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정신/맨흙 ‘맨’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다. ‘맨 꼭대기’, ‘맨 처음’처럼 명사를 꾸미는 구실, ‘이 방에는 맨 책뿐이다’, ‘동생은 맨 놀기만 한다’처럼 서술어를 꾸미는 구실이 있고, ‘맨땅·맨발·맨밥·맨주먹’처럼 몇몇 명사 앞에 붙어 새 낱말을 만드는 구실이 있다. 관형사 ‘맨’은 ‘가장·제일’의 뜻으로 쓰이고, 부사 ‘맨’은 ‘온통·모두 다’의 뜻으로 쓰인다. 앞가지(접두사) ‘맨’은 ‘다른 것이 없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의 뜻으로 쓰인다. 관형사와 부사로 쓰이는 ‘맨’은 뒤에 오는 낱말과 띄어 써야 하고, 앞가지로 쓰이는 ‘맨’은 뒤에 오는 낱말과 붙여 써야 한다. 앞가지 ‘맨’이 결합된 말 가운데 사전에 오르지 않은 낱말로 ‘맨정신’, ‘맨흙’이 있다. 맨흙과 비슷한 말로는 맨땅이 있다. “그건 술주정이 아니었어요. 맨정신으론 말할 수가 없어 잠시 술힘을 빌었을 뿐이에요.”(홍성원 〈육이오〉) “그 웃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웃음 뒤에 나타난 것은 맨정신의 얼굴이 아니었다.”(박경리 〈토지〉) “아스팔트가 끝난 길가 맨흙 위에 패어나간 타이어 자국이 남아 있었다.”(이원규 〈훈장과 굴레〉) ‘맨정신’은 ‘맑은 정신’, ‘맨흙’은 ‘다른 게 섞이거나 깔지 않은 흙’이다. 앞가지에는 ‘맨’ 말고도 ‘군’(군걱정·군불 …)’, ‘날’(날강도·날김치 …), ‘덧’(덧니·덧쓰다 …) 따위가 있는데, 큰사전들에는 200개 안팎이 수록돼 있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사라져가는 언어(1) 유네스코는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현재 6000여 언어가 21세기 말께는 그 절반 또는 90%까지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본다. 언어는 새로 생겨날 수도 있지만, 이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말과 지리·계통에서 이웃한 만주말도 당장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한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그 언어에 반영된 문화와 정신까지 사라져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류에게 지난 20세기는 획일성의 시대, 다양성 말살 시대였다.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 이어 소련과 중국 같은 강대국이 세워지면서 이들 나라에 속한 다양한 소수민족들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우세한 언어와 문화에 급격하게 동화되어 갔다. 이들 강대국의 언어문화 정책은 겉으로는 소수민족 언어를 유지·보호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거역할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해 자신들의 고유어를 잃어갔다. 얼마 전 러시아에서 만난 어느 소수민족 언어연구소 소장의 말은 되새겨볼 만하다. “국가가, 사냥하며 고유한 말을 쓰며 살아가는 우리를 이곳 도회지로 데려와 교육시키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하고, 나아가 나에게는 우리 민족의 언어·문화를 연구하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우리 민족과 문화, 언어는 곧 사라지게 되었다.” 인류 문화의 값진 유산인 언어가 사라져 가는 것을 우리는 보고만 있어야 할까? 그리고 과연 우리말은 괜찮을까?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정서적 의미 국어사전에는 ‘샘’의 뜻을 ‘물이 땅에서 솟아나는 곳, 또는 그 물’이라고 풀이한다. ‘샘’이 가지는 물리적 현상을 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전라 방언에서 쓰이는 ‘샘’의 고장말 ‘시암’을 쓴다면 이 ‘시암’의 의미는 쓰는 사람 따라 상당히 다른 정서적 의미를 갖게 된다. ‘집안이나 마을 어귀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이 일반적인 의미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쌀이나 채소를 씻거나 손빨래를 하며 물을 긷는 곳, 아낙네들이 모여 삶의 얘기를 나누는 곳, 겨울에 물 길러 갔다가 얼음에 미끄러져 다친 곳, 여름철 더위에 등목을 하던 곳’ 등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시암’이라는 방언에 녹아 있는 정감은 오랜 전통과 문화와 역사 속에서 다져진 정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시암’에 얽힌 개인의 추억과 경험에 따라서 방언 ‘시암’의 문화·정서적 의미는 아주 다양할 것이다. 