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三暮四(조삼모사) 朝(아침 조) 三(석 삼) 暮(저물 모) 四(넉 사) 열자(列子)의 황제(黃帝)편과 장자(莊子)의 제물론(齊物論)에는 원숭이를 기르던 한 사나이의 이야기를 기록한 대목이 있다. 송(宋)나라에 저공(狙公)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원숭이를 너무 사랑하여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큰 무리를 이루게 되었다. 그는 원숭이들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고 원숭이들도 저공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원숭이를 사육하다 보니 먹이 대는 일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그는 원숭이의 먹이를 제한하고자 하였으나 많은 원숭이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서 먼저 그들을 속여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에게 주는 도토리를 아침엔 세 개, 저녁엔 네 개 준다면(若與 朝三而暮四) 족하겠느냐?" 원숭이들이 모두 화를 내자, 저공은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를 준다면 족하겠느냐?"라고 했다. 이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였다. 朝三暮四 란 본시 눈 앞의 차이만을 알뿐 그 결과가 같음을 모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나,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이고 농락하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 《出典》'列子' 黃帝篇 / '莊子' 齊物篇 宋有狙公者 愛狙養之成群 能解狙之意 狙亦得心之心 損其家口 充狙之欲 俄而?焉 將限其食 恐重狙之不訓於己也 先?之曰 與若?朝三而暮四 足乎 衆狙皆起而怒 俄而曰 與若? 朝四而 暮三 足乎 衆狙皆伏而喜. 【준 말】조삼(朝三) 【동의어】조사모삼(朝四暮三)
季札掛劍(계찰괘검) 季(끝 계) 札(패 찰) 掛(걸 괘) 劍(칼 검) 사기(史記)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오(吳)나라 왕 수몽(壽夢)의 아들인 계찰(季札)의 일화가 실려 있다. 계찰은 처음 사신으로 떠났을 때 오나라의 북쪽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서(徐)나라의 군주를 알현하게 되었다. 서나라의 군주는 계찰의 보검(寶劍)이 마음에 들었으나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계찰은 속으로 그의 뜻을 알아차렸지만, 사신의 자격으로 중원(中原)의 각 나라를 돌아다녀야 하였기 때문에 검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돌아 오는 길에 서나라에 도착해보니 서나라의 군주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이에 계찰은 자신의 보검을 풀어 무덤가의 나무에 걸어놓고 떠났다. 수행원이 그 이유를 묻자 계찰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처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이 칼을 그에게 주려고 결심하였는데, 그가 죽었다고 해서 어찌 나의 뜻을 바꿀 수 있겠는가?" 훗날 계찰은 자신에게 맡겨진 왕위(王位)마저 사양한다. 季札掛劍(季札이 검을 걸어놓다) 이란 신의(信義)를 중히 여김 을 비유한 말이다. 대권(大權)주자 가운데에 계찰 같은 이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좋으련만. …………………………………………………………………………………………………………………………………
似而非(사이비) 似(같을 사) 而(말 이을 이) 非(아닐 비) 맹자(孟子) 진심장하(盡心章下)편에는 스승 맹자(孟子)와 제자인 만장(萬章)의 문답이 기록되어 있다. 만장이 온 고을이 다 그를 향원(鄕原)이라고 한다면 어디를 가나 향원일 터인데 공자께서 덕(德)을 해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라고 물었다. 이에 맹자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겉으로는 비슷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미워한다(惡似而非者). 