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하) - 편저자 : 강효석, 역자:권영대, 이정섭, 조명근
1. 예론이 당쟁으로
원혼들로부터 철저히 복수 당한 김석주
김석주(1634~1684)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사백, 호는 식암이다. 잠곡 김육(1659~1658)의 손자다 효종 8년(1662) 증광문과에 장원하였다. 서인 중의 한당에 가담하여 집권 세력인 산당의 미움을 사서 중용되지 못하였다. 자의대비 복상문제로 2차 예송이 일어나자 남인인 허적 등과 손잡고 송시열, 김수항 등 산당을 숙청하고 수어사, 도승지 등 요직에 등용되었다. 남인들의 세력이 강화되자 이번엔 산당과 손잡고 남인 제거에 앞장섰다. 허적이 유악사건으로 실각한 틈을 타서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여 남인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 일등에 청성부원군이 되었다. 김석주가 죽은 지 6년 뒤에 남인들의 그의 훈작은 삭제되고, 아들 김도연은 자결하고, 부인 황씨는 변방으로 떠도는 불운을 겪었다. 그런데 우상에 청성부원군이란 훈작을 받은 김석주의 집이 이렇게 몰락하게 된 것은 김석주가 죽자 김석주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평안도 무인 모갑에게 붙어서 전에 받은 원한을 철저히 복수했다는 이야기라고 전한다.
신분이 천한 무인에게 큰 교훈을 얻은 정재숭
정재승(?~?)의 본관은 동래이고 자는 자고, 호는 숭와다.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이다. 효종 1년(1651)에 진사가 되고 현종 1년(1660)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숙종 11년(1685)에 우의정에 올랐다. 정재숭이 산사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무인 최씨를 만났다. 이 최씨는 신분이 미천한 무인이지만 가정의 법도가 엄하기로 이미 소문이 나 있던 터였고, 어릴 적에 한번 안면이 있었으므로 어떻게 가정을 다스렸기에 마을 선비들의 입에도 오르내릴 정도인가 그 내력을 알고 싶던 차였다. 마침 비가 연일 오고 그와 한방에서 묵게 되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대는 활쏘기와 말타기로써 발신한 몸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을 터인데 마을 선비들로부터 집안을 잘 다스린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도대체 무슨 비법이 있는가?"
그 무인은 즉시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히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소년 시절의 일입니다. 산골에 사는 종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마침 다른 사람은 없고 종매 혼자 있었습니다.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저를 안았습니다. 제가 그 때 벌떡 일어나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종매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못생긴 덕이었으며, 만약 그 여자의 자태가 요염했던들 저는 그 때 틀림없이 짐승같이 욕망을 채웠을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마음 한쪽에 늘 부끄러운 구석이 있었는데, 언젠가 아이들이 글을 배우고 있는 서당 옆에서 화살을 만들고 있을 때 귀에 들려온 서당 훈장님의 말씀이 저를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 무슨 뜻인가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남녀가 같이 만났을 때 일어나는 성욕은 억제하기 힘든 것이므로 아예 어릴적부터 남자와 여자는 엄격하게 구분해서 앉는 것이 좋다'는 내용의 설명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내가 진작 이런 말을 들었던들 혼자 있는 종매의 집에 가지 않았을 터인데'하고 크게 속으로 뉘우쳤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즉시 그 훈장님께 간청하여 그 말 언문으로 받아 와서 집에 붙여 두고 그대로 집안을 다스렸습니다."
유응부의 계시를 받은 숙종조의 충신 오두인
오두인(1624~1689)의 본관은 해주이고 자는 원징, 호는 양곡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나이 겨우 열 살에 시를 지어 명나라 사신 정룡을 놀라게 했다. 인조 26년(1648) 진사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또 장원하였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원자정호 문제로 남인이 송시열 등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한 일)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인현왕후 민씨가 폐위되자 오두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다짐하였다.
"내가 조정의 은혜를 입고 벼슬이 경상의 지위에 올랐는데 어찌 자리에 연연하여 입을 다문단 말인가!"
오두인은 박태보, 이세화와 함께 반대 상소를 하여 국문을 받고 의주로 압송되기 위해 의금부에서 출옥하자, 사람들은 충신의 얼굴을 보겠다고 장안 길을 메웠다. 의주로 가는 도중 파주에서 죽었다. 그가 죽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유응부라고 쓴 쪽지를 받고 그를 만났는데 그는 오두인을 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대감도 오래지 않아 우리 있는 곳으로 올 터이니 그 때 만납시다."
친국을 받으면서 임금에게 간한 이세화
이세화(1630~1701)의 본관은 부평이고 자는 군실, 호는 쌍백당 또는 칠정이다. 이이재의 아들로 이희재에게 입양되었다. 효종 8년(165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황해도, 평안도, 전라도 등 5개도의 관찰사를 지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 때 오두인 등과 함께 인현왕후 폐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친국을 당하고 정주에 유배되었다. 친국받을 때 반대 상소문을 누가 썼느냐는 질문에 이세화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박태보는 붓만 잡았을 뿐이고 내용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그 말에 숙종은 진로하여 고문을 더욱 심하게 하였다. 이세화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여 항변하였다.
"신은 평소에 항상 죽을 땐 국사를 위해 죽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이제 저의 원을 풀게 되었으니 여한은 없사오나 성덕에 누가 될까 두렵습니다. 신의 죄가 비록 크지만 담당 옥리에게 맡겨 다스려도 충분할 터인데 이렇게 밤에까지 친국을 하시니 옥체에 해가 되지 않을까 심히 걱정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를 형간(고문을 받으면서 임금에게 간함)이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이세화는 정주로 유배의 길을 떠났다. 1694년 갑술옥사롤 이세화는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간이 되었고 이어서 호조, 공조, 형조, 병조, 이조 판서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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