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쉐린’에서 발간하는 ‘미슐랭’ 가이드 ‘미슐랭 가이드’는 1900년부터 발간되기 시작한 최고 권위의 레스토랑 안내서이다. 파리, 뉴욕, 도쿄 등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도시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올해 안에 서울편도 발간된다고 한다. 이 책은 본래 타이어 회사인 ‘미쉐린’에서 무료로 나눠 주던 것이었다. 자동차 여행자들에게 주유소의 위치나 근처의 식당, 숙소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소책자가 지금의 맛집 안내서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왜 ‘미쉐린’사에서 만든 책 이름이 ‘미슐랭’ 가이드일까. 이것은 프랑스어 이름인 Michelin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의 혼란에서 비롯됐다. Michelin은 이 회사 창업자의 성으로,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미슐랭’으로 적는다. 그러면 ‘미쉐린’은 이 이름의 영어식 표기일까? 그렇지 않다. 영어 발음에 따른 외래어 표기는 ‘미셸린’이라고 써야 한다. ‘미쉐린’은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법인을 설립할 때 등록한 한글 이름이다. 고유명사이기에 표기법에 맞지 않지만 공식 표기로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1980년대에 ‘미슐랭’이라는 책 이름으로 처음 우리나라에 알려졌다. 이후 1990년대 초에 타이어 회사가 ‘미쉐린’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두 이름이 너무 달라 서로 관계가 있으리라고 짐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10여 년 전 신문에는 ‘미쉐린의 총수인 프랑수아 미슐랭’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기도 하다. 사실 알고 보면 ‘미슐랭’이라는 사람 이름을 따서 만든 ‘미쉐린’사에서 ‘미슐랭’이란 책을 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미슐랭’으로 통일해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한편 한 외국어 이름에 대응하는 두 가지 다른 한글 표기, ‘미슐랭’과 ‘미쉐린’은 그 말이 우리 사회에 소개될 당시의 맥락과 역사성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14 風文 R 1420
다르다와 틀리다 20세기 현대사상의 거두라고 불리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질성의 포용’이라는 책에서 상대의 이질성(異質性)을 상대방의 정체성(正體性)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상대방과의 친화를 도모하는 것을 ‘이질성의 포용(inclusion)’이라고 정의하고, 이를 21세기 철학의 화두로 삼았다. 이처럼 상대방의 이질성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이질성의 포용’은 지금 대한민국 사회가 겪고 있는 이념 간, 세대 간, 지역 간, 계층 간의 갈등상황을 치유하는 치료약이 될 수 있다. 