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첫느낌 그 설레임으로 살고 싶다
강연호 - 어느 흐린 기억
아무도 오지 않는다 허구한 날 내 마음의 공터에는 혼자 놀다 심심해진 햇살 곰곰한 생각에 지쳐 그늘 키우고 기다리는 일 많으면 사람 버리기 십상이라며 귓바퀴에 잠시 머물던 바람결 총총히 사라진다 저 햇살 저 바람도 저녁이면 돌아갈 집이 있는가 고개 갸우뚱하면 침착하게 낙법을 연습하던 나뭇잎 몇 장 내일 또 오마는 약속처럼 어깨에 얹힌다 삶이란 이런 거다 건너편 아파트 베란다에 널렸다 걷히면서 다시 더러워질 결심을 바투 여미는 흰 빨래의 반짝임 같은 세월아, 갈기갈기 찢기고 늘어진 하품에 지쳐 나는 너에게 줄 그리움이 없는데 너는 손 벌리고 자꾸만 손 벌리고
사진틀 속에 흑백으로 갇힌 날들이 파닥거린다 더러 지나간 날들이 예쁘게 이마 짚어주지만 아무리 기억의 초인종을 신나게 눌러도 그때, 그 들길, 첫 입맞춤 풀잎 풀잎 풀잎, 서걱서걱 서투르다며 흉보던 날들은 이제 더 이상 여기에 살지 않는다 텅 빈 우편함에는 수취인 불명의 먼지 쌓여갈 뿐 내 한 번도 같이 놀자고 한 적 없는 세월아, 내가 언제 숨바꼭질하자 했니? 그것도 모자라서 세월아 왜 나만 술래 되어야 하니?
- 시 "허구한 날 지나간 날"전문
첫사랑을 이야기해 달란다. 첫사랑이라. 이 요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남의 옛 상처를 훔쳐보고자 하는 사람의 장난기 섞인 재촉 같은 것인가. 아니면 다소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도 무엇인가 가벼운 마음으로 털어놓고 싶은 사연 비슷한 것을 갖고 있기는 하다는 말인가. 첫사랑이라. 하지만 이 낭만적이면서도 쓸쓸한 낱말이 나를 막막하게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털어놓을 만한 이야기가 막상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 이미 세월의 이끼에 덮여 까마득하다는 것, 어쩌면 한때는 문득문득 가슴을 파고들기도 했을 기억들이 흐린 날의 하늘처럼 캄캄하다는 것, 그 기억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는 것 등이 나를 새삼 아득하게 한다. 그렇지만 누르라니까 마지못한 척 기억의 초인종을 눌러보기로 하자. 그러면 영영 잊혀졌다고 생각됐던 몇 개의 전화번호, 어떤 노래의 몇 소절, 언제 누가 살았는지 모를 주소, 혹은 전혀 의미 모르게 조합된 숫자 같은 것들이 가끔 불쑥 튀어나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마 고교 문학서클들의 연합 시화전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고향 대전에서 한참 대학입시에 시달리고 있을 고교 3년생이었고, 그럼에도 시화전 같은 데를 기웃거린 것을 보면 마음은 딴데 가 있었음에 틀림없었고, 성적은 지지부진할 때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시나 소설 따위의 문학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던 내가, 또래 몇과 어울려 시화전에 간 이유는 물론 뻔했다. 거기서 여학생들이 힐끔거리고 혹시 운이 좋으면 문학소녀들과 사귀고 싶은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전시 축하 화환이나 꽃다발, 방명록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고 음료수도 마련되었던 것을 보면 고교생들의 잔치치고는 꽤 격식을 갖추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렴풋이 느낌만 남아 있지만 작품들의 내용은 대체로 심각했다. 사르트르나 카뮈풍의 실존적 고뇌를 담았던 것 같았는데, 말하자면 그 시화전은 프랑스식 살롱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고 할까. 돌이켜보면 고만고만한 시절의 고만고만한 치기가 어울어진 행사였지만, 어린애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식의 건방진 언급을 방명록에 휘갈겨 썼던 나 역시 그 시절의 치기를 한껏 발휘하고 있었나 보다. 아마 문학을 한다고 서로 자유롭게 어울리고 있는 주최측 학생들에 대한 심통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 어찌어찌하여 한 여학생의 쪽지가 몇 다리를 건너 나에게 전해지고,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제과점에서 그녀와 마주앉게 된다. 시화전에 작품을 내걸었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 여학생은 다짜고짜 방명록에 쓴 내 언급을 따지고 들었고, 내 형편없는 문학적 비평안을 수정시키려 만나자고 했다는 말을 거듭 강조했고, 나는 우물쭈물 사과했고, 사과하면서도 그녀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고, 계속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하고 싶어 더듬거렸고, 결국 우리는 헤어질 때쯤 해서 서로의 이력과 전화번호와 주소를 대충 나눌 수 있었다. 