강아지풀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망령됨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말 많은 것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믿음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보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 색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향원(세속에 따라 야합라는 위선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라고 하셨다 . 似而非란 사시이비(似是而非)에서 나온 말이며, 겉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似而非는 큰 해악(害惡)이다. 하지만 似而非를 가려내지 못하는 것은 더 큰 해악이다. ………………………………………………………………………………………………………………………………… [원말] 사이비자(似而非者). [출전]《孟子》〈盡心篇〉,《論語》〈陽貨篇〉 ① 겉은 제법 비슷하나 속은 전혀 다름. ② 진짜같이 보이나 실은 가짜임. 전국 시대, 아성(亞聖)으로 불리던 맹자에게 어느 날 만장(萬章)이라는 제자가 물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다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 훌륭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어찌하여 그들을 가리켜 ‘향원[鄕原:지방의 토호(土豪)]은 덕(德)을 해치는 도둑’이라고 말씀하셨을까요?” 맹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들을 비난하려 해도 들어서 비난할 것 없고, 공격하려 해도 공격할 구실이 없으나 세속에 아첨하고 더러운 세상에 합류한다. 또 집에 있으면 충심(忠心)과 신의가 있는 척하고, 나아가 행하면 청렴결백한 척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스스로도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들과는 더불어 요순(堯舜)의 도(道)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공자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느니라. ‘사이비한 것[似而非者]을 미워한다…‥말 잘하는 것을 미워하는 것은 정의를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고, 정(鄭)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아악(雅樂)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덕을 혼란시킬까 두려워서이다…‥’”
蒲柳之姿(포류지자) 蒲(부들 포) 柳(버들 류) 之(-의 지) 姿(맵시 자) 세설신어(世說新語) 언어(言語)편에는 진(晉)나라 간문제(簡問帝)였던 사마욱(司馬昱)과 유명한 화가인 고개지의 부친이자 후에 상서좌승(尙書左丞)의 관직을 지내게 될 고열(顧悅) 사이의 대화가 실려 있다. 고열은 간문제와 같은 30대의 나이였지만 머리가 먼저 희어졌다. 간문제가 이를 의아하게 여겨 경은 어찌하여 나보다 먼저 머리가 희어졌는가? 라고 물었다. 고열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임금님은 송백(松柏)과 같아서 설상(雪霜)을 겪으면서도 더욱 무성해지지만, 저는 물버들과 같아 가을이 되면 곧 잎이 지게 되는 것입니다(蒲柳之姿, 望秋而落). 고열은 사람됨이 성실하고 신의가 있었으며, 지나치게 공무에만 몰두하여 침식(寢食)을 소흘히 하였던 까닭에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蒲柳 란 물가에서 자라는 버들을 가리키며 수양(水楊), 포양(蒲楊) 이라고도 한다. 蒲柳之姿는 蒲柳之質(포류지질)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蒲柳의 잎이 일찍 떨어지듯 일찍 노쇠(老衰)하는 체질 또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사람 등을 비유한 말이다. 빈둥거리며 살찌는 사람보다는 아직은 열심히 일하는 고열같은 이들이 많아 정말 다행스럽다. …………………………………………………………………………………………………………………………………