이질성의 포용은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필요한데, 예를 들어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 잘못 사용하는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남녀의 목소리가 서로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다르다’를 써야 하는 상황에 ‘틀리다’를 잘못 사용하고 있는데, ‘다르다’와 ‘틀리다’는 품사부터가 서로 다르다. ‘다르다’는 품사가 형용사로서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아니하다’라는 뜻이고 ‘틀리다’는 품사가 동사로서 ‘사실 따위가 그릇되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단어를 혼동해 많은 언중들이 ‘다르다’를 써야 할 곳에 ‘틀리다’를 쓰고 있는 것은 자기와 같은 생각, 이념, 모습은 옳고, 자기와 다른 생각, 이념, 모습은 틀리다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고방식을 은연중에 심어줄 수 있다. 이는 마치 색연필의 살구색 이름을 ‘살색’이라고 표현해 우리와 같은 피부색인 살구색만 살색이고 우리와 다른 피부색인 검은 색은 살색이 아니라는 선입견을 학생들에게 심어준 것과 같은 경우인데, ‘이질성의 포용’을 위해 ‘다르다’와 ‘틀리다’를 서로 구별해 사용해야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14 風文 R 967
<평론> 시대고와 그 희생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오,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 이 말은 우리 청년의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픈 소리다. 그러나 나는 이말을 아니할 수 없다.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소름이 끼치는 무서운 소리나, 이것을 의심할 수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이 폐허 속에는 우리들의 내적(內的), 외적(外的), 심적(心的), 물적(物的)의 모든 부족, 결핍, 결함, 공허, 불평, 불만, 울분, 한숨, 걱정, 근심, 슬픔, 아픔, 눈물, 멸망과 사(死)의 제악(諸惡)이 쌓여 있다. 이 폐허 위에 설 때 암흑과 사망(死亡)은 그 흉악한 입을 크게 벌리고 곧 우리를 삼켜버릴 듯한 삼이 있다. <중간 4행 줄임> 이 세상은 고해(苦海)와 같다고 말한다.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흔히 우리 인류 생활의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고(苦)가 아닐까. 사실을 회피하여 은폐하고 부정함은 어리석다. 사실은 사실대로 그대로 승인하고 그것을 처리하며 그것을 초월치 않으면 안될 것이다. 약한 인간이나 민족은 그 고에 눌려서 그의 노예가 되고 그 고에 못견디여서 쇠멸(衰滅)하고 만다. 강한 자는 그 고와 싸우고 정복하여 쳐 이기고 퇴치코자 최후까지 백방으로 분투한다. 이에 불꽃이 튀고, 천지를 움직이는 대활동이 일어나고 처참한 대비극이 연출된다. 그리고 분투(奮鬪)의 정도를 따라 승리의 운명을 복(卜)한다. 강자의 승리는 과시(果是) 선전건투(善戰健鬪)에만 있다. 우리는 그 싸움속에 사는 가치와 의미를 발견한다. 소극적으로, 일체 곤란, 압박, 부자유, 부여의(不如意)의 고통과 싸워 이기고 적극적으로 일체 진, 선, 미와 자유, 모든 위대한 것, 신성한 것, 숭고한 것을 얻기 위하여 싸운다. 그 싸움이 얼마나 신성하며 이 싸움을 잘 싸우는 자 얼마나 영광이랴. '나는 허무와 싸우는 생명이다. 밤에 타는 불꽃이다. 나는 밤이 아니다. 영원한 싸움이다. 어떠한 영원한 운명이라도 이 싸움을 내려다 보지는 못한다. 나는 영원히 싸우는 자유 의지(意志)이다. 자, 나와 함께 싸우자. 타거라 부단히 싸우지 않으면 아니된다. 신도 부단(不斷)코 싸우고 있다. 신은 정복자이다. 비유하면 육(肉)을 탐식(貪食)하는 사자와 같다' 이는 근대 영웅 정신의 권화(權化)인 로망 로랑의 말이다. 우리는 인생이니 인생고가 있고, 인간이니 사회고(社會苦)가 있고, 시대에 처해 있으므로 시대고가 있다. 이 여라 고통 중 어느 것도 심각한 고통이 아니랴마는 그 중 우리 운명에 대하여 직접 영향을 미치고 가장 핍절(逼切)하고 가장 절박한 관계와 지배권을 가진 것은 시대고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시대의 아들인 동시에 특히 우리는 비상한 시대에 처해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시대고의 문제를 해결하면 기타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된다. 