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難而退(지난이퇴) 知(알 지) 難(어려울 난) 而(말 이을 이) 退(물러날 퇴) 춘추좌전(春秋左傳) 선공(宣公) 12년조에는 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난다는 것은 용병의 바른 원칙이다(見可而進, 知難而退, 軍之善政也) 라는 대목이 있다. 춘추시기, 정(鄭)나라는 패권(覇權)을 다투던 진(晉)나라와 초(楚)나라 사이에 위치하였는데, 정나라는 먼저 진나라에 의지하였다. 그러자 초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정나라를 공격하였다. 정나라는 자국(自國)의 안전을 위하여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먼데 있는 물로는 불을 끌 수 없듯 진나라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정나라는 초나라에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진나라의 군대를 통솔하던 환자(桓子)는 정나라를 구원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여겼으며,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에 진나라로서도 승산이 없었다. 이에 그는 철군하려 하였으나, 지휘에 따르지 않던 부하들은 초나라 군사와 교전을 하여 크게 패하고 말았다. 知難而退 란 형세가 불리한 것을 알면 마땅히 물러서야 함 을 뜻한다. 대권을 향한 용(龍)들이 아직껏 꿈틀대고 있는 것은 그들이 정말로 대세의 불리함을 몰라서가 아니라 얄팍한 자존심과 환상(?) 때문일 것이다. …………………………………………………………………………………………………………………………………
不可救藥(불가구약) 不(아닐 불) 可(옳을 가) 救(건질 구) 藥(약 약) 시경(詩經) 대아(大雅)에는 한 충신의 답답한 마음을 노래한 판(板) 이라는 시(詩)가 실려 있다. 서주(西周) 말엽, 여왕은 포학하고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였다. 백성들은 몰래 그를 저주하였으며, 일부 대신(大臣)들까지도 그에게 불만을 품었다. 여왕은 백성들이 자신을 욕하고 있음을 알고 그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공개적으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당시 유명한 관리였던 범백(凡伯)은 왕의 이러한 처사를 지나치다고 여겨 과감하게 글을 올렸으나,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하늘이 저리도 가혹한데 날 그렇게 놀리지 마소. 늙은이는 진정으로 대하는데 젊은이는 교만스럽네. 내 하는 말 망녕된 것 아닌데도 그대들은 농으로 받네. 심해지면 그땐 고칠 약도 쓸 수 없다오(不可救藥). 기원전 841년, 백성들의 폭동으로 여왕의 폭정은 결국 종말을 맞게 되었다. 不可救藥 이란 일이 만회할 수 없을 지경에 달하였음 을 형용한 말이다. 학원 폭력의 심각한 상황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모두가 좋은 약을 찾아야 할 때이다. …………………………………………………………………………………………………………………………………
弱肉强食(약육강식) 弱(약할 약) 肉(고기 육) 强(굳셀 강) 食(밥 식) 한유(韓愈)의 송부도문창사서(送浮屠文暢師序)는 한유가 문창이라는 승려에게 써 보낸 글로서, 한유의 불교에 대한 관점이 잘 나타나 있다. 한유는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道)에 있어서 인(仁)과 의(義)보다 더 큰 것이 없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예약과 형정(刑政)보다 더 바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들을 천하에 시행하면 만물이 모두 합당함을 얻게 되고, 그것들을 그 자신에게 적용하면 몸은 편안하고 기운은 평온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교라는 것은 누가 만들고 누가 전한 것입니까? 새들이 몸을 숙여 모이를 쪼다가 몸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고, 짐승들이 깊은 곳에 있으면서 드물게 나타나는 것은 다른 것들이 자신을 해할까 두렵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도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약한 자의 고기를 강한 자가 먹고 있는 것입니다(猶且不脫焉, 弱之肉, 强之食). 弱肉强食(The weak become the victim of the strong) 이란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잡아 먹힌다 는 뜻이다. 경쟁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요즘 사회에서도 이 말은 전투수칙(?)이나 생존법칙(?)처럼 쓰이고 있다. …………………………………………………………………………………………………………………………………