그래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그 고장말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이는 ‘새미, 시얌, 새암, 삼, …’ 들로 말하는 고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주로 쓰는 말은 대체로 경험적으로 익힌 것들이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길든 말을 즐겨 쓰게 된다. 이럴 때, 표준어가 보여주는 물리·현상적 의미와 고장말의 체험·정서적 의미가 대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장말의 문화·정서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는 환경을 만나면 사람들은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글쓰기와 말하기를 어렵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태영/전북대 교수·국어학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카테고리변경되었습니다 (2008-10-14 00:05)
알타이말 세계지도를 보면 몽골고원 위쪽에 알타이산맥이 있고 알타이라는 땅이름도 여럿 있다. 몇 해 전 러시아연방에 속한 알타이공화국에 간 적이 있다. 알타이산맥 자락인 그곳에는 주로 알타이족이 살며 그들은 알타이말을 러시아말과 함께 쓴다. 그러나 사용 인구는 급격히 줄고 있다. 우리는 준비한 언어 조사표를 들고 그곳 제보자가 하는 말을 조사했다. 제보자는 낯선 곳에서 자기네 말을 연구하러 온 우리들을 무척 반가워했다. 한 시간쯤 조사가 진행되자 갑자기 물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것 중에서 몇 퍼센트나 한국말과 같습니까?” 우리는 대답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제보자는 상당히 같을 것이라 기대하고 물었기 때문이다. 다시 대답을 제촉하기에 “아직은 하나도 없는데요”라 하였더니 꽤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곳에서 쓰는 알타이말은 이른바 알타어어족 터키어파의 한 언어다. 그들은 어족 이름과 자기네 언어 이름이 같아 꽤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마치 알타이어족의 중심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알타이언어를 쓰는 민족의 발원지가 알타이산맥 부근이라는 말이 있지만 아직 근거가 없다. 어쩌면 알타이산맥과 알타이민족 사이에는 관련이 없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우리가 조사했던 그곳의 알타이말과 우리말의 관련성을 지금으로서는 말하기 어렵다. 더 많은 알타어언어들을 조사해 보아야 우리말의 뿌리를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외국어와 새말 새말이 만들어지는 환경은 한마디로 사회 변화에서 비롯된다. 최근 들어 바깥나라와 사람들이 자주 오가고 방송·인터넷의 발달로 여러 나라와 문화권 사이에 소통이 잦아졌다. 외국어를 익히고 쓰는 인구도 부쩍 늘었다. 이런 환경 변화에 따라 외국어에서 비롯된 새말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남은 생애를 관리해 주는 사람을 일컫는 ‘데스 코디네이터, 데스 컨설턴트’나 졸업한 뒤에도 직장을 구하거나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의지하면서 사는 젊은이들을 이르는 ‘트윅스터’(twixster)와 같이 외국에서 쓰는 말을 그대로 들여와 사용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트윅스터’는 그저 ‘어중이’ 정도에 해당한다. 한때 ‘웰빙’(참살이)이 유행하더니 ‘웰다잉, 웰엔딩’까지 쓰고 있는 것을 보는데, ‘데스 코디네이터’라면 이런 말들과 관련된 새 직종 명칭에 든다. 외국어와 우리말을 합쳐 말을 만드는 때도 있다. 쌀시장이 개방되면서 원산지, 생산 연도, 품종, 무게 등을 거짓으로 표시한 양곡 유통업자를 신고하여 보상금을 타 내는 ‘쌀파라치’(쌀+paparazzi)가 그런 보기다. 갈수록 외국어를 그대로 들여다 쓰는 것에 대한 감각이 무디어지고 있다. 음식점에서 완성된 음식을 구입하여 밖으로 가지고 나가 먹는 음식을 가리키는 ‘길먹거리’와 같이 순우리말로 된 새말들이 대접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
