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인사 담당자라면 “오신 김에 건물 좀 둘러보시지요.” 대형 쇼핑센터의 보안팀장을 뽑는 면접이었다. 면접자는 곧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고 한 시간 뒤 상기된 얼굴로 올라왔다. 앞서 여러 명이 이미 면접을 끝내고 돌아간 뒤였다. 면접관은 그에게 건물을 둘러본 소감을 물었다. 그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 들며 입을 열었다. “예, 우선 생각보다 많은 수의 입점주들과 다양한 상품들이 인상 깊었고, 그만큼 철저한 관리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하 주차장부터 최상층까지 둘러봤는데, 제가 느꼈던 몇 가지 강점과 개선사항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그러곤 층별 적재물에 대한 생각과 조직 관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선 방안에 대한 의견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며 밝은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다. 나중에 인사부장의 말을 들어 보니, 면접을 보면서 전 층을 그렇게 다 돌아본 사람은 처음이란다. 게다가 둘러본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일일이 정리해 온 것도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빌딩 전체의 보안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의 주요 역량을 알고자 했던 것이 면접이라면, 면접관은 책임감과 성실성, 문제 해결 능력 등을 어떻게 표현하고 검증할 것인가를 눈여겨 보았을 것이다. 여러 질문보다 한 가지 행동에서 자신을 검증하고자 하는 면접관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역할을 찾은 것이 답이 되었다 하겠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 것이 취업을 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구직자의 마음이 번번이 두근거리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일까, ‘어떻게 하면 면접을 잘 볼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속 시원하게 한마디로 대답해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라 한참 뜸을 들이다 결국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답을 한다. 취업을 하겠다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내가 인사 담당자라면 어떤 사람을 원할 것인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 면접 과정과 질문의 의도를 파악한다면 자신을 드러내는 데 구체적인 방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인사 담당자의 역할과 책임은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적합한 인재를 뽑아 배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윤정 님|(주)스카우트 이사 -《행복한동행》2008년 7월호 중에서
꿈을 이루는 또 하나의 길 어릴 적 나는 천문학자도 되고 싶고, 성악가도 되고 싶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나는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되어 병원 진료실에 앉아 있다. 병원에 갇혀 개원의로 살다 보니 어린 시절 꿈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천문학을 배웠고 성악을 공부했다. 그런데 6년 전인 2002년, 별과 음악을 조화시켜 한꺼번에 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별 음악회’였다. 처음 별 음악회를 시작했을 때는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았다. 천체 투영관은 음악회를 위해 만들어진 곳이 아니기 때문에, 공연할 공간도 예산도 없었다. 사비를 털어 전자피아노를 사고 음향과 조명장비를 들여 놓고 아주 소박한 공연을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관객들은 별 음악회에 폭발적인 반응을 보냈고 입소문에 힘입어 매 공연마다 90석의 객석이 일찌감치 가득 찼다. 그러나 무료 공연이라 연주자들에게 출연료를 줄 수 없다 보니 100회 전까지는 출연자를 구하느라 애를 먹곤 했다. 마지못해 출연을 약속하고도 당일 날 오지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객석에 꽉 들어찬 관객들이 무대만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럴 때면 내가 ‘대타’로 무대에 올랐고, 지금도 나는 한 달에 한 번 가량 대타로 무대에 오른다. 나는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객이 느끼는 감동과 행복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곡마다 해설을 곁들인다. 그런데 곡 설명을 해 줘야 할 연주자들이 어색하고 귀찮다며 거절할 때도 많다. 그러다 보니 음악회 때마다 내가 직접 자료를 찾아 해설을 준비하곤 한다. 한 회 한 회 공연은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막을 올리고, 땀과 눈물로 막을 내린다. 그럼에도 내가 300회 넘게 별 음악회를 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공연을 통해 내가 느끼는 행복감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나는 아마추어 천문학자로서 지식이 늘었을 때, 성악을 배우며 연주 기량이 향상됐을 때 행복을 느꼈다. 그러나 별 음악회가 끝난 뒤 관객의 얼굴에 번지는 행복을 읽을 때나, 고맙다는 인사를 들을 때면 생애 최고의 행복감을 경험한다. 그렇게 나는 별 음악회를 통해 질리지 않는 행복의 의미를 알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방법을 찾았다. 심우훈 님 | 안과 의사, 별 음악회 음악감독 -《행복한동행》2008년 7월호 중에서
