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홍영철 - 저물 무렵의 시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조금씩 살아 있음. 혹은 조금씩 죽어있음. 빛은 빛만을 고집하지 않고 어둠은 어둠만을 고집하지 않고, 살아 있음은 살아 있음만을 고집하지 않고 죽어 있음은 죽어 있음만을 고집하지 않음. 조금씩 살아 있으므로 조금씩 살아 있게 하고 조금씩 죽어 있으므로 조금씩 죽어 있게 함. 서로 조금씩이므로 서로 조금씩이게 함. 조금씩 살아 있음에 찬미 조금씩 죽어 있음에도 찬양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이 아름다워. 안개, 아니면 빈 아스팔트. 시"회색에 대하여"전문 그는 저물 무렵 내게로 왔다. 낮의 환함이 힘을 잃고 모든 사물들이 어둠에 잠겨들 그런 회색의 시각, 그 저물 무렵에 그는 내게로 왔다. 그때 우리 집은 도시계획으로 말미암아 가옥의 반쯤이 잘려나간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던 우리 집은 일종의 제과점을 하고 있었는데, 도로확장이라는 당국의 방침에 따라 점포의 일부가 뭉텅 잘려나가 가게도 온전히 운영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큰길 쪽에서 보면 방문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런 꼴이었는데, 나는 그런 우리 집이 좀 창피스러웠다. 나를 사람답게 키워보겠다는 어머니의 생각으로 도시 변두리에서 한복판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은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무렵이었다. 변두리 학교에서는 제법 똑똑한 편에 속했나 본데, 도심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학교로 옮겨진 내게 모든 것은 낯설고 어리벙벙했다. 아이들은 내가 모르는 참고서를 들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것들이 나를 몹시 당황스럽게 했다. 그런 가운데 나는 도심지에서의 생활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고 있었다. 그것은 변두리에서의 삶보다 훨씬 신나는 것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다른 녀석들에게 뒤지기가 싫어 나는 철저히 삐딱선을 탔다. 교문 앞에 즐비한 만화가게 출입, 불량식품 사먹기, 야바위꾼들과 사귀기 등등 비 모범생들이 즐기는 것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위 '범생이'들의 생활 패턴보다 확실히 신나는 일이었다. 그 가운데에서 내가 가장 자신 있어 한 것은 야바위였다. 뺑뺑이라 일컬어지는 동그란 판이 탄피가 덧씌워진 대못 위에서 빙그르르 돌아가고 닭털이 달린 바늘이 그 위에 내리꽂힌다. 물론 그 전에 나는 얼마간의 돈을 배팅한다. 1번부터 6번까지 어디든 자기가 원하는 숫자에 돈을 건 뒤 바늘로 뺑뺑이판을 내리찍는 것이다. 모두 여섯 칸으로 나눠진 뺑뺑이판 위에 바늘이 꽂히고 나면 야바위꾼은 어지럽게 돌아가는 판을 멈춘다. 내가 건 숫자에 바늘이 꽂혀 있으면 나는 다섯 배의 돈을 받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야바위의 전문가였다. 2원이 10원이 되고, 10원이 20원이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운은 아니었다. 정확한 계산에 의해 바늘을 냅다 꽂는 것이다. 내가 2번에 돈을 걸었다 치자. '나는 당시 2번을 몹시 좋아했다' 야바위꾼에게 나는 "2번을 잡고 돌려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열이면 열 명의 야바위꾼이 2번을 잡고 뺑뺑이판을 돌린다. 판이 돌아가는 찰나, 나는 속으로 재빨리 "하나, 둘, 셋!"을 외친다. 그러고는 뺑뺑이판을 향해 바늘을 냅다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바늘은 어김없이 2번에 꽂혀있게 마련이었다. 나의 유년은 그런 야바위 속에서 흘러갔다. 아니다. 나의 유년 속에는 또 하나의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미완성인 채, 아니, 시작도 없는 그런 모습으로. 내가 뺑뺑이와 만화와 화투 등으로 그 찬란한 시절을 보내고 있을 무렵, 우리집은 반쯤이 강제로 헐린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마치 폭격 맞은 것 같은 집 모양을 대충 추스르고 우선 그냥저냥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우리 집이 부끄러워 방 안엘 들어가기가 싫었다. 누군가 방문 밖에서 우리들의 구차한 생활을 들여다볼 것만 같았다. 따라서 밥 먹는 시간이나 잠잘 시간 외에는 늘 바깥에서 돌았다. 그런데, 그때 그 아이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아이가 우리 집 쪽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가 키네마 극장의 높고 널따란 지붕 너머로 모습을 감춘 그런 시각이었다. 그 아이는 피아노 책을 가슴에 안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러고는 부서진 우리 집의 담벼락을 지나 어둠이 깔린 대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다가구 주택식의 가옥이었는데, 우리가 도로변에 살고 있었고 안쪽으로 세 세대가 살고 있었다. 음악대학에 다닌다는 그 가운데 집의 큰딸은 피아노 강습을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늘 쿵쾅거리는 계집아이들의 어설픈 피아노 소리들에 젖어 살아야 했다. 당시 나에게 피아노 소리란 그저 시끄러운 소음쯤으로 여겨지거나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감각한 철사선의 진동쯤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내가 그 아이를 처음 본 것은 학교 앞 세상으로부터 지쳐 돌아오고 있던 어느 저녁이었다. 만화방에서 남은 2원으로 간신히 5원을 만든 나는 그 5원으로 돼지기름에 튀긴 얇은 만두를 간장을 듬뿍 쳐서 후루룩 말아먹고는 귀가를 서둘렀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스름 속에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이 눈에 띄었다. 꽃이었을까? 나비였을까? 향기였을까? 어둠 속에서 점점 다가오는 그를 피해 나는 반쯤 남아 있는 담벼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무런 까닭도 없이. 내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더럽혀질 수 없는 꽃 또는 나비였고, 나는 진흙이었다. 나는 숨소리를 죽이며 그 아이를 응시했다. 그 아이는 커다란 책을 가슴에 안고 이쪽으로 나풀나풀 뛰어와서는 내가 숨어 있는 담벼락 바깥을 돌아 안집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가슴은 내가 야바위꾼 앞에 섰을 때보다 몇 갑절 세게 뛰고 있었다. 쿵쿵거리는 가슴을 하고서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세상의 때를 모두 불러들인 것 같은 검은 손. 내 손이 검어 보이는 것은 어둠 때문만이 아니었다. 나는 갑자기 그런 손이 싫어졌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수돗가로 달려가지는 않았다. 그냥 그대로 어둠 속에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왜냐하면 곧 모차르트의 연습곡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다. 지붕이며 담장이며 거리는 저녁을 지나 밤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멀리 키네마 극장의 우람한 지붕도 어두운 하늘과 섞여 있었다. 나는 피아노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쿵쾅거리는 것이, 나의 새벽잠을 깨우거나 숙제를 방해하는 굉음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아이는 다음날도 같은 시각에 내 곁으로 왔다. 그것은 곧 나의 귀가 시각이기도 했다. 만화방 긴 나무의자에 묻혀 있다가도 그 시각만 되면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세상사로부터 내가 어떤 아름다움의 세계로 돌아오는 그런 순간이었다. 나는 그 아이가 치는 것이 바이엘인지 체르니인지 알지를 못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었다. 피아노를 잘 치는지, 못 치는지도 알지 못했다. 오로지 그 아이의 하얀 손가락이 두드리며 매는 소리가 내겐 커다란 설레임이었다. 그 아이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피아노 책을 가슴에 안고 이쪽으로 뛰어왔다. 그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저물 무렵이 내게는 행복이었다. 혹시 남의 눈에나 띄지 않을까, 나는 무너진 담벼락 깊숙히, 가능한 한 깊숙이 몸을 숨기고는 저녁을 맞았다. 아니, 그 아이를 맞았다. 그리고 피아노 소리를 맞았다. 그 아이가 내 곁을 스칠 때쯤이면 나는 그 앞으로 튕겨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눌러야만 했다. 나는 그 앞으로 나갈수가 없었다. 용기도 없었을 뿐더러, 내게 그 아이는 천사였고 나는 그 아이에게 악마였다. 그런 등식은 곧 상처로 다가왔으나 나는 아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적어도 꿈을 꾸고 있었으므로.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얼마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나는 그런 나의 비밀을 내 조직들에게 털어놓았고, 나와 같은 갬블러인 친구들은 재빠른 정보력을 가동해서 그 아이가 우리와 같은 학년으로 몇 반이며 집은 어디인지를 알아 준 것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내 주위에는 온통 소년 갬블러투성이었다. 대부분 시장통에서 장사를 하는 집안 아이들이었는데, 녀석들은 누가 장돌뱅이 자식이 아니랄까 봐 몸놀림도 머리굴림도 재빨랐다. 미성년자 관람가보다 관람불가를 더 즐겨 보던, 투전놀이를 딱지치기나 구슬치기보다 더 좋아하던 우리들은 자주 화투를 쳤다. 장삿집 아이들이라 낮의 텅빈 집안에 틀어박혀 우리는 '짓고땡이'나 '섯다'를 즐겼던 것이다. 그런 녀석들이 알아낸 그 아이의 이름은 봉명희. 시장통에서 약국을 하는집 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수확이었다. 이제 내가 머뭇거릴 곳은 하나가 더 느는 셈이었다. 그 아이가 나타나지 않는 날이면 나는 약국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길 건너편에서 하얗게 빛나는 유리창 안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유리창 안에 없는 날이 더 많았다. 내 눈이 형광등의 빛보다 더 하얗게 바랠 때쯤 나는 돌아서곤 했다. 차라리 그 아이를 만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위안을 가슴에 안고.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그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지는 못했다. 말은커녕 나의 존재를 드러내보이지도 못했다. 저물 무렵 세상의 모든 놀이에서 돌아와 부서진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기고 그아이가 가슴에 피아노 책을 안고 뛰어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 그러고는 피아노 소리를 듣는 일. 아니면 쪼르르 시장통으로 달려가서 약국의 유리창을 눈이 부시도록 바라보는 일, 그것이 내게는 그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의 전부였다. 그렇게 얼마의 세월이 흘렀을까. 나는 무사히 중학교 진학 시험에 낙방을 했고 이어 재수생 노릇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 아이의 피아노 소리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만약, 만약 말이다. 그 아이를 지금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피아노 책을 안고 나풀거리던 그 아이는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는 정말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었으며 지금도 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 아이는 이미 중년 속에 들어 있을테고,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도 갖고 있지 못할 것이며, 지금 그를 만나더라도 나는 역시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30년이나 지난 지금까지 그런 저물 무렵의 풍경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것이 사랑이다. 아무것도 돌려받으려 하지 않는 것, 세상의 잣대로 그를 평가하려 들지 않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사랑이다. 나는 지금도 회색의 시간을 좋아한다. 흰 것도 조금씩 살아있고, 검은 것도 조금씩 살아 있는 그런 시각. 빛은 빛대로, 어둠은 어둠대로 조금씩 살아 있는 것. 어느 하나가 스스로만을 고집하지 않고 조금씩 살아 있는 세상.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이다. - 홍영철 1955년 대구출생으로 계명대 국문학과를 나왔으며, 1978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와 '문학사상' 신인발굴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작아지는 너에게', '너는 왜 열리지 않느냐', '내 가슴속을 누가 걸어가고 있다' 등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박주택 - 가을편지 새벽 총총한 걸음으로 오리라. 기다리는 순절만으로도 행복한 날. 날이 새면 기억하는 자의 가슴만 혹독한 멍이 들거늘 밤은 어찌 이렇게 바람만 안겨다 주는지. 끝끝내 살아 잊어버렸던 것들이 깨어 오는 무렵 한밤내 뒤척인 방 안으로는 쩡쩡히 눈 시린 해. 저 강 끝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언제까지 갈대들을 눕히고만 있을 것인가. 철새들도 어디론가 날아가고 물결만이 허허롭게 남아 있어 기다리는 자의 일렁이는 가슴을 닮아 머리를 날리며 서 있는 이곳. 저 무리지어 날아가는 무심한 철새들이 알겠는가. 돌아서지 않는 발길로 스스로의 중심으로 돌아간 뒤에라도 잔물결 이는 기슭의 갈대처럼 부스럭거리며 눕혀지지 않는 잠들을. 시"포구에서"전문 너무나 오랜만에 편지를 씁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그대의 집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내 마음 어느 한 편 구석에서 거울처럼 빛나다 빗물에 숨을 가라앉힐 것입니다. 그 동안 잘 있었는지요. 그대의 나라에도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지요. 낙엽에 마음을 빼앗겨 흐르는 시간의 기억을 이따끔 더듬기라도 하는지요. 시간의 공기가 강쪽으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쓸쓸한 기억들이 강 하구 쪽으로 몰려갈 때쯤이면 내가 아는 그대는 저녁 강을 바라보며 가끔씩 종류를 알 수 없는 은빛 영혼들이 펄럭이다 사라지는 것을 검푸른 입술로 바라볼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불현 듯 외로워져 마치 소망이 사라진 슬픈 가수처럼 마음깊은 곳으로부터 음울한 노래에 잠겨 있는 날처럼 그대 또한 돌들이 파랗게 부풀어오르는 잠 틈 사이에 낀 유리가 되어 방 안에 잎들을 후드득 후드득 떨어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밤마다 후미진 기억의 기슭에서 어슬렁 어슬렁 걸어나오는 바람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가슴에 낀 잎이 어두워져 갑니다. 도시의 낮은 구름위로 날아가는 새들이 보이고 불빛의 노란 젖이 흘러갑니다. 안간힘을 써서 시간도 서로 몸을 붙여 흘러가고 나무들도 서로 배척하거나 서로 싸우지 않고 한 묶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발자국 소리만이 표박하는 시간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저녁, 홀로 앉은 의자 뒤로는 감정들이 부서집니다. 노을도 네모반듯한 창으로 밀려와 몸을 맡기고 정적이 감미로운 전망을 휩싸고 돌 때 가구를 물들이며 노을이 달콤한 동작으로 움직입니다. 일곱 시가 되었나 봅니다. 그 시간 속에 길이 의식 속에 길게 뚫려 홀로 걸어가는 어두운 자화상이 보이고 은행나무조차 잎을 떨어뜨린 지 오랜 거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옷깃을 세워도 봅니다. 당신의 조용한 뜨락에도 가을꽃이 졌겠지요. 