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27센트가 일으킨 기적 미국 필라델피아에는 3천 3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대형 탬플 침례교회와 탬플 대학, 탬플 병원, 탬플 주일학교가 있습니다. 이렇게 큰 탬플 재단이 설립되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노고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도 어린 꼬마아이의 애절한 이야기가 마음을 울립니다. 해티 와이얕이라는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작은 규모의 주일학교를 찾아가서 자기를 어떤 반에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리가 부족해 학생을 더 받을 수 없는 주일학교에서는 해티를 그냥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채 2 년이 지나지 않아서 해티 와이얕은 병을 앓다가 그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해티가 죽은 후에 마음을 뜨겁게 한 사실이 발견됐습니다. 해티가 베고 있던 베개 밑에서 작은 어린이용 지갑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지갑 속에는 동전 27센트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에 메모가 적혀 있었습니다. "예배당을 더 크게 지어서 많은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갈 수 있도록." 그 교회의 목사님이 이 사실을 교회 성도들에게 알렸을 때 그들은 모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예배당을 증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신문에도 이 이야기가 보도되자 도처에서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놓았습니다. 드디어 해티 소녀가 죽은 지 5 년 만에 27센트였던 돈이 25 만 달러라는 대단한 액수로 늘어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탬플 침례교회 예배당 증축은 물론 대학교, 병원 등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이여! 너의 형제들을 너의 가슴에 껴안으라. 동정이 있는 곳에 시의 평화가 있다. O brother mam! fold to thy heart thy brother. Where pofy dwells, the peace of God is there. (J. G. 휘티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나이팅게일의 기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병참장교가 치명상을 입고 후송되었습니다. 그가 신자임을 안 간호사는 목사를 불러오려고 했지만 그 장교는 한사코 거절을 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간호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속에 계시도록 제가 열심히 기도 드리죠." 이 말을 들은 장교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곧 피로와 싫증을 느껴 기도를 그만두게 될 거예요." "아니, 저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위해 16 년 동안 기도해 왔답니다." "16 년간을? 그렇다면 그 사람은 당신이 사랑하는 남자임에 틀림없겠죠?" "아닙니다. 그분은 제가 결코 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의 어머니는 독실한 백작 부인의 시녀였는데 지금으로부터 16 년 전, 백작 부인은 저의 어머니에게 방탕 생활을 하고 있는 자기의 아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답니다. 저도 그분을 위해 계속 기도했죠. 지난달 백작 부인에게서 온 편지에 의하면 그는 지금 군인이 되었다더군요." 열심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교는 이렇게 묻습니다. "그러면 당신 어머니의 이름이 아베타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럼 당신은 내가 16 년 동안 기도했던 찰스 씨군요."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이 간호사로부터 간호를 받도록 이곳으로 자신을 보낸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 후 그는 세례를 받았고 얼마 후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 또한 큰 위안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시간과 장소에 의하여 변하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은 자신의 처소이며, 스스로 지옥을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 (J. 밀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한 걸음 진보하기 위해서 1992 년 8월 25일 낮 12시 30분, 서울대학 병원에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감동의 집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물을 삼키며 비장한 각오로 집도하고 있는 교수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안구를 떼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고, 암세포가 퍼진 것으로 밝혀진 간, 폐, 심장 등의 장기들은 병리학 교실의 연구자료로 쓰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의과대학에 시체를 기증키로 했으니 불의의 사망시 대학병원쪽에 연락 바람'이라는 내용의 유언서를 신분증과 함께 가지고 다닌 서울대 이광호 교수는 이 날 오전 10시 급성 신장암으로 운명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뜻에 따라, 장남이 자리한 가운데, 후학들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있는 살신성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해부학 발전에 몸바쳐 오다 최근 의과대학 해부실험용 시체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어 실습에 차질을 빚게 되자 지난 1월 서울 지역 9개 의과대학 해부학과 교수 34 명과 함께 시신을 해부용으로 내놓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로 인한 