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최영철 - 처음이자 마지막,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형 사랑이여 그대들 잠시라도 마음 아프게 혼자서는 돌아설 수 없구나 그대들 부러 쭈빗거리며 저녁상을 차리고 숟갈 놓기 바쁘게 먼 길 떠나려 할 때 부디 억센 손길로 막아다오 우리들 안타까운 그리움 때문만은 아니다 막차를 보내고 추위에 떨며 내밀히 서성거린다 그대들 아름다움에 이 밤 몸 섞지 못하고 쓴 담배 나눠 피우며 불 꺼진 들판과 다함없이 팔 벌린 어둠으로 버려진 채 바라보면 세상은 끝없어 들판 속 어둠에도 한가닥 길은 있으나 사랑이여 우리 어찌 나아갈 수 있으랴 그대들 숱한 그리움 바람으로 흩어져 긴 밤 내 떠돌게 할 수 있으랴. - 시 "이 세상 사랑에게"전문 모든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20년 전쯤에 쓰여졌을 마을 앞의 시를 다시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 읍으로 가는 버스는 언제나 빨리 끊어졌다. 그녀를 바래다주기 위해 늦은 저녁 도시의 동점에서 버스를 타고 가며 어쩌면 돌아오는 버스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도시의 현란한 불빛들을 지나 어두운 들판을 달리고 있을 즈음에는 이 길을 되밟아 영영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예감은 불길한 추측이 아니었다. 우리가 간 길을 단 한발자국도 되밟을 수 없다는 것을, 한번 지나간 시간을 다시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도시에서 읍으로 가는 늦은 저녁길은 멀리 점점이 뿌려 놓은 불빛을 쫓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앞의 암흑을 헤치며 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목마른 그리움으로 당도할 길이 어디인지, 그길의 끝에 어떤 미래가 그려져 있는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던 길이었다. 그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는 완행 버스 뒤칸에 앉아 우리는 그 길의 도착지를 말없이 그려보곤 했다. 20대초의 한창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의 종점이 호화롭기를 우리는 바라지 않았다. 세상의 명리가 하나도 우리 앞에 주어지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 몇 개의 호화로운 명리 때문에 그에 값하는 시련과 절망을 주시려거던 차라리 아무것도 주지 않으셔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저 아득하고 조용한 들판과 산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해서 오랫동안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두 시간쯤 걸렸던 읍에 버스가 당도하면 늦은 밤이었다. 도시의 밤은 늦을수록 맹렬한 야성을 내뿜는 법이지만 읍의 밤은 어둠과 함께 둥지 속으로 몸을 웅크리는 순응의 시간이었다. 도시의 밤이 어두울수록 눈에 불을 켜는 맹수를 닮는다면, 읍의 밤은 일몰과 함께 날개를 접는 착한 초식동물을 닮는다. 우리는 어두워졌기 때문에 더 싸한 내음이 나는 읍의 냄새를 맡으며 바람난 초식동물처럼 여기저기를 걸어다녔다. 늦은 귀가길을 종종거리며 가는 어른들과 구멍가게에서 군것질거리를 사가는 아이들, 낮부터 추해 있었을 법한 술꾼 몇 명, 그리고 이들의 옆을 느리게 지나쳐가는 바람 난 강아지들을 제외하고는 움직임이 거의 없는 밤길이었다. 어느 땐 용케 막차를 탈 수 있었고 어느 땐 돌아갈 버스가 없었다. 그런 날 밤은 읍 중심의 파장한 시장 근처 선술집에서 막걸리나 소주를 마셨다. 20대에 마신 술의 대부분은 진퇴양난의 폐쇠회로를 지나는 듯한 불안한 조짐들을 안주삼아 마셨을 것이다. 버스를 놓치고 읍의 허름한 장거리에서 술이나 마실 수 있었던 밤은 그래도 차라리 행운이었다.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마지막 버스를 타고 오는 밤은 갑자기 혼자가 되어버린 무서운 외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저 번쩍거리는 도시의 불빛 사이를 지나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무데도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강을 넘으면서 시작되는 현란한 물결들과 자동차와 상가의 불빛과 아우성을 치며 달려드는 소음에 진저리를 치며 나는 내 방으로 숨어들었다. 내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컴컴한 방문을 열고 들어가 스위치를 올리면 방 한 귀퉁이에 그녀가 앉아 있을 것 같았다.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 아니면 봄이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왜 하필 서울이었는지 모르겠다. 세상 끝까지, 아니 세상 밖으로,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저 세상으로 같이 건너가기 위해 그 열차를 타고 있었다. 별로 많이 심각하게 생각해 본 것 같지도 않다. 그냥 주거지를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옮기듯이 훌쩍 그렇게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도 가끔 그때 생각을 하면 내가 기특하게 여겨진다. 일생에 겨우 얻을까 말까 한 깨달음의 끝자락을 어찌 그렇게 단숨에 결행하려 했을까. 그 생과 사의 난해한 의미를 단칼에 잘라 보려 했던 용기는 사랑의 힘이요 절망의 힘이었다. 사랑은 모든 절망을 물리치는 것이지만 절망은 또 모든 가식을 물리친다. 절망의 극한에서 사랑은 진실해진다. 절망의 진퇴양난이 용기를 만든다. 그때 우리의 가출이 사랑이었는지 절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앙갚음이나 자학은 아니었다. 우리를 가로막은 세상을 원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왠지 마음이 편안했다. 전날밤 나는 내가 차고 있던 온전한 시계를 동생의 고물시계와 바꾸었다. 부디 이일이 온전하게 성사되더라도 이일로 하여 아무도 상처받지 않기를 빌었다. 우리는 그저 편안하게 야간 완행열차를 탔고 기차안에서 잠깐 아는 이를 만나 우스갯소리를 했던 기억도 난다. 그렇게 내려선 서울의 새벽은 낯설고 차가웠다. 미명과 함께 떠 있는 높고 낮은 건물들은 섣불리 우리의 마지막을 받아 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마지막의 수렁으로 우리를 던져 버림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열어 보려 했던 욕심이 만만찮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 일부러 텅빈 주머니로 길을 나섰던 우리는 그저 무료하고 힘없이 서울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날 저녁 어떤 친구와 늦도록 술을 마셨는데 아무런 이야기도 하기 싫어진 나와 그녀에게 그는 계속 시비를 걸었다. 술주정 같기도 하고 투정 같기도 하고 세상 밖으로 도망가려는 우리를 붙잡으려는 완강한 손길 같기도 했다. 참다 못한 내가 그랬던 것 같다. "뭐냐. 뭘 어쩌란 말이냐." 그 친구의 주정은 세상이 내게 뭐라고 해대는 웅웅거리는 소리와 비슷했다. 아직 세상은 뭐라고 분명하게 내게 일러주지 않고 이처럼 웅웅대기만 했다. 도대체 날 보고 어쩌라는 것인지. 이틀쯤 서울의 낯선 거리를 쏘다니면서 여기는 참으로 사람이 마지막을 보낼 만한 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강이나 바다가 보이는 곳이면, 그래서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길이 강이 나 바다를 따라가는 길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잡아준 여인숙에 둘이 누워 이 모습으로 간다면 우스운 해프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남은 자의 그런 뒷말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그것은 한동안 복무했던 이승의 우리데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사흘 만엔가 친구가 구해준 여비로 급행열차를 타고 돌아왔다. 가는길은 더디고 돌아오는 길은 금방이었다. 열차의 속도는 그랬지만 정작 가는 길은 빠르고 오는길은 다시 걸어가야 할 시간들 때문에 더디고 무거웠다. 오백년 여기 서 있는 동안 한번은 당신 샛별로 오고 한번은 당신 소나기로 오고 그때마다 가시는 길 바라보느라 이렇게 많은 가지를 뻗었답니다 오백년 여기 서 있는 동안 한번은 당신 나그네로 오고 한번은 당신 남의 임으로 오고 그때마다 아픔을 숨기느라 이렇게 많은 옹이를 남겼답니다 오늘 연초록 잎벌레로 오신 당신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많은 잎을 피웠답니다 - "인연, 푸조나무 사랑" 푸조나무는 부산 수영공원 안에 있는 수령 5백년이 넘은 천연기념물이다. 힘들 때마다 나는 이 고목을 생각했다. 그 나무에 견주면 나의 외로움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겨울에 처음 이 나무를 보았는데 쓰레기더미 속에서 불이 탄 듯 음산하고 시커멓게 서 있는 꼴이 도저히 살아 있는 나무로 보이지 않았다. 그 나무에 봄이면 어김없이 잎이 무성하다. 거대해진 가지를 혼자 지탱할 수가 없어 쇠기둥에 몸을 의지한 채 전신이 상처 투성이인데도 여린 잎을 피운다. 5백년 동안 소멸과 신생을 거듭한, 쓰러지고 일어서며, 지고 피는 순환을 계속한 나무를 지금 나는 내 마음에 옮겨 심고 싶다. 봄을 만나려는 마음이, 봄의 새와 꽃과 바람과 다시 노닐고 싶은 그리움이 나무에게 소생의 힘을 주었듯이, 사랑을 만나려는 나의 마음에도 신생의 기운이 주어지기를 기원한다. 읍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던 20년 전이나 푸조나무를 바라보는 지금이나 나는 벅찬 해후의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다. 붙박힌 나무처럼 비바람을 맞고 들판에 홀로 서 있으면 신생의 오아시스처럼 언젠가 한 번은 그 순간이 와 주리라는 믿음이 나를 몸서리치게 한다. 세상에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없다. 다만 끝까지 가보지 않았을 뿐이다. 미처 가보지 않은 길의 끝에 완전한 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 때문에 그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은 두고두고 우리를 아련한 회한에 젖게 한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도 없다. 사랑은 이루어졌건 아니건 간에 불완전한 끝으로 남는다. 미완으로 남은 시간과 미처 다 가보지 못한 거리 때문에 사랑은 사랑이다. 마침표가 아닌 쉼표.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사랑은 무한하다. 모든 사랑은 언제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리고 현재 진행형이자 미래형이다. 20여 년 만에 다시 쓴 사랑시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 최영철 1956년 경남 창녕에서 출생하여,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힘'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 '야성은 빛나다', '홀로 가는 맹인악사', '가족사진'.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가 있고, 산문집으로 '우리 앞에 문이 있다'가 있다.
주변에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 지인이 두 명이나 된다. 한 명은 직장 생활 5년 차에 싱글남이고 다른 한 명은 10년 차에 애가 둘이다. 둘다 엔지니어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업무로 가족을 돌보지 못하고 개인 생활이 없다는 고충을 쏟아냈다. 엔지니어에 대한 편견과 높지 않은 대우도 불만이었다. 요즘 세상에 번듯한 직장이 있는데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할 테지만 당사자들의 고통은 당사자들만 알 것이다. 나는 워낙 걱정이 많고 소심해서 중요한 결정은 뒤로 미루곤 했다. 그 결과 별로 관심이 없던 전자공학으로 박사과정까지 밟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학교를 무작정 그만두고 미국을 여행하게 되었다. 무얼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우습게도 비슷한 전공의 학교를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다니거나 직장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부모님이 결코 좋아하지 않겠지만, 소설가가 되고 싶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결정 뒤에도 내 선택이 옳은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의 실버레이크에는 내가 자주 가는 술집이 있었다. 친구가 바텐더로 있어서 값싸게 술을 마셨다. 손님은 주로 근처 사는 단골들이었는데 그중 한 노인과 술을 마시면서 나의 고민을 털어 놓았다. “네 선택이 옳은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최악의 선택은 그냥 견디고 살아가는 거야. 나를 봐, 이제는 새로운 선택을 할 시간도 남아 있지 않다고. 그런 선택을 하기에는 네가 젊지 않다고? 푸핫, 이것 봐. 너는 열 두 번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만큼 어려.” 그 말은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외계인 소녀와의 러브스토리를 다룬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게 10년 전 일이다. 왜 그 노인이 내게'어리다'고 했는지 지금은 알 것 같다. 나에게 상담을 요청한 두 친구에게도 비슷한 멋진 말로 조언을 해 주었다. 마치 내가 지어낸 것처럼 말이다. 최악의 선택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 늦었다고 생각해도 결코 늦지 않다. 두 친구의 선택에 박수를 쳐 준다. 성실한 친구들이니까 여행을 다녀온 뒤에 어떻게든 다시 잘 해내리라고 믿으며. 서진 님|소설가 -《행복한동행》2010년 8월호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노혜경 - 저주받은 시인과의 한철 그의 어깨 돋아 있던 것은 분명 날개는 아냐. 날개라 하기엔 지나치게 선명한, 뼈에서 자라난 나뭇가지 같은 그것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그것은, 거대한 그것은, 그의 어깨가 숙여질 때마다 어쩔 수 없어 슬프다는 듯 갑자기 툭 처져 버리는, 살대 꺾인 우산 같은, 그것은 어쨌든 날개는 아냐. 그럼 그것이 뭐란 말이지? 하도 오래 살아 낡은 얼굴, 나 때문에 속이 썩었다고 겹겹이 주름진 얼굴을 내보이는 어느 영혼이 덧없이 죽은 다음 내게로 덤핑이 된 무능한 내 수호천사의 어깨에 돋아난 그것은? 내 수호천사는 주기적으로 몸살을 한다. 내가 무겁다는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침대머리에 붙어 앉아 거의 지워진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그를 지치고 낡게 만든 것이 흡사 나에 대한 근심이라는 듯, 내가 걱정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었던 내 운명에 대한 끝없는 근심이라는 듯, 어깨를 뒤집어 방바닥에 드러눕는 그. 어느 날, 그의 어깨에서 실뿌리가 뻗어 나와 슬금슬금 땅을 향해 파고드는 걸 난 느꼈어 조용히 그의 등에서 내려와 땅을 딛던 나는 업힌 것이 내가 아니라 그였음을 알았지 우리는 나란히 누워 그의 날개를 찢었어. 탈바꿈하는 곤충처럼 바삭바삭해진 날개 새 날개를 만들 수 있겠냐고 근심하는 그에게 약속했어 내가 줄 수 없는 걸 주진 않겠다고. 내가 주어야 하는 것은 꼭 주겠다고. - 시 "지상의 평화 3 - 수호천사" 전문 첫사랑이 과거의 강박이 되어버릴 때 그것을 과연 첫사랑, 아니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기억을 아무리 반추해 보아도 있었던 현실을 돌이킬 순 없다는 환멸만이 남을 때도 그것이 사랑일까. 아마 모르긴 해도 우리가 첫사랑이라 부르는 종류의 경험은 기억이 이미 추억으로 변하고, 그리하여 상상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무해한 즐거움이 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런 무해한 즐거움이 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그런 종류의 경험이다. 