창밖으로는 바람이 불고 가끔씩 집으로 돌아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 지금, 어쩐지 그대의 휜 블라우스가 떠오릅니다. 당신은 종로의 전화부스 속에서 내 전화를 한사코 받지 않으려는 화가 난 여자에게 내 대신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전화부스 밖으로 오가는 차들을 무심히 바라보다 전화 속의 여자와 몇 마디 나눈 뒤 어색해 하는 내게 말없이 전화기를 건데 주었지요. 다시 당신이 내 뒤에서 전화 차례를 기다렸고 나는 여자와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허겁지겁 전화를 끝마쳤지요. 그때 당신이 내게 했던 말 '잘 되셨어요?' 라는 말, 기억나지요? 그리고는 당황스러워 '감사합니다. 차 한 잔 사겠습니다' 라는 생각지도 않았던 나의 말. 머뭇거리던 당신이 나를 따라나선 건 호기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카페에 앉아 한없이 내 얘기를 듣고만 있었던 그대. 비가 오던 날이던가요. 물 묻은 손으로 우산을 접고 다방으로 들어오는 당신을 보고 시름 속에 누워 있는 잎들이 일제히 싱싱하게 펄럭거렸답니다. 그랬지요. 내 외로움의 거처에 뜨거움을 지피며 당신은 내 산발한 나날들을 매만져 스스로와 투쟁하는 내 영혼을 재웠던 게지요. 지금 '그 집 앞'이나 '애니로리'와 같은 노래가 부르고 싶어집니다. 천변에서 우리가 부르던 노래였나요. 이제 아파트의 창에 기대어 나직이 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리움이 삶을 가꾸지는 못한 채 무성한 격정을 재우고 입술만 달싹거립니다. 내 힘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계곡이 깊게 패어지고, 걸어 놓을 수 없는 계곡 어귀에서 희망과 시, 그리고 빛나는 날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꿈으로 뒤척이는 날들 속에 잿빛 플라타너스 먼지가 빗물에 씻겨 길을 적시고 음울한 음률로 걷는 사람들 사이로 젊음이 방류된 물처럼 흘러갔습니다. 별이 뜨나 봅니다. 시원을 알 수 없는 존재의 밑바닥을 걸어가면 심장을 갉아먹은 많은 시간의 동물들의 눈빛이 만나집니다. 그 심연 속에는 더 깊은 물이 흐르고 가끔씩 기이한 새와 관목들도 서 있습니다. 흙으로 덮인 평원의 피부 위로 살아나는 식물들. 그러한 식물들은 굳은 의지로 노래하고 두근거리는 영혼에게도 떨리는 입술로 말을 붙입니다. 그리고 내 몸속에는 말들이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가끔씩 목책 안으로 흰구름조차 떠다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운명이라고 불러야 하는지요. 땀구멍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시간으로만 채워집니다. 나는 우리들 존재의 정면을 바라봅니다. 나는 그대의 근육을 잘라내지 못 합니다. 당신이 나의 숨골을 막지 못하듯이. 어느 시간이던가, 당신이 마음을 다져먹고 돌아서려 했을 때 혹은 영영 마음이 떠나버린 후 무수한 돌이 날아왔을 때 나는 그 돌을 피하느라 운동신경의 거의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랬었지요. 나는 내 옆에 여자가 붙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자기애는 페스트'라고 말했을 때 진작 깨달았어야 했던 게지요. 나 이외에 아무도 사랑하지 못했던 내게 당신은 자기애에서 나오는 지독한 집착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그랬을 겁니다. 여자들이 하나 둘씩 떠나는 이별의 계보처럼 당신도 훌쩍 유학을 핑계삼아 그 먼 나라로 갔었던 거지요. 홀로 남겨진 내가 사랑한 것은 광택을 잃은 가구와 미욱한 전망의 어두운 저켠에서 날아가는 새들과 추억의 배후에 두리번거리다 걸어간 길을 다시 되돌아오는 상처투성이의 나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그 돌을 들어 던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내 존재의 정면이기도 하지만 운명은 너무 멀리 닿지 않는 곳에 있어 아무도 그곳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람 끝에 불려오는 미진한 소식에 몸을 기대어 눕지 않고 시간에 미쳐 존재를 바쳤던 어리석음을 생각해 봅니다. 바람이 창밖으로 붑니다. 불이 켜진 집들.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잎사귀가 검게 반짝이고 누군가 방문을 두드립니다. 잘게 잘리는 문조각, 그리고 종류를 알 수 없는 생물의 알을 깨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동안 길이 아닌 길로만 걸었습니다. 어디론가 끝없이 길이 아닌 길. 보이지 않는 희미한 안개와 종류를 알 수 없는 벌레들만이 수풀 속으로 달아나면 생애 끝에 오는 죽음은 어디서 숨쉬며 기다리고 있을는지요. 절벽 끝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득한 일몰 뒤에 태양의 뒤편에서 붉은 새가 날아오를 때 바닷 속 어족들은 일제히 심해로 가고 숨쉴 때마다 가늘게 떨리는 옷들. 그리고 밤입니다. 사위도 갑자기 조용해지고 귀가하는 차 소리도 뜸합니다. 이명현상 때문에 정신이 없는 틈 사이로 낮 동안 피곤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곧바로 나를 몰아치는 어떤 의식의 한 부분이 그것을 이겨내기도 합니다. 기억나시지요. 내 불행의 족족을 아무 불평 없이 따라오다 불현 듯 스스로의 운명 때문에 망연히 길 중에서 있었던 그해 여름. 그리고 십 몇 년 전이던가의 10월. 적산가옥이 즐비한 낯선 항구의 군산. 비가 내리고 서천으로 가는 배를 타고 가는 중에 만난 스산한 삶과 부두 노동자의 느린 걸음걸이. 비는 내리고 더 많은 비는 우리들 운명에 섞여 퀘퀘한 선실 속까지 파고들어왔지요. 그대가 나를 손으로 쳐서 만날 수 있었던 꾀죄죄한 남매 아이와 일용할 양식에 부딪꼈을 그 아이들의 엄마, 질척질척한 항구의 곁 모퉁이에서 금방 구워낸 뜨거운 풀빵을 입술을 데는 줄도 모르면서 한 손으로는 또 다른 풀빵을 집고 두 눈으로는 또 다른 풀빵에 번뜩거리며 먹어대는 유행 지난 옷을 입은 아이들. 그아이들 엄마의 풀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세월에 낡은 아이들의 앉은뱅이 책상이 보이고 닫혀지지 않는 부엌문이 보입니다. 연민이겠지요. 그처럼 내 연민의 삶 속으로 멋모르게 걸어와 지나온 길이 너무 멀어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 사랑하는 혈육들. 삶에 발이 묶인 채 다시는 외지로 떠날 수 없는 항구의 사람들처럼 그대도 나로부터 떠날 수 없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대에게 정말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대가 그대의 영혼을 밝혀 나의 길에 이르던 시절. 세상의풀꽃을 모아 한밤에 몰래 와 머리에 얹어주던 그대. 열린 가슴으로 나를 묻어주고 우수에 젖어 세상으로 가는 길을 바라보며 나를 재우던 그대. 내 의식의 부둣가로 목청이 굵은 사내의 주절대는 욕이 들리고 롱펠로우의 "화살과 노래"가 그 사내의 욕에 섞입니다. 그대, 낙엽이 바람에 불립니다. 저녁의 정적 속으로 사랑이 일어서고 어제보다 더 깊은 잠을 잘 때 그대의 길 속으로 길을 걷다, 쓰다 만 일기 위로 내 몸을 눕힙니다. - 박주택 1959년 충남 서산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꿈의 이동 건축",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가 있다. 현재 경희대 강사로 재직중이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양선희 - 나를 이끈 손 너는 캄캄할 때, 온다. 한 길로 가는 마음 같은 줄을 타고, 오래 고름을 짜낸 생에 경계 없는 길을 들인다. 삶의 노래 내 안에 물결치고 노화하며 내 몸 울음 재우는 집이 된다. - 시 '사랑아'전문 사랑에 대한 정의는 무수히 많다. 어떤 이는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이는 인간의 주성분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이는 외투보다 추위를 더 잘 막아 주는 것이 사랑이라 했고 또 어떤 이는 우리 인생의 훌륭한 선생이 바로 사랑이라 했다. 인생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내린 사랑의 정의 중에서 청소년기의 내가 매혹당했던 것은 '사랑은 더 넓은 곳으로 나를 불러 내는 것'이라는 정의어이다. 릴케의 글을 읽다가 발견한 사랑에 대한 부분을 내 나름대로 정리한 문장이다. 결혼을 하기 전까지 줄곧 나는 릴케식의 정의로 사랑을 재단했다.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불러내어, 내가 사랑을 하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하고, 경이로운 느낌들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의심없이 믿었던 것이다. 물론 내가 사랑에 빠졌을 때 나를 더 넓은 세계로 불러낸 것은 내가 사랑을 느낀 그 존재 자체일 수도 있지만, 그 존재를 사랑하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드넓은 세계로 불러낸 것은 내가 사랑을 느낀 그 존재 자체일 수도 있지만, 그 존재를 사랑하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드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는 것은 역시 사랑의 감정이기 때문에 나는 즐거이 사랑의 손에 이끌려 새로운 세계를 맛보곤 했다. 새로운 세계에서 내가 새롭게 느끼는 감정들 속에는 늘 신비로움과 환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쓰디쓴 맛들과 견디기 힘들어 생명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인 고통과 슬픔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낯설지만 아름다운 세계로 나를 불러내는 사랑의 감정들을 사랑했다. 릴케식의 사랑의 정의에 어울리는 나의 첫사랑을 만난 것은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날 기념으로 어머니에 대해 썼던 산문이 교무실 앞 복도에 게시됐던 이후부터, 글을 쓰는 일에 큰 관심을 가졌던 나는 중학교 때부터는 밤을 새워 쓴 시를 '새농민' 이란 잡지의 독자란에 투고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농협에 근무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잡지를 손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어린이 새농민'을 두고도 굳이 성인 잡지인 그 책의 독자란에 글을 보냈던 이유는 아버지께서 농촌의 대다수 어른들이 보는 그 잡지에 활자화되어 있는 글을 보는 일을 큰 기쁨과 자랑으로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거의 매달 시를 써서 '새농민'에 보내곤 했었다. 잡지가 그다지 많지 않던 시절이었고, 지금보다는 순수한 시대라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새농민'에 내 시가 실리면 그 시를 읽는 독자들로부터 수많은 편지가 오곤 했었는데, '시골 소녀'라는 제목의 시가 수록됐을 때는 다른 때보다 더 많은 분량의 편지가 날아와 답장을 보낼 편지와 보내지 않을 편지를 분류해서 두 개의 라면 상자에 나누어 담았었다. 그런데 답장을 보낼 편지들이 담긴 바로 그 상자에 들어 있던 편지의 발신인 중 한명이 바로 나의 첫사랑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M의 편지를, 답장을 보낼 편지로 분류했던 것은 그의 편기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멋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편지들은 자신이 읽은 내 시에 대한 느낌과 시를 쓴 나에 대한 여러 방면의 추측, 혹은 자기를 소개한 내용들로 여러 장의 편지지가 채워져 있었지만 그의 편지는 봉투부터 달랐다. 나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기 위해서였는지 편지 봉투에는 발신인의 주소가 없었고, 편지지도 그 시대의 흔히 쓰던 양면돼지가 아니라 백지였다. 백지의 5분의 4정도를 여백으로 둔 하단에 '위의 여백에 나의 마음을 담아 보냅니다'라는 정성을 다한 펜글씨가 깨끗하게 적혀 있었고, 뒷장에는 그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편지의 형식이 워낙 개성적이었던 탓에 그 주소는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졌었다. M의 첫 편지에 오래 마음을 빼앗겼던 나는 곧장 답장을 썼다. 그때 나는 주로 여러 종류의 말린 꽃잎을 붙여 꾸민 종이를 편지지로 사용했었다. 그의 두 번째 편지를 통해 나는 그가 서울대학교에 낙방하여 재수를 하고 있는 수험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성인잡지에 시를 투고했었기 때문에 내게 편지를 보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자기 또래의 성인으로 여겼듯이,M역시 막연하게나마 나를 그렇게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내가 곧 여고생이 될 신분이라는 것을 금방 밝히지는 않았다. 그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더 있고 난 다음에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힐 참이었다. 문학적이고 섬세한 문장의 그의 편지를 서너 통 받아 읽은 뒤 그가 편지교류를 계속해도 좋을 사람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린 나는 나의 신분을 밝힌 편지를 보냈다. 그랬더니 그 이후에 온 그의 편지는 높임말이 예삿말로 바뀌었고, 미지의 또래 여인을 대하듯 하던 문체는 여동생을 대한 듯한 친근한 문체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그보다 한참 손아래라는 것을 밝힌 이상 나 역시 그때부터는 그를 'M씨'하는 호칭 대신 '오빠'라 불렀고, 서로의 사진을 주고 받으며 환 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한발 내려왔다. 그 뒤에 그는 내게 '세상에는마음으로 봐야 될 것이 더 많다'는 편지와 함께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선물했고, 나는 그에게 손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베갯잇을 보냈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는 내가 보낸 선물의 용도를 몰랐었다고 한다. 그의 대학진학과 아버지의 임종이 맞물려 있었던 터라 장남이던 그가 원하던 대학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그가 주거하던 지방대학의 행정학과에 입학을 했다. 그가 대학생이 된 후에도 편지를 통한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그는 편지를 통해 자신이 쓴 형이상학적인 시들을 들려 주기도 하고, 괴테며 릴케, 폴 발레리, 앙드레 지드, 조르주 상드, 버지니아 울프, 키에르 케고르 같은 사람들의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식구들이 밥을 먹는 동안에도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손전등을 켜 들고 책을 읽을 정도로 독서를 즐기던 나였지만, 우리 나라 작가들이 아닌 외국작가들의 이름과 작품은 거의 그를 통해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며 막스 뭘러의 '독일인의 사랑',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여자의 일생',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같은 책들을 떨리는 가슴으로 접할 수 있었다. 그는 늘 내게 '책 속에 모든 길이 있다'라고 말했기에 대학진학의 압박을 받지 않은 여고시절을 보냈던 나는 그가 권하는 책을 읽고, 사색하고, 시를 쓰고, 거의 매일 그의 편지를 읽고 답장을 쓰는 일들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곤 했다. 편지를 통해 그는 자신이 나보다 먼저 알게 된 삶의 다양한 표정을 나에게 보여 주었고, 깊고 맑은 지혜의 샘물을 길어 내 목을 축여 주었고, 나는 그가 나에게 주는 것들을 내 성장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그 시절의 내가 뿌리도 잘 내리지 못한 한 그루의 어린 나무였다면, 그의 존재는 나무가 뿌리를 튼튼히 내리게 하고 꿈을 키우며 푸르게 자라게 하는 영양분 많은 흙이며 한없이 부드럽고 따스한 햇살이었다. 그는 나의 우상이었다. 나보다 박식하고 나보다 시를 잘 쓰고..... 모든 면에서 나보다 우월해 보인 그를 나는 숭배했다. '나는 언제쯤 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열심히 읽고, 쓰면서 마음의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애썼다. 한창 이성에 눈을 돌릴 시절이었지만 나의 마음은 늘 그를 향해 있었다. 