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연지기(浩然之氣) 浩:넓을 호. 然:그럴 연. 之:갈 지(…의). 氣:기운 기. [준말] 호기(浩氣). [동의어] 정대지기(正大之氣). 정기(正氣). [출전] ≪孟子≫ <公孫丑篇) ①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넓고도 큰 원기. ② 도의에 뿌리를 박고 공명 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바 없는 도덕적 용기. ③ 사물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고 즐거운 마음. 전국 시대의 철인(哲人) 맹자(孟子)에게 어느 날, 제(齊) 나라 출신의 공손추(公孫丑)란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나라의 재상이 되시어 도를 행하신다면 제나라를 틀림없이 천하의 패자(覇者)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선생님도 역시 마음이 움직이시겠지요?” “나는 40 이후에는 마음이 움직이는 일이 없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마디로 ‘용(勇)’이다. 자기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두려울 게 없고, 이것이야말로 ‘대용(大勇)’으로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최상의 수단이니라.” “그럼,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告子)의 부동심은 어떻게 다릅니까?” 고자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하여 ‘사람의 본성은 선(善)하지도 악(惡)하지도 않다’고 논박한 맹자의 논적(論敵)이다. “고자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을 애써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이는 소극적이다. 나는 말을 알고 있다[知言]는 점에서 고자 보다 낫다. 게다가 ‘호연지기’도 기르고 있다.” ‘지언’이란 피사(편역된 말), 음사(淫辭:음탕한 말), 사사(邪辭:간사한 말), 둔사(遁辭:회피하는 말)를 간파하는 식견을 갖는 것이다. 또 ‘호연지기’란 요컨대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를 말하는 것으로서 천지간에 넘치는 지대(至大), 지강(至剛)하고 곧으며 이것을 기르면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천지까지 충만 한다는 원기(元氣)를 말한다. 그리고 이 기(氣)는 도와 의(義)에 합치하는 것으로서 도의(道義)가 없으면 시들고 만다. 이 ‘기’가 인간에게 깃들여 그 사람의 행위가 도의에 부합하여 부끄러울 바 없으면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도덕적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Board 고사성어 2024.07.04 風文 R 386
빗방울이 듣다 “빗방울이 듣는 차창으로…” 언젠가 낡은 버스 차창 안으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원고를 보낸 후 인쇄된 글을 보니 ‘듣는’이 ‘드는’으로 고쳐져 있었다. ‘듣다’는 비나 눈물 따위가 방울져 떨어지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는 흔히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오타로 여겨질 만큼 생소한 말이 되고 말았다. 다행히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적긴 하지만 ‘빗방울이 듣는 일요일 아침 옥상 텃밭에서’, ‘호수엔 빗방울 듣고’처럼 몇 용례가 보인다. 문학적 감성까지 어우러져 더욱 반갑게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그릇을 부시고” 이 말을 적어 아이들에게 보여 주었더니 하나같이 그릇을 깨뜨렸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흔히 ‘부수다’를 ‘부시다’라고 하는 데 이끌린 탓이다. ‘부시다’는 그릇 따위를 물로 씻어 깨끗이 한다는 뜻이다. 그 정갈한 느낌 때문인지 입안을 헹구는 경우에도 쓰였다. 이 역시 예전에는 적잖이 쓰이던 말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세력이 약해져 이제는 ‘부수다’의 비표준어 ‘부시다’로만 이해되는 데 이르고 말았다. 마치 단아한 아가씨가 우락부락한 장정이 되고 만 느낌이랄까. ‘부시다’에는 ‘씻다’에는 없는 고유한 뉘앙스가 있다. 햇살이 반짝이며 튕겨져 나가는 듯 맑고 시원한 느낌은 오직 ‘부시다’에만 있다. 그래서 낱말 하나하나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선진 국가에서는 그 나라의 국어 시간에 어휘 교육에 굉장히 힘을 쏟는다고 한다. 풍부한 어휘력은 사고력과 표현력을 높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휘 교육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다면 우리말도 더 풍요로워지고 아이들도 더욱 지혜로워지지 않을까.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04 風文 R 957