꾸지람 언어예절 살다보면 일이 어긋나거나 잘못을 저지르는 수가 잦다. 말을 듣지 않거나 제대로 일을 치르지 못할 때도 많다. 사람은 꾸지람도 듣고 반성하며 커 가기 마련인데, 시키는 사람이 올발라야 말도 먹힌다. 잘못이 명백하다면 나무람을 들어도 할말이 없게 되지만, 무얼 잘못했는지 모를 수도 있다. 이를 깨우칠 때는 흥미와 능력차도 생각해야 한다. 듣는이를 높이고 어루만지는 말법이 필요하다. 대개 한두 번 실수는 웃고 넘긴다. 비슷한 잘못을 거듭 저질렀을 때 ‘좋아, 이번엔 넘기지만 다음엔 조심해라, 지켜보겠다 …’ 정도로 짚는다. 사람을 나무라고 꾸짖기가 수고롭기도 하고 듣는이도 고통스런 까닭이다. 관대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특히 가족 사이, 동료 사이, 친구나 사제 사이처럼 인연이 깊은 사람일수록 용서와 온정으로 대한다. 그래서 그 폐단을 꼬집는 말발이 매섭기도 하다. 그러나 대체로 ‘나무람’이 미치는 영역은 여기까지다. 그 다음으로 가면 좀 단순해진다. 학교나 군대에서는 얼차려와 체벌이 뒤따른다. 이도 잘만 쓰면 성금이 난다. 일터에서는 벌주기로 나아간다. 징계는 교칙·학칙·사규 등 각종 규정에다 법규들로 집단마다 공고한 절차와 틀로 굳혀 놓았다. 여기서는 조직의 권위와 양식이 힘을 쓴다. ‘제발 좀 잘해보자, 약속 좀 지키자, 제대로 하자 ….’ 꾸지람의 바탕에는 아끼고 잘되게 하려는 바람이 녹아 있다. 무서운 것은 몇차례 꾸지람 뒤에도 고치지 않으면 마음을 달리 먹게 된다는 것이다. 포기·외면·무관심 곧 사람 만들기를 그만두는 일이다. 최인호/한겨레말글연구소장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타임머신을 타 보셨나요? 런던 교외의 길거리에서 웬 힘센 사내애가 저보다 어린 아이를 들어올린 후 내던졌습니다. 버티(허버트의 애칭)는 그 아이를 받으려다가 그만 한쪽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몇 개월 동안 발에 추를 매달고 침대에서 고생했으나 접합이 되지 않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그 일은 참으로 무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완전히 재수없게 걸려든 사고였지만 그것이 그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꼭 1 년간을 꼼짝도 못하고 누워 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책만 닥치는대로 읽은 결과 세계적 대문호로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버트 웰스는 도기점을 하는 집안의 2층 좁은 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지하에는 음침한 작은 방이 있어 부엌으로 쓰고 있었는데 머리 위의 행길로부터 쇠창살 틈으로 광선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창살문 위로 지나가는 사람의 신발을 보고 그 사람의 인품을 알아맞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도기점이 망해 버리자 어머니는 부잣집의 가정부로 들어가고 버티는 포목점 점원으로 일했습니다. 수십 년 후의 '세계문화사 대계'의 저자가 될 인물이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가게 청소를 하고, 난로에 불을 지피고, 하루에 14시간씩 혹사당한 것입니다. 한 달이 되자 그마저 쫓겨와 약방 점원이 되었지만 여기서도 한 달 만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또다시 다른 포목점에 들어가 2 년간 일을 했지만 어느 날 그곳을 도망쳐 나와 15 마일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가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합니다. "어머니 더 이상 가게에 못 있겠어요. 더 있으라고 하면 자살해 버리겠어요." 그런 후 은사로부터 교사 일자리를 얻어 교사 일을 3 년 정도 하고 있을 때 또 불의의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축구시합을 하다 밀려 넘어져서 신장 한쪽이 짓이겨지고 오른쪽 폐가 파열되는 바람에 출혈이 심해 위험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의사들도 외면한 상태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12 년 동안 목숨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12 년간 그 수많은 생각을 했고 재능을 키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후 5 년간 필사적으로 글을 썼지만 모두가 아마추어 냄새만 풍긴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써놓은 것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렸습니다. 얼마 후 반불구의 몸으로 교사직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자기처럼 불구인 한 여학생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래, 지금 당장 최대의 행복을 붙들어 두자"라고 다짐한 후 그는 그녀와 곧 결혼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쓰러지거나 죽기는커녕 건강을 회복하고 정력적으로 집필에 전념해 '타임머신' 등 80권 이상의 책을 썼고 그것은 모두 전세계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세 곳에 보낸 편지 '동물 이야기'를 쓴 시튼(Seton, Emest Thompson 1860~1946)이 열아홉 살 때의 일입니다. 