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은 모국어다 〈혼불〉을 지은 작가 최명희는 토박이말 또는 고장말을 애써 찾아 쓴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모국어는 우리 삶의 토양에서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품고 길러 정신의 꽃으로 피워주는 씨앗”이라고 말한다. 한국어를 단순히 의사를 소통하는 수단인 언어로 보기보다는 이 땅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씨앗’으로 본 것이다. 모국어라는 언어에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인간과 자연의 모습, 전통, 문화, 예술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은 작가였다. 그리하여 “유구한 우리나라의 기후와 풍토, 산천초목, 전통적인 생활 습관, 사회 제도, 촌락 구조, 역사, 세시풍속, 관혼상제, 통과의례, 그리고 주거 형태와 복장과 음식이며 가구·그릇·소리·노래·언어·빛깔·몸짓” 들을 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말하자면 우리 혼이 담긴 토박이말 또는 고장말의 아름다움을 전하고자 소설을 쓴 것이다. 이런 깨달음을 전하는 까닭은 “피폐한 현대인들의 떠돌이 정서에 한 점 본질적인 고향의 불빛을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떠돌이 정서’는 바로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 시대 한국인들이 지닌 불안정한 정서를 일컫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 문화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하여 한국인으로서 안정된 정서를 찾게 해 주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에게 모국어란 곧 방언이었고 전통과 자연과 인간을 합일시키는 매체였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쉬다와 놀다 ‘쉬다’는 사람의 목숨에서 ‘움직이다’와 짝을 이룬다. ‘쉬다’와 ’움직이다’가 번갈아 되풀이하며 사람 목숨을 이룬다. 엄마 뱃속에서는 ‘쉬다’와 ‘움직이다’의 되풀이가 아주 잦다가 태어나면 차차 늘어져서 예닐곱 살부터는 거의 하루에 한 차례씩 되풀이한다. 밤이면 쉬다가 낮이면 움직이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목숨이다. ‘쉬다’와 ‘움직이다’는 삶에서 맡은 몫도 짝을 이룬다. 쉬는 것이 없으면 움직일 수가 없고, 움직이는 것이 없으면 쉴 수가 없다. 잘 움직이려면 먼저 잘 쉬어야 하고, 잘 쉬려면 먼저 잘 움직여야 한다. 이것이 사람 목숨을 제대로 반듯하게 살리는 길이다. 목숨의 반쪽인 ‘움직이다’는 ‘놀다’와 ‘일하다’로 나뉜다. ‘놀다’는 목숨이 즐거움을 맛보려는 움직임이고, ‘일하다’는 목숨이 살아남으려는 움직임이다. ‘놀다’와 ‘일하다’는 ‘쉬다’와 ‘움직이다’처럼 처음부터 짝을 이루지 않았다. 엄마 뱃속에서는 움직임이 모두 ‘놀다’였다. 자연과 문화 환경 따라 다르지만 어디서나 예닐곱 살을 넘어서면서 ‘움직이다’는 ‘놀다’와 ‘일하다’로 갈라져 나간다. 그러면 ‘쉬다’는 ‘놀다’와도 짝이 되고 ‘일하다’와도 짝이 되어 놀다가도 쉬고 일하다가도 쉬게 된다. ‘놀다’와 ‘일하다’는 물론 움직임에서 맡은 몫도 짝을 이룬다. 일을 잘 하려면 먼저 잘 놀아야 하고, 놀기를 잘 하려면 먼저 일을 잘 해야 한다. ‘놀다’와 ‘일하다’가 가지런히 짝을 이루지 못하고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삶은 뒤틀어진다. 김수업/우리말대학원장