이 날의 숭고한 집도는 허준이 '동의보감'에서 의술 발전을 위해 남긴 스승의 시신을 눈물과 함께 해부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참 삶의 고귀한 가치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기증 의사를 듣고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어긋날 뿐 아니라,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평생을 바쳐온 의학계의 발전에 죽어서까지 이바지하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막내따님의 너무나도 소박하고 애틋한 이야기가 마치 가까운 이웃에서 들리는 듯합니다만, 죽어서까지 남을 위하고, 죽어서까지 할 일을 하는 이들의 용기와 귀한 생각을 우리는 얼마나 닮아가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분들에게 영원히 갚기 힘든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구령 맞춰 하나 둘 미국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장선생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황색, 붉은색, 밤색 피부의 아이들을 차례로 세웠으며 흑인 아이들을 제일 끝에 세웠습니다. 줄을 다 세워 놓고 보니 만족스럽지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그들을 맨 앞에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해산시키고 다시 줄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다시 줄을 세우려고 아이들을 뒤섞어 놓았을 때 교장선생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이들을 한 줄로 세우기도 전에 교장선생님이 오시다니, 큰일이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게 된 선생님은 아이들을 뒤죽박죽 있는 그대로 세웠습니다. 이윽고 교장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섰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교장 선생님은 흡족한 표정으로 백인 아이며, 흑인 아이들의 머리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장 선생님이 다녀가신 후 선생님은 고개를 들고 아이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종전과 달리 선생님의 눈에 비친 아이들은 서로 다른 피부를 가진 아이들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사랑하는 여러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함께 어울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주머니 속의 어머니 얼굴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미국 해군은 필리핀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에 대한 마지막 대공격을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필리핀의 수도인 마닐라의 바다에는 해병대를 태운 미국 군함이 꾸역꾸역 모여들었습니다. 이윽고 마닐라 해안을 향해 지구가 흔들릴지도 모를 엄청난 규모의 함포 사격이 시작될 찰나였습니다. 문득 한 해병의 윗도리가 바다로 떨어졌습니다. "앗, 내 군복!" 이렇게 외치며 그 해병이 물로 뛰어들려 하자 소대장이 말렸습니다. "안 돼! 곧 함포 사격이 시작된단 말얏!" 그러나 그 해병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기어이 군복 윗도리를 건지려 했습니다. 이 하찮은 소동 때문에 함포 사격은 잠깐 중지됐습니다. 그리고 그 해병은 명령 볼복종 죄로 군법 회의에 넘겨져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관인 듀이 장군이 물었습니다. "함포 사격이 막 시작되려는 그 위험한 순간에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바다로 뛰어든 까닭은 무엇인가?" 그 해병은 제 군복 윗도리를 매만지며 대답했습니다. "이 옷을 건지기 위해 그랬습니다." "그 따위 군복 하나를 건지기 위해 군의 작전을 망치게 했단 말인가?" 듀이 장군의 성난 질문에 그 해병은 군복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대답했습니다. "이건 제 어머니의 사진입니다. 저는 이 사진을 제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뭐라고? 어머니 사진?" 놀란 듯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던 듀이 장군은 크게 감동받은 표정으로 해병에게 악수를 청하며, "어머니의 사진 때문에 제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군인이라면 나라를 위해서도 마땅히 목숨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죄를 묻지 않기로 했습니다. 다시 말해 특별 사면을 내린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그래서 아들은 목숨을 걸고 어머니의 사진을 건져냈던 것이며, 역시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하기 때문에 아들이 무죄로 석방되도록 하늘에서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로멘스는 우리를 실망시키고 우정도 실망시키지만 부모자식 관계는 다른 모든 관계보다 덜 시끄러우면서도 세상에서 여전히 잊을 수 없고 끊을 수 없는 가장 강력한 관계이다. (T. 라이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내가 바로 시어러예요 제2차세계대전 전, 남편과 나는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 외곽에 있는 월세 50 달러짜리 아파트에서 살았습니다. 집세는 남편 월급의 반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라디오도 살 수 없었으나 놀라우리만치 행복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밤에 남편은 내가 노마 시어러와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인기 있는 영화배우였는데 나하고 시어러하고 닮은 점은 사실상 머리모양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남편은 동네 옷가게 진열장에서 본 드레스 이야기를 나에게 했습니다. "그것을 당신한테 사줄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그 옷은 당신에게 잘 어울릴 거야. 