酒池肉林(주지육림) 酒(술 주) 池(못 지) 肉(고기 육) 林(수풀 림)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는 상(商)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의 방탕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주왕은 본시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한 임금이었으나, 달기라는 요부에 빠져 그만 극악무도한 폭군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잔혹한 형벌을 고안해 내어 자신을 반대하는 관리나 백성들을 불에 태워 죽이면서, 여기에서 쾌락을 느꼈다. 그는 향락을 위하여 높이가 천척(千尺)에 달하고 둘레가 삼리(三里)나 되는 궁전을 만들도록 명령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7년 동안 노역케 하였다. 화려한 궁실(宮室)이 완성되자 각지의 준마(駿馬), 명견(名犬), 미녀(美女) 등을 수집하여 자신의 쾌락을 위한 도구로 삼았다. 이것으로도 부족했던 그는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덩이를 걸어 숲을 이루게(以酒爲池, 懸肉爲林)한 다음, 많은 젊은 남녀들로 하여금 발가벗고 서로 희롱하고, 음탕한 음악과 음란한 춤을 추게 하며, 자신도 먹고 마시면서 이러한 광란의 잔치를 감상하였다. 酒池肉林(sumptuous feast) 이란 지극히 사치스럽고 방탕한 술자리나 생활 을 비유한 말이다. 기업들의 연이은 부도 속에서도 향락 산업만은 불황을 모른다고 한다. ………………………………………………………………………………………………………………………………… 《出典》'史記' 帝王世紀 十八史略 고대 중국의 夏나라 걸왕(桀王)과 殷나라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智勇)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들은 각기 말희와 달기라는 희대(稀代)의 두 요녀 독부(妖女毒婦)에게 빠져서 사치(奢侈)와 주색(酒色)에 탐닉(眈溺)하다가 결국 폭군 음주(暴君淫主)라는 낙인(烙印)이 찍힌 채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夏나라 걸왕은 자신이 정복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바친 희대의 요녀 말희에게 반해서 보석과 상아로 장식한 궁전을 짓고 옥으로 만든 침대에서 밤마다 일락(逸樂)을 베풀기로 했다. 또 무악(舞樂)에 싫증이 난 말희의 요구에 따라 궁정(宮庭) 한 모퉁이에 큰 못을 판 다음 바닥에 새하얀 모래를 깔고 향기로운 미주(美酒)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못 둘레에는 고기[肉]로 동산을 쌓고 포육(脯肉)으로 숲을 만들었다. 걸왕과 말희는 그 못에 호화선을 띄우고, 못 둘레에서 춤을 추던 3,000명의 미소녀(美少女)들이 신호의 북이 울리면 일제히 못의 미주를 마시고 숲의 포육을 탐식(貪食)하는 광경을 구경하며 희희낙낙 즐겼다. 그러니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원성은 하늘에 닿았다. 이리하여 걸왕은 하나라에 복속(服屬)했던 殷나라 탕왕에게 주벌(誅伐) 당하고 말았다. 또한 탕왕으로부터 28대째로 殷나라 마지막 군주가 된 주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달기는 주왕이 정벌한 오랑캐의 유시씨국(有施氏國)에서 공물(供物)로 보내온 희대의 독부였다. 주왕은 그녀의 끝없는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다. 그래서 창고에는 백성들로부터 수탈(收奪)한 전백(錢帛)과 곡식이 산처럼 쌓였고, 국내의 온갖 진수기물(珍獸奇物)은 속속 궁중으로 징발되었다. 또 국력을 기울여 호화찬란한 궁정을 짓고 미주와 포육으로 '酒池肉林'을 만들었다. 이렇듯 폭군 음주(暴君淫主)로 악명을 떨치던 주왕도 결국 걸왕의 전철을 밟아 周나라 시조(始祖)인 무왕(武王)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喪家之狗(상가지구) 喪(죽을 상) 家(집 가) 之(-의 지) 狗(개 구)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는 공자의 초라한 모습을 이야기한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공자(孔子)는 제자들을 데리고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하였다. 