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게 그는 대단히 긴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지쳐 버렸고, 굶주려서 목이 바싹 말랐습니다. 사막을 오랜 동안 걸은 끝에 간신히 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습니다. 나무 그늘에서 쉬며, 열린 과일로 굶주림을 채우고 옆에 있는 물을 마시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행을 계속하기 위해 다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이 나무에 매우 감사하며, '나무여! 정말 고맙다. 나는 너에게 어떻게 답례를 하면 좋은가. 너의 과일이 달게 되도록 빌려 해도 너의 과일은 이미 충분히 달콤하다. 상쾌한 나무 그늘이 있도록 빌려 해도 너는 이미 그것을 갖고 있다. 너를 다시 더욱 자라게 하기 위해 충분한 물이 있도록 빌려 해도 물은 이미 충분히 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바랄 수 있는 것은 네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고, 그 열매가 많은 나무가 되어서 너처럼 아름답고 훌륭한 많은 나무로 자라도록 바랄 수밖에 없구나'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이 헤어지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바랄 때, 그 사람이 더욱 현명하게 되도록 바랐더라도 이미 충분히 현명하며, 많은 돈이 들어오도록 바랐더라도 이미 충분히 풍부하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착한 사람이 되라고 바랐더라도 이미 충분히 착한 사람이었을 때는, 당신은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도록'이라고 바라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바람인 것입니다. 갖지 않은 것을 애태우지 않고, 가지고 있는 것을 기뻐하는 자가 현명한 사람이다. He is a wise man who does not grieve for the things which he has not, but rejoices for those which he has. (에픽테투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비누거품에 이는 무지개를 사랑합니다 50여 년 동안 장님이었던 다알 교수에게 새롭게 펼쳐진 세계는 놀라움과 기쁨이었고 하얀 비누거품이 쏟아지는 무지개색의 빛나는 색채를 볼 수 있는 접시닦는 일조차 큰 기쁨이었습니다. '나에게는 한쪽 눈밖에는 없다. 그 한쪽 눈도 심한 상처 때문에 나는 왼쪽 눈 끝의 작은 틈으로 사물을 본다. 그러므로 책을 읽을 때에는 책에 얼굴을 깊숙이 박고 되도록 한쪽 눈을 왼쪽으로 쏠리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50 년 동안 거의 장님이었던 B. 다알의 '나는 보고 싶었다'라는 책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동무들과 돌차기를 하며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땅에 쳐진 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간 뒤에는 땅바닥을 기다시피 하면서 금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리고는 땅바닥의 금을 구석구석까지 머릿속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집에서 책을 읽는 것도 배웠으나 큰 활자의 책도 눈썹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해서 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시력이었으나 그녀는 미네소타 대학의 문학사와 콜롬비아 대학의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미네소타주의 한 가난한 마을 학교의 교사가 되었으며 마침내 오거스타나대학의 신문학과와 문학과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 12 년간 강의를 했고 라디오 방송도 맡아 했습니다. 1943 년 그녀가 52세 때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유명한 '마요진료소'에서 수술한 결과 지금까지보다 40배나 잘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그녀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녀에게는 접시 닦는 일까지도 기쁨이었습니다. '나는 접시 위에 부드러운 하얀 비누거품과 장난친다. 그 속에 손을 넣고 비누거품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을 떠올려 햇빛에 비치면 그 하나하나 속에 작은 무지개색의 빛나는 색채를 볼 수 있다'라고 그녀는 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저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음과 같이 맺고 있습니다. '사랑의 신 하느님이시여, 하늘에 계신 우리들의 아버지시여, 나는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적은 모래의 변위도 때가 되면 깊은 강줄기를 바꿀 수 있다. (M. 곤질레스 프리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영감이 흐르는 스와니 강 주옥같은 민요를 작곡했던 포스터는 아내 제니와의 이별, 남북전쟁의 혼란 속에서 음악의 샘이 말라 폭음으로 고통을 잊으려 했지만 마침내 알콜중독과 결핵, 가난으로 불행한 운명을 걷게 됩니다. 스와니 강, 켄터키 옛집, 금발의 제니, 오 수재너, 올드 블랙 조 등 주옥같은 미국의 민요들이 스티븐 포스터라는 젊은이에 의해 작곡되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의 가사도 모두 그가 작사했으며 그의 생애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아는 사람을 흔치 않습니다.