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우리 두 사람의 교향곡 제정 러시아의 암담한 현실과 사랑하는 여인과의 이별... 차이코프스키는 화려한 박수갈채 속에서도 고독과 상상에 젖어 모스크바로 돌아가 마지막 교향곡 '비창'을 발표한 후 쓸쓸히 죽음을 맞았습니다. 1840 년생인 차이코프스키가 젊음을 맞이한 때는 제정러시아의 격동기였습니다. 광산기사의 아들로 자유롭게 자란 차이코프스키였지만 조국의 암담한 현실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가 눈물을 흘리며 들었다는 '안단테 칸타빌라'를 비롯해서 '비창'에 깔린 깊은 애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으로서만이 이해와 공감이 가능했습니다. 음악을 직업으로 택하기가 어렵던 당시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를 마치고 장래가 보장된 법무부의 관리가 되었지만 여기서 그는 생리적인 구토감을 갖게 하는 사회악만을 보게 됩니다. 아들의 우울을 간파한 아버지는 그에게 음악가의 길을 종용합니다. 안톤 루빈스타인이 경영하는 음악원에 들어가, 피아노와 작곡에 개미처럼 부지런했던 결과 25세 때 작곡 부분에서 은상을 획득하고 영예로운 졸업을 하였습니다. 루빈스타인의 동생인 리콜라이가 모스크바에서 경영하는 음악원에 작곡과 교수로 자리를 잡은 그는 터질 듯한 창작의욕을 불태우면서 부임 이듬해인 1866 년에 교향곡 제1번 '겨울날의 환상'을 발표했습니다.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그린 이 한 편은 교향곡 작곡가로서의 차이코프스키를 확고하게 하였습니다.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어쩌면 미스테리와도 같은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은 '나데즈다 폰 메크'입니다. 사유철도경영을 하던 남편이 막대한 재산을 남기고 죽자 사교계와 발을 끊고 그림수집과 독서와 음악에 묻혀 조용히 살고 있던 그녀에게 차이코프스키의 제자가 선생의 딱한 사정을 얘기하자 즉시 소품 시작을 의뢰 엄청난 작곡료를 보내 주었습니다. 36세였던 차이코프스키와 미망인은 편지로만 왕래하였는데 교향곡 제4번은 '우리 두 사람의 교향곡'이라고 차이코프스키가 그녀에게 고백한 바 있습니다. 이 곡은 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밝고 찬란하다는 평을 듣는 곡입니다. 그러다가 차이코프스키는 성격 차이로 마침내 결혼의 파탄을 맞게 되는데, 이때에도 폰 메크 부인은 구원의 손길로 매년 6,000루불을 보내 주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생명과 예술을 구해 준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조의 호수' 등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차이코프스키였지만 그녀는 끝내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13 년이 지난 후, 연금을 중단하겠다는 편지가 차이코프스키에게 날아들었습니다. 그는 편지라도 계속하기를 간청했지만 회답도 없이 부인과의 연계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고독과 상심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그에게 화려함과 박수갈채가 있었지만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시대의 아픔, 인류의 삶과 죽음, 투쟁과 종말을 그렸다는 마지막 교향곡 제6번 '비창'을 발표, 초연을 지휘한 후 열흘만에 콜레라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의 무덤에 폰 메크 부인이 찾아와 한없이 울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달과 같아서, 누구에게도 결코 보여 주지 않는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 (마크 트웨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낙서로 남긴 좌우명 시카고의 맥비키 극장으로부터 수많은 구경꾼들이 줄을 이어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최대의 마술사인 알렉산더 허만의 공연이 끝난 것이었습니다. 신문팔이 소년 하나가 덜덜 떨며 돌아가는 군중들에게 신문을 팔고 있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코트도 입지 못하고 돌아갈 집도 없는 소년은 결국 극장 뒤의 골목길에서 팔다 남은 신문을 베고 누웠습니다. 배가 고팠습니다. 추위로 인한 떨림도 멈춰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드러누운 채로 '그래 나도 마술사가 되어야지. 이제 두고봐라! 마술사로 이름을 떨치게 되면 이 극장에서 본때를 보여 주어야지.' 그는 이를 악물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그로부터 20 년, 그는 정확히 그 다짐을 실현했습니다. 출연을 끝내고 극장 뒤의 골목길에 가보니 벽에 자기 이름의 머릿글자가 그대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20 년 전 자신이 새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40 년간 세계를 순회하며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신비를 연출한 하워드 더스틴의 생애는 그가 무대 위에서 전개하는 쇼만큼이나 아찔하고 환상적이었습니다. 더스틴은 소년 시절에 부친에게 지독하게 매를 맞고 울면서 집을 뛰쳐나갔는데, 그 후 5 년간 소식이 없자 가족들은 당연히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떠돌이 부랑자 신세가 되어 무임승차, 걸식, 도둑질을 하면서 10번이나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윽고 경마의 기수가 되어, 17세 때에는 뉴욕으로 흘러들어갔습니다. 무일푼에 기댈 언덕도 없는 그는 어느 날 전도사의 설교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당신 속에도 정확히 한 사람의 인간이 숨어 있는 겁니다." 