태양이 되고 싶어 태양만을 보며 자라는 해바라기처럼. 그는 내 삶의 지주였고, 내 영혼의 지배자였고 나를 키우는 영양제였다. 그러나 내 영혼의 키가 조금 자랐다 싶으면 그의 영혼의 키는 언제나 나보다 더 훤칠하게 자라 있어서 나를 안타깝게 했고, 나를 더 열심히 살게 만들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다. 부드럽고 향그러운 흙과 같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든 황무지같은 가슴을 지닌 사람이든 그 가슴에 사랑이 민들레 씨앗처럼 날아들어 뿌리를 내리면 그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변한다. 생기가 도는 표정이나 정감이 넘치는 말씨, 약간 들뜬 듯한 행동뿐 아니라 사물이나 대상을 보는 시선도 한결 부드러워진다. 사랑의 씨앗이 눈을 떠 껍질을 깨고 떡잎을 내밀 때쯤이면 그 사람은 자신에게 그 보배로운 선물을 준 존재를 닮으려고도 한다. 서로 이질성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라고는 알고 있으나 동질성을 지니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즐겨 마시는 차를 따라 즐기고, 그 사람이 즐겨 가는 장소를 따라 즐거이 찾고, 그 사람의 취향까지도 닮으려는 헛되지만 예쁜 노력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M을 만났던 시절에 '나는 그를 사랑한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오직 같은 하늘 아래 그의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희열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닮으려고 했었다. 그는 자신이 염세주의자라고 했었다. 그런 단어를 그로부터 처음 들은 나는 사전을 펼쳐보고서야 세계나 인생을 가치가 없는 것이나 무의미한 것,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보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 염세주의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때 나는 낙천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고, 그 동안 그가 보내온 편지들을 통해 나름대로 내가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 또한 지나친 염세주의자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그렇게 평가한 이상 나도 염세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해야만 될 것 같은 유치한 생각을 했었다. 외적으로 나타난 그 징후는 우선 옷을 살 때 유채색보다는 무채색을, 채도가 높은 것보다는 채도가 낮은 것을, 새 느낌을 주는 옷보다는 누가 몇 번 입었다 벗어둔 듯한 헌옷을 고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적으로 나타난 그 징후가 있다면 그것은 우선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순간도 꿈을 버린 적이 없었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은 이율배반적인 것이었겠으나, 나는 그의 생각처럼 미래는 없으니 늘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야 된다고 믿었고, 그렇게 행동했다. M은 그렇게 청소년기의 내 인생의 표정을 바꾸어 놓았고,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한 존재였던 것이다. 얼굴을 보지 않고 주고받는 편지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환상을 키우기에는 알맞은 형식이든가? 그 시절 M과 내가 주고받은 편지는 때로는 일반적인 편지의 형식을 빌려 썼지만 대부분은 일기 형식이었다. 일기라는 것은 자기내면을 비추는 은밀한 거울이라면, 그 거울에 비친 고백의 얼굴 같은 것을 함께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벽이 없는 가까운 느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M과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서로의 마음 풍경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서로 근친과도 같은 친근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지 않고 현실에서 자주 만났더라면 서로에 대한 환상이 쉽게 깨져 오랜 만남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상도와 충청도란 지리적인 거리는 우리를 그런 불행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에게도 서로를 신비의 베일에서 벗어나게 할 날이 찾아왔다. 지금은 소설가가 되어 서울에 살로 있는 6촌 언니가 한 명 있는데, 그림을 잘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여자주인공처럼 예쁘게 꾸미고 다니던 그 언니는 일찍 결혼을 해서 딸 쌍둥이를 낳았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언니의 시가 쪽 친척이 M이 사는 도시에 살고 있었고, 언니가 혼자 그곳에 갈 일이 생겼는데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가기가 힘들다며 나에게 동행을 부탁해 왔던 것이다. 나는 구름 위를 걷는 기분으로 기꺼이 언니를 따라나섰다. 그 도시에 도착한 나는 저녁 무렵에 그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내가 있는 곳과 가까운 장소인 석유창고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러나 그 도시가 초행이었던 나는 끝내 약속장소를 찾지 못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낯선 거리를 헤매다가 서점에 들러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서로 만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는 내게 폴발레리의 시집을 한 권 사서 읽으라는 권유로 만나지 못한 첫 만남을 위로해 주었다. 그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을 길거리의 벽보에서나 볼 수 있었다. 운동권에 투신해 어두운 한 시대를 밝히는 데 한 줄기 빛이라도 더하고자 했던 그는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있었던 것이다. 교도소를 들락거리고, 도피생활을 하느라 편지를 주고받는 일이 뜸해졌던 어느 날 그는 내게 마지막 편지라고 단언한 한 통의 편지를 보내 왔다. 그때 나는 여고를 졸업하고 상경해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자신의 처지 때문에 나와의 만남을 계속하면 나를 세속적인 형태의 불행에 빠뜨릴 것 같다는 내용의 마지막 편지. 그 편지를 읽으며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눈물과 한숨에 젖은 나날을 오래 지속하던 나는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된다는 생각으로 그가 내게 보냈던 수백통의 편지를 한 장 한 장 불에 태웠다. 그의 존재는 그렇게 한줌의 재로 남게 된 것이다. 결혼을 두고 흔히 '새로 태어나는 것' 이라고들 한다. '가정'을 갖고 나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활의 태도 등이 '가정'을 갖지 않고 떠돌 때와는 많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기 이전의 사람들이 뿌리 없이, 혹은 헛뿌리만 내리고 환상 속을 붕붕 떠다닌다면 결혼은 그들을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결혼과 함께 사랑에 대한 나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결혼 이전에는 나를 넓은 세계로 불러내는 것만이 사랑이라고 믿었었지만, 사랑은 그렇게 한 가지 표정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수만 가지의 변화무쌍하고 신비로운 표정을 지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오늘까지 나를 더 넓은 세계로 이끈 사랑의 손길들에게, 그러나 축복을..... 양선희 - 1960년 경남 함양에서 출생하여 1984년 서울예전 문창과를 졸업했다. 1987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했음며,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 '집으로 가는 길'이 당선되었다. 시집으로'일기를 구기다'가 있으며, 장편소설로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가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일근 - 4월, 벚꽃나무 아래서의 첫사랑 막차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는 하마 분분한 낙화 끝나고 지는 꽃잎 꽃잎 사이 착하고 어린 새 잎들 눈뜨고 있겠지요 바다가 보이는 교정 4월 나무에 기대어 낮은 휘파람 불며 그리움의 시편들을 날려보내던 추억의 그림자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까 작은 바람 한 줌에도 온몸으로 대답하던 새 잎들처럼 나는 참으로 푸르게 시의 길을 걸어 그대 마을로 가고 싶었습니다 날이 저물면 바다로 향해 난 길 걸어 돌아가던 옛집 진해에는 따뜻한 저녁 불빛 돋아나고 옛 친구들은 잘 익은 술내음으로 남아 있겠지요 4월입니다 막차가 끝나기 전에 길이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시 '4월 엽서'전문 첫사랑! 그 말을 입안에 넣고 추억처럼 중얼거린다. 불혹의 내 입 속에서 4월 진해를 뒤덮던 벚꽃이 다시 씹힌다. 그 기억 지워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불처럼 뜨거웠던 꽃잎들과 얼음처럼 차가웠던 낙엽들의 기억이 입 속에 함께 스쳐 지나간다. 진해. 그렇다. 그 도시에서 내 첫사랑의 시작과 끝이 있었다.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 잠자고 있었구나, 사랑이여 첫사랑이여. 아득해하며 눈을 감으니 흰 꽃잎들이 화사하게 눈처럼 날린다. 내게 진해의 벚꽃은 4월에 내리는 눈과 같았다. 해군도시인 남쪽의 진해는 겨울이 와도 눈과 얼음이 귀한 부동항의 항구도시. 그 도시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낸 벚꽃나무들은 4월이면 일시에 피었다가는 바람이 불면 눈 같은 꽃잎을 뿌려주었다. 분분설처럼 날리던 4월의 눈나라를 나는 잊지 못한다. 꽃잎이 눈처럼 날리던 그 4월에 내 첫사랑은 시작됐다. 일본의 소설가 가오바타 야스날리는 '터널을 지나자 눈의 나라였다'고 눈나라,'설국'의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진해는 4월이 오면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나는 내 첫사랑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그대들도 진해에서 열리는 4월의 축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벚꽃잔치인 군항제. 도시에 심어진 7만 그루가 넘는 벚꽃나무들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도시의 축제는 화려하게 막이 오른다. 그 축제의 전야제는 유년의 내 몸과 마음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분수 탑 로터리. 우리 나라에서도 귀했던 8거리인 그 로터리에서 브라스 밴드인 해군 군악대의 경쾌 한 행진곡 연주와 장총을 들고서도 한치의 오차 없이 돌아가는 시계추 같은 의장대의 멋진 사열솜씨를 보면서 우리는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고적대 제복을 입은 여중생들의 멋진 퍼레이드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고생들의 강강 수월래로 봄밤이 서서히 어두워져 오면, 한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엔 불꽃놀이의 요란한 폭죽이 터지고, 땅에는 아이들이 축등 행렬이 시작됐다. 궁핍의 60년대, 흑백 TV도 귀했던 시절. 4월이 오면 오색 찬란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요란한 폭죽 소리가 들리고 잠시후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꽃비가 세상으로 내렸다. 어린 내 마음은 그 폭죽 소리를 따라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불꽃이 만드는 무지개를 타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곤 했다. 축등 행렬은 언제나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축제의 전야제, 사각으로 만든 축등에 촛불을 밝히고 축제의 광장인 8거리를 중심축으로 방사선으로 퍼져가는 쭉쭉 뻗은 도시의 길을 따라 걸어가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밤이 주는 흥겨움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나서 그때부터 축제는 나에게 슬픔으로 변해버렸고, 나 또한 말보다는 눈물 많은 소년이 돼버렸다. 아버지의 죽음은 4월이었고, 나는 꽃 피는 거대한 나무를 잃은 작은 가지였다. 불의의 교통사로였다. 아버지께서 먼 곳으로 떠나신 이후 집안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가난의 고통이 무엇인지 나는 눈물과 함께 배워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4월에도 눈이 내린다는 먼 북쪽 마을로 떠나셨다고 생각했다. 기일이 오면 늘 꽃잎이 눈처럼 날렸기에, 아버지는 해마다 4월이면 꽃을 눈 대신 몰로 진해로 찾아오신다고 믿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아버지가 사시는 그 먼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나무에 기대어 선 나에 게, 저녁 바람이 휘파람을 가르쳐 주었고, 축제가 끝난 뒤의 파장의 쓸쓸함이 나에게 가슴속으로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 내 주위에는 온통 여자의 눈물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남았다. 아들을 잃은 할머니, 남편을 잃은 어머니, 오빠를 잃은 고모들..... 그 많은 여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눈물을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잠결에 듣는 어머니의 울음은 슬픔의 바다가 돼 나에게 몰려왔고, 나는 이불속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바다에 젖어 울 수밖에 없었다. 서른에 청상이 되신 어머니인데 어찌 눈물이 없었겠는가. 한순간 가진 것없는 빈손으로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험한 세상에 버려진 어머니. 아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울면서 알았다. 세상 에는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것을. 그 이별은 늘 슬픈 것이라고. 어린 나이에 나는 사람들은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생각할 뿐 꽃이 지는 축제의 슬픔은 알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파장을 더욱 사랑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밀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자고 외로운 섬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 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 문예반지도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슬픔의 시를 쓰는 나를 늘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하셨다. 그런데 사랑도, 첫사랑도 내가 그렇게 슬픔에 젖던 4월에 나를 찾아왔으니.중3이었다. 내가 다닌 모교는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실 창문으로는 늘 남쪽으로 열린 진해 바다와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학교였다. 그런데도 군사도시의 영향인지 중학교인데도 선.