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응?” “아니야, 내 자랑 같아서 말 안 할래.” “크크, 또 뭔데 그래?” “어제 집에 들어갔는데 설거지며 빨래가 잔뜩 쌓였더라고…. 그래서 내가 다 해놨어. 거실 바닥도 물걸레질 하고.” 토요일 점심 무렵, 친구 아들 돌잔치에 가는 데 남편이 수줍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내 자랑 같다.”는 말에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맞벌이를 하다 보니, 나는 주중엔 집안일에 거의 손을 놓고 지낸다. 대신 토요일에 한꺼번에 몰아서 일주일치 반찬도 만들고, 설거지며 빨래, 대청소를 하곤 한다. 남편과 분업해서 하지만, 아무래도 내 손이 가야 할 일이 많은지라 일을 다 끝내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다. 그런 나를 배려해 남편이 작은 도움을 준 것이다. 연애 시절만 해도, 결혼을 하면 집안일은 표를 만들어 철저히 반으로 나눠서 해야 한다고 지금의 남편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했었다. 그런데 살면서 참 많이 무뎌진 나를 발견한다. 내가 하나를 했으니 너도 하나를 해주어야만 한다는 욕심은 버린 지 오래다. 함께 살고, 함께 해내야 할 일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우린 사소한 일에 폭소를 터트리고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이제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시댁이나 친정 식구들과의 관계, 직장 동료나 상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조금 무뎌지려 한다. 때론 칼 같은 날카로움보다 투박하고 둔한 무딤이 '함께'라는 말의 의미를 더 깊게 만들어 줄 테니. 글 《행복한동행》 박헤나 기자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나를 달리게 하는 내 안의 근성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어떻게 성공했나요?”이다. 학생들은 나처럼 성공하고 싶다며, 어떻게 하면 멋진 디자이너가 될 수 있냐고 묻는다. 그런데 아직 나는 성공에 대해서 말할 수가 없다. 이미 성공한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나를 만들기 위해 달리고 있는 중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안에 있는 근성을 단단히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우리 집은 부모님께 용돈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에 중•고등학생 때도 용돈을 스스로 벌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엔 아르바이트를 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홍대 앞 노점에서 옷 장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석 달 만에 쫄딱 망했다. 첫 사업의 실패는 내게 아주 큰 상처여서 그 뒤로 무엇을 시작할 때마다 두려움이 앞섰다. 때마침 친구가 나에게 원단 시장에서 일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이모가 동대문시장에서 원단 장사를 하는데 직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원단부터 배우고 그 다음에 옷을 만들어 보자 결심하고 월급 40만 원을 받으며 그곳에서 일했다. 사실 40만 원을 받고 일한다기보다 40만 원을 받으며 일을 배운다는 생각이 더 컸다. 훗날 내 가게를 열기 위해 40만 원 중에서 20만 원을 따로 떼어 적금을 부었다. 또한 남은 20만 원 중에서 6만 원으로는 영어학원에 등록해 일이 끝나면 공부를 했다. 그때의 26만 원이 지금의 '제너럴 아이디어'와 나를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부터 나는 내 꿈과 미래에 대해서 상상하기 시작했다. 5년, 10년, 20년 후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5년 후엔 무엇이 되리라는 계획을 세우고 그 그림을 거꾸로 그려 보면 지금 준비하고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다. 그런 뒤 큰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잡으러 달려간다. 그러니 상상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래서 나의 공책에는 '최범석 5년 계획'이 적혀 있다. 