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뜩잖다, 마땅찮다 “… 이름을 줄줄이 거론하며 시간을 늘이는 배우들의 수상 소감이 마뜩한 것은 우리만의 일이 아닌 듯하다.” 지난달 미국에서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과 관련한 신문 기사 중 일부다. 신세진 사람들을 일일이 거명하는 수상 소감을 금지키로 한, 주최 측의 지침을 환영한다는 내용이다. 이 중에 ‘마뜩한’은 잘못 쓰였다. ‘마뜩하다’는 ‘상당히 흡족하다’는 말이므로 여기서는 뜻이 통하지 않는다. ‘마뜩하지 않은’이라고 하거나 준말인 ‘마뜩잖은’으로 써야 한다. ‘마뜩하지 않다’의 준말을 ‘마뜩잖다’로 쓴다고 하면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뜩하지 않다’와 뜻이 비슷한 ‘마땅하지 않다’를 줄여서 ‘마땅찮다’로 쓰는 것처럼 ‘마뜩찮다’로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혼란스러울지 모르나 ‘마뜩잖다’와 ‘마땅찮다’로 각각 구분해 써야 한다. 이는 ‘하지 않다’가 줄어들 때 ‘잖다’와 ‘찮다’ 두 가지로 발음되는 현상을 표기에 반영한 결과다. ‘-하다’로 끝나는 용언의 어간이 어미 ‘-지 않다’와 결합해 줄어들 때는 그 앞소리가 울림소리인지 여부에 따라 소리가 달라진다. 우선 울림소리(유성음: 모음과 ㄴ, ㄹ, ㅁ, ㅇ) 뒤의 ‘하’는 모음 ‘ㅏ’만 떨어지고 ‘ㅎ’은 남아, 뒤에 있는 ‘지’와 결합하여 ‘치’ 소리를 만들게 된다. 예를 들어 울림소리인 ‘ㅇ’ 받침으로 끝나는 ‘마땅’에 ‘하’가 결합한 ‘마땅하지 않다’는 ‘마땅ㅎ+지 않다’로 줄어서 ‘마땅치 않다’가 된다. 이것을 더 줄여 ‘마땅찮다’로 적는 것이다. 반면에 안울림소리(무성음: 유성음을 제외한 모든 소리) 뒤에서는 ‘하’ 소리가 통째로 탈락한다. 곧 ‘마뜩하지 않다’는 ‘마뜩+지 않다’로 줄어들어 ‘마뜩지 않다’가 되고 다시 ‘마뜩잖다’로 줄여서 적는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10 風文 R 1147
찬란한 슬픔의 봄 봄은 겨우내 얼어붙은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의 계절이다. 그러나 T.S.엘리엇은 봄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했다. 그는 ‘황무지’에서 “차라리 겨울에 우리는 따뜻했다”며 계절의 순환 속에서 다시 버거운 삶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봄을 잔인한 계절로 묘사한 것이다. 김영랑 시인도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봄을 ‘찬란하지만 슬픈 계절’로 묘사했다. 그런데 ‘찬란’과 ‘슬픔’은 서로 모순되는 말이다. ‘찬란함’은 ‘아름다움’과 ‘빛남’을 표현하는 말이어서 ‘슬픔’과는 호응할 수 없는데도 김영랑 시인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고 했다. 김영랑은 슬프지만 절망적인 슬픔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아름답고 화려한 슬픔이라는 의미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고 했다.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말을 사용해 의미를 강조하는 역설법은 문학작품에서 많이 사용된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조지훈 ‘승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유치환 ‘깃발’)이 대표적인 경우다. 일상생활에서도 역설적인 표현들이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때 아닌 호황에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창조적인 파괴를 통해 조직을 재편해야 한다’ 등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사용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 진실을 담고 있는 표현들이다. 올해 우리나라의 봄은 ‘잔인한 계절’이 되고 있다. 경기침체와 극단적인 남북 대치상황, 4ㆍ13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뒤숭숭한 분위기까지 겹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희망의 꽃이 피기까지는 김영랑 시인처럼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10 風文 R 1151
화씨지벽(和氏之璧) 和:화할 화. 氏:각시 씨. 之:갈 지(…의). 璧:둥근 옥 벽. [준말] 화벽(和璧). [동의어] 변화지벽(卞和之璧) [유사어] 완벽(完璧). 연성지벽(連城之璧) [참조] 완벽(完璧). [출전] ≪韓非子≫ 〈卞和〉 천하 명옥(天下名玉)의 이름.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월형(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그러안고 궁궐 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렸다.