匹夫之勇(필부지용) : 匹(필 필) 夫(지아비 부) 之(-의 지) 勇(날쌜 용) 맹자(孟子) 양혜왕하(梁惠王下)편에는 춘추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맹자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꿈꾸는 선왕은 왕도정치를 설명하는 맹자에게 이웃 나라들과 사귀는 방법이 있겠는가를 물었다. 맹자는 인(仁)과 지(智)에 의한 교류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선왕은 맹자의 말에 만족하지 못하고 나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는데 그것은 내가 용기를 좋아 한다는 것이요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맹자는 선왕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왕께서는 작은 용기를 갖지 마십시오. 칼자루을 어루만지며 노려보면서 네가 감히 나를 당해내겠느냐? 라고 하신다면, 이는 필부의 용기입니다(此匹夫之勇). 그것은 겨우 한 사람만을 대적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제발 큰 용기를 가지십시오. 匹夫之勇 이란 사려분별 없이 혈기만 믿고 날뛰는 소인들의 경솔한 용기를 말한다. 얼마전 고층빌딩에서 돈을 뿌렸던 한 노동자의 행동을 두고 匹夫之勇 이니 호연지기(浩然之氣) 이니 하는 말들이 많다. 하지만 匹夫之勇 으로 즉각 반응을 보여야 할 정치인들은 지금껏 침묵하고 있다. ………………………………………………………………………………………………………………………………… 필부지용(匹夫之勇) / 소인의 깊은 생각 없이 혈기만 믿고 냅다치는 용기. 《出典》'孟子' 梁惠王下 齊나라 宣王이 물어 보았다.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방법이 있습니까?" 孟子가 대답했다. "있습니다. 오직 仁者라야 능히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殷 나라 湯王이 갈(葛)나라를 섬기고, 周文王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다. 그리고 오직 지혜있는 왕이라야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越王 구천(勾踐)이 吳나라를 섬겼습니다. 큰 나라로써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즐기는 것이요, 작은 나라로써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것이니, 하늘의 道를 즐기는 사람은 천하를 편안케 하고, 하늘의 道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기 나라를 편안케 합니다.《詩經》 에도 이르기를 '하늘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길이 나라를 편안케 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크기도 하여라, 선생의 말씀이여! 그런데 과인에게는 한 가지 병이 있으니, 과인은 용기를 좋아합니다." "왕께서는 제발 작은 용기를 좋아하시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칼자루를 어루만지고 노려보면서, '제가 어찌 감히 나를 당해낼 것이냐?'하신다면, 이는 필부(匹夫)의 용기입니다. 이는 곧 한 사람을 대적함이니, 왕께서는 제발 용기를 크게 부리소서." 齊宣王 問曰 交隣國有道乎 孟子對曰 有 惟仁者 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 文王事昆夷 惟智 者 爲能以小事大 故 勾踐事吳 以大事小者 樂天者也 以小事大者 畏天者也 樂天者保天下 畏 天者保其國 詩云 畏天之威 干時保之 王曰 大哉言矣 寡人有疾 寡人好勇 對曰 王請無好小勇 夫撫劒疾視曰 彼惡敢當我哉 此匹夫之勇 敵一人者也 王請大之.
亡國之音(망국지음) 亡(망할 망) 國(나라 국) 之(갈 지) 音(소리 음) 한비자(韓非子) 십과편(十過篇)에는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는 도중에 들었다는 멋있는 음악에 관한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의 평공(平公)에게 산동의 복수( 水)라는 곳에서 들었던 음악을 자랑하였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그는 이 음악을 듣고 깜짝 놀라 이건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입니다(亡國之音). 라고 말하며 연주를 중지시켰다. 사광은 그 음악의 내력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이것은 주나라의 악사인 연(延)이 주왕(紂王)을 위해 만든 음탕한 음악입니다. 무왕(武王)이 주나라를 정벌하자 연(延)은 복수까지 도망와서는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음악은 복수 강변에서만 들을 수 있으며, 최초로 듣는 자는 반드시 나라를 빼앗긴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亡國之音은 亡國之聲(망국지성) 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음란하고 사치스러워 나라를 망칠 음악을 말한다. 최근 일부 유행가의 가사에도 음란한 표현이나 욕설 등이 등장하고 있다고 한다. 