刻舟求劍(각주구검) 刻(새길 각) 舟(배 주) 求(구할 구) 劍(칼 검) 여씨춘추(呂氏春秋) 찰금편(察今篇)에는 융통성 없는 한 사나이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의 한 사나이가 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너 가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의 칼을 그만 강물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는 황급히 다른 칼을 꺼내어 그 배의 옆부분에 칼 빠뜨린 곳이라는 자국을 새기면서(遽刻其舟) 여기는 내 칼이 빠진 곳 이라고 말했다. 배가 목적지에 이르자, 그는 자신이 새겨 놓았던 곳을 따라 물 속으로 뛰어들어 그 칼을 찾으려 했다(求劍). 그러나 자신이 탔던 배는 칼을 빠뜨린 곳을 지나 계속 이동하여 왔으므로, 그가 칼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刻舟求劍 이란 뱃전에 새겨놓은 표시만을 믿고 물에 빠뜨린 칼을 찾으려함 을 뜻한다. 이는 곧 시세(時勢)나 세상 형편에 어둡거나 고지식함 을 비유한 말이다. 법 조항이나 문구(文句)에 얽매어 현실을 고려하지 못한 경우에도 刻舟求劍 이라는 말은 들어 맞는다. 이렇듯 현실 감각이나 융통성이 전혀 없는 사람, 반대로 시류(時流)에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약삭 빠르게 앞서 가는 사람은 대사(大事)를 도모하지 말아야 한다. ………………………………………………………………………………………………………………………………… 시세의 변천도 모르고 낡은 생각만 고집하며 이를 고치지 않는 어리석고 미련함을 비유하는 말. 《出典》'呂氏春秋' 戰國時代, 楚나라의 한 젊은이가 揚子江을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배가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때 그만 실수하여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뿔사! 이를 어쩐다." 젊은이는 허둥지둥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고 칼을 떨어뜨린 그 뱃전에다 표시를 하였다. 이윽고 배가 건너편 나루터에 닿자 그는 곧 옷을 벗어 던지고 표시를 한 그 뱃전 밑의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 밑에 있을 리가 없었다. 楚人 有涉江者 其劍 自舟中 墜於水 遽刻其舟 曰『是 吾劍之所從墜』舟止 從其所刻者 入水求之 舟己行矣 而劍不行 求劍若此 不亦惑乎. 以古法 爲其國 與此同 時己徙矣 以法不徙 以此爲治 豈不難哉. [유사어]수주대토(守株待兎)
지금 평양에선... - 塗炭之苦(도탄지고) 塗(진흙 도) 炭(숯 탄) 之(갈 지) 苦(괴로울 고) 서경(書經) 중훼지고(中虺之誥)에는 은(殷)나라 탕왕(湯王)의 어진 신하였던 중훼가 탕왕에게 고하는 글이 실려있다. 탕왕은 무력으로 왕위를 차지한 것을 늘 괴롭게 여기고 후세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구실 삼을까 염려하였다. 중훼는 이러한 탕왕의 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아뢰어 그를 격려하였다. 하늘은 총명한 이를 내셔서 이들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하(夏)나라 임금은 덕에 어두워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民墜塗炭), 하늘은 이에 임금님께 용기와 지혜를 내리시어, 온 나라의 의표가 되어 바로 다스리게 하시어, 우(禹)임금의 옛 일을 계승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의 법을 따라서 하늘의 명을 받드시는 것입니다. 塗는 진흙을 뜻하고 炭은 숯불 을 뜻하니, 塗炭之苦 란 진흙수렁이나 숯불에 빠진 것과 같은 괴로움 을 말한다. 이는 재난(災難) 등으로 몹시 곤란한 처지에 빠져있음을 나타낸다.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묘사함에 도탄(塗炭) 이라는 표현은 적절하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속에서 허덕이는 북한 동포들은 지금 塗炭之苦 를 겪고 있는 것이다. …………………………………………………………………………………………………………………………………
일곱 걸음에 숨겨진 재능 - 七步成詩(칠보성시) 七(일곱 칠) 步(걸음 보) 成(이룰 성) 詩(시 시) 세설신어(世說新語) 문학(文學)편에는 위(魏) 문제(文帝)인 조비(曹丕)와 그의 동생인 동아왕(東阿王) 조식(曹植) 간에 일어난 고사가 실려 있다. 문제는 동아왕에게 일곱 걸음을 떼는 사이에 시를 지으라고 하면서(文帝嘗令東阿王七步作詩), 못지을 경우에는 국법으로 다스리겠다고 하였다. 동아왕은 대답을 마치자 마자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콩을 삶아 콩국을 끓이고 콩물을 짜서 즙을 만드네. 콩깍지는 솥 아래서 불에 타고 콩은 솥 안에서 눈물짓네. 본시 같은 뿌리에서 생겨났건만 서로 지저댐이 어찌 이리도 급할까! 문제는 조식의 이 시를 듣고 몹시 부끄러웠다고 한다. 조조(曹操)와 그의 큰 아들인 조비, 셋째 아들인 조식은 중국 문학에서 삼조(三曹) 라 칭하는 유명한 문장가들이다. 이들중 조식의 시재(詩才)가 특히 뛰어났기 때문에, 조비는 천자(天子)가 된 후에도 조식에 대한 시기심이 변하지 않았다. 조비는 조식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를 죽일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어서 이러한 시를 짓게 했던 것이다. 七步成詩 는 문재(文才)가 민첩함을 말하며, 칠보재(七步才)란 글 재주가 뛰어난 사람 을 일컫는 말이다. …………………………………………………………………………………………………………………………………
