聲東擊西(성동격서) 聲(소리낼 성) 東(동녘 동) 擊(칠 격) 西(서녘 서) 통전(通典)의 병전(兵典)에 나오는 이야기다.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서로 다투던 시기, 위왕(魏王) 표(豹)의 투항으로 한나라 유방(劉邦)은 항우(項羽)와 위왕 표의 협공을 당하는 국면이 되어 매우 위험한 형세에 처하였다. 그는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한신(韓信)을 보내어 정벌에 나섰다. 이에 위왕 표는 백직(柏直)을 대장으로 임명하여, 황하의 동쪽 포판(蒲坂)에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의 도하(渡河)를 저지하였다. 한신은 포판의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였으나, 사병들로 하여금 낮에는 큰 소리로 훈련하게 하고 밤에는 불을 밝혀 강공의 의사를 나타내도록 하였다. 백직은 한나라 군대의 동태를 살펴보고 그들의 어리석은 작전을 비웃었다. 한편으로 한신은 비밀리에 군대를 이끌고 하양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뗏목을 만들었다. 뗏목으로 황하를 건넌 한나라 군사들은 신속하게 진군하여 위왕 표의 후방 요지인 안읍(安邑)을 점령하고, 그를 사로 잡았다. 聲東擊西(to make a feint to the east and attack in the west)란 동쪽을 칠 듯이 말하고 실제로는 서쪽을 친다 는 뜻으로, 상대방을 속여 교묘하게 공략함 을 비유한 말이다. 개인이나 정치인들의 처세, 또는 운동 경기 등에서 흔히 쓰이는 수법이다.
終南捷徑(종남첩경) 終(끝날 종) 南(남녘 남) 捷(빠를 첩) 徑(지름길 경) 신당서(新唐書) 노장용전(盧藏用傳)에 실린 이야기다. 당나라 때, 노장용이라는 유명한 선비가 있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시(詩)와 부(賦)에 뛰어났다. 그는 진사에 합격했지만, 조정으로부터 아무런 관직을 받지 못하였다. 그는 조정의 관심을 끌기 위하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곧 당시의 수도인 장안(長安)근처에 있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가 은둔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매일 심신을 수양하며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얼마되지 않아 노장용은 정말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관직을 얻게 되었다. 부임 길에 오른 그는 몹시 기쁜 마음에 종남산을 가리키며 이 산 중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도다(此中大有嘉處) 라고 하였다. 이 당시 사마승정(司馬承禎)이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도 벼슬을 하지 않고 종남산에서 은둔 생활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노장용의 말을 듣고는 그의 속뜻을 알아 차리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 종남산은 벼슬의 지름길일 따름이다(仕官之捷徑耳). 終南捷徑이란 명리(名利)를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을 비유한 말이다. 세상이 이처럼 혼란스런 것은 바로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지름길만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眼中釘(안중정) 眼(눈 안) 中(가운데 중) 釘(못 정) 신오대사(新五代史) 조재례전(趙在禮傳)에 실린 이야기다. 오대(五代) 후당(後唐)시대 당(唐)나라의 명종(明宗)이 재위할 때, 송주(宋州)의 절도사로 조재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포악한 정치때문에 많은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반발하거나 불평하지 못했다. 조재례가 송주를 떠나 영흥(永興)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송주 백성들은 모두 조재례가 떠난다니, 마치 눈에 박힌 못이 빠진 것 같은데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나(眼中拔釘, 豈不樂哉) 라며 기뻐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조재례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곧 황제에게 송주의 절도사로 유임(留任)하고 싶다는 글을 올렸다. 황제는 조재례의 뜻이 백성들의 희망때문인 것으로 알고, 그로 하여금 유임하도록 했다. 다음 날, 조재례는 즉각 명령을 내려,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못을 뽑아내는 비용으로 일인당 1천문의 돈을 내도록 하고, 돈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眼中釘(a thorn in the eye) 이란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눈에 거슬리는 사람 을 비유한 말이다. ………………………………………………………………………………………………………………………………… 안중지정(眼中之釘) 眼:눈 안.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釘:못 정. [동의어] 안중정(眼中釘). [출전]《新五代史》〈趙在禮專〉 눈에 박힌 못이라는 뜻. 곧 ①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의 비유. ② 몹시 싫거나 미워서 항상 눈에 거슬리는 사람(눈엣가시)의 비유. 당나라 말, 혼란기에 조재례(趙在禮)라는 악명 높은 탐관오리가 있었다. 그는 하북 절도사(河北節度使) 유인공(劉仁恭)의 수하 무장이었으나 토색(討索)질한 재무를 고관대작에게 상납, 출세길에 오른 뒤 후량(後梁).후당(後唐).후진(後晉)의 세 왕조에 걸쳐 절도사를 역임했다. 송주(宋州:하남성 내)에서도 백성들로부터 한껏 착취한 조재례가 영흥(永興) 절도사로 영전, 전임하게 되자 송주의 백성들은 춤을 추며 기뻐했다. “그 놈이 떠나가게 되었다니 이젠 살았다. 마치 ‘눈에 박힌 못[眼中之釘]’이 빠진 것 같군.” 이 말이 전해지자 화가 난 조재례는 보복을 하기 위해 1년만 더 유임시켜 줄 것을 조정에 청원했다. 청원이 수용되자 그는 즉시 ‘못 빼기 돈[拔釘錢(발정전)]’이라 일컫고 1000푼씩 납부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미납자는 가차없이 투옥하거나 태형에 처했다. 이처럼 악랄한 수법으로 착취한 돈이 1년간에 자그마치 100만 관(貫)이 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