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병 가엾어(동병상련) 오자서는 초나라 평왕의 태자 건의 태부(항상 태자의 곁에서 모시는 벼슬의 우두머리) 오사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태자소부(버금 태부) 비무기가 거짓으로 꾸며 바친 말로 아비 오사가 평왕에게 죽임을 당했다. 형님 상도 그로 말미암아 죽었다. 오자서는 앙갚음을 하려고 다짐하고 오나라로 도망하여 오나라 태자 광에게 벼슬살이했다. 오자서는 광의 힘을 빌려 앙갚음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그러려면 먼저 태자 광을 오나라 왕으로 해야 했다. 오자서는 자객 전제를 광에게 추천하여 오왕 요(광의 종제)를 죽이고 스스로 오왕이 되라고 꼬드겼다. 광은 오자서의 꾀대로 하고 왕이 되었다. 오왕 합려(재위 서기전 515~496)다. 오자서는 왕의 태부가 되었다. 그해 초나라에서 백비가 망명하여 왔다. 그도 비무기 때문에 아비가 죽임을 당했으므로 오자서를 믿고 온 것이다. 오자서는 진심으로 백비를 도와 오왕에게 추천하여 태부 벼슬을 주게 하여 함께 국정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역시 같은 태부 피리가 오자서에게 말했다. “어째서 백비를 그렇게 믿습니까. 백비는 인상이 좋지 않습니다.” “그와 나는 같은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오.” 오자서는 그렇게 말하고 하상가 글귀를 읊었는데, 그 글귀의 첫머리에 ‘같은병 가엾어’(동병상련)라는 말이 나온다. 각설하고, 오자서가 합려를 시켜 초나라를 공격했다. 오자서는 평왕의 무덤을 파서 300번 매질하여 앙갚음을 했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이리뒤척 저리뒤척(전전반측)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거나 괴로운 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자다가 저쪽으로 몸을 뒤척거리거나 이쪽으로 뒤척거리거나 하는 것을 ‘이리뒤척 저리뒤척’(전전반측)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주나라 초기부터 춘추시대 초기까지의 시 305편을 모은 유교 학자나 학파들의 경전인 <시경> ‘국풍 주남’편의 ‘관저’란에서 나왔다. 문왕과 왕비가 화합한 덕을 기리어 읊은 것인데, 군자와 숙녀가 혼인하여 화합하고 예의가 바르다는 이야기다. 이 시는 3절로 되어 있는데, 이 이야기와 관계가 있는 둘째와 셋째 절을 들어 보인다. “참치한 행채는/ 좌우에 이를 흘린다./ 요조한 숙녀는/ 오매에 이를 구한다.” ‘참치’는 길거나 짧거나 하여 가지런하지 않음, ‘행채’는 ‘조름나물’이라는 물풀이다. 그 조름나물의 긴 것과 짧은 것을 오른쪽으로 쥐거나 왼쪽으로 뜯거나 한다. 이것은 아름다운 아가씨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나타낸다. ‘요조’는 아름답다는 뜻, ‘숙녀’는 교양 기품이 있는 여성, ‘오매’는 ‘자나깨나’. “이를 구해도 얻지 못하고/ 오매에 사복한다./ 유하구나 유하구나/ 이리뒤척 저리뒤척” ‘사복’은 그리워 못 잊음, ‘유’는 아득히 멀다는 뜻, 그리움은 끝없이 이어져 잠들지 못하게 되어, 그래서 ‘이리뒤척 저리뒤척’ 한다는 말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안 빠뜨리는 하늘그물(천망회회 소이불루) “하늘그물이 넓어서 성기어도 빠뜨리지 않는다”(천망회회 소이불루)고 함은 <노자>에 있는 구절이다. “할 수 있는 일에 날래면 곧 망하며, 할 수 없는 일에 날래면 곧 산다. 이 둘은 어쩌면 이롭고 어쩌면 해롭나니, 하늘이 꺼리는 일, 누가 그 까닭을 알랴. 이를 가지고 성인들도 오히려 어려워한다. 하늘의 길은 다투지 않고도 잘 이기며, 말하지 않고도 잘 응하며, 부르지 않고도 스스로 오며, 느슨하면서도 잘 해낸다. ‘안 빠뜨리는 하늘그물’이다.” 노자는 “현상은 길의 한쪽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여긴 것이 ‘부드러움이 센 것을 이긴다’이다”라고 썼다. 여기에서 그는 현상으로서의 행위를 부정하여 무위(사람이 이루지 않은 자연 그대로)야말로 참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소극적인 유약(무르고 약함)이 적극적인 강강(굳세고 강함)을 이긴다는 논리가 이루어진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반 통념의 역(거꿀)이야말로 참이라고 하는 까닭이다. 노자의 말은 대강 다음과 같은 뜻이다. “끝까지 통크게 해내려고 하면 몸을 망치게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면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태도의 하나는 이롭고 하나는 해롭다. (중략) 느긋하게 늘어져 있는 것 같지만 충분히 계산되어 있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커서 눈이 성기어도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하늘옷 안 꿰매(천의무봉) 이 이야기는 <영괴록>에 있다. 어느 여름날 밤 곽한이 뜰에 나와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야릇한 향내와 함께 눈부시게 어여쁜 아름이(아름다운 이)가 하늘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섰다. 곽한이 놀라 그의 앞에 납작 엎드리니, 아름이는 웃음 띤 얼굴을 하며 “소녀는 하늘나라 직녀입니다. 서방님의 몸깔(인품)을 사모하여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했다. 곽한은 직녀와 꿈과 같은 하룻밤을 지샜다. 그미는 날이 새자, 구름을 타고 하늘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서 직녀가 밤마다 찾아와 곽한과 구름비(운우)의 정을 나누었다. 이윽고 칠석날 밤에는 직녀가 나타나지 않았다가 며칠 뒤에 또 나타났다. 곽이 “오랫동안 못 뵈었네요” 하니까, 직녀가 웃으며 말했다. “하늘의 하루는 이승의 닷새가 됩니다.” 