그 계획 중에 가장 우선은 내년 2월에 있을 뉴욕 컬렉션 참가다. 그리고 5년 계획이 어느 정도 그려졌을 때 다시 10년 계획을 세울 것이다. 돈이나 명예를 얻는 것보다 목표를 달성했을 때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뉴욕 컬렉션은 내게 너무 큰 무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해낼 것이다. 그래야 내가 산다. 해내지 못하면 화병으로 죽을 것처럼 내 안의 근성이 나를 멈추지 않고 달리게 한다. 최범석 님|패션 디자이너ㆍ《최범석의 아이디어》 저자 - 《행복한동행》 2008년 12월호 중에서
천복(天福)을 아는가 신화학자인 조셉 캠벨에 의하면 인간의 가장 큰 복이란 '일생을 걸 만한 일을 알아보고, 그 일을 향해 매진하는 것'이란다. 운 좋게도 나는 그 천복을 우연히 만났다. 그러나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까지 꽤 많은 관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천복인 연극과의 만남은 대학교 시절 이루어졌다. 서울로 유학 온 열아홉 살짜리 시골 아가씨는 최루탄 자욱한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대자보에 쓰인 글귀는 험했고, 거리 풍경은 낯설었으며, 서울말은 깍쟁이처럼 들렸다. 인간을 공부하러 들어간 교육심리학과에서는 심리 대신 교육학만 가르쳐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학교를 자퇴할 것인가 견딜 것인가를 고민하던 차, 모험심보다는 게으른 천성에 기대어 견디기로 결정했고, 놀 궁리나 하자며 덜컥 연극반에 가입했다. 연극에 남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동아리 가입 기간이 끝난 뒤에도 신입 회원을 받는 곳이 연극반뿐이어서 그리 된 것이니, 결국 어물거리는 게으름에 기대 천복을 만난 셈이다. 그러나 천복이 그렇게 손쉽게 수중에 떨어질까.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을 필생의 업으로 삼고, 희곡작가가 되리라 결심한 순간부터 인생은 쌀쌀맞아졌다. 신춘문예를 비롯해 등단할 수 있는 모든 지면에 응모했으나 낙방만 따라다녔다. 처음엔 자존심이 상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감이 없어지다가 심사위원의 안목 없음에 화가 나기도 하고, 한 번만 더 떨어지면 포기하리라 독이 잔뜩 올랐다. 그렇게 떨어지길 일고여덟 번, 신춘문예에 당선된 누군가의 작품을 읽던 어느 겨울이었다. 창밖엔 눈보라가 거셌다. 나는 문득 창밖을 보다가 눈보라가 그치면 세상은 또 얼마나 맑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오랜만에 마음이 차분해졌고 제대로 글을 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천복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비로소 그 순간 나의 입문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작가라는 이미지에 덧씌워진 허영심이나 자신에 대한 치기 어린 자존심 대신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만 남은 그 순간 말이다. 그해 가을에 나는 작가로 등단했다. 한편으론 믿을 수 없었으나 한편으론 예정된 운명의 길에 들어선 듯 담담했다. 김명화 님 | 희곡작가 - 「행복한동행」 2008년 11월호 중에서
잠재된 사교력을 깨워라! 강의 요청이 있어 어느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그곳 교육팀장과 잠깐 담소를 나누고 헤어질 때쯤 그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한마디를 건넸다. “아, 참! 강의료 얘기를 안 했네요!” 그는 씩 웃으며 짓궂게 말을 이었다. “그냥 무료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물론 농담으로 한 말이다. 이때 나는 웃는 얼굴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으며 이렇게 답했다. “얼마든지 무료로 해 드릴 수 있죠. 그렇지만 강의가 무료해집니다! 하하하.” 사교력이란 '유쾌한 인간관계의 기술'을 말한다. 인간관계는 비즈니스 성공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그렇다면 인간관계를 유쾌하게 만드는 사교력의 핵심 기술은 무엇일까? 단연 유머 활용이다. 