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정일근 - 4월, 벚꽃나무 아래서의 첫사랑
막차가 끝나기 전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곳에는 하마 분분한 낙화 끝나고 지는 꽃잎 꽃잎 사이 착하고 어린 새 잎들 눈뜨고 있겠지요 바다가 보이는 교정 4월 나무에 기대어 낮은 휘파람 불며 그리움의 시편들을 날려보내던 추억의 그림자가 그곳에 남아 있습니까 작은 바람 한 줌에도 온몸으로 대답하던 새 잎들처럼 나는 참으로 푸르게 시의 길을 걸어 그대 마을로 가고 싶었습니다 날이 저물면 바다로 향해 난 길 걸어 돌아가던 옛집 진해에는 따뜻한 저녁 불빛 돋아나고 옛 친구들은 잘 익은 술내음으로 남아 있겠지요 4월입니다 막차가 끝나기 전에 길이 끝나기 전에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 시 '4월 엽서'전문
첫사랑! 그 말을 입안에 넣고 추억처럼 중얼거린다. 불혹의 내 입 속에서 4월 진해를 뒤덮던 벚꽃이 다시 씹힌다. 그 기억 지워져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불처럼 뜨거웠던 꽃잎들과 얼음처럼 차가웠던 낙엽들의 기억이 입 속에 함께 스쳐 지나간다. 진해. 그렇다. 그 도시에서 내 첫사랑의 시작과 끝이 있었다. 내 가슴 깊숙한 곳에 숨어 잠자고 있었구나, 사랑이여 첫사랑이여. 아득해하며 눈을 감으니 흰 꽃잎들이 화사하게 눈처럼 날린다. 내게 진해의 벚꽃은 4월에 내리는 눈과 같았다. 해군도시인 남쪽의 진해는 겨울이 와도 눈과 얼음이 귀한 부동항의 항구도시. 그 도시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낸 벚꽃나무들은 4월이면 일시에 피었다가는 바람이 불면 눈 같은 꽃잎을 뿌려주었다. 분분설처럼 날리던 4월의 눈나라를 나는 잊지 못한다. 꽃잎이 눈처럼 날리던 그 4월에 내 첫사랑은 시작됐다. 일본의 소설가 가오바타 야스날리는 '터널을 지나자 눈의 나라였다'고 눈나라,'설국'의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진해는 4월이 오면 비로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고 나는 내 첫사랑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그대들도 진해에서 열리는 4월의 축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벚꽃잔치인 군항제. 도시에 심어진 7만 그루가 넘는 벚꽃나무들이 일시에 꽃을 피우고 도시의 축제는 화려하게 막이 오른다. 그 축제의 전야제는 유년의 내 몸과 마음을 후끈 달아오르게 만드는 하나의 의식이었다. 분수 탑 로터리. 우리 나라에서도 귀했던 8거리인 그 로터리에서 브라스 밴드인 해군 군악대의 경쾌 한 행진곡 연주와 장총을 들고서도 한치의 오차 없이 돌아가는 시계추 같은 의장대의 멋진 사열솜씨를 보면서 우리는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어 고적대 제복을 입은 여중생들의 멋진 퍼레이드와 고운 한복을 차려입은 여고생들의 강강 수월래로 봄밤이 서서히 어두워져 오면, 한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엔 불꽃놀이의 요란한 폭죽이 터지고, 땅에는 아이들이 축등 행렬이 시작됐다.