한 끼 식사에 열 번 일어서기 - 一饋十起(일궤십기) 一(한 일) 饋(먹일 궤) 十(열 십) 起(일어날 기)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는 우(禹) 임금의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묘사한 대목이 있다. 우 임금은 자신에게 도(道)로써 가르칠 사람은 와서 북을 울리고, 의(義)로써 깨우치려는 자는 와서 종을 치며, 어떤 일을 고하고자 하는 자는 방울을 흔들고, 근심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와서 경쇠를 치며, 소송할 일이 있는 자는 와서 작은 북을 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우임금은 어진 사람들을 맞이 하기 위해 한 번 식사하는 동안에 열 번이나 일어났으며(一饋而十起), 한 번 머리 감을 때 세 번이나 머리를 움켜쥐고 나와 천하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럴 때 선(善)을 다하거나 충(忠)을 나타내지 못한 자는 그 자질이 부족한 자이다. 라고 하였다. 一饋十起 란 일이 몹시 바빠서, 한 끼 밥을 먹는데도 도중에 여러 차례 일어나야 했음 을 뜻한다. 이는 곧 통치자가 국민들을 위한 정치에 각별한 열성(熱誠)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는 一饋十起 하면서 열성적으로 국민을 위해 일했던 통치자가 몇이나 있었으며, 그리고 통치자들 때문에 국민들이 끼니를 건너 뛰어야만 했던 적은 몇 번이나 있었을까? …………………………………………………………………………………………………………………………………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 - 徙木之信(사목지신) 徙(옮길 사) 木(나무 목) 之(갈 지) 信(믿을 신) 사기(史記) 상군열전(商君列傳)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정치가인 상앙(商 )의 법령 시행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상앙은 새로운 법을 정하였으나, 백성들이 이를 믿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는 세 길이나 되는 나무를 남문(南門)에 세우고 이를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十金을 주겠다고 포고했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감히 옮기지 않았다. 상앙이 다시 五十金을 내걸자, 한 사나이가 나타나 그것을 북문으로 옮겼다. 상앙은 즉시 그에게 상금을 주어 거짓이 아님을 내보였다. 이렇게 하여 신법을 공포하였는데, 일년후 백성들이 그 법령의 불편한 점을 고하며 도성으로 몰려왔다. 이때 태자(太子)가 그 법을 어겼다. 상앙은 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이 상류층 사람들이 범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태자의 보좌관과 그의 스승을 처형하였다. 이후 백성들은 기꺼이 법령을 준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徙木之信이란 약속을 반드시 실천에 옮긴다 는 것을 뜻하며, 移木之信(이목지신) 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상앙의 徙木之信을 가지고 법을 만들어야 하며, 만든 법은 자신들부터 반드시 지키겠다는 믿음을 국민들에게 주어야 한다. ………………………………………………………………………………………………………………………………… 이목지신(移木之信) [동의어] 사목지신(徙木之信). [반의어] 식언(食言). [출전]《史記》〈商君列專〉 위성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을 믿게 한다는 뜻. 곧 ① 남을 속이지 아니한 것을 밝힘. ② 약속을 실행함. 진(秦)나라 효공(孝公) 때 상앙(商鞅:?~B.C. 338)이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으로 법률에 밝았는데 특히 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펴 천하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가로 유명했다. 한 번은 상앙이 법률을 제정해 놓고도 즉시 공포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믿어 줄지 그것이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앙은 한 가지 계책을 내어 남문에 길이 3장(三丈:약 9m)에 이르는 나무를 세워 놓고 이렇게 써 붙였다. “이 나무를 북문으로 옮겨 놓는 사람에게는 십금(十金)을 주리라.” 그러나 아무도 옮기려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오십 금(五十金)을 주겠다고 써 붙였더니 이번에는 옮기는 사람이 있었다. 상앙은 즉시 약속대로 오십 금을 주었다. 그리고 법령을 공포하자 백성들은 조정을 믿고 법을 잘 지켰다고 한다. [주] 상앙 : 전국 시대, 진나라의 명재상. 제자 백가(諸子白家)의 한 사람. 별명은 공손앙(公孫鞅). 상군(商君). 위(衛)나라의 공족(公族) 출신. 일찍이 형명학(刑名學)을 공부하고 진나라 효공(孝公)을 섬김. 법치주의(法治主義)에 입각한 부국 강병책(富國强兵策)을 단행하여 진나라의 국세(國勢)를 신장시킴. 효공이 죽자 그간 반감이 쌓인 귀족들의 참소(讒訴)로 사형 당함. (?~B.C. 338).