곽이 무심코 직녀의 옷을 보니 꿰맨 데가 없었다. 까닭을 물은즉, “하늘옷(하늘 사람들이 입는 옷)은 바늘이나 실로 꿰매지 않습니다”라는 대답이었다. 그가 보고 있는데, 그미가 돌아가려 하자, 그 옷이 저절로 스르르 몸에 감기는 것이었다. 직녀의 옷에 꿰맨 데가 없다는 데에서 글이나 그림이 잔꾀가 없이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완전하다는 뜻으로 ‘하늘옷 안 꿰매’(천의무봉)라고 하게 되었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큰그릇 늦되기(대기만성) 큰 그릇은 만드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듯이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로, ‘큰그릇 늦되기’(대기만성)라는 말이 있다. <노자>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다. “훌륭한 사람은 도를 들으면 열심히 그것을 실행하려고 애쓴다. 보통사람은 도를 들으면 마음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잊은 듯도 하다. 하바리인 사람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하바리 무리가 웃음거리로 하지 않을 것 같으면 도라고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언>이라는 책에 ‘평평한 길은 울퉁불퉁하게 보인다. 매우 흰 빛은 거무튀튀하게 보인다. 넓은 덕은 어딘가 이지러진 것처럼 보인다. 씩씩한 덕은 가냘프게 보인다. 진실 자체는 여러 가지로 보인다. 큰 네모는 모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큰 그릇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큰 소리는 울림을 듣기 어렵다. 큰 모양은 잘 보이지 않는다.” ‘도’는 인식되지 않고 무엇이라고 일컬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도야말로 만물에 힘을 빌려주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노자의 ‘도’라는 것은 현상 세계의 상대적인 것을 성립시키는 근원적 원리 같은 것으로서, 이름 붙이기 어렵지만, 그냥 ‘도’라고 하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위 글 속에 “큰 그릇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큰그릇 늦되기’가 나온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천년의 만남(천재일우) “좀처럼 다시 만나기 어려운 기회”라는 뜻의 ‘천년의 만남’(천재일우·천세일시·천재일시)이라는 말이 있다. 출전은 동진 사람 원굉(328~376)의 <삼국명신서찬>이다. 이 책은 ‘위·촉·오’의 세 나라를 세운 명신(이름난 신하) 스무 사람에 관해서 ‘찬’을 만들어 서문을 붙인 것이다. ‘찬’이라 함은 “사람의 공로나 덕을 기려 칭찬하는, 한 귀 넉 자로 된 운문의 한 글체다. 그 서문 가운데 “아직 백락을 만나지 못하면,/ 곧, 천년에 한 천리마가 없다./ 그 만년의 한때는 삶의 길,/ 천년에 한 번 만남은 슬기의 모임이다”라는 글귀가 있다. ‘백락’이라 함은 주나라 사람으로, 이름있는 말의 감정가(가려내는 사람)였다. 그래서 뛰어난 인물을 보아 가려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백락’이라고 하게 되었다. ‘천리마’라는 것은 여기서는 뛰어난 인물을 말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백락 같은 감정가를 만나지 못하면 천년을 기다려도 뽑히지 못한다. 그와 같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 있어도 그를 알아보는 눈이 있는 임금을 만나지 못하면 천년이 지나도 한 사람의 충신도 있을 수 없다. 또 만년에 한 번의 기회라고 하는 것은 인생의 통칙이며, 천년에 한 번의 만남이란 것은 현명한 사람과 슬기 있는 사람의 경사스러운 만남이다. 그런 보기 드문 우연한 만남이 없으면 명신도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
지나침은 못미친꼴(과유불급) <논어> ‘선진편’에 자공이 물었다. “사와 상은 어느 쪽이 어집니까?” 공자 왈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또 묻기를 “그러면 사가 낫다는 말씀입니까?” 공자 왈 “지나침은 못 미침과 같다.” 자공은 공자의 제자. 본이름은 단목사. 자공이라 함은 그의 다른 이름이다. 사 또한 공자의 제자로서 본이름은 전손사. 다른 이름은 자장이라고 한다. 상 역시 공자의 제자. 본이름은 복상. 다른 이름은 자하다. 자공이 자장과 자하 가운데 어느 쪽이 뛰어났는지를 물은 것이다. 이 경우의 ‘어짊’은 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인품·인물의 낫고 못 미침을 물은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므로 공자가 자장은 지나치고 자하는 모자란다고 대답한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 공자는 자장에 관해서 “사는 벽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벽’이라고 함은 한쪽으로 치우친다는 말.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적극적이기는 하나 지나친 버릇이 있었을 것이다. 자하는 공자에게서 “그대, 군자의 선비가 되어라. 소인의 선비가 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듣고 있다. 좀 사삭스럽고 인물로서 그릇이 모자란 점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함부로 낫고 못함을 가리기 어렵다. “지나침은 못 미친 꼴”(과유불급)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함부로 평하기 어렵다는 가르침이다. 정재도/한말글연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