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의 ‘일광욕 의자’ 여름 하면 떠오르는 장면 가운데 하나는 긴 의자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모습이다. 필자는 그 의자를 무어라 부르는지 궁금했었는데, 최근 그 이름이 ‘선베드’라는 것을 알았다. 여름 휴가철 용어로 이와 같이 낯선 외래어는 또 있다. ‘풀빌라’는 전용 수영장이 딸린 숙박업소, ‘루프톱’은 야외 카페 등이 있는 건물 옥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역시 필자에게는 생소한 말들이다. 가뜩이나 무더운 여름, 이런 외래어들은 뭔가 거추장스러운 옷 같다는 느낌이다. 다행히 최근 국립국어원은 이 세 가지 여름 휴가철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어 선보였다. ‘선베드’는 ‘일광욕 의자’, ‘풀빌라’는 ‘(전용) 수영장 빌라’, ‘루프톱’은 ‘옥상’으로 다듬은 것이다. 그 말들로 대화를 한번 꾸며 보았다. “김 대리, 이번 여름휴가 어디로 가나?” “네, 저는 가족끼리 전용 수영장 빌라(←풀빌라)에 가 보려고요. 과장님은요?” “아, 나는 어디 가까운 빌딩 옥상(←루프톱)에 가서 일광욕 의자(←선베드)에 누워서 잠이나 푹 잘 거야.” 이렇게 쉬운 말을 쓰면 시원스럽게 뜻이 통하지 않는가? 괄호 속의 ‘풀빌라, 루프톱, 선베드’의 낯선 말보다는 ‘전용 수영장 빌라, 옥상, 일광욕 의자’가 가볍고 편한 느낌이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재충전하면서 이 말들도 한번쯤 생각해 보자.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27 風文 R 1285
‘썩히다’와 ‘삭히다’ ‘썩다’의 옛말은 ‘석다’이다. ‘삭다’의 기본뜻은 ‘물건이 오래되어 본바탕이 변하여 썩은 것처럼 되다’이다. ‘썩다(<석다)’와 ‘삭다’가 본래 한가지에서 나온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썩다’와 ‘삭다’는 각각 두 가지의 사동사를 취한다. 사동사란, 문장의 주체가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남에게 그 행동을 하게 함을 나타내는 동사를 말하는데, ‘썩다’에 대해서는 ‘썩히다’와 ‘썩이다’가, ‘삭다’에 대해서는 ‘삭히다’와 ‘삭이다’가 그것이다. 대개의 동사들이 사동사를 하나만 취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예: 울다-울리다, 웃다-웃기다, 입다-입히다, 속다-속이다) ‘썩히다’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세균에 노출시켜 부패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풀을 썩혀서 거름을 만들다’ ‘음식을 썩히지 않으려면 냉장고에 넣어 두어라’와 같이 쓸 수 있다. 둘째는 ‘활용하지 않고 묵히거나 내버려두다’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좋은 재주를 썩히지 마라’ ‘값비싼 장비를 활용하지 않고 썩히고 있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썩이다’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애타게 하거나 괴롭게 하다’라는 뜻이다. ‘이 친구 술버릇이 잘못 들어 골치깨나 썩이는군.’과 같이 쓸 수 있다. ‘삭이다’에도 크게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소화시키다’라는 뜻이다. “돌도 삭일 나이에 그렇게 소화를 못 시켜서 어떻게 하냐”와 같이 쓸 수 있다. 둘째는 ‘어떤 감정이나 생리 작용을 가라앉히다’라는 뜻이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이다’ ‘가래를 삭이다’와 같이 쓸 수 있다. ‘삭히다’는 ‘음식을 발효시켜 맛이 들게 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삭힌’ 홍어는 먹을 수 있어도 ‘썩힌’ 홍어는 먹지 못하는 것이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07.27 風文 R 1530
