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모두 바둑에서 온 말이었구나! 최근 이세돌 9단과 인공지능 알파고의 바둑 대국이 지상파 방송 등을 통해 생중계되면서 국민들 사이에 바둑 붐이 일고 있다. 필자처럼 바둑을 못 두는 문외한들도 바둑을 통한 사람과 인공지능의 흥미로운 대결을 지켜보면서 새삼스럽게 바둑의 묘미를 느끼게 된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바둑 중계방송에서 접할 수 있는 상당수의 바둑 용어들이 우리가 평소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사용하고 있는 말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거저 더 얹어준다’는 의미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덤’이라는 말이 바둑에서도 사용되는데, 바둑 대국에서 먼저 두는 흑돌이 유리하게 때문에 나중에 두는 백돌에게 몇 집을 더 주는 일을 ‘덤’이라고 한다. 또한 포석(布石)은 ‘중반전의 싸움에 유리하도록 초반에 돌을 벌여 놓는 일’을 말하는 바둑 용어인데, 일상생활에서 ‘어떤 일이 있기 전에 미리 준비해두는 행동’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석(定石)이라는 말도 바둑에서 ‘예로부터 공격과 수비에 최선이라고 인정한 방식으로 돌을 놓는 법’을 말하는데, 일상적으로 ‘수학의 정석’처럼 ‘어떤 일의 정형화된 순서와 방식’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한 사활(死活)이라는 말도 ‘돌과 돌이 살고 죽는 싸움’을 총칭하는 바둑 용어인데 일상에서 ‘목숨을 걸만큼 매우 중요한 문제’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밖에 자충수(自充手-자기가 놓은 돌로 자기의 수를 줄여 자멸을 자초하는 수), 악수(惡手-잘못 두는 나쁜 수), 강수(强手-무리함을 무릅쓴 강력한 수), 묘수(妙手-생각해 내기 힘든 좋은 수), 승부수(勝負手-판국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수)도 모두 바둑의 기술에서 온 일상 속 용어들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08 風文 R 1071
화룡점정(畵龍點睛) 畵:그림 화. 龍:용 룡. 點:점 찍을 점. 睛:눈동자 정. [유사어] 입안(入眼). [출전] ≪水衡記≫ 용을 그리는데 눈동자도 그려 넣는다는 뜻. 곧 ① 사물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완성시킴. 끝손질을 함. ② 사소한 것으로 전체가 돋보이고 활기를 띠며 살아남의 비유. 남북조(南北朝) 시대, 남조인 양(梁)나라에 장승요(張僧繇)라는 사람이 있었다. 우군장군(右軍將軍)과 오흥태수(吳興太守)를 지냈다고 하니 벼슬길에서도 입신(立身)한 편이지만 그는 붓 하나로 모든 사물을 실물과 똑같이 그리는 화가로 유명했다. 어느 날, 장승요는 금릉[金陵:남경(南京)]에 있는 안락사(安樂寺)의 주지로부터 용을 그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절의 벽에다 검을 구름을 헤치고 이제라도 곧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두 마리의 용을 그렸다. 물결처럼 꿈틀대는 몸통, 갑옷의 비늘처럼 단단해 보이는 비늘, 날카롭게 뻗은 발톱에도 생동감이 넘치는 용을 보고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용의 눈에 눈동자가 그려져 있지 않는 점이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장승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눈동자를 그려 넣으면 용은 당장 벽을 박차고 하늘로 날아가 버릴 것이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당장 눈동자를 그려 넣으라는 성화독촉(星火督促)에 견디다 못한 장승요는 한 마리의 용에 눈동자를 그려 넣기로 했다. 그는 붓을 들어 용의 눈에 ‘획’하니 점을 찍었다. 그러자 돌연 벽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더니 한 마리의 용이 튀어나와 비늘을 번뜩이며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눈동자를 그려 넣지 않은 용은 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4.07.07 風文 R 470
