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경림 - 그 청보랏빛 새벽길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네 제 그물에 갇힌 거미처럼 가로 세로 마구 뒤엉킨 눈발들이 뽀얀 허공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어디선가 아련히 유리 깨지는 소리 같은 것 들렸네 그때 우리는 그 밑을 묵묵히 걸어가는 먹물 같은 시간들이었을 터 눈발 사이, 밤의 푸르름은 형광빛으로 번득이고 무슨 긴 모래 같은 아픔이 그와 나 사이를 흘러갔네 거대한 밤의 나무들! 이파리 뒤에서 번득이던 수천 개의 눈알들. 툭툭 먹물 같은 눈물이 터졌네 생각나네, 먹어도 먹어도 갈증 솟던 그 검은 우물물 수면 위로 어른거리던 알 수 없는 무늬들, 문득 내 안에서 한때의 구름이 일었네 나는 갈참나무 한 잎처럼 가볍게 혹은 무겁게 흔들렸네 흔들리면서 검은 구름 한때를 고요히 게워냈네 시 '그 겨울 밤'전문 너를 만난다 절망은 미친 바람으로 내 등을 밀어붙여 나를 바다의 끝에 데려다 놓는다 그 끝에서 허기처럼 너는 온다 파도를 등에 업고 어둠의 언저리를 서성거린다 등대 옆에 있는 풍향계를 밟고 도는 바람이 너를 자꾸 기울게 한다 모래사장이 점점 솟아오르고 바람이 죽은 나무들을 깨운다 너의 파도에 내가 휩쓸린다 '안암동 5- 연애' 인생을 계절로 표현한다면 4,50대는 다사다난했던 한 생의 가을쯤이 아닐까? 그것들 중, 그나마 축축하게 오래 끌어안고 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생각된다. 라즈니쉬 수상집에 보면 '모든 사람이 황금빛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나 착각이다. 황금빛 어린 시절은 없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생에 있어서 단 한번 황금빛 아니 핑크빛 시절이 있다면 그것은 첫사랑을 시작할 무렵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무렵의 누구도 그 환상적인 색채의 아우라속에 한번쯤 갇혀보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그것이 이루어진 사랑이든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든 우리는 일생을 통해 그 찬연한 기억을 쉽게 지우지 못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일 때 더욱 감미롭게 기억될 것이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우리 집은 고려대 뒤쪽 안암동 산동네에 있었다. 산기슭에 물방게처럼 붙어 있던 집들, 겨울이면 숫제 앉아서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던 왕모래의 길. 종일 그치지 않고 들리던 싸움소리. 공동수도에 끝없이 늘어서 있던 입 벌린 물통들...... 우리는 그곳에서 이웃으로 만났다. 그는 시골에서 올라온 유학생이었다. 햇빛이 투명했던 봄날. 베레모에 제비꼬리 칼라의 교복을 입은 나는 무거운 가방을 들고 낑낑거리며 비탈을 오르고 있었다. 거의 꼭대기에 있는 집까지 올랐을 때, 나는 풀밭에서 네댓 살 된 이웃집 경이를 데리고 장난을 하고 있는 그를 보았다. 그 애는 나를 보고 '언니!'하고 부르며 쪼르르 달려왔다. 그 아이는 아버지 친구의 딸이었던 것이다. "우리 오빠야, 시골서 왔어. 우리 집에 살 거야." 얼굴이 까맣고 수줍음을 타는 전형적인 시골 학생인 그는 나를 보며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며 서 있었다. 나도 왠지 쑥스러워 그냥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그후 우리는 양쪽 집이 가까웠던 관계로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그는 자존심이 유난히 강한 공부벌레였다. 우리는 집옆에 있는 개척교회에 딸린 토굴 기도실에서 밤샘 공부를 같이하는 동지가 되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밤새 축축한 토굴 속에서 '어부사시사', '월인천강지고', '사미인곡'등을 '노란 셔츠 입은 사나이'의 곡에 붙여 외우던 기억이며, 그때 서울에서 처음 생긴 정릉의 사설 독서실에서의 밤샘 공부, 새벽 네 시쯤이면 문득 졸음이 걷히고 혓바닥에 이끼가 돋는 듯하던 신신한 느낌이며, 돔바위산 및 채석장에서 그가 불러주던 '딜라일라'. ......그래 지금도 생생하다. 독서실에서 함께 돌아오던 청보랏빛 새벽 산길, 부모님 몰래 보았던 '쉘부르의 우산', '벤허', '율리시즈', '콰이강의 다리'....... 그때 우리는 차비 3원이 없어서 돈암동에서 재동까지 걸어 다니는 가난뱅이들이었지만 그와 나를 잇는 보이지 않는 푸른 끈이 우리를 슬프지도 지겹지도 않게 해주었다. 어느 날은 밤샘 독서실에서 코피 흘리는 그를 부축해 오기도 했고, 대학시험을 며칠 앞둔 어느 폭설이 내리던 날은 이상하게 절박해져 수유리 4.19묘지까지 걸어갔다 오기도 했다. 고3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데 라디오에서 '북치는 소년' 이라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날따라 그 곡이 왜 그리도 슬프고 애절한지, 온몸의 뼈가 아픈 슬픔이란 이런 거구나......, 처음 알았다. 불현 듯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새벽 두 시에 나는 몽유병 환자처럼 밖으로 나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고려대 뒷산을 가르는 오솔길이 그날따라 유난히 희게 빛났다. 이파리들은 아청빛으로 반짝이고 세상이 형언할 수 없이 가볍고 슬픈 것들에 싸여 흔들렸다. 그의 방에 발그레한 불빛이 보였다. 그것은 손 닿을 수 없는 먼 세상의 것처럼 깊고 아득했다. 나는 그의 방이 비스듬히 보이는 둔덕에 아주 오래 앉아있었다. 발 아래 세상의 불빛들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때 나는 천상의 어떤 세상에 있었다. 어쩐지 그와 내가 무슨 슬픈 비극 속의 연인들처럼 느껴졌다. 그때의 상황을 나는 첫시집의 안암동 연작에서 이렇게 썼다. 누가 씹다 버린 희망이나 못다 이룬 잠 더럽혀진 그리움 같은 것들이 판잣집 촉수 낮은 불빛에 고여 골목길을 돌아오는 너의 좁은 어깨를 바라보는 일은 하릴없고.....어둠이 비탈길을 휩쓸 때 산 뒤편 부촌으로 난 오솔길은 무섭도록 희다 삶이여 키 큰 바람이 산 아래서 우악스레 거슬러 오를 때 황사에 싸여 회오리처럼 몰려오는 허기여 아, 하루는 허기처럼 길고 거리에는 이루지 못할 사랑이 휴지처럼 쌓인다 숨고 싶어라 돔바위 산을 스미는 시린 물소리 바람소리 거친 숨소리 울음소리 그 아래로 어둠에 쌓인 산 서서히 제 그림자를 키우는 '안암동 1-돔바위 산' 그날 이후 얼마동안 나는 그의 방의 불빛이 꺼지고야 잠드는 버릇이 생겼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입시를 앞둔 이들 특유의 초조에서 나오는 광기쯤으로 생각했다.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우린 너무 어렸고 또 너무 가족 같았기 때문이다. 그 겨울이 가고 그와 나는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는 학교가 가까운 동네로 가정교사 자리를 얻어 이사를 했다. 그리곤 각자 새로운 환경과 생활에 적응하기에 바빠 자주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나 내 가슴 한켠에는 그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입대하게 되었다고 나를 찾아왔는데 그때 나는 너무 가난했던 집안 사정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될 형편에 놓여 있었다. 그 때 나는 정신적으로 말 할 수 없이 황폐하고 지쳐 있었다. 그가 내게,"헤어져 있는 동안 네가 얼마나 나에게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어"하고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할 때 나는 "그런 한가한 생각은 부르주아들이나 하는 거 아냐?"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생기지도 않은 애인이 생겼다고 나 따위는 잊어버리라고 마구 지껄어댔다. 나는 모든 것이 벽이고 벼랑이라고 생각되었다. 끝간 데 없는 분노와 반발만이 몸과 마음을 휘감고 있었다. 그는 내가 너무 황폐해있다며 화를 냈고 우리는 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뚝방에서 밤새 다투다 지쳐 그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튿날 그는 군에 입대했고 그것이 그와 나의 마지막 만남이 되어 버렸다. 그후 나는 내가 예감했던 대로, 말도 안되는 이른 나이에 결혼해 버렸다. 그것은 나보다 휠씬 윤택한 환경에 있던 그에 대한 반발이나 일종의 시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오랜 후에야 나는 생각했다. 첫사랑의 기억은 대개 어떤 아우라에 싸여 우리들의 뇌리에 혹은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남이 보기엔 정말 미미하고 하찮은 일일 수도 있는 순식간에 어떤 광휘에 휩싸여 생의 한 순간을 휘어잡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은 시작된다. 그 순간의 일어나는 그 신비스런 움직임을 어떤 과학자가 어떤 증명으로 해석할 수 있겠는가? 나의 졸작 중에 이런 시가 있다. 희양산 계곡 물 속에서 돌 하나 보았다 수많은 돌 틈에서 유난히 다른 색깔로 물살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 위를 흐를 때 물은 아주 다른 빛깔이 되었다 물의 미세한 결이 다 보였다 순간이었다, 그를 벗어난 물은 태연히 다른 몸들을 넘어갔다 어둑한 몸들을 넘어가는 물소리가 계곡을 꽉 붙들고 있었다 - '돌' 어느 날 나는 어떤 계곡 물 속에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빛깔의 돌을 발견하였다. 그 빛깔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 위를 흘러가는 물까지 다른 물과는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그 흐르는 물 속의 돌과 그위를 흘러가는 물을 자세히 보았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돌은 그 자리에 그냥 있었지만 그 위를 흘러가는 물은 끊임없이 새로운 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물들은 한결같이 그 돌 위에서만 유난히 다른 빛깔로 반짝였다. 아주 잠깐! 그것을 넘어 간 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다시 어둑한 빛깔이 되어 계곡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도 그런 것일 게다. 우리가 사랑을 느낄 때, 혹은 사랑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그 순간의 돌이나 물이 될 것이다. 그때 그 물이나 돌은 그 순간 그곳에 있었으므로 서로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맥 빠지는 이야기 같지만 나는 그때 물속의 돌을 물 밖으로 꺼내보았다. 그러나 물을 벗어난 돌은 물이 마르자 순식간에 여느 돌과 다를 바 없는 아주 평범한 한돌멩이가 되어 버렸다. 사랑도 마찬가지리라. 근래에 와서야 나는 사랑이란 하나의 '상황'이란 걸 알았다. 후일담이지만 나는 그 사람을 아주 오래 후에(40이 훨씬 넘어)우연한 기회에 한 문인의 집에서 만났다. 처음 우리는 서로 잘 알아보지는 못했다. "혹시.....안암동에 살던 경림씨 아니세요?" 이런 어색한 탐색전이 오간 뒤에야 서로를 알아볼 정도였다. 나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과연 이 사람이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고 애틋해 했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너무나도 평범한 40대의 찌들린 샐러리맨의 모습이었다. 적당히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고 언뜻 탐욕스런 모습까지 보여주는 그를 보며 나는 한량없이 쓸쓸했다. 과연 이 사람이 수십년 내 가슴 한켠에 집을 짓고 한사코 떠나지 않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그때 나는 내가 사랑했던 것이 '사람'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을 둘러싸고 있던 '젊음'이나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그러나 상황이든 젊음이든 아니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어떤 사건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첫사랑'이란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는 생의 과자인가! 이경림 - 1989년 '문학과 비평'으로 등단했다. 시집'토씨찾기', '그 곳에도 사거리는 있다', 시절하나 온다, 잡아먹자'들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권태현 - 첫사랑, 잊혀지지 않는 밤마다 나는 호수로 내려갑니다. 하늘에서 내려준 가장 아름다운 별빛 한 가닥 타고 갑니다. 세상은 호수 깊숙히 잠들어 있어 나는 곧 세상입니다. 호수에 닿으면 찰랑 하늘이 부서지고 별들이 떨어집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헤엄치기 위해 제일 가벼운 신발로 갈아 신어야 합니다. 호수에는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숨겨져 있습니다. 숨어 있을수록 아름다운 빛을 갖고 있음을 처음 알았습니다 내 작은 그릇으로는 어느 것 하나 담을 수 없었으므로 나는 아무 이름도 짓지 못 했습니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더욱 웅장한 빛의 연주가 울려 퍼집니다. 이마에서 떨어져내린 땀방울이 한 점 빛이 되어 반짝입니다. 아침마다 나는 호수에서 걸어나옵니다. 호수에서 만난 갖가지 현상을 모두 제자리에 놓아두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호수 밖으로 드러내면 제 빛깔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나는 조심조심 계단을 딛고 올라 지친 산 한 자락을 베고 누워 잠이 듭니다. 밤이 올 때까지 세상은 나를 재워 줍니다. 시 '밤.호수' 전문 내 첫사랑은 기억은 얼룩진 눈물과 울음소리로 남아 있다. 나는 아직도 환영처럼 그 모습을 보며, 환청처럼 그 소리를 듣는다. 그것들은 가끔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해서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불쑥 나를 찾아왔다가 사라져 간다. 이미 오래 전의 그 일이 내게 아직까지 그렇게 간헐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때의 이별이 그만큼 가슴 아팠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았고 두 학년이 더 높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출을 했던 나는 고등학교를 일 년 늦게 들어갔고, 그녀는 정상적으로 진학을 한 상태였던 것이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때 이미 그녀는 대학교 1학년이었다. 