궁핍의 60년대, 흑백 TV도 귀했던 시절. 4월이 오면 오색 찬란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요란한 폭죽 소리가 들리고 잠시후 하늘에는 형형색색의 꽃비가 세상으로 내렸다. 어린 내 마음은 그 폭죽 소리를 따라 하늘 끝까지 솟구쳤다. 불꽃이 만드는 무지개를 타고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곤 했다. 축등 행렬은 언제나 어린 우리들의 몫이었다. 축제의 전야제, 사각으로 만든 축등에 촛불을 밝히고 축제의 광장인 8거리를 중심축으로 방사선으로 퍼져가는 쭉쭉 뻗은 도시의 길을 따라 걸어가며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밤이 주는 흥겨움에 흠뻑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나서 그때부터 축제는 나에게 슬픔으로 변해버렸고, 나 또한 말보다는 눈물 많은 소년이 돼버렸다. 아버지의 죽음은 4월이었고, 나는 꽃 피는 거대한 나무를 잃은 작은 가지였다. 불의의 교통사로였다. 아버지께서 먼 곳으로 떠나신 이후 집안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가난의 고통이 무엇인지 나는 눈물과 함께 배워나갔다. 나는 아버지가 우리를 버리고 4월에도 눈이 내린다는 먼 북쪽 마을로 떠나셨다고 생각했다. 기일이 오면 늘 꽃잎이 눈처럼 날렸기에, 아버지는 해마다 4월이면 꽃을 눈 대신 몰로 진해로 찾아오신다고 믿고 싶었다. 4월이 오면 아버지가 사시는 그 먼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를 궁금해하며 나무에 기대어 선 나에 게, 저녁 바람이 휘파람을 가르쳐 주었고, 축제가 끝난 뒤의 파장의 쓸쓸함이 나에게 가슴속으로 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당시 내 주위에는 온통 여자의 눈물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집안의 유일한 남자로 남았다. 아들을 잃은 할머니, 남편을 잃은 어머니, 오빠를 잃은 고모들..... 그 많은 여자들이 나를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눈물을 가르쳤다.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잠결에 듣는 어머니의 울음은 슬픔의 바다가 돼 나에게 몰려왔고, 나는 이불속에서 숨을 죽인 채 그 바다에 젖어 울 수밖에 없었다. 서른에 청상이 되신 어머니인데 어찌 눈물이 없었겠는가. 한순간 가진 것없는 빈손으로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험한 세상에 버려진 어머니. 아아, 나는 어머니와 함께 울면서 알았다. 세상 에는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것을. 그 이별은 늘 슬픈 것이라고. 어린 나이에 나는 사람들은 꽃이 피는 축제의 기쁨만 생각할 뿐 꽃이 지는 축제의 슬픔은 알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축제의 즐거움보다 축제가 끝난 뒤의 파장을 더욱 사랑했다. 축제의 항구도시를 찾아 밀물처럼 밀려온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며 만들어 놓은 또 다른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자고 외로운 섬이 홀로 있는 것을 좋아했다. 바람에 혹은 비에 떨어진 꽃잎을 밟으며 슬픔의 시를 쓰는 소년으로 변해버려, 문예반지도 선생님은 나이보다 조숙한 슬픔의 시를 쓰는 나를 늘 안타깝게 바라보시곤 하셨다. 그런데 사랑도, 첫사랑도 내가 그렇게 슬픔에 젖던 4월에 나를 찾아왔으니.중3이었다. 내가 다닌 모교는 바다가 보이는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다. 교실 창문으로는 늘 남쪽으로 열린 진해 바다와 섬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학교였다. 그런데도 군사도시의 영향인지 중학교인데도 선.후배 사이에 엄한 질서가 있어 선배들의 서슬에 기가 죽어 숨죽여 생활하던 1,2학년을 보내고 최고 학년인 3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교생 활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모자의 챙을 미니형으로 줄이고 알맞은 가방끈을 괜히 길게 만들어 어깨에 메고, 일자형의 교복바지를 나팔바지로 만들어 입던 것이 유행이었던 시절. 신는 것이 금지 돼 있는 흰색 신발이나 농구화를 몰래 신으며 괜히 어깨를 으쓱이거나 후배들을 불러 세워 기 합을 지던 시절. 턱과 코밑에 조금씩 돋아나는 수염을 자랑스러워하며 여학생들에게 처음으로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하던 시절. 그러나 그런 자유보다는 고교입시라는 짐이 더 무거웠던 시절 이었다. 3학년이 되어서 나는 어머니 덕분으로 입시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 어머니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며 겨우 겨우 가족들의 생계를 유지해왔지만 교육열만큼은 높으셔서 아들의 고교입시를 걱정,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학원에 보내 주셨다.