그 여학생은,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그것은 1년의 휴학 때문이니까 후배 취급당할 수는 없는 일이며, 아버지가 어느 지방 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에 자기는 가족과 떨어져 이곳 대전에서 혼자 자취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강요하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나를 종교적으로도 인도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후 우리는 주로 밤 늦은 놀이터에서 만나기 시작했다. 입시를 앞둔 내가 늦도록 학교에 있어야 했기 때문었이다. 당시만 해도 남녀 고교생들의 교제는 남들의 이목을 의식해야 했으므로 늦은 밤의 놀이터는 오히려 간섭받을 염려가 없었다.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위해 안 읽던 시집을 찾아 읽고 시인들에 대해 공부해야 했으며 교회도 가끔 나가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점차 횟수가 늘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했다. 학교성적이야 물론 더욱 떨어지고 있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중에는 그녀의 자취방에 자유로이 들락거릴 수 있었다.
이 진부한 첫사랑 애기에 지친 독자들은 아마 이때즘 해서 그 자취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기대할지도 모른다. 물론 성에 대한 호기심이 극에 달할 고교시절에, 당돌한 어린 연인들이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자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그런 욕망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걱정을 끼칠 일은 저지르지 말자고, 우리는 저급해지지 말자고, 어느 때인가는 아가페와 플라토닉 같은 단어들을 들먹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말하자면 당시의 또래들에 비해 우월감을 갖고 있었던 우리의 지적허영이 육체적 접촉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는 역시 어렸고, 성적이 접촉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또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는 게 아마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기억한다. 언젠가 놀이터의 그네에 앉아 흔들거리던 우리를 기억한다. 그네 밑에서 너와 함께 주운 공작용 가위를 기억한다. 아마 낮에 놀다간 아이들 중 하나가 잃어버렸음에 틀림없을, 그 아이들만큼 작고 앙증맞게 생긴 가위를 기억한다. 그 가위를 거쳐간 색종이들은 무엇이 되어 있을까를 말잇기 놀이처럼 서로 한 마디씩 주고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가거나 물고기로 푸른 바다를 헤엄치거나 뿌리 튼실한 나무로 자라 푸른 숲을 이루었을 거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또 기억한다. 내 생일날 네가 내게 선물한 시집을 기억한다. 세상에서 단 한 권뿐이라던, 네가 좋아하던 한용운과 박인환과 황동규의 연애시 몇 편과, 백일장에서 나갈 때마다 상을 휩쓸어왔고 장래의 여류시인를 꿈꾸었던 너의 창작작품들이, 옆으로 조금 기울어진 네 필채로 또박또박 쓰여져 한데 묶었던, 너와 영영 소식이 끊기고 나서도 한동안 간직했으나, 몇 번의 이사 도중에 어딘가에서 버려진, 지금은 "겨울 돌계단 위에 비 내릴 때" 라는 네 작품 한 편만이 어렴풋한, 그것도 제목만 희미하게 남은, 너의 시집을 기억한다. 생각하면 그떄 우리는 삶의 따분함과 시시함과 권태스러움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것 같다. 물론 그런 감정을 달고 다녀야 왠지 고급스러워 보인다는 것을 어린 연인들은 이미 그때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그렇지만 애써 학업성적 같은 것은 무시했지만 대입시험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네게 까탈을 부리기 시작했고 사소한 일에도 모든 게 너 때문이라는 듯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너는 나를 달랬었지만, 결국 입시를 두 달 앞두고 나는 당분간의 절제를 제안했다. 원래 소심하고 유약했던 나로서는 공부와 너와의 만남을 둘다 잘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런 성격 역시 지금도 그렇다. 요즘도 원고마감에 쫓기면 나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고 험악해진다.
