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日千里(일일천리) 一(한 일) 日(해 일) 千(일천 천) 里(마을 리) 후한서(後漢書) 왕윤(王允)전의 이야기다. 왕윤은 동한(東漢)때의 인물로서, 헌제(獻帝) 재위 시기에 사도(司徒)를 지냈다. 그는 젊은 시절,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그와 동향(同鄕)인 곽림종(郭林宗)은 왕윤의 총명함과 학문하는 태도를 보고, 그를 칭찬하여 왕윤의 학문은 매우 빨리 발전하고 있는데(王生一日千里), 장차 제왕(帝王)을 보좌하여 대사(大事)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王佐才也). 라고 하였다. 왕윤이 사도로 재임하던 때에, 동탁(董卓)은 전권을 잡고 방탕하고 도리를 모르는 포악한 생활을 하였다. 왕윤은 겉으로는 동탁에게 순종하였지만, 몰래 여포(呂布)를 부추겨 미인계로써 동탁을 죽이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동탁의 부하인 이각(李 )과 곽사(郭 )에게 살해되고 말았으니, 그의 나이 56세. 一日千里 라는 말은 본시 사기(史記) 진본기(秦本紀)에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서주(西周)시대 주나라 목왕(穆王)의 휘하에 조보(造父)라는 마부가 있었는데, 그가 모는 말은 하루에 천리길을 달릴 수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一日千里 란 본시 말이 매우 빠르게 달리는 것을 뜻하였으나, 지금은 진보나 발전의 속도가 매우 빠름 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
貪小失大(탐소실대) 貪(탐할 탐) 小(작을 소) 失(잃을 실) 大(큰 대) 전국(戰國)시대, 진(秦)나라 혜왕(惠王)은 군대를 동원하여 촉(蜀)나라를 치려고 하였으나, 험한 산세에 길이 없어서 진군(進軍)이 불가능하였다. 이에 진혜왕은 탐욕스런 촉왕을 속이기 위해 실물 크기의 돌소(石牛) 다섯 개를 만들어, 돌소의 꼬리에 번쩍거리는 황금을 달아 놓고, 신우(神牛)가 황금의 변(便)을 본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식을 들은 촉왕이 신기한 돌소에 군침을 흘리자, 혜왕은 촉왕에게 돌소를 대가없이 주겠다고 하였다. 하지만 돌소를 차지하게 된 촉왕은 그것들을 운반해 올 방법이 없었다. 이에 진왕은 그에게 길을 만들어 돌소를 옮겨 가도록 제안했다. 재물에 눈먼 촉왕은 백성들을 동원하여 길을 만들었다. 그러나 길이 뚫리자 진나라의 20만대군은 일거에 촉나라를 멸하고 말았다. 훗날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제(北齊)의 유주(劉晝)는 유자신론(劉子新論) 탐애(貪愛)편에서 이 일을 촉왕의 멸국망신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작은 이익을 탐하다 큰 이익을 잃어버린 꼴이다(以貪小利失其大利也) 라고 하였다. 貪小失大란 작은 이익을 탐하여 큰 이익을 잃어버림 을 뜻한다. 이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겪는 여러 실수들 가운데 가장 지혜롭지 못한 것이기도 하다.
飮水思源(음수사원) 飮(마실 음) 水(물 수) 思(생각할 사) 源(근원 원) 남북조(南北朝)시대, 북주(北周)에 유신(庾信)이라는 문인(文人)이 있었다. 자(字)는 자산(子山)이었다. 서기 554년, 그는 양(梁)나라 원제(元帝) 소역(蕭繹)의 명을 받들어 서위(西魏)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장안(長安)에 도착하였다. 유신이 고국을 떠나와 있던 동안, 양나라는 서위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유신은 당시 문단(文壇)에서 그 명망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서위의 군주는 그를 강제로 장안에 잡아두고 대관(大官)으로 삼았다. 유신은 고향을 떠나 북조(北朝)에서 28년 동안 머무르며 고향을 매우 그리워하였다. 그는 자신의 이런 마음을 유자산집(庾子山集) 칠권의 징주곡(徵周曲)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일을 먹을 때는 그 열매를 맺은 나무를 생각하고(落其實者思其樹),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네(飮其流者懷其源). 飮水思源이란 음수지원(飮水知源) 이라고도 한다. 이는 근본을 잊지 않음을 비유한 말이다. 넓게는 국가와 민족, 가깝게는 부모와 고향. 일상 생활에서는 문자 그대로 식수원(食水源). 농사짓는 농부의 마음. 그리고 제일 중요한(?) 돈의 근원 등. 이렇듯 우리 주위에는 큰 혜택을 베풀기에 그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