‘만 하다’와 ‘만하다’ 다음 중 띄어쓰기가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 ① 형만한 아우 없다. ② 형 만한 아우 없다. ③ 형만 한 아우 없다. 정답은 3번이다. 이 예에서 ‘만’은 조사이고 ‘하다’는 형용사이다. 따라서 단어별로 띄어 쓰되 조사는 앞말에 붙여 쓰는 원칙에 따라 ‘형만 한’으로 쓴다. 이는 ‘형만 못하다’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간다. ‘형만 못하다’는 누구나 이와 같이 띄어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는데, 그렇다면 ‘형만 하다’도 같은 식으로 띄어 쓰는 것이 옳다. 다음 중 띄어쓰기가 올바른 것은 무엇일까? ① 먹을만하다 ② 먹을 만하다 ③ 먹을만 하다 ④ 먹을 만 하다 정답은 1, 2번이다. 위 ‘형만 한’과 같은 모양은 3번이지만 이는 정답이 아니다. 둘은 성격이 전혀 다른 것으로 ‘먹을 만하다’의 ‘만하다’는 보조형용사이다. 따라서 ‘먹을 만하다’로 쓰는 것이 원칙이고, 보조용언은 본용언에 붙여 쓰는 것도 허용되는 데 따라 ‘먹을만하다’로 쓸 수도 있다. 그런데 ‘만하다’ 사이에 조사가 개입하면 ‘먹을 만도 하다’처럼 띄어 쓴다. ‘만도 하다’가 한 단어는 아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만’은 의존명사이고 ‘하다’는 형용사이다. 이상과 같이 ‘만+하다’의 구성은 꽤 복잡하다. ‘형만 한’에서는 조사+형용사, ‘먹을 만하다’에서는 보조형용사, ‘먹을 만도 하다’에서는 의존명사+형용사이다. 다만 ‘만하다’를 의존명사+형용사 구성으로 보는 문법학자들도 적지 않은데, 이 경우라면 위 4번처럼 ‘먹을 만 하다’로 띄어 써야 한다. 현재 규범은 ‘만하다’를 보조형용사로 보는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먹을 만하다’로 쓰는 것이다. 띄어쓰기는 이와 같이 문법적 이해를 요하는 내용이 많아 관심을 기울여 익힐 필요가 있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07 風文 R 1007
바깥어른, 사부님, 부군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늘어나면서 여성 동료나 상사의 남편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모님’에 기대서 ‘사부님’이라는 말을 만들어 쓰면서 이 말이 적절한지를 묻기도 한다. 사실 호칭어 같은 언어예절은 실제 생활에서 허용되는 범위가 넓어 그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기가 어렵다. 그렇더라도 어느 정도의 합의된 기준은 필요하기에 국립국어원에서는 실태조사와 전문가 의견을 종합하여 ‘표준 언어예절’을 정하여 권장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상사의 남편 이름이 ‘홍길동’이라면 ‘홍 선생님’, ‘홍길동 선생님’ 등으로 부르거나 그분의 직함을 활용해서 ‘홍 과장님’, ‘홍길동 과장님’ 등으로 부르도록 하고 있다. 해당 직장 상사나 제삼자에게 지칭할 때에는 위에 나열한 것 외에 ‘바깥어른’이나 ‘바깥양반’ 등을 쓸 수 있다. 때때로 ‘부군(夫君)’을 쓰기도 하나 이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부군’은 아랫사람이나 적어도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남편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직장 상사나 집안 어른 등 존대를 해야 할 상대에게 ‘부군’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사부님’은 사정이 조금 복잡하다. 본래 ‘사부(師父)’는 스승이 아버지와 같다고 하여 생겨난 말로 스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나에게 직접 가르침을 준 일이 없는 사람에게 ‘사부님’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표준 언어예절에서는 ‘아비 부(父)’가 아닌 ‘지아비 부(夫)’ 자를 쓰는 ‘사부(師夫)님’을 따로 두어 여자 선생님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의 범위를 학부모나 학생의 편에서 여자 선생님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한정해 두었기에 직장 상사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로 확대해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07 風文 R 915
