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산문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 오상순 내 일찌기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소유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삼아 정원에 놓아 기르기 십개성상(十個星霜)이더니 올 여름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식음과 수면을 거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 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 우는 단장곡은 참아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 긴장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오는 쪽으로 천방지축 기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적적무문(寂寂無聞),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또 다시 외치며 제 소리 울려오는 편으로 쫓아가다가 결국은 암담한 절망과 회의의 답답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는 꼴을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랴. 말 못하는 짐승이라 때 묻은 말만 주고 받고 못하나 너도 나도 모르는 중에 일맥의 진정이 서로 사이에 통하였던지 십년이란 기나긴 세월에 내 홀로 적막하고, 쓸쓸하고 수심스러울 때 환희에 넘치는 너희들의 약동하는 생태는 나에게 무한한 위로요 감동이었고 사위가 적연(寂然)한 달빛은 가을 밤에 너희들 자신도 모르게 무심히 외치는 애달픈 향수의 노랫소리는 나도 모르게 천지 적막의 향수를 그윽히 느끼고 긴 한숨을 쉰 적도 한두 번 아니러니... 고독한 나의 애물아, 내 일찌기 너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칠 능(能)이 있었던들 이내 가슴 속 어리고 서린 한없는 서러운 사정과 정곡을 알려 들리기도 하고 호소도 해보고 기실 너도 나도 꼭같은 한없는 이 설움 서로 공명도 하고 같이 통곡도 해보련만 이 지극한 설움의 순간의 통정을 너와 더불어 한가지 못하는 영원한 유한(遺恨)이여... 외로움과 서러움을 주체 못 하는 순간마다 사람인 나에게는 술과 담배가 있으니 한개의 소상반죽(瀟湘班竹)의 연관이 있어 무한으로 통한 청신한 대기를 속으로 빨아들여 오장육부(五臟六腑)에 서린 설움을 창공에 뿜어내어 자연(紫煙)의 선율을 타고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면 허공에 사라지는 나의 애수의 자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속 빈 한숨 길게 그윽히 쉴 수도 있고, 한잔의 술이 있어 위로 뜨고 치밀어 오르는 억제 못 할 설움을 달래며 구곡간장 속으로 마셔 들며 손으로 스며들게 할수도 있고 십이현(十二絃) 가야금이 있어 감정과 의지의 첨단적 표현 기능인 열손가락으로 이줄 저줄 골라 짚어 간장에 어린 설움 골수에 맺힌 한을 음율과 운율의 선에 실어 찾아내어 기맥이 다하도록 타고 타고 또 타 절절한 이내 가슴 속 감정의 눈물이 열두 줄에 부딪쳐 몸부림 맘부림쳐가며 운명의 신을 원망하는 듯, 호소하는 듯, 밀며 당기며, 부르며, 쫓으며, 솟으며, 잠기며, 맺으며 풀며, 풀며 맺으며, 높고 낮고, 깊고 짧게 굽이쳐 돌아가며 감돌아 돌며 미소하고 그윽하게 구르고 흘러 끝 가는 데를 모르는 심연(深淵)한 선율과 운율과 여운의 영원한 조화미 속에 줄도 있고 나도 있고 도연히 취할 수도 있거니와... 그리고 내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 이 곡조에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 속에 가득 답답한 설움과 한을 잠시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번 덩실 추는 것을 보련마는...아아, 차라리 너 마져 죽어 없어지면 네 얼마나 행복하며 내 얼마나 구제되랴. 이내 애절한 심사 너는 모르고도 알리라. 이내 무자비한 심술, 너 만은 알리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아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꿈에라도 행여 가볍게 보지 말 것이니 삶의 기쁨과 주검의 설움을 사람과 꼭 같이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보다도 더 절실한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은 산 줄 알고 살고, 죽은 줄 알고 죽고, 저는 모르고 살고 모르고 죽는 것이 다를 뿐 저는 생사 운명에 무조건으로 절대 충실하고 순수한 순종자... 사람은 아는 것을 자랑하는 우월감을 버리고 운명의 반역자임을 자랑 말지니 엄격한 운명의 지상명령에 귀일하는 결론은 마침내 같지 아니한가. 너는 본래 본성이 솔직한 동물이라 일직선으로 살다가 일직선으로 죽을 뿐 사람은 금단의 지혜의 과실을 따 먹은 덕과 죄인지 꾀 있고 슬기로운 동물이라 직선과 동시에 곡선을 그릴 줄 아는 재주가 있을 뿐, 십년을 하루같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기거와 동정을 같이 하며 서로 사이에 일백의 진정이 통해 왔노라. 나는 무수한 인간을 접해 온 십년 동안에 너 만큼 순수한 진정이 통하는 벗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노라. 견디기 어렵고 주체 못 할 파멸의 비극에 직면하여 술과 담배를 만들어 마실 줄 모르고 거문고를 만들어 타는 곡선의 기술을 모르는 솔직 단순한 너의 숙명적 비통을 무엇으로 위로하랴. 