후배 사이에 엄한 질서가 있어 선배들의 서슬에 기가 죽어 숨죽여 생활하던 1,2학년을 보내고 최고 학년인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교생 활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모자의 챙을 미니형으로 줄이고 알맞은 가방끈을 괜히 길게 만들어 어깨에 메고, 일자형의 교복바지를 나팔바지로 만들어 입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신는 것이 금지 돼 있는 흰색 신발이나 농구화를 몰래 신으며 괜히 어깨를 으쓱이거나 후배들을 불러 세워 기 합을 지던 시절. 턱과 코밑에 조금씩 돋아나는 수염을 자랑스러워하며 여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하던 시절. 그러나 그런 자유보다는 고교입시라는 짐이 더 무거웠던 시절 이었다. 3학년이 되어서 나는 어머니 덕분으로 입시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겨우 겨우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교육열만큼은 높으셔서 아들의 고교입시를 걱정,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 주셨다. 진해역 오른편에 있었던 청산학원. 학교수업을 마치고 저녁이면 학원으로 걸어가 수업을 받았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있었는데 시내에서는 제법 떨어진 시골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 친구의 집에서 학원까지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동이 아닌 리라는 주소를 쓰는 시골이었다. 당시 진해 시내의 중학교는 모두 남학교와 여학교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다니는 학교는 시골인 까닭에 유일하게 남녀공학인 중학교였다. 그 중학교에 초등학교 시절 친구도 있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 친구와는 이내 학원 짝지 이상으로 친해져 버렸다. 그것을 기회로 나는 웃으며 "네가 다니는 학교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녀공학이니 좋은 여자 친구가 있으면 나에게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 친구도 웃으며 자기 마을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같은 학년의 S라는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약속이 있은 지 며칠 후 그 친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나에게 S의 얼굴 사진을 가져다 주었다. 그 친구는 S에게 나의 이야기를 했고 소개시켜 달라는 이야기도 전했다는 것이다. S는 나의 교제신청에 좋다는 뜻으로 자신의 사진을 내게 보냈던 것이었다. 사진 속에서 약간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시골 소녀의 모습. 사랑은 그렇게 오는가. 사진만으로 도 S는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여자로 내 눈 속에, 머리 속에, 마음속에, 온몸에 꽉 차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미 마음속으로 S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때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났든지 나는 S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첫사랑의 숙명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리라. 사진만으로도 내 가슴은 뛰었다. 내 사진도 한 장 그녀에게로 보냈다. 그 시절 사진이란 등교실 학교 앞에서 나눠주는 할인권을 받아 사진관에서 찍으면 낙엽 모양이나 하트 모양의 무늬 속에 얼굴이 나오던 그런 흑백사진이 아니었던가. 교복에 모자까지 쓰고 찍은 그 사진 곁에 '희망'이 니 '우정'이니 하는 문구가 흰색으로 적혀 있었던. 그 친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진만 교환한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전령사로 열심히 도와주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반에서 활동했던 솜씨를 살려 나는 멋진 연애편지를 그 친구를 통해 S에게로 보내곤 했었다. 그리고 S의 답장을 받았다. 사진과 편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녀를,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는 며칠 있으면 S도 학원에 나오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그 마을에서는 부농이었던 부모를 졸라 시내까지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녀 역시 나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S는 그렇게 처음 나에게 나타났다. 학원 앞은 큰 도로여서 벚 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4월 저녁, 나는 학원 앞 벚꽃나무 아래서 기다렸고 그 친구를 따라 S는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처음 나에게 슬픔을 가르쳐 준 벚꽃나무 아래서 만났다. 모든 사랑이 시작이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어색한 인사로 만남은 시작됐고, 서로 학원수업에 열중인 척했지만 머리 속에는 가까이에 앉아 있는 서로의 생각뿐이었다. 학원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마을로 돌아가는 막차시간까지 주차장 부근 어두운 골목에 숨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흐르자 학원시간을 한 시간쯤 빼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미 우리에게는 학원수업이니 입시보다는 서로에게 향한 사랑의 감정이 소중했다. 꽃이 피는 4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그 4월은 슬프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그 4월에 사진관에서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축제 전야제의 밤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믿었다.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이제 더 이상 4월에 슬픔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벚꽃이 활짝핀 나무 아래를 그녀와 함께 걸으며 다시 찾은 축제의 흥겨움으로, 첫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우리는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 아침 일곱 시 라디오에서 알리는 시보 소리에 맞춰 성냥불을 밝히기로 한 것이다. 성냥을 켜면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우리 사랑이 영원하기를 빌자는 약속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식구들 몰래 성냥을 켜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S를 생각했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 우주의 중심은 S였다. 어느 날은 함께 이웃 도시인 마산으로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고, 영화를 보면서 용감하게도 모자를 벗어 그속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기도 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S의 마을로 놀러가 S의 집에서 S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 밀 밭으로 몰려가 밀서리를 해먹기도 했다. 어느 휴일에는 S의 학교 교실로 가 환경미화를 돕기도 했으며, 그녀의 친구들과도 자주 어루려, 친구들 사이에 나와 그녀의 사랑은 공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 하루하루 깊어져가던 어느 주말이었다. S의 마을로 놀러갔다. 우리는 산 위 무덤 곁에 앉아 함께 밤을 새웠다. 그 마을은 바닷가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서 '시그리'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아름다운 말을 배웠다. 시그리란 그 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로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 바닷물에서 빛이 일어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었다. 죽은 물고기들의 뼈에서 나온 인들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야광작용이었다. 어두운 바다를 향해 돌을 던지면 도깨비불 같은 푸르스름한 빛이 일어났다.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에서도 파란 불이 번쩍였다. 그 마을 아이들은 배에 작은 돌을 싣고 밤바다로 나가 돌을 던지며 시그리를 즐겼다. 물수제비로 뜨는 신비한 불빛 시그리. 무덤에서 밤을 새우고 내려온 새벽 그녀를 집으로 보내주며 집앞에 있는 다리에 앉아 그 시그리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혼불이 머리를 타고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열여섯 나이에 시그리 같은 차가운 불빛에서 그처럼 뜨거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아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 입맞춤이 첫사랑의 완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황홀함이 벚꽃나무에 핀 새 잎이 낙엽이 되어 지는 가을에 끝이 나고 말았다. S는 가을이 깊어지자 내 곁을 떠났다. 실연의 주체는 나. 그녀에게 중2학년 때 서울로 전학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가 좋아했던,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었던 그 친구가 불쑥 다시 나타남으로써 그녀의 선택은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첫사랑을, 아름다움을 고백하는 자리에 이별의 고통과 상처를 더 적어 무엇하겠는가. 다시 사랑의 자리로 돌아와 달리는 여러 차례 나의 애원과, 나를 아낀 선배 누나들이 그녀를 찾아가 나선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면으로 나는 첫사랑의 패배자로 기록됐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차가운 뺨 한 대를 남기고 돌아섰다. 더 이상 비참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벚꽃나무 아래서 찬 이슬에 젖어 있는 낙엽을 짓밟으며 나는 절망이라는 끝없는 우물 속으로 추락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때 결별의 고통은 아픔으로 오랫동안 나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지금은 오랜 아픔보다 짧은 사랑의 기쁨이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녀에게로 향한 그 지독했던 증오와 원망도 이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에게 첫사랑이었기에. 첫사랑은 늘 미완성이지만 완벽한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사랑이기에. 사족 하나. 그 결별 이후 우리는 대학시절 대구 시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대구 모 대학에서 응모한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입상이 되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에 갔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났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그녀가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도 그 부근에서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가 내 생각이 나서 먼저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사랑이 깨어진 사람들을 위해 신이 한번쯤 허락해 주신 그런 운명적인 재회 앞에서도 어찌할 수 없이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지금의 아내와 열애중이었고, 전문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녀도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4월이 오면 진해로 가보아야겠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 자리, 그 벚꽃나무는 그대로 서 있는 지. 꽃은 또 그렇게 아름답게 피는지. 피었다가는 부는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지. 4월이 오면. 정일근 -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경주 남산','감지의 사랑', '처용의 도시',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바다가 보이는 교실' 등이 있으며, 사랑시 선집 '첫사랑을 덮다'가 있다. 현재 울산대 사회교육원 문예창작학과 지도교수로 있으며,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하재봉 - 단풍잎 속에는 내 피가 들어 있다 나는 피가 없다 밤이 되면 내 피는 모두 어디로 가는가 가슴을 쓰러내리면 하얀 버즘 마르고 마른 눈물, 별이 뜨고 저녁과 함께 나는 가고 싶다 너의 금 간 벽, 파랗게 떠는 돌들의 이마 내 몸을 빠져나가는 눈부신 빛이, 나무의 끝에 닿는 순간 나의 세계는 변화할 것이다. 어쩌다 무덤 위로 차가운 태양이 솟구치고 다시 또 몇몇 사람은 누울 자리 찾아 땅 밑으로 내려갈 것이지만 빛의 허리를 부여잡고 그래, 울지 말자 꽃다운 내 나이 봄이 오고 있으니 죽어도, 너의 문 앞에서 죽자 - 시 ' 빈혈' 전문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르겠지만, 운전하다 보면 트렁크 뒤쪽에 캐나다 국기가 인쇄된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차들이 있다. 붉은 단풍잎이 들어 있는 캐나다 국기를 볼 때마다, 어쩌면 그 단풍잎 속에 내 핏방울이 들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불교예요?" 내가 그녀에게 처음 한 말은 이것이었고,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개의 혓바닥이 아스팔트에 닿을 것처럼 축 늘어진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 생일이기도 했다. 도시에서 하숙을 하고 있던 나는, 방학중이었지만 고3 이었기 때문에 집에 내려가지 못했다. 그날 나는 우체국에서 생일축하 전보를 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너무 더웠다. 팥빙수를 먹기 위해 들어간 간이음식점에서 교복을 입은 여학생 두명이 앉아 있었다. 팥빙수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녀들을 훔쳐보았다. 배지를 보니까 2학년이었다. 내 귀는 예민하게 움직여서 그녀들이 나누고 있는 대화를 채집하고 있었다. 두달 전 있었던 여학교 축제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통 있는 그 여학교 축제는 유명했다. 전교생이 각 반 별로 세계 각국의 민속의상을 입고 춤추며 그 나라 문화를 소개하는 일종의 가장무도회였는데, 모든 남학생들이 가보고 싶어했지만 그곳은 금남의 구역이었다. 그러나 나는 빙긋 웃었다. 두 달 전, 나와 내 단짝 악동은, 그 페스티벌에 참여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날, 승복과 삿갓과 고무신을 구해서 스님으로 가장을 했다. 학교 정문에는 훈육주임 선생님이 지키고 있었지만 우리를 수상하게 생가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학생들이 짙은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은 모습으로 춤구는 것을 삿갓 아래로 즐겁게 바라보았다. 천막 아래 차려놓은 음식들도 집어 먹었고, 세계 각국의 민속생활을 소개 한 전시관도 훑어보았다. 우리가 가장 즐거워했던 것은 금남의 구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여학생들을 가까이서 마음놓고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70년대였다. 