썩지 않을 튼튼한 기둥 하나 - 一木難支(일목난지) 一(한 일) 木(나무 목) 難(어려울 난) 支(지탱할 지) 남조(南朝) 송(宋)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쓴 세설신어(世說新語) 임탄편(任誕篇)에는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위(魏)나라 명제(明帝)의 사위인 임개(任愷)는 가충(賈充)이라는 사람과의 불화로 그만 면직당하고 말았다. 그는 권세를 잃게 되자, 자신을 돌보지 않고 무절제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에 어떤 사람이 임개의 친구인 화교(和嶠)에게 말하길 당신은 어찌 친구인 임개의 방탕함을 보고도 구하지 않고 좌시만 하는거요? 라고 물었다. 중서령(中書令)을 지냈던 화교는 임개의 방탕은 마치 북하문(北夏門)이 무너질 때와 같아서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쳐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오(非一木所能支). 라고 대답하였다. 一木難支 는 一柱難支(일주난지) 라고도 하는데, 이는 큰 집이 무너지는 것을 나무 기둥 하나로 떠받치지 못하듯 이미 기울어지는 대세를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 을 비유한 것이다. 개인의 경우 방탕함으로 얻게되는 최후의 결과는 망신(亡身)이고, 나라의 경우에는 망국(亡國)이다. 지금 우리는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방탕과 다름없는 일들이 일어 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썩지 않을 충실한 기둥을 하나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
오래사는 미인은 가짜 미인 - 佳人薄命(가인박명) 佳(아름다울 가) 人(사람 인) 薄(엷을 박) 命(목숨 명) 소동파(蘇東坡)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송대(宋代)의 시인 소식(蘇軾)은 진사, 학사, 예부상서 등의 관직을 지냈으나, 정치적으로는 순탄하지 않았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는데, 이러한 환경은 그로 하여금 심도 있는 작품을 쓰게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佳人薄命 이라는 말은 그의 칠언율시 박명가인(薄命佳人) 에 나온다. 두 볼은 엉긴 우유빛 머리는 옻칠한 듯 검고 / 눈빛이 발에 비추어 구슬처럼 반짝인다. / 하얗고 하얀 비단으로 선녀의 옷을 지어 입고 / 타고난 바탕을 더럽힐까 입술연지는 바르지 않았네. / 오나라 사투리의 예쁜 목소리 앳되기만 한데 / 한없는 근심은 전혀 알 수 없네. /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의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自古佳人多命薄) / 문을 닫은채 봄이 지나가면 버들꽃도 떨어지리. 본래 이 시에서는 佳人命薄 이라 하였으나 후에는 佳人薄命 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美人薄命(미인박명) 이라는 말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佳人薄命 이란 미모가 뛰어난 여자는 그 운명이 기구하거나 길지 못함 을 뜻하는 말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뜯어고친 여인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들은 외모를 위해 수명과 운명이라는 내실(內實)을 포기한 것일까. ………………………………………………………………………………………………………………………………… 아래 시의 작자 소식(蘇軾:1036-1101)이 항주, 양주 등의 지방장관으로 있을 때 우연히 절에서 나이 삼십이 이미 넘었다는 예쁜 여승을 보고 그녀의 아름다웠을 소녀시절을 생각하며 미인은 역사적으로 운명이 기박하였음을 시로 쓴 데서 전하여졌음. 두 볼은 엉긴 우유와 같고 머리는 옻칠을 한 것처럼 새까맣고, 눈빛이 발에 들어오니 주옥과 같이 빛난다. 본디 흰 비단으로써 선녀의 옷을 지으니, 입술연지는 천연의 바탕을 더럽힌다 하여 바르지 않았네. 오나라 사투리의 애교 있는 소리는 어린아이처럼 애띠고, 무한한 사이의 근심 다 알 수 없네.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 운명 기박함이 많으니, 문을 닫고 봄이 다하니 버들꽃 떨어지네. 雙頰凝乳髮抹漆 眼光入廉珠的白樂 故將白練作仙衣 不許紅膏汗天質 吳音嬌軟帶兒癡 無限間愁總未知 自古佳人多命薄 閉門春盡楊花落 이 시는 1086년부터 8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가인박명(佳人薄命)'은 어린 승려를 노래한 七言律詩로 되어 있다. 酥 or 乳