첫사랑의 대상이던 그와는 무관하게 오직 내 기억 속에만 남아, 필요할 때 얼마든지 편리하게 내 위주로 고쳐 그릴 수 있는, 그러면서도 하나의 양식화된 언어로 내 속에 새겨져 있는 사랑의 기억, 그것을 우리는 '첫사랑'이라 부르거니와, 그렇다면 첫사랑이란 지나가버린 역사가 아니라 되풀이되는 이야기 속에 존재한다. 인류가 자신의 기원을 로맨틱한 이야기에 담아 오래도록 반복하고 재구성하듯, 개인도 자아라는 껍질 밖으로 걸어나가 본 첫경험을 첫사랑이란 이야기 속에 담아 오래 반추한다. 불행히도, 내겐 그러한 의미에서의 아름다운 첫사랑은 존재하지 않았다. 고교 2학년 때, 나는 다른 학교의 남학생들과 시동인회 활동을 한 일이 있다. 고교 무시험 진학 첫회였던 우리 동급생들은 학교에서 얻을 수 없는 또래의 정체성을 나름의 대외 활동을 통해 찾으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고, 시 동인회도 그런 맥락 가운데 하나였다. J는 그 동인회의 중요한 멤버였는데, 만나고 보니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시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던 내가 그들 모임에 끼게 된 것은 교지에 썼던 수필 때문이었는데, 아마 내가 동창이라서 내 글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처음 해보는 교외 동아리 활동이었고, 또 남학생들과 하는 일이라 무척 마음이 부대꼈었다. 그러나 공부밖에 모르던 당시의 내 생활에 끼여들어온 그들에게서 나는 처음으로 시라는 것의 즐거움을 배웠던 것 같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나 독일의 표현주의 시인들에 대해 내게 소개해 준 것도, 특히 보들레르와 휠데를린과 릴케를 가르쳐 준 것도 그들이었다. 내가 그들이라고 말하는 건 처음 한달이 지나기까지 나는 누가 누구인지 이름도 제대로 구별을 못했기 때문이다. 시동인회가 결성되고 한 달쯤 지났을까, 그날따라 모임장소로 예약해 두었던 청소년 회관이 착오로 자리가 나지 않았다. 남자 아이 넷, 여자 아이 다섯인 우리 동인들을 장소를 근처 중국집 골방으로 옮겼고, 장소의 분위기가 그래서였던지 곧 술병이 들어왔다. 나를 제외한 다른 멤버들은 이런 분위기가 처음은 아니었던 듯 무척 자연스럽게 어울렸지만 나는 충격을 크게 받았다. 그때만해도 나는 앞뒤가 꽉 막힌 모범생이었던 것이다. 모임이 끝나고 말없이 자리를 뜨는 나를 J가 따라왔다. 그는 내게 부담스러우면 동인회를 그만두어도 괜찮다고 했다. 있어주었으면 좋겠지만, 강요할 순 없다고. 나는 날 이해해 주려고 한 유일한 멤버인 그가 고마웠다. 내가 J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고 기억하게 된 것이 바로 그날이다. 우리는 그날 시라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왜 시를 쓰려 하는가에 대해 제법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대단히 문학적이고 시에 대한 해박한 상식을 지닌 그가 부러웠으며 그는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공부 잘하는 바보'인 내가 대견하다고 했다. 사실 나는 수학과 화학은 거의 도사급이었으므로 우리는 만날때마다 따로 한 시간씩 둘이서만 데이트를 할 것이며, 그때 서로 아는 것을 가르쳐 주기로 모종의 합의까지 보았던 것이다. J는 이렇게 해서 아주 조용히 내 삶에 끼어들었다.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그랬다면 나는 아주 행복한 기분으로 이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은 어긋났다. 중국집에서 남학생들과 어울려 나오는 내 모습이 같은 학교 아이들에게 목격되었고, 지금보다 훨씬 엄한 규칙이 적용되던 당시 여학교의 풍토는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공부 잘한 덕에 처벌은 면했지만, 나는 동인회에서 탈퇴할 것을 치욕적으로 강요당했다. '배신' J는 동인회를 그만두겠노라고 말하는 나에게 그것은 자신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말했다. 그가 눈에 파란 불을 켜고 죽어도 이 배신을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던 장소는 그의 문예반 선배가 하숙하고 있던 일식 가옥의 다다미 거실이었다. 중국집 같은 곳이라면 두 번 다시는! 하고 말한 내 협박 때문에 어렵사리 구한 모임장소였는데, 가슴아프게도 나는 거기서 이 모임을 그만두겠노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마음속 깊이 통증을 느꼈지만, 나는 그가 내 처지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가 언제나 제도의 바깥을 떠돌며 살아온 말하자면 불량학생이라는 것을 내가 비난하지 않았듯, 내가 제도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범생이라는 것이 그의 비난의 표적이 되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J를 오랫동안 기억했다. 배신이라는 말을 남기고 방을 박차고 나가버린 뒤 내 얼굴로 쏟아지던 다른 사람들의 의혹서린 눈길과, 막상 내가 현관으로 나왔을 때 비에 젖었던 내 신발을 말려서 가져다 주었던 일, 봄태풍이 밀어닥치는 거리로 나설 때 입었던 교복을 벗어주고 우산을 씌워 주었던 일을 두고두고 생각해 보곤 했다. 결국 그는 한없이 정에 굶주린 상처받은 소년에 지나지 못했던 것을, 그날의 내겐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만 동인회를 그만두고 싶었을 뿐인데, 그리고 그건 제가 먼저 꺼냈던 말이기도 했었는데, 어째서 내가 너를 배신한 게 되냐고 나는 항변하고 싶었다. 그러나 버스 정류소까지 가는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 나빴던 것은 내 머리 위에만 우산을 씌우고는 자신은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내내 걸었던 일이다. 결국 내 마음속을 가득 채운건 이 모습이 나를 향한 시위라는 분함이었다. 사실 그것은 일종의 폭력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래, 그럭하자꾸나. 배신이라면 배신해 주지. 다시는 널 안 볼 거야, 라고. 그의 시위에 맞서 내 마음은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 모임에서 빠져나온 얼마 뒤 나는 그에게 연락을 했다. 핑계는 우산을 돌려주기 위해서였지만, 사실은 '배신'이라던 그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내가 너의 뭘 배신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만나고 나니 그는, 내게 그런 폭언을 퍼부은 적이 언제 있었냐는 표정이었고, 부끄럼 타는 아이처럼 계속 웃기만 했다. 내게 남자친구란 것이 생기려고 한다는 것과, 그 상대가 바로 J가 될 거라는 사실을 나는 그날 깨달았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고민거리였다. 우리는 서로의 삶의 형태와 관습을 이해하기엔 너무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고, 나는 거의 온실 속의 화초나 다름없는 어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내게 그는 너무 미지의 존재였다. 한 달 남짓 동인 모임에서 만나는 동안 그에게서 느낀 기묘한 어둠의 분위기와 그의 주변을 늘 맴도는 다른 여자아이들의 존재도 그를 향해 싹터 오른 약간의 호감을 잠재우기에 충분했다. 맨처음의 남자친구가 틈만 나면 학교를 무단결석하고 거의 알콜중독자에다 내놓고 담배를 피우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그런 아이라는 걸 부모님이 아시면 뭐라고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아주 피해버린 것은 아니다. 사실은, 나는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어떤 문학적 열기를 도저히 뿌리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싫든 좋든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리라는 걸 의식하게 되면서, 나는 점점 더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나를 만나기가 어려워졌다. 어느 날, 도서실에서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J라는 애가 여섯 시부터 버스정류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나가 보라고. 집에 와서 기다리래도 막무가내이니 가서 만나보고 오라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의 밤 열한 시였다. 내가 망설이자, 아버지는 다시 권하셨다. 다급한 일이 있길래 그러겠지. 무슨 일인지 몰라도 사람 대접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교복을 입은 채로 뛰어나갔다. 속이 부글거렸다. 겨우 그를 만났을 땐 거의 자정이 다 되었을 무렵이었다.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가야 한다고, 할아버지에게 그렇게 약속했다고 그는 말했다. 열한 시 오십 분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이 미련퉁이, 멍청이, 내가 왜 너의 집에 가야 해? 그것도 이 시간에. 그는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약속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나중에, 나중에야 알았다. 그의 조부모님과의 약속이 J에게 어떤 의미였던가를. 집에서 내버리다시피 한 불량소년인 그를 보살피고 감싸준 그분들에게, J는 착실한 학생이 되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착하고 단정한 여자친구를 보여주겠노라고, 단 한번도 제대로 약속을 지켜본 일이 없던 손자가 이번만큼은 보여드리겠노라고. 그것이 집앞에서 여섯 시간을 기다린 이유였는데, 그 늦은 시간은 내게 납득할 만큼 여유를 주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도록 절망한 표정으로, 그는 내게 이렇게 물었을 뿐이다.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라고. 빛이라곤 단 한점도 없던 그의 눈과, 허물어지기 직전의 축대같던 그의 어깨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내 마음의 한구석에서 한없는 연민의 손이 그를 향해 뻗어나가고 싶을 만큼. 그러나 공포가 밀려왔다. 이 유혹에는 어딘가 죽음의 냄새가 난다고, 거기 빠지면 끝장이라고 누가 징을 쳤다. 야, 정신차려, 넌 고등학교 2학년짜리야, 임마! 나는 천천히 또박또박 대답을 했다. 믿지 못한다고. 나는 너를 잘 알지 못한다고. 우린 겨우 몇 번을 만났을 뿐이라고. 어리고 난폭한, 그리고 막 화살에 맞아버린 야수 같은 그의 영혼은 날뛰기 시작했다. 주먹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내가 예견한, 그리고 예견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프고, 슬펐다. 그리고. 넋이 나가버린 나를 그가 껴안았다. 곧 내 입술 위에 그의 입술이 얹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슬프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내가 널 이렇게 사랑하는데, 라고 그가 말했지만, 나는 알았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며,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이라는 것을. 심장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적어도 이렇게 하지 않았어야 했다. 언젠가 너하고 진짜로 최초의 입맞춤을 하게 될 것이 우리 운명이었다 하더라도 이런 식으로 탈취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넌 알고 있니? 난 절대로 너를 사랑하게 되지 않을 거야. 나는 겨우 이 한마디만 입밖에 내어 중얼거렸을 뿐이다. 꼭 이래야만 했니?라고. 우리 집 앞에 도착했을 땐 자정이 넘어 있었다. 그는 집 옆 담벼락에 기대어 흐느껴 울었다. 이렇게 하여 나는 마음속으로 J와 완전히 결별해 버렸다. J는 그 뒤로도 한참을 방황했다. 가정형편과, 충동적인 성격과, 상처받은 자존심이 그를 정상 바깥의 생활로 내몰았던 것이다. 나의 '날카로운 첫 키스'가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기까지 그는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오곤 했으며, 더불어 그의 여자친구를, 아니 애인을 자처하는 아이들이 나를 찾아다녔다. 그의 친구들, 선배들, 그의 주변을 맴돈 여자들은 나를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공식적인 두 번째 여자였다. 그의 첫 번째 여자는 수시로 바뀌었지만, 나는 부동의 작은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내게 한 복수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도, 그에 관한 한 마지막 연민의 한 조각까지도 지워 없애는 것으로 복수를 했다. 어리석게도. 나중에, 내게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러한 소문을 듣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그가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우리는 플라타너스 잎이 무성한 가로수 아래를 말없이 걸었고, 걷는 동안 나는 그에 대한 내 미움이 많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진짜인 사랑의 힘이 나를 온화하고 너그럽게 만든 것이리라. 어쨌든, 그가 내게 저지른 수많은 폭력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향하던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내게 대한 그의 사랑이 아무리 난폭하고 비정상적인 것이었다 해도 그 진실함만은 받아들였어야 했다는 것을 나는 인정했다. 그리고 한 달쯤 뒤, 그는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 동아리의 MT를 갔다가, 물에 빠진 여학생을 구하고는 심장마비를 일으켜 익사해 버린 것이다. 인생의 마지막을 이타적으로 마감하고는 떠나버린 셈이다. 그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쓸 수도 있었으리라. 그랬다면 그의 의미, 내 인생의 구겨진 한 페이지가 펴지기라도 했을까? 아니다. 나는 지금 오랜 세월 갚지 못해 온 부채를 갚기 시작한 기분이 든다. 그는 따지고 보면 나를 시의 길로 인도한 장본인이었고, 사랑이 권력이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반면교사이기도 했다. 나는 지금의 남편을 대학 1학년 때 만났는데, 이 사람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내 첫사랑이다. 오그라들 대로 오그라든 내 마음을 열어주고, 따뜻한 신뢰로 채워준 사람이 바로 남편이 되는 행운을 나는 지켜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J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이 글을 쓰려고 생각하는 동안 내내 나를 괴롭혀 온 부채감 때문이었다. 나는 일생 내내 그가 폭력으로 나를 소유하려 했다고 믿어 왔지만, 사실은 사랑이라는 것을 무기로 하여 그를 노예로 소유하려 했던 것은 내가 아닌가? 사랑하려 하기 전에 사랑받기를 먼저 배우는 자가 빠지는 함정, 그것에 나도 빠졌었던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비로소 나는 그를 나의 공식적인 첫사랑으로 인정할 마음이 생긴다. J에게 말하고 싶다. 정말 미안하다, 라고. 노혜경 1958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부산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부산대 국문학과 강사로 있으며, 시집으로 '새였던 것을 기억하는 새'가 있고, 공동 저작으로 '한국 현대시와 패러디', '한국 서술시의 시학'등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강연호 - 어느 흐린 기억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 시 "허구한 날 지나간 날"전문 첫사랑을 이야기해 달란다. 첫사랑이라. 이 요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남의 옛 상처를 훔쳐보고자 하는 사람의 장난기 섞인 재촉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소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무엇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털어놓고 싶은 사연 비슷한 것을 갖고 있기는 하다는 말인가. 첫사랑이라. 