‘우거지붙이’ 말 ‘푸성귀를 다듬을 때에 골라 놓은 겉대’를 ‘우거지’라고 한다. 먹을 게 넘치는 요즘은 무나 배추의 우거지를 버리기도 하지만, 먹을거리가 모자라던 시절에는 더없이 좋은 식료품이었다. “긴 긴 겨울, 굶기를 밥 먹듯 하며 우거지국으로 가까스로 연명을 해 온 그들이었다.”(문순태, 〈타오르는 강〉) “어느 곳이나 식량 사정은 딱해. 우리 절에서도 쌀 몇 알을 넣은 우거지죽을 끓여 먹는 형편이니까.”(이병주, 〈지리산〉) “우거지찌개하고 신김치만 있으면 밥이 마냥 꿀맛 같은 대식가였고 ….”(박완서,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 이 ‘우거지’가 ‘국·찌개’를 끓이거나 ‘죽’을 쑤는 재료로 쓰이면서 ‘우거짓국’, ‘우거지찌개’, ‘우거지탕’, ‘우거지죽’이란 이름이 생겼는데, 국어사전에는 ‘우거지김치’ 정도만 올랐고 다른 음식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음식 재료는 대개 ‘국·탕·찌개·볶음’ 등의 재료가 되므로 관련된 말을 죄다 챙겨서 올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스파게티’나 ‘비프스테이크’ 같은 여러 외래 음식도 국어사전에 올리는 판에 ‘우거짓국, 우거지탕, 우거지죽, 우거지찌개, 우거지부침’ 같은 우리 일상 생활과 관련이 깊고, 많이 쓰이는 낱말들을 사전에 챙겨 올리지 않는 것은 문제다. 비슷한 말인 ‘시래기’의 경우, ‘시래깃국, 시래기나물, 시래기떡, 시래기죽, 시래기지짐이, 시래기찌개’들이 사전에 수록돼 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부럽다’의 방언형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는 “동네 사람들이 얼매나 불버라 하는지 아요?”에서처럼 형용사 ‘붋다'가 보인다. ‘불버라, 불버도’와 같이 쓰이는 이 말은 표준어 ‘부럽다’의 경남 방언이다. 〈한국방언자료집〉을 참고하여 정리해 보면, 경기도를 중심으로 ‘부럽다’가 쓰이고, 충청 방언과 전라 방언을 중심으로는 ‘불거도, 불거워도’처럼 ‘붉다’가 쓰이며, 경상 방언에서는 ‘불버도’와 같이 ‘붋다'가, 동사로는 ‘불버하다’가 쓰인다. 역사적으로 옛 문헌에서는 형용사 ‘븗다'와 ‘부럽다’가 두루 보인다. 이는 동사로 ‘블다’(羨)가 쓰이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형용사 ‘부럽다’는 동사 ‘블-’에 형용사를 만드는 파생접미사 ‘-업’이 연결되어 형용사가 된 것이다. 전라도 지역에서 쓰이는 형용사 ‘불겁다’는 ‘불거워도, 불거뵌다’와 같이 쓰이는데, 이는 ‘붉다’에 다시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업’이 연결되어 짜인 것이다. 경상도와 인접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불법다’는 ‘불버워도’와 같이 쓰이는데, 형용사 ‘붋다'에 다시 뒷가지 ‘-업’이 연결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결론적으로, 동사 ‘블-’에 형용사를 만드는 접미사 ‘-업’이 붙은 ‘부럽다’가 표준어로 쓰이고, 동시에 전라 방언에서는 ‘붉-’이 주된 기본형으로, 경상 방언에서는 ‘붋-’이 기본형으로 쓰인 것으로 이해된다. 우리말이 나누어지면서 지역에 따라 독특하게 쓰이는 고장말의 다양성과 상관성을 보여준다. 이태영/전북대교수·국어학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카테고리변경되었습니다 (2008-10-14 00:05)
단소리/쓴소리 아무래도 ‘고언’(苦言)을 하기보다는 ‘감언’(甘言)을 하기가 쉽고, ‘고언’을 듣기보다는 ‘감언’ 듣는 것이 좋다. 뜻으로는 ‘감언’이 좋을 듯하나 쓰임을 보면 ‘감언에 넘어가다’, ‘감언에 이끌리다’, ‘감언으로 꾀다’처럼 부정적으로 쓰이는 반면, ‘고언’은 그 반대다. “앞으로 동학이 어디로 나갈 것인가. …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소승 감히 고언(苦言)을 드리는 바이오.”(박경리, 〈토지〉) 이를 달리는 ‘단소리’ ‘쓴소리’로 쓴다. 여기서 ‘단소리’는 감언을 다듬은 말 같은데 〈표준국어대사전〉에 ‘단소리’는 오르지 않았고, ‘쓴소리’는 올랐으나 ‘고언의 북한어’로 풀이돼 있다. 그런데 최근 문헌이나 방송 쪽 자료를 보면 ‘감언’이나 ‘고언’보다 ‘단소리’와 ‘쓴소리’가 훨씬 자주 쓰이는 편이다. “… 단소리만 받아들이고 쓴소리는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모양이라고 ‘일침’을 놓은 뒤 ….”(〈한겨레〉) “… 시장은 단소리만 좋아하고 쓴소리 하는 의원들에겐 미운털을 박아놓고 저런답니다.”(명쾌한 외, 〈단소리 쓴소리〉) ‘단소리’와 ‘쓴소리’를 이처럼 자주 쓴다면 옹근 자격을 줘야 할 것이다. 파생어 ‘단소리하다’와 ‘쓴소리하다’도 마찬가지다. ‘듣기 좋게 꾸며 하는 말’인 ‘단소리’보다 ‘듣기에는 거슬리나 도움이 되는 말’인 ‘쓴소리’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하겠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떼부자 ‘좋은 부자 되기’ 같은 말을 한다. 