정(鄭)나라에 이르렀을 때, 제자들과 길이 엇갈려버린 공자는 하는 수 없이 동문(東門)아래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초조해진 공자의 제자들은 모두 나뉘어 이곳저곳을 돌아 다니며 그를 찾았다. 제자들중에서 자공(子貢)이 가장 열심히 사방으로 스승의 행방을 묻고 다녔다. 그러던 중 어떤 정나라 사람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동문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같고, 그 목은 고요(皐陶)와 같으며, 어깨는 자산(子産)과 같았소. 그렇지만 허리 아래로는 우(禹)임금에 세치쯤 미치지 못하였고, 그 지친 모습은 마치 초상집의 개(若喪家之狗)와 같았소. 제자들을 만난 공자는 자공의 이러한 말을 듣고 용모에 대한 말을 맞다고 하기 어렵지만 초상집 개 같다는 것은 딱 들어맞는 말이다(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라고 했다. 喪家之狗 란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먹을 것을 구하러 다니는 초라한 사람 을 비유한 말이며, 연말 대선에서 패배한 용들의 모습 또한 이러하리라. ………………………………………………………………………………………………………………………………… 孔子適鄭 與弟子相失 孔子獨立郭東門 鄭人或謂子貢曰 東門有人 其類似堯 其項類皐陶 其肩 類子産 自然腰以下 下及禹三寸 廐廐若喪家之狗 子貢以實告孔子 孔子欣然笑曰 形狀末也 而似喪家之狗 然哉然哉.
駟不及舌(사불급설) 駟(사마 사) 不(아닐 불) 及(미칠 급) 舌(혀 설) 논어(論語) 안연(顔淵)편에는 경솔한 말을 경계한 대목이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子貢)에게 위(衛)나라 대부(大夫)인 극자성(棘子成)이 군자는 바탕만 있으면 되었지 문(文)이 왜 필요합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자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안타깝습니다. 그대의 말씀은 군자의 말씀입니다.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도 혀에 미치지 못합니다(夫子之說君子也, 駟不及舌). 문(文)이 질(質)과 같고 질(質)이 문(文)과 같다면, 호랑이나 표범의 가죽이 개나 양의 가죽과 같다는 것입니까? 송(宋)나라 구양수(歐陽修)의 필설(筆說)에도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한번 입을 떠나면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로도 쫓기 어렵다(一言旣出, 駟馬難追) 라는 대목이 있다. 駟不及舌(A word, once uttered, is beyond recall) 은 駟馬難追(Four horses can't overtake it -- a spoken word) 라고도 하는데, 이는 말을 신중하게 해야함을 비유한 표현이다. 모 정당의 경선 후보들은 자신들이 쫓아 갈 수도 없는 약속을 마구 해대고 있다. 대통령이 되기도 전에 공약(空約) 남발하는 연습을 미리 하고 있다는 것이다. ………………………………………………………………………………………………………………………………… 자공(子貢)을 보고 극자성(棘子成)이 물었다. "君子는 그 바탕만 있으면 되지 어찌해서 문(文)이 필요합니까?" 이 말을 듣고 자공은 이렇게 말했다. "안타깝다. 그대의 말은 군자답지만 사(駟)도 혀[舌]에 미치지 못한다. 문(文)이 질(質)과 같고 질이 문과 같다면,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이나 개와 양의 가죽이 같다는 말인가?" 唐나라 때의 명재상인 풍도(馮道)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입은 화의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自刀. 《明心寶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실려 있다.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말은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으나 편안할 것이다." 口是傷人斧 言是割舌刀 閉口深藏舌 安身處處牢.