하지만 유머 감각이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사교력의 원천 기술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볼티모어 메릴랜드 주립대 로버트 프로바인 교수는 '유머는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만드는 사회적 신호일 뿐.'이라며 이를 입증하는 실험을 했다. 광장이나 거리에서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 1,200여 명의 대화 내용을 분석한 것이다. 그 결과 실제 유머로 인해 웃는 경우는 단지 20%뿐이고, 일상적 대화에서 비롯된 웃음이 나머지 80%를 차지했다. 일상에서 상대방에게 전하는 친밀한 표현들, 예를 들어 웃는 얼굴, 칭찬의 말, 경청의 자세, 기분 좋은 맞장구 등은 애써 유머를 활용하지 않아도 명랑한 인간관계의 80% 이상을 보증해 주는 '사교력의 원천 기술'인 것이다. 미국 작가 레오 버스카글리아는 “우리는 웃고 있을 때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결국 나의 '웃음 띤 얼굴'이야말로 사교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인 셈이다. 물론 여기에다 '유머'라는 사교력의 핵심 기술을 얹게 된다면 더 강한 끌림으로 인간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를 다음과 같이 유머러스하게 표현해 보면 어떨까? 내 안에 잠재된 사교력을 깨우기 위한 웃음 띤 얼굴로 말이다. “야, 이게 누구야! 박 대리? 와우! 안 보는 사이에 몰라보게…. 그대로네!” “그동안 기체후 일향 만강하옵시며, 댁내 두루 평안하시오며, 기타 부속품 일체는 안전하시온지요!” - 「행복한동행」 2008년 10월호 중에서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오체투지, 사람과 생명과 평화의 길 월간 말 10월호 포토에세이 누구도 가라하지 않은 고행의 길을 가고 있는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사진 더 보기 ⓒ 월간 말 세걸음 걷고 오체투지를 하며 한 시간에 채 500m도 못가는 길, 승용차로 3~4분이면 갈 거리를 하루 종일 기어서 가는 길. 이 세상에서 가장 느리게 가는 이들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가는 이들이 있다.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느리게, 가장 고통스럽게 너무나 먼 길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지리산 노고단(하악단)에서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까지, 다시 계룡산에서 임진각을 지나 묘향산 상악단까지 사람의 길,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묻고 또 물으며 마침내 온몸을 던지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순례 길을 떠납니다. 다리 불편한 스님과 늙은 사제입니다. 오체투지, 이 여정은 손에 가슴에 생활 속에 촛불을 피워 올린 청소년들과 수많은 국민들께 드리는 사랑과 존경의 표현입니다.” 새만금 해창 갯벌의 한 마리 갯지렁이의 자세로, 지리산 자벌레의 자세로 뜨거운 아스팔트 길 위에서 참회하며 대성통곡의 기도를 하는 문규현 신부님과 수경 스님. 그 누구도 이 험한 길을 가라하지 않았다. 노구의 몸, 병든 몸으로 마침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고행의 길을 그 누구도 가라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그 누구도 만류하지 못했다. 이들은 이미 한반도 대운하 백지화를 위한 103일간의‘생명의 강을 모시는 사람들’종교인 순례 도중에 목숨을 건‘도원결의’를 했다. 대운하라는 유령이 한반도의 하늘을 뒤덮는 순간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다가오고 있음을 확연히 깨달았다. 촛불 문화제의 대국민적 저항을 좌우 이념의 낡은 공안정국으로 몰아붙이고, 통일의 길로 나아가던 남북관계를 다시 긴장과 갈등 구조로 몰아가는 등 민주주의의 위기와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벌써 예감하고 또 절감한 것이다. 그러나 겨우 할 수 있는 것은 참회와 간절한 기도뿐. 예로부터 조상들은 국난이 닥쳤을 때 몸과 마음을 다해 하늘에 제를 올리고 국가와 국민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촛불, 광장의 촛불 이제 산에 오릅니다. 한반도의 어머니 산들이시여! 부디 우리의 흰 그늘을 받아주시옵소서.” 9월4일, 지리산 노고단에서 천고제를 올리며 시작된 오체투지는 기어코 눈물바람을 일으키고 말았다. 