들르다, 들리다 “집에 가는 길에 잠깐 들려.” “그래, 여섯 시쯤 들릴게.” 이 대화에서 ‘들려’와 ‘들릴게’는 잘못 쓰인 말이다. ‘들러’와 ‘들를게’로 적어야 한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어가 머무르다’는 뜻을 지닌 말은 ‘들르다’인데 ‘들리다’로 잘못 쓰는 사람들이 많다. 기본형이 ‘들르다’이므로 ‘들러서, 들르니’ 등으로 활용한다. ‘그는 서점에 자주 들르는 편이다’ ‘집에 오다가 시장에 들러 반찬거리를 사 왔다’처럼 쓰면 된다. 그런데도 이 말을 ‘들려, 들리니’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기본형을 ‘들리다’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본형을 ‘들르다’로 제대로 알고 있다면 잘못 쓸 이유가 없다. ‘소리를 지르지 마시오’, ‘점심을 걸렀더니 힘을 못 쓰겠다’ 같은 말에서 ‘지르다’ ‘거르다’ 등을 잘 활용해서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들르다’와 마찬가지로 ‘-르다’로 끝나는 ‘지르다’와 ‘거르다’를 활용할 때 ‘(소리를) 질렀다’나 ‘(점심을) 걸렀다’ 대신 ‘질렸다’나 ‘걸렸다’를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본형이 ‘지르다, 거르다’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들르다, 들리다’처럼 기본형을 곧잘 혼동하는 말 중에 ‘구르다’가 있다. 매우 안타까워하거나 다급해하는 상황을 나타낼 때 쓰는 표현인 ‘발을 구르다’를 ‘발을 굴리다’로 잘못 쓰는 것이다. 지난달 제주도 비행기 결항 사태를 보도한 기사 중에 ‘회항하지 않았을까 우려된다며 발을 동동 굴렸다’는 표현이 있었다. 기본형이 발을 ‘굴리다’가 아니라 ‘구르다’이므로 ‘발을 동동 굴렀다’로 써야 맞다. ‘굴리다’는 바퀴처럼 둥근 물건을 굴러가게 하다는 뜻이므로 ‘발을 굴리다’는 성립하지 않는다. 발을 들었다가 힘주어 내려놓는 동작을 나타내는 ‘구르다’를 써서 ‘발을 굴러, 발을 구르니’ 등으로 쓴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04 風文 R 904
왜 ‘밸런타인데이’인가? 매년 2월 14일은 여성이 남성에게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초콜릿을 선물하는 밸런타인데이이다. 이 날은 고대 로마의 그리스도교 성인인 발렌티누스(영어로는 밸런타인)를 기리는 축일인데, 3세기 무렵 고대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가 징집된 병사들이 출병 직전에 결혼을 하면 다른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대의 기강이 문란해질 것을 염려해 결혼을 금지시켰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발렌티누스 사제가 몰래 혼인성사를 집전했다가 순교한 날을 기린 것이라는 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Valentine’s Day’의 외래어 표기가 왜 ‘발렌타인데이’가 아니라 ‘밸런타인데이’일까? 아직도 많은 언중들은 이 날을 ‘발렌타인데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고 ‘밸런타인데이’가 바른 외래어 표기이다. ‘Valentine’s Day’는 영어이기 때문에 영어 발음을 따라 외래어 표기를 해야 하는데, ‘Valentine’의 영어 발음은 [v'l'ntain]이다. ‘외래어 표기법’ 제2장 표 1에 따르면 [æ]는 ‘애’로, [?]는 ‘어’로 적어야 하므로 ‘Valentine’을 ‘밸런타인’으로 적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인 ‘Abraham Lincoln’의 외래어 표기는 ‘아브라함 링컨’이 아닌 ‘에이브러햄 링컨’인데, ‘Abraham’의 영어 발음이 [eibr'hæ'm]이기 때문이다. ‘상표 사용료’라는 의미의 ‘royalty’도 영어 발음이 [roi?lti]이기 때문에 ‘로얄티’가 아닌 ‘로열티’로 표기해야 한다. 축제를 뜻하는 ‘festival’ 역시 영어 발음이 [fest?v?l]이므로 ‘페스티발’이 아닌 ‘페스티벌’로 표기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04 風文 R 1004
한단지몽(邯鄲之夢) 邯:땅 이름 한. 鄲: 땅 이름 단. 之:갈 지(…의). 夢:꿈 몽. [동의어] 한단지침(邯鄲之枕), 한단몽침(邯鄲夢枕), 노생지몽(盧生之夢), 일취지몽(一炊之夢), 영고일취(榮枯一炊), 황량지몽(黃粱之夢) [출전] 심기제(沈旣濟)의 ≪枕中記≫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뜻으로, 인생의 덧없음과 영화(榮華)의 헛됨의 비유. 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이다. 도사 여옹이 한단[하북성(河北省)내]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서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 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에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 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속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서울을 다스리는 으뜸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투기하는 바람에 단주 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 후 10년간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은 포박 당하는 자리에서 탄식하여 말했다. “내 고향 산동에서 땅뙈기나 부쳐먹고 살았더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애써 벼슬길에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걷던 때가 그립구나.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는 칼을 들어 자결하려 했지만 아내와 아들이 말리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 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년 후 원죄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을 제수(除授)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만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애를 마쳤다. 노생이 깨어 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옹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는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노생은 여옹에게 공손히 작별 인사를 고하고 하단을 떠났다.