진해역 오른편에 있었던 청산학원. 학교수업을 마치고 저녁이면 학원으로 걸어가 수업을 받았다. 그때 내 옆자리에 앉은 친구가 있었는데 시내에서는 제법 떨어진 시골에서 온 학생이었다. 그 친구의 집에서 학원까지는 버스를 타고 한 시간 이상 걸리는 먼 거리였다. 동이 아닌 리라는 주소를 쓰는 시골이었다. 당시 진해 시내의 중학교는 모두 남학교와 여학교뿐이었는데 그 친구가 다니는 학교는 시골인 까닭에 유일하게 남녀공학인 중학교였다. 그 중학교에 초등학교 시절 친구도 있고 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 친구와는 이내 학원 짝지 이상으로 친해져 버렸다. 그것을 기회로 나는 웃으며 "네가 다니는 학교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남녀공학이니 좋은 여자 친구가 있으면 나에게도 소개해 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그 친구도 웃으며 자기 마을에서 같이 살고 있는, 같은 학년의 S라는 여학생을 소개해 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런 약속이 있은 지 며칠 후 그 친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던 나에게 S의 얼굴 사진을 가져다 주었다. 그 친구는 S에게 나의 이야기를 했고 소개시켜 달라는 이야기도 전했다는 것이다. S는 나의 교제신청에 좋다는 뜻으로 자신의 사진을 내게 보냈던 것이었다. 사진 속에서 약간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시골 소녀의 모습. 사랑은 그렇게 오는가. 사진만으로 도 S는 세상 어느 여자보다도 아름다운 여자로 내 눈 속에, 머리 속에, 마음속에, 온몸에 꽉 차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미 마음속으로 S를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그때 그녀가 어떤 모습을 하고 나타났든지 나는 S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첫사랑의 숙명 앞에 놓여 있었던 것이리라. 사진만으로도 내 가슴은 뛰었다. 내 사진도 한 장 그녀에게로 보냈다. 그 시절 사진이란 등교실 학교 앞에서 나눠주는 할인권을 받아 사진관에서 찍으면 낙엽 모양이나 하트 모양의 무늬 속에 얼굴이 나오던 그런 흑백사진이 아니었던가. 교복에 모자까지 쓰고 찍은 그 사진 곁에 '희망'이 니 '우정'이니 하는 문구가 흰색으로 적혀 있었던. 그 친구는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사진만 교환한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의 전령사로 열심히 도와주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반에서 활동했던 솜씨를 살려 나는 멋진 연애편지를 그 친구를 통해 S에게로 보내곤 했었다. 그리고 S의 답장을 받았다. 사진과 편지, 그것만으로도 나는 그녀를,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는 확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는 며칠 있으면 S도 학원에 나오기로 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그 마을에서는 부농이었던 부모를 졸라 시내까지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그녀 역시 나를 보고 싶었을 것이다. S는 그렇게 처음 나에게 나타났다. 학원 앞은 큰 도로여서 벚 꽃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4월 저녁, 나는 학원 앞 벚꽃나무 아래서 기다렸고 그 친구를 따라 S는 내 앞에 나타났다. 우리는 처음 나에게 슬픔을 가르쳐 준 벚꽃나무 아래서 만났다. 모든 사랑이 시작이 그렇지 않은가. 처음에는 어색한 인사로 만남은 시작됐고, 서로 학원수업에 열중인 척했지만 머리 속에는 가까이에 앉아 있는 서로의 생각뿐이었다. 학원수업을 마치고 그녀의 마을로 돌아가는 막차시간까지 주차장 부근 어두운 골목에 숨어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흐르자 학원시간을 한 시간쯤 빼먹고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미 우리에게는 학원수업이니 입시보다는 서로에게 향한 사랑의 감정이 소중했다. 꽃이 피는 4월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그 4월은 슬프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그 4월에 사진관에서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다. 교복을 입고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축제 전야제의 밤이었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믿었다. 사랑은 영원할 것이라고, 이제 더 이상 4월에 슬픔이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벚꽃이 활짝핀 나무 아래를 그녀와 함께 걸으며 다시 찾은 축제의 흥겨움으로, 첫사랑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우리는 아름다운 약속 하나를 했다. 아침 일곱 시 라디오에서 알리는 시보 소리에 맞춰 성냥불을 밝히기로 한 것이다. 성냥을 켜면서 서로를 그리워하며 우리 사랑이 영원하기를 빌자는 약속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식구들 몰래 성냥을 켜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S를 생각했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 우주의 중심은 S였다. 어느 날은 함께 이웃 도시인 마산으로 영화를 보러가기도 했고, 영화를 보면서 용감하게도 모자를 벗어 그속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기도 했다.