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는 미국독립기념 50주년이 되는 1836 년 7월 4일 부유한 지방 명사의 일곱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지금 피츠버그 시 근교 벤 아베뉴라고 불리우는 언덕 위의 하얀 저택이었는데,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어 그가 네 살 되던 해에는 이 저택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일곱으로 줄어든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만 했는데, 어린 스티븐도 이곳 저곳으로 학교를 옮겨다녔습니다. 학교도 사람도 싫어진 고독한 소년에게 구원의 손길은 오로지 플룻으로 익히는 음악뿐이었습니다. 어느 악기점 주인으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오로지 영감을 통해 노래가 떠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스티븐의 운명을 결정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뉴욕의 토요신문인 '뉴밀러'지에 그의 가곡이 실린 것입니다. 그는 결심한 듯 학업을 포기하고 음악 그룹을 조직해서 작곡 발표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이때 오 수재너, 루이지애나 미인 같은 곡들이 나와 미국 각지로 번져갔습니다. 가곡 작곡가로 선망의 대상이 된 그는 유명한 '금발의 제니'로 노래 불러진 '제니'와 행복한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녀와의 결혼은 그의 앞날을 보랏빛으로 보이게 했습니다. 이윽고 외동딸 마리온이 태어납니다. 시골 경마, 넬리 브라이, 스와니 강 등 36 편의 주옥같은 노래가 결혼 후 2 년만에 쏟아져 나옵니다. 그런데도 포스터 내외는 결혼한지 3 년째부터 별거하다가 결국 헤어지게 됩니다. 포스터는 보다 넓은 활약의 터전을 찾아 뉴욕으로 떠나지만 때마침 남북전쟁이 터져 국토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고, 음악적 영감이 고갈되어 노래의 샘이 말라 버립니다.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하여 폭음하다 마침내는 알콜중독자가 되어 버립니다. 더구나 기온의 격차가 심한 뉴욕은 결핵성이 있는 그의 건강을 급속도로 악화시켰습니다. 포스터의 비참한 모습을 뉴욕의 어느 악기점 여점원이었던 파크 허스트 듀어 여사가 회고담으로 기록에 남겨 두었습니다. 어느 날 인생에 지친 듯한 사나이가 악기점에 들어왔습니다. 마침 손님도 뜸해서 한곳에 몰려 있던 점원들이 "스티븐도 말씀이 아니군." 하면서 그 사나이를 비웃었습니다. "스티븐이라니, 누구 말이죠?" 여사는 남자점원에게 물었습니다. "왜 거 있잖아, 스티븐 포스터, 하지만 이젠 떠돌이니까 가까이 가지 말아요." 그러나 포스터의 가곡을 애창해 왔고 기회가 있으면 그 작곡가를 만나고 싶어 했던 여사는 그 초라한 모습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힘주어 말했습니다. "아녜요! 저는 가까이 가겠어요. 저분은 다정하게 해드릴 사람이 필요할 거예요." 여사는 말을 건넸습니다. "포스터 선생님이신가요?" "그렇소이다.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의 산송장입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산송장이라고 하시면 안 됩니다. 누가 뭐래도 선생님을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정말 기뻐요." 포스터는 자기도 모르게 흘러내린 눈물을 옷소매로 훔쳤습니다. "용서하시오, 체면없이 눈물을 흘린 것을. 그렇게 다정하고 따뜻한 말을 들어 보기는 너무도 오랫동안 없었던 일이라서......" 그리고 그는 숙녀 앞에서 옷차림이 남루한 점을 신사답게 사과했습니다. "아녜요. 제가 뵙고 싶었던 건 선생님이세요. 옷차림이 아닙니다." 여사는 손을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한 달 후, 1864 년 1월 10일 오후, 알콜과 결핵으로 싸구려 여인숙에 누워서 새해를 보낸 포스터는 때가 밴 몸을 닦기 위해서 욕조로 갔습니다. 욕조에 물을 받고 옷을 벗으려는 순간 현기증이 일어나 머리를 욕조에 부딪히고 쓰러졌습니다. 낡은 유리욕조가 깨지면서 그의 경동맥을 끊고 말았습니다. 빈사 상태의 피투성이가 되어 병원으로 옮겼으나 사흘 후에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가 남긴 지갑에는 현금 몇 푼과 다음과 같은 글이 적힌 종이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Dear Friends, and gentle hearts: 다정한 친구, 그리고 따뜻한 마음' 작곡가는 자동차 운전수와 심부름하는 소년이 휘파람 불 수 있는 곡을 지어야 한다. (T. 비첨 경)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우리 며느리 만세! 서울 어느 산동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비탈길과 계단을 20분 정도 올라야만 골목 어귀에 들어설 수 있는 이 작은 산동네에 팔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가 있었습니다. 산동네의 살림이 대개 그렇듯이 빠듯하게 꾸려나가는 생활 속에서도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주민등록증을 갱신하러 동회에 가야만 했는데 평소 문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할 정도로 약했던 시어머니도 별 수 없이 길을 나서야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한 낮의 무더위를 피하려고 오전에 서둘러 동회를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동회에 도착했을 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병약한 노인을 모시고 이리저리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주민등록 갱신을 끝마쳤을 땐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고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를 정도 였습니다. 며느리는 힘겹게 몸을 추스리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비탈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시어머니의 더딘 걸음으로 인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더욱 멀게 느껴지고 더위도 한층 심하게 느껴졌을 법도 한데 며느리의 얼굴에선 짜증스러움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껴안듯이 부축하는 며느리가 안쓰러워 맘이 급해진 시어머니는 무리하게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더 오랜 시간을 길가에 앉아 쉬어야만 했습니다. 