그 해 캐나다의 한 미술학교를 졸업한 시튼은 런던으로 유학을 가게 됐습니다. 시튼의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런던에서 일을 하면서 공부를 계속했습니다. 시튼은 원래 그림공부를 했으나 장차의 꿈은 박물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책을 구해 읽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무렵의 어느 날, 그는 브리튼 박물관에 전세계에서 발행된 귀중한 박물학 관계 서적이 많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튼은 곧 박물관으로 뛰어가서 열람을 신청했습니다. 그러나 도서계원은 그가 19세의 어린소년이라는 이유로 열람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 계원은 박물관 규칙상 21세가 되야 입관이 허용된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시튼은 박물관의 규칙을 알지만 박물학을 공부하려는 자신의 뜻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시튼의 열정에 마음이 누그러진 계원은 그렇다면 한 번 사서관장을 찾아가서 부탁해 보라고 말했습니다. 계원은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지만 사서관장이 허락한다면 예외로 들여보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시튼은 다시 사서관장실 찾았습니다. 그는 한참을 찾은 끝에 사서관장이라고 써붙인 방을 노크했습니다. 시튼은 사서관장에게 자기가 찾아온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서관장은 융통성없는 어조로 말했습니다. "학생의 뜻은 잘 알겠소. 그러나 여기서는 엄격한 규칙이 있어 그걸 어길 수는 없소. 미성년자들이 출입하게 되면 소설을 읽는다거나 과제 같은 것을 하는 사람이 많아서 정작 연구를 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기 일쑤요. 학생 같이 열심히 연구하려는 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안됐지만 어쩔 수 없소." 사서관장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시튼은 별안간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서 제일 높은 분이 누구십니까?" 사서관장은 그의 당돌한 질문에 웃음지으며 말했습니다. "제일 높은 분이라, 여기서는 내가 최고 책임자지만 평의원의 지시가 있으면 그대로 따르겠네." "그럼 그 평의원은 구체적으로 누굽니까?" 다시 묻는 시튼의 얼굴에서 진지함이 우러나고 있었습니다. 사서관장은 어느덧 시튼에게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부드럽게 설명했습니다. "평의원이란 황태자, 대승정, 그리고 총리대신 그렇게 세 분일세만, 그분들이 과연 학생의 청을 들어 줄까?" 그러나 시튼은 사서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사를 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시튼은 하숙집에서 밤늦게까지 편지를 썼습니다. ...박물학은 제게 있어서 생명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게는 그것을 연구할 만한 책이 없습니다. 오직 박물관에서만 그 책을 볼 수가 있답니다. 저는 언제까지 영국에 머물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박물학을 연구할 생각만으로 희망을 느낍니다. 원컨대 저로 하여금 박물관에서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시튼은 세 곳에 편지를 보내기는 했지만 그 중에서 누구든 단 한사람이라도 회답을 주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모두에게서 회답이 왔는데 한결같이 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시튼이 사서관장을 찾아가자 그는 시튼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놀랍네. 최후까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려는 용기는 정말 훌륭해. 황태자께서 허락을 내리셨네. 오늘부터 자네는 마음대로 연구하게 되었네. 열심히 연구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네." 시튼은 그때부터 열심히 연구하여 후에 유명한 작가가 됐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짬렁 시므렁, 그는 뇌물을 모르는 채식주의자로 하루 한 끼밖에 먹지 않으며 서민들의 마음을 어떤 정치인보다도 잘 이해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이 이미 서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두 차례의 방콕 시장 선거에서 우리나라 돈으로 약 18 만 원을 쓰고도 유효득표율이 63.5%의 지지를 얻으면서 당선되어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세웠습니다. 그는 우편열차의 직원이었던 아버지와 지게 행상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습니다. 그가 비록 가난한 집안의 아이였으나 그의 부모님은 훌륭한 분들이어서 어릴 때부터 바른 품성을 몸에 익혔습니다.