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굽는 남자 별이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감나무 아래서 서로의 등을 기대고 서서 하늘을 보았다. 그때 내가 바라보는 하늘 쪽에 길게 유성 하나가 흘렀다. “야, 별똥별이다.” 하지만 아내는 별똥별을 보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결국 별똥별을 찾지 못했다. 더 기다려 보자고 하자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보았으니 본거나 다름없어.” 무심코 아내는 그 말을 했겠으나 별똥별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듯 시리고 아프고 저려왔다. 젊은 날 나는 시를 쓰네, 교육운동을 합네, 들꽃탐사를 가네, 하면서 동인 모임이니 토론회니 집회니 회의니 하면서 집을 비우고 퍽이나 돌아다녔다. 더러는 해외까지 나다녔다. 그동안에 아이들은 다 커서 대처로 떠났다. 가끔 아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만류하거나 반대할 때면 아내는 “자기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으면서….”라고 말끝을 흐릴 때가 있다. 시골 생활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아내를 데리고 지리산 아래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온 것도 그렇다. 그랬다. 돌아보면 아내를 볼모로 난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살아왔다.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유보하거나 포기하며 내 공백을 메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별똥별을 본 것이 마치 자기가 본 것처럼, 혹은 내가 들꽃을 보고 오면 자기가 본 것처럼 제 가슴속에 천국을 그리며 대리 만족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궁이에 장작을 몰아넣고 군불을 땐다. 시골로 이사온 후로 겨울이면 나는 나무를 구해다가 구들을 달구고 잠을 잔다. 아내는 설설 끓도록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불을 다 땔 무렵 숯이 몽그라지면 난 잦아든 잉걸불 속에 고구마를 넣어 구울 것이다. 아내는 군고구마를 좋아한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불을 때고 나서 구운 그 고구마를 좋아한다. 시를 쓴다 했으나 높은 이름 같은 것은 얻지도 못했고 승진은 일찌감치 포기하여 어떤 직함도 얻지 못했다. 이래저래 번 것보다 더 많이 썼는지 쌓아놓은 돈도 없다. 내가 '아내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군불을 때는 것과 고구마를 구워주는 일 같은 것밖에 없다. 좀스럽다 해도 그렇다. 나는 오늘도 지난날 헛된 욕심과 내 허물을 불살라 군불을 때고 고구마를 구워 아내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줄 것이다. 복효근 님|시인 -《행복한동행》2011년 3월호 별이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감나무 아래서 서로의 등을 기대고 서서 하늘을 보았다. 그때 내가 바라보는 하늘 쪽에 길게 유성 하나가 흘렀다. “야, 별똥별이다.” 하지만 아내는 별똥별을 보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결국 별똥별을 찾지 못했다. 더 기다려 보자고 하자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보았으니 본거나 다름없어.” 무심코 아내는 그 말을 했겠으나 별똥별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듯 시리고 아프고 저려왔다. 젊은 날 나는 시를 쓰네, 교육운동을 합네, 들꽃탐사를 가네, 하면서 동인 모임이니 토론회니 집회니 회의니 하면서 집을 비우고 퍽이나 돌아다녔다. 더러는 해외까지 나다녔다. 그동안에 아이들은 다 커서 대처로 떠났다. 가끔 아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만류하거나 반대할 때면 아내는 “자기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으면서….”라고 말끝을 흐릴 때가 있다. 시골 생활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아내를 데리고 지리산 아래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온 것도 그렇다. 그랬다. 돌아보면 아내를 볼모로 난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살아왔다.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유보하거나 포기하며 내 공백을 메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별똥별을 본 것이 마치 자기가 본 것처럼, 혹은 내가 들꽃을 보고 오면 자기가 본 것처럼 제 가슴속에 천국을 그리며 대리 만족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궁이에 장작을 몰아넣고 군불을 땐다. 시골로 이사온 후로 겨울이면 나는 나무를 구해다가 구들을 달구고 잠을 잔다. 아내는 설설 끓도록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불을 다 땔 무렵 숯이 몽그라지면 난 잦아든 잉걸불 속에 고구마를 넣어 구울 것이다. 아내는 군고구마를 좋아한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불을 때고 나서 구운 그 고구마를 좋아한다. 시를 쓴다 했으나 높은 이름 같은 것은 얻지도 못했고 승진은 일찌감치 포기하여 어떤 직함도 얻지 못했다. 이래저래 번 것보다 더 많이 썼는지 쌓아놓은 돈도 없다. 내가 '아내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군불을 때는 것과 고구마를 구워주는 일 같은 것밖에 없다. 좀스럽다 해도 그렇다. 나는 오늘도 지난날 헛된 욕심과 내 허물을 불살라 군불을 때고 고구마를 구워 아내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줄 것이다. 복효근 님|시인 -《행복한동행》2011년 3월호 별이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감나무 아래서 서로의 등을 기대고 서서 하늘을 보았다. 그때 내가 바라보는 하늘 쪽에 길게 유성 하나가 흘렀다. “야, 별똥별이다.” 하지만 아내는 별똥별을 보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결국 별똥별을 찾지 못했다. 더 기다려 보자고 하자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보았으니 본거나 다름없어.” 무심코 아내는 그 말을 했겠으나 별똥별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듯 시리고 아프고 저려왔다. 젊은 날 나는 시를 쓰네, 교육운동을 합네, 들꽃탐사를 가네, 하면서 동인 모임이니 토론회니 집회니 회의니 하면서 집을 비우고 퍽이나 돌아다녔다. 더러는 해외까지 나다녔다. 그동안에 아이들은 다 커서 대처로 떠났다. 가끔 아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만류하거나 반대할 때면 아내는 “자기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으면서….”라고 말끝을 흐릴 때가 있다. 시골 생활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아내를 데리고 지리산 아래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온 것도 그렇다. 그랬다. 돌아보면 아내를 볼모로 난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살아왔다.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유보하거나 포기하며 내 공백을 메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별똥별을 본 것이 마치 자기가 본 것처럼, 혹은 내가 들꽃을 보고 오면 자기가 본 것처럼 제 가슴속에 천국을 그리며 대리 만족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궁이에 장작을 몰아넣고 군불을 땐다. 시골로 이사온 후로 겨울이면 나는 나무를 구해다가 구들을 달구고 잠을 잔다. 아내는 설설 끓도록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불을 다 땔 무렵 숯이 몽그라지면 난 잦아든 잉걸불 속에 고구마를 넣어 구울 것이다. 아내는 군고구마를 좋아한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불을 때고 나서 구운 그 고구마를 좋아한다. 시를 쓴다 했으나 높은 이름 같은 것은 얻지도 못했고 승진은 일찌감치 포기하여 어떤 직함도 얻지 못했다. 이래저래 번 것보다 더 많이 썼는지 쌓아놓은 돈도 없다. 내가 '아내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군불을 때는 것과 고구마를 구워주는 일 같은 것밖에 없다. 좀스럽다 해도 그렇다. 나는 오늘도 지난날 헛된 욕심과 내 허물을 불살라 군불을 때고 고구마를 구워 아내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줄 것이다. 복효근 님|시인 -《행복한동행》2011년 3월호 별이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감나무 아래서 서로의 등을 기대고 서서 하늘을 보았다. 그때 내가 바라보는 하늘 쪽에 길게 유성 하나가 흘렀다. “야, 별똥별이다.” 하지만 아내는 별똥별을 보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결국 별똥별을 찾지 못했다. 더 기다려 보자고 하자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보았으니 본거나 다름없어.” 무심코 아내는 그 말을 했겠으나 별똥별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듯 시리고 아프고 저려왔다. 젊은 날 나는 시를 쓰네, 교육운동을 합네, 들꽃탐사를 가네, 하면서 동인 모임이니 토론회니 집회니 회의니 하면서 집을 비우고 퍽이나 돌아다녔다. 더러는 해외까지 나다녔다. 그동안에 아이들은 다 커서 대처로 떠났다. 가끔 아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만류하거나 반대할 때면 아내는 “자기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으면서….”라고 말끝을 흐릴 때가 있다. 시골 생활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아내를 데리고 지리산 아래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온 것도 그렇다. 그랬다. 돌아보면 아내를 볼모로 난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살아왔다.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유보하거나 포기하며 내 공백을 메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별똥별을 본 것이 마치 자기가 본 것처럼, 혹은 내가 들꽃을 보고 오면 자기가 본 것처럼 제 가슴속에 천국을 그리며 대리 만족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궁이에 장작을 몰아넣고 군불을 땐다. 시골로 이사온 후로 겨울이면 나는 나무를 구해다가 구들을 달구고 잠을 잔다. 아내는 설설 끓도록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불을 다 땔 무렵 숯이 몽그라지면 난 잦아든 잉걸불 속에 고구마를 넣어 구울 것이다. 아내는 군고구마를 좋아한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불을 때고 나서 구운 그 고구마를 좋아한다. 시를 쓴다 했으나 높은 이름 같은 것은 얻지도 못했고 승진은 일찌감치 포기하여 어떤 직함도 얻지 못했다. 이래저래 번 것보다 더 많이 썼는지 쌓아놓은 돈도 없다. 내가 '아내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군불을 때는 것과 고구마를 구워주는 일 같은 것밖에 없다. 좀스럽다 해도 그렇다. 나는 오늘도 지난날 헛된 욕심과 내 허물을 불살라 군불을 때고 고구마를 구워 아내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줄 것이다. 복효근 님|시인 -《행복한동행》2011년 3월호 별이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반짝이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감나무 아래서 서로의 등을 기대고 서서 하늘을 보았다. 