경제성 오래도록 전라 방언을 써 온 나이 든 분들은 ‘집에서’를 [집이서]로, ‘논에서’를 [논으서]로 소리 낸다. 또한 ‘하고’를 [허고]로, ‘하려면’을 [헐라먼, 힐라먼]으로 소리 낸다. 여기서 전라 사투리에서는 모음 [에] 대신 [으, 이]로, [아] 대신 [어]로 소리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모음은 높은 음으로 혀 앞에서 발음하고, [으] 모음은 높은 음으로 혀 가운데서 소리를 낸다. [어] 모음은 약간 높은 음으로 혀 가운데서 발음하기 때문에 낮은 음이면서 혀 가운데서 발음하는 [아] 모음보다 훨씬 소리 내기가 쉽다. 같은 환경에서 [으]를 가장 짧게 발음하고, [애, 아]를 가장 길게 소리 낸다. 높은 음인 [이, 우, 으]는 다른 모음들보다 소리가 짧다. 이처럼 토씨에 쓰이는 모음은 대체로 짧게 발음하는 모음을 사용하면서 발음을 짧게 하는 경향이 있다. ‘학교’를 [핵교]라 하고, ‘고기’를 [괴기]라고 소리 내는 것도 역시 발음을 쉽게 하고자 하는 방편이다. ‘형’을 [성]이라 하고, ‘기름’을 [지름]이라고 하는 것도 발음을 쉽게 하려고 바꾸어내는 발음이다. 자음 [ㅎ]은 목에서 나는 파열음인데, 이 소리를 마찰음 [ㅅ]으로 바꾸어 소리내기를 쉽게 하고 있다. 사투리에서 사용하는 발음을 해당 지역의 말투로 간단히 처리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 방언의 독특한 발음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고 경제적으로 변화한 언어 현상인 까닭이다. 이태영/전북대교수·국어학 ***** 윤영환님에 의해서 게시물 카테고리변경되었습니다 (2008-10-14 00:05)
사투리와 토박이말 ‘사투리’는 대중말(‘대중’은 ‘눈대중이 매섭다’ 하는 대중, 곧 ‘가늠’을 뜻하는 토박이말)에 맞선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사투리와 대중말이 싸잡혀 있다. 대중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국민이 막힘없이 주고받도록 규정에 맞추어 마련해놓은 말이고, 그 규정에서 벗어나는 우리말은 모두 사투리다. 그것에는 어느 고장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고, 어떤 사람이나 모둠에서만 쓰는 사투리도 있다. ‘토박이말’은 들온말(외래어)에 맞선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토박이말과 들온말이 싸잡혀 있다. 우리말에는 중국과 몽골, 일본과 서양에서 들온말이 있거니와 이것들을 뺀 나머지는 토박이말이고 이것이 우리말의 알짜요 노른자위다. ‘토박이말’에는 대중말과 사투리가 있고, ‘사투리’에는 토박이말과 들온말이 있다. ‘사투리’와 ‘토박이말’은 배웠다는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은 낱말이다. 그들은 굳이 ‘방언/지역어’와 ‘고유어/순수국어’라는 어려운 한자말을 꾸어다 쓴다. 따져보면 ‘사투리’나 ‘토박이말’은 살갑고 올바른 낱말이지만 ‘방언/지역어’나 ‘고유어/순수국어’는 어긋나고 엉성궂은 낱말이다. ‘사투리’나 ‘토박이말’은 우리 겨레의 삶에서 나고 자라 살갑게 우리 품에 안겨들지만 ‘방언/지역어’나 ‘고유어/순수국어’는 다른 겨레의 삶에서 나고 자라 엉성궂게 우리 품을 밀어낸다. ‘사투리’나 ‘토박이말’은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낱말이고, ‘방언/지역어’나 ‘고유어/순수국어’는 창피하고 부끄러운 낱말이다. 김수업/우리말대학원장
분루 눈물과 관련된 낱말로 사전에 오른 한자말들이 서른 가지가 넘는다. 이 가운데 눈물을 흘리는 이유나 종류와 관련된 말로 ‘감루(感淚), 별루(別淚), 이루(離淚), 수루(愁淚), 열루(熱淚), 원루(寃淚), 자루(慈淚), 체루(涕淚), 향루(鄕淚), 혈루(血淚), 회루(悔淚) 따위가 있다. 이런 갖가지 낱말 가운데 감루, 혈루 또는 피눈물, 체루 정도만 문헌에서 그 쓰임이 확인될 뿐 나머지 낱말들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두루 버려도 될 말들이다. 한편, 눈물과 관련된 낱말로, 자주 쓰이면서도 아직 국어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말로 ‘분루’(忿淚·憤淚)가 있다. “9회 2사 만루의 역전 기회를 살리지 못해 분루를 삼켰다.”(<한겨레>) “뚝발이가 머리를 흔들며 일어나 분루를 흘리는 꽃순일 휘어잡고는 … 바닥에 내리꽂았다.”