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못에 고기숲(주지육림) 사나운 임금(폭군)의 대명사로 ‘걸주’라는 말이 있다. 중국에서 가장 오랜 왕조라고 하는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왕’과, 다음의 은나라 마지막 왕 ‘주왕’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둘이 다 음탕하고 난잡하며 사납고 모진 짓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를 망쳤다고 한다. 중국 한나라 사마천이 ‘황제’로부터 ‘무제’까지 역대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로 적어 전한 초에 펴낸 역사책 <사기>의 ‘하 본기’에는 걸왕에 관해서 적은 내용이 매우 간단하지만, ‘은 본기’에는 주왕의 모짊새가 상당히 자세하게 적혀 있다. “술을 가지고 못을 이루고, 고기를 가지고 숲을 이루고, 남녀를 벌거벗겨 숨바꼭질을 시키고, 온 밤을 마셔 새웠다. 백성들이 원망하여 등을 돌리는 자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주왕은 도리어 형벌을 무겁게 하여 달군 쇠로 살을 지지는 법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호탕한 놀이를 즐기는 짓을 ‘술못에 고기숲’(주지육림)이라고 하게 되었다. 위 <사기>의 글 끝에 있는 “형벌을 무겁게 함”은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것을 나타내며, “달군 쇠로 살을 지지는 법”이라 함은 구리기둥에 기름을 바르고 숯불로 뜨겁게 한 뒤 미끌미끌 미끄러지는 그 뜨거운 기둥 위를 죄인에게 걸어가게 하여 보기에 민망할 만큼 괴롭히고 태워 죽이는 형벌이라고 한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저버리기(자포자기)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의리를 잊거나 어기면 그걸 ‘저버린다’고 한다. 그 ‘저버린다’의 ‘저’는 무슨 뜻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저’에 ‘자기’라는 뜻을 매기면 ‘저’를 ‘버린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저버리는 짓’은 ‘저버리기’다. 이 ‘저버리기’에 알맞은 한자말이 있을 법하다. ‘자포자기’는 어떨까. ‘이루’는 중국 황제 때의 전설적 사람인데, 볼심(시력)이 뛰어나 백 걸음이나 떨어진 곳에서도 털끝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맹자>의 그 ‘이루편’에 있는 말씀. “‘자포’하는 자는 더불어 말할 이가 없다. ‘자기’하는 자는 더불어 일할 이가 없다. 예의를 헐뜯음을 ‘자포’라고 한다. 내 몸이 의리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가 없음을 ‘자기’라고 한다.” 입을 열기만 하면 예의를 업신여기는 것을 ‘자포’라 하고, 자기의 몸이 의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것을 ‘자기’라고 한다. 의리는 사람의 바른 길이다. 바른 길을 버리고 다니지 않는 것은 참으로 가엾은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일반적으로 약간의 뜻맛이 달라져 실망, 실의 따위로 ‘자포자기’함은 자기 자신을 버리고 천하게 여기는 것을 일컫게 되었다. 어쨌거나 ‘저버리기’와 ‘자포자기’의 궁합은 흥미롭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쉰걸음 백걸음(오십보백보) ‘비슷비슷’이라는 뜻으로 ‘쉰걸음 백걸음’(오십보백보)이라는 말이 있는데, <맹자> ‘양혜왕’ 편에 있다. 맹자가 전국시대 양나라 혜왕의 고문을 맡고 있을 때, 어느날 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나는 이웃 나라보다 정치를 잘하는 줄로 아오. 이웃이 흉작일 때에는 그 백성이 우리나라로 와야 할 텐데 그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구려. 어째서일까요?” 맹자가 대답했다. “임금님은 싸움을 좋아하시니까 싸움에 빗대어 보십시다. 적과 우군이 맞닥뜨려서 맞붙싸움(백병전)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겁쟁이바람’을 일으켰더니 도망치는 자가 생겼습니다. 어떤 자는 백 걸음을 도망가다가 머무르고, 어떤 자는 쉰 걸음을 도망가다가 머물렀습니다. 쉰 걸음 도망간 자가 백 걸음 도망간 자더러 겁쟁이라고 비웃었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임금이 말했다. “그건 안 되오. 백 걸음 도망가지 않았다고 해도 도망간 것은 다를 바 없으니 말이오.” “그것을 아시었으면 임금님도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혜왕이 정치를 잘하려고 해도 백성을 위해서 덕으로써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이웃 나라와 ‘쉰걸음 백걸음’(오십보백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비슷비슷하다는 것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거꿀비늘(역린)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한비가 지은 <한비자>의 ‘세난편’은 임금을 타이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적은 것이다. 임금이 명예를 부러워하는 때에 이익을 가지고 타이르면 나쁜 놈이라고 멀리해 버린다. 거꾸로 이익을 탐내고 있는데 명예로 타이르면 실용성이 없다고 받아들이지 않는다. 겉으로는 명예를 좋아하는 척하고 있을 때 명예로 타이르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쓰지 않고, 이익으로 타이르면 속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겉으로는 나쁜 놈이라고 멀리해 버린다. 