가장 중요한 선결 문제는 시대고이다. 오늘날과 같이 비상하고 혼돈한 시대에 있어서는 이 시대고의 문제가 한층 긴장하고 또 중대한 지위를 점령할 것이다. 그래서 우선 나는 급한대로 이 시대고와 그 희생과 그 뜻의 일단(一端)을 논하여 일종의 암시를 얻고자하며 겸하여 비상한 시대 특히 그 과도기에 처한 뜻있고 마음있는 우리 남녀 청년의 충정(衷情)의 고민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가 있기를 바란다<11행 줄임>. 우리의 시대는 말할 수 없는 오뇌를 가지고 있다. 그는 결코 생활난의 고생이나 허영심에 뜬 초조와 속적(俗的) 성공열(成功熱)에 따른 불만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엄숙한 오뇌이다. 진자기(眞自己)도 희생함을 요구하여 가차(假借)치 않도록 잔인하고 필연적인 고민이다. 이 시대의 고민 오뇌는 가장 진실한 청년 남녀에게만 이해되고 체험되며 또 가장 처참하게 심각하게 오뇌된다. 이러한 청년은 실로 시대 요구에 제일 충실하고 무구(無垢)한 희생자이다. 오늘날 생각 있고 진실한 우리 청년들은 모두 다 이러한 상태에 있다. 단 이뿐이면 참을 수도 있겠다. 저들은 물론 이 시대 사람들의 동정이나 이해를 얻지 못한다. 왜 그런고 하니 이 시대들은 저들의 시대적 고뇌를 상상할 수도 없으니까 ! 저들은 자기에게 가장 가깝고 믿을만 하다는 사람에게 향하여 자기의 오뇌를 호소한다. 그는 반드시 남에게 동정을 얻으려 하는 박약하고 비천한 마음으로 나온 것이 아니요, 다만 자기의 하는 바를 아지 못하는 답답함에서 나오는 것이나 가엾은 그네들은 예상치 못한 무이해(無理解)와 냉담한 응답을 듣고 암흑한 고독의 심연을 볼 뿐이다. 그러나 정열적인 그네들은 그 전율(戰慄)할 고독의 적연(寂淵)에 뛰어들어가기를 피(避)치 아니한다. 그래서 자기 희생을 더욱 비극으로 한다. 가깝고 동정이 있을만한 자에게도 이해(理解)가 없거던 항차 기타(其他)에서랴. 세상과 그네들은 마주하되 마치 가시로 살을 찌르는 듯한 냉소와 모멸과 매리(罵리)로써 한다. 세상과 그네들과는 세대가 틀리고 세계가 전이(全異)하니 부득이한 현상이라 하더라도 격리(隔離)가 너무 심하다. 세인의 눈에는 생활난이나 성공난의 불공평이나 혹은 허영야심의 권화(權化)같은 무지몰각자(無知沒覺者)로 밖에 비치지 않는 것같다. 무슨 생각이 있고 열정이 있고 무엇을 진정 해 보고자 하며 참 의미있는 생활을 영위코자 하는 청년들은 다만 함부로 전통과 습속(習俗)과 권위에 반항하는 부도덕자(不道德者), 비애와 고립을 자초(自招)하는 우자(愚者), 자기와 세상을 보지 못하는 또 세간(世間)과 보조를 합해 갈 줄 모르는 유치자(幼稚者)라는 냉평(冷評)을 퍼붓는다. 또 조금하면 '어른'들의 우뢰같은 꾸지람이 비오듯 한다. 그뿐만 아니다. 밖에도 또 마적(魔賊)이 있다. 소위 설상(雪上)에 가상(加霜)이다. 저, 남들은 우리들의 생각, 말, 행동 태도를 멸시하고 더구나 우리들의 요구, 이상, 정신을 꺾고 밟는다. 우리들의 모든 것과 모든 일은 다 소용이 없단다. 모든 것을 다 해 줄터이니 너희들은 국으로 가만히 있으란다. 저희들에게는 우리의 입을 꼭 봉하고, 우리의 눈은 꼭 감고, 우리의 귀는 꼭 틀어막고 손과 발을 꼭 비쓸어매고 무형(無形)한 정신이나, 마음까지라도 꼭 비끌어매고 있었으면 좋을 듯이나 싶이......우리들도 하도 답답할 때에는 차라리 그렇게나 되어버리고 말았으면 하는 절망의 탄식, 암흑과 사(死)의 비통이 있다. 우리의 절대 제한과 부자유와 억울과 고민은 이에 있다. 우리의 희생은 더욱 비장(悲壯)해 간다. 이같이하여 시대를 오뇌하는 진지한 청년은 무저항속에 침(沈)하여 간다. 저들은 남에게 이해도 못 되고 또 이해할 수도 없는 절대 불가해(不可解) 속에 고독한 혼을 안고 간다. 세상은 더욱 속적(俗的)으로 추악하게 발전해가고 좀 새롭다는 자도 웬만큼 낡아지고 무지(無知)한 자는 방탕하고 간교해 진다. 다만 진실한 청년만 영원한 정적(靜寂)으로 흘러간다. 세상은 참 기묘하다. 그러나 시대의 애련(哀憐)한 희생은 과연 무의미한 것일까? 전혀 무가치한 것일까? 