가까이서 지켜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눈길을 돌려 외면해도 눈물이 흘렀다. 그저 앞길의 돌이나 치워줄 수밖에. 지리산 성삼재와 시암재의 가파른 내리막길을 지나 열흘 만에 겨우 전남 구례지역을 벗어나 전북 남원으로 접어들었다. 예정으로는 11월1일 계룡산 중악단 도착이지만, 이는 말 그대로 예정일뿐이다. 이미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님이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암담할 뿐. 그러나 오늘도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세로, 가장 느리게, 가장 고통스럽게 너무나 먼 길을,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이들이 있다. 두 성직자의 고행 길에 매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다. 사진 더 보기 ⓒ 월간 말 문규현 신부가 주먹밥을 먹는 모습을 찍는 기자를 발견하곤 수줍은 듯 미소를 짓는다.(사진 위) 문정현 신부가 동생 문규현 신부의 고행길을 함께 하며 모든 것을 영상에 담아 기록하고 있다.(사진 아래) 사진 더 보기 ⓒ 월간 말 지리산 노고단 낭송시 역주행 한반도여 대체 어디로 가는가 먼 길을 가다가 길을 물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뺨을 때렸다 지금 여기는 어디, 대체 어디로 가시는지요? 사람이 사람에게 길을 물었을 뿐인데 다짜고짜 주먹을 날리고 발길질을 했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의 길을 묻고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묻고 또 물을 뿐인데 촛불을 든 어린 소녀들에게 유모차를 모는 아직 젊은 어머니들에게 마구 물대포를 쏘고 마녀사냥 하듯이 주홍글씨를 새겼다 먼 나라 어제의 일이 아닌 2008년 바로 지금 여기 오늘의 일 아무래도 이건 아니라며 절대 아니라며 다시 길을 묻는 이 땅의 지고지순한 백성들 앞에 또 하나의 38선, 소통불능의 ‘명박산성’을 쌓았다 그리하여 역주행의 한반도는 대륙이 아니라 반도가 아니라 갈가리 찢겨진 섬이 되었다 이미 38선으로 몸통이 잘린 남쪽의 섬, 북쪽의 섬, 청와대의 섬, 국회의 섬, 강부자 고소영의 섬, 미군부대의 섬, 자본의 섬, 영남의 섬, 호남의 섬, 정규직의 섬, 비정규직의 섬, 실업자의 섬, 농민의 섬, 도처에 38선이 들어선 국적 불명 고립의 섬, 저마다 하나씩의 불안한 독도가 되어 떠돌고 있다 채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조각조각 퍼즐 맞추기도 어려운, 공중분해 혹은 침몰 직전의 섬들이 되고 말았다 역주행의 한반도여 어디로 가는가 정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망치고 경제의 이름으로 민생을 파탄시키고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모욕하고 국민의 이름으로 국민을 능멸하는 역주행의 운전자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않을 수 없다 국회 안에 정치와 정치인이 있느냐? 청와대 안에 정녕 대통령이 있느냐? 도대체 누구의 정치인이며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대통령이냐? 건국 60년,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세 치 혓바닥으로 자충수를 두지 마라 우리는 지금 한반도의 운명에 대해 묻고 있다 우리는 지금 조국과 모국어의 안부를 묻고 있다 따지고 보면 지고지순한 백성들에겐 광복이 되자마자 암흑의 분단 반세기 그 모두가 잃어버린 60년과 빼앗긴 오늘이 있을 뿐 땡볕으로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길 위에서 참회하며 대성통곡의 기도를 하는 문규현 신부와 수경 스님. 사진 더 보기 ⓒ 월간 말 수경스님이 두 눈을 감고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진 더 보기 ⓒ 월간 말 문규현 신부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쉬고 있다. 사진 더 보기 ⓒ 월간 말 그리하여 목숨을 걸고 다시 길을 묻는 이들이 있으니 대체 이를 어찌하랴 지리산 하악단에서 계룡산 중악단을 바라보며 마고할미에게 한반도의 운명을 물어보고 다시 묘향산 상악단을 향하여 좌심방 우심실 뜨거운 심장의 안부를 물으며 역주행의 불도저 앞에 온몸을 던져 마침내 브레이크를 거는 이들이 있으니 대체 이를 어찌하랴, 어찌 만류할 수 있으랴 이미 공동묘지가 된 새만금 해창 갯벌의 한 마리 갯지렁이의 낮은 자세로 지리산 자벌레의 처절한 참회의 자세로 사람의 길을 묻고 또 물으며 생명의 길, 평화의 길을 열고 또 열며 마침내 오체투지의 머나먼 길을 나서고 있으니 마고할미시여, 마고할미시여! 어찌 이 광풍의 땅에 눈물이 없다 하랴 어찌 이 오욕의 땅에 의로운 사람이 없다 하랴 그러나 오늘도 역주행하는 한반도여 단지 길을 물었을 뿐인데 느닷없이 뺨을 때리는 시절이 왔다 대체 어디로 가는 거예요 물을 뿐인데 다짜고짜 곤봉으로 뒤통수를 후려치고 물대포를 쏘는 아주 오래된 과거가 돌아왔다 눈물의 값은 외상이 없다 피의 값은 외상이 없다 ©월간 말
