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원재훈 - 10월의 여인
새가 가까이 날아도 잡을 수 없듯이 물 속에 물고기가 손에 닿아도 잡을 수 없듯이 내 눈동자 속에 들어왔다 다시 간 그대는 항상 내 곁에 머무는 생각의 그림자 그리워할수록 더 멀어지는 서해의 썰물처럼 어느 순간 내 곁에서 떠나갔지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나의 버릇이었을 뿐 빛나는 모든 것들이 별이 아니듯이 흐르는 모든 것들이 물이 아니듯이 바라볼수록 어두워 만지는 붉은 노을 속에서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고 믿게 한 사랑의 나무를 캐낸다 아직 싱싱한 나뭇잎들이 아직 누군가의 그리움으로 살고 있는 뿌리의 눈물을 보며 이젠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은 어둠 속으로 던진다
왜 나는 사랑의 별을 보았을까 그때 그 순간에 눈을 뜨고 있었던 것인가 천상의 그대가 우연히 지나친 것이었는데 이건 사람의 운명이 아니었을 텐데 조롱만 할 뿐 이해하려 하지 않은 집승들 사이에서 나는 왜 그대의 향기를 맡았던가 그건 천상의 향기였는데 그 빛과 향기에 취해 나는 지상의 삶을 버리려 한다 구름을 잡으려 내민 나의 손이여 부질없는 사랑의 이름만 쓰다 지쳐 죽을 나의 영혼이여
왜 나는 그때 사랑의 별을 그대의 눈동자를 순간적으로 보았단 말이냐 아무런 느낌도 없이 단지 빛나기만 하는 그대여 오늘은 어느 영혼의 눈동자를 눈멀게 하려 하는가?
시'별, 잠시 빛났던 그대의 눈동자'전문
어둠속에서 빗방울소리가 떨어진다. 불을 끄고 누운 지가 한 시간은 넘은 것 같다. 이렇게 잠이 잘 오지 않은 때가 가끔씩 있다. 이럴 적이면 주로 지나간 일들에 대한 생각을 한다. 어둠은 뒤를 바라보기에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아마 이 비가 내리고 나면 추워질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로 천장을 바라볻 몸을 뒤척여 벽을 바라본다. 이미 눈에 익숙해진 벽지의 문양이 어슴푸레하게 보인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한때의 열정으로 지나간 사람들은 저렇게 어둠 속의 벽지 문양처럼 희미하게나마 기억의 골짜기에 묻혀 있다. 다시 몸을 일으켜 거실의 큰 창문 앞에 선다. 별도 달도 없이 단지 비가 내리는 창밖엔 지금은 내가 돌아갈 수 없는 한 장소가 있는 듯하다. 어쩌면 몇 분 후 저 비가 눈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창문을 열면 그곳이 환하게 밝아올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착각은 이런 시간에 아주 어울리는 유희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그녀와 함께 영원히 새겨져 있는 이미지는 눈이다. 그날은 눈이 많이 내렸다. 방송에서는 몇십 년 만의 폭설이라고 떠들어댔던 기억이 난다. 그날 저녁 우리는 만났다.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눈이었다.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펑펑 내리던 눈. 그 눈 속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리고 겨울 봄 여름.가을 다시 겨울 눈, 이런 식의 세월의 순환이 몇 번은 지났다. 처음 그녀에게 키스하던 날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
"참 오랫동안 기다렸어."
그리고 그녀와 처음 섹스를 하던 날은 이런 말을 했다.
"나랑 자고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서울을 한참 벗어난 한 교외의 아주 허름한 여관에서 섹스를 했다. 그 여관은 주로 그 주변의 군인들이 면회를 오면 이용하는 군대용 여관이었다. 그녀는 그런 곳이 편한 듯했다. 우리를 알아볼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정작 행위에 들어간 순간, 낡은 침대에 그녀의 몸이 떨어진 순간, 한꺼풀씩 벗어내던지던 옷가지들. 서로의 몸에는 익숙하지 않은 동작 때문에 어떤 쾌락의 느낌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몸을 확인하는 신선함이 있었다. 그녀의 나체를 바라보며 나는 밖에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분명히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도시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녀는 무척 바쁜 일을 했고, 나 역시 그리 한가한 시간은 없었다. 그러나 둘이 있는 시간은 절묘하게 맞추어 나갔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잠을 자기 틀린 것 같다. 저 비가 내리다 눈이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물방울 하나가 베란다 창에 맺힌다. 쌀쌀한 늦가을 바람에 어린아이처럼 몸을 움츠리다가 천천히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들. 어쩌면 나와 같이 밤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저 빗방울에 담겨져 있는 듯하다. 그들은 어떤 사연으로 어떤 만남을 기다리며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사람과 사람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커피포트에 물이 끓는다. 조금은 진하게 인스턴트 커피를 탄다. 커피향에 잠시 눈을 감는다. 그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가까이 듣 것은 황홀한 일이었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나만의 공간에서, 예를 들면 작은 연주회장이거나 오래 된 오페라 하우스 같은 곳에서 내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잘 길들여진 악기를 혼자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이야기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가슴에 담아 놓았다. 위대한 선지식의 말씀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 그녀의 이야기만큼 내 마음의 그릇에 담기 좋은 것은 없었다. 책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살아 있는 언어들은 내 마음의 자음과 모음이 되었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돌 항아리에 물이 고이듯. 그 생명수와 같았던 말, 속삭임, 신음소리, 호흡소리 등은 내 가슴에 고여져 갔다. 그것은 결코 넘쳐흐르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으로 적당한 수위가 조절 되었다. 나는 사막과도 같은 이생을 걸어가면서 낙타처럼 그 생명수를 아주 아껴가면서 먹었던 것이다.