그때 내가 바라보는 하늘 쪽에 길게 유성 하나가 흘렀다. “야, 별똥별이다.” 하지만 아내는 별똥별을 보지 못했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결국 별똥별을 찾지 못했다. 더 기다려 보자고 하자 아내가 말한다. “당신이 보았으니 본거나 다름없어.” 무심코 아내는 그 말을 했겠으나 별똥별이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듯 시리고 아프고 저려왔다. 젊은 날 나는 시를 쓰네, 교육운동을 합네, 들꽃탐사를 가네, 하면서 동인 모임이니 토론회니 집회니 회의니 하면서 집을 비우고 퍽이나 돌아다녔다. 더러는 해외까지 나다녔다. 그동안에 아이들은 다 커서 대처로 떠났다. 가끔 아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내가 만류하거나 반대할 때면 아내는 “자기는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았으면서….”라고 말끝을 흐릴 때가 있다. 시골 생활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아내를 데리고 지리산 아래 조그만 시골 마을로 이사를 온 것도 그렇다. 그랬다. 돌아보면 아내를 볼모로 난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살아왔다. 아내는 하고 싶은 것을 끊임없이 유보하거나 포기하며 내 공백을 메운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별똥별을 본 것이 마치 자기가 본 것처럼, 혹은 내가 들꽃을 보고 오면 자기가 본 것처럼 제 가슴속에 천국을 그리며 대리 만족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궁이에 장작을 몰아넣고 군불을 땐다. 시골로 이사온 후로 겨울이면 나는 나무를 구해다가 구들을 달구고 잠을 잔다. 아내는 설설 끓도록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는 것을 좋아한다. 불을 다 땔 무렵 숯이 몽그라지면 난 잦아든 잉걸불 속에 고구마를 넣어 구울 것이다. 아내는 군고구마를 좋아한다. 그 무엇보다도 내가 불을 때고 나서 구운 그 고구마를 좋아한다. 시를 쓴다 했으나 높은 이름 같은 것은 얻지도 못했고 승진은 일찌감치 포기하여 어떤 직함도 얻지 못했다. 이래저래 번 것보다 더 많이 썼는지 쌓아놓은 돈도 없다. 내가 '아내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이 군불을 때는 것과 고구마를 구워주는 일 같은 것밖에 없다. 좀스럽다 해도 그렇다. 나는 오늘도 지난날 헛된 욕심과 내 허물을 불살라 군불을 때고 고구마를 구워 아내의 입가에 미소를 그려줄 것이다. 복효근 님|시인 -《행복한동행》2011년 3월호
엄마는 가끔 나에게 커피를 타 달라고 부탁한다. 엄마의 단골 메뉴는 냉커피다. 엄마가 커피를 시키면 나는 300원을 받고 영수증을 써 준 다음, 내가 만든 쿠폰에 도장을 콱 찍어 준다. 도장 10개를 모으면 어떤 차든 공짜로 먹을 수 있다. 엄마는 벌써 10개를 다 모아서 공짜로 녹차를 마셨다. 냉커피는 뜨거운 커피보다 타는 법이 복잡하다. 나만의 냉커피 비법이 있는데, 그건 찬물을 곧바로 넣지 않는 것이다. 먼저 물을 조금 끓이고 컵에 조그만 스푼으로 설탕 두 스푼과 커피 한 스푼을 넣는다. 끓인 물을 설탕과 커피가 잠길 정도로 붓고, 잘 섞이게 저어 준 다음 찬물을 붓는다. 커피에 보리차를 넣으면 맛이 없다. 정수기 물처럼 투명한 물을 넣어야 한다. 또 연유 두 스푼을 넣고 힘차게 저은 다음, 마지막으로 얼음 다섯 개를 넣는다. 엄마는 냉커피를 마시면서 “우리 세화가 탄 커피가 제일 맛있다.” 하고 칭찬해 주시는데 그럴 때면 기분이 뿌듯하다. 처음엔 커피 한 잔에 250원이었다. 하지만 냉커피 타는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250원이면 거의 공짜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도 가격이 너무 싸다고 하셔서 냉커피는 300원으로 올렸다. 난 커피값을 모아 엄마에게 선물을 사 드리려고 했다. 엄마한테 어떤 게 필요하냐고 여쭤 봤더니 눈썹 그리는 화장품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그런데 돈이 너무 늦게 모여서 엄마가 벌써 사 버렸다. 이번에 돈을 모으면 스킨과 로션을 사 드릴 것이다. 내가 산 화장품을 바르고 엄마가 더 예쁘고 젊어지면 좋겠다. 양세화 | 부산 양천 초등학교 4학년 - 어린이좋은생각《웃음꽃》2011년 03월호
당신은 사랑이 위안이라고 말했습니다. 위안을 주지 못하면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사랑은 열정이라고 말했습니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나는 당신을 종종 다그쳤고, 당신은 그때마다 알 수 없는 미소로 대답하곤 했지요. 지금 생각하니 내가 바란 것이 당신의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사랑한다는 말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당신이 먼저 이별을 고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별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당신은 내가 더 이상 위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렇게 빨리 내 곁을 떠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망설임도 없이 돌아서는 당신이 낯설고 무서워서 차마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이별을 알지 못했습니다. 멀리 떨어져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거라 믿었습니다. 사실 나는 당신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종종 이별을 꿈꾸곤 했더랬습니다. 영영 이별이 아닌 낮잠과 같은 이별 말입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진다 해도, 우리는 언젠가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낯선 고장의 기차역이나 횡단보도 한가운데 같은 곳에서 말입니다. 그런 날에 우리는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을 거라 상상했습니다. 내가 이별을 상상했던 것은 어쩌면 그 극적인 포옹의 순간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내가 당신을 다시 떠올린 것은 이국의 어느 기차역에서였습니다. 국경 근처의 작은 역 플랫폼. 거기서 나는 그동안 무수히 머릿속으로 그려 오던 장면을 보았습니다. 조각상처럼 꼼짝도 않고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고 있던 남자와 여자. 나는 그들이 싸움을 하는 것인지, 이별 의식을 치르는 것인지, 아니면 오랜 헤어짐 끝에 재회를 한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이 어떤 제스처라도 해 주길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서 있기만 했습니다. 마음이 급했습니다. 실은 그들이 이별을 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고약한 심보가 생기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출발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신호라도 되듯 여자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한 줄기. 그리고 여자의 어깨에 무너지듯 얼굴을 파묻은 남자. 그들은 그렇게 또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여자와 머리를 파묻은 남자.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 여자의 손이 남자의 등 뒤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기차에 누가 올라타게 됐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이별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남자의 등을 어루만진 여자의 손길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등을 쓰다듬는 그들은 분명 사랑하고 있는 것일 테지요. 그들은 결코 헤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손이 그립습니다. 《러빙유》에 실린 천운영 님의 <당신의 손이 그립습니다>에서 《러빙유》는 대한민국의 걸출한 필자 45인이 들려주는 달콤 쌉쌀한 러브 에세이집입니다.
살아오면서 실수한 일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완벽주의자인 양 가장했지만 사람이 어찌 실수 없이 살 수 있을까.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지금부터 20년도 훨씬 전의 일일 것이다. 나는 공주교육대학교 부속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대학 윤리과 교수 가운데 K교수님이 있었다. 매우 예의가 바르고 조신하신 성격에 사람을 대함에 있어 소홀함이 없는 분이었다. 길거리나 캠퍼스 안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고개를 깊이 숙이는 것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저만큼 K교수님의 모습이 보이면 이쪽에서 지레 정신을 차리고 짐짓 자세를 가다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쩌면 공주 시내 은행에서 볼일을 마치고 은행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의 일일 것이다. 은행 앞길에서 그 K교수님과 딱 마주쳤다. 나는 보통 때처럼 K교수님 앞으로 다가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그때 머리에서 불이 번쩍 튀도록 자극이 왔다. '딱!' K교수님의 이마와 내 이마가 정면으로 부딪힌 것이다. 그와 내가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머리를 깊숙이 숙인 것이 화근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얼얼한 머리를 들어 올리며 K교수님에게 사과를 해야만 했다. “제가 너무 고개를 많이 숙여서 죄송합니다.” 그건 사과의 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생뚱맞고 궁색한 변명이었다. 그날 어떻게 K교수님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는지는 기억에 없다. 나나 K교수님이나 무슨 커다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들처럼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으니까 말이다. 그 뒤부터 우리 두 사람은 길거리나 대학 캠퍼스 안에 서 만나더라도 멀리서부터 피하여 다른 길로 돌아가는 사이가 되었다. '지나친 공손은 오히려 예의에 벗어난다(過恭非禮)'는 옛말이 있다. 결국 그 일이 약이 되었다. 나는 인사할 때에 지나치게 고개를 숙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때로는 상대방이 고개를 숙이는 방향을 살피면서 고개를 숙이는 조심성까지 배웠다. 나태주 님 | 시인·공주문화원장 -《행복한동행》2010년 9월호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해설. 박덕규 - 미지의, 미완의 사랑학 사랑하니까 시를 쓴다. 다른 사람 글 얘기 하지 말고, 내가 내 얘기를 직접, 재미있게 하자, 하고서 소설가가 되어 놓고는, 막상 내 첫사랑 얘길 하려고 하니까 또 내 얘기를 꺼내기 싫어지는 거 있지요. 사랑에 얽힌 오래 전의 내 시를 얘기하는 것도 별로 신나는 일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제 첫사랑에 무슨 비밀스런 것이 남달리 있는 편도 아니거든요. 언제 사랑의 첫 느낌을 가졌는지 분명치 않다는 점도 남다른 게 아니지요. 그때 그게 사랑의 느낌이었는지 아닌지,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잘 알 수 없는, 그런 느낌도 무수히 많잖아요? 반면에, 사랑의 감정으로 충만했을 때는 시심도 그만큼 충만했지요. 그럴 땐 정말 시를 쓰고 싶어 미칠 것 같았지요. 그 시를 어서 빨리 '사랑하는 그대'에게 보내고 싶어서 또한 미칠 것 같았던 느낌도 다른 이들의 추억과 꼭 같지요. 이렇게요. 내가 그대에게 하는 잦은 말들이 그대 영혼을 조금이라도 흔들지 못한다면 시는 있어서 무엇하리. 윤성근 "첫사랑의 시"에서 사랑의 마음만큼이나 풍성한 시의 마음이었지요. 그대를 향한 그 많은 시들은 지금 조금 남고 다 어디로 갔을까요? 