난생 처음 받은 감동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는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부랑자 출신의 그가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즉흥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의사 겸 전도사가 되기 위하여 펜실베니아 대학에 입학하기로 했습니다. 올버니에서 갈아탈 기차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다 시간이 남아 극장에 갔는데 마침 그곳에서 알렉산더 허만이 요술 묘기를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탈 기차는 생각하지도 않고 허만이 묵는 호텔로 찾아가 이웃방에 투숙하고 허만을 만나려고 했으나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열쇠구멍에 귀를 대보거나 복도를 서성거리기만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허만이 정거장으로 가자 그곳까지 쫓아가 결국 허만이 타고 가는 기차까지 따라 타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허만과 같이 공연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더스턴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었는데 유료관객 6백만명, 수입 2백만 달러라는 경이의 기록을 세우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더스틴의 성공 비결은 두 가지인데 그 중 하나는 자신의 개성을 관중들에게 팔아 넘기는 기술이며, 다른 하나는 관중을 마음속으로부터 깊이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관객들이 아주 좋아요. 관객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제일 좋지요. 근사한 인생이죠. 참 즐거워요!" 자신이 즐겁지 않으면 누구도 기쁘게 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진지한 사람들이란, 가끔 습관적으로 중대한 면이 없는 일이 중대한 면을 보는 사람들이다. (V. W. 브루크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영웅의 어머니 '내가 만약 내 아이들에게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너희들 각자가 한 인간으로서 또 하나의 개체로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대담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나가 달라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일하기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세상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성공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그들로 하여금 그 자리에 오르도록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아들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도록 한 릴리안 고오디 카터 여사입니다. 1898 년 리치랜드에서 태어난 그녀는 1917 년 19살의 어린 몸으로 전쟁터에서 종군 간호사로 일할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휴전조약이 체결되어 보람있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하지만 그녀는 간호사 면허증을 따기로 결정하고 프레인즈 주의 조그만 도시에서 간호사 양성을 위한 훈련의 지도 아래 간호교육을 받았고 제임스 얼 커터를 만나 결혼해 아들 지미를 낳습니다. 지미는 책을 즐겨 읽었는데 그의 독서 영역을 넓히는 데 있어서 어머니 릴리안의 영향은 매우 컸습니다. 릴리안이 아들 지미에게 준 가르침은 단순한 모성애가 아닌 그 이상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 생활방식에 따라 살았고 이 점이 아들 지미가 훗날 대통령이 되는데 아주 큰 도움을 주었던 것입니다. 릴리안은 주위사람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흑인들을 위한 치료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녀의 남편 얼도 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그녀를 적극 후원해 주곤 했습니다. 그러던 1953 년 얼이 복부암으로 숨지자 릴리안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지만, 7 년간 오오번대학의 기숙사에서 보모 생활을 하면서 삶의 보람을 되찾았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그녀는 블래이클리의 요양원을 2 년간 운영했으며 그 후에는 '평화봉사단'에 지원하여 인도에 건너가 일흔의 나이로 젊은이들도 견디기 힘든 간호보조사의 역할을 거뜬히 해냅니다. 한 어머니로서의 릴리안이 지미의 성공에 공헌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손녀딸을 보살피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신문에 한 흑인이 의회 의원에 출마한다고 하자 격려하는 의미로 소액의 수표를 보냈는데 그가 바로 앤드루 영이었고 그는 지미를 위해 흑인 유권자들에게 영향력을 과시했던 사람입니다. 마침내 지미는 미국의 제38 대 대통령이 되어 세계를 이끄는 인물이 됐습니다. 그녀가 인도에서 고향에 있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글이 써 있습니다. '내가 만약 내 아이들에게 한 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너희들 각자가 한 인간으로서 또 하나의 개체로서 커다란 의미를 갖는 인생의 목표를 향해 대담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나가 달리는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일하기 바란다. 