물론 현재에 있어서는 하등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 그러나 변해오는 새 시대에는 누가 능히 이 젊은 침묵의 비극에 대하여 따뜻한 회상의 꽃을 전져 일국(一국)의 눈물을 뿌려줄까? 어느 누가 능히 그 현실의 자유와 문화 속에 비통한 과거의 역사가 파묻혀 있는 것을 상상할까. 다만 신(神)과 같은 시인 뿐이, 이 '때'의 냉혹을 울것이 아닐까. 물론 이러한 희생은 어느 시대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처럼 가장 많이 가장 심각하고 냉담한 때는 드물었을 것이다. 오늘날 깊이 자각이 있고 진실한 우리 남녀 청년의 고뇌를 아는 나는 이같이 말한다. 아아 그러나 우리 청년은 약하게 지관해서는 안되겠다. 다만 감상적으로 실망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 오뇌를 체험하고 고민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이상의 것 즉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 가장 자유와 정열이 충만한 생활의 영원미(永遠美)에 투철하려 원하는 고로 시대 속에 시대를 위하여 우리를 고뇌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일개(一個)의 의식 세계 속에 우리들을 고뇌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의 협애(狹隘)한 의식 세계중에 독거(獨居)하여, 거기서 모든 문제를 속히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되겠다. 그곳에는 난감한 실망과 단념과, 적멸(寂滅) 이외에 다른 것은 찾아보지 못 할 것이다. 우리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눈은 늘 무한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다. 우리의 발은 항상 무한한 흐름 한가운데서 서 있어야 하겠다. 우리의 심정은 항상 영원한 사랑과 동경 속에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태도로 우리는 우리의 체력이 께속하기까지 의지력(意志力)이 열(熱)하기까지 진행치 않으면 안되겠다. 어떠한 오해나 핍박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자유에 살고 진리에 죽고자 한다(3행 줄임). 우리는 항상 영원한 광대한 세계에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강한 신앙을 가지고 노력하고 분투해야 하겠다. 이 강한 신앙과 노력 속에만 우리의 의의(意義)와 가치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일체 편견, 고루(固陋), 사념(邪念)을 파기하여야할 것이다. 우리는 시대의 희생이 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구태여 남으로 하여금 피하게 할 것도 없다. 희생은 본래부터 비극이다. 그러나 영원한 내적 세계에서는 그것은 가장 숭고하고 장엄한 부활이다. 아무리 적은 희생이라도, 아무리 정일(靜溢)한 침묵에 파묻힌 희생일지라도 영생의 빛속에 들어오지 않을 것은 없다. 그는 우리의 시대를 뇌(惱)케하고 있는 영원한 생명의 세계에서는 여하한 존재라도 축복 아니되며 영생화(永生花)되지 않고 소멸하는 것은 절대로 없을 것이므로 이것이 우리 청년의 열정적 신앙이다. 우리의 생존하는 시대의 오뇌는 영원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탐욕적인 무수한 젊은 비극을 요구하나 그중에 하나라도 무의미(無意味)하게 망각리에 장사(葬事)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희생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는 즉 영원에서 사는 고로. 이 시대의 오뇌는 언제까지든지 이대로 울굴(鬱屈)해 있을 것은 아니다. 