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비록 가난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길가에서 노는 아이들의 친구였지만 험한 말씨나 좋지 않은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로 버릇없이 떠들기는 했어도 악담은 하지 않았고, 천하게 남을 넘겨짚어 말하지 않았다는 점만은 장담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에게도 계속되는 욕구와 갈등이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놀고 공부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있기를 바랐고, 마음 맞는 친구와 훌륭한 선생님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어머니에게 매를 덜 맞기를 바랐으며, 유명한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랐습니다. 근사한 칼을 차고 다니는 사관생도가 되고 싶었으며, 좋은 직장을 갖고, 아름다운 여자와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땅과 집 그리고 자동차도 갖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평범한 꿈을 가진 그가 1985 년에 방콕 시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자 스스로 자문하기를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가? 나는 크게 되고 싶어 한다. 무엇을 하든 지금보다 더 크게 되고자 노력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과 달랐습니다. '만약 그 일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짬렁'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7뼘의 폭과 12뼘 길이의 내 오두막으로 돌아가 자연과 더불어 즐겁게 그리고 계속해서 욕심을 잠재우는 참선을 벗삼아 살 것이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분명한 견해와 이상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입장이 올바른가를 항상 되돌아봤습니다. 그는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럽고 예의바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며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던 그는 강한 인내의 소유자였으며 무엇보다도 항상 밝은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군의 장학금으로 미국에서 공부하여 행정학 석사학위를 상원의원, 수상실 비서, 방콕 시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이런 그는 고기를 먹지 않으며, 취침시에는 널빤지 위에서 잘 뿐 아니라 우산을 갖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우산을 펴 그 아래에서 자기도 했습니다. 이런 그를 선거 때마다 다른 후보들이 비정상이라고 혹독하게 비난하지만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검소와 친절 그리고 자비심이 바로 그가 하는 일들에 수반되는 정신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해.' 오선지를 사용할 줄도 모른 어빙 벌린이 미국 음악에 영향을 끼친 작곡가가 된 것은 거리를 떠도는 장님 악사의 손을 붙잡고 길을 인도하는 생활을 하는 동안 가슴속 깊이 울리는 멜로디를 스스로 발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 2천 년이 되면 미국 음악의 탄생일과 어빙 벌린의 탄생일은 같은 날이었다고 반드시 음악비평가가 말하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그런 생각이 든다." 미국 최고의 작곡가인 카펜터가 한 말입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부활절 행진'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Gad bless America)' 등의 곡을 작사 작곡해 지금까지도 미국을 감동시키고 있는 어빙 벌린은 미국 유행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입니다. 1888 년에 태어난 벌린은 가족들과 함께 1892 년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도망쳐 나왔습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컴컴한 선창 속에 처박혀 윗칸에서 떨어진 칼을 맞아 상처를 입으면서 대서양을 건넜습니다. 빈손으로 미국에 도착한 일가는 편물 수공업, 공장일, 정육점 등에서 일을 하며 어두운 지하 셋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의 끔찍했던 생활에 비교하면 마치 천국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늘 감사의 기도와 함께 '신이여, 미국을 축복하소서'라고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벌린은 어머니의 이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노래의 내용은 어머님의 입을 통해 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다. 노랫말은 가슴속 깊은 데에서 떠오른다." 1939 년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무렵 벌린은 이 곡을 발표했습니다. "또다시 세계대전이 벌어진다면 큰일이다. 정말로 온 미국이 일치 단결해서 일어서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 곡이 크게 히트하자 그는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돈을 벌려 한다고 비난을 받을까봐 인세를 모두 미국의 보이스카웃과 걸스카웃에 기부했습니다. 