하지만 이 낭만적이면서도 쓸쓸한 낱말이 나를 막막하게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털어놓을 만한 이야기가 막상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이미 세월의 이끼에 덮여 까마득하다는 것, 어쩌면 한때는 문득문득 가슴을 파고들기도 했을 기억들이 흐린 날의 하늘처럼 캄캄하다는 것, 그 기억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는 것 등이 나를 새삼 아득하게 한다. 그렇지만 누르라니까 마지못한 척 기억의 초인종을 눌러보기로 하자. 그러면 영영 잊혀졌다고 생각됐던 몇 개의 전화번호, 어떤 노래의 몇 소절, 언제 누가 살았는지 모를 주소, 혹은 전혀 의미 모르게 조합된 숫자 같은 것들이 가끔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마 고교 문학서클들의 연합 시화전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고향 대전에서 한참 대학입시에 시달리고 있을 고교 3년생이었고, 그럼에도 시화전 같은 데를 기웃거린 것을 보면 마음은 딴데 가 있었음에 틀림없었고, 성적은 지지부진할 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나 소설 따위의 문학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던 내가, 또래 몇과 어울려 시화전에 간 이유는 물론 뻔했다. 거기서 여학생들이 힐끔거리고 혹시 운이 좋으면 문학소녀들과 사귀고 싶은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전시 축하 화환이나 꽃다발, 방명록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음료수도 마련되었던 것을 보면 고교생들의 잔치치고는 꽤 격식을 갖추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렴풋이 느낌만 남아 있지만 작품들의 내용은 대체로 심각했다. 사르트르나 카뮈풍의 실존적 고뇌를 담았던 것 같았는데, 말하자면 그 시화전은 프랑스식 살롱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고만고만한 시절의 고만고만한 치기가 어울어진 행사였지만, 어린애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식의 건방진 언급을 방명록에 휘갈겨 썼던 나 역시 그 시절의 치기를 한껏 발휘하고 있었나 보다. 아마 문학을 한다고 서로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는 주최측 학생들에 대한 심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어찌어찌하여 한 여학생의 쪽지가 몇 다리를 건너 나에게 전해지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제과점에서 그녀와 마주앉게 된다. 시화전에 작품을 내걸었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 여학생은 다짜고짜 방명록에 쓴 내 언급을 따지고 들었고, 내 형편없는 문학적 비평안을 수정시키려 만나자고 했다는 말을 거듭 강조했고, 나는 우물쭈물 사과했고, 사과하면서도 그녀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고, 계속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 더듬거렸고, 결국 우리는 헤어질 때쯤 해서 서로의 이력과 전화번호와 주소를 대충 나눌 수 있었다. 그 여학생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그것은 1년의 휴학 때문이니까 후배 취급당할 수는 없는 일이며, 아버지가 어느 지방 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에 자기는 가족과 떨어져 이곳 대전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나를 종교적으로도 인도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후 우리는 주로 밤 늦은 놀이터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입시를 앞둔 내가 늦도록 학교에 있어야 했기 때문었이다. 당시만 해도 남녀 고교생들의 교제는 남들의 이목을 의식해야 했으므로 늦은 밤의 놀이터는 오히려 간섭받을 염려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위해 안 읽던 시집을 찾아 읽고 시인들에 대해 공부해야 했으며 교회도 가끔 나가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점차 횟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했다. 학교성적이야 물론 더욱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중에는 그녀의 자취방에 자유로이 들락거릴 수 있었다. 이 진부한 첫사랑 애기에 지친 독자들은 아마 이때즘 해서 그 자취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물론 성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할 고교시절에, 당돌한 어린 연인들이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자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그런 욕망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칠 일은 저지르지 말자고, 우리는 저급해지지 말자고, 어느 때인가는 아가페와 플라토닉 같은 단어들을 들먹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당시의 또래들에 비해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우리의 지적허영이 육체적 접촉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역시 어렸고, 성적이 접촉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또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게 아마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기억한다. 언젠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던 우리를 기억한다. 그네 밑에서 너와 함께 주운 공작용 가위를 기억한다. 아마 낮에 놀다간 아이들 중 하나가 잃어버렸음에 틀림없을, 그 아이들만큼 작고 앙증맞게 생긴 가위를 기억한다. 그 가위를 거쳐간 색종이들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를 말잇기 놀이처럼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거나 물고기로 푸른 바다를 헤엄치거나 뿌리 튼실한 나무로 자라 푸른 숲을 이루었을 거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또 기억한다. 내 생일날 네가 내게 선물한 시집을 기억한다.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이라던, 네가 좋아하던 한용운과 박인환과 황동규의 연애시 몇 편과, 백일장에서 나갈 때마다 상을 휩쓸어왔고 장래의 여류시인를 꿈꾸었던 너의 창작작품들이, 옆으로 조금 기울어진 네 필채로 또박또박 쓰여져 한데 묶었던, 너와 영영 소식이 끊기고 나서도 한동안 간직했으나, 몇 번의 이사 도중에 어딘가에서 버려진, 지금은 "겨울 돌계단 위에 비 내릴 때" 라는 네 작품 한 편만이 어렴풋한, 그것도 제목만 희미하게 남은, 너의 시집을 기억한다. 생각하면 그떄 우리는 삶의 따분함과 시시함과 권태스러움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것 같다. 물론 그런 감정을 달고 다녀야 왠지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어린 연인들은 이미 그때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애써 학업성적 같은 것은 무시했지만 대입시험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네게 까탈을 부리기 시작했고 사소한 일에도 모든 게 너 때문이라는 듯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너는 나를 달랬었지만, 결국 입시를 두 달 앞두고 나는 당분간의 절제를 제안했다. 원래 소심하고 유약했던 나로서는 공부와 너와의 만남을 둘다 잘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성격 역시 지금도 그렇다. 요즘도 원고마감에 쫓기면 나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고 험악해진다. 시험이 끝난 뒤 우리는 물론 다시 만났지만,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로 올라와야 했고, 너는 아버지의 직장문제로 대구로 전학을 가야 했다. 한동안은 주말마다 기차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만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네가 대입준비생이었고 너 역시 나처럼 초조함과 까탈스러움과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입시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아마 내 분방한 대학생활과 여학생들과의 미팅에 대한 마음쓰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제 대학생이지만 자기는 아직 고교생이라는 말을, 네가 자주 되뇌이곤 했었던 것 같다. 유치하게 굴지 말라고 내가 거듭 타일렀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언젠가 내가 대구로 내려갔을 때 너는 갑자기 나를 여관으로 이끌었다. 옛날의 그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던 네 자취방과는 다른, 그 음습하고 지저분한 공간에서 너는 천천히 떨리는 손길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왜 그래야 했을까. 알몸으로 너는 나에게 무엇을 다짐받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울먹이는 너를 달래야 했고, 옷을 그냥 다시 입혀준 뒤 황황히 여관을 빠져나오면서 너를 안심시켜야 했지만,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나의 참담함은 또 왜였을까. 그날 이후 너와의 만남을 거절한 것은 물론, 너의 슬픈 전화연락에도 사무적으로 냉정하게 대하던, 너무 차가워서 나 자신조차도 내 태도에 놀라던 그 변심은 또 무엇때문었을까. 내 첫사랑은 이렇게 지나갔다. 이후 내 연애사는 남들처럼 버리고 버림받는 몇 번의 기억을 남기게 된다. 그때 내 첫사랑은 소식이 없고 나는 지금 시인이 되어 있다. 내게 시적인 기질과 재주가 있다면 그 토양은 전적으로 그녀의 영향이다. 그 철없던 날들의 치기어린 순수는 이제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탁자 위에 떨군 물방울처럼 기억은 희미하지만, 나는 세상의 어떤 우연이 세상의 모든 필연이 되는 경우를 믿는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만남과 헤어짐, 그 가슴 서늘한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내 졸시 "허구한 날 지나간 날"에 나오는 첫 입맞춤의 기억도 이렇게 그녀와의 몫으로 운명처럼 남는다. 좀더 덧붙인다면 연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여자는 누구나 무언가 정신 나감과 내 우스꽝스런 구석을 지니고 있고, 남자는 누구나 무언가 우스꽝스런 구석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정신 나감과 내 우스꽝스러움이 결합한 처음의 경험, 그것이 내 시적토양이라면 그야말로 웃을 것인가. 웃어도 할 수 없지만 제발 웃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세상의 어떤 부재는 그 부재에 대한 흐린 기억으로서도 충분히 그 존재를 증명한다. 그 부재의 존재를 나는, 지금, 간신히, 기억한다. 강연호 1962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1995년 제1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가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끝별 - 나는 그때 사랑 밖에 있었다, 텅 빈 채 버석이던 갈대잎은 바람에 쏠렸는데요 산벚꽃 웃음과 춘백의 눈매는 헛헛히 무너졌는데요 그렇게 웃자란 꾳핌은 온통 상처라 당신 곁 무릎쯤만 내어주고 싶었는데요 몸끝 어쩌지 못하고 물오르는 풀인지 향기인지 모란 잎새 그늘 불현 듯 꿈틀대던 꽃대도 그 꽃대 끝에서 떨던 소란한 저녁 물비늘도 내 영혼에 일렁이던 햇살도 한통속이었는데요 그렇게 한백년쯤 나를 비껴 서 있었던 것만 같던 당신 무릎과 내 겨드랑이가 이제사 둥그렇게 키 낮은 망대를 만들다니 바라보는 일만도 그토록 망설임이었건만 두 가슴을 묻는 일이야 만장처럼 사라져가는 당신의 내 풀자국으로 인해 내 사난할 것입니다 모란 내음 선명한 하마 흔하디 흔한 세상 한 봄밤으로 인해 내내 따뜻할 것입니다. - 시 "강진 편지" 전문 사랑은 욕망이고 욕망의 특이함이고 이미지이고 매혹이고 하나이고 선택이고 도취이고 흔들림이고 피로이고 실패이고 반복이다. 사랑은 욕망이 특별히 집착하는 그곳을 가리키고 싶어하지만 그곳은 결코 가리켜질 수 없다. 사랑은 잠시 스쳐갈 뿐 만져볼 수도 다시 돌이킬 수도 없다. 사랑은 언제나 불확실하고도 미완성인 채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늘 사랑 밖에 있었다. 내 사랑은 내가 없는 바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 없었다. 나는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말할 수도 없다. 그러니 지나가버린 사랑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것도 첫사랑을 언어화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나는 첫사랑의 푯대를 어디에다 꽂아야 할지부터 망설인다. 그러나 나는 짐작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열병과 함께 꿈꾸었던 그 그를 향한 열망이 표적이 될것임을. q년 반 동안 나는 그를 욕망했고, 꿈꾸었고, 그리고 고백했다. 그러나 고백하는 순간 나는 텅 비어버렸고 내 사랑은 사라져버렸다. 대학에 입학해 문학에 대한 막연한 느낌으로 가입했던 문학회는 내 생을 온통 뒤흔들어 놓았다. 허름한 중국집 뒷방에서 술과 담배, 젓가락 장단과 운동가로 치뤄졌던 신입생 환영회는 충격과 부정과 눈물과 일탈의 연속이었던 대학생활을 예고하는 전조에 불과했다. 그를 처음 만난건 1학년초, 3개대 연합 시합평회를 가진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 또한 타 대학의 신입생이었다. 큰 키에 적당한 체격, 하얀 얼굴의 첫인상은 상큼하고 또 풋풋했다. 그후 3개대의 공식 만남에서마다 그를 보았다. 그 과정에서 외모보다는, 정태춘의 '떠나가는 배'나 '북한강에서'를 불러제끼는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와 노래솜씨, '돌무덤'을 비롯해 간신히 보여주었던 신입생답지 않게 꽤 무르익었던 시 작품들, 그리고 대화중에 언뜻언뜻 내비치던 시적 감수성과 사회과학적 인식 등은 내게 부족한 부분들이었기에 더욱 커보였다. 그는 유난히 하얀색과 청색 티셔츠가 어울린다. 그의 웃음소리는 장난스럽게 끽끽거린다. 하지만 그가 일어나 공식적인 발언을 할 때는 의젓하고 당당하다. 깍듯한 예의와 분명한 태도, 빈틈없는 견고함이 배어 있는 그의 목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신뢰를 갖게 한다. 정갈하면서도 은은하고 싫증나지 않는, 소담한 소국 같은 사내, 그는 붉은 자줏빛과 청색이다. 그러나 깊이 있게 아니 오붓하게라도 그와 말문을 터볼 기회는 좀체로 주어지지 않았고 그 에 대한 감정은 내 일기 속에서만 무르익어 갔다. 그 느낌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한 것도, 잊고 지낼 만큼 밋밋한 것도 아니어서, 더욱 애틋하게고 질긴 것이었다. 아름다운 사랑에 관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고 문득문득 근원을 알 수 없는 아련함으로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훌쩍 가을이 되었고 드디어 그와 가까워질 수 있는 '사건'이 터졌다. 그가 속한 대학의 행사가 있던 날, 나를 비롯해 몇 명이 축하해주러 쫑파티에 참석했고, 많이들 마셨고, 또 많이 늦었다. 문제는 나를 집까지 바래다 줄 기사로 그가 간택된 것이다. 12시가 넘어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 오기는 왔지만 실상은 바래다줘야 할 사람은 그였다. 억병으로 취한 그의 귀가가 걱정이 되었으나 골목에 그를 버려둔 채 집으로 들어왔다. 세수를 하고 아무래도 미심쩍어 골목을 나가봤더니 아니나다를까 쓰레기통(당시는 집집마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쓰레기통들 갖고 있었다.)에 기댄 채 쭈그리고 앉아 잠들어 있었다. 어처구니 없었다. 