Board 고사성어 2024.07.03 風文 R 374
‘노랗네’와 ‘노랗니’의 명암 “색이 노랗네.” 이 말은 표준어일까? 정답은 ‘그렇다’이다. 하지만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노랗네’는 표준어가 아니었으며 ‘노라네’가 표준어였다. ‘노랗다, 빨갛다, 동그랗다, 조그맣다’ 등은 ‘ㅎ’ 불규칙용언으로서 어미 ‘-네’가 결합하면 ‘ㅎ’이 탈락하여 ‘노라네, 빨가네, 동그라네, 조그마네’가 된다. 그런데 인터넷 블로그를 검색해 보면 오히려 ‘노랗네, 빨갛네, 동그랗네, 조그맣네’가 몇 배쯤 많이 쓰인다. 규범과 달리 현실 언어에서는 ‘ㅎ’을 탈락시키지 않고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그래서 정부는 지난해 12월에 ‘노랗네, 빨갛네, 동그랗네, 조그맣네’ 등도 표준어로 인정하였다. 결과적으로 ‘노라네, 노랗네’ 둘 모두 표준어가 되었다. “색이 노랗니?” 이 말도 표준어일까? 정답은 ‘아니다’이다. ‘노랗네’와 달리 이 ‘노랗니’는 표준어가 아니며 ‘노라니’만 표준어이다. 의문형 어미 ‘-니’가 결합한 말은 여전히 ‘ㅎ’이 탈락한 ‘노라니, 빨가니, 동그라니, 조그마니’만 표준어로 삼고 있는 것이다. ‘노랗니, 빨갛니, 동그랗니, 조그맣니’도 널리 쓰이지만 아직 표준어가 되기에는 부족하다고 보아서일 것이다. 다만 ‘노랗네’는 표준어인데 왜 ‘노랗니’는 표준어가 아닌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노라네, 노라니’라고 말하는 화자는 불규칙활용을 따르는 것이고, ‘노랗네, 노랗니’라고 말하는 화자는 규칙활용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 ‘노랗네’만 표준어라고 한다면 뭔가 짝이 맞지 않는 느낌을 받게 된다. ‘노랗네’처럼 규칙활용을 인정한다면 같은 맥락의 활용형인 ‘노랗니’도 표준어로 인정하는 것이 좀 더 쉽고 편한 정책이 아닐까 싶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03 風文 R 1104
세배할 때 인사말 설날의 백미는 역시 세배다. 가족 간의 정과 웃음이 오가는 곳이 세배하는 자리다. 그런데 세배를 할 때도 언어 예절이 있다. 종종 세배를 드리겠다고 어른에게 “절 받으세요”, “앉으세요”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올바른 예절이 아니다. 가만히 서 있다가 어른이 자리에 앉으면 말없이 공손히 절을 하는 것이 옳다. 다만 나이 차가 많지 않은 어른인 경우에는 절 받기를 사양하는 경우가 있다. 절 받기를 사양하는 것도 일종의 예절이고, 절 받기를 권하는 것도 예절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절 받으세요”, “앉으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 절을 하면서, 또는 절한 후 곧바로 어른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배할 때는 절하는 것 자체가 인사이기 때문에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와 같은 인사말은 없어도 되고, 무엇보다도 어른에 앞서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그냥 공손히 절만 하고 어른의 덕담이 있기를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예법인 것이다. 세배 받는 어른은 절한 사람에게 덕담을 한다. “소원 성취하게”가 정형적인 덕담이라 할 만하고, 그 외 상대방 처지에 맞게 “건강하게 자라거라”, “올해 좋은 인연 만나야지”와 같이 적절히 덕담을 할 수 있다. 절을 한 사람도 어른의 덕담이 있은 뒤에 “올해에도 등산 많이 하세요”, “늘 재미있게 사세요”처럼 상대방 처지에 맞게 적절히 인사말을 한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인사말이 가능한데, 어떤 것이든 상대방의 행복을 바라는 진심이 담겨 있다면 그것이 가장 좋은 세배 인사말이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03 風文 R 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