그는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격렬한 변동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그 변화는 폭풍우일는지 대홍수일는지 대진동일는지 또는 무엇일는지는 우리의 예언할 바 아니다. 그는 아무 것이라도 관계치 않다. 그러나 어떻든지 대변화가 올 것은 확실하다. 그는 영원한 활동을 자유로 분방적(奔放的)으로 현현(顯現)하려 하는 시대의 오뇌는 방금 그 고조(高潮)에 달해 있는 고로 그리고 생명은 최후의 승리와 개가로써 더욱더욱 돌진할 것이다. 아~ 이 시대의 대변동에 제(際)하여 어떤 일이 심판될까. 어떤 사람이 영원히 축복을 받으며 어떤 사람이 여원히 저주될까. 누가 가장 행복이며 누가 가장 화(禍)로 올까? 우주의 심판자가 진리와 비진리를 척결할제. 우리는 이러한 상상을 그만두자. 우리는 다만 용기를 가지고 나아갈 뿐이다. 최후까지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족하다. 영원한 생명과 축복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때 비로소 황량한 우리 폐허에는 다시 봄이 오고 어린 생명수(生命樹)에는 꽃이 피겠다. 그때 그곳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험난한 시대에 처하여 어느 형식으로나 진정으로 가장 애많이 쓰고 눈물과 피로써 일체에 잘 싸워온 사람 특히 남 모르는 중 침묵리에 새로운 시대 창조를 위하여 가장 희생을 많이 한 그 사람들일 것이다. <1920. 7. [폐허] (창간호)>
‘곤색’ 정장 “곤색 정장에 물방울무늬 분홍색 넥타이 차림의 김 대표는….” 이는 지난주 총선 투표가 끝난 직후 어느 정당의 모습을 보도한 한 언론 기사이다. ‘곤색’은 일본어에서 온 말이다. ‘감색(紺色)’의 ‘紺’이 일본어로 ‘곤’이다. 우리말 속의 일본어는 대부분 과거 일제 강점기의 산물이다. 그 시기에 잃어버린 우리말을 찾기 위한 노력은 꾸준히 이어져 왔다. 광복 직후인 1948년 정부는 “우리말 도로 찾기”라는 책자를 발간하였는데, ‘도시락’도 이 책에서 제안되어 결국은 ‘벤토’를 이겨낸 말이다. ‘곤색’을 우리말로 바꾸기 위한 노력 역시 적지 않았으나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필자의 십대 딸아이도 이 말을 쓰는 걸 보면 꽤나 질긴 생명력을 지닌 것 같다. 물론 일본어라고 하여 무조건 배격할 필요는 없지만 ‘곤색’은 고유한 문화적 의미를 지닌 것도 아니어서 굳이 두고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말의 대안도 많다. 그 가운데 널리 쓰이는 것은 ‘감색’이다. 또 ‘진남색’(진한 남색)이나 ‘검남색’(검은 빛이 도는 남색)이라는 순화어도 있다. 무엇보다도 ‘감색’처럼 이미 자리 잡은 말이 있다면 ‘곤색’은 더더욱 피해야 할 말이다. 그래서 위 기사는 유감스럽다. 반면에 같은 기사의 ‘물방울무늬’는 반가운 말이다. 이 역시 일본말에서 온 ‘뗑뗑이’가 적잖이 쓰이기도 한다. 또 영어에서 온 ‘도트 무늬’도 종종 쓰인다. 이 가운데 ‘물방울무늬’가 여러 모로 가장 예쁜 말이다. ‘곤색’과 ‘물방울무늬’가 한 문장 안에 있는 것은 어색해 보인다. 그보다는 “감색 정장에 물방울무늬 분홍색 넥타이 차림”이 더 자연스럽고 좋은 표현 아닐까. ‘곤색, 뗑뗑이’와 같은 일본말, 이제는 사라졌으면 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13 風文 R 1028
있으시다, 계시다 “이어서 회장님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 행사장 같은 데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말인데 어딘가 어색하다. 높임말이 잘못 쓰였기 때문이다. ‘자다’의 높임말이 ‘주무시다’인 것처럼 ‘있다’의 높임말은 ‘계시다’이므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계시다’ 대신 ‘있으시다’를 써야 한다. ‘있다’에는 동사와 형용사 두 가지 쓰임이 있는데, 동사로 사용될 때는 높임말이 ‘계시다’가 되지만 형용사로 쓰일 때는 ‘있으시다’를 써야 한다. 동사와 형용사는 활용형의 차이로 구분한다. 동사 ‘있다’는 ‘있어라/있자’처럼 명령형이나 청유형 어미와 자유롭게 결합하지만, 형용사일 때는 그런 어미와 어울리지 못한다. 