空城計(공성계) 空(빌 공) 城(성 성) 計(꾀 계)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는 텅빈 성(城)에 속아 넘어간 조조(曹操) 휘하의 한 장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갈량은 양평이라는 곳에 군대를 주둔시켜 두고, 대장군 위연(魏延) 등을 파견하여 조조의 군대를 공격케 하였다. 때문에 성 안에는 병들고 약한 소수의 병사들만 남아 있었다. 이 때, 조조의 군대가 대도독 사마의(司馬懿)의 통솔로 양평을 향하여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 졌다. 성을 지키고 있던 유비의 군사들은 이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과감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는 군사들을 시켜 성문을 활짝 열고, 성문 입구와 길을 청소하여 사마의를 영접하는 것처럼 꾸몄다. 그리고 자신은 누대(樓臺)에 올라가 조용히 앉아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사마의는 군사를 이끌고 성 앞에 당도하여 이러한 상황을 보고 의심이 들었다. 그는 성 안에 이미 복병을 두고 자신을 유인하려는 제갈량의 속임수라고 생각하고, 곧 군사를 돌려 퇴각하였다. 空城計란 겉으로는 허세를 부리지만 사실은 준비가 전혀 없는 것 을 비유한 말이다. 피서철 빈집털이가 우려된다고 하는데, 제갈량의 계략을 응용해 봄직하다. …………………………………………………………………………………………………………………………………
一擧兩得(일거양득) 一(한 일) 擧(들 거) 兩(두 량) 得(얻을 득) 사기(史記) 장의열전(張儀列傳)에 나오는 고사이다.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의 혜왕은 초(楚)나라의 사신 진진(陳軫)에게 한(韓)나라와 위(魏)나라를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 물었다. 진진은 다음과 같은 고사로 대답을 대신하였다. 변장자(卞莊子)가 범을 찌르려고 하자 여관의 아이가 만류하면서 지금 두 범이 서로 소를 잡아 먹으려 하고 있는데, 먹어 보고 맛이 있으면 서로 빼앗으려고 싸울 것입니다. 싸우게 되면 큰 놈은 다치고 작은 놈은 죽을 것이니, 그 때 다친 놈을 찔러 죽이면 일거에 두마리의 범을 잡았다는 이름을 얻게될 것입니다(一擧必有雙虎之名) 라고 말했답니다. 조금 후에 두 범이 싸워서 큰 놈이 다치고 작은 놈이 죽자, 변장자가 다친 놈을 찔러 죽이니 과연 한 번에 두 마리 범을 잡은 공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一擧果有雙虎之功). 一擧兩得 은 一石二鳥(Killing two birds with one stone) 一箭雙 (일전쌍조:화살 하나로 수리 두 마리를 떨어 뜨린다) 와 같은 표현이며, 모두 한 가지 일로써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 을 뜻한다. ………………………………………………………………………………………………………………………………… [준말] 양득(兩得). [동의어] 일거양획(一擧兩獲), 일전쌍조(一箭雙鳥), 일석이조(一石二鳥). [반의어] 일거양실(一擧兩失). [참조] 조명시리(朝名市利). [출전]《春秋後語》,《戰國策》〈秦策〉 진(秦)나라 혜문왕(惠文王) 때(B.C.317)의 일이다. 중신 사마조(司馬錯)은 어전에서 ‘중원으로의 진출이야말로 조명시리(朝名市利)에 부합하는 패업’이라며 중원으로의 출병을 주장하는 재상 장의(張儀)와는 달리 혜문왕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신이 듣기로는 부국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국토를 넓히는데 힘써야 하고, 강병(强兵)을 원하는 군주는 먼저 백성의 부(富)에 힘써야 하며, 패자(覇者)가 되기를 원하는 군주는 먼저 덕을 쌓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옵니다. 이 세 가지 요건이 갖춰지면 패업은 자연히 이루어 지는 법이옵니다. 하오나, 지금 진나라는 국토도 협소하고 백성들은 빈곤하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먼저 막강한 진나라의 군사로 촉(蜀)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는 길밖에 달리 좋은 방법이 없는 줄로 아옵니다. 그러면 국토는 넓어지고 백성들의 재물은 쌓일 것이옵니다. 이야말로 ‘일거양득’이 아니고 무엇이오니까? 그러나 지금 천하를 호령하기 위해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周)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는 한(韓)나라를 침범하면, 한나라는 제(齊)나라와 조(趙)나라를 통해서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에 구원을 청할 게 분명하오며, 더욱이 주나라의 구정(九鼎)은 초나라로 옮겨질 것이옵니다. 그땐 진나라가 공연히 천자를 위협한다는 악명(惡名)만 얻을 뿐이옵니다.” 혜문왕은 사마조의 진언에 따라 촉 땅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국토를 넓혔다. [주] 구정 : 우왕(禹王) 때에 당시 전 중국 대륙인 아홉 고을[九州]에서 바친 금(金, 일설에는 구리)으로 만든 솔. 하(夏),은(殷) 이래 천자(天子)에게 전해 오는 상징적 보물이었으나 주왕조(周王朝) 때에 없어졌다고 함.