이듬해 이 곡은 전미 음악감상회로부터 그 해의 최우수 작곡상을 받았고, 순식간에 퍼져 나가 이젠 미국 제1의 국가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빙 벌린은 학교를 2 년밖에 다니지 않았습니다. 책도 끝까지 다 읽은 것은 아마 자신의 전기 정도일 것입니다. 유명한 알렉산더 올코트가 그의 전기를 벌린의 나이 35세 때 썼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선지도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따라서 그의 작곡은 멜로디를 그가 흥얼거리면 음악을 아는 비서가 악보로 작성했고, 음악을 배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주 젊었을 적에 확실히 배운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거리를 떠도는 장님 악사의 손을 붙잡고 길을 인도해 주면서 그 악사가 연극하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곤 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를 발견하곤 했던 것입니다. 1920 년 벌린은 뉴욕 사교계의 우두머리를 아버지로 둔 엘린 메케이와 사귀게 되어 서로 사랑하게 되었지만 손님이 던져 주는 푼돈을 바닥의 톱밥에서 주워 싸구려 하숙비를 지불하는 벌린과는 너무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행복한 삶을 누렸습니다. 벌린이 결혼 전 아내에게 준 생일 축하 선물에는 오직 한마디 '올웨이즈(Always)'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가사 중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해'라는 대목의 악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고독을 덜어 주는 고독한 황제 헐렁한 바지와 어눌한 동작으로 희극계의 왕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채플린, 그러나 그의 불행한 성장처럼 언뜻언뜻 보이는 고독과 외로움의 정체...... 둘레가 높은 모자, 다 떨어진 저고리에 헐렁한 바지, 질질 끌리는 큼지막한 구두의 대나무 단장으로 분장한 채플린의 어릿광대 모습을 볼 때면 웃음보다 먼저 무언지 모를 고독과 외로움을 떠올립니다.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그 고독과 외로움의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 최고의 희극왕 찰리 채플린은 1889 년 4월 16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습니다. 가족은 어머니와 네 살 위의 의붓형밖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처자를 버리고 종적을 감추어 버렸으니 어머니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삯바느질을 하여 끼니를 때워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마저 심한 편두통에 시달리다 쓰러져 생계를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어머니는 빈민구제원에, 여섯 살 된 채플린과 형은 고아원에 수용되었습니다. 추운 겨울,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플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면서도 어머니를 기다렸으나 2 년 동안 어머니는 면회 한번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날에는 배우였고, 가수 겸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그 당시 정신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채플린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어머니에게까지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서 고독과 외로움을 벗삼게 되었습니다. 결국 법원이 아이들에 대한 양육을 아버지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다른 여자와 살고 있었으며, 그 여자는 형제를 길거리로 내쫓는 등 구박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퇴원하고 방 한 칸을 빌어 아이들을 데려와 바느질을 하면서 살림을 꾸려나가자 차츰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형은 뱃사람이 되고 채플린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가끔 무대에 서서 어린아이 역을 맡아 배우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병이 재발하여 다시 정신병원에 입원하자 채플린은 고아원에 가기 싫어 한때 자취를 감추었다가 학교는 문앞에도 가보지 못한 빈민가의 부랑아가 되었습니다. 부랑아 생활을 하면서도 간혹 무대에 선 덕에 21세 때 극단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헐리우드에 진출, 31세 때는 최초의 영화를 제작하였고 4 년 후에는 자기 프로덕션을 세우면서 미래를 신뢰하기 시작했습니다. 겁많고 외로운 부랑아가 심술궂은 상대방의 술책에 애를 먹다가 아차, 하는 순간 요절복통한 묘수로 위기를 모면하는 연기는 전세계인의 박수갈채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공부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40 년간 되풀이해 읽기도 한 채플린은 히틀러를 '독재자'로 비판하고, '모던타임즈'로 현대문명을 통렬히 비판했으며, '살인광 시대'로 군비확장을 규탄했습니다. 