예문을 통해 살펴보자. 우선 ‘동생이 집에 있다.’라는 문장을 보자. 이때의 ‘있다’는 ‘집에 있어라/집에 있자’처럼 명령형과 청유형으로 활용하는 게 자연스러우므로 동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장의 주어를 동생에서 아버지로 바꾸면 ‘아버지가 집에 계신다.’가 된다. 한편 ‘영수야, 우산 있어?’ 또는 ‘우리 언니는 돈이 좀 있어.’같은 문장을 살펴보자. 여기 쓰인 ‘있다’는 ‘우산 있어라’ 또는 ‘돈이 좀 있자’처럼 쓸 수가 없다. 명령형이나 청유형 어미와 결합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형용사로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 경우 높임말을 쓸 때는 ‘아주머니, 우산 있으세요?’ ‘우리 할머니는 돈이 좀 있으셔’처럼 써야지, ‘우산 계세요?’나 ‘돈이 좀 계셔’는 부자연스러운 문장이 된다. 그렇다면 ‘말씀’의 경우는 어떤가. 우산이나 돈의 경우처럼 ‘말씀이 있어라/말씀이 있자’ 등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있다’가 형용사로 쓰인 것이므로 높여 말할 때에는 ‘회장님의 말씀이 있으시겠습니다’로 써야 함을 알 수 있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13 風文 R 1139
“졸리면 쉬어야 되지 말입니다” KBS 2TV 수목 드라마 ‘태양의 후예’가 지난주 최종회 시청률 38.8%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하며 막을 내렸다. 드라마 속 유시진 대위(송중기)와 의사 강모연(송혜교), 서대영 상사(진구)와 윤명주 중위(김지원)는 각각 ‘송송커플’과 ‘구원커플’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최종회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을 맺었다. 특히 ‘태양의 후예’는 주연 배우들의 솔직하고 담백한 대사들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유시진 대위가 강모연에게 “그 때 허락 없이 키스한 것 말입니다. 사과할까요? 고백할까요?”라고 말했고 이후 강모연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묻는 유시진에게 “저 안 가요. 대위님이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방금 나 고백한 것 같은데, 사과할까요?”라고 말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또한 극중에서 유시진 대위가 말끝에 ‘~ 말입니다’를 붙이는 군대식 말투는 시청자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는데, 실제로 고속도로에서 졸음운전을 예방하는 안내문에 “졸리면 쉬어야 되지 말입니다”라는 문구가 사용되기도 했다. ‘~ 말입니다’에서 ‘말’은 주로 ‘말이야’, ‘말이죠’ 등의 꼴로 쓰여서 어감을 고르게 할 때 쓰는 군말로, 상대편의 주의를 끌거나 말을 다짐하는 뜻을 나타낸다. 군말은 ‘하지 않아도 좋을 군더더기 말’이기 때문에 “졸리면 쉬어야 됩니다”가 어법상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지만 상대편의 주의를 끌거나 말을 다짐하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혹은 인기 드라마의 대사를 활용해 친근감을 주기 위해 “졸리면 쉬어야 되지 말입니다”라는 문구를 사용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13 風文 R 1087