남녀 학생들의 만남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여학생들의 하얀 종아리만 봐도 가슴이 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시간도 안되어서 쫓겨나야만 했다. 학교를 순찰하던 훈육주임 선생님 눈에 발각되어 삿갓을 빼앗겼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무용담은 다음날 학교 전체로 퍼져나갔다. 우리는 장황하게 우리가 본 것들을 친구들에게 전해주었다. "남학생 두 명이 스님으로 변장해서 들어왔었잖아. 룸비니에서 그 남학교로 정식으로 항의를 했대." 그녀들은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룸비니'가 불교학생회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우리학교에 항의를 한 것은 모르고 있었다. 나는 팥빙수 집을 나가는 그녀들을 뒤따라갔다. 집도 같은 방향이었다. 학교 앞 큰길에서 두 여학생은 갈라져서 따로따로 걸어갔다. 나는 그중 눈여겨본 한 여학생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물었다. "불교예요?" 그녀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나는 내가 그날 페스티벌에서 승복을 입고 들어간 학생이라고 자수를 했다. 그녀는 나에게 광명을 찾아주었다. 친구들이 대입시험을 위해 잠자는 시간을 아껴가며 막바지 총정리를 하던 그 무렵, 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까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공부를 해야 한다면서 잘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그녀였으며,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책만 들고 다니는 친구들을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했었다. 그때, 나의종교는 시였다. 나는 시를 쓰고 있었다. 그리고 내 시의 근원은 그녀였다. 그녀는 나에게 무수히 많은 시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으며, 내 영혼의 동굴에 피리를 불어주곤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가 쓴 시들을 읽어주었다. 다른 친구들이 대입 본고사 한 달 전부터 서울로 올라가서, 독서실에서 합숙하며 시험준비를 할 때도, 나는 시험 이틀 전까지 그 도시에 남아 있었다. 그녀와 떨어지기 싫어던 것이다. 결국 나는, 전기 입시에 실패했다. 1,2교시 시험은 괜찮게 보았었다. 이런 페이스라면 충분히 합격할 것 같았다. 그런데 2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지원했던 과의 수험생 중에 그녀와 이름이 같은 여자애가 있었다. 나는 그 때부터 시험 도중에 자꾸만 그녀가 생각났다. 정신은 혼란스러워졌다. 시험보러 올라 올 때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던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내가 숨쉬는 것은 그녀가 숨쉬다 남은 공기였으며, 내가 바라본 태양은 그녀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태양이었다. 후기시험에 합격한 후, 나는 그 도시로 내려갔다. 그녀는 겨울 방학중이었고, 곧 고3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곧 바로 전화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아버님은 교육자이셨고, 매우 엄 한 분이셨다. 남학생이 전화를 해서 그녀를 찾으면 큰일나는 것이다. 대신, 그 여름날 팥빙수집에서 그녀와 함께 있었던 단짝친구에게 전화를 하면, 그녀에게 연락이 되곤 했다. 나는 약속장소로 나갔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돌체'라는 음악 다방이었다. 생맥주와 청바지와 통기타의 청년문화가 꽃피던 시절이기도 했다. '돌체다방'은 동굴 내부처럼 인공암벽이 만들어져 있고, 암벽사이로는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 있으며 담배연기가 홀 안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었다. 나는 좌우를 둘러보았다. 구석에 그녀와 그녀 친구, 그리고 모르는 여자가 두 사람 더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따로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제법 흐른 후, 두 여자가 다가왔다. 그녀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여자였다. "잠깐 나가서 얘기 좀 할까요?"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멈칫거리며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그 여자들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녀보다는 조금 나이들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 미리의 언니되는 사람인데, 잠깐 같이 가줘야겠어요." 그렇게 말하더니 지나가는 택시를 잡는 것이었다. "어디로 가는데요?" 나는 조금 저항을 했다. 그러자 그녀 언니는 얼굴이 변하는 것이었다. "남자가 책임을 져야지 타요." 택시 문이 열리자, 그녀의 언니 옆에 서 있던 여자가 먼저 안쪽에 탔다. 그리고는 나보고 타라고 했다. 내가 그 옆에 앉자, 그녀의 언니가 내 옆에 탔다. 즉, 나는 택시 뒷자리에서 두 여자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어디로 가는 거죠?" "우리집에요.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세요." 나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집 앞에서 택시가 멈추고 그녀의 언니가 먼저 내렸다. 언니는 내리면서 내 한쪽 팔을 꼭 끼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서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달아날 수도 없었다. 다리가 너무 후들거렸던 것이다. 차 안에서 나는, 내가 책임질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키스만 한 여자의 평생을 책임져야 한다면, 모든 연인들이 키스를 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진정으로 그녀를 평생 책임지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고 좋아하던 풋사랑이 아니라, 떨리는 가슴으로 데이트 신청을 해서, 같이 포도밭에도 가고, 시와 예술, 종교를 이야기했으며, 슬쩍 스치는 손등의 감촉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눈을 뜨던,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우린 아직 18,17 세였다. 온갖 꽃나무들이 심어져 있는 그녀의 집 정원으로 내가 들어갔을 때, 모두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대청마루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그녀의 부모 앞에서 나는 죄인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편히 앉으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감히 양반다리를 하고 앉을 수가 없었다. 내 가족사항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 아버님도 중.고교 교장회의 같은 데서 서로 얼굴은 마주치는 사이였다. 30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휠씬 더 짧은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어머님은 사과를 깎아 쟁반에 담아오셨다. 겨울이었지만, 내 등에서는 축축 하게 땀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 학생이니까 공부하는 데 열중해야 하므로 더 이상 그녀를 만나지 말라는 말씀이 최종적으로 떨어졌다. 나는 대답하지 앉았다. 그냥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아버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그녀와는 연락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자초지종을 들었다. 나를 택시에 태워 납치해 갔던 여자들은, 그녀의 언니와 올케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접선 시간과 장소를 언니에게 들킨 것은, 순전히 친구의 잘못이었다. 어젯밤, 친구는 그녀에게 전화를 해서, 내일 나를 만나는 것 잊지 않았냐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던 그녀는 잘 생각이 안 난다는 듯이, 언제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지? 묻더라는 것이 다. 그 친구는 다시 한번 시간과 장소를 말해 주었는데, 다음날 그녀의 언니가 올케와 함께 우리들의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그러니까 친구의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였다. 세 살 터울인 그녀와 그녀의 언니는, 목소리가 너무 똑같아서 식구들도 혼동한다는 것이다. 그녀의 언니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모른 체하면서, 우리들의 접선시간과 장소를 알아내고 급습 했던 것이다. 그녀의 언니가 나를 납치하려고 계획을 세웠던 것은, 고3이 되는 그녀를 수험공부에 전념케 하려는 것 이외에는 또 다른 이유가 없었다. 최근 그녀의 집에 한밤중이나 새벽에 느닷없이 괴전화가 걸려온다는 것이다. 수화를 들면 아무 말도 안하거나, 아니면 곧바로 끊어버린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그녀가 나를 만난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언니는 범인이 나일 것이라고 단정을 한 것이다. 물론 나는 그런 전화를 하지 않았다. 후에 그녀에게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도 그 괴전화의 범인은, 그녀를 짝사랑하던 같은 동네 남학생일 것이라는 거였다. 그 납치사건 이후 한동안 우리는 만날 수 없었다. 나는 대학입학식 이전까지 무한대의 자유를 즐기기에 바빴다. 그녀는 집과 학교를 오고 가는 일상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3월이 되면 나는 서울로 가고 그녀는 그 도시에 남는다. 우리는 헤어져 있어야 했다. 1년 뒤 그녀가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된다면 다시 만날 수 있지만, 그녀의 집에서는 지방대학을 권하고 있었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은, 그러나 스무 살 젊은 영혼에게는 오히려 따뜻한 것이었다. 나는 그 한달 동안 친구들과 함께 시내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숨을 쉬었다. 그것은 노예해방과 비슷한 것이었다. 술집에서 저녁식사를 겸해 술을 마시고, 디스코텍에서 춤을 춘 뒤 친구 집에서 잠을 잤다. 그때도 나의 더듬이는 항상 그녀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3이 된다는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부보님의 설득이 주효했는지,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 겨울밤, 오랜만에 우리는 만났다. 그러나 곧 말다툼을 하였고, 차가운 강바람이 부는 다리 위에서 나는 그녀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사라졌다. 나는 곧 후회했다. 이렇게 헤어진다면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살 속으로 파고들던 그날밤, 12시 통금시간이 가까워졌지만, 나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이미 그녀의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방이 어느쪽인지도 휜히 알고 있었다. 순찰을 도는 방법들의 호루라기 소리를 피해, 나는 그녀의 집 담장에 낮게 엎드렸다. 근처에서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지만, 정원에는 키 큰 나무들이 많이 있어서 몸 하나를 가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내 몸은 긴장되어서 땀으로 번들거렸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담을 넘었다. 날카로운 나무 모서리에 손등이 찢겨져 피가 흘러나왔다. 마당에는 나뭇잎들이 쌓여 있어서 나는 조심스럽게 발자국 소리를 죽이며 그녀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방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전통 한옥구조였기 때문에 방문 앞에는 툇마루가 있었다. 그러나 차마 문을 두드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가슴에 아프게 못을 박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가지고 있던 러시아 시집을 넘기다가 당시의 내 마음과 똑같은 상황을 묘사한 뚜르게네프 시인의 시를 한 장 찢었다. 그리고 그녀의 방문 틈으로 살며시 밀어넣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담을 넘어, 머물고 있던 친구 집으로 돌아왔다. 통금 해제 사이렌이 불고 있었다. 그녀는 결국 지방대에 진학했고 우리는 그 뒤에도 몇 년 동안 소식을 주고받다가 서로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면서 연락이 끊어졌다. 그런데 얼마 전 나는 우연히 그녀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국제결혼을 해서 지금은 캐나다에 살로 있다는 것이다. 캐나다 뱅쿠버 교외에서 그녀는, 아직도 그 옛날의 일들을 추억하고 있을까? 단풍잎 속에는 아직도 내 핏방울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하재봉 - 중악대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으며, 1991년 문에중앙 신인상에 중편소설이 당선되었고, 1980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0년부터 1990까지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다. 작품집으로 시집 '안개와 불','비디오/천국', '발전소' 장편소설 '콜랙트 콜', '블루스 하우스','쿨재즈', '황금동굴', '컬트시대', 영화평론집 '하재봉의 비디오 천국', '하재봉의 영화읽기', 에세이집 '트라이앵글이 은빛으로 우는 이유', 번역시집 '수잔과 함께 강가에 앉아 '등이 있고, 동아TV 드라마 '블루스 하우스'의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기도 했다. 현재 집필활동과 함께 영화평론, 방송 MC를 하고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윤택 - 그녀와 나 사이에 한 편의 시가 태어났는데 시집을 왔다 맹숭맹숭하다 내 위에 포복한 남편 괜스리 심각한 표정 참을 수 없어 쿡, 웃다가 뺨다귀를 맞았다 거의 혼자 방에서 지낸다 책 헤드폰 거울 그리고 시간은 무제한 방출 그냥 이대로 지워 간다는, 어쩌면 지당한 생각. 네 볼품없는 옆모습이라도 떠올려야겠다 솜씨 없는 연애법이랑 그 잘난 시 나부랭이까지 나에겐 세일러복 시절의 사진첩 같은 것인가 감상에 빠져 있군 이라든지 누구나 가끔 그럴 때가 있어 따위 몰상식한 답변은 사양하겠다 국제시장 골목서 칼국수 사먹으면서 너가 부자랬음 좋겠다고 한 말을 기억하니? 그때 선생님의 눈길을 끌기 위해 과도한 모험을 서슴지 않고 연출하는 아동처럼 너에게 헌납했던 골목에서의 키스 연극이었다. 부산 앞바다 너절하게 떠 다니는 걸레조각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서 늘 죄송했다 도시 집단 이주촌 제1종 생활보호대상자 밀떡 먹고 검은 똥 누면서 필사적으로 2년제 교육대학 천상의 밧줄처럼 매달려야 했던 여자에게 이 시대는 처음 눈뜬 사랑을 허락할 능력이 있니? 너는 땡전 한푼 없이 날 불러내었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숙녀 흉내라도 내기 위하여 나는 전 날밤 3백 개의 플라스틱 꽃술을 더 달아야 했다. 밤 새워 20원 짜리 조화를 만들면서 세 번 네 번 눈을 감았다 떠도 아니다. 이건, 맹목이다 나는 문이란 문 죄다 열어제쳐놓고 일기장 속 고이 찔러넣은 감정들 날려 버리기로 했지 지하다방 희미한 등불 아래 기억을 씻고 광복동 밤길 갈 곳 없이 떠도는 너의 발자국 지우고 한 해 다 지나도 소식 없는 2급 정교사 자격증 따위 믿지 않기로 하고 당신, 나의 권리자가 되어 주겠어요? 