미국 보수층으로부터 반발을 사 한때 국외추방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1972 년 아카데미상을 받음으로써 이에 대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채플린은 은막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가난은 너를 현명하게도 만들고 슬프게도 만든다. Poverty makes you as well as wise. (B. 브레히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영국제 미국인의 웃음 배달 가장 미국적 코미디언인 보브 호프, 발음이 엉뚱하고 횡설수설하면서도 관중들의 배를 끌어안는 폭소를 보는 순간 보브는 사람을 웃기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8 만 마일이나 날아가서 사람을 웃긴 사나이, 알제리에서는 적의 폭격을 만났고, 이탈리아에서는 폭격중인 공항과 탄약고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하는 곤경에 처하면서도 종횡무진 전선을 누비며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는 미군 장병들에게 그 나름의 천하지 않은 농담을 기관총처럼 퍼붓는 사나이. 그런 인물이 바로 보브 호프입니다. 한번은 영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군인 60여 명이 10 마일의 황야를 터벅터벅 걸어서 보브 호프의 공연을 보러 오다가 도저히 끝까지 걸을 수가 없어서 실망을 안고 중도에서 돌아서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보브 호프는 공연이 끝나고 마지막 박수소리가 그치기도 전에 단원 일동을 지프에 태우고 뒤를 쫓아가, 60 명의 군인들을 위해 비가 쏟아지는 황야의 한복판에서 다시 한 번 공연을 되풀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무서운 열정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보브 호프는 가장 미국적인 코미디언으로 통하고 있는데, 사실은 영국 태생입니다. 양친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와 클리브랜드에 정착했을 때는 어금니가 한 개 정도 돋았을 나이였습니다. 일곱 살 때, 그 고장의 교회 추수감사절 행사에서 무대에 나가 시를 읊었습니다. 발음은 엉뚱했으며, 문구는 횡설수설, 관중들은 배를 끌어안고 폭소를 터뜨렸습니다. 대개의 아이들이라면 얼굴이 새빨개져 도망쳐 나왔을 것이지만 보브는 싱긋 한번 웃고는 공중제비를 넘은 다음 고개를 까딱하고 숙였습니다. 그 순간 보브는 사람을 웃기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후, 지독한 가난 속에서 삶은 콩과 도너츠만 먹고 살았습니다. 얼마나 신물이 났는지 삶은 콩과 도너츠는 보기만 해도 위가 스코트랜드 춤을 춘다고 익살을 부리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극단 지배인이 보브에게 무대에 나가 내주의 공연 예정을 소개해 달라고 했습니다. 보브는 관중들 앞에 나갔습니다. "사실은요, 지배인으로부터 부탁이 있어서요. 내주에는요, 아주 신나고 멋있는 연극을 보여 드릴 모양이에요. 제목은 뭐가 됐건...... 재미만 있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런데 관중들은 끝까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휘파람을 불고, 마룻바닥을 동동 구르며 폭소를 터뜨려 마치 소동이 난 듯하였습니다. 보브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지배인이 말했습니다. "보브, 재주가 대단하군. 아마도 자네 밥줄은 관중들의 배꼽에 달려 있는 듯싶네." 그때부터 보브가 조크를 터뜨리면 1억 3천만 명이 한꺼번에 배를 쥐고 웃었습니다. 유머는 야릇하고 괴이하며 거친 것이다. 짐짓 꾸미면 망칠 뿐이다. 유머는 궁리해서 얻어지지 않고 모르는 사이에 갖게 된다. (J. 스위프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행운은 누릴 자의 몫 유명한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는 원래 다른 사람들보다 촉망받는 첼로 연주자였습니다. 그의 긴 손가락은 첼로 연주에 적합했지만 심한 근시였던 토스카니니는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그의 눈은 연주회에서 악보를 볼 수 없을 정도여서 악보를 모두 외워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뉴욕에서의 공연 일정이 잡혀 단원 모두가 몹시 분주하게 연습에 몰두했습니다. 무척 중요한 공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소같이 이번에도 토스카니니는 악보를 모두 외웠습니다. 그런데 연주회를 이틀 앞두고 지휘자가 병원에 입원하게 됐습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새로운 지휘자를 구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연주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머리 속에 담고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연주 단장은 토스카니니를 불렀습니다. 당시 19세였던 토스카니니에게 지휘를 맡기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 연주에서 토스카니니는 지휘자로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 토스카니니(Toscanini, Arturo, 1867--1961) 이탈리아의 지휘자로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거장의 하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뛰어난 음악적 재질을 보였다. 그는 명쾌한 리듬 감각과 강렬한 음량증감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극히 현대적인 연주 양식을 확립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