殷鑒不遠(은감불원) 殷(성할 은) 鑒(거울 감) 不(아닐 불) 遠(멀 원) 시경(詩經) 대아(大雅)편의 탕(蕩)이라는 시는 나라의 흥망(興亡)에 대한 교훈을 노래한 것이다. 하(夏)나라 최후의 왕인 걸왕(桀王)은 잔혹한 정치로 백성들을 핍박하다 결국 그들의 반항을 받게 되었다. 기원전 16세기경 상(商)부락의 지도자인 탕(湯)는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멸하고 상나라를 세웠다. 기원전 14세기경에는, 상나라의 왕 반경(盤庚)은 수도를 은(殷)지역으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상나라를 은나라라고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나라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주지육림(酒池肉林)의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기원전 11세기 중엽 당시 서백후(西伯侯)의 아들인 발(發)에게 나라를 잃고 말았다. 은나라가 멸망하기 전, 서백후는 주왕에게 간언하기를 넘어지는 일이 일어나면 가지와 잎은 해가 없어도 뿌리는 실상 먼저 끊어진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은 하나라 걸왕 때에 있다(殷鑒不遠 在夏後之世) 라고 하였다. 鑒은 선례(先例) 본보기 라는 의미로 쓰였으니, 殷鑒不遠(An example is not far to seek) 이란 본보기로 삼을 만한 남의 실패가 바로 가까이에 있음 을 뜻한다. ………………………………………………………………………………………………………………………………… 고대 중국 하(夏) 은(殷) 주(周)의 3왕조 중 殷王朝의 마지막 군주인 주왕(紂王)은 원래 지용을 겸비한 현주(賢主)였으나, 그를 폭군 음주(淫主)로 치닫게 한 것은 정복한 북방 오랑캐의 유소씨국(有蘇氏國)에서 공물로 보내온 달기라는 희대의 요녀독부(妖女毒婦)였다. 주왕은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막대한 국고(國庫)를 기울여 시설한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 음주폭락(飮酒暴樂)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결국 그는 가렴주구(苛斂誅求)에다가 충간자(忠諫者)를 처형하기 위한 포락지형을 일삼는 악왕(惡王)의 으뜸으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주왕(紂王)의 포학(暴虐)을 간(諫)하다가 많은 충신이 목숨을 잃는 가운데 왕의 보좌역인 삼공(三公) 중의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는 처형 당하고 서백(西伯)은 유폐되었다. 서백은 그 때, '600여 년 전에 은왕조(殷王朝)의 시조인 탕왕(湯王)에게 주벌(誅伐) 당한 하왕조(夏王朝)의 걸왕(桀王)을 거울 삼아 그 같은 멸망의 전철(前轍)을 밟지 말라'고 충간(忠諫)하다가 화(禍)를 당했는데 그 간언(諫言)이《詩經》'大雅篇'의 '탕시(湯詩)'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은나라 왕이 거울로 삼아야 할 선례(先例)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 걸왕 때에 있네. 殷鑑不遠 在夏后之世. 삼공(三公)에 이어 삼인(三仁)으로 불리던 미자(微子) 기자(箕子) 비간(比干) 등 세 충신도 간했으나 주색에 빠져 이성을 잃은 주왕은 걸왕의 비극적인 말로(末路)를 되돌아 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마침내 원성(怨聲)이 하늘에 닿은 백성과 제후들로부터 이반(離叛) 당한 주왕은 서백의 아들 발(發)에게 멸망 당하고 말았다. 【원 말】재하후지세(在夏后之世) 【동의어】상감불원(商鑑不遠) 【유사어】복차지계(覆車之戒), 복철(覆轍)
得意洋洋(득의양양) 得(얻을 득) 意(뜻 의) 洋(넘칠 양) 洋(넘칠 양) 사기(史記) 관안열전(管晏列傳)에는 겸손의 교훈을 주는 고사가 기록되어 있다. 춘추시기, 제(齊)나라의 유명한 재상인 안영(晏 )에게는 한 마부(馬夫)가 있었다. 어느 날, 안영이 마차를 타고 외출을 하려는데, 마부의 처가 문틈으로 자기 남편의 거동을 엿보았다. 자신의 남편은 수레 위에 큰 차양을 씌우더니, 마차의 앞자리에 앉아 채찍질하는 흉내를 내며 의기양양하여 매우 만족스러워 하고 있었다(意氣揚揚, 甚自得也).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그의 처는 그에게 이혼해야겠다고 하였다. 영문을 모르는 마부가 그 이유를 묻자, 아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안자(晏子)께서는 키가 6척도 못되지만 나라의 재상으로 명성이 높습니다. 그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매우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키가 8척이 넘으면서도 남의 마부가 된게 만족스런 듯 기뻐하니, 저는 이런 남자의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후 마부는 늘 겸손한 태도를 지니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안자는 그를 대부(大夫)로 천거하였다. 得意洋洋(triumphant) 은 의기양양(意氣揚揚) 이라고도 한다. …………………………………………………………………………………………………………………………………
人面獸心(인면수심) 人(사람 인) 面(낯 면) 獸(짐승 수) 心(마음 심)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는 한대(漢代) 흉노들의 활동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흉노족은 서한(西漢) 시대 중국의 북방에 살았던 유목 민족이었다. 당시 한(漢)나라는 흉노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도 풍부하였으므로, 흉노족들은 자주 한나라를 침입하였다. 흉노족의 수십만 기마병(騎馬兵)은 해마다 한나라의 북방 국경을 넘어 들어와 농가를 기습하여 가축을 약탈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납치하였던 것이다. 기원전 133년, 한 무제(武帝)는 흉노 정벌에 나서 수년 동안의 전투를 겪으며 그들의 침공을 막아내었다. 동한(東漢) 시대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흉노족의 잔악함을 묘사하여 오랑캐들은 매우 탐욕스럽게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데, 그들의 얼굴은 비록 사람같으나 성질은 흉악하여 마치 짐승같다(人面獸心) 라고 기록하였다. 人面獸心(man in face but brute in mind) 이란 본시 한족(漢族)들이 흉노를 멸시하여 쓰던 말이었으나, 후에는 성질이 잔인하고 흉악한 짐승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