외래어 표기 규정과 현실 사이 지난 주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우리 국민들은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네 번의 실패 이후 4전 5기 만에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틀린 외래어 표기이며 ‘리어나도 디캐프리오’가 바른 외래어 표기라는 사실이다. ‘Leonardo W. DiCaprio’를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적는 이유는 그가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으로 이름이 불리기 때문인데,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에서 현지 영어 발음에 가까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표기하도록 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외래어 표기의 통일을 위해 ‘외래어 표기법’을 만들어 놓았지만 우리 국민들 모두 ‘외래어 표기법’을 익혀 규정에 맞게 표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정부·언론외래어심의공동위원회’에서 격월로 회의를 개최해 주요 외래어의 한글 표기를 ‘외래어 표기법’에 맞게 결정해 국민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대다수 국민들에게 이미 익숙해진 이름을 ‘리어나도 디캐프리오’로 바로 잡기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중국 인명의 경우에도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 현대인은 원칙적으로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한다’는 규정에 따라 현존하는 중국(홍콩) 배우와 감독들의 이름을 ‘장이머우(張藝謀)’, ‘저우룬파(周潤發)’, ‘청룽(成龍)’, ‘류더화(劉德華)’, ‘리롄제(李連杰)’, ‘저우싱츠(周星馳)’, ‘왕주셴(王祖賢)’ 등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도록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들은 괄호 안의 한자음대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07 風文 R 1078
8. 산문 짝 잃은 거위를 곡하노라 - 오상순 내 일찌기 고독의 몸으로서 적막과 무료의 소유법으로 거위 한 쌍을 구하여 자식삼아 정원에 놓아 기르기 십개성상(十個星霜)이더니 올 여름에 천만 뜻밖에도 우연히 맹견의 습격을 받아 한 마리가 비명에 가고 한 마리가 잔존하여 극도의 고독과 회의와 비통의 나머지 식음과 수면을 거의 전폐하고 비 내리는 날 밤에 여윈 몸 넋 빠진 모양으로 넓은 정원을 구석구석 돌아 다니며 동무 찾아 목메어 슬피 우는 단장곡은 참아 듣지 못할러라. 죽은 동무 부르는 제 소리의 메아리인 줄은 알지 못하고 찾는 동무의 소린 줄만 알고 홀연 긴장한 모양으로 조심스럽게 소리 울려오는 쪽으로 천방지축 기우뚱거리며 달려가다가는 적적무문(寂寂無聞), 동무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을 때 또 다시 외치며 제 소리 울려오는 편으로 쫓아가다가 결국은 암담한 절망과 회의의 답답한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는 꼴을 어찌 차마 볼 수 있으랴. 말 못하는 짐승이라 때 묻은 말만 주고 받고 못하나 너도 나도 모르는 중에 일맥의 진정이 서로 사이에 통하였던지 십년이란 기나긴 세월에 내 홀로 적막하고, 쓸쓸하고 수심스러울 때 환희에 넘치는 너희들의 약동하는 생태는 나에게 무한한 위로요 감동이었고 사위가 적연(寂然)한 달빛은 가을 밤에 너희들 자신도 모르게 무심히 외치는 애달픈 향수의 노랫소리는 나도 모르게 천지 적막의 향수를 그윽히 느끼고 긴 한숨을 쉰 적도 한두 번 아니러니... 고독한 나의 애물아, 내 일찌기 너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칠 능(能)이 있었던들 이내 가슴 속 어리고 서린 한없는 서러운 사정과 정곡을 알려 들리기도 하고 호소도 해보고 기실 너도 나도 꼭같은 한없는 이 설움 서로 공명도 하고 같이 통곡도 해보련만 이 지극한 설움의 순간의 통정을 너와 더불어 한가지 못하는 영원한 유한(遺恨)이여... 