드디어 비탈길을 무사히 지나온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그보다 더 힘든 계단 앞에서 망연하게 위를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까지 묵묵하게 걷기만 하던 며느리가 별안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등을 시어머니 쪽으로 돌리고는 덥썩 시어머니를 업는 것이었습니다. 내내 며느리에게 미안했던 시어머니는 짐짓 싫은 듯 몸을 비틀며 내려오려고 애를 썼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씩씩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며느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따뜻한 목소리로 시어머니를 달랬습니다. "어머니, 제 어깨를 꽉 잡으세요. 그렇게 몸을 움직이시면 집에 가서도 안 내려 드릴 거예요." 그러나 시어머니는 열 손가락에 물든 지문을 찍고 난 잉크가 며느리의 옷에 묻을세라, 손을 도리어 번쩍 쳐들고 머리만 며느리 등에 꼭 기대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만세를 부르듯 양팔을 번쩍 들어올린 채 업힌 시어머니와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채 계단을 오르는 며느리를 바라보던 산 동네 주민들의 얼굴에는 서서히 미소가 퍼져 나갔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모두를 사랑한 아버지 인구가 2천 명쯤 되는 미국 노스코와 주의 멜렌데일, 가난한 농촌 마을인 이곳에서 로이 린드 박사는 유일한 의사였습니다. 마을의 젊은이와 아이들은 대부분 린드 박사의 손을 거쳐서 세상에 나왔을 정도로 그는 오랫동안 마을사람들의 건강을 돌봐왔습니다. 허름한 정비소 2층, 박사의 진료소는 새벽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얕은 잠을 자고 있으니 누가 아프면 곧 연락 주시오.'라는 뜻입니다. 또한 한겨울 눈사태 속에서도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제설차를 동원해 환자를 진찰하러 가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먼 곳이라도, 아무리 험한 곳이라도 환자가 있으면 즉시 달려가는 린드 박사, 그가 환자 침대 곁에 나타나기만 해도 벌써 병의 절반은 나은 것 같다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온 린드 박사가 70 회 생일을 맞았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독신이었기 때문에 생일을 축하해 줄 아내도 아이도 없었습니다. 이에 마을사람들은 마을 강당에 몰래 생일잔치를 마련했습니다. 밴드도 부르고 커다란 케이크도 준비하고...... 린드 박사는 영문을 모른 채 강당에 들렀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마을사람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강당에 모여 강당이 떠나갈 듯 큰 소리로 생일 축가를 불러준 것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린드 박사의 자손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꼬마 한 명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제가 박사님 아들이에요." 다시 그 옆에 앉아 있던 여인이 일어나 "제가 박사님 딸이에요."라고 하자 또 누군가가 "저도 박사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며 일어섰습니다. 마침내 강당 안의 모든 사람들이 린드 박사의 자식임을 자처하며 일어섰습니다. 린드 박사는 눈시울이 뜨거워져 할 말을 잃고 사랑스런 자식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름진 피부 밑에서도 우리들의 마음은 젊다. 인생은 우리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이다. (A. 랭)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고독과 더불어 사는 문학 고독한 천재 전혜린(1934~1956)은 평남 순천에서 8 남매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고등 문관 시험인 사법, 행정 양과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명석함을 이어받은 전혜린은 아버지의 열성적인 가르침도 있었지만 서너 살 때 벌써 국어책과 일어책을 전부 읽을 수 있었을 정도로 총명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지나친 기대는 전혜린의 강렬한 자아를 묶어 놓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이리저리 이사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고향이 없는 아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어린 시절의 각별한 정서가 깃든 곳은 신의주였습니다. ... 먼 데로의 그리움, 어디론지 미지의 곳으로 가고 싶은 충동은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 싹튼 것 같다. 그때부터 내 눈은 실향민의 눈, 슬픈 눈으로 된 것 같다... 전혜린은 경기여고를 거쳐 전국의 수재들이 모이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하는 모범생 코스를 순탄하게 밟았습니다. 그녀는 3 학년 때 아버지의 예속을 끊고 좀더 '자유로운 인식'을 위하여 독일 뮌헨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습니다. 뮌헨에서의 5 년 세월은 31 년이라는 그녀의 생으로 볼 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전공을 법철학에서 문학으로 바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딸도 않았습니다. 