노마 시어러에게 맞는 스타일이거든." 나는 남편의 말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입고 어딜 가겠어요. 그 옷은 우리에겐 너무 사치예요." 그러나 그 이후로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할 때마다 그 드레스를 훔쳐봤습니다. 파스텔 색조의 얇은 실크 드레스, 그것은 모든 여자가 꿈꾸는 아름답고 고전적인 완벽한 스타일의 드레스였습니다. 그것의 가격은 20 달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분필을 찾다가 20 달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한 해 전에 남편이 받아왔던 예상치 않은 보너스였습니다. 그때 우리는 이 돈을 잘 보관하기 위해 옷장 속의 분필통에 넣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보너스에 관해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남편이 퇴근하여 집에 왔을 때 우리는 번갈아 빠닥빠닥한 지폐를 만지면서 웃고 또 웃었습니다. 다음날 밤 남편이 큰 상자를 안고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그 상자를 침실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윽고 둘만의 시간이 되자 남편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드레스 한번 입어 봐." 나는 침실에 들어가서 새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들여다봤습니다. 나한테 꼭 맞았습니다. 정말 완벽했습니다. 내가 바로 노마 시어러였습니다. 행복이란 습성이다. 그것을 몸에 지니라. (허버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고난 속에 피는 사랑 영국의 위대한 탐험가 색클톤 경이 대원들과 탐험을 하던 중에 생긴 일입니다. 아주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던 그는 임시 대피소에서 밤을 지내게 됐습니다. 식량도 다 떨어졌기 때문에 그는 마지막 건빵 한 봉지씩을 대원들에게 나누어 줬습니다. 과연 안전지대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극도로 지친 대원들은 잠이 들었지만 색클론 경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한 대원이 벌떡 일어나는 게 아닙니까? 그는 다른 대원들이 잠들었는지 확인한 후 손을 뻗치더니 바로 옆에서 자고 있는 동료 대원의 건빵봉지를 훔쳐가는 것이었습니다.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색클톤 경은 기가 막혔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기의 생명까지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는데,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동료의 마지막 건빵을 훔치다니! 저런 사악한 인간이 있을까? 그런데 다음 순간 색클톤 경은 깜짝 놀랐습니다. 친구의 건빵을 훔친 대원은 훔쳐온 건빵 봉지를 열더니 자신의 건빵을 꺼내서 친구의 봉지에다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채운 봉지를 다시 살며시 동료 대원의 머리맡으로 옮겨 놓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생사의 고비를 헤매이는 그 경황에서 그것은 실로 위대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행복을 받고 행복을 주는 것은 항상 인간의 큰 기쁨이니라. 사랑하면서 둘이 서로 산 보람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천상의 기쁨이라 해야 할 지니라. (괴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관중과 포숙아를 아십니까? 중국 춘추시대에 우정이 깊은 관중과 포숙아라는 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양공이라는 임금의 신하였는데 이 양공은 매우 난폭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조카인 공손무지라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고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포숙아는 양공의 첫째 왕자인 소백을 따랐고 관중은 둘째 왕자 규를 따라 각각 다른 나라로 망명을 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공손무지가 죽게 되어 양공의 두 왕자가 다시 나라를 찾게 되었습니다. 두 왕자는 돌아오자마자 왕의 자리를 다투었는데 결국 첫째왕자인 소백이 왕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둘째왕자를 따른 관중은 잡히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때 포숙아는 왕에게 간곡히 탄원하여 목숨을 구하고 후에 재상에까지 올랐습니다. 어떤 사람이 관중에게 '어떻게 해서 높은 벼슬에 오르게 되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내 친구 포숙아의 덕분이었습니다. 예전에 내가 포숙아와 장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내가 남는 이익금을 좀 많이 가졌는데도 그는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심을 부린다고 말하지 않았으며, 내가 포숙아를 위해 한다는 일이 서툴러서 오히려 포숙아를 당황하게 한 적이 있었으나 그는 사람이 하는 일에는 실수가 있음을 알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전에 내가 세 번 벼슬에 올라 쫓겨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포숙아는 내가 운이 없음을 알고 내게 무능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 내가 싸움터에서 싸움에 졌을 때 도망친 일이 있었는데 그때도 포숙아는 나이 많으신 어머님 때문임을 알고 내게 비겁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낳아준 사람은 어버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내 친구 포숙아지요." 그때부터 마음으로 깊이 사귀는 친구의 사이를 관중과 포숙아의 우정이라 일컫고 있습니다. 한 알의 도토리가 뒷날 떡갈나무가 된다. An acom one day proves an oak. (R. 