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S의 마을로 놀러가 S의 집에서 S가 해주는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 밀 밭으로 몰려가 밀서리를 해먹기도 했다. 어느 휴일에는 S의 학교 교실로 가 환경미화를 돕기도 했으며, 그녀의 친구들과도 자주 어루려, 친구들 사이에 나와 그녀의 사랑은 공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사랑이 하루하루 깊어져가던 어느 주말이었다. S의 마을로 놀러갔다. 우리는 산 위 무덤 곁에 앉아 함께 밤을 새웠다. 그 마을은 바닷가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에게서 '시그리'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아름다운 말을 배웠다. 시그리란 그 마을 사람들이 쓰는 말로 달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 바닷물에서 빛이 일어나는 현상을 뜻하는 말이었다. 죽은 물고기들의 뼈에서 나온 인들에 의해 일어나는 일종의 야광작용이었다. 어두운 바다를 향해 돌을 던지면 도깨비불 같은 푸르스름한 빛이 일어났다.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에서도 파란 불이 번쩍였다. 그 마을 아이들은 배에 작은 돌을 싣고 밤바다로 나가 돌을 던지며 시그리를 즐겼다. 물수제비로 뜨는 신비한 불빛 시그리. 무덤에서 밤을 새우고 내려온 새벽 그녀를 집으로 보내주며 집앞에 있는 다리에 앉아 그 시그리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으로 입을 맞추었다.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치는 순간 혼불이 머리를 타고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열여섯 나이에 시그리 같은 차가운 불빛에서 그처럼 뜨거움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아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 입맞춤이 첫사랑의 완성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 황홀함이 벚꽃나무에 핀 새 잎이 낙엽이 되어 지는 가을에 끝이 나고 말았다. S는 가을이 깊어지자 내 곁을 떠났다. 실연의 주체는 나. 그녀에게 중2학년 때 서울로 전학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녀가 좋아했던, 그녀에게는 첫사랑이었던 그 친구가 불쑥 다시 나타남으로써 그녀의 선택은 순식간에 변해버렸다. 첫사랑을, 아름다움을 고백하는 자리에 이별의 고통과 상처를 더 적어 무엇하겠는가. 다시 사랑의 자리로 돌아와 달리는 여러 차례 나의 애원과, 나를 아낀 선배 누나들이 그녀를 찾아가 나선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외면으로 나는 첫사랑의 패배자로 기록됐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차가운 뺨 한 대를 남기고 돌아섰다. 더 이상 비참해지는 것이 싫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벚꽃나무 아래서 찬 이슬에 젖어 있는 낙엽을 짓밟으며 나는 절망이라는 끝없는 우물 속으로 추락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그때 결별의 고통은 아픔으로 오랫동안 나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지금은 오랜 아픔보다 짧은 사랑의 기쁨이 더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녀에게로 향한 그 지독했던 증오와 원망도 이제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을 안다. 그것이 나에게 첫사랑이었기에. 첫사랑은 늘 미완성이지만 완벽한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사랑이기에.
사족 하나. 그 결별 이후 우리는 대학시절 대구 시내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대구 모 대학에서 응모한 문예작품 현상공모에 입상이 되어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대구에 갔다 길을 걷다가, 갑자기 그녀 생각이 났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그녀가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지 않은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도 그 부근에서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가 내 생각이 나서 먼저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첫사랑이 깨어진 사람들을 위해 신이 한번쯤 허락해 주신 그런 운명적인 재회 앞에서도 어찌할 수 없이 다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지금의 아내와 열애중이었고, 전문대학 졸업반이었던 그녀도 결혼을 전제로 사귀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4월이 오면 진해로 가보아야겠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그 자리, 그 벚꽃나무는 그대로 서 있는 지. 꽃은 또 그렇게 아름답게 피는지. 피었다가는 부는 바람에 눈처럼 날리는지. 4월이 오면.
정일근 -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경주 남산','감지의 사랑', '처용의 도시', '그리운 곳으로 돌아보라','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바다가 보이는 교실' 등이 있으며, 사랑시 선집 '첫사랑을 덮다'가 있다. 현재 울산대 사회교육원 문예창작학과 지도교수로 있으며, '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