오랜만에 한잔할까요? 오랜만에 선배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자고 제안할 때 “오랜만에 한잔할까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잔’을 붙여 써야 할까? 아니면 띄어 써야 할까? ‘한’은 수량이 하나임을 나타내는 관형사이고 ‘잔’은 명사이기 때문에 ‘한 잔’으로 띄어 쓰는 것이 맞지만 이 경우에는 ‘한잔하다’가 ‘간단하게 한 차례 차나 술 따위를 마시다’는 의미의 동사이기 때문에 모든 음절을 붙여 써야 한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후배에게 “그럼 정말로 딱 한 잔만 하는 거다”라고 말할 때 ‘한 잔’을 붙여 써야 할까? 아니면 띄어 써야 할까. 이 경우에는 ‘한’이 수량이 하나임을 나타내는 관형사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형사 ‘한’과 명사 ‘잔’을 띄어 쓰는 것이 맞다. 이처럼 우리말에는 같은 음절이라도 의미에 따라 띄어쓰기가 달라지는 경우가 꽤 많이 있다. “오래 못 봤는데 언제 한번 봐야지?”라고 말할 때 ‘한번’은 ‘어떤 일을 시험 삼아 시도함을 나타내는 말’을 의미하는 부사이기 때문에 붙여 쓰지만 “그런데 정말 한 번만 보고 말 건 아니지?”라고 말할 때 ‘한’은 수량이 하나임을 나타내는 관형사 본래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관형사 ‘한’과 의존명사 ‘번’을 띄어 쓰는 것이 맞다. 또한 “아기를 잘 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라고 말할 때 ‘큰소리’는 ‘남 앞에서 잘난 체하며 뱃심 좋게 장담하거나 과장하여 하는 말’을 뜻하는 한 단어이기 때문에 붙여 쓰지만 “괜히 큰 소리 내 자는 아기 깨우지나 마라”라고 말할 때 ‘큰 소리’는 소리가 강하다는 의미의 형용사 ‘크다’의 관형사형 ‘큰’과 명사 ‘소리’를 띄어 써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26 風文 R 1691
하실게요 며칠 전 동네 병원에서 수액을 맞았다. 얼마 후 간호사가 간단히 상태를 물어보면서 주삿바늘을 빼 주었다. 필자는 침대에 누운 상태라 그저 귀로만 듣고 대답했는데, 간호사가 바늘을 꽂았던 자리를 누르면서 “꼭 누르실게요. 좀 있다가 반창고 붙여 드릴게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곧 반창고를 붙여 주거니 하면서 가만히 있었더니, 간호사가 “여기 눌러 주세요”라고 재차 말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팔에 댄 지혈용 솜을 누르라는 뜻이었음을 깨달았다. 주사 맞을 때면 흔히 하는 일인데도 미처 생각지 못한 이유는 ‘꼭 누르실게요’를 간호사가 누르겠다는 뜻으로 오해하는 데 있었다. 흔히 ‘-ㄹ게요’를 청자에게 명령하는 뜻으로 쓰는데도 순간적으로 이를 간호사 자신이 무언가 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요즘 고객 응대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하실게요’ 식의 표현은 직접적인 명령을 피하여 완곡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쪽으로 가실게요” “여기 앉으실게요” “이쪽 문으로 나가실게요”와 같은 표현에서 대접받는다는 만족감보다는 뭔가 어색하고 불편한 느낌만 남는다. 더욱이 앞서 간호사는 ‘누르실게요’에서는 명령의 뜻으로 ‘붙여 드릴게요’에서는 의지의 뜻으로 말하였으니 듣는 이로서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ㄹ게요’는 “곧 연락할게” “먼저 갈게”처럼 약속이나 의지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므로 명령의 뜻으로 ‘하실게요’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당연히 “꼭 누르세요” “저쪽으로 가세요” “여기 앉으세요” “이쪽 문으로 나가세요.”와 같이 표현해야 한다. 이와 같이 명확하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친절한 화법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26 風文 R 1008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 ‘소개하다’와 ‘소개시키다’는 뜻이 다르다. 