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오백년의 선비정신 - 강효석
3. 왕도정치의 시작
황진이의 유혹에도 동요하지 않은 서경덕
서경덕(1489-1546)의 본관은 당성이고, 자는 가구, 호는 화담으로, 개성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업으로 삼고 지냈다.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썼다. 아버지의 명으로 과거에 응시하여 진사시에 합격한 뒤로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화담 가에 집을 짓고 도의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이치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 혹 말없이 여러 날 동안 마냥 앉아 있기도 하였다. 만일 하늘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려면 '천'자를 벽에 써서 깊이 연구하고, 다시 다른 글자를 써서 정밀히 생각하고 연구하여 밤이 새는지 해가 지는지 모르고 골똘히 연구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여러 해 지나 모든 세상의 이치가 환하게 된 뒤에 글을 읽어 그것을 증명하였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스승을 얻지 못했으므로 공부를 한 것이 지극히 깊었지만, 후인이 내 말대로 하면 나처럼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논설은 송대 장횡거(이름은 재임)의 학설을 주장한 것이 많았다. 마음에 스스로 터득하여 만족하게 스스로 즐기고, 세상의 시비, 득실과 영욕은 추호도 마음에 개의치 않았다. 집에 끼니 꺼리가 여러 번 떨어졌으되 늘상 태연하였다. 하루는 문생 강문우가 와서 뵈니, 화담 선생이 못가에 앉아 있었는데, 이미 한낮이 되었다. 그와 더불어 강론하였는데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강문우가 부엌에 들어가서 그 집 식구들에게 물어 보니 "어제부터 양식이 떨어져서 밥을 짓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못가를 산보하며 놀다가 종이를 한 치쯤 잘라 몇 글자를 써서 물속에 던져 넣으니, 한 쌍의 잉어가 물에서 뛰어나와 돌 위로 올라왔다. 화담 선생이 손으로 잡아서 살펴보고는 웃으면서 물에 도로 던져 넣고 말하였다.
"좌도(바르지 못한 도)를 하는 사람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중종 때에 참봉에 제수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선조 때에 영상에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문강이다. 겨울에는 화롯불을 쬐지 않고 여름에는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밤에도 잠자리에 쉬이 들지 않았다. 일찍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글 읽던 당시에는 세상 다스리는 경륜 뜻했는데 노년에는 도리어 안자의 가난 달게 여기네 부귀는 다툼이 있어 손을 대기 어렵고 산수는 금함 없어 몸을 편히 할 수 있네 산의 나물과 물의 고기로 이 배를 채울 수 있고 달을 읊조리고 바람을 노래하니 정신을 상쾌하게 하네 학문이 의심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 참으로 쾌활하거니 헛되이 백년의 인간이 되는 것 면하게 되리
그를 추종하여 옷자락을 걷어올리고 수업한 사람이 날로 문에 가득하였다. 송도에 인물이 많아서 차오산(이름은 천로임)의 문장, 한석봉(이름은 호임)의 명필 등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또한 명창 진이란 기녀가 있어 얼굴이 아름답고 노래를 잘 부르고 거문고를 잘 타며 시에 능하였는데, 또한 여자 중의 호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컫기를 "송경에 삼절이 있으니, 그 첫째는 박연폭포이고 그 둘째는 화담 선생이고 그 셋째는 곧 황진이다"라고 하였다. 진이는 화담 선생이 고상하게 살며 벼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한다는 말을 듣고, 그를 시험해 보고자 하여 거문고를 메고 술을 걸러 들고 실띠를 매고 '대학'을 끼고 가서 절하였다.
"소첩이 듣건대 '남자는 가죽띠를 매고 여자는 실띠를 맨다" 하였습니다. 소첩도 학문을 알므로 실띠를 매고 왔으니 원컨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화담 선생은 웃으면서 그를 가르쳤다. 진이는 밤을 이용하여 접근하되, 마치 마등이 아난타에게 달라붙는 것처럼 여러 날 동안 접근하였으나, 화담은 끝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진이는 부끄러움과 한을 견디지 못하여 드디어 화담을 하직하고 금강산으로 향하였다. 칡적삼과 베치마차림에 짚신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국내의 명산을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다. 진이는 늘 말하였다.
"지족 노선이 30년 동안 벽을 쳐다보고 수도했어도 나에게 지조가 무너졌는데, 오직 화담 선생은 여러 해 동안 가까이 지냈으되 끝내 난잡한 데에 이르지 않았으니 참으로 성인이다"
화담이 시냇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서사정'이라는 현판을 걸고서 그 위에서 즐겁게 놀았다. 하루는 문도들과 '주역'의 이치를 설명하고 있을 적에 홀연히 늙은 중이 와서 섬돌 아래에서 절하였는데, 무성한 눈썹에 고리눈이며 상모가 흉악하고 사나웠다. 화담이 물었다.
"너는 여기 무슨 까닭으로 왔느냐?" "빈도가 마치 갈 곳이 있어 집 앞을 지나는 길에 잠시 뵙기를 청합니다" "내가 죄없이 죽음에 나아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너는 놓아 줄 수 있겠느냐?" "이는 천명에 관계되니 진실로 어기기 어렵습니다"
중이 절하며 하직하고 가 버리자, 화담이 탄식하여 마지않았다. 문도들이 모두 당황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그 까닭을 궁금해하자 화담이 말하였다.