코베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이방인의 애국심 어네스트 토마스 베델은 1872 년 영국의 프린스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국의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 지에 근무하는 기자였는데 1904 년 노, 일 전쟁이 일어나자 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하여 조선에 오게 됐습니다. 베델은 조선이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이 어질고 순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 나라를 위해 무언가 뜻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자기가 맡은 취재가 끝났지만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조선에 머물게 됐습니다. 그는 먼저 이름을 조선식 이름인 '배설'로 고치고, 1905 년 한, 영 합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한편 70 평생을 오직 독립운동에 몸바쳐 온 양기탁은 일본의 감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신문을 낼 수 있는 외국인을 찾던 중 베델을 만나 신문을 만들 것을 권유했습니다. 베델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받아들여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하고, 양기탁은 총무 겸 주필을 맡았습니다. 대한일보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철저히 일본에 반대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글을 실음으로써 국민들의 가슴을 뛰게 했고 애국심을 일깨웠습니다. 또한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고종의 친서를 코리아 데일리 뉴스에 실어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여러 나라 원수들에게 전달하여 일본의 강압적 침략을 세계 만방에 알리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은 눈엣가시 같은 베델을 본국인 영국으로 쫓아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양기탁을 국채보상금 횡령이라는 올가미를 씌워 구속했습니다. 그러나 1908 년 베델도 일본인 배척을 선동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제도를 외국인이 방해했다는 이유로 영국 총영사관에 공소되어 재판을 받고 상하이에 3주 동안 묶여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 해 7월, 서울에 다시 돌아온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사장직을 같은 영국인 '말함'에게 맡기고 뒷전으로 물러나 독립운동을 하다 1909 년 9월에 머나먼 이국땅에서 병을 얻어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37세, 그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나는 죽되 대한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기를 원하노라." 그의 시신은 평소 그를 도운 장지연, 양기탁, 정대유, 박용규 등 독립지사들의 손에 의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훌륭하게 사는 자가 오래 사는 것이다. 우리들이 나이란 햇수와 날수와 시간수로 헤아려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바르타의 영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어린이를 위하여 5월이 되면 생각나는 선구자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린이 가슴에 사랑의 선물을 듬뿍 안겨 준 인자한 동화 속의 아저씨 같은 사람입니다.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요, 희망이며 이상이다"라고 주장하던 소파 선생은 1899 년 서울에서 미곡상을 경영하던 가난한 집의 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불우한 환경에도 명랑하고 의욕적이었던 그는 서울 미동초등학교와 선린상업학교에 들어가 가장 바람직한 독립운동을 위해선 어린이 육성운동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일생을 어린이를 위하여 바치겠다고 결심하고 소년 운동에 뛰어듭니다. 천도교 신자가 된 그는 '어린이는 하늘과 같다'고 믿고 장인인 손병희 선생과 당시 천도교 비밀신문인 '조선 독립신문'이 위기에 처하자 보성전문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비밀리 신문을 만들어 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본 형사대에 잡혀가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끌려온 급사 아이가 맞는 것을 보고 '저 아이 대신 나를 때려라'고 외쳤습니다. 또 동화연구가로도 유명했던 방정환 선생은 잡지 '어린이'에 '쫓겨가신 선생님'이란 소설을 발표, 일본 총독부 검열관에 걸려 옥살이를 했습니다. 옥살이 동안에도 옛날 이야기를 어떻게나 구수하게 했는지 간수들은 그가 풀려 나가는 것을 섭섭해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번은 천도교 대강당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동화 대회를 열었는데 오줌은 마렵고 이야기는 재미있고 해서 고무신을 벗어 오줌을 누는 아이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손깍지를 낄 수 없을 만큼 배가 나온 그가 단 위에 올라가 말라깽이 흉내를 내면, 마른 사람으로 보일 만큼 동작과 화술이 놀라워 아무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1921 년 동경에서 세계명작 동화집 '사랑의 선물'을 번역 출판하기도 한 그는 1923 년 세계 최초의 어린이 헌장이라고도 할 만한 '어린이날의 약속'이란 글을 발표한 뒤 희망을 위하여, 내일을 위하여, 다같이 어린이를 잘 키우자고 호소했습니다. 소설과 연극운동도 함께 펼친 소년 같은 아저씨 소파 방정환은 눈물어린 동요와 동시 수백 편을 남기고 민족의 광복을 맞기 전, 30 대 초반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 와서 우주에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또한 떠나간다고 해서 어떤 변화가 있었던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와서 떠나가는 것인가? 이 귀에 알아듣게 말해 준 사람이 있었던가? (르바이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