그렇게 한다면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없다 할지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단다.' 가장 높은 지성은 산꼭대기와 같이 여명을 제일 먼저 알아차리고 반사시킨다. (머콜리 남작)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동궁의 진심 "흐흐흐흐......" 사람만 보면, 아니 혼자 방안에 있을 때도 동궁 양녕은 미친 사람처럼 히죽히죽 웃습니다. 태종 임금의 맏아들로서, 앞으로 임금 자리에 오를 왕세자가 미쳤다는 소문이 장안에 쫙 퍼졌습니다. 양녕은 그럴수록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낮에는 사냥을 하고, 밤에는 대궐 담을 뛰어넘어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오가는 사람을 때려눕히기 일쑤였습니다. 무술년, 이젠 양녕의 나이도 25세. 열한 살에 왕세자로 책봉된 후 오늘에 이르는 동안 그중 7, 8 년의 세월을 미치광이 노릇을 하고 지낸 것입니다. 몇 해 전의 일입니다. 양녕은 부왕 태종과 어머니 민비가 소곤거리면서 하는 이야기를 문밖에서 들었습니다. "참 아쉬운 일이오.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누가 아니랍니까. 충녕이 맏이였어야 할 것인데." 이 이야기는 양녕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는데 어느 날 세자를 가르치는 스승 이래가 찾아오자, "옳지, 지금부터다!" 하고 일부러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 개 짖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멍멍멍......" 양녕은 잇달아 짖어대며, 물어뜯을 듯이 이래의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는 듯도 하였지만 이래는 양녕의 이러한 행동을 태종에게 낱낱이 고했습니다. 양녕이 미친 짓을 하자 둘째 효녕은 은근히 자기에게 세자 책봉의 기회가 올 줄 알고 눈가림으로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양녕이 효녕의 방을 찾아가 그를 나무라며 자신이 미친짓을 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충녕을 세자로 책봉시키기 위한 것임을 말합니다. 이에 효녕도 크게 감동을 받아 깨닫고 그 날로 머리를 깎고 염불을 외우는 불제자가 되어 궁을 떠납니다. 결국 황희 판서와 개국공신 이직의 간언도 뿌리치고 태종이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양녕대군은 편안한 마음으로 광주로 귀양을 떠나고, 황희와 이직도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1418 년, 제4 대 임금에 오른 세종은 형님들의 마음을 헤아려 지성껏 모시며 가까이 두고자 하였으나 양녕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풍류객들과 사귀고, 아우 세종을 돕기 위해 암행어사의 자격으로 민정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시, 글씨, 활과 무술 등 다방면으로 뛰어난 양녕이었지만 순리를 알았기에 왕의 자리와 호화로운 생활을 과감히 버리고 평민과 더불어 시원한 삶을 살다간 그의 인생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슴 뭉클한 감동과 지혜를 줍니다. 소용없거나 미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 가장 좋다. 쓸데없게만 보이는 것도 그밖의 것들을 강화시켜 주고 뒷받침해 준다. (H. W. 롱펠로우)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진정한 스포츠 정신 1913 년 2월의 맑게 개인 오후, 영국 국민들은 뜻밖의 사건에 놀라 숨을 죽였습니다. 그것은 넬슨 제독이 트라팔카 해전에서 전사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극 대륙을 두 번째로 밟은 스코트 대위가 로스빙벽에서 대원 두 명과 함께 숨을 거둔 것입니다. 스코트 대위는 탐험선 테라 노바('새로운 대지'라는 의미) 호를 타고 남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남극권에 들어서자마자 재난이 시작됐습니다. 뱃전에 산더미 같은 파도가 밀어닥쳐 짐을 모두 바다에 내던졌으나 배 밑바닥으로 물이 계속 들어왔습니다. 엔진은 고장을 일으켰고, 펌프는 작동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재난의 제1보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건강한 말을 몇 마리 데리고 갔으나 갈라진 얼음장에서 허우적거리기 일쑤여서 사살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개들도 미친 듯이 날뛰며 빙하의 가장자리에서 뛰어내려 결국 스코트 대위와 대원 네 명이 천 파운드가 넘는 장비를 실은 썰매를 끌며 남극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해발 9천 피트의 희박한 공기에 호흡곤란을 느끼면서 생물이라고는 살지 않는 극지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14일째가 돼서야 비로소 남극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한 개의 막대기 끝에 갈가리 찢겨진 헝겊 한 장이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국기다.! 노르웨이 국기다.!" 그들의 실망과 슬픔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겨우 5주일 전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센이 한 발 먼저 남극점을 밟고 돌아간 것이 아닙니까. 일행은 크게 낙심한 끝에 귀로에 올랐습니다. 정면으로 불어닥치는 찬바람으로 눈과 코는 얼어붙었고, 수염에는 고드름이 매달렸습니다. 