주왕의 음악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음악이라면 곧 亡國之音이 아닐까. ………………………………………………………………………………………………………………………………… [동의어] 망국지성(亡國之聲). [유사어] 정위지음(鄭衛之音). [출전]《韓非子》〈十過篇〉.《禮記》〈樂記〉 나라를 망치는 음악이란 뜻. 곧 ① 음란하고 사치한 음악. ②망한 나라의 음악. ③ 애조(哀調)를 띤 음악. ① 춘추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위(衛)나라 영공(靈公)이 진(晉)나라로 가던 도중 복수[濮水:산동성(山東省) 내] 강변에 이르자 이제까지 들어본 적이 없는 멋진 음악 소리가 들려 왔다. 영공은 자기도 모르게 멈춰 서서 잠시 넋을 잃고 듣다가 수행중인 사연(師涓)이란 악사(樂師)에게 그 음악을 잘 기억해두라고 했다. 이윽고 진나라에 도착한 영공은 진나라 평공(平公) 앞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들으며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들은 새로운 음악’이라고 자랑했다. 당시 진나라에는 사광(師曠)이라는 유명한 악사가 있었는데 그가 음악을 연주하면 학이 춤을 추고 흰 구름이 몰려든다는 명인이었다. 위나라 영공이 새로운 음악을 들려준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입궐한 사광은 그 음악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황급히 사연의 손을 잡고 연주를 중지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새로운 음악이 아니라 ‘망국의 음악[亡國之音]’이오.” 이 말에 깜짝 놀란 영공과 평공에게 사광은 그 내력을 말해 주었다. “그 옛날 은(殷)나라 주왕(紂王)에게는 사연(師延)이란 악사가 있었사옵니다. 당기 폭군 주왕은 사연이 만든 신성백리(新聲百里)라는 음미(淫蘼:음란하고 사치함)한 음악에 도취하여 주지육림(酒池肉林)속에서 음일(淫佚)에 빠졌다가 결국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주벌(誅伐)당하고 말았나이다. 그러자 사연은 악기를 안고 복수에 토신 자살했는데, 그 후 복수에서는 누구나 이 음악을 들을 수 있사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망국의 음악’이라고 무서워하며 그곳을 지날 땐 귀를 막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사옵니다.” ②《예기(禮記)》〈악기(樂記)〉에도 이런 기록이 있다. “복수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는 ‘망국지음’이다.”
越俎代庖(월조대포) 越(넘을 월) 俎(도마 조) 代(대신할 대) 庖(부엌 포)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편에는 요(堯)임금과 기산에 숨어 살았다는 은자(隱者) 허유(許由)가 나눈 대화가 실려 있다. 요임금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이야기 하며 허유에게 천하를 맡아줄 것을 권유한다. "일월(日月)이 밝은데 횃불을 계속 태우면, 그 빛이 헛되지 않겠습니까? 때 맞추어 비가 내리는데 여전히 물을 대고 있으니 그 물은 소용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부족하오니, 부디 천하를 맡아 주십시오." 이러한 요임금의 권유에 허유는 뱁새와 두더지를 비유로 들며 다음과 같이 거절의 뜻를 표한다. "그대는 돌아 가시오. 내게 천하란 아무 소용없소. 요리사가 음식을 잘못 만든다고 할지라도 시동이나 신주가 술단지와 고기그릇을 들고 그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오( 人雖不治 , 尸祝不越樽俎而代之矣). 越俎代庖 란 자신의 직분을 넘어 타인의 일을 대신하는 것 을 말한다. 越俎之嫌(월조지혐) 이라는 말로도 쓰이는데, 이는 자신의 직분을 넘어 남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꺼리다 라는 뜻이다. 일 처리가 썩 훌륭하지 않더라도,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갖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