할 수 없이 한 살 위인 막내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오빠는 그를 깨워 자기방으로 데리고 갔다. 이튼날 아침 오빠 후배로 알고 차려주는 밥상을 함께 받았을 때의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전날 마시던 술집에 내 소지품을 놓고온 탓에 우리 둘은 다시 택시를 타고 그의 학교로 향했다. 술집이 문을 열기를 기다리는 오전 내내 우리는 많은 얘기를 했다. 나뿐만 아니라 그도 이 모든 상황에 당황해 있었고 다소 들떠 있었다. 그는 연신 "내가 뭔가에 홀렸었나봐"라고 중얼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내 안에 훨씬 더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그 또한 가끔 보는 공식모임에서 종친 혹은 친척(우리는 동성동본이었다!)이라고 내 어깨를 치며 친근함을 내보였다. 그가 내 안에 깊게 자리잡으면 잡을수록 나는, 내 사랑을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를 고민하게는 게 아니라 어떻게 감추고 묻어두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했다. 그 욕망, 그 애잔함, 그 안타까움은 나로 하여금 지나치게 잦은 몽상으로 빠져들게 했다. 충족되지 않은 체로 늘 비어 있기만 하는 그에 대한 내 사랑을 환상함으로써 나는 그를 비현실화시키고 있었고 이미지화시키고 있었다. 그 사랑은 도취적이었고 환영처럼 떠돌 뿐이었다. 이 비가 나를 깨우듯, 내 마음의 비가 그의 창가를 두드려 그를 깨울 수 있었으면 한다. 다른 일들을 생각할 수 없다. 온종일 그의 그림자를 달고 다닌다. 그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내 그만을 생각하기를 지루해 하지 않는다. 나의 허상 혹은 실체일 수도 있는 이 숱한 잔영들, 현기증들. 모든 사랑의 플롯은 욕망, 상상, 고백으로 짜여져 있다. 드디어 고백의 기회가 왔다. 겨울 방학이 다가왔고 3개대 시낭송회 준비를 위한 회장단 모임이 있었다. 그도 나도 각각 회장이 되어 있었다. 장소는 백마(지금의 일산)의 한 카페였다. 나, 총무였던 내 동료, 그, 또 다른 대학의 회장 A, 이렇게 네 명이 모였다. 사건의 발단을 마련해준 건 A였다. A는 이미 그가 속한 대학의 대학문학상 소설 부문에 입상을 한 터였고 그 기세로 그는 벌써 소설가 였고 벌써 투사였다. 저돌적인 관심의 메시지를 내게 몇 차례 퍼부은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내 반응은 냉담했었다. 만나자마자 A는 들이붓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횡설수설했고 나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유행했던 ' 지식인'과 '지식인기사"라는 개념을 빌어, 내 문학적 운동성에 대해 지식인 기사로서의 한계를 공격했던 것 같다. 함께했던 그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 앞이라 나는 더욱 화가 났고 급기야 A의 얼굴에 술을 끼얹고 자리를 일어서버렸다. 백마역에 도착하니 신촌행 기차가 오려면 조금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합실 의자에서 불쾌한 감정을 삭이고 있자니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너무 반가웠다. 우리는 함께 기차를 탔고, 화물칸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덜컹거리는 화물칸에 나란히 앉아 바라보는 초저녁의 기찻길은 너무 고적했다. 그 아름다움에 취했던 걸까. 나는 순간 그에 대한 사랑을 발설하고 말았다. 아니 들켜버렸다. 이에 용기를 얻었던 것이었을까. 신촌역에 내리자 그가 먼저 술도 깰 겸 차 한 잔 하고 가자고 제안했고 이번에는 그가 나를 향해 진지하게 고백했다. 너를 사랑한다, 너를 바래다준 날부터다, 네 긴 머리칼을 만지고 싶었다, 이젠 내가 먼저 전화할 거다, 네가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게 훨씬 크고 깊다. 1985년 1월 13일이었고, 일요일이었다. 그날의 모든 것들은 늘 어제처럼 생생하다. 그의 표정과 말투, 옷매무새, 지금은 없어졌지만 레스토랑의 이름과 자리, 소파의 색깔, 배경음악, 그때 마셨던 커피 맛과 향기. 그리고 우리는 보다 본격적으로 만나기 시작했다. 동인천의 자유공원, 삼청공원과 춘천 등지를 걸으면서 강창민(그도 동성동본인 강경화 시인과 결혼했다.)의 '손 내밀어 서로를 쥐면 '칡넝쿨에 매달린 겨울 풀잎처럼' 우리는 서로의 손아귀에서 함께 부수러진다'라는 시구절을 가슴에 되새기곤 했다. 한 행씩 서로 번갈아가며 시 비슷한 낙서를 하기도 하고, 그의 생일을 맞아 꽃과 카드, 뭔가를(책이었을까 만년필이었을까 라이터이었을까) 선물하기도 했다. 한번은 이대 후문에서 만나 맥주와 커피를 마시고 나오니 눈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우리는 연대 동문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연대 청송대쯤 이르렀을 때 쌓인 눈에 내가 넘어질 뻔 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다. 달빛 아래 반짝이는 전인미답의 백설은 온통 환하기만 했다.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눈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나는 이효석의 메밀꽃밭과 달빛을 생각했다. 또 한번은 그가 자신의 어떤 모습이 가장 좋으냐고 물은 적이 있다. 꼬고 앉은 긴 다리위에 팔꿈치를 놓고 긴 손가락 안에 작은 문고판을 감싸듯 쥐고 읽으면서 나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많이 실망했다. 내가 좋아하는 모습이 자신이 죽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 대화는 불길한 예시와도 같았다. 그를 만났다. 가까워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 단지 보이는 것의 거리만으로 가까워지기를 원했었는지. 그가 멀게 느껴지면 내가 다가서려 하고 그가 가까이 오면 나는 밀쳐내고 물러서고. 그와의 만남이 습관화되는 건 아닐까. 사랑이란 딱 들어맞지 않는다. 언제나 부족하거나 지나치다. 제때에 공급되지 않는 결핍이거나 제때에 소비되지 않는 과잉인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내가 먼저 그를 요망했고 그 욕망을 먼저 발설했다는 사실은 내게 묘한 열패감으로 남아 있었다.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에 대한 나의 사랑보다 더 깊고 넓다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고, 그 확인으로 나의 오랜 사랑을 보상받고 싶었다. 그 끊임없는 요청 앞에서 나는 그를 놓쳐버리고 있었다. 간섭하며 침번하고 , 조르고 협박하고, 의심하는 내가 있었다. 사랑에도 자질이 있다면 겁 많고, 자존심 세고, 의심 많고, 앞서 생각하는 내 천성은 사랑과는 멀리 있을 터였다. 나는 회의했다. 그 긴 시간동안 그의 첫인상은, 술과 담배와 스스로를 아끼는 것이 죄악시되던 대학문화의 풍토 속에서 꺼칠해 있었으며, 사회과학적 인식과 실천이라는 당면과제 앞에서 수척해져만 갔다. 그러나 그것은 핑계였을 뿐이다. 나는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불확실하다는 것에 갈급해했고, 모든 형용사가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그를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다. 내 마음 안에서나 밖에서나 혹은 뒤에서나 당신이 언제나 피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끝이 있는 것이 되고 싶었습니다 선창에 배가 와 닿듯이 당신에 가까워지고 언제나 떠날 때가 오면 넌지시 밀려나고 싶었습니다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것을, 창밖에 문들 흩뿌리는 밤비처럼 언제나 처음처럼 휘번뜩이는 거리를 남몰래 지나가고 있었을 뿐인 것을. '소곡' 내가 썼던 것인지 누군가의 시를 옮겨놓은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이 시는, 내 사랑의 결별을 예고하고 있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사랑의 출발점에서 내가 매혹되었던 환상과 이미지의 장례를 나는 감당할 수 없었다. 모든 연인들처럼, 정기적으로 만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고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해야 하고 걱정을 해야 하고 질투를 해야 하고 의심을 해야 하고 욕구불만을 느끼면서 내가 감당해야 했던 사랑의 상실.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내 욕망이었을 뿐이며 그는 그 앞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다시 내 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칼을 들이민 것도 나였다. 그만 만나자는 말에 그는 어이없어 했다. 너이기 때문에, 지금의 너보다 그렇게 오래 꿈꾸던 네가 더욱 소중하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이유였다. 그는, 사랑은 환상이 아니라 의지라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이해라고 응수하며 나를 설득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는 고집 센 당나귀와 같았다. 1985년 6월 23일 이었고, 역시 일요일 이었고, 그 카페도 지금은 없다. 영원한 꿈일지도 모르는 관계에 대한 일련의 환상들,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 타협치 않음일 수 있다고 믿습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돌아서는 법까지도 짧은 견고함! 분별 있게 헤어지고 말았구나. 그것으로 우리는 끝이 났다. 6개월 남짓한 기간이었다. 그를 잃었을 때 나는 사랑을 되찾은 것 같은 안도감과 해방감을 느꼈다. 그렇게 분별있게 헤어진 데는 2학기 개강과 함께 그가 군에 입대하게 된 요인도 있다. 그의 친한 친구들은 그의 입대가 나 때문이라고 몰아세우기도 했다. 그것이 오비이락이었든 아니든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그에게 미안한 건 사실이었다. 헌데, 그때 내가 선언한 결별은 하나의 미끼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했기 때문에 이기적이었고 두려웠다. 그에게 대책 없이 빠져든다는 것이 말이다. 어쩌면 나는 도망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더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를 함정에 빠뜨렸고 그는 궁지에 몰렸다. 그리고 도망가 버렸다. 너무 세게 붙잡으려 했기 때문에 놓쳐버린 것이다. 그 상실의 대가로 그는 지금껏 내게, 대학에 갓 입학한 후 내가 꿈꾸었던 완벽한 남자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흰색 혹은 청색의 이미지다. "가는 배여 가는 배여 그곳이 어디메뇨" 지그시 눈을 감고 부르던, 결기 있되 울림 좋은 서정적인 바이브레이션이다. 그는 여전히 미소년에 가깝고 여전히 상큼하고 풋풋하다. 나는 그가 모 경제신문의 기자가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시인이 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넘도록 커피숍이나 호프집 같은 데서도, 지나치는 차창 너머로 마주친 적이 없다. '닥터 지바고'나 '폴링 인 러브'와 같은 만남 혹은 해후는 영화의 한 장면일 뿐이었다. 아이 둘쯤은 거느린 채 중년의 가장이 되어가고 있을 그를 상상하는 일이란 잔인하되 감미로운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무슨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나의 첫말은, 그의 마지막 말은 무엇이어야 할까. 나는 지금도 사랑의 형상을 완성하지 못하고 있다. 첫사랑은 특히 설익어 벌어져 버린 석류와도 같은 상처이고, 이동하고 방황하는 하나의 기표처럼 더더욱 모순투성이고 모호하기 짝이없다. 지금껏 나는 그 첫사랑의 형상을 찾아 망설이고 더듬었을 뿐이며, 결국은 이 남루한 말밖에는 주워담지 못했다. 이 텅 빈 말들밖에는. - 정끝별 1988년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시가 당선되었고,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자작나무 내 인생'이 있고, 시론집으로 '패러디 시학'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연왕모 - 추억이 될 수 없는 첫사랑 나무와 땅과 바람 그리고 하늘이 왜 이리 가깝게 보이는지요 거기 묻어오는 그대의 모습들이 가슴으로 들어와 온몸을 적셔놓는데 왜 나는 자꾸만 갈증을 느끼는 걸까요 오직 주인의 채찍에만 길들여진 순진하기만한 당나귀의 눈을 아시는지요 어딜 가다가도 문득 제자리에 서서 그대만을 생각하는 바보처럼 멍한 모습의 당나귀가 스스로는 얼마나 큰 기쁨에 겨워하는지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 또 하루 묵묵히 걸어간다는 걸 아시겠는지요 짐수레도 없이 그저 혼자 길 위에 버려진 당나귀를 생각해보셨는지요 그냥 길 위에서 풀을 뜯으며, 가고 싶은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게 그에겐 오히려 허전함보다 못하다는 걸 느낄 수 있겠는지요 그러다 문득 주인을 만나면 어떤 말 대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오직 맑은 눈빛으로만 바라보는 당나귀를 그려보실 수 있겠는지요 - 시 '당나귀로부터 온 편지' 전문 사랑이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가치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가면서 사랑이 갖고 있는 환상이 차츰 깨져가기 시작했고, 세상에는 내가 몰두할 것들이 훨씬 많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직 내게는 사랑할 때가 오지 않았으므로, 사랑이란 그저 막연한 가치에 불과했고, 남들의 사랑은 그저 감정의 사치로만 느껴졌다. 사랑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사랑놀음보다는 차라리 자기개발에 몰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남을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경험할 수 있겠는가. 자신밖에 몰랐던 나는 가슴에 단단히 빗장을 걸어둔 채 사랑에 빠져들 수 없었다. 그저 언젠가는 나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겠지 하는 기대감만 있을 뿐, 나는 첫사랑의 경험조차 없는 싱거운 인간이었다. 그러나 1996년 4월, 기어코 사랑이 찾아왔다. 친구로부터 전직 스튜어디스라는 그녀를 소개받게 된 것이다. 물론 친구는 그녀가 매우 예쁘다고 말했지만, 나는 큰 기대감을 갖지 않았다. 잔뜩 기대했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엔 그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에, 나는 늘 의식적으로 기대감을 억누르는 편이기 때문이다. 기대감을 갖지 않을 경우에는 어떤 상황이든 그럭저럭 견딜 수 있으니까. 하지만, 윤희의 첫인상은 상당히 매혹적이었고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졌다.(그것이 바로 처음 마주친 사랑의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랑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가 가장 고귀한 존재가 아니던가.) 외면적인 것도 물론 큰 비중을 차지했지만, 말하는 모습과 표정 그리고 서 있는 모습까지 은근하게 매력이 발산되고 있었다. 이후, 윤희라는 그녀의 이름은 내게 사랑을 뜻하는 소중한 단어가 되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만큼 새로운 만남이 주는 기쁨도 컸다. 내 이상형임을 직감했지만, 나는 그 감정조차도 억누르고 있었다. 이 역시 내 기대감이 크면 좋지 않으리란 생각 때문이었는데, 그런 걸 보면 기대감이 무너지는 것에 대해 내가 지나치게 의식을 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받는 것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경계심, 그것이 내가 아주 작은 사랑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런 견고한 벽은 그녀 앞에서 차츰 허물어져갔다. 윤희는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를 보고 가장 먼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내 차는 말이 자동차지 모양새는 가관이었다. 