그 사랑을 잃고 울던 시절에도 시심은 또 달리 충만했지요. 실연의 아픔을 시 쓰는 일로 달랜다고나 할까요? 시고 뭐고 다 버리고 싶은 심정인데도 시를 쓰고 있었지 않았겠어요. 날이 새면 기억하는 자의 가슴만 혹독한 멍이 들거늘 박주택 "포구에서"에서 혹독한 멍으로 남은 사랑을 다시 혹독한 상심 속에서 노래하고 있었지요. 이렇듯, 사랑의 느낌과 시를 쓰는 일은 특히 '첫사랑의 시절'에는 참으로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아니겠어요? 그 점에서 보면, 그 누구나 시인이었거나 지금 시인이거나 장차 시인일 게 분명하죠. 바로 이 책을 읽는 당신들 모두가 말이지요. 그대가 누군지 몰라도 사랑의 시를 쓴다. 그런데 말이지요. 제 시와 더불어 한번 하고 넘어갈 사랑 얘기가 있기는 있어요. 사랑의 마음이 시를 낳는다고 했는데, 그게 꼭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냥, 그 누구든, 또는 그 누구도 아니든, 막 보고 싳어 미칠 것 같은 그런 느낌 속에서, 자신이 본 적도 없고 그려 본 적도 없는 대상을 향해 사랑의 마음을 춤고 시를 쓰는 때가 있어요. 미지의 존재를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라고 볼 수 있겠지요. 제가 이미 십수 년 전에 낸 시집 '아름다운 사냥'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보니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시가 눈에 띄더라구요. 제목이 '하현달'이라는 건데요, 실은 이리저리 뒤적일 것도 없이 그 시집 첫머리를 장식하는 시지요. 그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는 가장 어린 나이에 쓴 시이기도 하지요. 제가 그 시를 여기 다 적어 놓을 테니까 기왕이면, 옆에 앉은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을 만큼만 작은 소리를 내면서 낭송을 해보시겠어요? 너는 참 이상한 꽃이야. 잠결에 어린 누이가 뜰에 내린 어둠을 쓸고 있다. 발목에 이는 덜 깬 바람이 흐느적거리며 다시 어둠의 일부가 된다. 치마폭에 갇혀서 나의 누이는 밤마다 꽃밭을 가꾸자고 한다. 물안개를 뿜으면 꽃들은 조개처럼 입을 오므린다. 뜰에 가득히 꽃잠을 자다가 나비잠을 자다가 간밤엔 초경으로 가슴 팔딱이던, 오오라네가 지상에 처음인 그 입술 작은 꽃이로구나. 제가 20세를 전후한 시절에는 김춘수 선생의 무의미시 전후를 넘나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살던 도시의 문화적 환경이 그랬지요. 시적 대상을 이미지화 하는 가운데 관념의 문제에 제법 시달리는 듯한 그런 면이 그 지역 선배시인들에게서도 많이 발견되지요. '하현달'에서, 꽃과 누이와 달이 어우러지고 있는 밤이란 실재하는 밤 풍경이랄 수가 없겠지요. 이미지로 존재하는 밤이라고나 할까요. 그 밤을 위해, 잠을 '덜 깬 바람'이 '어둠의 일부'가 된다는 식의 표현이 얹어져 있어요. 바람이 어둠의 일부가 된다? 그건 이미지이면서 관념이지요. 그 관념은 무의미시론 이후의 김춘수 시인이 그토록 배제하려고 하던 것이지만요. 그땐 그런 거 저런 거 다 몰랐어요. 그때 제가 또 몰랐던 게 있지요. 이 시에서 초경을 맞는 누이란 실재하는 누이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상 속의 소녀라고도 저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것 같아요. 그러나 사실로는 그렇지 않았을 거예요. 제 무의식을 제가 알 수도 없고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만, 이 시를 소리내어서 읽다 보면, 비록 이 시가 이미지로서의 풍경화로 제시되어 있다 하더라도, 뭔가 이 세상의 사물과 새로이 만나고 있는 한 소녀의 실재적 이미지가 드러난다는 거지요. 그 누이는 누구인가? 제게는 누이가 없어요. 저는 저 삭막한 남자 6형제만의 집안의 막내 아니겠어요. 그런 제가, 없는 누이를 설정해 보았다는 것, 잠결에 부시시 일어나 뜨락을 거니는 누이를 상상해 보았다는 것, 그 누이가 하얀 달빛 아래서 꽃과 입맞춤을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은 여자에 대한 막연하지만 지극한 그리움의 소산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꽃잠, 나비잠이란 시어에서 묻어나는 귀엽고 순결한 이미지가 '흐느적거린다', '조개처럼 입을 오므린다', '초경으로 가슴 팔딱이던', '입술 작은 꽃' 등이 풍겨주는 관능적인 이미지와 만나게 된 게 다 필연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때 누이란 내게 미지의 존재, 미지의 사랑이었던 거지요. 제 시 중에 '첫사랑의 시'라고 할 만한 시가 없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요? 저는, 사랑의 첫 느낌은 어쩌면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상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픈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우리 시에 무수히 등장하는 누이니, 여인이니, 순이니 하는 이름들이란 실제로는 미지의 연인일 수 있다는 얘기지요. 윤동주 시인의 시에 나오는 '순이'도, 고은 시인의 초기 시에 등장하는 누이도, 더 나아가,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물 속에 비쳐옴을 의, 송수권 시인의 절창 '산문에 기대어'에서의 누이도. 누이야, 이봄엔 네게 피리를 주마. 옥처럼 깨끗하고 슬픈 하나의 피리를. 불어도 울지 않고 울어도 닿지 않는 저 하늘의 아지랑이 같은. 의, 박정만 시인의 아름다운 서정시 '누이에게 주는 선물'에서듸 누이도, 실제적 형상으로서의 누이나 애인이라기보다,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여성지향적 원망이 낳은 상징적 형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더욱 성큼 나아가면, 김소월 시인의 '님'이나 한용운 시인의 '님'이나 그 무수한 서정시들의 '님'들이 또한, 말로 설명 안 될 미지의 대상이라고 볼 수 있지요. 우리들의 미지의 사랑이 무한한 시들을 낳게 했다는 얘기지요. 미지의 존재를 향한 사랑의 노래가 우리 서정시의 뚜렷한 한 전통이라는 얘기도 가능하겠지요. 사랑을 잃고도 시를 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설레게 하고 그리하여 시심을 일으켜 무수한 시를 낳게 했던 여성적 대상이 실재적 형상으로 구체화 되는 때의 시에 대해서도 떠올려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예정된 순서니까요. 상상적 존재로서의 연인이 구체적 존재로서 형상화되는 때의 그 느낌, 그 느낌을 노래한 시가 우리에게 또한 참으로 많지요. 바로 이렇게 표현되는 느낌 말이지요.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정호승, '첫마음'전문 이 '첫마음'의 느낌 속에서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암울한 식민지 시절, 순결한 영혼으로 자기 삶을 성찰하고 반성하기를 잊지 않았던 윤동주 시인마저도, 동경에서 만난 한 여자 유학생에게 연정을 품고 사랑을 발견한 그 기쁨의 순간을, 삼동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윤동주, '봄'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을 정도니까(작가 송우혜 선생이 도서출판 세계사에서 개정판으로 낸 '윤동주 평전'을 참조하세요),그 기쁨, 그때의 시심이란 얼마나 가슴 설레는 것인지 미루어 짐작 하고도 남음이 있을 테지요. 빼앗길 것 같아 해가 떠도 눈뜰 수 없고 해가 져도 집으로 못돌아가게 되는 그 첫마음이란 그러나 얼마나 오래 간직될까요? 아니, 그 마음이야 오래 간직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그러니 사랑은 짧고 이별은 긴 것, 기쁨은 잠깐이요 아픔은 오래 지속되는 것, 그리하여 사랑의 기쁨보다는 사랑의 슬픔을 노래하는 시가 더욱 우리 가슴을 치는 법이지요. 사랑은 없고 사랑의 느낌만 남은, 그런데도 그 사랑을 떠날 수 없는 시. 가령, 이런 시, 여러 번 읽으면 절로 암송할 수 있게 되는 한 편의 시 말이지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빈집' 전문 '빈집'이라는 제목의, 기형도 시인의 이 연시가 꼭이 '첫사랑의 시' 라고만 명명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촛불 켜둔 책상 앞에 앉아 흰 종이 위에 사랑의 말들을 적으면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눈물 흘리며 밤을 지새던 그 젊은 날의 일들이 고스란히 떠오르는걸 보면 이 시가 그런 시절의 실연을 노래한 시일 수밖에 없음을 쉽게 예단할 수 있지요. 시인의 사후에 곧바로 발표된 유고시라 해서 이 시를 두고 시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시라고 추리한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게 보는 것도 좀 그렇죠? 이건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을 노래한 연시 아니겠어요? 문제는 많은 연시 중에서 이 시가 상당히 돋보인다는 점이지요. 더욱이나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실연의 사연을 어쩌면 지나칠 정도로 감상적인 어휘들, 즉 촛불, 안개, 눈물, 열망 등의 말들로 드러내고 있는 이 시가 왜 뜻 깊게 다가올까요? 그 열쇠는 첫연 '쓰네'와 마지막 행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가 가지고 있지요. 그 두 표현이, 오랜 감상의 시간을 겉에서 감싸안고 있는 형태죠. 그건, 사랑의 열병을 한판 진하게 앓고 나서 그때를 돌아보는 지금 시간을 표나게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지요. 사랑한 시간을 문제삼은 게 아니라 사랑을 잃고 그것에 대해 쓰는 지점, 즉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를 문제삼고 있다는 얘기지요. 마치 저 유명한 연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에서 에서의 그 '자세'와도 같지요.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라고 했지만, 실은 사랑했던 그 열병의 시간으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하는 거지요. 아직은 다 벗어나지 못했으니 '장님처럼'더듬거리며 '문을'잠그긴 하지만, 그 시간을 애써 과거로 밀어내고 객관화하려는 자아가 고개를 들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죠. '쓰네'가 바로 그 자아의 자세이지요. 그리하여 이 시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설명하는 시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지요. 인간이 한층 더 높은 단계로 성숙되는 과정에서 고통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막 이해하려 하고 있는 한 청춘의 모습을 느낄 수 있을 테지요? 그런 과정 그런 모습을 사건화한 소설을 일컬어 '성장소설'이라 이름하는데, 그렇다면 이 시는 '성장시'쯤으로 명명될 수 있지 싶어요. 어쨌든 좋아요. 우리에게는 이렇듯 무수한 사랑의 시가 있고, 저에게도 있었지요. 그 사랑들은 흘러가고 그 시들도 흘러가고, 그리고도 많은 시가 남아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군요. 그 시들은 말하고 있어요. 내 사랑하는 것들은 말이 없고 내 사랑하는 여자도 말이 없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을 하다가 쓰러져 겨울 사내로 말이 없고 박노해, '사랑의 침묵'에서 '미완의 사랑'을 노래하고는 있지만, 사랑하다 지쳐 더 말도 못할 그런 사랑 얘기를 하고 있지만, 실은 침묵 그 자체로 '사랑의 완성'임이 증명되는, '미완의 사랑'이되 '완전한 사랑학'일 수 있는 그런 시들이 또한 우리 시의 뚜렷한 전통이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이지요. - 박덕규 : 1958년에 태어나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시운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고, 1982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어 평론가로 등단했으며, 1994년 '상상'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름다운 사냥', 소설집으로 '날아라 거북이', '함께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장편소설로 '시인들이 살았던 집' 등이 있다. 