교육대 졸 보조개 소유 33-23-33인치 신부값은 얼마쯤 할까 철 지난 사내들에게 추파를 던졌지 지금 잠옷까지 그럴듯하게 걸친 채 얼음 채운 잔 현실적으로 들고 있다 경탄할 만한 세상 아니니? 아침마다 한강을 넘는 단조로운 어깨들 꿀꿀거림 속에서 힘차게 승용차 기어를 밟는 남편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으니 잘들 해 보라지 내가 보여주는 한 편의 멜로드라마 또한 한강의 기적처럼 새로운 미덕으로 떠오를 것이니 너 같은 철 지난 사림들은 상처를 내보이며 엄살 떨다가 자식새끼 하나 없이 일찍 죽어라 내 그때, 너에 대한 기억들로 밤치장하고 불 밝힌 강변로 제법 우아한 모습으로 울리라. - 시 '수자의 편지'전문 왜 시를 쓰려 하는가? 누군가 이런 질문을 내게 던질 때 나는 심심해서 시를 쓴다고 대답한다. 이런 시시한 인간 같으니! 라고 누가 말한다면, 나는 그 말 그대로 시인은 참 시시한 인간이라고 답해 준다. 시인이 위대하다는 말은 유아독존적인 과대망상의 소산이다. 시인은 참 한심한 존재일 뿐이다. 시집이 읽히는 이유는 이 세상에 시시하고 한심한 인간들이 그만큼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들레르는 바다 위를 나는 새, 알바트로스를 시인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높이 떠서 공중을 나는 새, 알바트로스의 모습은 자유와 해방의 황홀경을 느끼게 해준다. 그러나 그 새가 나는 데 지쳐 선박 갑판 위에 내려앉았을 때, 그 멋없는 몰골에 당황해 하는 모습은 곧 선원들의 경멸 대상이 되고 만다. 멋쩍게 크기만 한 새가 갑판 위를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선원들의 발에 채이고 얻어맞으면서 지상에서의 수모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이게 시인의 모습입니다'는 말에 나는 동의 한다. 시인은 지상에서 결코 자신의 삶을 증거하지 못한다. 하릴없이 걸기적거리는 모습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디엔가 구석진 곳에 처박혀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다. 나의 문학청년 시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시인의 보금자리는 행안통 번화가를 비껴 앉은 낡은 클래식 다방이었다. 커피 한잔 값 80원만 있으면 하루종일 구겨박혀 꿈꿀 수 있는 '오아시스'. 바깥 세상은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는 데 나는 느릿한 속도로 흘러나오는 음악 속에 숨어 살았다. 음악 속에 나의 집을 짓고 시를 꿈꾸었다. 그때 유일한 행위는 사랑이었다. 사랑은 가장 노동력이 적게 드는 행위였고, 무엇보다 내게는 풍부한 어휘가 자산이었다. '아, 나도 이 세상과 구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건 사랑이었다!'라는 눈뜸. 내 사랑은 작고 이쁜 새 같은 여자였다. 너무 작고 등이 굽어서 멀리서 보면 곱추처럼 보였다. 2년제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기약 없이 발령을 기다리던 그녀는 그 무료한 기다림의 시간을 '오아시스'에서 보내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그녀 또한 커피값밖에 없어서 온종일 음악과 함께 보내야 했던 처지였으므로 나와의 만남은 어떻게 보면 상투적이었다. 낡고 침침한 찻집에서 온종일 않아 있어야 했던 우리는 어느 날 서로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 그날 이후 내가 그녀에게 쏟아부었던 말들은 몇트럭 분으로 실려 나갔으리라. 나는 끊임 없이 말을 쏟아붓는 아구통이었고 그녀는 끈질기게 내말을 들어 주는 귀였다. 혓바늘이 서고 목젖이 퉁퉁 붓도록 쏟아놓았던 말들에는 분명 그녀의 무료함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서로 정이 들고 나의 만만찮은 관념의 분량을 인정하는 그녀였지만, 손끝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녀의 또 다른 태도였다. 깨끗한 몸으로 남자에게 시집가야 한다는 그녀의 순결성을 나는 이해했다. 그녀에게는 2년제 교육대학을 나온 학력과 언젠가 주어질 교사라는 직책, 그리고 그녀의 깨끗한 몸이 삶의 무기였던 것이다.그녀는 대학도 못 다니고 머리통만 멋쩍게 큰 문학청년을 감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의 주체할 수 없이 큰 머리통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이 그녀의 생활의 위안은 될 수 있었을지언정 삶의 식량이 되어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어느 날 문득 내게 키스 한번 해주고, 사랑해, 낮은 목소리를 내뱉고는 사라졌다. 한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던 그녀에게서 편지가 왔고, 나는 내 관념을 먹고 떠난 그녀의 편지가 이미 한편의 시가 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는 시집을 갔고 현실 속에 무사하게 안착했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녀의 몸 속에 나의 사랑은 암세포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기다렸던 삶의 평화는 어떤 모습이었는가? 시집은 갔는데 맹숭맹숭하고 그렇게 고이 간직했던 순결의 문을 열면서 쿡, 웃어 버렸던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이것이 그렇게 귀중한 삶의 무기였던가? 무제한 방출되는 시간 속에서 거의 혼자 집에서 지내는 결혼생활은 그녀에게 어떤 삶의 위안이 되어주고 있는 가. 남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힘차게 기어를 밟으며 한강을 넘는다. 그 시간 그녀는 잠옷까지 그러듯하게 걸쳐 입고 얼음 채운 술잔을 들고 있다? 그녀는 아마 이런 인생이 얼마나 지겨운 삶의 무게인가를 느끼기 시작했으리라. 그래서 어느 날 문득 이쁘게 밤치장을 하고 불 밝은 강변로를 걸으면서 나를 기억해 내기 시작한 것이리라. 그리하여, 그녀는 비로소 내가 토해 놓은 그 무진장한 사랑의 관념들을 되씹기 시작했을 것이고, 자신을 데려갈 능력조차 없었던 남자에게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며 찔금거리다가 편지를 썼을 것이다. 편지는 찻집으로 왔고, 나는 한 해 꼬박 그녀를 줄기차게 기다리다가 그 편지를 받았다. 그때의 느낌은 무엇이랄까, 내게는 작은 사랑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인신매매당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버림받지 않고 무사하게 현실 속에 안주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무엇보다 그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내가 여전히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되어 주었고, 무엇보다 그녀의 편지가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그녀와의 사랑은 편지 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건 나의 관념이기도 했고 나와 그녀가 보내었던 시간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리고 현실을 뛰어넘는 사랑의 힘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 편지는 몇 년 후 나의 시로 둔갑하여 발표되었다. 최소한 그녀의 남편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짓눌려 살아갈 위인이므로 내가 발표한 시를 읽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마 읽을 것이다. 그리고 새삼스런 두근거림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사랑은 극적 갈등도 전개도 없이 끝났다. 한 편의 소박한 멜로드라바처럼 끝이 난 사랑이기에 세상에서 시비를 걸 이유도 없다. 나는 그녀의 남편과 소줏잔을 기울일 수도 있고, 그녀가 낳은 자식을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있다. 언젠가 그녀가 나타난다면 다시 그 무진장한 말을 애무처럼 쏟아줄 의사도 있다. 그녀와 나 사이에 한 편의 시가 태어났는데, 그 어떤 현실적인 권리가 우리를 이별시킬 것인가. 이윤택 -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작품집으로 시집'시민', '춤꾼이야기', '막연한 기대와 몽상에 대한 반역', '밥의 사랑', 비평집' 해체, 실천, 그 이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정부가 있다', 희곡집 '웃다 북치다 죽다', '문제적 인간 연산', 연극이론서 '이윤택의 연기훈련', '이윤택의 극작실습', 시나리오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TV드라마 '행복어사전'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연극연출가로도 활동하며, 극단 '연희단 거리패'와 우리극연구소 '가마골 소극장'을 이끌고 있다.
몇 달 전이었습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계속 걸려 왔지만 평소 낯선 번호의 전화는 받지 않기에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약 두 시간 동안 여덟 통의 부재중 전화와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왔습니다. 아버지가 제주도의 한 병원에 계시니 연락 바란다는 내용에 덜컹! 후들거리는 손으로 동생에게 연락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배를 타십니다. 아버지는 부산에, 엄마와 우리 자매는 인천에 살면서 왕래 횟수가 부쩍 줄고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오래전 어느날, 배를 탈 거라는 아버지 말씀에 우리는 짜증부터 냈습니다. 선박 사고 등 위험한 일로 우리의 평온에 찬물을 끼얹을 것 같아서요. 그저 우리가 드리는 용돈으로 조용히 사시기를 바란 겁니다. 아버지는 피해 안 주겠다며 우리를 달래셨습니다. 아버지는 겨울 끝물이 넘실거리는 차가운 바다에 빠졌다가 구조되셨다고 합니다. 놀라움이 가라앉자 당시 아버지가 취중이셨다는 병원 쪽 말에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동료분 얘기를 듣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사고 직후, 알 수 없는 말만 되풀이하던 아버지에게 연락할 가족이 있느냐고 묻자 두 딸의 휴대 전화 번호를 또박또박 불러 주셨다는 겁니다. 단축 번호만 아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놀랐습니다. “아빠. 우리 전화번호는 언제 외우셨어요?”“니들하고 내가 그거밖에 더 있나!” 가족이라는 외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아버지는 그 번호를 얼마나 외우고 또 외우 셨을까요? 그 줄을 튼튼하게 만드는 건 우리 몫이겠죠. 노력할 겁니다. 하민정 님(가명) | 인천시 남구 -《좋은생각》2010년 8월호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정하 슬픔은 우리 방황하는 사랑의 한 형태였다 너에게 달려가는 것보다 때로 멀찍이 서서 바라보는 것도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겠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묵묵히 너의 뒷모습이 되어주는 것도 너를 향한 더 큰 사랑인 줄을 알겠다. 너로 인해, 너를 알게 됨으로 내 가슴에 슬픔이 고이지 않는 날이 없었지만 네가 있어 오늘 하루도 넉넉하였음을...... 내 생각마저 접으면 어김없이 서쪽 하늘을 벌겋게 수놓는 저녁해. 자신은 지면서도 세상의 아름다운 뒷배경이 되어 주는 그 숭고한 헌신을 보면, 내 사랑 또한 고운 빛깔로 바알갛게 번지는 저녁해가 되고 싶었다. 마지막 가는 너의 뒷모습까지 감싸 줄 수 있는 서쪽 하늘, 그 배경이 되고 싶었다. 시 '길의 노래' 전문 내게 첫사랑은 없었다, 라고 말을 하는 지금의 내 심경은 쓰라리다. 그건 내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었으므로. 고백컨대 여지껏 나는 사랑에 늘 비켜 서 있었다. 독자들에게 나는 끊임 없이, 사랑이 어떤 아픔을 동반하건 상관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글을 써왔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건 마찬가지겠지만 종말이 있다는 걸 일찍부터 예감해서 일까. 사랑의 종말, 그건 다른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가슴 아픈 일이겠지. 그렇지만 시작도 못하고 가슴속에서만 머문 일이 있다면 그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애초에 다가서지도 못했기에 붙잡을 수도 없었던 내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그랬다. 그 애만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아리다. 그런 점에서 나는 카프카의 말을 겸허히 수용한다. 누군가를 생각할 때 그 사람이 자신에게 비수와 같은 존재이며, 그 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에는 듯한 아픔을 느낀다면 당신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 그랬다. 그 애의 존재가 내게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딴전을 피우고 있었지만 내 몸의 세포는 모조리 그 애를 향해 뻗어 있었음을. 가을이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은 가을이었다. 우리들 마음속에 한잎 두잎 낙엽이 쌓이는. 바람은 길거리에만 부는 것이 아니라 내 공허한 마음속에 불어닥쳤고, 그리하여 나는 한자리에 있지 못했다. 사람의 가슴속에 부는 바람은 누구를 향한 갈망이 아닐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기에 내 안에 이는 흔들림. 난 교회에 들어서자마자 그 애부터 찾았다. 한 번도 그애와 길게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그녀가 나만의 여자인 양 착각 속에 빠져있는 것도 그즈음 나의 행복이었다. 단아한 교복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서 성가대의 반주를 하고 있는 그애의 목덜미를 훔쳐보느라 나는 한번도 제대로 찬송가를 부르지 못했다. 하나님한테는 참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엄숙해야 할 기도시간마저도 나는 눈을 뜨고 있었다. 그때 내게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면 그 시간이 더 길어져 더 오래 그 애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이었으므로. 그랬다. 그 애는 항상 내가 볼수 있는 거리에 있으면서도 잡히지 않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애의 눈길 또한 늘 다른 곳에 머물러 있었기에, 성가대 지휘를 맡고 있는 김 선생님을 쳐다볼 때의 그 애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가끔 교회 벤치에 그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걸 볼 때면 나는 태연한 척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 큰 슬픔이 밀려와 내 가슴에 아픈 흔적을 남겼다. 애당초 그 애에게 다가서지도 못했기에 그 애를 원망할 수도 없었던 나는 한걸음 더 떨어져 그 애를 지켜볼 뿐.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아니 어쩌면 늘상 그 근처를 서성이던 내가 그 두 사람을 목격한 것은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그 애를 집까지 바래다준 김 선생님이 돌아가던 모습을 그 애는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고, 길 모퉁이에 숨어 그걸 지켜보던 나는 또 한없는 나락으로 스며들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보고 있는 건 그 애의 텅 빈 육체뿐이었으므로. 나는 영혼까지 담긴 그 애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때의 그 애에겐 영혼이 없었으니까. 그 애의 영혼은 김 선생님을 따라가고 있었으니까. 그 애 곁을 줄곧 맴돌면서 정작은 한 걸음도 다가서지 못했던 나는 그날 이후로 골방에 처박혀 있었다. 멋모르고, 당연히 사랑은 달콤하고 황홀할 것이라고 상상하던 나에게 사랑은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었다. 긴 밤 내내 전해주지도 못할 사연들만 끄적이다 날이 뿌옇게 새던 그날들. 세상에는 사랑으로 인해 더없이 행복한 사람도 있겠지만 때로는 슬픔만 안고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때 나는 알았다. 