나이로 보나 학년으로 보나 나는 그녀를 누나라고 불러야 옳았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이미 그녀는 내 마음 깊은 곳에 하나의 무늬로 자리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시력교정을 위해 안구훈련을 하는 곳이었다. 두어 달 정도 나가던 나는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아서 때려치웠는데, 콘택트렌즈를 빼 볼 욕심으로 그녀는 그후에도 줄곧 그곳에 나가 안구훈련을 했다. 나는 시력교정을 때려치우기 전에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었다. 당시만 해도 교복을 입고 있던 내가 대학생인 자신에게 보인 태도를 그녀는 몹시 불쾌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오로지 내 목적은 그녀와 가까워지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마침내 내가 시력교정을 그만두는 날이 왔다.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안구훈련을 계속할까 하는 미련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밖에서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밖에서 만나줄 것 같지가 않았다. 고민을 하던 나는 그녀를 향해 불쑥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그 안에는 내가 소속된 고등학교 문예반에서 하고 있는 시화전 초대장이 들어 있었다. 그녀가 그것을 되돌려줄까 봐 나는 잽싸게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우리 학교 문예반이 시화전을 하고 있는 YMCA복도를 서성이며 그녀를 기다렸다. 첫날도,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끝까지 오지 않으면 안구훈련을 하는 곳으로 그녀를 찾아가리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YMCA복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날, 드디어 그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줄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덥석 안아 줄 뻔했다. 나는 내 시가 걸려 있는 자리로 가서 그녀에게 말도 되지 않는 설명을 늘어놓았다. 세련되고 예뻤던 그녀는 금세 내 친구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우쭐한 기분에 들떠서 그녀가 무슨 말을 건넸는지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잠시후 그녀와 나는 YMCA복도를 빠져나와 그 근처에 있는 빵집에 마주앉았다. 그녀는 마치 누나가 동생을 축하해 주러 온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그럴수가 없었다. 나는 재수를 해서 다른 친구들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다고 말했고, 그렇게 따진다면 나이가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기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을 강조했다. 차근차근 이어지는 내말을 듣고 있던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나는 결코 그녀를 누나로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 말은 한동안 더 장황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기뻐서 그녀의 뺨이라도 어루만져 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그녀는 고등학생 친구를 사귄다는 일에 적응 하기가 좀 힘든 것 같았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나는 적극적으로 리드했다. 그렇기 때문에 좀더 자연스럽게 자주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생활이 무척 어려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여동생은 서울로 올라가고, 대구에는 나 혼자남아 자취를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리고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 학교 안에서 학생지를 팔며 겨우 연명하고 있을 때였다. 라면이 주식이었고 그나마 끼니를 거르는 때가 많았다. 그녀는 큰언니 집에 얹혀 지내긴 했지만 나에 비하면 훨씬 더 유복한 편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데이트 비용은 늘 그녀가 대는 형국이었다. 그녀는 때론 언니네 집에서 쌀과 반찬을 몰래 가져다 주기도 했다. 용돈이 많이 생기는 날이면 과일과 간식을 사들고 내 자취방을 찾기도 했다. 그런 그녀 덕분에 나는 포식을 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단순한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말 한 마디를 해도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고 있었으며, 무슨 일을 할 때 자신의 생각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사이가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그녀는 대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실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머리도 제대로 자르지 않고 수염도 잘 깎지 않던 나는 그녀와 어깨동무를 한 채로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길을 걸을 때는 그녀가 옆에서 매달리듯 팔을 잡아주지 않으면 여간 허전하지 않았다. 한번은 가까운 야산으로 나들이를 나갔을 때였다. 나는 불쑥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니 가슴 한번 만져 봤으면 좋겠다." "여기서?" "응." 막상 말을 꺼내고 나자 나는 미친 듯이 그녀의 가슴을 만지고 싶었다. 그녀는 펄쩍 뛸 줄 알았는데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사람이 없는 숲 사이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블라우스 단추를 풀어 주었다. 나는 지금도 내가 그때 그녀의 가슴을 만졌던 감촉을 잊지 못한다. 탄탄하고 부드러웠으며, 내 손에 힘을 넣을 때마다 반작용으로 전해져 오던 그 말랑말랑하던 느낌...... 나는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을 만졌다. 그러다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치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키스를 했다. 우리는 오래도록, 누군가가 그곳을 지나치며 인기척을 낼 때까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담배를 피웠는데,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담뱃갑이 그녀의 핸드백 속에 들어 있었다. 담배가 몸에 해롭기 때문에 내가 몇 번 사정을 해야 겨우 한 개비를 주면서 내 건강을 염려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을 보내고 있었다. 공부는 거의 하지 않고 있었고, 대구지역을 비롯 한 전국 백일장과 현상문예에서 상을 받으며 그 시절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성적으로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은 꿈도 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겨우 내가 갈 수 있는 학교는 현상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어 입학금과 등록금이 면제되는 대학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학교에는 가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날마다 무엇인가를 끌적이면서, 공부를 하지 않는 데 대학 초조감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그녀를 만나서 초라한 내 모습을 내보이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내 처지를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게 아무런 보장도 없다는 것이 우선 나를 견딜 수 없이 비참하게 했고, 그녀로부터 끊임없이 도움을 받는다는 것도 나를 못 견디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고, 그냥 그대로 주저앉고 말 것만 같았다. 그때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었던 것이 신춘문예였다. 비록 대구매일신문이었지만 나는 그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답답하게 막혀 있기만 한 내 앞날의 돌파구를 열고 싶었다. 신춘문예에만 당선이 된다면 무엇이든 내가 하고자 하는 대로 일이 풀릴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보기좋게 낙방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자 나는 축을 잃은 회전체처럼 나동그라졌다. 도무지 그 어느것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좌충우돌하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당시에 그녀의 언니가 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녀의 언니는 당연히 펄펄 뛰면서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그때서야 나는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에게 그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 앞서서 나 스스로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추운 겨울날 늦은 밤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였는데 그녀는 만나자마자 내 목에 매달렸다.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힘껏 그녀를 껴안았다.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우리 언니한테 인자 내 안 만나겠다고 했다면서?" 울음 섞인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물었다. 나는 인적이 뜸한 골목으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내게 끌려오면서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 울음소리 때문에 내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가 우째 안 만날 수가 있노? 말 좀 해봐라. 니는 내 안만날 수 있나?" 나는 아무 말도 입밖으로 나와 주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말인자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내한테는 인자 아무 희망도 없고......언니가 니 걱정 하는 것도 알고......" "안 된다.나는 절대 이래 못 헤어진다. 참말이다. 나는 못 헤어진다." 나는 그녀의 말을 받아서 무슨 말인가를 더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 궁색하고 맥빠진 소리들일뿐이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몸부림치듯 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녀는 내 얼굴을 마주 바라보더니 입술을 부벼댔다.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 때문에 찝질한 기운이 입 안을 타고 흘렀다. 그 사이에도 간간히 그녀의 울음 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눈물만 흘리며 그 자리에 그렇게 오래 서 있었다. 그녀를 언니네 집 앞에 이르렀을 때는 둘 다 많이 진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나를 무척 야속해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등이 비칠대면서 골목의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나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나지 않아 나는 대구를 떠났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그녀와 나 사이를 가로막는 언니의 지나친 염려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적인 상태가 된 나의 어쩔 수 없는 태도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도 가끔 그녀 생각이 난다. 얼룩진 눈물, 울음소리와 함께. 권태현 - 1958년 대구에서 출생했다. 1983년 '국시' 1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85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었다. 공동시집으로 '잠시 나가 본 지상','안경 너머 지평선이 보인다'가 있으며 소설집 '바보들의 농담'등이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안도현 - 첫사랑,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서 강물이 사라지는 쪽 하늘 한 귀퉁이를 적시는 노을을 자주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둘 다 말도 없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애와 나는 저무는 세상의 한쪽을 우리가 모두 차지한 듯싶었습니다 얼마나 아늑하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는지요 오래오래 그렇게 앉아 있다가 보면 양쪽 볼이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를 때도 있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붉은 노을 때문인 줄로 알았습니다 흘러가서는 되돌아오지 않는 물소리가 그 애와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그 애는 날이 갈수록 부쩍 말수가 주러드는 것이었고 나는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하는 자신이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손가락으로 먼 산의 어깨를 짚어가며 강물이 적시고 갈 그 고장의 이름을 알려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강물이 끝나는 곳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여태 한번도 가보지 못한 큰 바다를 그 애와 내가 건너야 할 다리 같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습니다 날마다 어둠도 빨리 왔습니다 그 애와 같이 살 수 있는 집이 있다면 하고 생각하며 마을로 돌아오는 길은 늘 어찌나 쓸쓸하고 서럽던지 가시에 찔린 듯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애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포개었던 날이 있었습니다 열 몇 살 열 몇 살 내 나이를 내가 알고 있는 산수공식을 아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은 노을을 보았습니다 저물 무렵 그 애와 나는 강둑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가 세상을 물들이던 어린 노을인 줄을 지금 생각하면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시 '저물 무렵'전문 나는 나의 첫사랑을 모른다. 