그런데 이 둘을 혼동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소개시키다’는 ‘소개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나는 아내가 될 사람을 어머니에게 소개시키고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어느 소설에서 따온 문장인데, 이를 곧이곧대로 해석하면 ‘나의 아내가 될 사람을 누군가로 하여금 어머니에게 소개하게 하고 나는 선물꾸러미만 내밀었다’는 뜻이 된다. 남을 시켜 아내될 사람을 소개하다니, 민망한 일이다. ‘소개시키고’를 ‘소개하고’로 고쳐야 내가 직접 소개하고 선물도 드린 것이 된다.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제삼자가 아닌,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직접 소개를 해 줄 것을 원하는 것이라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줘.”라고 해야 한다. ‘-하다’를 써서 그대로 뜻이 통하면 ‘-시키다’를 쓸 필요가 없다. “그는 마음먹은 대로 성주의 모습을 수천 조각으로 나눌 수도 있고 다시 결합시킬 수도 있었다. 어느 한 부분을 실물보다 크게 확대시킬 수도 있었고 작게 축소시킬 수도 있었다.” 이 예도 어느 소설에서 따온 것인데, 여기서 ‘결합시킬, 확대시킬, 축소시킬’은 각각 ‘결합할, 확대할, 축소할’로 바꾸어도 원뜻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하다’를 쓰는 것이 좋다. 때로는 ‘-시키다’를 쓸 자리에 ‘-하다’를 잘못 쓰는 경우도 있다. 서비스센터 같은 곳에 가면 “손님, 그 신청서는 2번 창구에서 접수하시면 됩니다.”와 같은 말을 듣곤 하는데, 이때는 ‘접수시키시면’이라고 해야 맞다. 신청서를 받는, 즉 접수하는 사람은 창구 직원이기 때문이다. 만약 ‘접수하다’를 그대로 쓰고 싶다면, “손님, 그 신청서는 2번 창구에서 접수합니다.”라고 하면 된다. 이대성 국립국어원 학예연구관
Board 말글 2024.07.25 風文 R 1105
온데간데없다 감쪽같이 자취를 감춰서 찾을 수가 없는 상황을 가리킬 때 쓸 수 있는 표현으로 ‘온데간데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온데간데없다’는 어떻게 띄어쓰기를 해야 할까. ‘데’가 장소를 뜻하는 의존명사이기 때문에 ‘온 데 간 데 없다’처럼 띄어 써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온데간데없다’는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말이기 때문에 모든 음절을 붙여서 ‘온데간데없다’처럼 붙여 써야 한다. ‘온데간데없다’가 원래는 ‘온 데 간 데 없다’처럼 어구(語句)의 형식으로 띄어서 썼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이 어구의 구성이 하나의 어휘처럼 강력한 결합력을 생성하게 되었고 언중들도 이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기에 이르면서 이제는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보잘것없다’가 있다. ‘보잘것없다’도 원래는 관형형 어미와 명사는 띄어 쓰는 원칙에 따라 ‘보잘 것 없다’로 써야 하지만 언중들이 이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게 되면서 이제는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었고 따라서 모든 음절을 붙여서 ‘보잘것없다’로 써야 한다. ‘첫날밤’의 경우도 ‘첫’이 관형사이고 ‘날’과 ‘밤’이 모두 명사이기 때문에 ‘첫 날 밤’으로 모두 띄어 써야 하지만 ‘첫날밤’이 ‘결혼한 신랑과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밤’을 뜻하는 한 단어이기 때문에 붙여 써야 한다. ‘큰코다치다’도 ‘크게 봉변을 당하거나 무안을 당하다’는 뜻의 한 단어로 사전에 등재되어 있고 ‘가는귀먹다’는 ‘작은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귀가 조금 먹다’는 뜻의 한 단어이며 ‘이제나저제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 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을 때 쓰는 한 단어이므로 모두 음절을 붙여 써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25 風文 R 1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