눈 오는 날엔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라 마음과 마음끼리 만난다. 그래서 눈 오는 날엔 사람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눈 오는 날엔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눈 오는 날' 어둡고 음습한 골방에서 그해 가을을 다 보낸 나는 겨울이 되어서야 거리로 나섰다. 마침 그 때 눈이 내렸다. 상처가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지만 눈은 또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니다. 어쩌면 나는 내리는 눈을 빌미로 그 애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두 사람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를 해줄 수 있다는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가을 내내 앓았던 내 열병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고 싶었다. 교회 근처에 다가서자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어떤 곡인지는 몰랐지만 그녀가 치고 있다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저 그 애가 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가슴은 떨렸고, 왠지 모를 슬픈 음률에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온기로 환히 달아오르는 그대 얼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때로는 그대 가슴을 데워 주기 위해 내가 톱밥난로로 뜨거워질 때도 있어야 하리. '톱밥난로' 그랬다. 나는 그 애가 치는 피아노 음률을 들으면서 그 애의 가슴을 따뜻이 데워주는 톱밥난로가 되어주기로 한 결심을 굳혀가고 있었다. 내가 짐작하기로 그 애가 하는 사랑도 결코 순탄치는 않을 것이었고, 만일 그렇다면 내가 그 애의 슬픔까지 넉넉히 감싸주는 더욱 성숙한 사랑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 그즈음 내가 느낀 것은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와는 멀어지도록 노력 하는 것이었다. 좁은 새장으로야 어디 새를 사랑할 수 있을까. 새가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내 안에서 날 수 있도록 내 자신이 점점 넓어지는 것. 그것만이 그 애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나는 깨닫고 있었던 것이었다. 예상대로 그 애는 피아노를 치다 말고 건반 위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그날이 바로 김 선생님의 약혼식이 있는 날이었음을 나는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어 알고 있었고, 나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 애의 슬픈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다. 용기를 내어 나는 그 애 앞에 다가섰고 울다만 얼굴로 그 애는 나를 쳐다봤다. 그때 난 처음으로 그 애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볼 수가 있었는데, 그날만큼은 피하지 않고 내 짝사랑을 들키고 싶었는데, 그 애는 참으로 가슴 섬뜩하게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왜, 이젠 네 뜻대로 되어 속이 시원하니? 마치 그런 질책을 하는 듯한 그 애의 표정을 보고 내가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내 진심을 어떻게 하면 그 애에게 전달 하 수 있을까 막막하던 나는 그만 고개를 속이고 말았고, 나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이 내 발 밑에 툭 떨어졌다. 가슴이 아팠다. 아픈 것은 온전히 나였으면, 내가 아픈 것은 견딜 수 있었지만 그 애가 아픈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나는 조심스럽게 그 애의 어깨에 손을 내밀었고, 그 애는 뜻밖으로 내 가슴으로 무너져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그 애의 눈물이 내 가슴에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난 또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겨야 했던 그날, 그날은 그 애를 가장 가까이 두었으면서도 가장 멀리 느껴야 했던 아주 춥고 외로운 날이었다. 그 애의 따스한 마음 한 조각이라도 내가 가질 수 있었다면 그해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았을 텐데. 그래, 10대의 마지막 겨울을 나는 그렇게 보냈다. 사랑하는 그 애로 하여 나는 외로웠고, 그 애로 하여 나의 외로움은 휠씬 구체적인 모습으로 내게는 절박했다. 마음속에 한 사람을 간직한다는 것. 마음속에 한 사람을 섬긴다는 것이 왜 그런 고독과 외로움의 수행이어야 하는지. 그래, 어쩌면 슬픔이란 것은 내 방황하는 사랑의 한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길을 잃고 헤매던 나. 그리움이 있어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도가도 끝이 없었다. 막막한 그 길에서 내 발은, 내 영혼은 다 부르트고. 이정하 - 1962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원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경남신문과 대전일보에 시가 동시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리 사랑은 왜 먼 산이 되어 눈물만 글썽이게 하는가','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 겹다'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우리 사는 동안에', '사랑하지 않아야 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면'등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김상미 파랑새 -과거는 시작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고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있어 온 것들은 앞으로 올 새벽의 여명일 뿐이다.(H.G.웰스) 나는 그와 헤어졌다. 어제와 헤어지고, 어제의 섹스, 어제의 거짓말, 어제의 눈부신 하늘과 헤어 졌다. 나는 오늘의 단단한 붉은 벽돌 속에 박혀, 웃는다. 모든 웃음은 어제의 눈물이다. 어제의 그리움, 어제의 오독, 어제의 분노이다. 나는 그와의 교감을 끊었다. 진부한, 모두가 가는 그 길을 이탈했다. 나는 내 가슴에 켜져 있던 촛불을 껐다. 언제나 삶을 선호하게 만들던 뜨거운 심장 속의 피를 모두 뽑아버렸다. 모든 밧줄과 엉킨 매듭과 고리들을 끊어 버렸다. 액자에 같혀 벽에 걸린 그림처럼 나는 움직이지 않는 하나의 개념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포장된 상자 속의 선물, 나는 나를 사방으로 퍼뜨린다. 모든 선물상자는 살아 남은 자들의 것. 나는 웃으며 나를 집어올리는 그들을 본다. 어제의 두개골인 어제의 바람이 나를 붙잡으려 데구루루 굴러오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미 늦은 새벽, 그 누구도 어제의 바람으로 오늘을 씹어 삼키지 않는다. - 시 '늦은 새벽'전문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나의 오빠.그러면 그는 그의 커다란 호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물을 통해 나는 그에게로 갔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하늘이, 그의 가슴에는 모든 이들의 목소리가 들어 있었다. 그는 세상이었고, 나는 언제나 세상의 바깥쪽에 있었다. 오빠, 나의 오빠, 나를 세상으로 들여보내 주세요. 아무리 애원하여도 그 세상엔 내 자리라는 게 없었다.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똑 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 혈육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그에겐 부인이 있고, 아이가 있다는 게 수긍이 갔다. 해서는 안 되는 근친상간처럼 내 사랑 또한 불륜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하나의 얼굴만이 있었다. 수천의 얼굴들 속에 불켜진 하나의 얼굴. 나는 그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푸른 실핏줄 사이로 스며 나오는 기쁨, 분노,고독, 슬픔 등을 들이마셨다. 그러면 그가 샅샅이 보였다. 햇빛에 반짝이는 반백의 머리카락, 생기 만발한 웃음소리, 한 웅큼 공기를 쥐고 있는 손바닥...... 사랑이란 물 흐르듯 그렇게 가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물 흐르듯 가는 것. 그런데도 내 사랑은 왜 이렇게 끝이 없고, 한도 없고, 원도 없는 것일까? 한 권의 두꺼운 책처럼 아무리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도 왜 이렇듯 끝 페이지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나는 그를 따라 그가 있는 서울로 왔다. 몸과 마음에 지옥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그 지옥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마치 내 방에 있는 것처럼 편했다. 어차피 지옥에서 한 발짝도 떠날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그 끔찍한 지옥이 나의 선이 되도록 하리라 결심까지 했다. 끝간 데 없는 지옥에서 천사처럼 살아가리라 다짐했다. 하여 그가 나를 울릴 때도, 세상 밖으로 나를 밀어내어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때도, 절대 그를 비난하거나 분석하거나 방어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여, 나를 숨김없이 털어놓고, 숨김없이 보여주었다. 그는 나의 오빠, 나는 그를 오빠라고 불렀다. 똑같은 피가 흐르는 남매, 혈육이라고생각했다. 그런식으로 나는 그에게 향하는 마음을, 열정을 다스렸다. 오빠를 연인으로 생각하는 건 죄다. 그 건 사랑이 아니라 근친상간일 뿐이다. 끊임없이 나를 달래고 달랬다. 나는 차츰 그에게로 얽히는 모든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나도 놀랄 만큼 친밀한 객관성을 유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 남매 같았다. 큰오빠와 막내 여동생. 쉴러나 셰익스피어, 몰리에르가 알면 혀를 내두를 만큼 우리는 어떤 비극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으며, 서로를 믿고, 잘 이해하였다.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를 사랑했다. 내 사랑이 가야 할 슬픔의 길을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쑥쑥 걸어갔다. 나는 점차 서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가 내게 주는 절망보다도 서울이 내게 주는 고독이나 쓸쓸함 들이 휠씬 내게는 감미롭고 덧없이 나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완전한 공범관계이다. 우리는 사랑에 관해서는 철저한 공범자였다. 우리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희망과 절망의 끝까지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가정이 있었다. 모든 이들이 노래하는 '즐거운 나의 집'이 있었다. 파괴할 수 없는 거대한 심연-그게 가정이고, 가족들이다. 피로 얽힌 괴물들이 내쉬는 숨결 때문에 나는 숨이 막혔다. 그런데도 부도덕한 건 나였고, 세상 밖으로 굴러떨어지는 건 나였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마시다 만 커피처럼 차디차게 식어가는 나를 남겨둔 채, 커피 물이 절절 끓는 그의 가정으로 돌아가면 그뿐이었다. 안락한 평화의 집으로..... 파랑새. 그는 나를 파랑새라 불렀다. 어디서 이런 예쁜 파랑새가 내게로 날아왔을까?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나를 파랑새나 나비로 부를 때마다 왠지 슬퍼졌다. 날개 달린 것들은 언젠가는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린다. 그가 나를 붙잡지 않는 이유도, 언젠가는 내가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가 버릴 것이란 예감 때문이다. 하여 나는 그가 나를 파랑새나 나비로 부르는 게 싫었다. 그냥 그의 말대로 물 흐르듯 흘러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겐 불꽃이 필요했다. 자꾸만 야위고 비워 가는 내가 안쓰러웠다. 나는 타오르고 싶었다. 남김없이 나를 태우고 싶었다. 살아 있는 육체가, 영혼이 되고 싶었다. 나 스스로 흘리는 눈물과 웃음 속에서 인생을 만지고 껴안고 싶었다. 손님처럼 왔다가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싫었다. 조각 조각 껴맞추어 만든 사랑이라는 낱말이 싫었다. 나는 마치 사랑으로 불타 버린 집을 고치러 온 건축 견습공 같았다. 나는 슬프고 불행했다. 모든 게 헛된 욕망 같아 보였다. 석양에 사라져버리는 희미한 그림자. 너는 알까? 네가 언제 올지, 내가 너를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를 너는 알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기다리는 걸 포기했다. 그와 함께 오르던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곳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무섭게 단순해졌다. 모든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그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거울만을 응시했다. 나는 내게 있는 모든 것들을 그에게 다 주었다. 내 사랑, 내 책들, 내 음악, 내 불행, 내 피까지도 그리고 그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낮이든 밤이든 불을 끄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포기했다. 그와 함께 가꾸고 싶었던 '즐거운 나의 집' 에 대한 환상을 바닷속에 처넣었다. 인생이 내게 일구라고준 모든 불들을 끄고, 나는 어디든 혼자서도 쑥쑥 걸어갔다. 그는 나에게 줄 것이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 인생을 들고 그에게로 갔지만, 그는 내가 읽는 책들처럼 언제나 내 인생 밖으로 지나갔다. 나는 공허한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을 붙잡고 활활 타오르려고 안간힘을 썼다. 차갑고, 그립고, 서글픈 파도소리가 내 온몸을 소리치며 밀려갔다. 밀려오면서 내 몸에서 나오는 불꽃들을 모조리 다 꺼 버렸다. 나는 바다 깊이 파묻혀 버렸다. 청춘을 낭비한 죄, 나는 난파당한 배에 불과했다. 오빠, 나의 오빠. 나는 혼자서 조금씩 나는 연습을 했다. 그가 예감한 대로 나는 그를 떠나 어디론가 날아가야만 했다. 자생력을 회복해야만 했다. 얼굴 한복판에 날개를 펄럭이며 거대한 우주를 향해 날아가야만 했다. 나는 무섭게 인생에 매달렸다. 내 위치로 다시 돌아가야 해. 날마다 들판을 달리고, 물속을 헤 엄쳤다. 그런 나를 향해 그는 소리쳤다. 다른 여자들이랑 똑같아지려 한다고, 그건 너의 스타일 이 아니라고. 하지만 오빠, 나의 오빠. 나는 이제 오빠와 놀지 않겠어요. 맨날 술래가 되어야 하고, 맨날 되어 주기만 해야 하는 게임, 이젠 싫어요. 사랑이라는 연못 아래에서 그대로 얼어버리는 내 감정, 내 꿈들, 내 절망들이 불쌍해서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파랑새처럼 날아갈래요. 어두운 창공에 걸려 그대로 그대로 제가 될지라도 하늘로 휠휠 날아갈래요. 어떤 면에서는 절망이 위안이 될 때도 있다. 희망과 달리 절망은 밑바닥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이 꼭 결혼이나 함께사는 것으로 성취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면서도 헤어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파멸조차 불사해야 한다는 건 억지이다. 세상에 사랑처럼 무정부주의인 게 있을까? 사랑처럼 피비린낸나는 식민지가 있을까? 사랑이 온유하고 평화로울 땐 규범 안에 있을 때뿐이다. 사랑이 그 규범을 뚫고 나오면,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한 대의 불덩어리가 된다. 