몰아쳐 겨우 5월에 육지에 내렸는데 병이 심하여 남해에서 그만 세상을 떠났다. 조정에서 벼슬살이한 지 40년 동안 온집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화로와 등잔 등 몇 가지로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조정의 대소 관리 임면을 관장하는 이조판서의 자리에만 10년 동안 있었으면서도 청탁하거나 뇌물을 바치는 자들을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여 집안이 물처럼 맑았다. 시호는 충경이다.
신임은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외아들인 판관 신사원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유복녀가 있었는데 시집 보낼 나이가 되었다. 그 과부된 며느리가 매양 시아버지에게 청하였다.
"이 딸아이의 신랑감은 아버님께서 관상을 잘 보신 후 가려 주소서." 신임이 말하였다. "수 80세에 부부가 해로하고 벼슬자리는 상신에 이르며 아들을 많이 두면 다행이겠습니다." 신임이 웃으며 말하였다. "세상에 어찌 그처럼 겸비한 사람이 있겠느냐? 네 소원대로는 필시 얻기 어려울 것이다."
그 뒤로부터 신임은 출입할 때마다 반듯 합당한 신랑감을 물었다. 하루는 초헌을 타고 한 곳을 지나가는데, 아이들이 장난하며 노는 속에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그 아이는 쑥대처럼 흐트러진 머리에 쑥 튀어나온 턱의 생김으로 뛰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신임이 초헌을 멈추고 자세히 보니, 의복은 남루하나 골격이 범상하지 않았다. 그 아이를 물러 성명을 물으니, 모의 아들이라고 대답하였다. 곧바로 그 아이의 집에 가서 보니 삼간 초가에 겨우 비바람을 가릴 정도였으며, 혼자 사는 부인이 있을 뿐이었다. 신임이 여종을 불러 전갈하였다.
"나는 아무 동에 사는 신 판서이다. 손녀가 있어 바야흐로 혼처를 구하던 중이었는데 댁의 도령과 정혼하고 간다." 그리고 돌아와서 그 며느리에게 일렀다. "오늘에서야 정혼하였다." 며느리가 어느 집이냐고 묻자, 신임은 말하였다. "뒤에 알게 될 것이다."
폐백을 받던 전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혼한 집을 말하니, 며느리가 급히 늙은 여종을 보내어 그 가세 및 신랑감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여종이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가세는 아무 것도 없는 가난뱅이고 신랑감의 얼굴을 아주 추합니다."
며느리는 그 말을 듣고 상혼 낙백할 정도로 실망하였으나 이미 어찌할 수 없었다. 혼인날이 되어 그 신랑을 보니 과연 여종의 말과 같으므로 매우 못마땅하였다. 사흘이 지난 뒤에 신랑을 그 집에 보냈는데 저녁 때 다시 왔다. 신임이 물었다.
"너는 무엇 때문에 다시 왔느냐?" 신랑이 대답하였다. "집에 돌아가니 저녁밥이 준비되지 않았고 또 돌아오는 하인과 말이 있으므로 도로 왔습니다."
신임이 웃으며 그를 머물러 있게 하였더니 집에 돌아가려 하지 않고 매일 안방에서 자는 것이었다. 하루는 신임이 말하였다.
"남자는 사랑방에 거처하고 안일을 말하지 않는 법인데, 날마다 안방에서 잠자는 것은 매우 불가하다. 오늘밤부터 나와 같이 자는 것이 좋겠다." 신랑이 대답하였다. "삼가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밤이 되어 신임의 옆에 자는데 신임이 잠들려고 눈을 감으면 신랑이 손으로 신임의 가슴을 쳤다. 신임이 놀라 말하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신랑은 말하였다. "잠버릇이 좋지 못하므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눈을 감으려면 또 이와 같이 하였다. 신임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곧 말하였다.
"너는 안방에 가서 자는 것이 좋겠다. 나는 같이 잘 수가 없구나."
신랑이 곧 침구를 말아서 안방으로 들어가니, 그 때 잔치에 온 신임의 일가 부녀자들이 신부의 방에 모여 있다가 놀라 일어나서 피하니 신랑은 큰소리로 말하였다.
"다른 분들은 급히 나가고 색시만 남는 것이 좋겠소."
이 때문에 처가의 위아래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괴롭게 여겼다. 신임이 황해 감사로 부임할 적에 신랑도 따라갔다. 황해도의 먹을 조정에 진상할 때 신임이 신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먹을 쓰려느냐?" 신랑은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신임이 가리켜 보이며 말하였다. "네 마음대로 골라 가져 가거라."