현재 협성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장석남 - 활짝 핀 꽃그늘 속을 걸어서 저, 꽃밭에 스미는 바람으로 서걱이는 그늘로 편지글을 적었으면, 함부로 멀리 가는 사랑을 했으면, 그 바람으로 나는 레이스 달린 꿈도 꿀 수 있었으며, 꽃 속에 머무는 햇빛들로 가슴을 빚었으면 사랑의 밭은 처마를 이었으면 꽃의 향기랑은 몸을 섞으면서 그래 아직은 몸보단 영혼이 승한 나비였으면 내가 내 숨을 가만히 느껴 들으며 꽃밭을 바라보고 있는 일은 몸에, 도망은 별 몇을 꼭 나처럼 가여워해 이내 숨겨주는 일 같네. - 시 "꽃밭을 바라보는 일"전문 그 애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역시 먼 기억이긴 해도 숨을 고르고 생각해볼 수밖에 없겠다. 그것이 첫사랑의 회상일 경우 어찌 숨을 고르지 않을 수 있으랴. 듣던 음악도 이미 묵은 무엇 같아 다른 것으로 바꾸고 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여울물 속을 들여다보듯 그 기억들을 들여다본다. 오 행복의 못자리들. 혹은 송어떼들. 헌데 어떤 여자를 첫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의 널따란 치맛자락을 첫사랑이라고 해야할지, 고등학교 다닐 때의 이웃학교 한 여학생을 그것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다. 매일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치던 그 잘록한 허리를 가졌던 한 학년 아래 여학생도 있었다.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한 그 여학생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대학 1학년때 불현듯 만난 그 애가? 아니 그 애들이? 모두 다 가슴을 흔들었고 마음에 웅덩이를 하나씩 만들어 놓은 여인들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이후 모든,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그것이 얼마나 되랴만)은 첫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다. 오, 축복 있을진저, 첫사랑들에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는, 그러니까 그 사랑의 모든 시간들은 다 꽃그늘 속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어떤 뛰어난 기억력도 사랑의 기억만큼은 온전히 복원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다시 회상해낼 수 없는 것이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것이고, 다시 오지 않는 것이다. 그저 단 한 번 지나간 일일 뿐이다. 단지 가슴을 떨었다든지 하는 정도의 기억일 뿐이다. 그 가슴마저도 지금은 다른 것이 되어 있을지 모른다. 활짝 핀 꽃그늘 속이란 늘 그 속에 있을 때는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고 이성을 잃는 것이며 그 밖으로 나오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그런 곳이 아니던가. 그러니까 고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시내 분식집에서 음악을 틀어 주는 형이 있었다. 그 형은 군대를 막 제대한 국문과 휴학생이었다. 그곳에는 시를 습작하는 방송대 국문과에 다니는 누나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문학소년이었다. 내가 그런 소년이라는 것을 그 음악을 틀어주는 형이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그곳엘 들렀는데 그 형이 두툼한 대학 노트를 하나 주는 것이었다. 그 안에는 아주 정갈하게 정리한 시와 그 시에 맞게 그려넣은 그림들이 한 권 가득했다. 근처 여학교의 같은 학년 여학생의 것이었다. 그 아이도 문학소녀였고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아이였다. 어느 날 그 애를 그 분식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얼굴이 아주 동그랗게 생긴 자그마한 애였다. 첫인상이 비유하자면 첫물로 따온 오이를 뚝 부러뜨렸을 때 퍼지는 그런 향기가 막 풍겨올듯한 아이였다. 하긴 그때 어느 여학생을 만났던들 그렇지 않았으랴만. 그 아이를 만나고 집엘 왔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그 애의 머리 모양이 좀 특이했었는데 그런 비슷한 뒷모습을 길을 가다가 보게 되면 혹시나 하여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애의 집은 개봉역에서 내렸었다. 다 늦은 저녁 때 동인천역에서 내가 내려야 하는 역을 한참을 더 지나는 개봉역까지 전철을 같이 타고 갔던 기억이 난다. 같이 나눈 이야기 중에는, 요즈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할머니 무덤엘 가보면 할머니가 추워할 것 같다는 참 유치한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학소녀답게 당돌한 구석도 있었는데 이담에 크면 서울 명동 같은 데서 작은 술집을 하는 것이 꿈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그때 나는 그 애의 그런 장래 희망이 꼭 실현될 것만 같아 여간 즐거운 게 아니었다. 나는 그 술집에 가서 술을 마시리라 생각했었다. 헌데 정말 그렇게 되었는지. 혹시 그런 좋은 꿈을 접고서 어디서 지지고 볶는지. 어느 토요일 오후 동인천역 광장 시계탑 앞.(그러한 곳에서 지금 아이들도 서로들 만나는지) 그곳이 약속 장소였다. 나는 그 애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고 있는데 그 해는 오지 않고 같은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와서 하는 말이 그 애는 일이 있어서 갔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대합실 쪽으로 그 아이가 들어가는 것을 내가 보아버리고 만 것이다. '니가 잘난 척을 하고 있구나.'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만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나중에 무슨 시화전에 같이 참여했으므로 자연스레 대면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속마음을 숨기고 잘난 척을 했기 때문에 그 이후 만남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여자 아이들은 처음엔 다 잘난 척을 한다고 한다. 나중에서야 알고 나서는 내가 잘난 척한 것을 후회했다. 모두가 지나간 후였다. 흐지부지 끝난 내 첫 번째 첫사랑이다. 그 애가 잘난 척을 하기 전까지 나는 숨이 막힐 듯한 꽃그늘 속에 있었던 셈이다. 그해 말인가 그 다음해 말인가 다시 이성복의 첫 시집 속 시구처럼 또 첫사랑이 불어닥친다. 그 애도 내 가슴을 뛰게 했던 아이였는데 두어 번인가 만나고는 잘 만나주지 않아 안 만났다. 그애는 얼핏 보면 아주 예쁜 얼굴이었는데 뜯어보면 못된 성질이 묻어 있는 인상이었다. 헤어진 지 오랜 어느 날, 어느 당구장엘 들어갔는데 그 애가 어떤 머슴애들이랑 히히덕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모습은 즐겁지 않았다. 바람둥이였었나? 다시 첫사랑이 불어왔다. 몇 번 만났고 몇 편의 편지가 오고갔다. 그러나 이념이 달랐다. 시들했다. 다시 첫사랑이 불어왔다. 그 애는 너무 계산적이어서 싫었다. 그러나 손을 잡아 보기도 했다. 다시 첫사랑이 불었다. 이 애는 내 성격이 너무 소극적인 자기와 비슷하다고 갔다. 다시 첫사랑이 불어오고 불려갔다. 나도 모르게 어느 날 내게서 첫사랑이 불어간 적도 있으리라. 그런 소문도 들었다. 어느 해 여름 나는 내 지나온 생활을 모두 지워버리고 싶어 혼자 서해의 어느 섬으로 갔었다. 밥을 끊여먹으면서 여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울긋불긋한 피서객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물론 죽음 같은 것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까지의 내 청춘이란 것이 참으로 한 번쯤 정리되지 않으면 안될 만큼 누추해져 있었던 것이다. 혼자서 맘껏 한적한 해변을 걷고 또 걸으면 마음에 새로운 살이 돋아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우선은 사람들을 좀 피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피서철이 끝나고 간이상점들이 폐쇄되었다. 그 중 어느 상점에 가위표로 각목을 대고 못을 치는 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리고는 섬은 황량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나니 모래 위는 사람의 발자국 대신 바람의 결들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 모래 위를 천천히 걸으면서 피폐해진 내 청춘의 이러저러한 문제의 목록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역시 사랑의 문제에도 어지간히 시달렸던 것 같다. 아니 당시 하고 싶었던 일들이 너무나 많았던 내게 사랑의 문제는 어쩌면 가장 시급하게 처리해야 할 문제일지도 몰랐다. 사랑이라는 이 관념을 어떻게 환원해 내 마음과 육체 속에 제자리를 찾아줄 것인가. 어떻게 번역해내야 하는가. 내 청춘은 지금 어떤 욕망과 싸우고 있는가. 욕망의 실체는 과연 어떤 것인가. 어느 날 밀물이 들어와 내 발치에서 수런수런대고 있었다. 조용히 어둠이 오고 별이 빛났다. 물결 곁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마음이 한없이 편안해졌다. 밀물이 마음에까지 밀려들어와 수런거리고 있었다. 그 위에도 별이 내려와 빛났다. 이 밀물이 그렇듯이, 사랑은 내 안에서 싹트지만 내 의지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하는 것이다. 순리가 하는 것이다. 그분이 하자는 대로 길을 넓게 잘 닦아주면 될 일이다. 사랑 때문에 아프다면 그것은 내가 아픈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온 신이 아픈 것이다. 사랑의 설렘 또한 그런 것이다. 그런 생각들이 불현 듯 누에의 실처럼 연이어 머리에 떠올랐다. 맞는 것 같았다. 사랑은 육체 이전의 문제이고, 정신 이전의 문제이듯, 도덕 이전의 문제이고, 슬픔 이전의 문제이고, 법과 제도와 계산 이전의 문제이고, 심지어 사랑은 사랑 이전의 문제였다. 사랑은 다만 심장의 고동과 타협하며 육체와 정신을 지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불어닥치는 것이다. 출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불어닥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불어닥친 것은 지나가는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과식을 했을 것이다. 지금 시간이 다 지나고 나니 첫사랑의 앙상한 잔영들이 몇 개 남아 있다. 가슴이 뛰고 늘 먼 곳을 보게 했던 그때의 지상에서 몇 센티미터쯤 떠 지내던 시절의 그림자들.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 애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아가고 있을까. 부디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라는 사실을 알았기를. 저 앞에 놓인 첫사랑의 꽃그늘 속을 다시 가보고 싶다. 그러나 천천히 갈 것인가 뛰어갈 것인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인가. 첫물 오이를 뚝 부러뜨렸을 때 퍼지는 그 향들을 기리며. 