찾아라, 창의력의 힘! 늦은 오후, 고등학생 아들 방에서 나오는 중학생 딸아이 손에 노릇노릇 잘 구워진 식빵이 들려 있다. “또 먹어? 어디서 났어?” “오빠가 만들어 줬어.” “오빠가?” '토스터가 고장 난 지 오랜데 이 녀석이 토스터를 고쳤나?'하는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자 아들 옆으로 식빵 봉지와 딸기잼 병, 버터 등이 보이고, 그 틈으로 다른 것들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다리미였다. 아들은 알루미늄포일로 식빵을 싸서 다리미로 식빵을 굽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있는 현장을 목격한 내 목소리 톤이 높아진다. “이야~! 재주도 좋네. 엄마도 하나 구워 주라.” 다리미로 빵을 굽는다는 작은 아이디어 하나를 탄생시킨 힘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그냥 먹을 수도 있는 식빵을 오로지 내 입맛에 맞춰 구워 먹겠다는 불굴의 의지! 둘째, 토스터를 사용할 수 없는 자신의 여건이나 집안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상황 속에서 방법을 찾는 적극성! 셋째, 다리미는 옷을 다릴 때만 쓴다는 고정관념을 버린 융통성! 넷째로 가장 중요한 점인, 생각이 떠올랐을 때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실천으로 옮긴 실행력이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이나 해야 하는 일을 못하는 이유를 여러 가지 꼬리표를 달아 설명한다. “경기가 안 좋아서요.” “물가가 이렇게 올랐는데 하고 싶은 걸 어떻게 다하고 살겠어요?” “시장이 안 좋으니 회사 매출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게 아닌가요?” 물론 현실적으로 맞는 말들도 상당히 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 보면 마치 경기 안 좋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안 되는 이유를 환경 탓으로만 돌리며 합리화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만약 이런저런 이유들로 상황 탓을 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들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생각해 보자. 토스터가 없다면, 토스터로 변신하는 다리미가 있지 않은가? 다리미에게 새로운 역할을 주고 “넌 이제부터 토스터야!” 하면 다리미는 토스터가 된다. 그저 주변을 둘러만 보자. 창의력이란 어떠한 상황에서도 빵을 굽고자 할 때 굽는 것이요, 빵을 먹고자 할 때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원하는 바가 있다면 할 수 있다고, 내 주변에 답이 있다고 믿자! 그러면 세상의 사물들이 나를 위해 변신하는, 창의력의 마술이 일어날 것이다. - 「행복한동행」 2008년 9월호 중에서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드라마 제작 PD로 산다는 것 전쟁이다. 첫 방송을 앞둔 이 시점에도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다. 처음도 아닌데 꼭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마냥 모든 것이 불안하고 아슬아슬하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른다. 누군가 건드리면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이 초조감.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마음도 몸도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드라마 제작 프로듀서다. 제작 프로듀서가 되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담배를 피워 볼까'였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만난 스태프들이 대부분 남자였기 때문이다. 