利用厚生(이용후생) 利(이로울 리) 用(쓸 용) 厚(투터울 후) 生(날 생) 상서(尙書) 우서(虞書)의 대우모(大禹謨)에는 우(禹)와 순(舜)임금과 익(益) 세 사람의 정치에 관한 대담이 기록되어 있다. 우는 순임금에게 말하길 임금이시여, 잘 생각하십시오. 덕으로만 옳은 정치를 할 수 있고, 정치는 백성을 보양(保養)하는데 있으니, 물·불·쇠·나무·흙 및 곡식들을 잘 다스리시고, 또 덕을 바로 잡고 쓰임을 이롭게 하며 삶을 두터이 함을 잘 조화시키십시오(正德利用厚生, 惟和) 하고 하였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7년조에도 수(水) 화(火) 금(金) 목(木) 토(土) 곡(穀)의 여섯가지가 나오는 것을 육부(六府)라 하고, 백성의 덕을 바르게 하는 정덕(正德)과, 백성들이 쓰고 하는데 편리하게 하는 이용(利用)과, 백성들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는 후생(厚生), 이것을 삼사라 이릅니다(正德利用厚生, 謂之三事) 라는 대목이 보인다. 利用厚生 이란 모든 물질들의 작용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백성들의 의식(衣食)을 풍족하게 하다 라는 뜻이며, 정치의 핵심을 집약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판에는 利用厚生 은 커녕 국민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삶과 지위를 풍족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
南郭濫吹(남곽남취) 南(남녘 남) 郭(성곽 곽) 濫(함부로 람) 吹(불 취) 한비자(韓非子) 내저설(內儲說) 상편에는 남곽처사(南郭處士)라는 무능한 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의 선왕(宣王)은 우라는 관악기의 연주를 매우 즐겨 들었다. 그는 많은 악사들이 함께 연주하는 것을 특히 좋아하여, 매번 300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다. 우를 전혀 불지 못하는 남곽이라는 한 처사가 선왕을 위하여 우를 불겠다고 간청하였다. 선왕은 흔쾌히 그를 받아들여 합주단의 일원으로 삼고, 많은 상을 하사하였다. 남곽은 다른 합주단원들의 틈에 끼여 열심히 연주하는 시늉을 했다. 몇 해가 지나, 선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민왕(緡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민왕은 아버지인 선왕과는 달리 300명의 합주단이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듣지 않고 단원 한 사람이 단독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겨 들었다. 난처해진 남곽은 자신의 차례가 돌아 오자 도망치고 말았다. 南郭濫吹(남곽이 우를 함부로 불다) 는 남우충수(濫 充數) 라고도 한다. 이는 무능한 자가 재능이 있는 척하거나, 실력이 없는 자가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
物腐蟲生(물부충생) 物(만물 물) 腐(썩을 부) 蟲(벌레 충) 生(날 생) 진(秦)나라 말년, 범증(范增)은 항량(項梁)에게 투항하여 그의 모사(謀士)가 되었다. 항량이 죽은 후, 그의 조카 항우가 그를 계승하여 진나라에 대항하였다. 항우는 용맹하였지만 지모(智謀)가 없었으므로 주로 범증의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하였다. 범증은 홍문(鴻門)의 연회에서 유방(劉邦)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곧 유방은 범증과 항우를 이간시키는 공작을 꾸몄다. 항우는 이 계략에 휘말려 범증을 의심하여 그를 멀리 하였다. 범증도 몹시 분개하여 항우를 떠나고 말았다. 얼마후 범증은 병사하였고, 항우는 유방에게 망하였다. 송(宋)나라 소식(蘇軾)은 범증론(范增論)이라는 글에서 범증이 항우의 곁을 떠난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며, 물건이란 반드시 먼저 썩은 뒤에야 벌레가 거기에 생기게 되는 것이고(物必先腐也, 而後蟲生之), 사람이란 반드시 먼저 의심을 하게 된 뒤에야 모함이 먹혀들어갈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物腐蟲生(Worms breed in decaying matter) 이란 내부에 약점이 생기면 곧 외부의 침입이 있게 된다 는 뜻이다. 불건전한 사회와 부패한 정치는 곧 범죄와 비리(非理)의 무대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