그러므로 임금을 타이를 때에는 그의 기분을 잘 살펴서 요령 좋게 끌어들이도록 해야 하며 조금치도 화를 내게 하는 것 같은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끌어대기(비유)다. ‘용’이란 놈은 잘 다루면 좋아하여 말을 잘 들어서 올라탈 수도 있지마는, 어쩌다가 목 밑에 있는 지름 한 자 정도의 ‘거꿀비늘’(역린: 거꾸로 박혀 있는 비늘)을 건드리거나 하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여 버린다. 임금에게도 거꿀비늘이 있다. 타이르는 사람이 임금의 거꿀비늘을 건드리지 않게 할 수 있으면 ‘될성부름’(가망성)이 있다고 봐도 된다. 이 대목에서 임금의 노여움에 걸리는 일을 “거꿀비늘을 거스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보통 같아서는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아 그냥 넘어가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시원하시겠습니다” 하고 알랑방귀를 뀌는 것도 한 처세술일런가.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달아래 얼음치(월하빙인) 중매쟁이를 ‘달아래 얼음치’(월하빙인)라고 하는데, 본디는 ‘달아래 영감’과 ‘얼음아래 영감’을 합친 말이다. ‘달아래 영감’은 <속유괴록>의 ‘정혼점’에 있다. 당나라 위고라는 사람이 여행길에 혼담이 왔다. “내일 새벽에 절문 앞으로 와 보라.” 가 본즉, 달 아래 한 노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저승사자였다. “나의 혼담은 되겠습니까?” “아니, 그대 아내는 세 살. 열일곱이 되면 그대와 결혼한다. 보여주지.” 장바닥에 이르러, 초라한 노인에게 안긴 어린 계집애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이 그대 아내다.” 위고는 하인에게 그 계집애를 죽이라고 했다. 하인이 돌아와서 보고했다. “가슴을 노렸는데 빗나가 미간을 찔렀습니다.” 그로부터 14년 뒤, 위고는 상주 지방 장관의 딸과 결혼했다. 아내는 미간에 꽃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아내가 말했다. “저는 장관의 딸이 아니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세 살 때 난봉꾼(무뢰한)의 습격을 받아 미간을 찔려 그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한편, ‘얼음아래 영감’은 <진서>의 ‘예술전’에 있다. 영고책이라는 사람이 얼음 위에서 얼음 아래 사람과 이야기한 꿈을 꾸었다. 점쟁이에게 물었더니, “얼음 위는 양, 얼음 아래는 음, 그 양과 음이 이야기했으니 중매하겠다”고 했다. 영고책은 얼마 뒤 친구 아들 중매 부탁을 받았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고기잡이 차지(어부지리) 서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끌어대기(비유)로 ‘조개·도요 싸움’(방휼지쟁)이라는 것이 있다. 두 것이 싸워서 딴것이 재미를 차지해 버린다는 말이다. 전한의 <전국책>에 연나라를 치려는 조나라 혜문왕을 소대라는 사람이 만나러 갔던 이야기가 있다. “여기 오는 길에 역수를 건너는데 뻘조개가 입을 벌리고 비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도요새가 와서 그 살을 먹으려고 부리를 처박으므로 뻘조개가 아가리를 닫아, 그 부리를 꽉 물었습니다. 도요새가 ‘오늘도 비가 안 오고 내일도 비가 안 오면 죽은 뻘조개가 되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뻘조개도 질세라 ‘오늘도 못 나오고 내일도 못 나오면 죽은 도요새가 되어 버린다’고 맞받아쳤습니다. 둘이 다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때 고기잡이가 와서 두 것을 다 붙잡아 버렸습니다. 이제 조나라가 연나라를 치려고 합니다. 그럼으로 해서 두 나라가 맞붙어 싸우다가 백성이 결딴나면 진나라가 고기잡이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혜문왕은 연나라를 치지 않았다. “개가 토끼를 잡으려고 산을 다섯 번 오르고, 토끼가 산을 세 번 돌다가 둘 다 죽어 버리자 농부 차지가 되었다”는 ‘개·토끼 싸움’(견토지쟁)과 비슷하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마음에서 마음으로(이심전심) ‘이심전심’은 본디 불교의 선가(참선하는 중들의 사회)에서 말하는 것이다. 송나라 중 도언이 쓴 <전등록>에 “부처가 법(물질과 정신의 온갖 것)을 가섭에게 주었다. 진리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옮는다”고 되어 있다. 깨달음이나 도의 오묘한 이치는 말로써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언젠가 석가모니가 영산회(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제자들과 주로 법화경을 설하던 모임)에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설법하고 나서, 연꽃을 비틀어 보였다. 아무도 그 뜻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섭 존자만이 혼자 빵끗 웃음으로써 알았다는 뜻을 비쳤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가섭에게 불교의 진리를 전수했다는 옛이야기가 <오등회원>이라는 책에 올라 있다. ‘염화시중’이라고도 하는 이 ‘꽃 비틀이 웃음’(염화미소)이 결국 스승에게서 제자에게 진리를 전하는 ‘마음에서 마음으로’(이심전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것이 말로써가 아니라 서로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옮는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해서, 뒷날 그런 깊은 뜻을 말로 안 해도 마음과 마음으로 알게 된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상식백과>) 우리 속담에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르다”는 것이 있다. 같은 말이라도 말하기 따라서는 달라진다는 것이니 새겨둘 만한 것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