세차는 거의 해본 적이 없을 정도라서 먼지를 뿌옇게 뒤집어쓰고 있고, 군데군데 도장면이 벗겨져 나간데다가 녹까지 슬어잇고, 백미러도 깨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미 10년이나 된 중고차이기도 했지만, 워낙 차를 관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지경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차는 그저 이동수단이라는 생각 때문에, 차에 오른 이상 같이 탄 사람은 배려하지도 않고 오직 목적지까지 빨리 가는 것만이 중요했다. 나의 운전습관은 조급하고 난폭하게 길들여져 있었고, 그래서 차에 탄 사람들은 거의가 불안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당시 내 운전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나에 대해 가졌던 좋은 인상까지 일순간 흐트러져 버렸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 만남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볼 정도로 그녀에겐 심각한 문제였었다.) 두 번째 만나는 날, 나는 또다시 약속시간에 늦고 말았다. 사실 첫날도 30분이나 늦었는데 또다시 늦는다고 생각하니 이만저만 조급한 심정이 아니었다. 간신히 차를 세워두고 숨을 몰아쉬며 뛰어들어간 약속장소에서 윤희는 입구 쪽에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눈 후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윤희가 먼저 나가고, 나는 계산을 한 뒤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나갔다. 그녀를 만남으로써 나는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몸은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그만 입구에 닫혀있는 유리문에 정면으로 충돌하고 말았다. 유리문에는 핏자국이 생기고, 카페 안에 있는 사람들이 놀라서 "헉!"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찔한 상황이었다.(들어갈 때 유리문은 열려 있는 상태였고, 급하게 서둘러 들어갔던 나는 거기에 유리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나는 이마의 피를 닦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밖에 서 있는 윤희에게 걸어가서 멋쩍게 웃어보였다. 그녀는 황당함과 걱정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그냥 조금 부딪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나를 데리고 약국으로 갔다. 그리고 그녀가 약을 발라주는 손끝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더 멍해져갔다. 우리는 매일 만나면서도 헤어지고 나면 또 보고 싶어졌다. 서로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차츰 사랑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느 순간 내 가슴의 빗장이 풀려 있음을, 아니 빗장이라는 것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만난 지 두 달쯤 지나서 윤희의 생일이 되었고, 나는 이 날이 그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평소 잘 입지 않는 양복을 차려입고 회사 앞으로 찾아간 나는 먼저 생전 처음으로 준비한 장미 꽃다발을 안겨주었고, 남산에 위치한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멕시코 요리를 시켜놓고 케이크를 자른 뒤, 생일선물로 목걸이를 주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이, 조금 안면이 있던 레스토랑 주인은 포도주를 서비스로 가져다주었다. 나는 레스토랑 주인과 옆 테이블 사람들에게 케이크를 나눠주며, 윤희가 태어난 날, 내 사랑이 태어난 날을 축하했다. 여자들이 분위기에 약하다는 말은 거의 예외가 없는 것 같다. 내가 표현한 사랑은 그녀가 그날의 아름다운 주인공이라는 느낌을 살려주기 충분했고, 그래서 그녀는 행복해 했다. 몇 개월이 지나고 우리가 만나서 함께 있는 시간은 하루 평균 여덟 시간 정도나 되었다. 그저 밥 먹고 차 마시고 얘기하는 것뿐인데도 우린 서로 지루함을 느낄 수 없었다. 프리랜서 방송작가인 나와 항공사 예약부에 근무하는 그녀는 일찍 끝날 때가 많았기 때문에, 대낮부터 만나서 거의 자정 무렵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면 전화를 통한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전화를 통해서야 진지한 마음속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가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한 번도 건넨 적이 없음을 알았다. 나는 서로간의 표정과 대화, 그리고 호흡을 통해서 사랑을 느낄 수 있고, 흔하게 말해지는 사랑보다는 그것이 훨씬 진지한 것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그건 어쩌면 그때까지도 내가 버릴 수 없었던 혼자만의 벽을 허물지 않으려는 변명이었거나 사랑에 빠져들려고 하는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결국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어차피 사랑이란 무형으로 존재하지만, 그래도 사랑이라는 말이 있음으로 해서 사랑이 더욱 다져지고 현실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전까지 내가 느끼던 것은 비현실적이고 그저 이상적인 사랑의 구름이었을 뿐이었다. 이후, 우리의 대화에서 사랑이라는 말의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차츰 사랑의 결실인 결혼까지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내가 주로 작업하는 시간은 자정을 넘은 후부터 아침까지다. 어느 겨울날 그럭저럭 작업을 하다보니, 윤희가 깨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조금 후면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로 나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녀를 놀라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편의점에서 따뜻하게 데운 캔음료와 어묵을 사들고, 차 안에는 히터를 최대로 틀어놓고 집 앞에서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 화장도 하지 않고 금방 잠에서 깬 얼굴로 그녀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깜짝 놀란 표정의 그녀 모습은 아침 공기보다 더 신선해 보였고, 그녀는 내 작은 선물에 매우 즐거워했다. 우리는 한강 고수부지에 들러 차를 마시며 해가 뜨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그날 회사를 가는 대신에 나와 같이 하루를 보냈다.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이나 성격으로부터 가족사항과 조부모님의 이력까지 닮은 점이 너무나 많았다. 닮은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서로 놀라면서, 우리의 만남이 필연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주었다. 아니, 그것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좀더 가까워지기 위해 발견한 소중한 연결고리였다. 사랑을 느낄 수 없었던 과거의 나는, 아직 인간들 속에 뿌리박지 못하고 떠도는 홀씨 같은 존재였다. 나는 삶의 방식에 익숙한 존재였고,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 몰입하면서 다름 사람들과 가슴으로 교감할 수 없었던 우물 속의 인간이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이런 무미건조한 내면을 갖고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이 있기 전까지 나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 세상은 혼자만으로도 살아가기가 얼마나 벅찬가. 혼자 하고 싶은대로 살다가 까짓거 죽으면 죽는 거고 하는 식이 내 삶의 방식이었다. 얼마나 편한 생각인가. 돈이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물질적인 욕망보다는 내 정신적인 만족이 훨씬 중요했다.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전까지 결혼은 내가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추구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라고 인식되었고, 그 결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윤희도 이런 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원하던 삶의 방식이 달랐기 때문에 헤어질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놓칠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없이 사랑을 느낀다는 것이나, 결혼 없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나, 모두 쓸모 없는 이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윤희를 간절히 원했고,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2년 여의 연애 후에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것은 우리의 사랑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사랑을 통해 나는 비로소 사람들 속에 들어가 함께 어울릴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사랑은 아주 실낱같은 빛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내 온몸을 감싸버렸다. 내 첫사랑은 지금 나의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사랑을 통해 새로 태어나고 있다. 사랑은 나를 환상으로부터 현실로 끌어들였다. 사랑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고, 채워야 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린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삶의 굴곡들을 겪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사랑의 변주를 느끼게 될 것이다. 나의 첫사랑은 추억이 될 수가 없다. 내 평생 함께해야 할 집이 되었으므로. - 연왕모. 1969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 예술전문대학 문창과를 졸업했다. 1994년 '문학과사회'로 등단했으며, 1998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서석화 - 나는 그를 바다라고 불렀다 기억을 말하는 일은 어렵다 넘겨야 할 페이지의 끝자락을 말아올리며 눈물을 참는 일은 더 어렵다 구름 흐르는 소리만 추운 하늘 일몰엔 노을도 앓아 눕는데 기억 속으로의 침몰은 찬 서리 말아 하늘로 올리며 자학의 불꽃을 피운다 언제부터 내 안엔 수천 개의 화산이 있어 용암의 불줄기 살을 태우나 시간은 불길 속에서 위태로운 살풀이를 추지만 열리고 또 열렸던 내 안의 타는 골짜기 화상 입은 그리움의 다리 하나 오늘도 그대 태울 준비를 한다 기억은 자꾸만 커진다 - 시 'in my memory' 전문 첫사랑을 말하라 한다. 나에게. 코스모스와 가을하늘과 그 아래서 찰랑거리던 귀밑 2센티 단발머리를 가졌던 여고 2학년 때의 내 모습을 기억해내라고 한다. 아아! 앞으로만 달려가는 시간을 붙잡아 20년 전의 그곳으로 가기 위해 길게 화살표를 긋고 있는 지금 오래 된 일기장 속에서 그날의 나를 본다. 그 사람을 본다. 나는 그를 '바다'라고 불렀다. 세상 여러 곳을 흐르던 물이 저마다의 삶을 마치고 끝내 귀향하는 곳, 절망조차 합쳐지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수평선을 만드는 곳, 한 방울의 물이라도 결코 밖으로는 새나가지 않는 곳, 하늘과 맞닿아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내 몸이 수증기처럼 가볍게 날아오르던 곳, 내게 있어 바다란, 원시를 그리는 태아의 꿈 같은 곳이었다. "이런 느낌 알아? 처음 본 순간 찾아오는 어떤 영감 같은 거. 눈물 맺힌 두 눈망울을 가진 단발머리 여고 2년생이 헤어나지 못할 운명으로 나를 흔들었다는 거." 그는 내게 그렇게 왔다. 요란하지 않게, 늘 두눈이 젖어 있어 울었냐는 소리를 듣고 있던 내게 그는 착한 사람이 돼주겠노라는 약속을 하며 조용히 왔다. 로망로랑이 말한 '산다는 것, 그건 아픔이고 슬픔이며 거짓이다'라는 상황에 오래 잠겨 있던 나에게 모든걸 뒤집으며 다가온 사람. 1978년 9월 23일, 차갑고 무너지고 있던 가슴에 이슬보다 맑게 솟아오르던 그 기쁨을 나는 하느님께 감사 드리기 위해 쉬는 시간이면 교정에 있던 성모상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태어나서 처음 느낀 사랑. 사랑은 정갈하게 올리는 기도의 첫 번째 자리에 그 사람을 부르는 것일까? 하늘과 땅을 덮으며 흩어지던 그 가을의 낙엽을 태우며 나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아세요? 하느님! 이것이 사랑이란 걸요. 그 해 겨울 크리스마스 날 당일치기로 그와 함께 다녀온 겨울 바다를 우린 지금도 가끔 이야기하곤 한다. 그는 내게 첫 선물로 고운 털로 만든, 강아지 두 마리가 꼭 껴안고 있는 인형과 시를 쓰라면서 노트 한 권을 줬다. 그때 받은 강아지 인형은 우리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한참 자랄 때까지 우리 집에서 그와 나의 긴 역사를 증명해주는 소중함으로,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우리 아이의 생애 첫 친구 노릇을 톡톡이 해냈다. 겨울바다에서 그는 나에게 조병화의 시 '남남'을 낭송해줬고 나는 그에게 당시 유행하던 오정선의 '님을 위한 노래'를 작은 목소리로 불러줬다. 치약거품이 일어나듯 하얗게 번져나가던 파도, 손만 대면 찬물이 주르륵 쏟아져내릴 것 같던 시린 하늘 위로 갈매기가 우리들의 겨울바다 여행을 반기듯 무리지어 날고 있었다. 하늘색 두꺼운 스웨터에 파란 모직 머플러를 두르고 있던 내모습을 차마 바라보기도 아까운 듯 그는 다가서지도 못한 채 "어쩌면 이렇게 예쁠까? 우리 화야는." 그 말만 되풀이했고, 그때 나는 무슨 마음에서였을까? 처음으로 정면에서 시선을 그에게 똑바로 향한 당돌한 모습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저 2년 후면 어떤 여자가 될 것 같아요? 2년 후면 전 스무살 숙녀가 되는데." "2년 후의 석화 모습, 청순한 눈빛을 가진 아름다운 숙녀가 될 거야. 그리고 누구에겐가 큰 사랑을 받게 될 거야 아주 큰 사랑을 말이야." "그럼 다시 2년 후엔요?" "보자, 그럼 스물 둘인가? 아마 약혼을 하게 될 거야." "그 다음 또 2년 후엔요?" "석화가 스물 네 살 때, 그래. 결혼을 하게 될 거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랑." 왜 그런 질문을 하고 그는 또 왜 그렇게 충실한 대답을 했을까? 그의 예언대로 난 스물 두 살에 그와 결혼을 약속했고 그리고 스물네 살 4월에 그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서울 S대로, 나는 그대로 대구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고서도 서로 헤어지지 않고 남들이 그렇게 맺어지기 어렵다는 첫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질 수 있었음은 그때 겨울바다에서의 그의 예언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는 내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리칠 수 있는 보통의 남학생이 아닌,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예감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흔히 말하는 '첫사랑'이라는 새콤달콤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앞으로 나의 긴 시간을 끌고 가는 그의 모습이 그를 처음 본 날, 처음으로 느껴보는 설레임과 함께 눈앞에 떠올랐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와의 만남을 숨김없이 이야기했고 대구 Y대학에 입학했다가 서울 S대학으로 가기 위해 휴학한 뒤, 서울로 재수하러 간 그가 보내준 편지도 어머니와 같이 읽으면서 지내는 동안 그는 어느새 어머니와 내겐 식구 같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다. 