맨 처음 하사관인 에번스가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 죽어갔습니다. 다음에는 오츠 대위가 병이 났습니다. 대위는 발에 동상이 걸려 걸을 수가 없게 되자, 자신이 일행의 발을 묶고 있음을 깨닫고 어느날 밤 무서운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내 목숨을 버려 동료를 살리자'는 생각으로 그 길을 택한 것이었습니다. 스코트 대위와 나머지 두 명은 옮겨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길을 재촉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인간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코도 손가락도 다리도 꽁꽁 얼어 금방이라도 꺾어질 듯했습니다. 드디어 1912 년 2월 19일 남극을 뒤로한 지 50일만에 일행은 최후의 텐트를 쳤습니다. 한 사람 앞에 두 컵 정도의 연료와 이틀 분의 식량이 남아 있었습니다. "됐다. 이젠 살았다"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식량을 묻어둔 곳까지는 18km밖에 남지 않아 단걸음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돌연 얼어붙은 대지 끝에서 맹렬한 눈보라가 몰려왔습니다. 스코트 대위 일행은 11일 동안 텐트 속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습니다. 식량은 떨어진 지 이미 오래였고 이젠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눈보라는 더욱 맹렬히 몰아쳤습니다. 그들에게는 좋은 기분으로 잠들면서 최후를 맞기 위한 아편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아무도 아편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좋아, 정면으로 죽음과 대결해 보자! 영국인 특유의 스포츠 정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스코트 대위는 죽기 직전 유명한 작가인 제임스 벨리 경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그때의 극심한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식량은 이제 동이 났고, 죽음은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제발 안심해 주십시오, 이 텐트 안에서는 힘찬 노래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8개월 뒤, 반짝거리는 남극의 빙원 위를 태양이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을 때 스코트 일행 세 명의 동사체가 발견됐습니다. 스키 두 개를 교차시켜 급히 만든 십자가 아래 그들은 조용히 묻혔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참을 실천하는 사람 도산 안창호는 1878 년 대동강변에서 태어나 1938 년 병원에서 죽음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친 사람입니다. 그는 국민의 마음과 생각을 높이는 데 앞장섰으며 흥사단을 조직하여 힘을 길렀고, 임시정부에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도산은 '참'의 사람이었습니다. '아아,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로구나. 내 평생에 다시는 거짓말을 아니하리라.' 도산은 스스로 이렇게 탄식할 정도로 거짓을 미워했으며 이 거짓이 우리나라를 망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산은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2천만이 다같이 사랑하기를 공부하자.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민족이 되자. 오직 사랑하자.' 그의 동지애는 유별하였습니다. 동지에 대해서는 물질과 사랑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 반신불수가 된 동지를 위해 운하 공사장에서 수개월 동안 인부로 일하여 약값과 치료비를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한 웃음을 좋아했습니다. 저마다 좋은 마음으로 웃는 얼굴을 가지는 것이 그가 그리는 새 민족의 모습이었습니다. 도산은 '겸허'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았으며 오만한 마음이나 권위주의적인 태도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언변과 통솔력과 덕성이 뛰어난 인격자였지만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늘 뒤에서 묵묵히 직분을 다하고 명예와 공은 남에게 돌리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그는 1919 년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노동총판으로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대통령 대리 후보자로 추천되었습니다. 도산은 그 자리를 끝내 사양했지만 결국 대통령 대리로 선정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잠시라도 대통령 대리의 명목을 띠고는 몸이 떨려서 시무할 수가 없소.' 스스로를 능력이 없고 인격이 모자라는 사람으로 격하하며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 송구스럽고 민망하여 몸이 떨려 일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이 내일에의 신념을 갖지 않으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There can be no progress if people have no faith in tomorrow. (J. F. 