낙엽에서 가을을 찾다 - 一葉知秋(일엽지추) 一(한 일) 葉(잎 엽) 知(알 지) 秋(가을 추) 회남자 설산훈(說山訓)에는 하나의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 해가 장차 저물려는 것을 알고(見一落葉而知歲之將暮), 병 속의 얼음을 보고 천하에 추위가 닥쳐옴을 아는 것은 가까운 것으로써 먼 것을 논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당나라 한 시인의 시(詩)에는 떨어지는 잎새 하나로 천하가 가을임을 알다(一落葉知天下秋). 라는 구절이 보인다. 一葉知秋 는 하나의 낙엽을 보고 곧 가을이 왔음을 알다 라는 뜻이다. 이는 사소한 것으로써 큰 것을 알며, 부분적인 현상으로써 사물의 본질이나 전체, 발전 추세 등을 미뤄 알게 된다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우리들은 정치와 경제에서, 그리고 교육에서도 낙엽들을 보았으며, 지금도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이 떨어지는 많은 잎사귀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서양 속담에 One swallow does not make a summer(제비 한 마리가 왔다고 여름이 되는 것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성급한 판단을 삼가라는 뜻이다. 지금 몇몇의 낙엽들이 눈에 띄인다고 해서 가을과 겨울의 뒤를 이어 나타날 봄까지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一葉知秋 와 유사한 표현으로는 以偏槪全(이편개전), 즉 반쪽으로써 전체를 짐작하다 라는 말이 있다. …………………………………………………………………………………………………………………………………
관 뚜껑에서 밝혀지는 진실 - 蓋棺事定(개관사정) 蓋(덮을 개) 棺(널 관) 事(일 사) 定(정할 정) 두보(杜甫)가 사천성(四川省)의 한 산골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이다. 마침 그곳에는 자신의 친구 아들인 소계(蘇係)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보는 소계에게 한 편의 시를 써서 그를 격려하고자 하였다. 그의 군불견 간소계(君不見 簡蘇係) 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길 가에 버려진 못을 /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부러져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되어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만들어지며 / 조그만 물웅덩이 속에도 큰 용이 숨어 있을 수 있네. / 장부는 관 뚜껑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결정되는 법이네(蓋棺事始定) / 그대는 다행히도 아직 늙지 않았거늘..... 이 시를 읽은 소계는 후에 그곳을 떠나 호남 땅에서 설객(說客)이 되었다고 한다. 蓋棺事定 이란 죽어서 관의 뚜껑을 덮은 후에라야 비로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결정된다 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죽은 이의 업적을 찬양하기도 하고, 생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80년 5월에 관 뚜껑이 덮혀졌던 많은 이들, 그들은 거의 20년만에야 자신들의 자리가 정해지게 된 셈이다. …………………………………………………………………………………………………………………………………
하루가 삼년같은 그리움 - 一刻三秋(일각삼추) 一(한 일) 刻(새길 각) 三(석 삼) 秋(가을 추) 시경(詩經) 왕풍(王風)에는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채갈(采葛) 이라는 시(詩)가 있다. 그대 칡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석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葛兮 一日不見 如三月兮), 그대 대쑥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아홉달이나 된 듯하고(彼采蕭兮 一日不見 如三秋兮), 그대 약쑥 캐러 가시어 하루동안 못 뵈어도 세 해나 된 듯하네(彼采艾兮 一日不見 如三歲兮). 고대 중국에서는 일주야(一晝夜)를 일백각(一百刻)으로 나누었는데, 절기(節氣)나 주야(晝夜)에 따라 약간 다르다. 예컨대, 동지에는 낮이 45각, 밤이 55각이었고, 하지에는 낮 65각, 밤 35각이었다. 춘분과 추분에는 낮이 55각반이었고, 밤은 44각반이었다. 청(淸)대에 이르러서는 시종(時鐘) 으로 시간을 나타내게 되었으며, 현대 중국어에서는 15분을 一刻 이라 한다. 하지만 옛사람들은 一刻 이라는 말로써 매우 짧은 시간을 표현하였다. 一刻三秋 나 一刻如三秋(일각여삼추) 라는 말은 이 시의 一日三秋 라는 표현에서 유래된 것으로 모두 같은 의미이다. 一刻三秋 란 짧은 시간도 삼년같이 느껴질 정도로 그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함을 나타낸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