시험이 끝난 뒤 우리는 물론 다시 만났지만, 나는 대학에 입학하여 서울로 올라와야 했고, 너는 아버지의 직장문제로 대구로 전학을 가야 했다. 한동안은 주말마다 기차로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만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네가 대입준비생이었고 너 역시 나처럼 초조함과 까탈스러움과 짜증과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걸 입시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아마 내 분방한 대학생활과 여학생들과의 미팅에 대한 마음쓰임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나는 이제 대학생이지만 자기는 아직 고교생이라는 말을, 네가 자주 되뇌이곤 했었던 것 같다. 유치하게 굴지 말라고 내가 거듭 타일렀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일까. 언젠가 내가 대구로 내려갔을 때 너는 갑자기 나를 여관으로 이끌었다. 옛날의 그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던 네 자취방과는 다른, 그 음습하고 지저분한 공간에서 너는 천천히 떨리는 손길로 옷을 벗기 시작했다. 왜 그래야 했을까. 알몸으로 너는 나에게 무엇을 다짐받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나는 울먹이는 너를 달래야 했고, 옷을 그냥 다시 입혀준 뒤 황황히 여관을 빠져나오면서 너를 안심시켜야 했지만, 그날 서울로 돌아오는 나의 참담함은 또 왜였을까. 그날 이후 너와의 만남을 거절한 것은 물론, 너의 슬픈 전화연락에도 사무적으로 냉정하게 대하던, 너무 차가워서 나 자신조차도 내 태도에 놀라던 그 변심은 또 무엇때문었을까.
내 첫사랑은 이렇게 지나갔다. 이후 내 연애사는 남들처럼 버리고 버림받는 몇 번의 기억을 남기게 된다. 그때 내 첫사랑은 소식이 없고 나는 지금 시인이 되어 있다. 내게 시적인 기질과 재주가 있다면 그 토양은 전적으로 그녀의 영향이다. 그 철없던 날들의 치기어린 순수는 이제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탁자 위에 떨군 물방울처럼 기억은 희미하지만, 나는 세상의 어떤 우연이 세상의 모든 필연이 되는 경우를 믿는다. 우리가 운명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만남과 헤어짐, 그 가슴 서늘한 기억들은 누구에게나 있게 마련이다. 내 졸시 "허구한 날 지나간 날"에 나오는 첫 입맞춤의 기억도 이렇게 그녀와의 몫으로 운명처럼 남는다. 좀더 덧붙인다면 연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글귀가 있다. '여자는 누구나 무언가 정신 나감과 내 우스꽝스런 구석을 지니고 있고, 남자는 누구나 무언가 우스꽝스런 구석을 지니고 있다.' 그녀의 정신 나감과 내 우스꽝스러움이 결합한 처음의 경험, 그것이 내 시적토양이라면 그야말로 웃을 것인가. 웃어도 할 수 없지만 제발 웃지 않기를 바란다. 그녀는 이제 내 곁에 없지만, 세상의 어떤 부재는 그 부재에 대한 흐린 기억으로서도 충분히 그 존재를 증명한다. 그 부재의 존재를 나는, 지금, 간신히, 기억한다.
강연호 1962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1991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으며 1995년 제1회 현대시 동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비단길", "잘못 든 길이 지도를 만든다"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