(박하기, <완전한 만남>) “나는 그가 탄핵의 분루를 마시면서 하는 일이 왜 하필이면 대처일까 생각했다.”(민지네) 여기서 분루는 ‘분하여 흘리는 눈물’이란 뜻인데, 주로 ‘분루를 삼키다, 분루를 마시다, 분루를 흘리다’ 식으로 쓰인다. 이처럼 쓰임이 널리 확인되는 말은 출처나 조어 방식에 큰 문제가 없다면 적절히 대접할 필요가 있겠다. 월드컵 축구가 한창이다. 경기엔 승패가 있기 마련이다. 굳이 얽매일 일은 아니나, 땀 흘린 선수들이나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두루 이기고 짐에 따라 눈물을 삼키기도, 흘리기도 할 것이다. 한용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우리 대화 상황에는 반드시 사람이 등장한다. 이들을 문법에서는 인칭이라 한다. 말하는 이가 1인칭, 듣는 이가 2인칭, 이야기에 언급되는 이가 3인칭이다. 인칭이 대명사로 실현되면 인칭대명사다. 우리말의 1인칭 대명사는 ‘나’(단수)와 ‘우리’(복수)가 있다. 상대를 대접해서 말할 때는 ‘저’와 ‘저희’라는 낱말을 쓴다. 1인칭 복수 ‘우리’라는 말은 따져 보면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전철 타고 갈 테니, 너희들은 버스로 가거라”라는 문장의 ‘우리’에는 말을 듣는 상대방인 ‘너희’는 제외돼 있다. 그러나 “그러지 말고 우리 함께 전철로 갑시다”의 ‘우리’에는 말을 듣는 상대방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라는 대명사는 말하는 사람 쪽만 가리키기도 하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상대편까지 모두 포함하여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언어에 따라서는 이런 두 가지 의미를 구분하여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내기도 한다. 알타이언어 가운데 그런 언어가 흔히 있다. 만주말을 보면 1인칭 복수대명사가 [be]와 [muse] 둘이 있다. [be]는 말하는 사람 쪽만 가리키고, [muse]는 말을 듣는 상대편까지 포함하여 가리킨다. “meni gurun”은 상대편 나라에 대하여 “우리 나라”라는 뜻이고, “musei gurun”은 “우리 두 나라 함께”라는 뜻이다. 몽골 옛말에도 ‘ba’와 ‘bida’의 구분이 있었다. 이러한 알타이언어의 특징이 우리말에는 없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언어학
청소년의 새말 20여 년 전만 해도 유행어를 만들어 내는 이들은 주로 대학생들이었다. ‘바보’(바라볼수록 보고 싶은 사람), ‘옥떨메’(옥상에서 떨어진 메주 덩어리) 등의 재미있는 말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유행했다. 인터넷이 의사소통과 문화 확산의 주된 매체로 자리잡으면서 새말을 만들어 쓰는 이들의 나이대가 낮아지고 전파 속도도 빨라졌다. 이들이 새말을 만들어 쓰는 이유로는, 크게 시간 제약, 공간 제약, 집단의식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빨리 글을 쓰려고 이어 적고(머시따), 줄여 적고(셤), 단어나 음절을 숫자로 대신한다(쪽8리다). 짧은 글에 감정을 나타내고자 자음·모음 등을 교체하고(그리구), 문장부호를 겹쳐 쓰며(!!!), 그림말을 사용한다(^^;). 이런 말들은 또래끼리 소통하는 곁말(은어)로 자리잡았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문화가 다른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새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소통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이 직접적인 대화보다는 인터넷이나 이동통신을 통한 의사소통을 선호하고, 기성세대는 이들과 대화할 여유가 없으므로 세대 단절이 깊어진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새말 만들기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기발한 새말을 통해 청소년들의 창의적인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무조건 쓰지 말라고 청소년들을 다그칠 것이 아니라 학습 공간, 공적인 장소, 어른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바른 말을 쓸 수 있는 분별력을 기르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다. 김한샘/국립국어원 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