케네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우리들 마음가짐의 바탕 끈기는 마음의 상태이므로 그것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마음가짐과 마찬가지로 끈기도 분명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품고 있던 목표나 목적이 조그만 장애나 불행에 부딪치면 금방 체념하곤 합니다. 그래서 나타난 장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목적달성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드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끈기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공에 이르는 모든 요소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이 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끈기가 없는 것이 실패의 주된 요인이 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같은 사실은 빛나는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포오드는 끈기를 제외하면 아무런 자랑할 만한 특징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미시건의 그린필드에서 태어난 포오드는 어려서부터 기계 만지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오직 자동차의 설계에 힘을 기울여 결국은 가솔린으로 달리는 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후에도 계속 자동차의 개량에 전념하여 포오드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여 값싸고 성능 좋은 T형 자동차를 생산해 냈습니다. 마침내 그는 대량생산으로 원가절감이 가능해지자 노동자의 임금을 올려 주고 노무비를 절감하는 바람직한 경영체제를 확립시켰습니다. 에디슨은 학교를 석 달밖에 다니지 않았지만 세계 최대의 발명왕이 됐습니다. 그는 끈기있게 연구에 매달려 축음기와 전화기, 전등과 전지 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포오드와 에디슨의 성공을 가져오게 한 비결이 끈기라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끈기를 형성시켜 나갈 수 있을까요? 끈기는 마음의 상태이므로 그것을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모든 마음가짐과 마찬가지로 끈기도 분명한 기초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초를 이루는 몇 가지 요소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우리도 끈기를 양성화시켜 나갈 수 있습니다. 다음에서 몇 가지 요소를 제시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먼저 자기가 무엇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끈기를 기르는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하고 강한 동기가 있어야만 많은 어려움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뚜렷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끊임없이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이때에는 자신의 계획이 건실하고 조직적이어야 하며 경험과 관찰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셋째,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강한 의지력으로 좋은 습관을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넷째,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끈기를 기르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참 가슴 찡한 이야기 - 황지니 뱁새들은 황새를 몰라본다 정명공주 집에 새로 며느리를 맞는 큰 잔치가 있었습니다. 정명공주는 상감 인조에게 있어서는 고모가 되는 터라 특히 잔치를 성대하게 하기 위하여 중신들의 부인에게 참여하라는 명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정명공주 집에는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중신들의 부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차림새의 호화스러움은 가히 백화난만한 것이었습니다. 한데 그 와중에 보잘 것 없는 가마가 들어오더니 한 노파가 내렸습니다. 그 행색은 수수하기 이를 데 없어 여느 평민집 늙은이 같았습니다. "저런 늙은이가 여기에는 왜 왔을까?" "아마 어느 댁의 심부름 온 하인이겠지요." 성장한 부인들은 각기 한마디씩 하면서 비웃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정명공주는 황망히 내려가 노부인을 정중하게 맞으며 융숭하게 대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공주마마께서는 저 늙은이를 꽤나 극진히도 대하시는군요." "인자하셔서 그러시겠지만 좀 과한 것 같군요. 보잘것없는 하인배를 저토록 우대하시다니......." 얼마 후 노파는 돌아가겠노라며 일어섰습니다. 정명공주가 만류하였으나 노파는 극구 사양하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은 어서 돌아가 저녁을 지어야 합니다. 집의 대감은 약원도 제조로 일찍 대궐에 들어갔으며 이조판서인 큰아들은 정사가 많다 하여 대궐에 들어갔습니다. 둘째는 승지로 마침 입직하는 날입니다. 그러니 제가 가서 저녁을 준비하여 각기 보내 주어야만 한답니다." 그제서야 이 노파가 바로 재상 이정귀의 부인임을 안 손님들은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공손한 사람은 남을 모욕하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에게서 빼앗지 않는다. (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