너도 나도 죽어 없어지고 영원한 망각의 사막으로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이 있을 뿐이 아닌가. 말하자니 나에게는 술이 있고, 담배가 있고, 거문고가 있다지만 애닯고 안타깝다. 말이 그렇지 망우초(忘憂草) 태산 같고 술이 억만잔인들 한없는 운명의 이 설움 어찌하며 어이하랴. 가야금 십이현에 또 십이현인들 골수에 맺힌 무궁한 이 원(怨)을 만분의 일이나 실어탈 수 있으며 그 줄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타본들 이놈의 한이야 없어질 기약 있으랴. 간절히 원하거니 너도 잊고 나도 잊고 이것 저것 다 없다는 본래 내 고향 찾아 가리라. 그러나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 저것 다 있는 그대로 그곳이 참 내 고향이라니 답답도 할사, 내 고향 어이 찾을고, 참 내 고향 어이 찾을고. 창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뜰 앞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이 완연하고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인가 이것이 꿈인가, 꿈 깨인 꿈인가. 미칠 듯한 나는 금방 네 속에 내 고향 보았노라. 천추의 감격과 감사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고 벽력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루만지며 침두(枕頭)에 세운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봉학이 울고 뜰 앞의 학이 춤 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 아니요, 꿈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서 우러러 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깊었구나... 꿈은 깨어 무엇하리.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누구? 며칠 전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다. 그런데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이름이 언론사마다 달랐다. 어떤 보도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고 하고 어떤 보도에서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맞다. 이미 1998년에 정부ㆍ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는 미국의 영화배우 Leonardo W. DiCaprio의 외래어 표기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정하였다. 이탈리아 출신 아버지를 둔 그의 이름은 이탈리아어 표기법에 따르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으로 이름이 불리는 데 따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를 정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어머니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감상하던 중 태동을 느끼고는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결국 같은 이름 Leonardo이지만 언어 환경에 따라 ‘레오나르도’(다빈치)와 ‘리어나도’(디캐프리오)로 달리 적는 것이다. 다만 표기법이 정해진 이후에도 근 20년 가까이 규범에 맞지 않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대중에게 훨씬 익숙하게 쓰여 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그렇게 표기되었고, 이번에 상을 받은 작품 ‘레버넌트’의 홍보 포스터에 적힌 이름도 여전히 ‘레오나르도 디카프오’이다. 일단 규범으로 정해진 이상 그 표기를 지켜야 한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라고 써야 한다. 다만 대중이 흔히 쓰는 표기를 계속 외면하기도 어렵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맥아더’처럼 원어 발음이 아니라 우리나라 대중이 흔히 쓰는 데 따라 표기를 정한 예도 있다. 앞으로 이 배우의 이름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06 風文 R 1040
꽤나 깨나 한동안 요리 프로가 인기를 끌더니 요새는 인테리어 방송이 눈에 많이 띈다. 페인트칠만으로 새 집 같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하고, 책장을 침대로 개조하는 일도 뚝딱 해내는 걸 보고 있노라면 눈이 저절로 휘둥그레진다. 한 번은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목공일을 하는 장면을 보고 있는데 ‘힘 꽤나 쓰는 두 사람’이란 자막이 나왔다. ‘힘깨나 쓰는’이라고 해야 할 것을 잘못 쓴 것이다. ‘꽤나’와 ‘깨나’는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혼동한다기보다는 ‘깨나’를 몰라서 ‘깨나’를 써야 할 자리에 ‘꽤나’를 잘못 쓰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꽤나’는 보통을 조금 넘는 정도를 나타내는 부사 ‘꽤’에 보조사 ‘나’가 합해진 말이다. ‘꽤’는 ‘두 사람은 꽤 가까운 사이다’ ‘어젯밤엔 술을 꽤 마셨다’ ‘학교는 집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처럼 문장 안에서 동사나 형용사, 또는 다른 부사를 꾸며주는 역할을 한다. ‘꽤나’를 쓰면 ‘꽤’를 쓸 때보다 그 수량이나 정도가 많거나 높음이 강조되는데 살짝 놀라는 뜻이 덧붙기도 한다. 