일을 하다 보면 소소한 갈등을 빚게 마련인데, 신기하게도 담배 한 대 같이 피우는 이 단순한 행위가 일을 보다 쉽게 풀리게 하는 모습이라니. 결국 담배를 피우는 것은 포기했지만, 덕분에 낮술을 즐길 만큼 술이 많이 늘었다. 얼마 전 종영된 <온에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제작 프로듀서가 저런가?', 'B팀까지 돌려야 할 만큼 빡빡한 촬영 일정에도 참 예쁘게 하고 다니네.'등 동료들 사이에서 여러 말들이 오갔다. 물론 결론은 '드라마니까!'였지만. 흔히 제작 프로듀서 하면 제리 브룩하이머를 떠올린다.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최고의 흥행작을 쏟아 내고 있는 그는 말 그대로 이 시대 최고의 프로듀서다. 하지만 우리 현실에선 아직 먼 얘기다. 드라마의 외주제작 비율이 높아지면서 제작 프로듀서의 위상이 나아지긴 했지만, 작가와 연출자의 힘이 워낙 크기 때문에 좀처럼 제 의견을 관철시키기 힘든 게 사실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작가나 연출자에게 일방적으로 깨지기 일쑤다. 가끔은 연출자를 비롯한 스태프들과 40대 1로 싸우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동료에서 '돈만 아끼려는 제작 프로듀서'로 전락하는 건 한순간이기 때문이다. 우연찮게 내 인터뷰 기사를 읽고 한 친구가 제작 프로듀서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느냐, 어떤 자질이 필요하냐 등 이것저것 물어 왔다. 나 역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에 잘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웬만한 각오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라는 것(연애는 포기한 지 오래다). 특히 여자가 하기엔 험한 일이라는 것(점점 입이 거칠어져서 큰일이다). 하지만 한번쯤 도전해 볼 만한 일이라는 것(삶이 다이나믹해진달까?). 아, 그나저나 얼마 전 첫 전파를 탄 드라마가 잘 돼야 할 텐데 걱정이다. - 「행복한동행」 2008년 8월호 중에서 출처 : 인터넷 좋은생각 사람들
만날 혼나는 사장님 “사장님, 종이가 부족해요. 면지에 인쇄한다는 얘긴 안 하셨잖아요.” “예? 그럴 리가…. 아, 그게….” 신간을 인쇄하러 가는 날 아침부터 걸려 온 전화를 “어버버~”하다 끊고 말았다. 세상에, 인쇄하는 날 종이가 부족하다니. 다행히 나보다 마음이 더 급한 인쇄소 부장님이 근처 제지사에 전화해 임시로 종이를 빌리셨고, 출판사에서 다음 날 그만큼 채워 주기로 한 뒤 이번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인쇄소에 도착해 무사히 돌아가는 인쇄기를 보며 얼마나 가슴을 쓸어내렸던지. 아마 내가 출판사 직원이었다면 ‘쫓겨나거나 혹은 한 대 맞고 쫓겨나거나’ 두 가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잘나가는 잡지의 기자 자리를 박차고 나와 1인 출판사를 시작한 지 벌써 2년. 이제는 정말 치려야 칠 수 있는 사고도 없을 것 같지만 어쩌면 이렇게 매번 색다른 사고를 치게 되는지 그 무한한 가능성에 내 스스로도 감탄할 지경이다. “사장님, 책 출고하셨어요? 독자들이 서점으로 불만을 접수하고 있는데요.”(엉뚱한 창고로 책을 보내는 바람에 서점 직원에게서 걸려 온 전화) “사장님, 그 종이는 국전지가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는데요. 기억 못하세요?”(인쇄하는 날 사이즈가 맞지 않는 종이가 와 있기에 제지사에 연락했더니 담당자가 하는 말) 기자란 게 글만 잘 쓰면 되는 일이라 책의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지식이 없었다. 그렇기에 이 일을 시작하면서 좌충우돌할 거란 예상은 했지만 직접 뛰어들고 보니 그 사고의 반경이 상상 외로 넓었다. 그러다 보니 사장이란 사람이 만날 혼나고 다니는 게 일이 되어 버렸다. 처음 몇 번이야 ‘이러면서 배우는 거야.’라고 위로했지만 비슷한 실수가 반복되자 ‘내가 그래도 대통령 인터뷰도 했던 사람인데….’라며 ‘왕년에~’ 타령까지 하게 됐다. 그럴 때마다 언젠가 홍세화 선생이 하신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 버는 사람이 특권층’이라는 말을 되새김질한다. 나야말로 지 좋아하는 일 하면서 입에 풀칠하고 사는 특권층이니 두말하지 말고 앞으로도 만날 혼나자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도 혼나지 않고 책 한 권쯤 만드는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김보경 님 | 책공장더불어 대표 -《행복한동행》2008년 8월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