장석남 - 198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젖은 눈'등이 있고,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장석주 - 잃어버린 한 마리의 '새'에 관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첫사랑을 잃지 않으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별자리의 이름을 외우리라 성경책을 끝까지 읽어 보리라 가보지 않은 길을 골라 그 길의 끝까지 가보리라 시골의 작은 성당으로 이어지는 길과 폐가와 잡초가 한데 엉겨 있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로 걸어가리라 깨끗한 여름 아침의 햇빛 속에 벌거벗고 서 있어 보리라 지금보다 훨씬 더 자주 미소짓고 사랑하는 이에겐 더 자주 '당신을 만나 정말 행복해'라고 말하리라 사랑하는 이의 머리를 감겨주고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더 자주 안으리라 사랑하는 이를 위해 더 자주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어 보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상처받는 일과 나쁜 소문, 꿈이 깨어지는 것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벼랑 끝에 서서 파도가 가장 높이 솟아오를 때 바다에 온몸을 던지리라 - 시 "사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전문 지난 겨울 뜰 한켠에서 말없다가 기지개 켜는 나무들, 나하고 끝끝내 무관하던 암벽들, 물결에 씻기던 백년의 뿌리들, 좀벌레들, 그리고 나 떠난 뒤에도 오래도록 출렁거릴 저 바다의 잔 물결들과, 쇠냄새 나는 수돗물과, 땅에 길게 드리워지던 짐승의 그림자들과, 달빛들, 달빛아래 염소들, 무성한 잡초와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의 이름만큼 많은 저녁별들. 나의 피들은 그것들 모두를 기억한다. 그것들 모두와 함께 단 한 사람의 이름을. '첫사랑'이란 미숙한 열정 속에 들려 한없는 혼란과 방황으로 보냈던 날들을. 그것들을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지 못하고 아직도 안고 있는 내 몸의 혈관의 피들은 불온하다. 사랑은 마음을 고요하게 비워놓고 난 다음에 이는 정열 속에 있다. 증오나 질투나 분노 속에는 괴로움과 흔들림과 혼란스러움만 깃들 뿐이다. 거기에는 일체의 욕망도, 의심도, 괴로움도, 의무도, 권리도 없다. 진정한 사랑이란 온 마음과, 온몸과, 온 심장과, 온 영혼을 다해 그에게 다가가는 것, 내게 더 이상 바칠것이 없을 때까지 내 전존재를 그에게 바치는 것이므로 그것은 죽음과 같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우리 마음속에, 심장 속에, 몸 속에, 영혼 속에 찾아드는 것은 고요한 평화와 분별과 사려가 깃든 정열과 이 세상 모든 고귀한 것들의 있음이 일으키는 행복한 충일이다. 그러나, 첫사랑이란 그런 완전한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사랑이다. '첫사랑'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의 모든 순간에 걸쳐 경험하는 사랑은 전부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카뮈는 말한다.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 사이에서 힘들게 일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늘과 땅이 가볍게 느껴지는 다른 땅을 꿈꾸게 된다'고 첫사랑이란 그렇게 꿈꾸는 '다른 땅'이다. 그것은 불모의 땅과 어두운 하늘에 진절머리를 치며 도망가는 지중해의 기슭, 빛의 사막이다. 저문 거리의 인파 속에 파묻혀 걷다가 뒤돌아보면 역광을 받고 서 있는 빌딩들의 기하학적인 선으로 분할된 하늘에 황혼이 암암히 걸려 있을 때 우리는 이유 없이 돌연한 슬픔에 빠져들곤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삶의 경영에 불가피하게 끼어들어 있는 어리석음, 시행착오, 뼈아픈 과오 등이 선명하게 환기되면서 일어나는 날카로운 회한에서 비롯된 것이다. 첫사랑이란 어리석음, 시행착오, 뼈아픈 과오이다. 그런 것들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결코 첫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첫사랑이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실패의 결과와 그것이 생의 표면에 남기는 흠집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그 무엇이다. 첫사랑이란 실패에 의해서만 그것이 첫사랑이었음을 입증하는 비극의 그 무엇이다. 나는 부쩍 '새'에 대한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비현실적인 것이었다. 간밤의 꿈에서는 나는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에 떨어져 헐떡거리는 '새'를 보았다. '새'는 오래된 이끼 냄새가 나는 그 말라버린 우물의 밑바닥에서 몇번이나 날개를 푸드득거리며 공중으로 날아오르려고 시도했으나, 이내 다시 바닥으로 추락하곤 했다. 아주 오래 전 홀연히 내 곁에 날아왔다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새'에 대한 꿈을 꾸고 난 이튿날은 언제나 가슴이 텅 빈것만 같은 공허감에 오래 시달리곤 했다. 베갯잇은 간밤에 흘린 땀으로 아직 축축하고, 거기 떨어져 있는 몇 올의 덧없는 머리카락을 집어올리며 나는 '새'가 떠나버리고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가 버렸는가 가늠해 보며 몸을 떨곤 했다. 내가 '새'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스물한 살이었다. '새'를 만나기 이전에 나는 이미 어떤 이성에 대하여도 성적 배타성을 굳게 유지해야 할 결혼관계의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새'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나는 무심코 그 사실을 서둘러 말해 버렸고, 그 순간 나는 '새'의 얼굴에 스쳐가던 실망과 안타까움의 그림자를 보았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빨리 우리는 '나'와 '남' 사이의 거리를 지워버렸다. 그 무렵 나는 숨쉬기 조차 힘들정도로 지쳐 있었고, 내게 홀연히 날아왔던 '새'는 위안과 희망, 그리고 구원이었다. 나는 불가해한 운명 앞에서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미소하고 나약한 존재인가를 참담하게 깨달았다. 나는 한 인간에게 그때처럼 무목적적으로 빠져들었던 적이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결코 없었다. 한 인간에 대한 그토록의 몰입과 탐닉을 통해 나는 인간의 애증의 그 끝간 데 없음에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고, 그것이 찰나에도 몇 번씩이나 천국과 지옥을 드나들게 하는 열락임을 비로소 알았다. '새'와 나의 시간들 속에는 일몰에 황량하고 장엄한 나신을 드러내는 서해 바다와, 교외선들과, 서울 근교의 유원지들과, 늦가을 산사들이 있다. 그리고 밤여행, 독주들, 서로에 대한 죽음과도 같은 열망, 머리를 짓 찧는 고통, 불면, 편지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되거나 소진되지 않은 비속한 정욕, 도덕적 갈등, 몇 번의 인위적인 쓰라린 헤어짐, 그리고 사람의 힘으로는 저항할 수 없이 강했던 운명의 인력, 눈물, 돌연한 파국들이 남아 있다. '새'는 나로부터 사라져 어디론가 날아가버렸지만, 나는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이전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나는 몇 년 동안을 혼자 지냈다. 어느 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 몸으로 빠져나와 작은 거처를 마련하고, 혼자 밥 먹고, 일하러 회사에 나가고, 퇴근해 돌아오는 길에 몇 병의 맥주를 사들고 들어와 늦도록 마시다가 취해 잠드는 단조로운 생활이 몇 년이나 이어졌다. 그때 나는 목젖을 막 통과하는 혼자 먹는 저녁밥의 아픔에 자주 목이 메이곤 했다. 그 동안 나는 낡은 수동타자기를 두드리며 많은 글들을 썼고, 내가 하는 일에 마음을 붙잡아매려고 무진 애를 썼고, '새'에 대해서는 간간이 아주 조금씩만 했다. '새'로부터는 아무 소식이 없었고, 나는 '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어떤 날은 '새'와 내가 가끔 들렀던 신촌 로터리에 있는 고전음악이 나오는 레스토랑에 몇 시간을 멍청하게 혼자 앉았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새'는 "여기 정신병원이야"라고 했다. 나는 평소에도 장난끼가 많았던 '새'가 나를 놀려주기 위해 농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나는 '새'가 어떻게 해서 정신병원에까지 가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순간적으로 가슴이 찢기는 것 같은 날카로운 고통이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전화를 끊고도 나는 오래 힘들어 했다. 나는 '새'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누를 끼쳤다. 나는 '새'의 인생이 저토록 망가지게 방치해 두었다. '새'를 생각하는 동안 참담한 자괴감이 내 마음을 고통스럽게 했다. 그리고 세월은 또 흘러갔다. 나는 말라버린 우물 밑바닥에 갇혀 언제까지나 날개를 퍼덕거리는 꿈 속의 '새'를 생각한다. '새'는 이미 내 손길이 미치치 않는 저 낯선 세상의 복판으로 흘러가버렸다. '새'는 세상은 커다랗고 정다운 여인숙이고, 인생은 하룻밤 짧은 꿈이라고 말하며, 아득히 흘러간 날들처럼 웃고 있다. 나는 나를 구속하는 일체의 인습과 이데올로기, 내게 주어진 현실의 조건들과 싸우며 살아왔다. 내가 그 싸움들을 포기하고 운명에 순응하려고만 했다면 내 삶에 어떤 흠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그것들을 피동적으로 수납하기를 거부하며,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기 위해 싸워 왔다. 그 싸움은 내가 소유하고 싶어하는 것들을 얻기 위한 욕망 때문이기보다는, 내자존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 내 삶의 많은 흠들은 그 싸움의 생생한 흔적들이다. 나는 이제 단단하게 아문 그 상처의 자리에 나의 눈물과 욕망을 비벼넣으며 어루만진다. 가끔 어둠에 침잠하는 내 영혼은 이렇게 부르짖는다. '나는 왜 이렇게 밖에 삶을 살 수 없는가?' 나의 인격, 주체, 정신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딱딱하게 엄습할 때, 사방을 둘러봐도 뚫고 나갈 길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자기혐오와 우울함에 빠져들고 나의 이성은 마비된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그 마비된 이성은 가까스로 힘을 회복하고 다시 내게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나됨을 가능케하고 뒷받침하고 있는 것들은 무엇인가?' 누구에게 그런 경험이 한 두 번씩 있는 것은 아닐까. 평소에는 막연하게 자기자신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믿고 행동하다가 어느 계기에 직면해 낮은 문설주 따위에 호되게 부딪쳐 정신이 막막해 지는 것과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 모순으로 가득찬 자아에 대한 생소함, 삶의 주체인 자기자신과 인식대상으로서의 자기자신 사이에 가로놓인 뛰어넘을 길 없는 막막함으로 형언할 길 없는 고통과 절망의 바닥에 떨어져버리는 경험 말이다. 첫사랑이란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운명이다. 그것은 생의 통과의례, 한 번은 건너가지 않으면 안되는 그 무엇이다. 내 의지와 선택의 바깥에 놓여 있는 사람들이 쉽게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 그것이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나'라는 티끌처럼 작은 실존 주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역사, 더 크게는 자연, 우주를 지배하는 어떤 법칙성과 힘, 알 수 없는 그 어떤 필연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첫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가! 나는 어느덧 첫사랑을 관조해야만 하는 나이에 이른 것이다. 내겐 더 이상 세상의 규범들을 바꾸고자 하는 잉여의 힘들을 다 탕진한, 저 뻘밭처럼 황량하게 비어 있는 내면만 있을 뿐이다. 그 황량한 뻘밭에는 어떤 '새'도 날지 않는다. - 장석주 : 1975년 '월간문학' 신인상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평론이 동시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후 청하출판사를 설립하여 단행본들과 계간 '현대시세계', '현대예술비평' 등을 펴냈다. 