사랑하는 연인 중 한사람이 그 불덩어리를 삼키거나 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하늘까지 치솟는다. 나는 내가 먼저 그 불꽃을 꺼버렸다. 사랑 대신 삶을 선택했다. 삶을 선택함으로써 사랑을 영원히 내 가슴에 묻어 놓았다. 나의 첫사랑. 몸과 마음이 함께 행복했고 함께 고통스러웠던 사랑. 문득 문득 그 사랑이 깨어나 나를 괴롭히긴 했지만, 이제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럽진 않다. 그 사랑이 벽이 되어 나의 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한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 사랑의 한계이며 전부였지만, 그 사랑이 대해 어떤 회한도 갖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사랑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를 사랑했다. 그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지나간 사랑이 아름다운 건 덧없이 어두운 이 세상을 빛에 비유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나간 사랑을 들여다볼 때마다 그속에 아직 남아 있는 연인들의 희미한 박수소리, 사라져 버릴 나날들의 그 반짝거림 때문이 아닐까? 다시는 맛볼 수 없는 어제의 찬란했던 빛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 아닐까? 그토록 열렬히 그 사랑에 매달렸음에도, 나는 이제 그 사랑의 뒤쪽에 무엇이 남아 있는 지 돌아보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불러도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는 이제 나의 오빠일 뿐이다. 똑 같은 피를 가진 사람. 아직도 나는 여전히 그를 오빠라 부른다. 그러나 이제 그 부름속에 타는 불꽃은 없다. 여전히 그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 속에 담금질된 헛된 욕망이나 갈증은 없다.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어제가 되었다. 나는 어제를 뒤돌아보지 않는다. 어제의 빛이 아무리 오늘의 영양소가 된다 해도 나는 그 영양을 취하지 않는다. 나는 오늘에다 내 영혼을 묶었다. 어제의 내 사랑은 그의 건물이다. 나는 이제 휠휠 어디론가로 날아갈 것이다. 언젠가 먼먼 훗날, 그가 내 선물상자를 풀 게 될 때쯤이면, 아마도 나는 그 상자 속에 없을지도 모른다. 파랑새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 새이다. - 김상미 1957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1990' 작가세계' 여름호를 통해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자는 인간을 만든다',' 검은, 소나기때'가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원재훈 - 10월의 여인 새가 가까이 날아도 잡을 수 없듯이 물 속에 물고기가 손에 닿아도 잡을 수 없듯이 내 눈동자 속에 들어왔다 다시 간 그대는 항상 내 곁에 머무는 생각의 그림자 그리워할수록 더 멀어지는 서해의 썰물처럼 어느 순간 내 곁에서 떠나갔지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나의 버릇이었을 뿐 빛나는 모든 것들이 별이 아니듯이 흐르는 모든 것들이 물이 아니듯이 바라볼수록 어두워 만지는 붉은 노을 속에서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고 믿게 한 사랑의 나무를 캐낸다 아직 싱싱한 나뭇잎들이 아직 누군가의 그리움으로 살고 있는 뿌리의 눈물을 보며 이젠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으로 던진다 왜 나는 사랑의 별을 보았을까 그때 그 순간에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인가 천상의 그대가 우연히 지나친 것이었는데 이건 사람의 운명이 아니었을 텐데 조롱만 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은 집승들 사이에서 나는 왜 그대의 향기를 맡았던가 그건 천상의 향기였는데 그 빛과 향기에 취해 나는 지상의 삶을 버리려 한다 구름을 잡으려 내민 나의 손이여 부질없는 사랑의 이름만 쓰다 지쳐 죽을 나의 영혼이여 왜 나는 그때 사랑의 별을 그대의 눈동자를 순간적으로 보았단 말이냐 아무런 느낌도 없이 단지 빛나기만 하는 그대여 오늘은 어느 영혼의 눈동자를 눈멀게 하려 하는가? 시'별, 잠시 빛났던 그대의 눈동자'전문 어둠속에서 빗방울소리가 떨어진다. 불을 끄고 누운 지가 한 시간은 넘은 것 같다. 이렇게 잠이 잘 오지 않은 때가 가끔씩 있다. 이럴 적이면 주로 지나간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한다. 어둠은 뒤를 바라보기에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아마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추워질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볻 몸을 뒤척여 벽을 바라본다. 이미 눈에 익숙해진 벽지의 문양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한때의 열정으로 지나간 사람들은 저렇게 어둠 속의 벽지 문양처럼 희미하게나마 기억의 골짜기에 묻혀 있다. 다시 몸을 일으켜 거실의 큰 창문 앞에 선다. 별도 달도 없이 단지 비가 내리는 창밖엔 지금은 내가 돌아갈 수 없는 한 장소가 있는 듯하다. 어쩌면 몇 분 후 저 비가 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을 열면 그곳이 환하게 밝아올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착각은 이런 시간에 아주 어울리는 유희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와 함께 영원히 새겨져 있는 이미지는 눈이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방송에서는 몇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떠들어댔던 기억이 난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만났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눈이었다.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펑펑 내리던 눈. 그 눈 속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리고 겨울 봄 여름.가을 다시 겨울 눈, 이런 식의 세월의 순환이 몇 번은 지났다. 처음 그녀에게 키스하던 날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참 오랫동안 기다렸어." 그리고 그녀와 처음 섹스를 하던 날은 이런 말을 했다. "나랑 자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서울을 한참 벗어난 한 교외의 아주 허름한 여관에서 섹스를 했다. 그 여관은 주로 그 주변의 군인들이 면회를 오면 이용하는 군대용 여관이었다. 그녀는 그런 곳이 편한 듯했다.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작 행위에 들어간 순간, 낡은 침대에 그녀의 몸이 떨어진 순간, 한꺼풀씩 벗어내던지던 옷가지들. 서로의 몸에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때문에 어떤 쾌락의 느낌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몸을 확인하는 신선함이 있었다. 그녀의 나체를 바라보며 나는 밖에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녀는 무척 바쁜 일을 했고, 나 역시 그리 한가한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둘이 있는 시간은 절묘하게 맞추어 나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을 자기 틀린 것 같다. 저 비가 내리다 눈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물방울 하나가 베란다 창에 맺힌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에 어린아이처럼 몸을 움츠리다가 천천히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 어쩌면 나와 같이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저 빗방울에 담겨져 있는 듯하다. 그들은 어떤 사연으로 어떤 만남을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다. 조금은 진하게 인스턴트 커피를 탄다. 커피향에 잠시 눈을 감는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가까이 듣 것은 황홀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나만의 공간에서, 예를 들면 작은 연주회장이거나 오래 된 오페라 하우스 같은 곳에서 내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잘 길들여진 악기를 혼자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야기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놓았다. 위대한 선지식의 말씀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그녀의 이야기만큼 내 마음의 그릇에 담기 좋은 것은 없었다. 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살아 있는 언어들은 내 마음의 자음과 모음이 되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돌 항아리에 물이 고이듯. 그 생명수와 같았던 말, 속삭임, 신음소리, 호흡소리 등은 내 가슴에 고여져 갔다. 그것은 결코 넘쳐흐르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으로 적당한 수위가 조절 되었다. 나는 사막과도 같은 이생을 걸어가면서 낙타처럼 그 생명수를 아주 아껴가면서 먹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사랑한다는 말을 아주 많이 하고나서 그녀가 한 말이다. 그래 그건 어쩌면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껍질과도 같은 느낌들을 당연히 거쳐야 하는 것이다. 새가 부화하듯이 사랑의 감정도 수없이 많은 착각의 과정을 통하여 날아오르는 것이다. 우린 그런 것을 처음의 열정이 사라지고 한참후에야 알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갖는 순간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오는 또 다른 불청객이 있었다. 불교우화에서 말하듯이 불행과 행복은 항상 같이 다니는 자매와 같은 것이다. 불행이 못 생겼다고 그녀를 버리면 행복이라는 미녀도 같이 사라진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라고 우화에서는 말한다. 사랑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어느 날, 혹시 말이야,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자기 꼭 나를 다시 찾아야 돼. 약속해." 항상 그러하듯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는 헤어짐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런 오래된 연인들의 유전자가 아닌가 싶다. 사랑이 싶어지면 항상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헤어짐에 대한 걱정은 오랜 역사가 있는 연인들의 법칙인 셈이다. 그것은 아주 고전적인 일이다. 인스턴트에는 이런 걱정이 없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 사랑의 일부만을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꼭 다시 찾겠다고 했다. 커피가 식었다. 한 두어 모금 입을 댔을까? 베란다 창문을 열어본다. 어둠 속에 섞여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아마 그 빗방울에 나의 시간이 들어가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날 같았으면 잠을 자고 있을 이 시간을 나는 빗방울과 어둠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아주 비극적인 동화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이 동화의 비극성은 한번 제대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창밖의 어둠과 빗방울은 나와 비슷한 모양의 슬픔을 가지고 있는 착시현상. 사랑이 영원히 이야기되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대부분 타인을 볼 줄 아는 눈이 또 하나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눈이 아니다. 나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밝은 눈 하나를 그녀에게서 선물받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내부에 있던 그 눈, 눈뜨지 못하고 있던 그 눈을 뜨게 하고 초점을 맞추어 주고 빛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 다시금 그 눈의 뜨임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빗방울이 그녀의 어려웠던 힘들었던, 사랑을 다시 한번 보게 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자주 다니는 건물의 한 귀퉁이에서 거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한동안 술에 절어서 살았다. 한번은 그녀의 잡앞에서서 그녀가 남편과 함께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취중이었지만 무척이나 편안했다. 그녀는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한 약속, 그걸 나는 지켜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결혼이라는 걸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내 인생에 너무나 큰 모험이었다. 그런 일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잊었다. 아니 그러기로 생각했다. 단지 생각만을.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 이혼 소송중이야. 연락할게" 간단한 그녀의 메지시를 받고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건강이 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이가 말을 안 들어. 이혼하기가 참 힘드네." 이런 식의 몇번의 일방적인 통보라도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만은 즐거웠다. 그리고 슬펐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가 이야기한 꼭 찾으라는 말을 실천하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지. 비가 그치고 새벽이 온다. 새벽빛이 이렇게 싱그러운지 몰랐다. 거실의 탁자에 있는 전화를 바라본다. 만약 어젯밤 그녀도 나와 같이 무엇인가를 추억한다면 저 전화벨이 울리겠지. 나는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새벽빛과 공기를 받아들였다. 밤새 피워댄 담배연기와 부질없는 상념이 뒤얽혀 있는 어제의 공기를 저기로 내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비 온뒤의 저 싱그러운 기운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항상 아침이 오는 이유를, 그리고 10월이 다시 오는 이유를 9월의 마지막 밤에 나는 조금 알았다. 사람과 그리고 사물에 대해 안다는 것은. 글세 한참이 지난 뒤에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잠깐 스치듯 지나치는 것이 아닐까. 간밤 내내 풀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이 부질없이 뚝 떨어지듯 말이다. 원재훈 -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창과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겨울 '세계의 문학' 시 '공룡시대'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시집 '낙타의 사랑', '그리운 102'.서정소설 '만남 - 은어와 보낸 하루'가 있다. 최근에 시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네'를 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