외로움과 서러움을 주체 못 하는 순간마다 사람인 나에게는 술과 담배가 있으니 한개의 소상반죽(瀟湘班竹)의 연관이 있어 무한으로 통한 청신한 대기를 속으로 빨아들여 오장육부(五臟六腑)에 서린 설움을 창공에 뿜어내어 자연(紫煙)의 선율을 타고 굽이굽이 곡선을 그리면 허공에 사라지는 나의 애수의 자취를 넋을 잃고 바라보며 속 빈 한숨 길게 그윽히 쉴 수도 있고, 한잔의 술이 있어 위로 뜨고 치밀어 오르는 억제 못 할 설움을 달래며 구곡간장 속으로 마셔 들며 손으로 스며들게 할수도 있고 십이현(十二絃) 가야금이 있어 감정과 의지의 첨단적 표현 기능인 열손가락으로 이줄 저줄 골라 짚어 간장에 어린 설움 골수에 맺힌 한을 음율과 운율의 선에 실어 찾아내어 기맥이 다하도록 타고 타고 또 타 절절한 이내 가슴 속 감정의 눈물이 열두 줄에 부딪쳐 몸부림 맘부림쳐가며 운명의 신을 원망하는 듯, 호소하는 듯, 밀며 당기며, 부르며, 쫓으며, 솟으며, 잠기며, 맺으며 풀며, 풀며 맺으며, 높고 낮고, 깊고 짧게 굽이쳐 돌아가며 감돌아 돌며 미소하고 그윽하게 구르고 흘러 끝 가는 데를 모르는 심연(深淵)한 선율과 운율과 여운의 영원한 조화미 속에 줄도 있고 나도 있고 도연히 취할 수도 있거니와... 그리고 내가 만일 학이라면 너도 응당 이 곡조에 취하고 화하여 너의 가슴 속에 가득 답답한 설움과 한을 잠시라도 잊고 춤이라도 한번 덩실 추는 것을 보련마는...아아, 차라리 너 마져 죽어 없어지면 네 얼마나 행복하며 내 얼마나 구제되랴. 이내 애절한 심사 너는 모르고도 알리라. 이내 무자비한 심술, 너 만은 알리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아 말 못하는 짐승이라고 꿈에라도 행여 가볍게 보지 말 것이니 삶의 기쁨과 주검의 설움을 사람과 꼭 같이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보다도 더 절실한 느낌을 보았노라. 사람은 산 줄 알고 살고, 죽은 줄 알고 죽고, 저는 모르고 살고 모르고 죽는 것이 다를 뿐 저는 생사 운명에 무조건으로 절대 충실하고 순수한 순종자... 사람은 아는 것을 자랑하는 우월감을 버리고 운명의 반역자임을 자랑 말지니 엄격한 운명의 지상명령에 귀일하는 결론은 마침내 같지 아니한가. 너는 본래 본성이 솔직한 동물이라 일직선으로 살다가 일직선으로 죽을 뿐 사람은 금단의 지혜의 과실을 따 먹은 덕과 죄인지 꾀 있고 슬기로운 동물이라 직선과 동시에 곡선을 그릴 줄 아는 재주가 있을 뿐, 십년을 하루같이 나는 너를 알고 너는 나를 알고 기거와 동정을 같이 하며 서로 사이에 일백의 진정이 통해 왔노라. 나는 무수한 인간을 접해 온 십년 동안에 너 만큼 순수한 진정이 통하는 벗은 사람 가운데서는 찾지 못했노라. 견디기 어렵고 주체 못 할 파멸의 비극에 직면하여 술과 담배를 만들어 마실 줄 모르고 거문고를 만들어 타는 곡선의 기술을 모르는 솔직 단순한 너의 숙명적 비통을 무엇으로 위로하랴. 너도 나도 죽어 없어지고 영원한 망각의 사막으로 사라지는 최후의 순간이 있을 뿐이 아닌가. 말하자니 나에게는 술이 있고, 담배가 있고, 거문고가 있다지만 애닯고 안타깝다. 말이 그렇지 망우초(忘憂草) 태산 같고 술이 억만잔인들 한없는 운명의 이 설움 어찌하며 어이하랴. 가야금 십이현에 또 십이현인들 골수에 맺힌 무궁한 이 원(怨)을 만분의 일이나 실어탈 수 있으며 그 줄이 다 닳아 없어지도록 타본들 이놈의 한이야 없어질 기약 있으랴. 간절히 원하거니 너도 잊고 나도 잊고 이것 저것 다 없다는 본래 내 고향 찾아 가리라. 그러나 나도 있고 너도 있고 이것 저것 다 있는 그대로 그곳이 참 내 고향이라니 답답도 할사, 내 고향 어이 찾을고, 참 내 고향 어이 찾을고. 창 밖에 달은 밝고 바람은 아니 이는데 뜰 앞에 오동잎 떨어지는 소리에 가을이 완연하고 내 사랑 거위야, 너는 지금도 사라진 네 동무의 섧고 아름다운 꿈만 꾸고 있느냐. 아아, 이상도 할사 내 고향은 바로 네로구나. 네가 바로 내 고향일 줄이야 꿈엔들 꿈꾸었으랴. 이 일이 웬일인가 이것이 꿈인가, 꿈 깨인 꿈인가. 미칠 듯한 나는 금방 네 속에 내 고향 보았노라. 천추의 감격과 감사의 기적적 순간이여. 이윽고 벽력같은 기적의 경이와 환희에 놀란 가슴 어루만지며 침두(枕頭)에 세운 가야금 이끌어 타니 오동나무에 봉학이 울고 뜰 앞의 학이 춤 추는도다. 모두가 꿈이요, 꿈 아니요, 꿈깨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만상이 적연히 부동한데 뜰에 나서서 우러러 보니 봉도 학도 간 곳 없고, 드높은 하늘엔 별만 총총히 빛나고 땅위에는 신음하는 거위의 꿈만이 그윽하고 아름답게 깊었구나... 꿈은 깨어 무엇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