시집으로 '햇빛사냥', '완전주의자의 꿈',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11월', '절망에 관하여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등이 있으며, 평론집으로 '세기말의 글쓰기', '문학의 죽음', '문학 인공정원' 등과 장편소설로 '세도나 가는 길' 등이 있다. 지금은 글쓰기에만 전념하고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홍결 - 그녀들은 예뻣다 전생에 나는 물고기였나보다 지느러미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물속을 그렇게 유영하다가 낯선 바위틈에 몸을 누이고 뻐끔뻐끔 소리없이 세상을 부르네. 아가미 사이로 물방울들 내 뿜을 때마다 그 속에 갇히는 몸뚱아리 바라보며 그렇게 화석으로 굳어버린 물고기였나보다. 전생에 나는 물고기로 살아 깊은 잠, 깊은 어둠을 열고 이른 새벽 이슬처럼, 때론 안개처럼 슬며시 깨어나는구나. 지느러미 가득 세상을 품고 비늘에 부딪히는 아픔으로 흐느적거리며 취해가는 길, 취한 세상 속을 향하여 화덕 위의 뜨거운 불길에 온몸을 퍼득거리는구나 - 시 "길, 그렇게 살아가는구나"전문 그녀들은 예뻤다. 그렇다. 내 첫사랑은 복수였다. 첫사랑의 당혹감은 언제나 내 사랑을 늪에 빠뜨렸고, 그렇게 나의 사랑은 운명지워졌는지 모른다. 아마 철 지난 가을이었을 것이다. 이화여고 강당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공연을 단체로 관람하고 버스를 탔다.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지만 음악감상실 구석에서 상념에 빠지며 시인의 꿈을 키우던 시절. 왠지 어색한 감정으로 일단의 여고생들 틈에 끼여 콩나물 시루처럼 버스에 뒤얽혔다. 얄궂은 설렘과 비릿한 냄새들, 그 냄새는 무엇이었을까, 그 틈바구니에서 무심결에 가방을 맡기고 이리저리 밀리며 봉긋하게 솟은 어느 여학생의 가슴을 느끼며 몇 정거장을 지나 한꺼번에 우리 남학생들이 내릴 때였다. 그때는 만원버스일 경우 창문으로 가방을 내려줄 때였으니까. 버스에 내려 가방을 건네받고 차는 출발하고, 우째 이런일이, 내 가방대신 남은 가방은 붉은 여학생 가방이었다. 할 수 없이 가방을 열고 확인할 수 밖에. 여학생의 가방을 열어보는 그 야릇한 감정이란. 무어랄까, 떨림보다는 황홀한 들킴이랄까. 가방속은 예쁘게 정돈되어 있었다. 교과서와 참고서 그리고 노트 몇 권, 도시락과 수건, 필기구와 한켠에 손수건에 말려져 있던 생리대. (이때의 추억이랄까 상처랄까 이후로 나는 생리대만 보면 자유를 휴대케 하는 성을 생각한다.) 어쩔 수 없이 수첩을 보았다. 그리고 연락,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그녀의 집으로 전화를 하고 근처 제과점에서 나는 여학생 가방을 들고 그녀는 남학생 가방을 들고 우리는 그렇게 가방을 교환하기 위하여 만났다. 만남은 늘 그렇게 예측도 없이 예고편도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리라. "시를 좋아하나 봐요." 그랬다. 당시 치기어린 문학소년의 가방에야 시집 몇 권과 책들뿐. 그렇게 해서 그녀와 나는 만났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 작은 우산을 받쳐쓰며 빗물에 젖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던 날 왜 그리 가슴은 콩당거리는지 귓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옆모습을 훔쳐보며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있고 싶었다. 밤 새워 편지를 쓰고 다시 쓰면서 어서 어른이 되었으면 하던 날들. 첫눈이 내리던 날, 수천 수만의 하얀 나비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첫눈이 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는 만났고 어둠이 내리길 기다려 손을 맞잡고 구석으로 구석으로 사람들을 피해 우리들의 은밀한 공간을 찾아 배회했다. 문득 사랑의 공간을 찾아 헤매던 전후 독일의 연인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내 청춘의 상상력은 그렇게 자라났다. 어둠에 쌓인 공원의 미끄럼틀 밑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기대고 그러다가 포옹과 짧았던 입맞춤. 입맞춤만으로도 세상은 그토록 눈부시게 나를 눈뜨게 했고, 그녀의 머리칼 위로 떨어지던 순백의 눈송이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우리의 사랑은 그 눈송이가 녹듯이 두 사란의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어갔다. 추송웅의 모노드라마를 보고 사보이 호텔 골목으로 차가운 겨울비를 맞으며 돌아오던 겨울밤이었다. 열연하던 추송웅의 떨림을 가슴에 품고 걸어오던 밤길, 저며오는 기쁨에 쭈뼛거렸던 것은 비극을 향한 예감이었을까. 불현 듯 극장 입구에서 엄마의 치마끝자락을 잡고 칭얼대던 작은 계집아이(지금은 배우가 된 추상미이다.)와 봉숭아물을 들인 엄지발가락이 눈 속으로 들어왔다. 그렇다. 내 '복수의 첫사랑'은 그렇게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의 한켠에서 자라나고 있었으리라. 아무튼 그녀가 교복을 입고 다소곳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가방을 앞으로 모은 채 얼굴을 한쪽으로 향한 채 서있는 여학생의 모습. 아, 그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이제 중년의 나이에 서성이면서도 그런 정경과 마주칠 때면 술이 깬다. 아무튼 나는 그때 놀래켜줄 요량으로 슬쩍 뒤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세차게 감싸 안았다. 그런데 철썩, 불시에 따귀를 얻어맞은 나는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할밖에. 더불어 경솔한 나의 행동이여! 그녀는 분명히 나의 첫사랑, 그리고 지난 몇 달간 나를 지탱해준 소영이였다. "소영아, 나라구." "어머, 저는 미영이예요. 그런데 우리 언니를 어떻게 알아요?" "언니라니요?" "소영이는 내 쌍둥이 언니거든요." "뭐라구요?" 그렇게 해서 또 다른 당혹스러움으로 나는 미영이와 만났다. 밤길을 걸으며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그랬다. 어쨌든 나는 그녀와 똑같은 육체와 입맞춤까지 한 사이가 아니던가. 쌍둥이지만 미영이는 소영이보다 더 쾌활하고 재치가 있었다. 소영이가 수줍게 핀 패랭이꽃이라면 미영이는 코스모스 같았다. 그날밤, 명동성당 앞 언덕길을 몇 번이나 되풀이 오갔던가. 오랜 기다림의 만남처럼 우리는 그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비밀 하나를 만들었다. "소영이에게는 비밀로 하고 일요일에 만나요." 성북역 대합실로 향하면서 나는 왠지 모를 불안과 초조함으로 자꾸 흘러내리는 배낭을 추스렸다. '처제와의 사랑'이랄까. 그런 상념으로 미영이와 나는 경춘선 열차에 올랐고, 객차 사이에서 트윈폴리오의 노래도 부르고 어느 틈엔가 손을 맞잡고 그렇게 다시 또 다른 사랑이 깊어갔다. 우리는 오랜 연인처럼 산을 올랐다. 함께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면서 사랑은 그렇게 어른들의 흉내를 내면서, 아니 같이 살기 위한 또는 같이 사는 것처럼 흉내내는 것이 바로 사랑이구나, 하고 느꼈다. 소주를 한 잔 마신 탓이었을까. 우리는 서로가 용기를 내어 나뭇등걸에 기대어 포옹을 하고, 길고 긴 입맞춤으로 서로의 만남이 불륜이 아닌 진정한 사랑이었노라고 스스로에게 강변했다. 팔장을 끼고 걸어오면서 어깨 가득 쏟아지던 그녀 젖가슴의 체온은 모든 것을 잊게 했다. 쌍둥이와의 사랑. 그 은밀한 날카로움의 끝에 서는 순간부터 사랑은 이제 사랑이 아니었다. 몰래 훔쳐피는 담배처럼 두근거리는 떨림과 선택의 갈림길에서 나는 방황해야 했다. 그리고 소영이에게는 '롯데', 미영이에게는 '테스'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그 갈등의 바다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같은 영화를 두 번 봐야 했고, 나누었던 말들과 약속들을 일기장에 적어가며 지속했던 만남은 운명처럼 짜릿했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어쩌면 예견되었던 파국, 나의 아련한 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주체할 수 없었던 사랑의 넘침 때문이었을까. 전화를 걸 때에도 변성의 목소리를 사용하거나, 편지를 쓸 때에도 소영이에게는 펜으로 미영이에게는 타자로 쳐서 보내야 했고, 무엇 하나 작은 선물을 할 때에도 거의 비슷하게 해야 했다. 그래서 소영이는 미영이에게 "내 남자친구 하고 니 남자친구는 취향이 비슷한가 봐. 그래서 우린 쌍둥이인가" 하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던 나날들 중 다음 해 겨울, 무려 1년이 넘는 줄타기 사랑의 끝은 미영이가 다니던 교회의 크리스마스 행사였다. 미영이의 권유로 나가던 교회. 철길 건너 언덕 위에 솟아오른 그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고등부 연극의 무대가 올랐다. 그랬다. 한편의 연극처럼 내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났다. 그야말로 연애를 하기 위해 다니던 교회에서 예배시간마다 곤혹스러웠던 나는 크리스마스 행사에 그 동안의 죄를 사하고자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아 하느님께 죄를 빌었다. '우리 구주의 힘과 주의 위로를 빌라.' 늘 이 소리를 읊조리며 어설픈 연극을 준비하고 드디어 막은 올랐다. 그런데 평소에는 아니 평생토록 (미영이의 교회 다니기 10여년 동안) 교회에 관심도 없던 소영이가 입시가 끝난 해방감과 그 지겹게도 많았던 시간을 소비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작은 죄를 감추기 위해 더 큰 죄를 키우지 말라는 신의 계시였을까. 소영이가 쌍둥이 언니의 무대출연을 축하하기 위해 교회를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팸플릿과 교회 여기저기 붙어 있던 포스터에 박혀 있던 내 이름을 보았다. 그랬을 것이니 그녀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교회 한켠에 앉아 눈물로 그 연극을 보았을 것이다. 동정녀 마리아의 사랑으로 불행했던 아픔을 감싸려 했을 것이고 언니와 나를 용서해 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내가 미영이의 손을 잡고 무대에 올라 다른 배우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고, 연적들이 다정하게 맞잡은 손을 보았을 때 그녀는 격해졌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모두가 주의 찬양을 외치던 밤에 가출을 했다. 작은 메모를 남긴 채.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잊으려 합니다. 한때는 방금 전까지 사랑했던 사람과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해야 할 미영에게' '그 여자는 이 한 마디 남겨두고 떠나갔다네, 무기들아 잘 있으라'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녀는 머리를 깍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고 싶었을까. 그녀가 산으로 들어가기 직전 친구에게 알렸고, 발칵 뒤집힌 그녀 부모의 집요한 탐문 끝에 그녀는 다시 집으로 끌려왔다. 그리고 그녀의 희망대로 법당에서 의식으로 치르지 못했으나, 그녀의 완고한 아버지에 의해 머리를 잘렸다. 그랬다. 그 잘린 머리카락들처럼 우리들의 첫사랑은 무참하게 잘려 나갔다. 그날 밤 미영이는 나와의 짧은 통화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냥 장난으로 시작했던 만남이 너무 큰 아픔이 되었어요. 우리 이제 그만 만나요. 소영이를 쳐다볼 수 조차 없어요." 그래 나 역시 어찌 더 만날 용기가 남아 있으리. 하지만 머리를 잘린 채 무너진 억장을 추스리고 있을 소영이를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진정코 내게는 사랑이었노라고. 다만 줄타기에 흔들렸던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고. 그리고 언제 까지나 그 상처가 아물고 그래서 다시 나에 대한 사랑이 거듭날 수 있다면 기다리겠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마음은 진정이었다. 사랑의 경험이 없는 첫사랑의 실수였노라고 말하고 싶었다. 몇 날을 기다리던 끝에 나는 소영이와 만났다. 