돈이 최고인 사회에서 ‘부자’라고 누가 손가락질할 것도 아닌데, ‘좋은’이란 모자를 얹는 까닭은 뭔가? ‘청빈’에 견주면 냄새가 나기도 하나 ‘부자 아빠’ 같은 말에서는 그렇지도 않다. ‘부자’로 비롯된 말들로 딸부자·땅부자·책부자·돈부자 …들이 있다. 살림이 넉넉한 것을 ‘가멸다’고 하는데, ‘부자’에 걸맞은 토박이말은 아직 찾기 어렵다. 다만 하도 많이 써서 낱말처럼 굳어져 쓰이는 말이 몇 있다. 가진자·못가진자, 있는집·없는집, 있는놈·없는놈 …들이 그렇다. ‘자’(者)는 ‘이·놈’으로 바꿔 쓰기도 한다. “누구는 일본 사람이 하던 정미소를 물려받아 떼부자가 됐고, 술 배달꾼 누구는 양조장을 뺏어 벼락부자가 되고 ….”(조정래, 〈불놀이 외〉) “바로 이 불로소득으로 인한 떼부자의 탄생이 우리 사회의 ‘심리적 양극화’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ㅈ신문) 여기서 ‘떼부자’는 우리가 흔히 하고 듣는 말이지만 사전에는 없다. ‘떼부자’면 ‘재산이 아주 많은 부자’, 곧 ‘큰부자’란 뜻과 ‘투기 따위로 한꺼번에 큰돈을 번 여러 사람’을 싸잡아 일컫는 뜻으로 풀 수 있겠다. 벼락부자·졸부·폭부 따위도 갑자기 떼돈이 생긴 사람들이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언어 분류 우리말을 세계 여러 언어들과 견줄 때, 흔히 알타이 말겨레에 딸린다기도 하고, 교착어에 든다기도 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현재 지구상에서 쓰이는 수천 언어들은 똑같은 정도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어에 비해 더 비슷하거나 가까운 게 있어, 서로 가까운 것끼리 묶어 볼 수 있다. 말을 분류하는 기준에는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언어의 구조적 특징에 바탕을 두는 기준인데, 이를 유형론적 분류라 한다. 다음은 언어의 기원과 역사에 바탕을 두는 것인데, 이를 계통론적 나누기라고 한다. 언어의 유형론적 분류란 언어가 지니는 말소리, 낱말, 문장에 따라 같은 특징을 가진 언어들끼리 묶어서 나누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문장을 구성할 때 우리말처럼 목적어가 서술어 앞에 놓이는 언어들이 있는가 하면, 영어처럼 목적어가 서술어 뒤에 놓이는 언어들이 있다. 이처럼 부려쓰는 말 차례에 따라서도 세계 여러 언어들을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계통론적 분류란 그 언어의 뿌리가 어디에 있으며, 같은 뿌리에서 갈려 나온 언어에는 어떤 언어들이 있는지를 밝혀 나누는 방식이다. 이렇게 나누어 기원이 같은 언어들끼리 묶은 것을 말겨레(어족)라고 하는데, 흔히 알타이어족, 우랄어족, 인도유럽어족들이 그 보기다. 그렇다면 우리말은 알타이어족에 드는 언어일까? 그렇다고 알고 있는 이가 적잖은데, 아직은 단정 짓기 어려운 수준이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기쁘다’와 ‘즐겁다’ 국어사전에서 ‘기쁘다’를 찾으면 “마음에 즐거운 느낌이 나다.” ‘즐겁다’를 찾으면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 이렇다. 기쁘다와 즐겁다는 같은 뜻을 지녔다는 소리다. 같은 뜻이라면 무슨 까닭에 다른 낱말을 쓰겠는가? 둘 다 느낌을 뜻하는 말이다. 그냥 느낌일 뿐만 아니라 좋은 쪽의 느낌이다. 마음이, 기분이, 몸까지도 좋다는 느낌이라는 쪽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두 말은 느낌이 오는 뿌리에서 다르다. 좋다는 느낌의 뿌리가 마음 깊숙이 박혀서 몸으로 밀고 나오면 기쁜 것이다. 좋다는 느낌의 뿌리가 몸에 박혀서 마음으로 밀고 들어오면 즐거운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쁘다’는 느낌은 마음에서 오고 ‘즐겁다’는 느낌은 몸에서 온다. 일테면, 달고 향긋한 참외를 맛나게 먹으면 즐겁다. 눈으로 아름다운 가을 단풍을 보거나 좋은 영화를 보아도 즐겁다. 이런 즐거움들은 모두 입·눈·귀와 같은 몸이 먼저 좋고 나서 마음으로 좋음이 번져 들어온다. 한편, 전쟁에 나갔던 아들이 탈없이 집으로 돌아오면 어버이는 기쁘다. 몸져누우셨던 어버이가 깨끗이 나아 일어나시면 아들딸은 기쁘다. 이런 기쁨들은 어느 것이나 몸과는 상관없이 먼저 마음속에서 좋고 그런 다음 몸으로 좋음이 번져나간다. ‘기쁨’은 혼자 마음속에 간직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으나 ‘즐거움’은 홀로 가만히 감추고 있기 어렵다. 즐거운 것은 몸과 더불어 바깥으로 드러나기 마련이고 남들과 함께 나눠야 제격이다. 김수업/우리말교육대학원장