그게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고 의아해 할지 모르겠지만, 내 기억 속에 단 한폭의 그림으로 저장되었는, 유일무이한, 딱히 첫사랑이라고 정의할 만한 사랑을 나는 모른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말을 내가 깊이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말은 이 세상의 어떤 잠언보다도 아름다운 게 사실이지만, 데체로 바람둥이들의 자기 변명을 위한 허사로 쓰이기 일쑤여서 엄격하고 안전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의 귀에는 매우 불온하게 들릴 수도있다. 또 첫사랑은 실패한다는, 상당한 경험이 깃들어 있는 듯한 인생파적인 잠언도 볼온하기는 마찬가지다. 미리 실패를 상정하고 만나는 사랑은 그 어떤 위험한 불장난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두려움과 두려움으로 인산 가슴 두근거림이 없는 사랑은 이미 사랑이 아니고, 더구나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더욱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나는 여자 사람으로 하여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한번도 없었던가. 그것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그때만 해도 6학년들이 졸업을 하기 전에 선생님들을 모시는 사은회라는 게 있었다. 학예발표회를 겸하여 1년에 한 번 열리는 이 행사에 나는 여자 아이들과 짝을 맞추어 무용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산토끼 같은 분장을 하고 학교의 숙직실에서 무용 연습을 했는데...... 비좁은 숙직실에서 줄을 맞추어 내가 등장할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던 나는 한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나하고 짝을 지어 같은 연습을 하는 여자 아이의 몸이 내 등에 바짝 붙어 있는 게 아닌가. 그저 아무렇지도 않았을 그 아이의 양쪽 가슴에 뭔가 말랑말랑한 정구공만한 게 달려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내가 너무 조숙했기 때문일까. 그후로 나는 돌이 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 같아서 그 아이의 커다란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2학년 때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다. 우리 학교에 초임 발령을 받고 부임한 담임 선생님은 누가 봐도 곱고 예쁜 처녀 선생님이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셨다. 장터 근방에 있는 선생님의 자취방으로 가서 무엇을 좀 가져오라고, 밤톨만한 자물쇠를 열고 선생님의 자취 방을 들어가는 순간, 나는 가슴이 콱 막힐 뻔하였다. 내가 그때까지 한 번도 맡아보지 못한 화장품 향기가 내 온몸을 얼얼하도록 적셨기 때문이었다. 거울이 달린 선생님의 화장대 위에는 크고 작은 화장품들이 꼬마병정들처럼 도열해 있었는데, 그것들이 풍기는 향기 때문에 나는 선생님의 비밀을 엿본 듯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이다. 그 동안 여자 사람이 내 가슴을 두드린 일들이 어디 그뿐이랴. 중학교 다닐 때 학교 벤치에서 '라면땅'이라는 과자를 건네주던 같은 학년 여자 아이의 가느다란 손끝이며, 고등학교 시절 수 십통의 편지를 주고 받던 여학생의 작은 키며, 시화전 같은 데서 만나 내 이야기에 자주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이던 여학생의 단발머리며 모두 내 가슴에 북소리를 나게 했던 기억들이 아니던가. 또 있다. 얼마 전에 출간한 어른을 위한 동화 '사진첩'에서 아련한 추억으로 다시 만난 봉자 누나였다. 내가 학교에 입학할 때 손수건을 사 준 사람이 종자 누나였다. 봉자 누나는 우리 옆집 양장점에서 일을 거들던 처녀였다. 어른들이 양장점 시다라고 불렀지만, 누나가 자신을 시다라고 말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축하한다." 어느 날 누나는 내 손에 신문지로 정성스럽게 싼 물건을 쥐어주었다. "이게 뭔데?" "입학선물이야" 파란 물방울 무늬가 그려진 손수건이었다. 나는 그때 적잖이 감격하여 얼굴이 다 빨개질 정도 였는데, 그것은 축하와 선물이라는 낯선 말을 생전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덟 살이 될 때까지 해마다 생일을 맞이했지만 누구한테서 정식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으며, 더군다나 선물을 받는 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사소하고 일상적인 사적세계 속에 머물러 있다가, 뭔가 인간과 인간이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되는 공적세계로 편입하는 순간의 감격이 그런 것인지 몰랐다. 나는 매일 손수건을 가슴에 달고 학교를 다녔다. 그렇지만 한번도 거기에다 코를 닦지 않았다. 처음 받은 선물에다 더러운 코를 묻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다 봉자 누나가 보고 싶을때면 혹시나 누나 냄새가 나지 않을까 싶어 손수건을 코 가까이에다 대어 볼 뿐이었다. 봉자누나는 전혀 화장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봉자 누나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다. 누나가 내 옆에 있다가 어쩌다 그 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길 때면 향기로운 누나의 냄새가 아찔할 정도로 느껴지곤 했다. 봉자 누나의 냄새를 기억하고부터 나는 누나의 모든 게 좋았다. 고무 슬리퍼를 끄는 소리도 싫지 않았고, 딱딱 소리 내어 껌을 씹는 볼도 보기 좋았으며, 선반에 있는 옷감을 내리기 위해 팔을 쳐들었을 때 겨드랑이 사이에 거뭇거뭇 드러나던, 그 윤기 나는 털도 보기 좋았다. 덕구네 큰형이 봉자 누나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나도 봉자 누나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학 교에 입학해 해야 할 숙제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다른 것에 신경을 쓸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어느 날 나는 양장점 주인 이모에게 식혜를 한 주전자 갖다주러 심부름을 간 적이 있었다. 양장점 주인 이모는 내가 왔는지도 모르고 봉자 누나를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 "니 신세 니가 알아서 하겠지만, 다시 한 번 극장을 갔다가는 다리 몽테이가 뿌러질 줄 알아라." 그 전날밤 봉자 누나는 덕구네 큰형과 함께 몰래 영화를 봤던 모양이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풍산면민 여러분, 오늘 밤 개봉할 영화는 눈물없이 볼 수 없는 순애보 중의 순애보,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하는 에로티크 러브......'매일 저녁 무렵이면 확성기를 통해 드려오는 극장의 영화 선전 방송은 열아홉 살 봉자 누나의 가슴을 흔들기에 족했으리라. "극장 들락거리다가 신세 조진 년들 많다는 거, 니 아나?" "나도 가고 싶어서 간 건 아니고요..... 딱 한 번만 가자고 해서......" "이 가시나가 시상 무서운 줄 모르네. 그라만 남자가 딱 하번만 자자고 하면 니 잘래?" 봉자 누나의 고개가 더 아래로 숙여졌다. 나는 위기에 빠진 봉자 누나를 구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으흠, 하며 염소 콧김 빠져나오는 소리를 냈다. 그제서야 내가 왔다는 것을 알고 양장점 이모는 봉자 누나를 방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봉자 누나가 직접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봉자 누나가 덕구네 큰형보다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누나는 언젠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다. "니 얼굴은 배호를 빼닮은 것 같애." 누나가 좋아하는 배호의 둥그런 얼굴과 내 얼굴이 닮았다는 것은 결국 나를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어 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 안고울고만 있을까.....' 그러니 나도 배호의 낮게 깔리는 굵은 목소리를 그때부터 흉내낼 수밖에. '다아-씨 한번 어루마지며 돌아서는 장충단 공원......' 어쨌든 나는 봉자 누나와 덕구네 큰형 사이를 떼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정보 한 마디 던지고 지나가는 말인 것처럼. "누나, 덕구네 큰형이 올 겨울에 군에 간다고 하드라." 내말을 들은 봉자 누나의 눈빛이 노래 가사에 나오는 낙엽송 고목처럼 쓸쓸해지는 것을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렇다. 그렇게 첫사랑들은 나도 모르게 스쳐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나의 첫사랑을 모른다. 그것을 구태여 따져 가려낼 생각도 없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세월을 더 산뒤에, 머리 위에 허옇게 서리가 내리더라도, 늙은 아내의 주름진 눈가를 들여다보며 가슴 두근거릴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살아 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비록 짧다고 해도 나는 둥둥둥둥 가슴의 북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라는 말을 이렇게 바꾸려고 한다. '당신의 가슴이 두근거리면, 언제 어느 때든 그게 바로 첫사랑이라고' 안도현-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대구애일신문 신춘 문예에 '낙동강'이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 당선 되었다. 시집으로 '서울로 가는 전봉준','모닥불','그대에게 가고 싶다','외롭고 높고 쓸쓸한','그리우 여우'가 있고, 어른을 위한 동화로 '연어','관계','사진첩'들이 있다.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김용택 - 그 여자네 집, 그리고 그 여자 이웃 마을에 살던 그 여자는 내가 어디 갔다가 오는 날을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마을 앞을 지날때를 어떻게 아는지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날 때쯤이면 용케도 발걸음을 딱 맞추어가지고는 작고 예쁜 대소쿠리를 옆에 끼고 대문을 나서서 긴 간짓대로 된 감망을 끌고 딸가닥딸가닥 자갈돌들을 차며 미리 내 앞을 걸어갑니다 눈도 맘도 뒤에다가 두고 귀도, 검은 머릿결 밖으로 나온 작고 그리고 희고 또 이쁜 귀도 다 열어놓고는 감을 따러 갑니다 커다란 느티나무 저만큼 서 있는 길 샛노란 산국이 길을 따라 피어 있는 길 어쩌다가 시간을 잘못 맞추는 날이면 그 여자는 붉은 감이 주렁주렁 달린 감나무를 높이높이 올라가서는 감을 땁니다 월남치마에다 빨간 스웨터를 입은 그 여자는 내가 올 때까지 소쿠리 가득 감이 넘쳐도 쓸데없이 감을 마구 땁니다 나를 좋아한 그 여자 어떨 때 노란 산국꽃포기 아래에다 편지를 감흥시로 눌러놓은 그 여자 늦가을 시린 달빛을 밟으며 마을을 벗어난 하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느티나무에다 등을 기대고 달을 보며 환한 이마로 나를 기다리던 그 여자 내가 그냥 좋아했던 이웃 마을 그 여자 들패랭이 같고 느티나무 아래 일찍 핀 구절초꽃 같던 그 여자 가을 해가 이렇게 뉘엿뉘엿 지는 날 이 길을 걸으면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와 저만큼 앞서가다가 뒤돌아다보며 단풍 물든 느티나무 잎사귀같이 살짝 낯을 붉히며 웃는, 웃을 때는 쪽니가 이쁘던 그 여자 우리 나라 가을하늘같이 오래 된 그 여자 가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습니다. 산도 젖고 강도 젖고 풀잎들도 젖고 내 마음도 젖습니다. 가을비 내리면 추워지고 봄비 내리면 따뜻해집니다. 이 비 그치면 들판의 곡식들은 더욱 더 깊이 고개 숙이며 익어가도, 강가에 풀잎들은 노랗게 말라가리. 아, 가을의 강가에 가보았는지, 해는 지고 억새들이 바람에 하얗게 나부끼는 가을 강가에 가보았는지, 해맑은 햇살 속에 마른 풀잎들이 사각이는 가을 강가에 서서 저무는 물을 보았는지. 외로움처럼 키 큰 포플러 마른 잎이 다 지고 마른 풀섶에 샛노란 산국이 지고, 단풍 지면 산산이 빈 산이 되어 저 강에는 겨울이 오고 저 강물로 하얀 눈송이들이 겁도 없이 하얗게내리리라. 그러면 나는 강가에 서서 강물로 사라지는 눈송이들을 보리. 내게 사랑은 늘 그렇게 왔다네. 계절처럼 소리없이 왔다가 계절처럼 소리 없이 사라지먼서 잎 피고 바람 불고 눈 내리고 비가 왔다네. 그 여자네 집은 우리 동네 윗동네에 있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벼가 익고 개구리 울고 감나무가 있고 보리가 겨울 달빛 속에 자랐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하얀 감자꽃이 피고 들국화가 피고 구절초가 피고 산벚꽃이 피고 강가에는, 강가에는 검은 바위들이 달밤에 번쩍거렸습니다. 풀벌레 울고 밤산에서 소쩍새 울고 부엉새가 부엉부엉 울었습니다. 어두운 밤에도 굽이굽이 하얗게 살아가던 길, 달이 뜨면 뽀얗게 떠보이는 적막하고 다정한 길이 늘 펼쳐져, 해 저물고 바람 불면 바람 따라 길 따라 하얗게 춤을 추던 개망초꽃, 그리고 해맑은 풀잎들. 그 길은 슬프고 외롭고 쓸쓸하고 그리고 정다운 길입니다. 아버지들이 하얀 달빛을 받으며 나락을 져 나르던 길이며, 어머니들이 아기 업고 머리에 곡식을 여 나르던 길입니다. 내 누이들이 돈 벌러 가던 길이며, 동무들이 밤도망을 치던 길입니다.