그 제과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리는 어색하게 물잔을 바라보며 곰보빵의 우둘투둘한 표면이 달이 아닐까, 저 달 속에는 누가 살고 있을까, 그렇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스카프로 머리를 감싼 소영이를 슬쩍슬쩍 쳐다보면서 나는 환영처럼 미영이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가에 맺힌 이슬에서 흔들리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런 이별의 말도 위로의 말도 못한 채 그렇게 헤어졌다. '이제와 다시 실연의 아픔이야 있겠냐마는, 내 가슴에 잃어버린 것을 위하여' 그렇다. 이제 그녀들은 내 취한 삶의 한 귀퉁이에서 그렇게 남아 있다. 음치인 내가 최백호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녀들과 걸었던 길들, 그리고 아직도 가슴에 묻어둔 그녀들의 입술 속에 나는 취한 몸을 이끌고 걸어간다. 그래서 언제나 내 사랑은 항상 흔들렸다. 홍결 - 1962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인천대 국문학과를 다녔으며 '보는 시' 동인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시의 혁명'등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신현림 - 아득한 사랑 당신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흰 풀뿌리 같은 목소리에 이끌려 비바람 속에서 내 발은 부푼다 비바람 속에서 당신을 찾아 떠난다 얼굴 한번 어루만지고 싶어 착한 마음 비치는 눈을 보고 싶어 멀리서 흰고래처럼 춤추는 당신 닿을 듯 닿지 않는 당신을 훔쳐만 보고 잠잠히 사라진다. - 시 "당신이 나를 생각한다" 전문 나는 '첫사랑'이란 그 꿈 같은 용어를 붙일 만한 사랑을 했는가?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것도 사랑일까? 자꾸 의심이 간다. 굳이 구분하자면 두 번째 사랑이 첫사랑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나이가 되도록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어렵기만 하다. 지나간 기억은 자기 편의대로 추려지거나 윤색되게 마련이다. 내 이야기도 내 편의대로 그려질 수 밖에 없다. 한 동안 내 마음속에 머물다 간 사람과의 인연을 기억해 보리라. 내가 처음 그리워했던 사람과의 인연은 짝사랑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인생에서 거절당하는 기분만큼 절망스럽고 치욕스런 것도 없다. 답장 없는 편지, 호출해도 응답이 없는 전화, 주고받는 것 없이 나만 걸게 되는 전화, 내 이름이 빠진 합격발표. 그 무엇보다 짝사랑이 되어버린 인연. 그 기억은 헤비급에 속하는 고통이다. 왠지 거절당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생각만 나면 그 사람 얼굴에 물총을 쏜다거나 밀가루 반죽을 던지는 상상도 한 적이 있다. 그만큼 화가 많이 났다. 그래도 마음은 약해서 실탄이 장전된 엽총이 아니었다. 그것을 잊지 않고 밝혀둔다. 치매증에 걸려 빨리 잊고 싶던 기억은 왜 짓물러 터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까. 원래 기억이란 기분 나쁜 것일수록 인상이 깊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기억을 고스란히 먼발치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세월 덕분이다. 만일 그 기억마저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 것인가. 만 19세 때 나는 그를 만났다. 그는 어딘가 '페드라'의 주인공 안소니 퍼킨스보다 좀 못한 풍모였으나 아무튼 골격과 롱다리가 무척 닮았다. 그래서 그를 간편히 안소니 퍼킨스라 부르겠다. 귀여운 남자였다. 청소년기엔 귀여운 남자들에게 환호성을 지르듯, 나 또한 그랬다. 겉으론 절대 표시하지 않았다. 내숭이 유행이니까. 아니 오래된 관습이니까. 내가 알던 여자들도 그를 보면 흐뭇해 했다. 이성의 감정이 아니래도 만나면 참 기분 좋아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휴교령이 내린 때였다. 내가 공부하러 다닌 곳에 참 많은 대학생들이 모이곤 했다. 누군가 계속 틀어대는지 모르지만 멜라니 사프카의 '더 새디스트 씽'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어두운 공간의 흐릿한 불빛 밑에서 누군가 담배를 조용히 피우고 앉아 있었다. 롱다리에다 상체가 짧아 그때는 무척 작은 사람인 줄 알았다. 내가 공부를 하다 고개를 휙 돌렸더니 담배연기 속에서 유난히도 빛나는 눈빛이 보였다. 눈에다 왁스를 발라 광을 낸 것처럼 빛이 났다. 퀭한 눈이었다. 나는 후에 처음 본 날 눈이 빛나는 그 사람을 마음속으로 계속 찾았다. 왜 찾았을까? 그건 첫인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항상은 아니라도 말이다. 버스를 탈 경우 집에 돌아가는 방향이 안소니와 같아서 만난 많은 날들을 한께 귀가를 했다. 물론 나는 전철이 빠른데도 2,30분을 함께 가는 것이 즐거워서 빙 돌아갔다. 두 번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을 달게 받았다. 안소니는 말라서 바람불고 추운 날이면 왠지 불쌍해졌다. "오빠, 내 윗도리 벗어줄까?" 이런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면 안소니 퍼킨스는 "괜찮아"라고 했다. 그래도 불쌍해 보여 바람 부는 날이면 그가 날아가면 어쩌나 걱정을 했다. 나는 그의 눈빛 만큼이나 빛나는 유머 감각을 참 즐거워했다. 친구한테 미팅시켜 주다가 내가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한테 무척 죄의식을 갖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그와 친구는 두 번 만나고 헤어졌다. 하지만 우린 순수하게, 때론 까불면서 선배와 후배 사이로 지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우연히 만나야 만남이 이루어졌다. 휴교령이 종을 치고 개강이 되자 그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안소니가 궁금해졌고, 늘 그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리움' 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꽤 흘러서였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안소니 퍼킨스에게서 기가 막힌 엽서가 왔다. 재치가 번득이는 그림과 함께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글귀가 적혀 있었다. 핵심은 열심히 살라는 내용이었다. 너무나 외롭고 힘들던 때라 그 엽서는 내게 큰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그래서 재치는 재치로서 화답해야 됨을 깨닫고 나도 귀여움이 번득이는 그림과 글로 엽서를 띄웠다. 그런 후 얼마 안 있어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내 엽서가 너무나 즐거워서 보고 또 보며, 티없이 맑다고 칭찬을 해댔다. 그 칭찬 몇 마디보다 그의 멋진 글솜씨에 놀라서 감격에 빠졌다. 그래서 또 열심히 편지 써서 보냈는데 한 달이 가도 답장이 없었다. 그때는 무답장에 상처를 입진 않았다. 이성의 감정보다 우정의 감정이 먼저 앞서기 때문이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안소니 퍼킨스는 주변 사람들한테 엽서를 띄웠는데 나한테만 답장엽서를 받았다고 했다. 그때도 실망은 좀 했으나 그리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에게서 받은 엽서와 편지는 남자한테 처음으로 받아본 거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2년간 가방에 넣고 다녔다. 물론 연애편지는 아니지만 소중하게 여겼다. 지금 생각해도 참 글을 매력 있게 썼던 사람이다. 후에 마음 정리하려고 다 태웠지만 그냥 놔둘 걸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젠 그보다도 그의 글이 더 생각난다. 너무 잘 쓴 글이기 때문이다. 글세, 지금보면 느낌이 또 다를 것이다. 그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동시대의 많은 남녀들이 애정표현에 서툴렀다. 그후에도 나는 글로, 엽서와 편지로 내 마음을 그에게 밀어붙였다. 여전히 내숭을 떨며 좋아하는 내색은 안하면서 경쾌하게, 언제나 후배답게 써서 몇 번 띄웠다. 답장은 카드 한 장, 편지 두 번 뿐이었다. 한번은 안소니와 성룡이 나오는 영화 '취권'을 꼬박 서서 보았다. 나는 안소니의 군대 걱정을 해주었다. 이상하게 안소니는 대꾸도 안하였다. 헤어질 때도 별말 없이 헤어졌다. 그는 집으로, 나는 그와 처음 만난 장소로 흩어졌다. 그런데 웬일인가. 안소니가 집에 가지 않고 70미터쯤 떨어진 장소에서 나를 향해 걸오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너무나 반갑고 놀랐다. "어, 어떻게 거기서 오지? 귀신 같네?" "산 너머 왔어." 그가 산을 넘어 왔다는 사실과 그날 나와 함께 같은 버스를 타고 간 기억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그 이후에 나는 안소니를 볼 수가 없었다. 이후에 나는 다른 사람과의 잊지 못할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그래도 안소니에 대한 그리움은 가끔씩 구름처럼 천천히 움직이며 그 부피를 늘였다, 줄였다 반복하였다. 그러다 5,6년의 세월이 지난 후 스물일곱 내 생일날에 안소니를 우연히 만났다. 그와 처음 만난 장소에서. 참 묘했던 것은 한동안 나를 쫓아다닌 오빠도 함께 있었다. 나를 좋아했던 오빠도 무척 웃기고 수다도 잘 떨었는데 이상하게 말이 없었고 금방 문밖으로 사라졌다. "이상하네. 왜 저 오빠가 말이 없지?" 내가 뇌까렸다. "너 오기 전에 실컷 떠들었어." 안소니가 대답하자 나는 막 웃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와 안소니와 여덟 시간을 함께 보냈다. 커피숖에서 곰살궂게 얘길 나누었다. 그의 한 마디는 나를 몹시 감동시켰다. "네 생각을 제일 많이 했어." 이 말은 몇 년간 희망의 기둥처럼 자리를 차지했고 미련을 떨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너 반찬 잘 하니?" 하며 안소니가 묻는다. "엄마가 요리학원 다니라고 그러셔서 궁중요리 배우려고 해." "웬 궁중요리?" 그가 깔깔 대고 웃는다.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해서 주변을 웃기거나 '벙찌게' 만드는 내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소중한 자리일수록 실수를 많이 하게 된다. 특히 안소니 앞에선 더 덤벙대기 일쑤였다. 그래도 반찬 잘 하느냐고 물은 것이 나를 여자로 본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추측을 하며 기뻐했다. 그를 못 만나는 시간 속에서도 그간의 말들과 헤어질 때 "연락해라"는 말을 포대기처럼 가슴에 두르면서 그를 그리워했다. 물론 그 뒤로 한 번 만났으나 우린 여전히 선배와 후배 사이였다. 그의 기억이 아득하다. 또 내일은 까마득히 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에겐 관심이 없다. 그런 막연한 만남도 싫고 안소니 같은 타입도 싫어졌다. 그 이후에 남자는 많고 할 일이 많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가 아직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 간간히 들려올 뿐이다. - 신현림 1961년 경기도 의왕에서 출생하여 아주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시집으로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전져라', '세기말 블루스'가 있으며, 영상 에세이집으로 '나의 아름다운 창'이 있다. 현재는 상명대학교 디자인 대학원에서 사진을 공부하는 중이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윤성근 - 시간의 고문을 이기기 위하여 내가 그대에게 하는 잦은 말들이 그대 영혼을 조금이라도 흔들지 못한다면 시는 있어서 무엇하리. 내가 그대를 앉은 자리에서 편찮게 하는 바로 그 마음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그 작은 증거 오늘은 이미 날도 어둡고 이 어둠의 그리움조차 길을 잃었지만 아아, 나는 거듭 거듭 이 말 하고 싶네. 기다려야 하네 먼 길 가야 하네 바람부는 데 몸 상한 갈대처럼 누워서는 안되네. 시름겨운 저 강물 위에 맨발로 서야 하네. 가야하네, 비에 젖은 전신 풀내음으로 물들이며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가야 하네. 