Board 고사성어 2024.07.09 風文 R 442
세 가지 꽃 이름 오늘 이야기는 꽃 이름 세 가지. 첫째는 오래 전 이 땅에서 태어나 전해 오는 이름들이다. 전래의 봄꽃 이름만 해도 진달래, 민들레, 꽃다지, 남산제비꽃, 나도바람꽃, 은난초, 히어리, 봄맞이, 골무꽃, 양지꽃 등 그야말로 지천이다. 김용택 시인은 ‘흉년 양식’이라는 시에서 밀래초, 코딱지나물, 풍년초 등을 일러 “저 남산 꽃산자락에 이 모든 풀이 다 우리들의 밥이었니라 목숨이었니라”라고 노래하였는데, 이를 흉내 내어 말한다면 이 꽃 이름들은 우리말의 목숨 같은 양식이다. 둘째는 이 시대에 태어난 이름이다. 지난해 학교 행사용으로 주문한 물품 중에 이른바 ‘코르사주’라는 게 빠져 있었다. 필자도 그리 익숙지 않은 단어라 더듬거리고 있는데, 배달 온 분이 “가슴꽃 말이죠?”라고 하는 것이었다. 가슴에 다는 꽃, 가슴꽃. 참 쉽고 편한 말이었다.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지만, 나중에 보니 해당 업계에서 조금씩은 쓰이고 있었다. 프랑스어에서 온 ‘코르사주(corsage)’는 어렵게 느껴지는 말이다. 그렇다 보니 종종 ‘코사지, 꽃사지’ 등으로 변형되어 쓰이기도 한다. 정부의 공식적인 순화어는 ‘맵시꽃’이지만 ‘가슴꽃’은 당당히 언중들 사이에서 태어난 말이다. 그래서 더욱 애정이 간다. 셋째는 꽃이 아닌 꽃이다. 이 무렵 필자가 사는 남해안에는 바다에도 봄이 오고 있다. 이곳에는 벚꽃 필 때가 되면 바다 밑에는 멍게꽃이 핀다는 말이 있다. ‘멍게꽃’은 발갛게 물이 오르는 멍게가 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눈꽃’처럼 언중들이 만들어낸 멋진 비유적 표현이자 어민들의 기쁨이 그대로 느껴지는 말이다. 세 가지 꽃 이름들, 우리말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이런 말들이 정말 고맙다. 허철구 창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Board 말글 2024.07.09 風文 R 1071
집밥, 친오빠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한다. 특히 새로 만들어진 말이나 갑자기 사용이 증가한 말들을 살펴보면 우리 사회의 변화가 한눈에 들어온다. 최근 눈에 띄는 현상은 ‘집밥’과 ‘친오빠’라는 말의 사용 증가다. 본래 밥은 집에서 식구들과 함께 해 먹는 것이기에 집에서 먹는 밥을 이르는 말은 따로 없었다. 집에서 먹는 밥은 그냥 ‘밥’이고 어쩌다 한 번씩 밖에서 먹는 밥을 가리키기 위해서 ‘외식’이라는 말이 존재했다. 그러나 요즘 우리의 식생활 문화는 상당히 달라졌다. 외식이 점차 일상화되고 그에 따라 집에서 만들어 먹는 밥을 따로 가리킬 말이 필요해졌다. 빅데이터 분석가들에 따르면 최근 일상적인 대화에서 음식을 ‘만든다’는 말보다 ‘먹으러 간다’는 표현이 압도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지난 연말 농림축산식품부 조사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식비의 40%를 외식비로 지출했다고 한다. ‘집밥’이란 말이 탄생한 데에는 우리 사회의 이런 변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새말은 아니지만 ‘친오빠’의 사용 증가도 중년 이상의 세대에게는 상당히 낯설다. 그냥 ‘오빠’라고 하면 당연히 친동기간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고,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은 ‘친척 오빠’ ‘선배 오빠’ 등으로 구분해 쓰는 게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오빠’는 대개 연인을 가리키는 말로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젊은 여성들이 ‘우리 오빠’라고 하는 사람은 대개 남자친구거나 심지어 남편인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어를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해외 한류 팬 중에는 남편을 오빠라고 부르는 드라마를 보고 한국에서는 남매간에도 결혼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언어사용이 지속된다면 머잖아 ‘오빠’는 연인을 가리키는 말에 자리를 내주고 ‘친오빠’만이 손위 남자형제를 특정해 부르는 말로 굳어지게 될지 모르겠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7.09 風文 R 1047
‘컷오프’의 운명 4ㆍ13 총선을 앞두고 여야 각 당이 공천 심사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컷오프’라는 용어가 뉴스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원래 ‘컷오프(cutoff)’는 골프 등의 스포츠에서 사용되던 말로 ‘일정 성적 이하인 선수를 탈락시켜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하게 하는 규칙’을 말한다. 보통 4라운드로 진행되는 프로골프 경기에서 2라운드까지의 성적을 기준으로 상위 70여 명만 3라운드에 진출하고 나머지 선수들은 탈락하게 되는데, 이를 ‘컷오프’라고 한다. ‘컷오프’는 최근 총선을 앞둔 각 당의 공천 심사에도 사용돼 ‘정당에서 현역의원을 평가해 하위에 속한 사람을 공천에서 배제하는 제도’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컷오프’는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 외래어로 등록되어 있지 않은 말이기 때문에 신문, 방송을 비롯한 공공언어에서는 ‘컷오프’라는 말 대신 우리말로 순화한 표현을 써야 한다. 국립국어원에서는 2002년 컷오프를 ‘탈락’으로 순화해 사용할 것을 권고했는데, 최근의 공천 심사에서 쓰이는 컷오프는 ‘공천 탈락’ 혹은 ‘공천 배제’ 등의 말로 순화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거와 관련해 또 자주 등장하는 말로 ‘매니페스토’가 있다. ‘매니페스토(manifesto)’는 ‘공직 후보자가 유권자에게 선거 공약의 정책 목표와 실현 시기, 예산 확보 근거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말하는데, 역시 외래어로 등록되지 않은 말로서 ‘참공약’으로 순화해 사용해야 한다. 이외에도 ‘정책의 현실성을 외면하고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는 정치행태’를 뜻하는 ‘포퓰리즘(populism)’은 ‘대중주의’ 혹은 ‘대중영합주의’로 순화해 사용해야 한다. 유지철 KBS 아나운서실 한국어연구부장
Board 말글 2024.07.09 風文 R 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