어머니들이 울면서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눈물로 자식들을 기다리던 길입니다. 꽃길입니다. 서러운 눈물 뿌리던 길입니다. 기쁨의 길입니다.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내 사랑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 여자는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네 집 가는 길엔 한 그루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그 느티나무 앞에는 작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들 끝에는 언제나 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 들 끝에 그 여자네 무밭이었습니다. 그 무밭에는 늘 곡식들이 다 떠난 들판에 파란 무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이따금 그 무밭에서 파란 무나 배추를 뽑아 머리에 이고 빈 들을 가기도 했습니 다. 그 느티나무 부근에는 또 여자네 밭이 있고 그 밭에는 그 여자 네 어머니가 하얀 수건을 쓰고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밭가에는 토란잎이 넓적하게 자라기도하고 가지가 열리기도 하고 오이가 열리기도 하고 그 여자가 그 여자 어머니와 함꼐 콩밭을 매기도 했습니다. 가을이 되면 감이 붉게 익고 그 여자가 감망으로 감을 따다가 내가 지나가도 못 본 척하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네 나이 든 할아버지는 뻣뻣하게 풀 먹인 삼베옷을 입고 하얀 수염을 나부끼며 해 저문 논두렁을 돌아다니기도 했습니다. 봄이면 그 밭에서 그 여자네 아버지가 큰 암소로 느릿느릿 쟁기질을 하기도 했는데, 그 여자가 밭가에 앉아서 내가 지나가면 곁눈질로 나를 보며 제비꽃을 꺾고 있었습니다 그 느티나무는 참으로 크고 의젓하고 당당합니다 봄이 오면 그 느티나무에 잎이 피어납니다. 그 추운 겨울 그 잔가지로 어떻게 그 매서운 강바람 들바람을 이겼는지, 봄만 되면 어김없이 가지마다 수많은 새 잎들을 피워냅니다. 나는 설레입니다 잎 피어나는 그 나무 밑을 지나면 나는 그 나뭇잎들의 수런거림으로 내맘은 설렙니다. 멀리에서도 나는 그 나무만 보면 늘 가슴이 뜁니다. 잎이 피면 그 주위에 수많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하얀 꽃, 노란꽃, 보라색 꽃들이 피어나고 그 나무 아래는 환하게 밫납니다. 그 여자, 꽃같이 고운 열아홉, 그 여자는 어머니랑 같이 그 나무 아래를 지나며 나를 못 본 척 눈을 내리깔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나 어디만큼 가서는 얼른 뒤를 돌아다봅니다.뒤태가 이뻤던 그 여자는 그때 꽃같이 고운 열아홉이었습니다. 그 여자가 나를 힐끗 뒤돌아본 날 밤이면 그 느티나무에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달빛을 받으며 그 길을 걸어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달빛을 밟으며, 먼 산에서 우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물소리를 차며 그 여자를 만나러 갔습니다. 검정 우산같이 달 그늘을 거느린 그 느티나무를 보면 나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여자는 커다란 느티나무에 달 쪽으로 기대어 서서 달을 보며 나를 기다렸습니다. 스웨터를 여미며 나를 보고 웃는 그 여자는 달빛 아래 하얗게 핀 박꽃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밤이면 그 느티나무 등뒤에서 만났습니다. 어쩌다가 밤 늦게 사람이 지나가면 우리 둘이는 그 나무 등에 딱 붙어서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너무 가슴이 뛰고 그리고 너무 좋았습니다. 어찌나 가슴이 쿵쿵 뛰던지 느티나무가 흔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여자의 숨소리, 따뜻해져 오는 몸, 그리고 어색하게 더듬어 찾던 손과 맞주치던 눈길들. 길 가던 사람이 지나가도 우린 한참을 그렇게 오래 느티나무 등뒤에 서 있었답니다. 그 여자는 운동회날이면 양산을 쓰고 학교에 왔습니다. 나는 선생이었고, 스물셋이었습니다 그 여자는 늘 느지막하게 학교에 동무들과 같이 나타났습니다. 코스모스가 핀 운동장가에 그 여자는 동무들과 어깨를 마주 대고 오불오불 꽃처럼 모여는 부락 대항 경기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졸업생 경기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 여자는 늘 나를 훔쳐보면서 나에게 눈을 주지 않았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가고 산그늘이 운동장을 덮고 마지막으로 아이들의 소고놀이가 끝나면 그 여자는 또 동무들과 집엘 갔습니다. 운동장가에 코스모스 꽃 속에서 그 여자는 웃고 있어습니다. 운동회가 가 끝나고 해가 다 진 뒤 나는 그 여자네 동네를 지나 집에 갑니다. 그 여자가 어디선가 나를 보고 있는 모습니 보이거나 내가 그 여자네 집 앞쯤 지날 떄, 얼른 그 여자가 그 여자네 집 앞을 지나가면 우린 그날밤에 만났습니다. 늘 그랬습니다. 그렇게 만나는 날이 가면서 겨울이 왔습니다. 어떤 날 밤은 그 여자가 우리 집으로 오기도 했습니다. 동무들과 같이 와서 내 방문에 밤톨만한 돌멩이를 던졌습니다. 뒷문으로 얼른 들어온 그 여자는, 동무들과 같이 있으면 늘 내게 무심 한 듯했습니다. 멀리멀리 돌아서야 내게 닿는 애매한 말 했지만 나는 그말이 내게 한 말임을 잘 알았습니다.어떨 때는 평소 우리둘의 뜻과는 너무 엉뚱한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방은 따뜻 했고 우리들은 이불 속에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놀았습니다. 나는 그여자의 발을 찾다가 다른 여자의 발을 잘못 건드리기도 했지만 우리 둘이 발이 닿으면 우리만 아는 눈웃음을 웃으며 좋아했습니다. 그런 밤이면 어머님이 감도 내오고 고구마도 가져왔습니다. 그릇 하나를 치워도 안 그런 척 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과시하기도 해서, 자기가 이 집과 특별한 관계임을 은근히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꼭 그렇게 티를 냈습니다. 그 여자들이 가면 나는 밤길을 걸어 그 느티나무까지 같이 갔다가 혼자 타박타박 걸어왔습니다. 먼 산을 지나는 밤바람 소리, 발 끝에 채이는 물소리. 우리는 늘 만나 놀았습니다. 이웃마을에 사는 총각들과 처녀들이 만나 놀때도 있었고 삼삼동네 젊은 총각들과 처녀들이 만난 밤을 세워 강가에서 놀았습니다. 달 뜬 밤 우리들의 젊음을 견디지 못해 우리들은 우리들의 장소에서 마나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습니다. 친구들이 군대 갈 때 헤어짐이 슬퍼서 놀았고, 이웃마을 처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강가에서 만나 밤이슬이 내리 때까지 놀았습니다. 콩쿨 대회 때도 만났습니다 그 여자네 오빠가 어찌나 감시와 단속이 심하던지 그 여자는 그 여자네 작은 언니 방에 나들이옷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아무리 감시가 심해도 어떻게든지 그 여자는 다른 동무들과 가설극장 불빛 아래 곱게 화장을 하고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속에 섞여 있어도 우리 둘은 어떻게든 또 따로 만났습니다. 넓은 바위위에서 나는 눕고 그 여자는 내 곁에 앉아 달을 보며 우리들은 행복했습니다. 먼데서 사람들의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 노랫소리가 아득하게 들리고, 달빛은 강물에 부서지고 풀밭에 이슬들은 반짝였습니다. 까마득하게 높은 달, 먼 산의 서늘한 어둠, 그리고 아스라한 저 먼 곳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도 같고, 노랫소리도 같은 산울음 소리, 그리고 멈춘 시간들, 그렇게 밤이 깊어졌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린 우리 둘이라는 게 그렇게 실감나고 호젓했습니다. 그러면서 강물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사랑도 흘렀습니다.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길이면 나는 그 여자네 뒤꼍으로 담을 넘어 그 여자가 있는 그 여자 골방에 들어가 놀기도 했습니다. 그 여자 바로 옆방에는 나이든 할아버지가 계셔서 우리들은 낮은 소리로 이야기하며 놀았습니다. 민화투도 치고 그 여자가 가져다준 감도 먹으며 놀다가 집에 갔습니다. 그럴 때 그 여자친구들과 그 여자가 그 느티나무까지 나를 바래다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그 여자와 나 사이에 눈이 오고 꽃이 피고 꽃이 졌습니다. 꽃이 피고 지는 사이에 우리들은 풀잎처럼 만나고 바람처럼 헤어졌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 여자네 집만 떠올리면 이 세상이 따뜻해져 오던 그 여자네 집엔 살구꽃이 있고, 은행나무가 있고, 감나무가 있고, 그리고 노란 초가집이었습니다. 저녁 연기가 오르고 그 여자가 물동이를 이고 부산하게 마을길을 걸어 그여자네 집 대문으로 얼른 사라질 때면 나는 늘 가슴이 뛰었습니다. 어디 갔다가 올 때면 그 여자가 무밭으로 무를 뽑으러 나가기를, 그 여자가 감을 따러 가기를 나는 간절히 빌곤 했습니다. 어떨 때는 그 여자가 소쿠리를 들고 얼른 대문을 나서서 멀찍이 떨어져 내 뒤를 따라오기도 했습니다. 그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그 여자네 밭으로 그 여자는 감을 따러 갔습니다. 어떨 때 나도 그 여자가 감을 따는 감나무 밑에 가서 감을 얻어먹기도 하며 올라가서 감을 따는 그 여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오기도 했습니다. 그때쯤이면 산국이 노랗게 피어 있어서 나는 산구구을 꺾어 그 여자 감 바구니에 놓고 오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너무 수줍어 입을 가리고 웃기도 하고 어떨 때는 너무나 의외로 거리낌없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었습니다. 나는 그 두 모습이 다 좋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그 여자가 스물한 살 먹을 때까지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도시로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동무들도, 여자 동무들도 하나하나 그 아름답고 즐거웠던 고향의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떠나갔습니다. 그 강, 그 산, 그 강변, 그 풀꽃들, 그 감나무와 밭의 넓적한 토란잎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흐른 후 나는 시인이 되었고, 그리고 더 많은 세월이 흐른 후 그 여자를 위해 두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그 여자네 집'이고 또 한 편이 '애인'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지켜보던 그 느티나무에도 단풍이 들고 가을이 가겠지요. 김용택 - 1948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순창농고를 졸업했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의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1'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섬진강','맑은 날','꽃산 가는 길','그리운 꽃편지','그대, 거침없는 사랑','강 같은 사랑'이 있으며 최근 '그 여자네 집'을 냈다. 산문집으로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그리운 것들은 산뒤에 있다','작은 마을' 들이 있고, 장편동화로 '옥이야 진메야'가 있으며, 김수영문학상, 김소월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 그가 태어나고 자란 섬진강변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고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이문재 - 수국은 한 송이 꽃이 아니다 여름 날은 헉헉하였다 오래 된 마음자리 마르자 꽃이 벙근다 꽃 속의 꽃들 꽃들 속의 피어나자 꽃송이가 열린다 나무 전체 부풀어오른다 마음자리에서 마음들이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열엿새 달빛으로 저마다 길을 밝히며 마음들이 떠난다 떠난 자리에서 뿌리들이 정돈하고 있다 꽃은 빛의 그늘이다 시 '꽃은 빛의 그늘이다- 수국' 전문 수국이 필 때면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국 한 송이가 저마다 여러 개의 작은 꽃송이로 이루어진 꽃의 다발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국은 그 커다란 꽃송이에 비해 화려하지 않다. 거개가 흰색이거나, 산수국일 때 연한 녹색 기운을 가질뿐이다. 색과 빛을, 향기와 모양을 되쏘지 않는 꽃. 되쏘기는커녕 색과 빛을, 향기와 모양을 받아들이는 꽃이 수국이다. 하얀 수국은 결혼했다가 일찍 홀로 된 누이를 떠올리게 한다. 첫사랑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에게는 매우 행복한 이야기지만, 들려주는 사람에게는 여간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들은 익히 체험했을 터이지만, 사랑 이야기는, 군인들의 무용담처럼 부풀려지기가 십상이다. 첫사랑 이야기 앞에서 알리바이와 물증을 추궁하는 청중이 어디 있겠는가. 나에게 첫사랑 이야기가 난감한 것은, 과연 무엇이 첫사랑인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모든 사랑이 첫사랑이었던 것 같다. 겨우 말을 배우고 난 대여섯 살 시절부터 막 40대로 접어드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가 하는 사랑은, 그것이 사랑의 범주 안에 든다면 모두 첫사랑이다. 수국 한 송이가 여러 개의 작은 꽃들로 이루어져 있듯이 말이다. 나는 최초의 여자를 사랑했다. 나는 만득이었다. 아버지가 쉰에 나를 나으신 것이다. 어머니는 마흔둘이셨다. 태어나서 내가 말을 배우고 사물과 사태를 인지하기 시작하던 때, 그러니까 최초의 기억이 만들어지던 무렵, 내 최초의 여자는 '늙으신' 어머니가 아니었다.(다른 글에서도 짧게 언급한 적이 있지만) 우리집에 잠깐 세들었던 경상도 아가씨였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시골집 앞에는 검문소가 하나 있었다. 그 검문소는 해병대 관할이었는데, 어느 날 그 검문소 초소장이 우리집 건넌방에 세를 들었고, 며칠 뒤 아주 젊은 아가씨를 데려왔다. 내가 나중에 성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그 헌병대장(우리는 초소장을 헌병대장이라고 불렀다)은 20대 후반이 채 안되었을 것이고, 그 아가씨는 갓 스무 살을 넘었을 것 같았다. 낮에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지어야 하는 새카만 늙은 어머니에 비해 그녀는 키가 크고, 피부가 고왔으며, 얼굴이 갸름했다. 