목젖 깊이 신음소리 내뱉으며 헐은 입천장으로 사람의 말 뱉아놓으며. - 시 "당신에게"전문 제이씨이, 처음으로 그대에 대한 글을 적기 위해 이런 제목을 달고 나니 실재했었고, 또 실재하고 있으며, 또 당분간(폐가 공기를 수용할 때까지)실재할 당신 혹은 너에 대해서 다소 불경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난 시간은 그 홀로 완성되었고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데. 그것은 흡사 4학년, 8학기를 마치면 그뿐이지 성적이 나쁘다고 해서 다시 대학을 다닐 수는 없는 것과 같지 않겠니. 하지만 그 무슨 호사취미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으랴. 다시 그 찢어진 필름을 이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아아 추억은 이미 그 자체로 완성된 것을. 그런 사실을 직관적으로 아는 나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밖에는 이야기할 수 없고 나는 또 현재 강남역과 양재역 사이에 묶여 있을 따름이다. 전경 하나 그날 문리과 대학 앞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신축교사의 무슨 상량식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고 격앙된 사람들의 표정은 지금도 손에 잡힐 듯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바로 그날 나는 당신 혹은 너를 보았다. 그러나 그저 보았을 뿐 사실 본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눌한 나로서는 그렇게밖에는 우리가 만난 순간을, 아니 정확하게 그대를 본 순간을 반추할밖에 없다. 하지만 그대를 본 순간이 어떤 하나의 영화 장면 같았을 리는 없고 그저 타는 봄볕과 진짜 영화의 몹신 같은 그런 허황한 어지럼증이 동반하는 순간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알수 없이 휘몰아쳐 오던 1980년 초반의 정국을 닮은 것 같은 여러 학내 사정과 잦은 데모대로의 대오형성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 있었던가. 아, 나는 시청 앞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었다. 그 위를 몇 사람의 발길이 지나간 후 겨우 대열에서 밀려났을 때 나는 당신을 언뜻 보았다. 처음 나는 당신이 나를 알아본다고, 그래서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당신은 또 당신대로 의경에게 두 팔이 거머잡힌 채 끌려나가는 중이었다. 나는 당신 쪽으로 가려고 한 것은 아니고 퇴로를 찾으려다 어쩌다 당신과 함께 닭장차에 실려 경범재판에 회부되었다. 물 위에 떠 있었어. 물흐름에 나를 맡기고 그 굽이치는 순환의 논리에 몸을 주고 엉켜서 비로 내리고 있었어. 구체적인 아스팔트를 구체적으로 적시며 그냥 숨죽여 있었어. 소탕당하지 않으려고 절반쯤 혼이 나간 사람처럼 누워 있었어.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사람처럼 생각이 난 사람처럼 태어남은 죽음에 예비되어 있고 쓸쓸함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느껴졌던 것. 전경 둘 다시 그대를 만났을 때 우리는 목련 밑에 서 있었다. 그대는 자신의 어머니 말을 빌려 4월에 목련이 피면, 잎도 먼저 피지않은 것이 꽃이 먼저 벙근다고, 불길하다고 들려줬다. 그랬던 것 같다. 그래야 이 글을 계속 적을 수 있기에. 아마 처음으로 맞는 야유회에 주말을 낀 산행이었던 것 같다. '천국'의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고 연일 신문들은 학살의 시간들에 대해 침묵하고 있고. 그리고 국방장관이 전방지역을 순시하다 지뢰를 밟았다던가 아니라던가 하는 소식이 숨가쁘게 들려오고, 그리고 이런 것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루어진 여행이었다. 그 여행의 한 끝에서, 그 치기와 불필요한 마음씀과 어둠과 그것들을 환히 찢어내는 캠프화이어의 불길 속에서 나의 사진은 인화되었다. 나는 누군가의 옷깃을 잡고 병나발을 불고 있고 또다른 한 손에는 보기 싫을 정도로 젖혀진 등산복 한 자락이 보이고. 다음날 나는 위벽을 날카롭게 갈라놓는 자각증상과 함께 눈을 떴다. 열려진 텐트의 한켠에는 그대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청춘의 날들이 거기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꿈 속에서 낯선 짐승이 되어 잘 모르는 도회의 한켠을 배회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함께 보고 있었다. 그 도시는 고관대작이 즐거운 도시오, 가진 배가 더 배부른 도시오, 더 많은 사람들이 더 갖지 못해 아우성치는 도시였다. 감히 말하건대 그 도시의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보잘 것 없는 처지의 사람이 되어(그 전부터 이미 되어) 우리는 어두워지는 성녘과 황혼의 거리를 예감처럼 술렁였다. 어쩌다 주머니에 두 사람분의 버스비만 있어도 행복했던, 적어도 행복한 것처럼 여겨졌던 시간이요 공간이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철 지난 바닷가를 걸었다. 가까운 항구도시의 어둠은 우리를 낯설게 감싸고 광포한 바다가 거기 있었다. 한 순간 해일이 일어 우리들의 가는 길을 막을 때 그때는 그 맞아섬이 또 얼마나 두려운 것이던지. 그래서 나는 인상을 쓰고 담배를 피워 물었던 것 같고 그런 나를 그대는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하는 눈으로 뜨악하게 올려다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손수건 한 장을 깔고 젖은 방파제의 한켠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면서 나는 왜 그리 앞이 막막한 감정 속에 뒤척였던지. 아마 이럴 때 시인이라면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배, 미쳐버린 바다 위를 떠도는 배 세상은 어두워져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내리 사흘을 울고난 뒤, 나는 목이 쉬었다. 이해하라, 대책없는 삶을 그것이 비록 어리석음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그래서 더 큰 어리석음을 부른다고 해도. 전경 셋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헤어짐은 너무나 당연하게 나를 목죄여 왔고 우리가 결국 마지막 만나던 날. 나는 뒤돌아선 그대를 쫓아가다 차에 치일 뻔했고. 그때 대형 트럭에 치이지 못한 내 가슴은 더 큰 상처가 되어 오래 나를 불면으로 빠뜨렸고. 그날의 일들을 떠올려보자. 이제는 잘 기억해낼 수도 없이 오래된 기억들을. 적어도 무슨 눈물바람을 하고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만 그러나 현실은 적어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오래 다니던 다방의 종업원은 먼저 차를 한 잔 가져왔고, 나는 자랑스럽게 '신동아'에 실린 내 시 한편을 꺼내 보였고. 빌어먹을, 무슨 무슨 말 같지 않은 말들과 그것보다 더 하잘것없는 오해가 증폭되어 나왔고, 고성이 오갔고, 상대에게 서로 상처줄 만한 말들을 찾으려는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의 순간들이 흘렀고 그리고 기어이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이 발화되었고, 물잔이 엎질러졌고, 그 물잔을 주으려다 찻잔을 쏟았고, 또 전화가 알 수 없는 곳에서 걸려와서 잠시 불편한 침묵의 순간이 연장되었고, 그리고 나는 서울로 왔다. 그러나 마지막의 순간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이지. 어둠의 한갓진 곳을 태워 대지는 불타오르고 우리가 누으면 천장이 코 끝에 다가오던 최후의 야시장터 같은 그곳 해변의 집. 우리들의 몸을 간지르던 모래알들 사기그릇 같은 너의 가슴을 찌르며 쏟아지고 천국을 딛고 선 느낌이었지. 성냥곽 같은 해변의 집.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바닷가를 거닐고 해가 뜨자마자 빨래를 내다걸었지. 우리들의 머리카락은 알맞게 소금향기를 풍기고 먼길 떠났던 사람들은 몸져 돌아오곤 했지. 아, 그러나 그대 눈떠 보면 지금은 '잔혹'이 불을 뿜는 시절 습지에선 앓아누운 풀들의 신음소리 로켓탄이 하늘에 시위를 매기는 이곳에서 나는 바라본다. 그리운 해변의 집, 그 모든 것. 전경 넷 그리고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단 하나의 만남과는 무관한 삽화 하나를 제외하고는. 하숙집에 전화를 쓸 수 없었던 그 시절, 나는 곧잘 S대학 구내의 공중전화를 이용하려고 저녁이면 외출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이 삽화는 그날 이뤄진 것이다. 첫 번째 통화는 불발이었다. 그날 두 번째 통화는 아주 늦은 시간에 이뤄졌다. 지금 나는 술을 먹든 안 먹든 그것 때문에 별반 실수를 잘 하지 않는다고 자부하는데 그날은 아니었다. 아마 그대의 아버지가 전화를 받은 것 같다. 그분은 내가 80년대초 어느 성당에 숨어있던 그대의 옛애인을 고지했다고 지금까지도 오해하고 있는 바로 그분이다. 상당히 고압적인 말들이 오간 후, 내 마음에도 이렇게까지 할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든 후에도 나는 무어라고 계속 지껄이고 있었다. 취직도 아직 못한 '나'는 그 무엇엔가에 상당히 양분해 있었던 것인데. 어찌 어찌 되어 당신이 전화를 받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꼭 그럴 것까지는 없지 않았을까 하는 말들과 행동들이었다. 자신을 떠난 후 다시 나를 바라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고백하지만 그러고도 다시 통화가 이뤄지지 않은 전화를 몇 번이고 술에 취해 걸었던 건 나였다. 또 두서없이 씌어진 편지들은 어쩌구. 그때 나는 열병을 앓는 환자였고 당신은 나를 고쳐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여러 증상이 혼효되어 있어서 어느 한 가지를 고쳐서는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의사였다. 하여튼 몇 번이고 나는 수화기를 들고 아직도 직장을 구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외쳤는데 어눌한 내 목소리는 하늘과 땅 사이, 을지로에서 정릉을 넘어가지 못하고(비끼어 가고)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영 혼자 남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날 이후 나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기로 했다. 눈이 형편없이 나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전화도 편지도 쓸 수 없게 된 내 처지를 사랑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었으므로. 또 그것이 내 자신이었으므로. 이제 나는 그 시절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 잘 지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그시절의 유일한 생존자다. 싫든 좋든 나는 귀환했고 이제 다시는 그대와의 지난 시절로 돌아가지 못한다. 다행히 나는 아직 그대를 그날 이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현재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그대의 존재에 대해서 모른다. 고마운 일이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나는 무난하게 살아갈 것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고 지난 시절들이 점차 더 완벽한 형태로 잊혀져 가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고통이라니, 그건 겪어보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자신이 없고, 그 정도는 정직하다. 이제 이 글은 끝났다. 가슴이 얼얼한가, 아마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윤성근 1960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동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리 사는 세상', '먼지의 세상', '소돔성 1990', '나는 햄릿이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