개비리길과 에메랄드로 도롱뇽 소송 사건으로 유명한 경남 양산의 천성산에 최근 산책로인 누리길이 완성되었다. 이처럼 전국 곳곳에 자연과 더불어 걷는 길들이 앞다퉈 만들어지고 있는데, 누리길처럼 대부분 이름들이 토속어의 멋을 담고 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남해 바랫길, 태안 노을길, 강릉 바우길 등이 다 그렇다. 필자가 사는 창원에서 멀지 않은 창녕 남지에는 개비리길이 있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좁은 벼랑길이다. 갯벌 즉 개의 비리(벼랑의 방언)에서 온 이름일 수 있지만 사람들은 개가 다닌 벼랑길이라는 어원 풀이를 더 좋아한다. 여기에는 작은 전설 하나가 깃들어 있다. 황씨 할아버지네 어미 개가 낳은 새끼 중 유난히 약한 놈이 있어 시집간 딸이 데려갔다. 그러자 어미 개가 매일 찾아와 젖을 먹였는데, 통행이 끊긴 폭설에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눈이 드문 벼랑 면의 좁은 길로 다닌 것이었는데, 이를 안 사람들이 이 길을 ‘개비리길’로 불렀다는 것이다. 남해안의 통영에는 ‘토영 이야길’이 있다. ‘토영’은 통영, ‘이야’는 가까운 언니, 누나를 허물없이 부를 때 쓰는 이 지역 방언이다. 그러니 토영 이야길은 허물없는 사람들끼리 도란도란 함께 걷기 좋은 길이라는 뜻이다. 길목마다 재미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것만 같은 이름이다. 이런 이름들과는 전혀 딴판인 길 이름들도 있다. (청라)에메랄드로, (청라)크리스탈로, 아카데미로, 하모니로, 파인토피아로, 골든루트로, 사파이어로 등이 그것이다. 몇 해 전부터 신도시 중심으로 생겨나 쓰이고 있는 도로명들이다. 누리길, 개비리길, 올레길에 비하면 이런 외국풍의 이름은 무미건조한 느낌이 든다. 전설도, 이야기도 깃들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도심에도 정감 있는 이름들이 더 많이 생겨났으면 한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12 風文 R 1150
부셔버릴거야 “당신… 부셔버릴거야.” 90년대 방영한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을 배신한 연인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했던 말이다. 드라마 역사상 명대사로 꼽히는 표현이지만 표준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 안타깝다. ‘부숴버릴거야’라고 해야 맞다. 이런 실수는 발음이 비슷한 ‘부수다’와 ‘부시다’를 잘 구분하지 못한 탓이다. ‘부수다’는 ‘도둑이 문을 부수고 침입했다.’거나 ‘과자를 부숴서 아이에게 주었다.’처럼 물건을 깨뜨리거나 여러 조각으로 잘게 나눌 때 쓰는 말이다. ‘부시다’는 ‘솥을 말끔히 부셔 놓아라.’처럼 그릇 따위를 깨끗하게 하거나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어.’라고 할 때처럼 빛이 강렬하여 마주 바라보기 어려운 상황에 쓰는 말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인생을 산산이 깨뜨려 못쓰게 만들겠다는 뜻을 나타내려면 ‘부숴버리다’라고 해야 맞다. 그런데 ‘부숴버리다’와 달리 ‘부서지다’는 ‘부숴지다’로 쓰면 안 되고 반드시 ‘부서지다’로 써야 한다. 이미 중세국어에서부터 ‘부수다’와 ‘부서지다’는 각기 다른 말로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부수다’의 어간 ‘부수-’에 ‘-어지다’가 결합하면 ‘부숴지다’가 되는데 왜 ‘부서지다’만 맞고 ‘부숴지다’는 틀렸다고 하는 걸까. 이것은 사실 선택의 문제로, 우리가 ‘부서지다’만 표준어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뜻이 같고 발음이 비슷한 말이 여러 개 있으면 그 중 하나만을 표준어로 삼는 것이 원칙이다. 혼란을 피하기 위한 것인데, 예를 들어 ‘봉숭아/봉선화’, ‘아내/안해’ 중에서 ‘봉숭아’, ‘아내’만을 표준어로 인정하는 식이다. 마찬가지 원칙에 따라 ‘부서지다’와 ‘부숴지다’ 중에서는 오래 전부터 써 왔고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부서지다’를 표준어로 정한 것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12 風文 R 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