뮌헨에서 그녀는 카톨릭에 귀의했고 고독과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만끽했습니다. ... 내가 독일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고 무겁고 축축했다... 이러한 절실한 고독은 철저한 자기 인식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뮌헨은 전혜린에게 자유, 청춘, 예술, 사랑을 자각하게 하는 기회를 주었던 곳이기도 했습니다. ... 어디선지 모르게 그림이 그려지고, 조각을 쪼고 있고, 시가 쓰여지고 있는 곳,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이 젊었을 때 누구나 가질 청춘과 모험과 천재의 꿈을 일상사로 생활하고 있는 곳, 환상이 우선하는 곳 ... 뮌헨에서 전혜린은 다시 태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쳤습니다. 장녀로서 숙명 때문에 받아야 했던 아버지의 기대와 전공을 문학으로 바꾸기 위한 고독과 불면이 뒤범벅된 불안정한 생활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작품으로서의 욕망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욕구가 치열하면 할수록 승화된 작품의 잉태가 어려웠습니다. 결혼도 전혜린의 고독감을 메우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전혜린의 이러한 자신의 괴로움을 동생인 채린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정으로 나타냈습니다. ... 넓은 우주 속, 풀포기와 같이 수가 많고 똑같이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는 한 동생을 가졌고 사랑했고 존경했다. 너는 얼마나 나를 내포하며 나는 또 얼마나 너를 내포하는지! ... 중략 ... 아무에게도 뺏길 수 없는 나의 단 하나의 소유가 있다면 그것은 너다. 아니 너에 대한 나의 애정이다... (동생 채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완성되지 못한 자아전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전혜린은 1965 년 1월 10일, 서른 하나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습니다. 이혼 상태였던 그 무렵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설도 있고 수면제 과잉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좌절에 의한 죽음이나 수면제 과용에 의한 죽음도 아닌 듯합니다. 다만 그 즈음에 보여진 어휘들에서 죽음, 권태, 우울, 불안이 여기저기 느껴지는데 극단적인 성격을 가졌던 전혜린에게는 세상을 일상성으로 파악하기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관념의 벽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불행의 원인은 늘 나 자신에게 있다. 몸이 굽으면 그림자도 구부러진다. 어찌 그림자 구부러진 것을 탓할 수 있겠는가. 나 이외에는 아무도 나의 불행을 치료해 줄 사람은 없다. 불행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은 내 마음뿐이다. (파스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진심을 포장한 선물 그는 갑자기, 그리고 완전히 잠에게 깼습니다. 새벽 4시. 그의 아버지가 항상 먼저 일어나서 우유 짜는 것을 거들라고 깨우던 바로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15세, 아직 아버지와 함께 농장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크리스마스 며칠 전의 어느 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보, 나로서는 아침에 마틴을 깨우는 것이 너무나 가슴아픈 일이오. 그 애는 한참 자랄 나이니까 잠을 푹 자야 하거든. 내가 깨우러 갔을 때 그 애가 얼마나 곤하게 자고 있는지 당신은 모를 거요. 나 혼자서도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여보, 그건 안 될 말이에요. 게다가 그 애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자기 몫을 해야 할 나이지요." 어머니는 냉정하게 느껴질 만큼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정말이지 그 애를 깨우기 싫다니까." 이런 말들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눈뜨는 것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늑장을 부리지 말아야지.'라고 그는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 후로는 잠에서 덜 깨어나 비틀거리면서도 일어났습니다. 며칠 후 크리스마스 전날 밤, 그는 누워서 아버지에게 드릴 좀더 좋은 선물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도 여는 해처럼 읍내의 상점에 가서 아버지께 드릴 목도리를 하나 샀으나 웬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예수님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문득 아침 일찍 일어나 암소의 젖을 몽땅 짜놓고 헛간도 깨끗이 청소해 놓는 선물을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소년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는 깊이 잠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열 번도 더 깨어났습니다. 1시, 2시, 2시 30분...... 드디어 3시 15분 전에 소년의 옷을 갈아입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갔습니다. 커다란 별이 헛간 지붕 의로 낮게 걸려 있었습니다. 암소들은 졸린 눈으로 놀란 듯이 소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소년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젖을 짰습니다. 일이 즐거워서 콧노래가 나올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헛간도 깨끗이 치우고 깨끗이 씻은 양동이는 벽에 걸어 놓았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소년은 허둥지둥 어둠 속에서 옷을 벗고 잠자리로 들어갔습니다.