내가 고3이 되면서 둘 다 수험생인 우리를 위해 어머니는 자신이 낳은 남매를 위해 정성을 들이듯 절에서 기도를 올리셨고, 입학시험일이 가까워서는 둘 중에 한 사람만 합격해야 하는 운세라면 딸인 나보다는 그가 합격하게 해달라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말도 안되는 기도를 진심으로 빌고 또 비셨다. 서울에서 하숙을 하며 공부하던 힘든 재수기간도 내 생일날 오후 기차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학원수업에 맞추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내려왔다가 다음날 학원수업에 맞추기 위해 밤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던 그를 보며 어머니는 그의 성실함을 믿게 되었고, 입시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걸르는 법 없이 배달되던 그의 편지 속에서 나이답지 않은 한결같은 사랑의 모습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다. "내 딸이 고른 사람인데, 누구의 딸이라고 아무나 만나겠어?" 어머니는 그렇게 딸의 선택을 믿으셨고 우리는 어머니의 지켜보심 아래서 각자 대학생이 되었으며 비로소 어른으로서의 연애가 시작되었다. 입학식을 치르고 첫 주말, 서울에서 내려온 그가 S대학 배지를 가슴에 달고 우리 집 대문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는 자신의 장한 아들이라도 맞는 양 감격해 하셨다. 그런 어머니 곁에서 나는 그의 가슴속에 빛나던 S대학 배지와 그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형편없는 대학에 들어가 오로지 오기로 달아놓은 내 가슴위의 학교배지를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어야 했다. 같은 해에 대학생이 된 우리에게 다니는 학교란 곧 두 사람의 그 동안의 모든걸 뜻한다고 할 만큼,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표면화된 그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거쳐 여고시절 내내 꿈꿔왔던 초겨울 새벽 같은 지성을 가진 당당한 여자로서의 희망은, 허약한 건강으로 재수는 절대 안된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모든 걸 포기하는 심정으로 들어간 대학에 입학한 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고, 겉으로 드러난 내 외양만 보시고 디자이너가 되면 어울리겠다는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들어간 의상학과는 당연히 나로선 재미없는 전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서울에 있었으므로 수업 마치고 친구들이 데이트한다고 바쁠 때 나는 혼자 학교 앞 다방이나 캠퍼스 내 잔디밭에 앉아 그에게 편지를 썼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스프링 노트에 글을 썼다. 나는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 좋았다. 평화로울 수 있었고 외롭지도 않았으며 그런 감정 속에서 나 자신이 정화되고 있음을 글 쓰는 동안은 벅차게 느낄 수 있었다. 대학시절을 거쳐 결혼 전까지 수백 통의 편지가 서울과 대구를 속달등기로 오고 갔다. 여고 졸업 때까진 어머니랑 같이 읽곤 했던 그의 편지를 대학생이 된 이후 차츰 혼자만 읽게 되었고, 그런 나를 어머니는 대견함과 딸 가진 부모로서의 조심스러움으로 지켜보셨다. 지금도 남편이랑 이 다음에 가보로 남겨주자고 농담처럼 말하곤 하는 그때의 편지 슼랩 속엔, 봉투에 '속달등기'라는 붉은 색 도장이 빛바래지지 않은 채로 찍혀 있음을 본다. 학교에 대한 나의 열등감은 그의 사랑 안에서 차츰 치유될 수 있었으며, 그의 학교 축제나 하숙집 오픈 하우스 같은 행사 때마다 대구에까지 내려와 어머니께 허락받은 뒤 나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던 그의 자상한 배려는 어머니에게는 그를 만점짜리 예비 사윗감으로, 나에겐 그의 아내가 된 내 모습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초만 해도 시외전화를 걸 수 있는 공중전화는 특별히 정해진 장소 외에는 없었으므로, 그는 내게 전화하기 위해 하숙집이 있던 신림동에서 서울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와 전화를 걸었으며, 그가 교수 연구실 조교한테 산정해서 몰래 건 전화로 "내일 오후에 전화할게" 라고 짧게 말하고 끊으면 다음날 나는 그의 전화를 받기 위해 하루종일 집에서 꼼짝 않고 그의 전화를 기다렸다. "남원에는 성춘향, 대구에는 서춘향"이라고 친구들이 놀려도 그의 편지를 기다리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주에 한 번은 나를 보러 대구에 내려오는 그를 기다렸던 세월이었다. 그 동안 그의 시골집에도 그를 따라 몇 차례 인사를 다녀온 우리는 누가 보기에도 결혼이 약속된 연인이었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많은 탓이었는지 긴 연애기간 동안 흔히 겪게 된다는 권태도 우리에겐 남의 일이었으며 그는 부족한 나의 학벌대신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문학에 대한 꿈을 심어준 사람이었다. 자기를 사랑하는 정성과 지조라면 하버드대학이라도 갈 수 있으며 신춘문예도 통과할 수 있다고, 출신대학이 중요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람의 전부를 평가할 수 있는 지표는 될 수 없다고 나의 숨은 능력을 캐내어 주려고 애쓴 사람이었다. 그 당시 오고간 편지를 보면 우리의 미래엔 원고지와 책이 가득한 방이 꼭 있었다. 그가 만들어주겠노라고 약속한 나만의 글 쓰는 방이었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그와 만난 지 꼭 20년째되는 오늘, 1998년 9월 23일을 맞는 새벽에 그가 만들어준 나의 글 쓰는 방에서 '첫사랑'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 사랑이란 반추하는 데 그 값짐이 매겨진다고 할 수 있다. 반추하고 싶지 않은 사랑은 먼 훗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려질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아무리 다른 기억들과 섞어놓아도 부르면 제일 먼저 달려나오는 게 사랑의 기억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는 누구나 숨차면서도 나직한 두 개의 목소리를 갖게 된다. 더욱이 '첫사랑을 말하라'하는 지금 첫사랑과 결혼하여 15년째를 살고 있는 나로서는 가슴 저미는 헤어짐을 말할 나직한 목소리는 갖지 못했지만, 시간을 거꾸로 돌려 새하얀 교복 칼라의 여고 2년생으로 돌아가는 길만으로도 숨이 차 글을 쓰는 내내 가슴에선 기적소리가 울렸다. 다시 20년이 흘러 어떤이가 내게 '마지막 사랑'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어떤 글을 쓰게 될까? 운명이었다고, 벼락이었다고, 아니아니 지독한 갈증으로 핀 암갈색 풀꽃이었다고, 벼락이었다고, 아니아니 지독한 갈증으로 핀 암갈색 풀꽃이었다고 슬까? 시간은 나를 어디에 붙들어 놓을까? 헤르만 헤세의 글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즐기는 힘과 기억하는 힘은 서로서로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하는 까닭은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늘 설레일 수 있는 즐거움이 생을 풍요롭게 하고 귀하게 한다는데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라.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황금빛의 후광은 캄캄한 밤에도 꺼지지 않는다. 미세한 울림에도 상대의 기척을 감지해내는 초고속 레이다망이 그의 가슴속에서 24시간 맹렬하게 작동하는 행복한 불면의 밤에 그는 초대받은 손님인 것이다. 첫사랑이란 태어나서 처음 느낀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그 의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덜 자란 여자아이의 속살처럼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조금은 애매한 기호 같은 것, 천진성이 내포된 마알간 시냇물 같은 투명한 시절에 찾아온 설레임이라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의 자아가 그리는 첫 그림인 것이다. 나는 첫사랑과 살고 있다. 때문에 이루지 못한 첫사랑처럼 먼 옛날 사랑에 대한 동경이나 아련한 그리움 같은 건 간직할 여유를 갖지 못했다. 이별의 아픔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의 실체를 다 경험했다고도 할 수 없다. 완전한 사랑이란 이별까지도 포함된 것이라는 말에 공연히 주눅들 때도 많다. 하지만 나를 보듯 들여다볼 수 있는, 그래서 참 오래 된 친구 같은 첫사랑과의 결혼생활은 많은 느낌의 공유라는 정신적 안정을 주고 있다. 어쩌다 마음이 비어 쓸쓸한 날, 오래된 사랑 하나 불러보고 싶은 날, 나는 남편에게 공연한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우리가 만약에 헤어졌다면 절절하게 그리운 이름을 갖게 됐을 텐데 난 이게 뭐야? 열여덟 살 때 만난 남자와 지금껏 살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인 줄 알아?" "아직도 내가 병적으로 좋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일기장 보여줘요?" "무기야 무기. 당신 일기장은." 1981년 4월 12일 햇빛 조금, 구름 많이, 바람 살살. 흐느적거린다. 전신에 기운이 없다. 차라리 죽어버렸음 하고 느낄만치 지금 난 아프다. 바다가 왔다. 낮에 학교에서 우리집으로 전화했을 때 엄마로부터 내가 아프다는 말씀을 듣고 그는 내게로 암표를 끊어 달려온 것이다. "난 말야. 석화를 너무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 같애." "그럼 안 되는데? 병이 나으면 안 좋아할 것 아녜요?" "그럼 건강적으로 좋아해." "치, 그런 게 어딨어?" 아!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길래 이토록 내게 따스한 빛으로만 몰려오는가? 첫사랑이란 내게는 환상이 아니다. 목메이게 부르고 싶은 이름도 아니다. 우연히라도 만나고 싶어 거리를 헤메이게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와 함께 있다. '바다'라고 호명했던 20년 전의 그날부터. - 서석화 1961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1992년 '현대시사상' 신인상에 '수평선의 울음'외 8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을 위한 아침'이 있고, 산문집으로 '죄가 아닌 사랑'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가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권대웅 - 하늘빛 남루한 사랑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 두 번 보다가 울었습니다. 성탄절. 오래 울리지 않는 전화벨 소리 기다리기 싫어 코드를 뽑아버렸습니다. 잘라도 잘라내버려도 마음속에 자꾸 그리운 혹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그럴 때는 뜨거운 물 속에 몸을 푹 담그는 것이 최고입니다.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때면 숨이 터지도록 뒷산공원까지 뛰어갑니다. 너무 숨이 차 눈물이 찔금 나는 하늘 멀리 황금빛 노을이 지고 나는 공원 입구에 우두커니 서서 가문비나무숲 사이로 지는 햇빛을 바라봅니다. 때로 눈부시고 설레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두근거림 때문입니다. 오래 혼자 있어도 될 것 같습니다. 내 마음 속에 당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등뒤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집니다. - 시 "블루 슈 다이어리" 전문 한 뼘 담장 높이 위로 지친 해바라기가 고개를 숙였을 때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보니 가을이었다. 까만 눈동자를 야물딱지게 뜨고 담장위로 올라가던 나팔꽃이 나를 보고 다 안다는 듯이 빨갛게 웃고 있었다. 가을이 왔다. 가을이. 언제나 가을이 오면 슬쩍 등뒤로 불어오는 한기와 함께 내 기억의 창문 하나가 열려지고 그 창문 속에서 그녀의 냄새가 나곤 한다. 그것은 양파냄새 같기도 하고 혀 끝에 떨어지는 식초 한 방울의 짜릿한 느낌 같기도 하고 텃밭에서 퍼져오는 깻잎냄새 같기도 하고 밤하늘에 빛나는 아픈 박하사탕 같기도 하다. 내 기억 깊숙한 곳에 어두운 집으로 남아 있다가 가을바람이 불면 문을 여는, 잠깐 불을 켰다 끄는 낮고 적막한 집. 나는 천천히 그 집 속으로 걸어간다. 그 집의 문을 열어본다. 그 집은 서울에서 가까운 산꼭대기에 있었다. 종점에서 내려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산동네 사람들이 자급하려고 심어놓은 고추며 상추, 깻잎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그 텃밭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스물 한 개의 계단이 있었고, 계단을 모두 다 올라가 세 걸음 뒤에 하늘색 나무대문집이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져 얼룩진 하늘색 나무대문집 문간방에서 그녀와 나는 별똥별처럼 짧고도 잊지 못할 한 달을 살았다. 그녀는 집을 도망쳐 나왔고 나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그녀와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 열심히 직장생활을 해야 했다. 서울 지리에 익숙하지 못했던 그녀는 내가 퇴근해서 돌아올 때까지 방안에서 한 발자국도 꼼짝 않고 있오T고, 나는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퇴근하면 서둘러 그 산동네 집으로 달려가곤 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너무 바빴고 야근하는 날이 많아 그녀와 자주 있지 못했지만 내 머리 속은 온종일 그녀가 지키고 있을 방과 그녀의 근심스러운 눈을 생각했다.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그녀의 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아버지가 해군장교인 탓에 자주 이사를 다녔고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그녀와 내가 20년 만에 만난 것은 직장일 관계로 자주 부산을 오갔던 때였다. 그녀는 나를 금세 알아보았다. '너 그때 전학갔던." 짝이었던 그녀를 나도 쉽게 알아보았다. 토요일마다 나는 부산에 갔었고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그녀와 헤어진 일요일밤 11시 50분 기차를 타고 서울로 왔다. 초등학교 때 헤어졌던 짝과 다시 만나게 되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성장해서 만난 연인과는 다른 즐거움과 따뜻함이 있다.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의 어렸을 적 표정을 발견하면서 묘하게도 나는 나의 어렸을 적 얼굴을 찾아내곤 하는 것이다. 구구단, 풍금소리, 연탄난로, 도시락.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녀보다 먼저 떠오른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참, 동화 같았던. "밥 굶기기 십상이지 어디 글쟁이 하고." 집 앞에서 만난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길로 집을 나와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늦은 밤 집으로 들어가면 때로 잠들어 있던 그녀, 흔적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울었을 그녀의 사레 섞인 숨소리가 나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이런 게 아니라는, 헤어지게 될 것 같다는 불안감들이 몰려왔다. 그런 강박관념들이, 불안감들이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만들었다. 피곤했지만 두근거렸기 때문에, 설레었기 때문에 나는 만원버스를 탈 수 있었고 야근을 할 수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우리는 부산의 광안리나 해운대가 아닌 산동네 언덕길과 뒷산을 거닐며 놀았다. 옆집 아줌마가 심어놓은 텃밭에 고추와 호박을 따다가 된장찌개도 끓이고 호박전도 부쳤다. 