그 아가씨는 쌀을'쌀'이라고 발음하지 못하고 '살'이라고 했다. 그녀가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은 바로 그 '살' 발음 때문이다. 여름철이면, 우리집 마당에는 아버지가 손수 만든 돗자리가 깔렸다. 저녁식사는 마당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졌으니, 지나가던 동네 사람들이 하나 둘 끼여들었고, 저녁식사 자리는 이내 옛날이야기 자리로 바뀌었다. 전쟁과 피난 이야기가 대부분인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돗자리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잠들곤 했다. 그런 어느 여름 날 저녁이었다. 그 헌병대장은 근무가 끝나면 자주 술을 먹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그 아름다운 경상도 아가씨에게 손찌검을 했다. 어른들이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그 헌병대장은 꼭 권총탄 띠를 마루나 돗자리위에다 풀어놓고 건넌방으로 들어가 그 아가씨를 때렸다. 어른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나는 몰래 권총에다 손을 대고는 했다. 그때 그 권총은 얼마나 차가웠던가, 그 때 이미 나는 그 아가씨를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그 경상도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헌병대장이 술에 취해 손찌검을 한 다음 날이면, 그 아가씨는 나를 꼭 끌어안고 소리없이 흐느끼곤 했다. 나는 그 화선지 같은 아련한 품안에서, 이 여자가 내 어머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상상했다. 지금이야 그녀를 경상도 아가씨라고 표현하지만 그때 나는 아마 속으로 '엄마'라고 되뇌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름다운 '엄마'를 괴롭히는 헌병대장에 대한 어린 나의 적의는 정당한 것이었다. 내가 어른들 몰래 그 무시무시한 권총에 손을 댔던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헌병대장과 경상도 아가씨는 그해 여름 한 철만 살고 우리 집을 떠나고 말았다. 그 이후 '젊고 예쁜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갈증은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방학 때, 큰 형님 결혼식이 서울에서 있었다. 아침 일찍 비포장길을 달려 인천에 도착해,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을지로 6가에 있는 예식장에 닿아야 했다. 부모님, 친척들과 함께 인천에서 고속버스를 탔는데, 유독 내 좌석만 따로 떨어져 있었다. 나는 창가에 앉아 버스가 출발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진한 화장품 냄새가 났다.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나는 그 향기가 나는 곳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오른쪽 창밖만 바라보아야 했다.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나 되었을까. 그 '향기'가 나에게 뭔가를 내미는 것이었다. 왼손으로 겨우 받았다. 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껌을 결국 씹지 못했다. 버스가 서울역 앞에 내릴 때까지 나는 그 껌을 왼손에 꼭 쥐고 있었던 것이다. 토끼털이었을까, 여우털이었을까. 얼굴 한 번 쳐다보지 못한 그녀는 털이 많은 옷을 입고 있었다. 왼손에 쥔 껌 하나조차 벗겨 먹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럼을 많이 탔던 나는 버스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또 '젊고 예쁜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삽화를 떠올리다 보면, 나에게 첫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젊은 어머니에 대한 염원이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젊은 여자 결핍 증후군'을 앓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수국의 작은 꽃잎 이야기는 계속된다.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그 시골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개교한 지 얼마되지 않은 그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나는 설레기도 했지만 두렵지 그지없었다. 낯선 여자가 준 껌하나 까먹지 못하는 놈이 망아지만한 여학생들과 어떻게 3년을 지낸단 말인가. 게다가 중학생 시절, 나는 키가 얼마나 작었던가. 나는 여학생들이 두려웠다. 대신 국어 선생님이나 영어 선생님, 또는 음악 선생님을 좋아했다. 그 여선생님들은 인천에서 출.퇴근하던 나의' 젊은 어머니'들이었다. 시골에서 인천까지 버스로 통학하던 70년대 중반, 그 통학 버스 안은 나의 용광로였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했던 그 통학길은 옹목 다섯 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프로이트나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있던 나에게 몇몇 정류장은 위험지대였다. 그 정류장에서 그녀가 타는가, 타지 않는가를 놓고 그날 하루의 운을 따지곤 했다 그때 나에게는 서너명의 '애인'들이 있었다. 종점에서 함께 A여고 3학년생, 다리 건너에서 타는 B여고 2학년생, 목장에서 타는 C여고 3학 년생, 종점에서 타는 3학년생은 키가 작고 얼굴이 아담했고, 다리 건너에서 타는 2학년여고생은 지중해 여자처럼 늘씬했으며, 목장에서 타는 3학년 여고생은 피부가 검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3년 내내 나는 그 세 여자 가운데 누구와도 말 한마디 나누어 본 적이 없었다. 아카시아가 만발한 5월의 주말이면, 목장에서부터 우리집이 있는 종점까지 서너 시간을 혼자 걸었을 뿐이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몇 송이의 수국 꽃잎을 만난 적이 있다. 워낙 쑥맥이어서,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붉어지고 몸이 굳는 통에 대학 1학년 3월은 견디기 어려웠다. 입학 동기 남학생들에게도 말을 잘 붙이지 못하고 있었다. 축구를 잘하던 과 동기를 따라 문학회에 들어가고, 그 문학회에서 선배를 만나 연극부에 들어갈 떄까지도 나의 '젊은 여자 부재 증후군'은 '대인공포증'으로 변질되어 치유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때 연극부는 나에게 새로운 ' 가족'이었다. 복학한 중문과 선배는 큰형처럼 보였고, 무용과나 국문과 여자 선배들은 또 '어머니'처럼 보였다. 학교에서 가까운 큰형집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거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연극부실에서 먹고 잤다. 대학시절, 문학보다는 연극에 심취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늙으신 부모 밑에서 고아처럼 자라났던 성장기에 대한 보상심리 바로 그것이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면, 아마 나는 쉽게 결혼에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시 쓰는 친구들과 함께 지금의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 될 여자를 그야말로 죽도록 따라나녔다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이후, 나는 다시는 연애를 하지 않으리라고 마음먹기도 했었다. 죽을 것 같았기 떄문이다. 잠시라도 보지 못하면, 연락이 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그건 삶이 아니었다. 고문이고 지옥이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사랑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편이다. 사랑에 대하여는 아는 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사랑은 말하여지지 않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사랑에 대하여 함구해야 한다. 묵언해야 한다. 거개의 사랑은 연애의 오역일 때가 많다. 사랑과 연애를 동일시하는 한 그는 아직 성인이 아니다. 그리고 연애는 무분별한 소유욕,집착일 때가 많다. 연애를 보라, 그것은 거의 정신병이다. 다른 것 사랑하는 그 대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일체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연애를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다. 연애는 순수하다. 지독하다. 그래서 아름다울 수 있다. 삶의 전과정에서 자신의 전존재를 자신이 아닌 그 무엇에 투신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연애 말고는 그리 많지 않다. 연애의 에너지가 잘못 풀려나갈 경우 광신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첫사랑은 자기를 발견하는 데에 있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투신은 신뢰의 관계로 성숙 할 때 사랑으로 이어진다. 사랑은 신뢰의 다른 이름이다. 연애로 가지 못하는 첫사랑, 사랑으로 가지 못하는 첫사랑은모두 신뢰가 부족하기 떄문이다. 그 리고 그 신뢰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을 때, 타인을 신뢰할 수 있다. 이것이 수국의 작은 꽃이파리들을 겪으면서 내가 터득한 깨달음이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수국 한 송이가 아니라, 수국 한 소망를 이루는 작은 꽃잎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이때의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시이다. 이문재 - 1957년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을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산책시편'이 있다. 제6회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문학동네 주간으로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박철 - 세상의 첫 걸음 지금쯤 고향의 상수리나무 뿌리는 언덕을 내려와 온 들판 밑을 끌어안고 있겠지 이 지구를 움켜쥐고 있겠지 나, 그 상수리나무 중간키에 첫사랑 이름 석 자 새겼으니 그 이름 물관부를 따라 흐르다 내게 다시 돌아오겠지 나는 잠 깨리라 상수리나무 열매 씹으며 텁텁한 향수, 첫사랑의 기억에 미소지으리 인공폭포 지나 가양동으로 오다가 나는 가끔 쓰러져 상수리나무 뿌리가 전해 주는 옛사랑의 노래를 듣네 그녀의 심장은 아직 따뜻하다 하얀 운동화끈도 순결하다 오뉴월 염천, 엄동설한에도 버티었겠지 그 옛날 내 사랑 이름 석 자 새겨놓은 깊은 뿌리 상수리나무 거기 중간키 아직 휘어져 있고 아직 멧새 둥지 틀어 주겠지 고향 뒷산의 중간키 뿌리 깊은 상수리나무 시 '상수리나무 중간키에' 전문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나는 아이들을 피해 슬며시 놀이터로 나간다. 마치 골목 끝에 버려진 폐차처럼 볼썽사나운 서민 연립주택의 놀이터는 이제 더 이상 아이들의 몫이 아니다. 끊어진 그네줄, 검붉게 녹물이 흐르는 시소, 모래 속엔 슬리퍼가 한 짝 잃고 처박혀 있고, 소주병이 나뒹굴고, 벤치엔 지난밤 누군가의 몸을 가려주었을 법한 담요 한 장이 걸쳐져 있다. 하늘은 멀고 가을햇살이 따갑다. 나는 그 담요를 슬쩍 밀어내고 거기에 않아 친구가 보내온 시집을 읽는다. 친구는 아직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희망의 노랠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친구마저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다. 책을 읽다가 어깨가 아프면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 거기 뜻 모를 아픔에 고개를 숙여 굽은 어깨를 주무른다. 목운동을 하다가 벤치에 그려진 서툰 글자를 발견하고 나는 씩, 미소를 머금는다. '현진이는 내 꺼.' 초등학교 3,4학년의 정도의 글씨체다. 글씨는 서툴게 힘차게 어린 마음 그대로 크레용으로 씌어져 있다. 요즘은 초등학교 학생만 되어도 이 정도의 낙서는 서슴치 않고 하는 모양이다 나는 미소를 지우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하늘을 바라보다가 시집을 덮는다. 시집을 덮고 눈의 초점을 잃어 가며 마치 깊은 잠에 빠지듯 한낮의 몽환 속에 옛날 언젠가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나이 40이 되도록 자신이 자란 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요즘에야 깨달았다. 고향을 떠나보지 않은 나로서는 사람은 대개 다 그렇게 사는가 싶었는데 세상은 그렇게 만만치가 않았던 것이다. 그것도 행정구역상 엄연히 서울로 편입된 지 40년이 넘는 곳이니 말이다. 그러나 40년 세월이라지만 마을의 지세는 지난날 그 모습에서 크게 변한 것이 없고 가구 수조차 그 모양 그대로이다. 다만 신작로가 8차선 대로로 바뀌고 신작로 건너 김포 벌판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뿐, 내가 아직 세상사를 잘 모르듯 내가 사는 마을도 뭔가 깊은 미망 속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 해도 아마 내 자식이 내 나이쯤 되면 저 푸른 벌판은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그 옛날 내가 저 벌판에서 잘 주어오던 뜸부기알처럼. 예나 지금이나 벌판 끝은 김포공항 활주로다. 그 활주로를 타고 비행기는 하늘로 떠올라 구름을 헤치고 멀리멀리 아주 먼 세계로 날아가곤 했다. 어린 날, 나는 창가에 걸터앉아 벌판 너머 떠오르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비행기 꼬리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놓지 않으며 늘 저 비행기는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마음을 조리며 방과후의한나절을 그렇게 보냈다. 지금은 1분에 한 대씩 뜬다는 비행기의 공해와 소음이 큰 골칫거리이지만, 한나절에 한두 대 떠오르던 그 시절엔 비행기란 마치 꿈을 싣고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타임머신이었다. 그렇게 벌판 끝을 내다보고 있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먼지 쌓인 창틀 위에 손가락으로 낙서를 하고 있는 것이다.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거기 글자를 써 넣기도 한다. '부연.' 