"사랑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사랑한다는 말을 아주 많이 하고나서 그녀가 한 말이다. 그래 그건 어쩌면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의 본질을 알기 위해서는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껍질과도 같은 느낌들을 당연히 거쳐야 하는 것이다. 새가 부화하듯이 사랑의 감정도 수없이 많은 착각의 과정을 통하여 날아오르는 것이다. 우린 그런 것을 처음의 열정이 사라지고 한참후에야 알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을 갖는 순간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오는 또 다른 불청객이 있었다. 불교우화에서 말하듯이 불행과 행복은 항상 같이 다니는 자매와 같은 것이다. 불행이 못 생겼다고 그녀를 버리면 행복이라는 미녀도 같이 사라진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라고 우화에서는 말한다. 사랑이라는 것을 안 순간 그녀는 이런 말도 했다.
"내가 어느 날, 혹시 말이야,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면 자기 꼭 나를 다시 찾아야 돼. 약속해."
항상 그러하듯이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는 헤어짐에 대한 생각을 했다. 그런 오래된 연인들의 유전자가 아닌가 싶다. 사랑이 싶어지면 항상 그 반대편에 서 있는 헤어짐에 대한 걱정은 오랜 역사가 있는 연인들의 법칙인 셈이다. 그것은 아주 고전적인 일이다. 인스턴트에는 이런 걱정이 없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일. 사랑의 일부만을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꼭 다시 찾겠다고 했다. 커피가 식었다. 한 두어 모금 입을 댔을까? 베란다 창문을 열어본다. 어둠 속에 섞여 떨어지는 빗방울을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아마 그 빗방울에 나의 시간이 들어가 앉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날 같았으면 잠을 자고 있을 이 시간을 나는 빗방울과 어둠에게 던져 주었던 것이다. 아주 비극적인 동화 '성냥팔이 소녀'와 같은, 이 동화의 비극성은 한번 제대로 이야기되어야 한다. 창밖의 어둠과 빗방울은 나와 비슷한 모양의 슬픔을 가지고 있는 착시현상. 사랑이 영원히 이야기되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진 사람은 대부분 타인을 볼 줄 아는 눈이 또 하나 생긴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의 눈이 아니다. 나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밝은 눈 하나를 그녀에게서 선물받은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의 내부에 있던 그 눈, 눈뜨지 못하고 있던 그 눈을 뜨게 하고 초점을 맞추어 주고 빛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 다시금 그 눈의 뜨임을 느낀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빗방울이 그녀의 어려웠던 힘들었던, 사랑을 다시 한번 보게 하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녀가 자주 다니는 건물의 한 귀퉁이에서 거지처럼 웅크리고 앉아 그녀의 그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한동안 술에 절어서 살았다. 한번은 그녀의 잡앞에서서 그녀가 남편과 함께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취중이었지만 무척이나 편안했다. 그녀는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한 약속, 그걸 나는 지켜야 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결혼이라는 걸 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내 인생에 너무나 큰 모험이었다. 그런 일을 결정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날 이후 나는 그녀를 잊었다. 아니 그러기로 생각했다. 단지 생각만을.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 이혼 소송중이야. 연락할게"
간단한 그녀의 메지시를 받고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단지 그녀의 건강이 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그이가 말을 안 들어. 이혼하기가 참 힘드네."
이런 식의 몇번의 일방적인 통보라도 그녀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듣는 순간만은 즐거웠다. 그리고 슬펐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녀가 이야기한 꼭 찾으라는 말을 실천하기에는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지.
비가 그치고 새벽이 온다. 새벽빛이 이렇게 싱그러운지 몰랐다. 거실의 탁자에 있는 전화를 바라본다. 만약 어젯밤 그녀도 나와 같이 무엇인가를 추억한다면 저 전화벨이 울리겠지. 나는 베란다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새벽빛과 공기를 받아들였다. 밤새 피워댄 담배연기와 부질없는 상념이 뒤얽혀 있는 어제의 공기를 저기로 내보내고 싶었다. 그리고 비 온뒤의 저 싱그러운 기운을 집안으로 불러들였다. 항상 아침이 오는 이유를, 그리고 10월이 다시 오는 이유를 9월의 마지막 밤에 나는 조금 알았다. 사람과 그리고 사물에 대해 안다는 것은. 글세 한참이 지난 뒤에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잠깐 스치듯 지나치는 것이 아닐까. 간밤 내내 풀잎에 매달려 있는 이슬이 부질없이 뚝 떨어지듯 말이다.
원재훈 -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창과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년 겨울 '세계의 문학' 시 '공룡시대'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여, 시집 '낙타의 사랑', '그리운 102'.서정소설 '만남 - 은어와 보낸 하루'가 있다. 최근에 시집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 하네'를 펴낸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