그 산동네에는 꽤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초등학교가 있었다. 초등학교 담장 옆으로 길게 코스모스 길이 나 있고 아이들이 뚫어 놓았을 법한 개구멍도 있었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저녁을 먹고 그녀와 나는 그 길을 자주 산책했다. 천천히 뒤를 따라오던 그녀가 가끔 먼발치에서 멈춰 서 있곤 하였다. 아주까리 넓은 잎사귀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방 어둑어둑 번지는 어둠사이로 그녀의 슬픔도 번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울까' 아주까리 나뭇잎사귀 사이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 라고 나는 힘주어 말했지만 그녀는 내가 다가갈 때까지 끝내 잎사귀에 얼굴을 감추고 서 있었다. 하늘색 나무대문집으로 올라가는 계단 아래서 그녀는 울었다. 나보다 그녀가 더 힘들어했다. 용기 있게 저질렀지만 우리를 그렇게 벅차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머리 위에 아득한 미래였을까. 누가 스무살 나이가 절망할 수 있어 아름다운 나이라고 말했는가. 그 집 문간방에는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 그러나 그 집은, 그 집으로 가는 언덕과 계단과 우두커니 서 있던 해바라기와 비에 젖던 보안등은 지금 없다. 오직 내 기억 속에 가끔 바람이 불면, 등뒤로 후각과 미각을 건드리며 훅하고 짧게 깻잎냄새 같은 향수가 지나가고 나면 한번씩 문을 열어 그 방을 보여줄뿐. 그 집 방문을 열어본다. 마당에서 문을 열면 한 평 정도의 부엌이 나오고 부엌에서 문을 열면 아주 작고 좁은 방 하나가 보인다. 책상 하나, 비키니 장롱, 이불, 독수리표 소형 녹음기, 걸어놓은 옷가지 그리고는 아무것도 없다. 창문을 열면 해바라기가 보였고 아랫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조금도 쉬지않고 왔다갔다 하는 마당이 보였다. 그 지붕 위로 푸른 군대처럼 호박넝쿨이 기어오르고 있었고 그녀는 내가 없는 빈방에서 창문을 열고 하루종일, 멀리 보이는 서울과 창문아래의 풍경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떠나고 나서 방에 혼자 남아 있게 되면서 그 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불안함과 그리움과 사랑만으로 가득 찬 그 방에서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슬픔과 그리움과 미움으로 가득 찬 그녀가 떠나간 그 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불가능이었다. 늦은 밤 퇴근하고 돌아와서 방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방에 없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어디 갔을까. 말도 없이. 나는 우산을 쓰고 우리가 자주 가던 초등학교 옆 산책길과 언덕길을 그녀를 찾아헤맸다. 늦게, 그녀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날 밤 우리는 싸웠다. 나는 집으로 가버리라고 말했고 그녀는 울면서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그녀를 쫓아가다가 나는 그만 계단에 발을 헛디뎌 발목이 부러졌다.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아니 발목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옆집 아주머니는 텃밭에 왜 그리도 많은 깻잎을 심어놓았는지, 며칠을 그 방에 누어 있는데 열어놓은 방문과 부엌문 사이로 깻잎냄새가 우리가 사는 방을 가득 채웠다. 내 기억의 깻잎냄새 속에는 막막함과 그리움과 가슴 설레임과 신선함 같은 것들이 함께 묻어 있다. 아주머니는 자주 남는다며 한 움큼의 깻잎을 가져다주곤 했다. 그녀는 아주머니에게 부산에서는 깻잎이나 콩잎을 된장독에 심어놓았다가 나중에 꺼내 먹는데, 맛있다며 아주머니의 된장독을 열어 돌 사이에 누른 깻잎을 심어 넣었다. 지금 그녀는 그녀가 된장 깊숙히 묻었던 깻잎처럼 내 기억 속에 그런 향기와 막막함을 갖고 심어져 있다. 우리가 함께 있었던 것도 꼭 한 달 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우리의 집을 찾아낸 것도 꼭 한 달 만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우리집 창문아래 지붕위로 올라가던 호박넝쿨의 푸른 군대처럼 부하 군인 한 명을 데리고 불쑥 나타났다. 비 내리는 저녁이었다. 많이 찾아헤맸는지 우산은 썼지만 등이 다 젖어 있었다. 그는 발목을 다쳐 누워있는 내게로 다가와 나의 빰을 때렸다. 그리고 그녀를 끌고갔다. 나는 깨금발로 그녀가 내려가는 계단을 바라보았다. 기억한다. 그때 계단 맨 아래 그녀가 돌아선 담장 위 불이 켜진 보안등이 빗물에 젖던 모습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오래 나는 그 방에 누워 있었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을이었다. 아파트가 들어서버린 지금 그 언덕, 그 산동네, 그 집은 이제 없다. 따라서 내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다. 내 기억의 먼 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었고 지금도 어느 별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또다시 가을이다. 어느새 각도가 바뀐 햇빛이 방 안 깊숙히 들어와 감춰졌던 구석구석을 비춘다. 문득 늑골이 아프다.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누가 널어놓았는지 마당 앞 골목에 빨간 고추가 너무도 선명한 빛나고 있었다. 그 고추 때문인지 햇빛 때문인지 코끝이 찡하다. 이 살아있음의 살갑게 느껴지는 생의 정면. - 권대웅 196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당나귀의 꿈'이 있고, 장편동화로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전윤호 - 나는 첫사랑을 믿지 않는다 멀리 서 있다 검은 윤곽만 보인다 죽은 숲이 가로막고 눈이 파란 짐승들 어슬렁거린다 우뚝 서 있다 바다가 보인다 한다 능선에 노을이 걸리면 바위들 묵묵히 타오르고 사방 물안개 돋는다 검은 새떼 푸르르 날리며 곡괭이질하고 싶다 광맥에 닿고 싶다 조난당하고 싶다 화석으로 남고 싶다 깊은 벼랑 위로 참나무들이 파수병처럼 서 있는 길이 없는 그녀 시 "그녀" 전문 나는 첫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 과연 내게 첫사랑이 있었단 말인가, 물론 그 동안 첫사랑이었다고 착각할 만한 감정의 충격상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사랑이라 부를 수 있었단 말인가, 사람들은 쉽게 사랑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일들에 대해 무조건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 단정짓는다. 그들에겐 당연히 첫사랑이 있고 마지막 사랑이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맘껏 누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다. 그런데 슬프게도 난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내겐 충분히 사랑이라 부를 만한 느낌이 없는 것이다. 이제 내가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거짓말이라는 걸 충분히 납득했을 것이다. 대신 이렇게 말하겠다. 이것은 첫사랑이 아니라 내가 가장 그런 종류의 감정에 근접했던 첫경험이었다고. 일생에 한 번은 어려운 시기가 있다. 불행에 불행이 겹치고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 평소보다 위축되고 나약해져 쉽게 우울해지는 것이다. 난 대학을 휴학하던 때 그런 경험을 했다. 스물한 살이었다. 그해 간경화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것이다. 아마 그 병이 아니었으면 돌아가신 뒤 한 달 후에 있었던 광산사고 때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의 작업반 동료 대부분이 갱도가 무너지는 바람에 유명을 달리했으니까. 내가 아버지의 장례를 마치고 탄을 실어 나르는 새벽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날 때, 나에게 고향은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던 고향에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당신의 폐에 한 움큼의 탄가루를 쌓으면서 내게 남겨진 돈은 대학을 다니기엔 부족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을 주제도 못 되었고 의무감이나 동정심으로 학비를 대줄 친척도 없었다. 내겐 나 자신이 전부였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무슨 대단히 불우한 처지에 빠진 것 같지만 사실 당시의 내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발목을 잡힐 걸림돌이 하나도 없는 자유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난 그저 나만 돌보면 됐다. 서울로 와서 방을 얻고 나는 천호동에 있는 야간업소에 취직했다. 올림픽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고 나라가 흥청망청하던 때인지라 그쪽에 자리는 많았다. 난 나비 넥타이를 매고 극장식 스탠드 바 입구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어서 옵쇼, 소리지르며 허리를 90도 구부려 인사를 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영업이 끝나고 의자를 탁자위에 올리고 걸레질을 하면 네 시 반, 방으로 돌아와 AFKN 틀어놓고 벽에 기대 잠드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때는 그저 영장이 나올 때까지 대기하는 시간에 불과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몸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어딘가 아픈건 아니었지만 체력이 딸리기 시작했다. 내게 내 몸은 가진 것의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대책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것이 집 근처에 있는 헬스클럽에 나가는 거였다. 지나가다 보면 찐빵처럼 부푼 몸을 한 남자와 수세미처럼 질겨 보이는 몸을 한 여자가 붙어 있는 사진이 눈을 끌던 곳이었다. 자고 나서 출근할 동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러닝머신에서 뛰는 건 쉽지 않았다. 금세 숨이 차고 땀이 줄줄 흘렀다. 남의 눈에 띄는 게 싫어 사람들이 없을 때만 올라갔는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이 되었다. 처음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낸 주의를 끄는 여자가 하나 있었다. 척 보기에도 단단한 근육질의 몸매를 가진 아가씨였는데 하루도 운동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아무튼 내가 가는 날엔 항상 그녀가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전문으로 운동을 하는 여자인 것 같았다. 운동시간도 길어서 보통 두세 시간을 헬스클럽에서 보냈다. 검은 런닝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모자를 눌러 쓴 그녀는 그렇게 몇 달 동안 나와 만났다. 물론 서로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모자를 눌러쓴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난 운동을 할 때도 안경을 써야 할 정도로 시력이 나빴다. 그녀는 한번 달리기 시작하면 30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았다. 어떤 때는 아예 두툼한 잡지책을 보면서 뛰는데 아무리 달려도 지친 기색이 보이질 않았다. 어느 날 내가 터덜터덜 들어오는데 러닝 머신에 있던 그녀가 날 보고 고개를 까딱했다. 난 잘못 봤나 싶어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탈의실로 들어가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난 낭패한 기분에 빠졌다. 이제 어떡한다지 헬스클럽의 입구에는 이런 말이 표어처럼 붙어 있었다. '회원 상호간의 인사는 스포츠맨의 기본입니다.' 빌어먹을 난 스포츠맨이 아니니까. 어색한 표정으로 나오자 그녀는 앞만 보고 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원래 순서대로 하자면 몸을 푼 뒤에 스태퍼를 하고 사이클을 한 뒤에 뛰는 거였다. 하지만 그날은 먼저 런닝머신에 올라갔다. 그녀의 바로 옆이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더구나 내가 오르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속도를 올리더니 달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나도 그녀의 속도에 맞춰 내 기계를 조작하고 함께 뛰기 시작했다. 나도 어느 정도 운동에 이력이 붙기 시작한 때였고 그녀는 이미 운동을 계속하고 있었으니까 내게 불리할건 없다고 계산했다.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면서 나는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미 내 체력은 한계에 도달하고 있는데 그녀는 전혀 지친 기색이 없었던 것이다. 입에서 거친 숨이 나고 온몸이 땀으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먼저 멈출 수는 없었다. 난 필사적으로 버텼다. 이젠 오기 하나로 버틸 뿐이었다. 그러나 25분이 되자 그것도 바닥이 났다. 심장이 터질것만 같았다. 그때 그녀가 내 모습을 힐끗 보더니 속도를 줄였다. 난 얼른 속도를 줄인 뒤에 내렸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해서 탈의실로 들어갔다. 탈의실로 들어가자마자 바닥에 쫙 퍼져 버렸다. 바튼 기침이 나고 온몸이 뜨거웠다. 한참 뒤에 샤워를 하고 나오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오후 세시, 그곳엔 우리 둘만 있었다. 우리는 그날 이후 매일 같은 시간에 그곳에서 만났다. 가장 사람이 적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뛰면서 얘기하고 운동복 차림으로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백지처럼 순진했다. 전라도의 바닷가가 고향이라고 했는데 서울에 올라와 회사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지금은 언니네 가게일을 도와주며 있다고 했다. 이름도 촌스러운 이경순, 그러나 그녀는 나를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강했다. 매사에 확실한 주관이 있고 자신감도 있었다. 그것은 시골에서 자라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점점 말이 많아졌다. 그러자 그녀는 신기해 했다. 처음엔 내가 벙어리나 성격장애자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좀더 다가가기 위하여 노력하지 못한 건 그녀를 꺼려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난 곧 군대에 가야 했다. 난 그저 그녀를 헬스클럽에서 매일 만나는 것에 만족하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건강한 웃음과 순진함이 좋았다. 그러나 어느새 난 그녀에게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어느 날 밤 그녀의 꿈을 꾸다가 깨어서 난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빠지는 일은 얼마나 두려운 사건인가. 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거나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보는 감정을 억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일하던 곳이 미성년자를 접대부로 고용했다는 이유로 영업정지를 먹었다. 본의 아니게 실직자가 된 웨이터들끼리 송별회를 열었다. 1차가 가고 2차가 되자 자연히 나이가 비슷하고 통하는 팀들끼리 남게 되었다. 그날은 나도 많이 마셨다. 곧 입대하라는 영장이 왔던 것이다. 3차가 되자 누군가 제안했다. 각자 애인을 부르자고, 못 부르는 사람이 술값을 내기로 했다. 