중학교3학년 때였다. 중학교 3학년이 사랑이 뭔지 알겠냐마는 나는 창틀에, 책상 위에 손가락으로 그렇게 쓰고 또 썼다. 나는 3학년 들어 성적이 지지부진하자 그 핑계를 남의 탓으로 돌리고 과외공부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그때 마음은 잔뜩 바람이 들었던가 보다. 예나 지금이나 과외공부가 꼭 성적을 올린다는 보장은 없다. 그건 그저 자기합리화를 위한 몸짓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중3의 어느 날이었다. 그렇게 방과후의 헛된 시간을 보내던 공항시장의 2층 과외방에 새로 한 여학생이 들어섰다. 미닫이 문이 열리고 7,8명의 우리는 침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때 직감적으로 그녀 역시 나와 같은 부류임을 알아차렸다. 과외를 가르치던 이병룡 선생도 대뜸 만만치 않은 얼굴빛을 보였다. 가르치는 일보다 다스리는 일이 더 힘든 중3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머리 등촌동에서 온 그녀 역시 성적보다는 그저 어떤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첫날부터 다른 학생들과 멀어져 있었다. 당시 여중 3학년들은 겨울이 되어도, 외투를 입는 학생이 그리 많지 않았다. 외투를 입어도 학생복에 맞춘 군청색의 헐렁한 외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치 고등학생들이나 입던 밤색의 윤기나는 외투에 그것도 몸의 곡선을 따라 맞추어 입은 듯한 모양이었다. 박박머리의 중3 눈에는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얼굴은 그리 곱상이 어니었는데 한층 성숙한 모습의 그녀가 여간 나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아니었다.(훗날 부연이와 화곡여중 한 반이었던 초등학교 동창 금호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나를 보고 그 과외에 들어왔다 하는데 그건 맞는 말 같았다.) 어쨌거나 사흘에 한 번 꼴로 빠지던 그 자리에 나는 하루도 걸르지 않고 나가는 성실한 학생이 되었다. 그건 부연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 모르게 나누는 밀회란 얼마나 짜릿하고 감미로운가. 나는 이미 그 어린 나이에 그 향기에 빠져 하염없이 헤매이기 시작했다. 공부가 끝나면 그녀는 다음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밤 늦도록 김포가도를 걸었다. 공항동에서 발산동을 지나 화곡동을 지나 등촌동까지 두 시간여를 걸었다. 아직 어렸으므로, 처음이었으므로 말없이 걸었다. 단지 그저 걷고 또 걷는 것이 우리의 전부였다. 그런 밀회가 계속되던 어느 날, 긴 교자상 두 개를 붙여놓고 공부를 하던 과외에서 부연이가 내 곁에 앉게 되었다. 자리는 오는 순서대로 앉았기 때문에 나란히 앉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선생을 외면하고 이런저런 잡념에 매달리던 나는 슬며시 부연이의 지우개를 가져왔다. 그리고 슬며시 거기에 몇 글자를 써 넣었다. '부연이는 내 꺼' 나는 그 글씨를 쓸 때의 심정을 기억한다. 공부는 지루했고 실내는 추웠으며 그저 뭔가 유치한 장난이라도 하고 싶었다는 것을. 이런저런 낙서나 하고 싶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단지 유치한 장난이 아니었다. 지우개를 받아든 그녀가 잠시후 슬며시 상 아래로 손을 디밀어 나의 손을 꽉 움켜쥐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시간이 지나도록 그녀는 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때 부연이는 내게 가르쳐주었다. 여자는, 작지만 어떤 몸짓에 만족해 하는지. 그게 비록 한갓 장난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어떤 시선에 행복해 하는지. 대처승의 외동딸이었던 그녀와 가수가 되겠다던 나의 사랑은 고교 3년 동안 참으로 가련하고 막막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이미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병약한 나와 엄격한 종교인의 딸로서 우린 세상은 온통 닫혀 있는 벽의 한가운데라고 믿었다. 답답하고 답답하였다. 그나마 나는 대학을 가기 위해 안간힘을 쏟을 때, 부연이는 오히려 연예계 진출을 꿈꾸며 신인가수들과 몰려다녔다. 우리는 대학입시에서 모두 실패했다. 예상된 결과였다. 나는 너무 높이 지원했고 그녀는 처음부터 뜻이 없었다. 나의 처지를 잘 모르던 아버지는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게 깊은 배신감까지 느끼는 모양이었다. 견디기 어려웠다. "도망가지." "......" 아버지의 악담에 가까운 훈시가 있던 날 나는 집을 나와 부연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1978년 추운 겨울이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 간단한 짐을 챙겼고 어머니는 돈 5만원을 쥐어주었다.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 기타를 들고 나왔다는 것이다. 옷가지는 별반 챙기지를 않고 마치 야유회라도 다녀오듯 나는 기타부터 둘러메고 당당히 집을 나섰다. 서울역에서 우리는 밤기차를 탔다. "아유, 귀여워." 내가 초조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고 밴드부였던 그녀는 머리나 옷모양새가 학생이 아니었고 나는 아직 박박머리를 웃도는 동안의 학생이었다. 무조건 멀리 가자 했고 우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모두 초행이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치는 검은 산야를 바라보며 앞으로 펼쳐질 나의 인생에 마음을 졸였고 그녀는 얼굴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부산 초량역에 도착한 것은 밤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역 앞 광장에는 여자들이 득실거렸는데 호객행위를 위해 사창가에서 나온 아줌마들이었다. 나는 길을 물었다. "여기서 무조건 먼 데로 가서 여관에 들어가요" 우리의 행색을 보던 아줌마는 그렇게 일러주었다. 우리는 그녀가 가리키는 오른쪽으로 한참을 걸어 이만하면 됐겠다 싶은 거리의 여관 앞에 섰다. 여관 앞 길가엔 큰 동상이 하나 서 있었다. 훗날 부산 사는 동료 문인에게 물으니 거기쯤 그런 동상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수학여행 때 경주에서 여관에 들던 기억이 있었지만 거리엔 인적이 없고 붉은 간판이 여간 낯설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너, 미성년자지!'하며 덜컥 뒷덜미라도 움켜쥘 것만 같았다. 먼저 들어선 이는 부연이였다. 눈을 비비며 기어나온 여주인은 흔히 있는 일인지 아무런 제지없이 3층 끝방을 열어주었다. 침대와 화장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대 앞에 병풍이, 그것도 8폭 병풍이 둘러져 있었다. 그런 낯선 모습들이 더욱 가슴을 뛰게 만들었고 나는 몇 번이나 문고리를 확인하였다. 한 시간 여의 침묵이 더 흐른 뒤, 나는 병풍 곁에 누웠고 부연이는 침대로 올라갔다. 부연이는 밴드부 합숙훈련을 하느라 여행을 많이 다녔기에 이런 방이 전혀 낯설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런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가 빨은 양말 두켤레가 나란히 창가에 걸려 있었다. 내 어머니 이외의 다른 여자가 나의 양말을 빨아준다는 것이 그렇게 마음 설레는 일인지 나는 또 부연이로 하여 처음 알았다. "나가자." 그녀는 여행 온 관광객처럼 밝게 나를 이끌었고 우리는, 철없는 나는 그녀를 따라 해운대로, 태종대로, 용두산공원으로 돌아다니다가 밤이 되어 다시 여관으로 기어들었다. 그렇게 이틀을 보냈다. 이게 가출인지 여행인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사흘째 나는 2차 시험결과를 확인하러 초량우체국으로 갔다. 그땐 시외전화를 우체국에서 해야 했다. 2차마저 낙방이었다. 바닷가에 나가 오후를 보내다가 돌아오는 길에 술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역앞 홍등가에서 나는 서성거렸다. 초저녁이라 그런지 호객조차 없는 술집 골목에서 나는 아무 곳에나 불쑥 들어섰다. 현실을 현디기에는 너무 어렸고 누군가에게 기대기에는 나도 이제 어른이었다. 접대부 서넛이 밥을 비벼먹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서자 한 여자가 먹던 숟가락을 놓고 반색을 하며 나를 방으로 이끌었다. 나는 너붓한 수작을 부리며 술을 시켰다. "밥이나 다 먹고 마시지." "아니, 됐어요."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두 주전자나 말없이 비웠다. "오빠, 집 나온 지 얼마 안됐지?" 어떻게 알았을까. 나는 덜컹 마음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고생 많았겠다. 여긴 오빠처럼 감옥 갔다가 바로 오는 사람 많아. 편히 술 먹어요." 여자는 박박머리를 보고 내가 감옥에서 막 출소한 사람으로 알았던 것이다.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 침묵에 여자는 더욱 애틋하게 그리고 어느 정도 후한 대접을 해주며 술을 따랐다. 취기를 느끼자 나는 술집을 나와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는 부연이가 홀로 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나는 구명가게에 들러 당시로서는 초고급인 마주앙을 두 병 샀다. 여관방에 들어서니 부연이가 눈동자를 까맣게 굴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불합격을 알렸다. 우리는 또 말없이 침대 앞에 앉아 그야말로 '고뿌'에다 마주앙을 따라 마셨다. 평소 술이 체질에 안 맞는다던 부연이가 나를 따라서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켰다. 몇 잔을 마신 뒤 마치 숨 넘어갈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거칠게 숨까지 몰아쉬기 시작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술까지 마시는 그녀의 그런 행동에 깊은 동질감을 느꼈고 또한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순간 나는 대학입시니 가출이니 하는 생각은 다 떠나버리고 벌떡 그녀가 한 명의 성숙한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몇 년간 고작 손이나 잡고 걷고 또 걷고 하던 우리였지만 이젠 이 정도는 되겠지 하는 흑심이 들었던 것이다.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부연이는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침대 우로 기어올라갔다. 취기가 있었지만 부연이와 한 이불 속에 누우니 심장이 뜯어질 듯이 벌렁거렸다. 나를 마주한 그녀의 얼굴이 취기에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나는 술기운을 뿜어 내는 그녀의 얼굴을 만지다가 천천이 손끝을 등뒤로 돌려 그녀의 옷 속으로 집어넣었다. 남자의 피부와 달리 여자의 피부가 그리 곱다는 것을 나는 또 그녀로 하여 처음 알았다. 그러게 천천히, 그녀의 몸을 더듬는 사이 나의 손이 몸의 아래로 내려가려 하자 그녀가 나으ㅢ 손목을 덥썩 잡았다. "잘들어, 철아, 나는 꼭 너와 결혼할 거야. 그때 너에게 내몸을 선물하고 싶어." '아!' 내가 부연이의 그 한 마디를 듣고 얼마나 감격했던가. 그 한 마디에 얼마나 깊은 믿음과 행복감을 느꼈던가. 부연이는 진정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나는 서둘러 내려와 병풍 앞에 누웠다. 그리고 너무나도 배려 깊은 그녀의 고운 마음씨에 감사했다. 이후 우리는 며칠간 더 즐거운 방황을 하고 돈이 떨어지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서울로 올라왔다. 지겹게 어깨에 메고 다니던 기타는 자살바위 어디쯤에선가 앉아 둘이 이정선의 '섬소년'이란 노랠 불러본 게 다였다.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여행 잘 다녀왔냐는 식으고 형제들도 낙방은 이미 알고 있었으며 공연히 나 호로 폼 잡고 괴로워하는 형국이었다. 나는 재수를 했고 그녀는 강남의 부유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대통령이 죽고 거리엔 최루탄이 쏟아지고 우리의 만남도 시대처럼 어긋나고 있었다. 나는 더 깊이 문학에 매달리면서 더욱 어려만 갔고 그녀는 성큼 건너뛰어 여인이 되어갔다. 스스로 물러선건 나였다. 딱히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없다. 단지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믿음만이 마음 깊이 떠나지 않았다. 6,7년 뒤 먼저 전화를 걸어온 건 그녀였다. "결국 시인이 되었구나....." "그래" 이미 그녀는 '내 꺼가 아닌 남의 꺼'가 되어 있었다. '남의 꺼'가 되었다가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가을 빗소리 같았다. 우리는 종종 전화통화를 했다. 술이 취하면 나는 더 전화를 했다. "내 선물 내놔." "뭐?" "부산서 약속했잖아. 네 몸 내게 선물한다고." "하하하, 바보 그걸 그래 믿었어. 순진하긴, 그때 그냥 밀어붙였어야지. 하하하." "히히히. 그래 그때만 해도 난 그렇게 순진했는데. 시인이 되더니 이젠 세상의 온갖 못된 것만 눈에 보이는구나." 전화로, 부연이는 세상이 그렇게 만만치가 않다는 것을 다시 알려주었다. 세상사람 모두를 믿지 말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렇게도 답답해 하던 사찰을 떠나 이제 그녀는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음씨만큼이나 큰 여유를 누리면서 옛날 얘기처럼, 아주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아갈 것이다. 잘 살다가 가끔은 생각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시들어 가는 한 시인의 순진했던 한 시대를. 박철 - 1960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단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창작과비평'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김포행 막차', '밤거리의 갑과을', '새의 전부', ' 너무 멀리 걸어왔다' 등이 있고, 1997년 '현대문학'을 통해 소설가로 등단하여 단편 '어떤 귀로'등을 발표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백학기 아카시아 꽃향기에 묻어난 지상의 순수 내 그리움 속에 낮달이 떠 있다 나는 낮달이라고 내 그리움에게 전한다 낮달을 그냥 낮달이라고 그리움을 그리움이라고 부르지만 내 그리움 속에 낮달이 푸르게 떠 있다 꽃과 시 몇 편 놓인 삶을 꿈꾸었던 내 삶의 책상 위로 바람의 달력이 내 손등을 쓸어가는 동안 내 그리움 속에 낮달이 떠 있다. 시 '낮달'전문 그러니까 첫사랑이란 말만 들어도 가슴이 떨려오는 그 옛날의 추억은 살아가면서 갖고 그윽한 향기로 누구에게나 남아 있을 터. 