상일꾼·큰머슴 요즘 지방자치 단체장과 의회 의원을 뽑는 선거운동이 한창이다. 저마다 그 고을 살림을 맡을 일꾼 곧 머슴을 뽑아야 할 중요한 선거다. 일꾼 중에도 일을 능숙하게 잘하는 일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꾼이 있다. 예부터 일을 잘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여 새경이나 품삯을 달리 주었다. “일꾼 중에선 힘으로도 상일꾼이구 사람됨도 젤 진국이에요.”(박완서, <미망>) 여기서 ‘상일꾼’[상:닐:꾼]은 ‘일꾼 가운데 특별한 기술이 있거나 일을 아주 잘하는 일꾼’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상’(上)은 전날 머슴이나 일꾼을 ‘상·(중)·하’로 구분하던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비슷한 말로는 ‘상머슴’이 있다. 현행 국어사전에는 이런 뜻의 ‘상일꾼’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표기가 같고 뜻이 다른(동음이의어) ‘상일꾼’[상닐:꾼]이 수록돼 있는데, 그 뜻은 ‘별로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막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먹고 자고 꿍꿍 일하고, 자식새끼 만들고 할 줄밖에는 모르는 상일꾼(농부)였었다.”(채만식 <미스터 방>) 이 ‘상일꾼’의 ‘상’은 ‘상’(常)이어서 앞서 살펴본 ‘상일꾼’과는 다르다. 이와 같은 말은 ‘막일꾼·막노동꾼’이다. 실상은 어떨지 모르나 “일꾼 중의 상일꾼 ○○○”, “상일꾼·큰머슴 ○○○” 등을 적은 선거 벽보나 펼침막들을 보면 그래도 반가워진다. ‘큰머슴’ 역시 사전에는 없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언어의 가짓수 오늘날 세계에서 쓰이는 언어의 가짓수는 얼마나 될까? 언어학 책이나 백과사전을 살펴보면, 적게는 3천, 많게는 6천 언어로 들고 있어 제각각이다. 왜 이렇게 엄청난 숫자 차이가 날까? 그 까닭은 언어와 방언의 차이가 불분명한 데 있다. 방언이란 한 언어의 하위 부류로서 그 차이가 아무리 뚜렷하더라도 서로 뜻을 주고받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는 크지 않다. 그러나 영어와 우리말, 우리말과 일본말처럼 서로 다른 언어는 그 차이가 너무 커서 두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뜻을 주고받는 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방언과 언어를 구별하는 기준으로 흔히 의사소통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꼽는다. 말 차이가 나는 두 지역 사람이 만나 의사소통이 되면 그 두 지역 말은 한 언어의 방언이며,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별개의 언어가 된다. 이런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 때도 있다. 한 언어에 드는 방언이면서도 소통이 안 되는 때가 있고, 두 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른 자기 언어를 쓰면서도 소통이 되는 경우가 있다. 첫째 보기로는 중국어를 들 수 있다. 표준 중국어인 베이징 방언과 남쪽의 광둥 방언은 같은 중국말이면서도 서로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다. 둘째 보기로는 북유럽의 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언어를 들 수 있다. 독자적 특징을 가진 별개 언어들인데 이 세 나라 사람들은 서로 제나라 말을 쓰면서 자유롭게 의사를 통한다. 이런 사정으로 세계 언어의 가짓수를 정확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