"그 중은 아무 산의 신호이다. 오늘 저녁 아무 마을, 아무 집에서 장차 사위를 맞이하여 폐백을 받는데, 처녀가 해를 당하게 될 것이니 어찌 참혹하지 않겠느냐" 무도들이 말하였다. "선생께서 이미 환하게 아시면 어찌 구제하려 하지 않으십니까. 유곤이 특이한 공적이 있자, 범이 그 아들을 업고 하수를 건너갔고, 황공이 적도를 외자 범이 사람을 해치지 못하였으니, 지금 만 가지 경우에도 두루 통하는 선생의 도로써 어찌 눌러 이기는 술법이 없으시겠습니까?" 화담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긴 뒤에 말하였다. "내가 조금 시험해 보려 하나, 다만 시킬 만한 사람이 없을 뿐이다" 한 문생이 자기가 가겠다고 자청하자, 화담은 기뻐하면서 책 하나를 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연화경' 안의 보현품이다. 옛날 고환국 손모가 이 경문을 외어 액화를 면하게 되었으니, 불가에서 '고왕관음경'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네가 그 집에 가서 모름지기 기밀을 누설하지 말고 다만 대청 위에 상탁과 향, 촛불을 갖추어 차려 놓고 그 처녀를 방안에 가둔 뒤 문을 굳게 잠그고 건장한 여종 5, 6인을 시켜 단단히 붙잡고 놓아주지 말도록 하라. 너는 대청 위에 앉아 이 경만 외우되 구두를 그르치지 말고 닭이 울 때까지 끌어가면 저절로 무사하게 될 것이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
그 문생이 화담의 가르침을 받고 그곳에 가니, 곧 산골 마을의 부잣집 민가였다. 집들이 즐비하고 노적가리가 담장 높이 솟았으며, 마당에는 차일과 장막이 여러 군데 쳐져 있고 문밖에 신발이 가득하였다. 방안에 들어가 주인을 만나 보니, 풍채와 인품이 좋은 노인이 물었다.
"손은 무슨 일로 밤에 여기로 왔소?" 그 문생이 대답하였다. "저는 과객이 아닙니다. 주인집에 큰 일이 있는데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할 수 있어서 일부러 왔습니다" "무슨 일이오" "오늘밤 주인집에 큰 액이 있으니, 만일 내 말대로 이렇게 이렇게 하면 거의 재앙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며 말하였다. "어디서 온 풍객이 미친 헛소리를 하오?" "나는 뜻만 커서 큰소리치는 초나라의 접여가 아니라, 계책이 초나라를 위하는 데에 있는 조나라의 모수입니다. 우선 앞으로의 일을 보고 나서 내 말이 속인 것이라면 곤장을 쳐서 쫓아 내면 될 것입니다"
주인 노인이 마음으로 매우 의아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어떻게 되는지 보겠다 하고 하인을 시켜 일체 손의 말대로 대청을 청소한 다음, 상탁을 설치하고 처녀는 방안에 깊이 숨겨 놓았다. 그 문생은 곧 옷을 가다듬고 대청 위에 단정히 앉았다. 안팎이 조용하고 등불, 촛불이 환하게 밝았다. 그는 상탁 앞에서 불경을 외웠다. 삼경 때쯤 되자, 벽력 같은 소리가 들리면서 지붕의 기와가 모두 진동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벌벌 떨며 숨어서 보니, 이마가 흰 큰 범이 뜰 가운데로 뛰어내려 왔는데, 눈은 번개처럼 번쩍이고 소리는 뇌성같이 웅장하였다. 그 범은 멋대로 날뛰며 물어뜯고 으르렁거렸는데, 그 형세가 매우 사나왔다. 문생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불경을 끊임없이 읽을 뿐이었다. 이때에 처녀가 변을 보겠다는 핑계로 나가려 했으나 여종들이 좌우에서 그를 포박한 것처럼 단단히 붙잡으니, 처녀는 손발을 어지럽게 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이윽고 범이 홀연히 번개처럼 잽싸게 떨쳐 일어나서 크게 울부짖고 창문 앞 기둥 나무를 물어뜯었는데, 이렇게 세 번 하였다. 조금 뒤에 마을의 닭이 '꼬끼오' 하고 울자, 범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처녀는 까무라쳐 버렸다. 이윽고 집안 식구들이 정신을 수습하고 따뜻한 물을 처녀의 입에 넣으니 조금 뒤에 깨어났다. 그 문생이 불경 읽는 것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주인이 절을 하고 사례하였다.
"공은 신인인데, 내가 눈이 있으되 태산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원컨대 천금을 올려 공자를 위해 축수함으로써 만분의 일이나마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내가 우연히 남의 위급함을 구제하는 의리로 인하여 잠시 술법을 시험해 본 것이지, 애당초 술법을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생이 물러가기를 고하니, 주인 노인이 재삼 굳이 만류하였다. 이에 옷소매를 뿌리치고 돌아와 화담에게 고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세 곳을 잘못 읽었느냐" 화담이 웃으며 말하자 문생이 대답하였다. "잘못 읽은 곳이 없습니다" "조금 전에 그 중이 또 들렀다 가면서 나에게 사람을 살려준 공을 사례하고 또 '경문 세 곳을 잘못 읽어서 기둥 나무를 물어뜯어서 표시하였다'고 하였다"
그 사람이 다시 생각해 보니 과연 잘못 읽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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