그 비밀스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련한 향기와 함께 온몸을 휘감아오는 전율을 느끼게 될 터이다. 내게도 그런 첫사랑이 있었나. 생각컨대, 초등학교 시절 동네 주변의 옥이나, 경희등 흔한 또래의 계집아이들에게서 느꼈던 감정의 골에서부터 중학교 시절 옆동네의 가슴이 봉긋한 고등학생 누나를 사모했던 어리숙한 감정들이 교묘하게 교직된 느낌을 지울 수 없음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내 연정의 씨앗이 발아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에서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이성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 살이 붙고 뼈를 이루어 사랑이라는 거대한 강물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나 하는 생각. 그런데 첫사랑의, 그 처음의, 풋풋하고 향기로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코 끝에 다가오는, 지독히도 아련한, 그래서 때로 그 향기를 다시 되맡아보기 위해, 오랫동안 정신을 집중시키면서, 그 옛날의 시절을 되돌아볼 때, 아카시아 향기의 냄새가 어느새 전신을 휩싸 노곤노곤하게 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 안에서 나는 그절의 어린 내가 되어 한 마리의 사슴처럼 산과 계곡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 산과 계곡에는 온통 아카시아 물결로 출렁이면서 아카시아의 향기가 온 산과 계곡을 뒤덮고 있어 첫사랑을 꿈꾸는 자의 내밀한 욕망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내 첫사랑은 그렇게 아카시아 향기와 함께 남아 있는 것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동네 주변의 같은 또래 옥이나 경희 등 그 애들은 같이 뛰고 놀면서 그 애들의 모든 것을 알고 있어 첫사랑의 신비한 맛이 사라지고, 그냥 동무나 친구 같은 기억들로 남아 있으나 어느 날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치게 될 때의 감정들은 또 특별하게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애들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감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볼 수 없을 터이다. 그보다도 그 애들에 대한 순수한 감정은 이내 그 애들의 대학생이 된 오빠나 삼촌 또는 공무원인 무섭고 근엄하게 보이는 아버지들에 의해서 순수한 감정들이 이내 기화돼버릴 수밖에 없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 그 애들은 제법 여성다운 냄새를 풍기면서 모양을 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또래의 머슴애들은 코를 킁킁거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에 옥이가 있었다. 그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참으로 예쁘고 착하게 생긴 옥이는 또래의 다른 여자애들답지 않게 맑고 순수한 여자애였다. 어느 때 방학이 끝나갈 무렵 군산인가 친척집에 다녀온 그 애는 풀지 못한 방학숙제를 내 도움을 빌어 무사히 마친 일이 떠오른다. 이게 인연이 돼 다른 애들보다 비교적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됐다. 방학 동안 옥이가 없는 동네는 적이 고즈넉할 수밖에 없었다. 전주-군산간을 오가는 두 칸짜리 열차는 지금도 그 대로여서 항시 갯비리내가 났었다. 삐익거리면서 철길 위를 지나가는 그 화차에서 갯비린내가 났다고 회상하는 것은 아마도 동네 아이들과 무임승차로 이 열차를 타고 군산항 부두까지 가 건너편 장항제련소의 굴뚝을 바라본 일이 있는 데서 기인할 것이다. 썰물이 빠져나간 갯흙들위로 썪은 냄새가 진도하고 부듯가에는 각종 생선횟감들과 시끄러운 소음, 거친 사내들의 음성이 한데 어우러진 그곳은 시각적인 풍경들과 함께 갯비린내 나는 곳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어쨌든...... 지금도 생각나지만 그 애는 위로 두 살, 네 살, 여섯 살 터울의 오빠들이 줄줄이로 버티고 있어 동네에서 아무도 그 애에게 접근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그 애네 오빠들은 한결같이 험악한 인상이어서 어떻게 한 집안의 형제들이 저렇게 다를 수 있나 의아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게 중 용기 있는 또래의 머슴애는 옥이에게 도전하는 폼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그 애의 오빠들에 의해서 무참히 도 혼쭐이 나기도 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행히도 나는 방학책의 인연으로 그 애의 오빠들로부터 비교적 점잖은 대우를 받았는데, 그런 나를 향해 누구는 주먹다짐으로 중학교만 들어가면 옥이를 빼앗아 밤열차를 타야겠다든가, 마을의 뒷동산으로 끌고가 먹어버리겠다든가, 누구는 다른 동네 애들을 동원해 여럿이 함께 쓰러뜨려버리겠다든가 하는 도저히 어린애다운 생각이랄 수 없는 허황된 꿈을 꾸기조차 했다. 밤 늦은 시각 동네 애들이 함께 모여 놀던 희미한 가로등 아래 담벼락 아래서 군산에서 오는 마지막 열차의 기적소리를 들으며 이처럼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내뱉던 이이들조차 왜 그들이 그렇게 옥이에게 탐닉하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옥이는 또래의 다른 계집애들보다 예쁘고 착하고 맑고 그랬다. 아니다. 거기에다 뭐할까 수컷을 .... 아니다. 그런 상상일랑 그만두자. 옥이는 한마디로 예뻤다. 우리들이 중학교에 들어가고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면서 고등학교 입시에 매달리던 그 3년 동안 나는 옥이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등.하교시 옥이가 말쑥하게 교복을 차려 입고 집을 나와 학교를 가고 오는 모습을 간혹 스치기라도 할라치면 가슴이 어느 때는 콩 볶듯이 뛰었다는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나 또래의 다른 녀석들은 킁, 하고 콧방귀를 뀌거나 못 견디겠다는 듯 아랫도리를 잡고 뱅글뱅글 도는 시늉을 해보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 당시의 우리 또래들은 그렇게 악도들이었을까! 하긴 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시내 영화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다 기도에게 걸려 쫓겨나고 여름이면 부래옥 아리스케키통을 들고 다른 동네를 싸돌아다니면 팔다가 이웃집 어른에게 발각돼 된통 혼나기도 하는 무언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라면 참지 못하는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옥이에게는 할 수 있는 한 갖은 방법을 동원해 꼬드길 수 있는 묘안을 찾거나 담벼락에 옥이를 그려넣고 못된 짓을 일삼던 우리들은 만약 자신들의 여동생에 대해 이 따위 무례한 행동을 보였다면 멱살을 쥐고 흔드는 일면도 있었다. 내가 공부에 매달리면서 자연 동네 아이들과 멀어지게 됐는데 야간 자율학습 후 귀가길에 어떤 은밀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것은 흔한 말로 운명의 장난일까. 처음에는 내 눈을 위심했으나 이내 그 상황은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뿔싸, 희미한 가로등 아래의 담벼락에서 누군가 낯익은 여자애와 남자애가 함께 있는 모습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때 군산에서 오는 마지막 열차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지만 않았다면 내 존재는 그대로 그 현장에 있는 그들에게 발각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당혹감이란! 그 상황을 목격하고 난 뒤 한동안 나는 미열에 시달리는 증세를 보이기도 했으나 곧 잊어버리기로 했다. 옥이는 그렇게 내 관심 밖으로 멀어져갔다. 누군가는 옥이가 다른 동네 머슴애와 사귀게 돼그 애네 오빠들에게 된통 당했다거나 못내 두들겨맞았다는 소식도 그즈음 듣게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옥이는 머리를 두 갈래로 양어깨에 땋아 내린 멋진 모습의 여자애가 됐다. 말하기 부끄러우나 나는 지방의 명문고에 입학했으며 옥이는 3류 여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식으로 옥이를 만나게 되는 우연치 않은 일이 생겼다. 동네 뒷산 아카시아 향기가 향기롭던 늦은 봄 어느 날이었다. 그 무렵엔가 나는 처음으로 아카시아 향기가 이처럼 강렬한가 하고 느끼는 '봄 타는' 녀석이 되어 있었다. 첫사랑은 그렇게 오는가. 옥이는 이전보다 휠씬 성숙해져 보였다. 옥이는 희미한 가로등 아래로 나를 불러낸 뒤 손바닥만한 편지를 내보였다. 아카시아 향기가 부드럽게 녹아 있는 날이었다. 전주-군산행 열차가 이날은 소리없이 지나갔다. 나는 옥이가 내민 편지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내 생각대로 였다. 여자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향내나는 편지. 첫편지의 추억과 함께 가슴에 물결치는 첫사랑은 그렇게 시작됐을 것이다. 며칠후 옥이와 나는 시내 중앙통 제과점에서 만났다. 교복을 입은 우리들은 탁자 위에 놓인 우유와 한 접시의 빵을 놓고 조심스레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가슴이 타고 입술이 마르는지 알 수 없는 나는 우유 잔만 만지작거릴 수밖에. 제과점의 넓은 창밖으로는 슬로우비디오로 행인들이 지나가고 건너편 영화고나의 대형간판에 미모의 여배우가 웃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보아온 옥이는 그 어린 날의 옥이가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숨바꼭질하던 그 어린날의 옥이가 내 시야에 가볍게 떠올랐다. 제과점을 나와 천변을 걸어가는 나는 아카시아 향기에 취했다. 천변 건너편 산에 지천으로 널린 아카시아 나무들의 꽃향기. 그 꽃향기는 내 전신을 휘감아 아련한 첫사랑의 길로 나를 인도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해 걷다가 천변에 앉아 아카시아 꽃향기에 취하다가 그렇게 늦은 밤 귀가했다. 참으로 멀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옥이의 집 앞에서 헤어진 나는 껑충껑충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흐린 가로등 담벼락 아래서 지켜본 옥이의 방에 불이 켜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잔영으로 남았다. 타고르의 시를 읽고 릴케와 헤세의 시를 읽는 날이 바야흐로 펼쳐졌다. 교과서나 종합영어, 수학정석의 참고서를 보는 날보다 타고르와 릴케와 헤세가 나와 함께했다. 창밖으로 먼 산을 바라본다거나 도서관 옥상에서 지붕을 내다보는 일이 잦아지고,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에서 아카시아 꽃향기를 맡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는 동안 옥이와 나는 몇 번을 더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들의 첫사랑이 그렇게 쉽사리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지만 않았다. 가슴 설레는 날들이 지나가고 아카시아 꽃들이 져버릴 즈음 귀가길에 우리는 옥이의 집 앞에 버티고선 그 애 오빠를 맞닥뜨리는 숙명 앞에 놓여졌다. 그 다음 상황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고 싶다. 아카시아 꽃향기와 함께 시작된 나의 첫사랑은 아카시아 꽃향기와 함께 사라졌다. 그 뒤 옥이네가 이사를 가고 우리 집 또한 어찌어찌한 이유로 이사를 하면서 내 첫사랑은 가슴속에만 아련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크게 달라진 나와 옥이네가 살던 동네 앞을 우연한 기회에 자나다보면 그 시절의 나의 옥이와 아카시아 꽃향기가 함께 어우러져 묘한 울림을 낸다. 또 옥이네 문 앞에 버티고 섰던 그 애 오빠도 함께 떠올라 웃음도 난다. 백학기 -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였으며, 원광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81년 '현대문학'에서 추천을 받고 '한국문학'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는 조극으로 가야겠다', '나무들은 국경의 말뚝을 꿈꾼다.'가 있다. 1997년 제33회 1천만원 고료 동아일보 논픽션에 ' 내 가슴에 남아 있는 천하의 박봉우'가 당선됐다. 현재 KBS홍보실에 근무하고 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호승 나의 첫 키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 봐 해가 떠도 눈 한번 뜰 수가 없네 사랑했던 첫마음 빼앗길까 봐 해가 져도 집으로 돌아갈 수 없네 - 시 '첫마음' 전문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삼촌네 집에 가서 사촌 누나들이랑 화로에 오징어를 구워 먹었다. 나는 마침 오징어 다리 한쪽을 뜯어먹었는데 몇 번 씹다가 너무 딱딱하고 질겨서 도로 뱉어 놓았다. 그러자 뜻밖에도 셋째 누나인 재란 누나가 얼른 그것을 자기 입 속에 넣어 버렸다. "누나, 그거, 내가 먹던 거야. 질겨서 먹다가 도로 뱉어놓은 거야. 먹지마. 이빨 아파." 나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재란 누나를 쳐다보았다. 재란 누나 한쪽 눈을 찡긋하면서 얼른 입을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잘 알고 있으니까 더 이상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자기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재란 누나의 그런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멍하니 입을 다물고 내가 먹던 오징어를 질겅질겅 씹어먹고 있는 재란 누나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마치 재란 누나와 키스라도 하고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 오징어 다리는 내가 많이 씹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내 입속에 들어갔다가 나온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다시 먹기에는 내 침이 축축이 묻어 있는 더러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재란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그걸 자기 입에 넣고 맛이게 먹고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나 자신이 재란 누나의 달콤한 입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로는 상대방이 먹던 음식을 조금도 더럽다고 느끼지 않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서로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재란 누나가 먹던 그 어떤 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봐서라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혹시 재란 누나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하루종일 가슴이 저려왔다. 