난 취중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그녀가 왔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운동복만 입은 모습만 보다가 처음 본 그녀의 성장한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는 표현은 물론 내 주관이 많이 들어간 과장이었지만 아무튼 그녀는 축 처진 나를 대신해 술을 마시고 동료들과 스스럼없이 부르스도 추었다. 참 내, 난 투덜거렸다. 전에 그녀가 "전 소주 세 잔만 마시면 가버려요" 하고 웃던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갑자기 그녀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얼른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밤 세 시였다. "아니, 술도 잘 마시지 못한다는 사람이 웬 술을 그렇게 마셨어요?"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이왕 나왔으니 분위기는 깨지 말아야 하잖아요." "참 이상해요, 밖에서 보니까 전혀 다른 사람 같아요" "왜요? 제가 좀 이상하게 굴었나 보죠?" 그녀가 나를 보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녀의 입을 막고 말았다. 천호동의 골목에서 전신주에 기대어 한 내 일생에 첫 번째 키스였다. 나는 떨고 있었다. 화를 내면 어쩌나. 그러나 그녀는 내 품에 폭 안겨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혀를 내밀었다. 난 다리가 떨려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술을 취하도록 마신 것이 후회스러웠다. 온전한 정신으로 이 순간을 느껴야 하는건데. 나는 얼떨결에 바보처럼 그녀에게 말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1초도 안돼 후회했다. 그녀는 너무도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쓰다 달다 말 한마디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집 앞에서 난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저 곧 군대가요." 그러자 그녀는 씩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요? 잘 다녀오세요." 그날 이후 난 운동을 끊었다. 그리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워버렸다. 입대하던 날 가장 친하게 지내던 동료에게서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까지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잊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역으로 배웅 나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니가 불렀던 그 여자 말이야, 이름이 이주리라며, 동식이가 새로 들어간 업소에 나온다더라. 아, 오늘 같은 날 좀 나오라 그러지. 너도 참."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부대로 편지 한통을 보냈다.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접촉이었다. 너무 순진한 당신에게 겁이 났어요. 잘못하다간 둘 다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가 냉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앞으로 여자의 말을 다 믿지 마세요. 그리고 쉽게 속마음을 털어놓지도 말구요. 사랑은 쉽지 않아요. - 전윤호 1964년 정선에서 태어나서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가 있고, 우화집으로 '한국판 어린 왕자'가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배문성 - 연희 저녁까지 집 앞을 지나간 것은 자전거 한 대, 개 두 마리였다. 그리고 잠시 싸래기눈이 왔다. 노을이 지는지 언덕에 나무 세 그루가 차례로 나타났다. 흰 측백나무, 흰 측백나무, 느티나무, 그리고 저녁이 된 것이다. 전화가 왔다. 벨소리는 노을 속에서 흘러나온다. 한 번, 두 번, 다섯 번, 노을 속으로 전화하는 것이 이렇게 멀다. 가마득히 나는 네 목소리에 담겨 있다. 붉은 외등이 켜지는 동안 목소리가 사라진다. 꾸부정하게 서 있는 그림자를 핥으며 바람이 지나간다. 겨울이 다 가고서야 나는 왜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까. 나는 왜 아무도 나를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을까. 사실 나는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몰두해 있었다. 내가 너를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내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지 않는 것은 너뿐이 아니다. 찾을 수 없었다. 아니면 오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찾지 않은 것인가. 우리가 찾아낸 것은 느낌이었다. 느낌이라. 찾아가지 않을 것. 보지 않을 것. 만나지 않을 것. 기다리지 않을 것. 듣지 않을 것, 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 철저하게 사라지지 말 것. 기미를 남겨둘 것. 자전거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버린 모든 사람이 그리워진다. 시"노을의 집"전문 그때가 제일 어중간한 시간이었다. 계획대로 살아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있을는지. 계획 없이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무엇을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에는 시간이 넘쳐나는 어중간한 사이에 우리는 놓여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시험쳐 놓은 대학에 가지 않고 있었다. L은 자원입대신청을 해서 군대에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다 뭔가 이뤄지지 않아서 답답했고 무엇인가 하고 싶었지만 시작하기에는 남겨진 시간이 짧았다. L의 집은 대가족이었다. 집 나간 아버지를 빼고도 4대가 모여 살고 있었다. 어머니 혼자 집안일을 다 꾸려나가고, 위로 거의 거동을 못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수발에 하루 해를 다보내는 할머니, 결혼해서 애기 둘은 모친에게 맡기고 1년에 두서너 번씩 집안을 들락날락하는 맏형 가족. 아직 학교 다니는 두 여동생, 저능아인 바로 윗형. 그리고 멀리 스페인에서 혼자 돌아온 고모까지. L의 말로는 인구 센서스 조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집안이었다. 거기에 지난 가을부터 나까지 껴붙어 있었다. 하긴 워낙 들락거리는 식구가 많은 집안이어서 그런지 객식구 하나 곁붙어 있었도 아무도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행랑에 머슴 하나 들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때였다. 우리의 행랑은 집 한가운데 있는 부엌 위에 달아 만든 다락방이었다. 난방기구 하나 없었지만 부엌에서 나오는 온기로 겨울을 보내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 내가 그 집에서 거의 5개월여를 지냈는데도-지냈다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L의 집안 식구와 얼굴이 마주친 것은 손꼽을 정도였다. 그러니 식구들은 아마 내가 한번씩 놀러온 정도로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우리가 다락방으로 숨어드는 시간은 대개 통금이 끝나고도 한두 시간이 지난 새벽 한두 시경이었으며, 대충 훤한 대낮이 되어야 집을 새나갔다. 그 시절에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별로 기억이 없다. 아마 우리는 별말을 했던 것 같지 않다. 하루종일 붙어다녔지만 각자 가지고 있던 어중간한 시간과 그 틈에 끼어 있는 사건들을 '째보려는 것'만으로도 우린 신경이 피로했다. 그때 우리는 길고 긴 하루를 무엇으로 채웠던가. 동래 시장통 한가운데, 옥샘다방이라고 있었다. 점심 무렵 L의 집을 나온 우리는 그때서야 문을 여는 옥샘다방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모닝 커피'를 시켜놓고. 연희라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아주 우아하게 생긴 마담 언니와 둘이서 다방을 꾸려나갔다. 연희는 갓 스물을 넘겼을 나이인데도 야릇한 교태를 천생으로 듯이 다방을 휘젓고 다녔다. 시장통의 젊으나, 늙으나 거친 장돌뱅이 상인들은 오로지 연희를 보려고 찻집에 온다는 것이다. 연희는 옥샘다방의 스타였다. 연희의 팬들은 그녀의 다소 과장된 콧소리 한번 짧은 몸짓에도 오금을 펴지 못하고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어쩔 줄 몰랐다. 그럴수록 연희는 제 애비뻘은 됨직한 다방 손님이 사촌동생이나 되는 듯이 썩 반말로 건드리고 어르는 것이 프로급이었다. 보통 밤 10시면 문을 닫는 다방이 통금시간이 되도록 문을 닫지 않을 때는 대개 연희와 어떻게든 하룻밤을 '보내려고' 연희를 기다리는 패가 죽치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우리의 연희는 외박을 하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들었다. 우리는 연희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우아한 마담 언니에게서 전해들었다. 실제로 우리는 옥샘다방을 출입하는 고정 멤버들중에서 연희에게 관심이 없는 거의 유일한 그룹이었다. 아니 그때 우리가 무엇에 그렇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없었다. 연희보다 더한 절색이 있었어도 다시 아픈 춘사를 펼치고 가다듬기에는 시간도 마음도 다함께 짧고 절박했다. 마담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에게 연희의 전적을 보고 했다. 몇 놈이 또 늘었다. 오늘은 몇 놈이 물먹을 거야. 아주 몇 놈은 연희 때문에 맛이 갔어. 등등등등등 마담은 우리도 연희에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야말로 연희에게 관심이 없어보이는 안전한 동네라고 생각했는지 시시콜콜 연희의 하루 구력을 알려줬다. 마담과 연희는 꽤나 이상한 아니면 아주 합리적이 공생관계를 유지했다. 내가 보기에는 연희보다 훨씬 우아하고 아름다운 마담은 젊고 싱싱한 연희의 인기를 시기함 직도 했다. 마담은 연희 때문에 골치아파 죽겠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러나 연희는 옥샘다방의 '돈줄'이었으며 차 팔아주는 '인기상품'이었다. 상품관리는 마담의 몫이었으며 그것이 마담의 골치덩어리였다. 마담이 할 일은 연희에게 들어붙는 암내 맡은 수컷들을 매일밤 떼어내는 거였으며, 연희에게 과도하게 손장난을 치는 남정네를 남새스럽지 않도록 물리쳐주는 거였다. 마담의 상품관리는 논리에 따르면 연희가 외박을 하지 때문에 저것들이 저렇게 법석을 떤다는 거였다. 만약 연희가 외박한다는 소문이 나면 이 좁은 시장통에서 반나절이면 짜르르 전시장이 다 알 거라는 거였다. 연희의 인기는 그녀의 교태, 목소리, 능숙한 화술에도 있지만 결정적이 것은 '안 주는 데' 있다는 거였다. 우리는 마담 언니를 통해서 연희의 하루 일과를 꿰뚫고 있었지만 근 반년에 이르는 옥샘다방 출입기간 동안 연희와 간단한 대화라도 해본 기억이 없다. 물론 연희는 제 풀에 깐죽거리는 붙이들 상대하기에도 안중에도 없어 하는 우리에게 말이나 한번 붙일 겨를이 있겠는가. 우리의 연희는 스탄데. 그때 그 1997년이 저물던 12월 31일, 통금이 없던 날만 빼고. 그날도 마담은 연희 때문에 겪은 온갖 해프닝을 길게 풀어 놓고 있었다. 한 마디가 끝날 때마다 머리가 찌근찌근 하다는 등, 저 × 때문에 자기가 10년은 먼저 간다는 등. 마담의 댓거리는 모두 자신의 돈줄인 연희를 향한 것이었지 그 문제 '원인제공자이기도 할 × 달린 놈'들에게는 단 한 번도 보내진 적이 없었다. 마담의 말에 따르면 연희는 그날 좀 '오버'했다. 망년회다 뭐다 하니까 오늘 매상을 팍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이놈저놈 권하는 '티'를 삼켰다. 홍차 속에 몇 방울 떨어트린 독한 화학주에 연희는 취했다. 거의 자정이 되어서야 다방에 들어선 우리 눈에도 연희는 맛이 가 있었다. 연희의 코맹맹이는 더욱 엉겨 있었다. 예나 오늘은 뿌리를 뽑겠다는 듯이 다방에서 차 대신 엉터리 위스키로 취한 몇몇 팀이 죽치고 있었다. 아예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연희를 끌고가려는 자도 있었다. 그 자는 대단한 결심을 온 다방에 공표하며 아예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마담의 한숨과 시기, 질투가 뒤범벅된 연희 성토를 시간여나 듣고 난 우리는 한잔 더 하러 나섰다. L이 새해 첫 달에 입대한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의미심장케 했다. 다방 문을 나서면 꺽어지는 골목이 있다. 거기에 작은 가게가 있는데 우리가 행랑에서 새벽 언제나 술 고프면 문 두드릴 수 있는 집이었다. 그날 아직 덜 취한 속을 채우려면 소주 몇 병이 더 필요했다. 그런데 그 가게집 작은 간판 아래에 연희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연희는 자기를 오늘 좀 데려가 달라는 거였다. 우리는 우선 서로 얼굴을 마주 댔다. 나? 아니면 나? 연희는 취하지 않았다. "오늘 해결 돼요? 안돼요" 연희는 마치 횡재라도 안겨주려는 듯한 태도였지만 미안하게도 우리는 당황스럽고 난감했다. "우리 술마시려 가려는데." 우리가 어쩌려고 연희를 데리고 술 마시러 갔는지 모르겠다. 연희는 어쩌려고 우리와 술 마시러 L의 집 다락방 우리의 행랑에까지 좇아왔는지 모르겠다. 연희는 오늘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벼르는 그 자에게 옷 갈아 입고 오겠다며 달래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그 자는 지금도 다방에서 죽치고 있을 거라고 낄낄거렸다. 그리고 내일부터 옥샘다방에 나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는 순간 참으로 바보스럽게 물었봤다. "왜 가게 앞에 있었어?" 연희는 들었는지 소주만 털어넣었다. 아마 연희가 먼저 잠들었던 것 같다. 그녀는 몇 잔 마시지 않았다. 우리는 남은 술을 마저 먹었다. 그리고 나는 한쪽 옆에 쓰러져 잤다. L은 입대하는 것이 차라리 홀가분하다고 했다. 머리를 박박 깍은 L은 정말 어떤 변화 앞에 기대에 차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L이 부럽기도 했다. 정말 L은 이제 어중간한 시간을 깨뜨리고 무엇이 될 수 있는 출발점에 서 있는 듯이 보였다. 입대는 동래역에서 했다. 플랫폼에서 우리는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 혼자 남겨진 시간을 절감하고 있었다. 게다가 앞으로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당시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미결정의 시간 속에 내가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L은 이제 들어가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왜 눈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나는 서러웠다. 군대 가는 L을 부러워해야 하는 내가 서러웠고, 군대 가는 것도 기꺼워해야 할 만큼 절박한 L이 서러웠다. 아주 부끄웠지만 나는 눈물이 줄줄 나왔다. 도리어 L이 당혹해 하는 것 같았다. "임마, 너 때문에 우는 것 아니니까 신경 꺼!" L은 제가 날 위로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씩씩하게 기차를 타야 하는지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연희가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연희는 김밥까지 싸서 L의 앞에 서 있었다. 줄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나는 미처 못 본 것 같았다. 연희는 L의 손을 꼭잡고 말하고 있었다. "나 다시 옥샘다방에 나가. 휴가 나오면 들러." 우리의 행랑시절은 그렇게 끝났고 L이 그날 행랑에서 연희와 무슨 일을 벌였는지, 또 휴가 나와서 옥샘다방에 들렀는지, 그때까지 연희가 옥샘다방에 있었는지 우리는 이야기한 적이 없다. - 배문성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문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2년 월간 시지 '심상' 으로 등단. 시집으로 '당신들 속으로'를 펴낸 바 있다. 현재 문화일보 문화부에 근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