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입니다. "마틴, 얘야 일어나야지. 크리스마스라서 안됐다만." "알았어요." 그는 졸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먼저 나가마."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문이 닫히자 그는 조그맣게 미소를 지었습니다. 불과 몇 분 후면 아버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놈 봤나......"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흐느끼는 듯한 묘한 웃음소리였습니다. "누가 속을 줄 알고?" 아버지는 침대 옆에 서서 그를 더듬으며 이불을 걷어냈습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아빠." 그는 아버지의 허리를 끌어안았습니다. 아버지의 팔이 그의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얘야, 고맙다. 아무도 이보다 더 흐뭇한 일은 못할 게다." "아, 아빠, 난 아빠가......."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다음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의 가슴은 넘치는 사랑으로 북받쳐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30 년 전에 돌아가셨지만 그는 지금도 새벽 4시면 일어났다가 다시 잠이 들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별들은 유난히 총총했습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크리스마스 새벽 동트기 전의 별들은 언제나 크고 밝게 보였습니다. 다른 어느 날의 별들보다도 확실히 더 크고 더 밝은 별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 별이 움직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어느 날 밤 그 별을 보았을 때 그렇게 느꼈던 것처럼. 아이들마저 다 떠난 지금 그는 오늘 아침 아내에게 어떤 선물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아내에게 자기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사랑이 살아있는 것은 오랜 옛날,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비로소 그것이 자기의 내면에 싹을 틔웠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일깨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이 축복받은 크리스마스 아침, 그는 아내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책상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보내는 사랑의 씨앗이 열매맺기를 바라면서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랑 당신에게......" 처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버이를 섬긴다면, 그 효도야말로 극진하게 될 것이다. (명신보감)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따끈따끈한 인정 전국을 구름처럼 떠도는 한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그는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자 하룻밤 묵어 가기 위해 한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마침 흉년이 들었던 때라 마을은 썰렁하고 무척 곤궁해 보였습니다. 나그네는 지친 발걸음을 쉬어 가기 위해 일부러 마을에서 가장 나아 보이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이리 오너라." 곧이어 하인인 듯한 사람이 나왔고 나그네는 곧 사랑채로 안내되었습니다. 그는 널찍한 방에 앉아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깨끗한 의복을 입은 한 선비가 나타나 미소를 띠우며 인사를 청했습니다. 나그네는 하룻밤 잠자리를 얻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터에 저녁까지 봐주려는 주인의 마음씨에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밥상은 주인과 겸상이었지만 아무 반찬도 없었습니다. 덩그러니 뚜껑이 덮인 놋주발 두 개만이 상 위에 놓여 나온 것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뜨거울 때 조금이라도 드십시오." 주인은 나그네에게 저녁 들기를 권유하며 수저를 들고 밥주발의 뚜껑을 열었습니다. 나그네도 감사의 말을 전한 뒤 주인이 하는 대로 따라 했습니다. 뚜껑을 연 나그네는 순간 두 눈이 뜨거워짐을 느꼈습니다. 놋그릇 속에는 뜨겁게 끓인 백비탕이 가득 담겨져 있었습니다. 때가 흉년인지라 나그네에게 대접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가난한 주인이 손님을 위해 맹물이나마 정성껏 끓여온 것입니다. 나그네는 주인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워 뜨거운 백비탕 한 그릇을 후후 불어가며 맛있게 배불리 먹었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해서 빈곤은 아니다. (미르티알리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2차대전 중에 열대 밀림 한복판에 있던 일본군의 포로수용소에는 늘 짙은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전기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지독한 무더위와 살인적인 배고픔 때문에 포로들의 얼굴에는 이미 검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식량이 거의 공급되지 않았던 수용소에서 쥐를 잡아먹었다면 큰 행운이라고 부러움을 받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수용소 안에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인으로 가방 깊숙한 곳에 양초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절친한 단 한 명의 포로에게 그 양초가 가장 위급할 때 중요한 식량이 될 것이라면서 이같은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친구에게도 꼭 나눠주리라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 고백을 들은 포로는 그 뒤부터 혹 친구가 양초를 혼자 다 먹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밤마다 가방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날 한 포로가 서글픈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어느새 크리스마스를 맞게 됐군. 