그러나 재란 누나의 마음을 잘 파악할 수 없었다. "호승아, 나는 원래 오징어 다리를 좋아해. 다른 사람은 몸통을 좋아하지만 난 몸통은 싫다"하는 재란 누나의 말이 나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막연하지만 그 일을 통해 내란 누나가 나를 마냥 사촌 동생으로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그 느낌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런 행동을 한 재란 누나의 마음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보낸 들뜬 마음이 거의 가라앉은 그날, 나는 유리창을 닫고 창가에 앉아 '젊은 마르크스의 시'라는 시집을 읽고 있었다. 그 시집은 막 의과대학생이 된 호용 형의 책상에 꽂혀있던 시집으로 '자본론'을 쓴 칼 마르크스가 대학시절에 그의 애인이었던 예니에게 띄웠던 사랑의 서정시들을 모은 것이었다.그 시들 중에서 나는 마침 ' 두 개의 별'이라는 제목의 시를 일고 있었다. 별이 둘 하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가까워지려다 스쳐 지나가 버립니다 언젠가는 하나가 되자고 빛의 날개를 펴지만 맺어지려고 하는 순간에 둘은 서로를 거부합니다 예니여, 그것은 우리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언제나 있습니다 가라, 세상의 것들을 꿰뚫고 나의 생각과 슬픔이여 가라, 그대 가슴속으로 그때 창밖에 연붉은 스웨터를 입은 재란 누나가 어른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시집을 덮고 제란 누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모르고 있었으나 재란 누나는 책을 읽고 있는 나를 한참동안이나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슨 책 읽노?' 창이 닫혀 있어 무슨 말인지는 잘 들이지 않았으나 재란 누나의 입모양으로 봐서 그런 말인 것 같았다. '시집 읽는다.' 나도 소리를 내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는 말을 했다. '재미있나?' '응, 재미있다.' '니가 시를 다 읽어?' '와? 내가 시 읽을면 안되나? 학교에서 내가 문예반인 줄 모르나?' '안다. 내 좀 빌려 줄래?' '그래' 우리는 마치 구화를 하듯이 그런 식의 대화를 계속했다. 그러자 재란 누나가 답답하다는 듯이 선뜻 유리창 가까이 다가왔다. 재란 누나가 서 있던 자리엔 감나무 이파리 몇 개가 땅에 얼어붙어 있었다. 재란 누나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내 책상 위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시집이고?' '마르크스.' 나는 일고 있던 시집 표지를 펴서 재란 누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재란 누나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공산주의자가 시를 다 썼나?' '그래, 다들 사랑을 노래한 시라 카더라.' 우리는 똑같은 방법으로 대화를 계속했다. 가능한 한 천천히, 입술 모양만 보아도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다가 재란 누나의 얼굴이 유리창에 너무 가까이 닿아 일그러졌다. 코와 입술이 찌그러들었다. 우스웠다. 내가 막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얼굴을 유리창에 갖다대었다. 재란 누나가 창밖에서 찌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낄낄거렸다. 그런데 그때 참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재란 누나가 갑자기 유리창에 입술을 갖다대었다. 이번에는 장난기가 있는, 일부러 흉하게 일그러뜨린 입술이 아니었다. 살짝 눈을 감고 뭔가 내 입술을 기다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순간 내 가슴속에서는 바윗돌 하나가 쿵! 하고 굴러 떨어지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런 재란 누나를 한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재란 누나의 입술 위에 내 입술을 포개었다. 재란 누나는 창밖에 있었고, 나는 창 안에 있었다. 재란 누나와 내 입술 사이에는 유리창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는 한참동안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키스를 했다. 정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키스를 하는 것 같았다. 가슴은 한없이 쿵쾅대었다. 비록 유리창을 사이에 둔 키스였지만 재란 누나의 부드러운 입술 감각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후,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후다닥 놀란 표정을 하고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서로 꼄연쩍은 듯이 웃음을 나누었다. '키스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두 사람 중 누구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재란 누나의 얼굴이 감홍시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나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여자하고 해 본 첫키스였다. 그후 나는 재란 누나와 키스할 때 창문을 열고 못한 것을 후회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의 최초의 키스가 유리창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세월이 지나서 재란 누나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김포공항에서 이별할 때 재란 누나가 내 손을 잡고 울었다. 왜 유독 나만 보고 울었는지 그때는 알 것 같았다. 나는 재란 누나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다시 첫 키스를 하고 싶다. 그러나 누나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서른의 나이에 백혈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에게 첫 키스만 남긴 채. 정호승 - 1950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경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별들은 따뜻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이 있고, 소월 시문학상과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박노해 사랑의 침묵 그대에게도 세월이 지나갔구나 꽃들은 어둠 속에 소리 없이 지고 내 사랑하는 것들은 말이 없다 내 사랑하는 여자도 말이 없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을 하다가 쓰러져 겨울 사내로 말이 없고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듯 진실로 사랑하는 가슴은 너무 많은 말과 너무 많은 사연과 너무 많은 눈물이 있어 말없이 흘러가는 것 그래도 꼭 한 마디 품고 가야 할 말이 있어 나 이렇게 새벽 강가에서 사랑의 침묵을 듣고 있을 뿐 짝사랑의 상처 벌교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나는 여학교 퀸으로 뽑히던 글 잘 쓰고 눈빛이 슬퍼 보이던 그 애를 짝사랑했는데 부끄럼을 많이 타서 편지로만 무지 몸살을 앓았는데 읍내를 꽉 잡고 누비던 어깨 큰 선배들이 그 애를 자기한테 인수인계하라고 해서 밤중에 공원으로 불려가 싸움이 붙어 엄청 깨져버려 지금도 머리에 짝사랑의 흉터가 챙피하게 남았는데 그때 선배들한테 목을 밟힌 채 내가 한 말은 그 여자애 마음을 가져와 보라고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힘으로 주고받냐고 어떻게 내 것도 아닌 사랑을 내 것인 양 인수인계하냐고 사랑의 방향은 오직 그녀 마음 안에 들어 있는 거라고......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힘으로, 돈으로 내 마음을 바꾸라고 강제할 때면 나는 문득 25년 전의 그 사랑싸움이 생각나는 것이다 아, 그때 피투성이로 밟힌 채 쳐다보던 그 밤하늘엔 어찌나 별이 맑고 곱던지 풀벌레 소리는 왜 그리 서럽게 환하던지 그래서였던가 나는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단호하게 말했었지 어떻게 사랑을 힘으로 주고받냐고 어떻게 내 것도 아닌 그녀 마음을 우리끼리 주고받냐고 어떻게 그녀 마음을 함부로 빼앗느냐고 그래, 지금도 난 그래, 어떻게 양심을 강제로 바꾸려하냐고 어떻게 민심을 힘으로 판단하냐고 어떻게 미래를 돈으로 가지려하냐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 것들을 어떻게 힘으로 빼앗아가겠다는 것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사랑의 상처를 다시 내 온몸으로 수놓을지라도 나로서는 정말 그 이상하고 이상한 생각에 굽힐 수 없는 것이다. 가을에 떠나다 이 가을에 나는 쓰러져 우네 다시 겨울은 오는데 저 겨울산을 무엇으로 혼자 넘나 너와 함께해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젖은 눈으로 지켜봐 주던 너도 이제 없는데 침묵의 불덩어리 품고 언 살 터진 겨울 사내로 무엇으로 혼자 넘나 저 겨울산 박노해 - 1957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박기평, 세례명은 가스발이다.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섬유.금속 노동자로 일했으며, 버스회사에 취업하여 운수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당하고 1985년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서 활동했다.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시집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과 산문집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있다. 1991년 구속되어 국가보안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중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재판을 하다 보면 참 많은 사람을 만난다. …… 이러한 만남 가운데 오래전에 법정에서 증인으로 만났던 한 여성을 잊을 수가 없다. 단 한 번 만났지만 그녀가 보여 준 기품과 용기는 감동적이었다. 마음이 혼란스럽거나 우울해질 때면 그녀를 생각하며 다시 힘을 얻곤 한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사건에 관해 증언하려고 법정에 출석했다. 남편이 그녀 몰래 여섯 살, 네 살 된 두 딸에게 독극물이 든 우유를 먹여 절명하게 했던 것이다. 남편 자신도 남은 우유를 마셨으나 목숨을 건졌고 살인죄로 재판을 받았다. …… 그녀에게도 딸들은 삶의 전부였다. 하지만 그 사이 남편은 여러 번 실망스러운 일들을 저질러 그녀를 힘들게 했고, 애정도 이미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일기장에는 두 딸의 출생 때부터 죽기 전날까지 같이 지낸 일상과 딸들이 세상을 돕는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길 기도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세 모녀가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깔깔대며 뒹구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그녀는 힘든 생활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 …… 그러나 남편은 시간이 갈수록 세상을 살아갈 자신감을 잃고 두려움에 빠져 딸들과 동반 자살을 결심했다. 딸들이 자기처럼 비참한 삶을 살 바에야 차라리 일찍 세상을 떠나보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피고인 신문이 끝난 후, 재판부 직권으로 그녀를 증인으로 채택했다. 형량을 정하기 위해서였다. 법정에 나온 그녀는 예상보다 몸이 훨씬 더 불편해 똑바로 걷지도 못했다. 심장병과 척수염, 류머티즘으로 날마다 여러 종류의 약을 먹고 있어서 몸을 움직이기가 힘들다고 했다. 증언대에서 그녀는 딸들을 살릴 수 있다면 자기 목숨이라도 바치겠다고 흐느꼈다. 그러나 곧 눈물을 거두고 차분한 태도로 남편에 관하여 증언했다. 처음에는 분노로 남편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남편과 살 수도 없고 애정도 전혀 없지만, 재판부에 편지를 낸 이유는 남편이 '정당한' 판결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남편이 아이들을 미워해서 죽인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세상에서 받을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죽게 한 것이며, 잘못은 남편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약한 남편에게 가벼운 형을 주어 한 번이라도 사람답게 살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증언을 끝맺었다. …… 지독한 가난 속에서 중병을 앓으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아이들을 밝게 키워 온 그녀 내면의 힘. 이것이 삶에 대한 진정한 용기 아닐까? 인간의 가치는 결코 외적인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녀야말로 작고 약한 외모 안에 진정으로 위대한 힘을 가진 놀라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나에게 온몸으로 깨우쳐 준 스승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그녀처럼 '훌륭한'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감히 고백한다. -윤재윤 판사의 《우는 사람과 함께 울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