신랑은 큰 먹 5백 동을 가져다가 해당 창고에 별도로 놓아두니, 비장이 앞에 나와 고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하면 진상품이 모자랄까 염려됩니다." 신임은 말하였다. "급히 다시 더 만들도록 하라."
신랑이 책실로 돌아와서 친지 및 하인들에게 모두 나누어 보내고 나니 하나도 남는 바가 없었다. 이 신랑은 다름 아닌 유척기이며, 호는 지수재이다. 수가 80세에 이르고 부부가 해로하고 벼슬이 영상에 이르렀으며 아들 넷을 두었으니, 과연 그 자부의 소원처럼 되었다. 유척기가 뒤에 황해 감사가 되어 사위 윤랑을 데리고 갔는데, 또한 먹을 진상할 때를 당하여 윤랑을 불러 그에게 마음대로 골라 가게 하였더니, 윤랑은 대절, 중절 합하여 2동을 골라서 별도로 보관해 두었다. 유척기가 말하였다.
"어찌하여 더 골라 갖지 않느냐?" 윤랑이 말하였다. "모든 물건은 한량이 있는 것인데 제가 만일 더 가져가면 아마도 국고에 해가 있을 듯합니다." 유척기는 웃으며 말하였다. "사람의 의량도 대소가 매한가지다. 너의 그릇됨이 또한 정승에 이를 수 있겠다."
윤랑이 과연 정승이 되었으니, 바로 방원 윤시동 우상이다.
목호룡의 기를 꺾은 비파의 명인 김성기
김성기(?~?)는 처음에 상방(궁중에서 쓰는 물품을 만들던 곳)의 궁인이었는데, 얼마 뒤에 활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거문고를 배워 거문고를 잘 타기로 이름났고, 또 퉁소와 비파에 능하여 스스로 매우 높은 단계의 음률까지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교방(장악원의 아악과 속악을 맡아보던 곳)의 자제들이 가서 그 악보를 배워 이름을 드날린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모두 김성기를 능가하지 못하였다. 이에 김성기는 이미 그 뛰어난 재능을 자부하고 아내와 자식의 생활을 위해 축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사람들이 재물로 교제하는 자가 있으면 이를 구차하게 여겼으니 가세는 날로 더욱 기울어졌다. 서호 위에 작은 배 하나를 사서 손수 낚싯대 하나를 들고 오가며 고기를 낚고 드디어 자호를 조은이라 하였다. 강물은 조용하고 달빛이 밝을 때를 만나면 노를 저어 중류에 가서 퉁소를 끌어 서너 차례 부는데 소리가 매우 비장하여 강 위의 기러기와 따오기도 날며 슬피 울고, 갈대 사이로 오가던 배에 탄 사람들도 모두 일어서서 떠날 줄을 몰랐다. 이 때 목호룡이 고변을 올려 이미 노론 사대신을 죽이고 점차 동궁(뒤의 영조)까지 흔들어 놓으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도리어 그 공훈으로 동성군에 봉해졌다 하여 공경으로부터 이하 사람들이 감히 그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무리를 이끌고 술을 마시고 풍악을 울리는데 준마를 갖추고 하인들을 시켜 김성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오늘 술자리에 그대가 아니면 즐거움을 누릴 수 없으니 그대는 조금 나를 돌보아 주게."
김성기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가지 않자, 심부름하는 자들이 와서 굳이 청하였으되 김성기가 굳이 가지 않으니, 목호룡이 매우 부끄럽게 여겨 그 수하들을 시켜 위협하였다.
"오지 않으면 재가 장차 너를 크게 괴롭힐 것이다."
김성기가 바야흐로 손들과 비파를 타다가 수염을 뽐내고 비파를 심부름 온 사람의 앞에 던지며 말하였다.
"나를 위하여 호룡에게 말하라. 내 나이 70이다. 어찌 너(목호룡)를 두려워하랴. 너는 고변을 잘하니 가서 나를 고하라. 나는 한번 죽는 이외에 무슨 죄를 가하랴."
목효룡이 그 말을 듣고 기운을 잃어 그로 인해 잔치를 파하였다. 그 뒤부터 김성기가 도성에 들어가지 않으니 놀기를 좋아하여 곧 술을 싣고 강 위에 가서 퉁소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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