내년 크리스마스는 집에서 보낼 수 있었으면...." 그러나 배고픔에 지친 포로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밤, 양초가 든 가방을 괴로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그 포로는 친구가 부시시 일어나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서 양초를 꺼내들자 친구가 자기 혼자만 양초를 먹으려는 줄 알고 놀라서 숨을 죽이고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양초를 꺼내 판자 위에 올려 놓고 숨겨 놓았던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오두막 안이 환해졌습니다. 포로들은 작고 약한 불빛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잠에서 깨어난 뒤 하나둘 촛불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촛불은 포로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은 없습니다." 촛불은 활활 타올라 점점 커져서 포로들의 마음까지 비추는 듯했습니다. "우리 내년 크리스마스는 반드시 집에서 보내자구." 누군가 또 이렇게 말하자 포로들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되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 뒤, 서로의 소원을 얘기했습니다. 그 날 그렇게 타오르는 촛불을 바라보던 포로들은 아무도 배가 고픈 줄을 몰랐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희망을 갖지만, 희망은 언제나 실망과 맞붙어 있는 것이어서 실망하게 되면 풀이 죽고 만다. 희망을 질러 나아가고, 잃지 않게 하는 것은 굳센 용기뿐이다. (양계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천상에서 부르는 응원가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풋볼을 몹시 좋아한 소년은 키가 작고 몸도 야위었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내내 풋볼 팀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늘 후보선수로 남아 한번도 경기에 참여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언젠가는 주전 선수로 경기장에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습을 했습니다. 소년이 소속된 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소년의 아버지는 어김없이 운동장으로 나와 관중석에서 소리를 지르며 열광적인 응원을 펼쳤습니다 대학에 들어간 소년은 또다시 풋볼팀에 지원했고 체격은 비록 왜소했지만 놀랄만한 투지를 높이 평가한 감독이 그를 합격시켰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4 년 동안 치뤄질 대학 풋볼 경기의 입장권을 한꺼번에 사버렸습니다. 그렇지만 소년은 4 년 동안 단 한 번도 시합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경기가 있을 때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관중석의 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마지막 시합이 있기 일 주일 전, 소년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고 고향에 다녀왔습니다. 토요일은 마지막 시합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경기는 소년이 속한 대학 팀이 뒤진 채로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감독 앞에 소년이 나타나 제발 자신을 출전시켜달라고 빌었습니다. 감독은 단 한 번의 경험조차 없는 선수를 내보낸다는 것이 이 상황에서는 무리라고 생각하여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이 너무나 열성적으로 매달렸고 마침 한 선수가 부상을 당하자 결국 소년을 운동장으로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소년이 경기장에 나간 뒤부터 전세는 바뀌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잘 뛰었고 공도 잘 잡았습니다. 마침내 동점이 되고 경기 시간 1분을 남겨놓았을 때 소년이 승리점을 올렸습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난 후 감독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소년이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장님이셨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경기를 보러 오셨지만 내가 뛰지 못한 것을 모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셨기 때문에 오늘 처음으로 제가 경기하는 모습을 하늘에서 보면서 아낌없는 성원을 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길은 가까운 데 있거늘 사람들은 먼 데서 찾는도다. 일은 쉬운 데 있거늘 사람들은 어려운 데서 찾는도다. 사람마다 부모를 부모로 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면 온 천하가 화평해지거늘. (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