위에 예로 든 표현들을 ‘꽤나 가까운 사이’ ‘술을 꽤나 마셨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로 바꿔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깨나’는 명사 등 체언에 직접 붙는 보조사로, 앞 말에 그것이 상당한 정도라는 의미를 더해 준다. ‘그는 돈깨나 있는 사람이다’ ‘심술깨나 부린다’ ‘그게 나이깨나 든 사람이 할 소리냐?’처럼 쓰는데, 빈정거리거나 가벼운 불만의 뜻이 덧붙여진다. 위의 자막은 ‘힘’이라고 하는 명사에 직접 붙을 뿐 아니라, 힘을 ‘꽤나’ 많이 쓰는 상황을 담담히 나타내기보다는 대단치도 않은 일에 두 사람이나 나서서 끙끙대는 모습을 살짝 비꼬고 있으므로 ‘힘깨나 쓰는 두 사람’으로 해야 맞겠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06 風文 R 1081
‘이쪽으로 앉으실게요’ 몇 년 전 모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한 ‘∼하고 가실게요’라는 표현이 어법에 맞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해당 프로그램 제작진이 ‘∼하고 가실게요’는 잘못된 표현이고 ‘∼할게요’, 혹은 ‘∼하겠습니다’가 바른 표현이라는 자막을 내보낸 적이 있다. 당시 시청자들은 방송에서 바른 말을 써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개그 프로그램의 경우는 어느 정도 이해가 필요하다는 의견과 개그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잘못된 표현은 집어내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의견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요즈음에도 병원과 백화점, 상점 등에서 ‘∼하실게요’라는 표현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하실게요’는 상대방을 높이는 선어말 어미 ‘-시-’와 말하는 사람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의 종결어미인 ‘-ㄹ게요’를 함께 썼기 때문에 호응이 잘못된 표현이다. 예를 들어 종업원이 손님에게 “이쪽으로 앉으실게요”라고 말하면 손님보고 이쪽으로 앉으라는 말인지, 아니면 종업원 자신이 이쪽으로 앉겠다는 말인지 혼동을 주게 된다. ‘앉으시다’라고 존대하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손님을 보고 하는 말 같지만 말하는 사람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 것을 약속하는 뜻의 종결어미 ‘-ㄹ게요’를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에 종업원 자신이 이쪽으로 앉겠다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이쪽으로 앉으세요”라고 말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영수증 받으실게요”는 “영수증 받으세요”로, “물리치료 하실게요”는 “물리치료를 해드릴게요”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실게요”는 “다른 장소로 이동하겠습니다”로 고쳐 말해야 바른 표현이 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06 風文 R 990
호접지몽(胡蝶之夢) 胡:오랑캐, 어찌 호. 蝶:나비 접. 之:갈 지(…의). 夢:꿈 몽. [유사어] 장주지몽(莊周之夢) [출전] ≪莊子≫ 〈齊物篇〉 나비가 된 꿈이란 뜻. 곧 ① 물아 일체(物我一體)의 경지. 물아의 구별을 잊음의 비유. ② 만물일체(萬物一體)의 심경. ③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④ 꿈. 전국 시대의 사상가 장자[莊子:이름은 주(周), B.C. 365~290]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물(物)의 시비(是非), 선악(善惡), 진위(眞僞), 미추(美醜), 빈부(貧富), 귀천(貴賤)을 초월하여 자연 그대로 살아가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제창한 사람이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꽃과 꽃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즐거운 나비 그 자체였다. 그러나 문득 깨어 보니 자기는 분명 장주가 아닌가. 이는 대체 장주인 자기가 꿈속에서 나비가 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나비이고 그 나비인 자기가 꿈속에서 장주(莊周)가 된 것일까. 꿈이 현실인가 현실이 꿈인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 그 사이에 도대체 어떤 구별이 있는 것인가? 추구해 나가면 인생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 아닌가.《장자(莊子)》의 이런 우화(寓話)는 독자를 유현(幽玄)의 세계로 끌어들여 생각게 한다. [주] ‘호접지몽(胡蝶之夢)’은 요즈음에도 ‘인생의 덧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이고 있음. 유현 : 사물(事物)의 이치(理致) 또는 아취(雅趣)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음.