食言(식언) 食(먹을 식) 言(말씀 언) 서경(書經) 탕서(湯誓)에는 하(夏)나라의 폭군 걸왕(桀王)을 정벌하려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맹서가 기록되어 있다. 탕왕은 박 땅에서 출전에 앞 둔 전군(全軍)에 다음과 같이 훈시한다. 나는 감히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오. 하나라의 임금이 죄가 많아 하늘이 명하시니 그를 치려는 것이오. 나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니 감히 바로잡지 않을 수 없소. 하나라 임금은 백성들의 힘을 빠지게 하고, 하나라 고을을 해치게만 하였소. 탕왕은 하나라 걸왕의 죄상을 설명하며, 계속하여 정벌의 불가피함을 외친다. 바라건대 나를 도와 하늘의 법이 이루어지도록 하시오. 나는 여러분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니, 여러분들은 믿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爾無不信). 나는 약속을 지킬 것이오(朕不食言). 그리고 그는 자신의 처자식의 목숨을 담보로 제시한다. 食言 이란 밥이 뱃속에서 소화되어 버리듯 약속을 슬그머니 넘겨 버리는 것 이니, 이는 곧 약속을 지키지 않거나 거짓을 말함 을 뜻한다. 떡값 받아 떡을 사 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선거 때 내뱉었던 공약의 말(言)까지도 깡그리 먹어치우는 이들은 탕왕에게서 신의(信義)를 배워야 한다. …………………………………………………………………………………………………………………………………
鷄口牛後(계구우후) 鷄(닭 계) 口(입 구) 牛(소 우) 後(뒤 후)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列傳)에는 전국(戰國)시대의 모사(謀士) 소진의 일화가 실려 있다. 소진은 합종책(合從策)으로 입신(立身)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진(秦)나라 혜왕, 조(趙)나라의 재상인 봉양군 등을 만나 보았으나 환영 받지 못하였다. 그는 다시 연(燕)나라로 가서 문후(文侯)를 만나, 연나라가 조(趙)나라와 맹약을 맺어 진나라에 대항해야한다는 합종의 계획을 말하였다. 문후의 후한 사례에 고무된 소진은 얼마 후 한(韓)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그는 한나라의 선혜왕(宣惠王)을 만나 진나라를 섬기지 말 것을 권고하며 다음과 같이 유세하였다. "이번 기회에 남북으로 연합하는 합종책으로써 진나라의 동진(東進)을 막아보십시오. 옛말에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말라(寧爲鷄口無爲牛後). 고 하였습니다." 마침내 선혜왕은 소진의 권유를 받아 들였다. 나머지 다섯 나라들도 그에게 설복되었으며, 결국 소진은 6국의 재상을 겸임하게 되었다. 鷄口牛後란 큰 집단의 말단보다는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낫다 는 것을 뜻한다. 이제 대선(大選)이 가까워지면서 鷄口 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맛으로 치자면 꼬리곰탕이 훨씬 나은 것을...... ………………………………………………………………………………………………………………………………… [원말] 영위계구 물위우후(寧爲雞口勿爲牛後). [출전]《史記》〈蘇秦列傳〉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 쇠꼬리는 되지 말라는 뜻. 곧 큰 집단의 말석보다는 작은 집단의 우두머리가 낫다는 말. 전국시대 중엽, 동주(東周)의 도읍 낙양(洛陽)에 소진(蘇秦: ?~B.C.317)이란 종횡가(縱橫家:모사)가 있었다. 그는 합종책(合縱策)으로 입신할 뜻을 품고, 당시 최강국인 진(秦)나라의 동진(東進) 정책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고 있는 한(韓)‧위(魏)‧조(趙)‧연(燕)‧제(齊)‧초(楚)의 6국을 순방하던 중 한나라 선혜왕(宣惠王)을 알현하고 이렇게 말했다. “전하, 한나라는 지세가 견고한데다 군사도 강병으로 알려져 있사옵니다. 그런데도 싸우지 아니하고 진나라를 섬긴다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옵니다. 게다가 진나라는 한 치의 땅도 남겨 놓지 않고 계속 국토의 할양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하오니 전하, 차제에 6국이 남북, 즉 세로[縱]로 손을 잡는 합종책으로 진나라의 동진책을 막고 국토를 보존하시오소서. ‘차라리 닭의 부리가 될지언정[寧爲鷄口]쇠꼬리는 되지 말라[勿爲牛後]’는 옛말도 있지 않사옵니까.” 선혜왕은 소진의 합종설에 전적으로 찬동했다. 이런 식으로 6국의 군왕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소진은 마침내 여섯 나라의 재상을 겸임하는 대정치가가 되었다. [주] 종횡가 :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제국(諸國)의 군주(君主)들을 찾아다니며 독자적인 정책을 유세(遊說)하여 그들 여러 나라를 종(縱)‧횡(橫)으로 묶어서 경륜(經綸)하려던 외교가(外交家)‧책사(策士)‧모사(謀士)의 총칭. 합종책을 설(說)한 소진과, 소진이 피살된(B.C.317) 후 합종책을 깨기 위한 연횡책(蓮衡策)을 펴 성공한 장의(張儀)가 그 대표로 꼽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