Board 고사성어 2024.07.05 風文 R 333
‘형편이 폐다’ 지난주에는 ‘(빗방울이) 듣다’처럼 점점 존재가 희미해져 가는 낱말 두어 개를 보았다. 이번 주에는 그 연장으로 준말 두어 개를 보고자 한다. ‘쌔고 쌨다’라는 말이 있다. 무엇이 흔한 경우를 가리켜 자주 쓰는 말이다. 이 ‘쌔다’의 정체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말은 ‘쌓이다’의 준말이다. 그런데 ‘쌓이다’에 비하여 ‘쌔다’는 거의 쓰임이 없는 말로서 ‘쌔고 쌔다’와 같은 관용적인 형식으로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정도이다. 눈이 ‘쌓여 있다’라고 하지 ‘쌔어 있다’라고는 거의 하지 않는 것이다. ‘쌔다’의 정체를 궁금해 하는 것도 그만큼 이 말의 활동 영역이 좁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폐다’는 사정이 더 심각한 예이다. 이 말은 ‘펴다’의 피동형인 ‘펴이다’의 준말이다. 대표적으로 ‘형편이 폤다’와 같은 용례를 들 수 있다. 구김살이 펴지듯이 형편이 순조롭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만 이 준말 ‘폐다’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 경우 흔히 쓰는 말은 ‘피다’이다. 즉 ‘형편이 폈다’와 같이 말한다. 꽃이 피어나듯이 살림살이도 피어나는 것이다. ‘형편이 [펟따]’와 같이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폤다’가 아니라 ‘폈다’가 ‘며느리>메느리’처럼 모음이 단순화한 결과일 것이다. 어쩌면 ‘형편이 폐다’라는 표현은 앞으로 다시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놓이다’의 준말 ‘뇌다’, ‘까이다’의 준말 ‘깨다’, ‘더럽히다’의 준말 ‘더레다’ 등도 비슷한 처지의 말들이다. 우리말에는 생명력을 거의 잃고 국어사전 한구석에 잠들어 있는 이런 준말들이 적잖이 있다. 이 말들이 새로 힘을 얻기는 어렵겠지만 소중한 우리말이기에 되새겨 보았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05 風文 R 1320
향년 방년 지난 주말에 방영된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이없는 자막 오류가 있었다. 한 여가수가 생년월일을 적는 장면에 그만 ‘향년 19세’라는 자막을 내보낸 것이다. 여러 시청자들이 잘못을 지적하자 담당자는 ‘방년’을 쓰려다 실수를 했다며 사과하였다. 자주 쓰지 않는 한자어들은 정확한 뜻을 몰라 혼동하기 쉽다. ‘누릴 향(享)’ 자를 쓰는 ‘향년(享年)’은 국어사전에 ‘한 평생 살아 누린 나이’로 풀이되어 있는데,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를 가리킨다. ‘선생은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처럼 쓴다. ‘꽃다울 방(芳) 자를 쓰는 ‘방년’은 꽃이 화사하게 피는 좋은 때라는 뜻으로 한창 젊은 나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보통은 스무 살을 전후한 나이를 가리킨다. ‘방년 18세 아가씨’처럼 여성에게 주로 쓰지만, 남성에게 쓸 수 없는 말은 아니다. 북한 사전을 포함한 여러 국어사전들에서 여성에게만 쓰는 말이라는 제약이 없으며, 많지는 않으나 실제로 남성에게도 사용된 예들이 있다. ‘김00 군은 방년 20세의 소년이나...’, ‘방년 28세의 배우 부부 이00 씨와 한00 여사’ 등의 용례를 과거 신문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묘령(妙齡)은 ‘방년’과 비슷하지만 스물 안팎의 젊은 여성의 나이만 가리킨다. 남성이나 나이가 많은 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따라서 ‘묘령의 여인’이라는 표현은 가능하지만 ‘묘령의 노인’이니 ‘묘령의 40대 여성’이니 하는 말은 잘못이다. 그런데도 이런 표현이 심심찮게 쓰이는 것은 ‘묘령’을 ‘묘하다’는 말에 끌려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남자 나이 스무 살을 이르는 말은 ‘약관(弱冠)’이다. ‘예기’에 나온 말로 스무 살이 갓을 쓰는, 곧 관례를 올리는 나이라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05 風文 R 1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