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 없음, 닫혔음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는 당시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는 1989년 2월의 어느 날 TV 뉴스를 통해 맞춤법과 표준어 개정 소식을 다루었다. 뉴스를 보던 고등학생 선우가 동생의 공책에 쓰인 ‘있읍니다’를 얼른 ‘있습니다’로 고쳐 주는 장면이 방영되었다. 1988년 개정 이전에는 ‘읍니다’와 ‘습니다’를 둘 다 쓰도록 했다. 즉 ‘읍니다’보다 ‘습니다’가 더 깍듯한 표현이라고 하여 둘을 구분해서 썼다. 그러나 점차 둘 사이에 의미 차이가 없어지게 되어 ‘습니다’ 하나로 통일해서 쓰도록 한 것이다. 이에 ‘있읍니다, 먹읍니다, 입읍니다’ 등은 더 이상 쓰지 않고 ‘있습니다, 먹습니다, 입습니다’로만 적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의 개정 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있음, 없음’ 등도 모두 ‘있슴, 없슴’으로 바뀐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있음, 없음’을 ‘있습니다, 없습니다’의 준말로 알고 ‘있슴, 없슴’으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음’은 동사나 형용사를 명사로 만들어주는 명사형 어미로, ‘습니다’와는 상관이 없다. ‘지금 여기 있음은 없음만 못하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음으로써 잡귀를 쫓는다’ 같은 문장을 살펴보자. ‘있다, 없다, 먹다’ 같은 형용사나 동사를 명사처럼 기능할 수 있게 바꾸어주는 역할을 ‘음’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습니다’는 서술형으로 문장을 끝낼 때 쓰는 어미 ‘ㄴ다’의 높임말이다. ‘아침에 밥을 먹는다’ 대신 ‘밥을 먹습니다’로 쓰면 상대를 높이면서 문장을 끝맺게 된다. 이 ‘습니다’ 형태는 따로 준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주변에서 흔히 보는 ‘있슴, 없슴, 닫혔슴’ 등은 모두 잘못된 표기다. ‘있음, 없음, 닫혔음’으로 적어야 맞다. 정희원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Board 말글 2024.06.24 風文 R 972
‘느지막하다’ ‘나지막하다’ 서양의 ‘브런치(brunch)’ 문화가 어느새 우리 사회에도 널리 퍼지고 있다. ‘아침 겸 점심’을 뜻하는 우리말 ‘아점’이 다소 속된 느낌, 놓친 끼니를 때운다는 느낌이 드는데 비해 영어인 ‘브런치’에서는 품격과 여유가 느껴진다면 이 또한 문화적 사대주의 탓일까? 아무튼 매일 아침, 시간에 쫓기는 맞벌이 주부인 나에게 여유롭게 즐기는 ‘느지막한 아침식사’는 바람일 뿐이다. ‘느지막한 아침식사’에서 ‘느지막하다’를 ‘늦으막하다’로 잘못 쓰는 경우가 많다. ‘늦다’는 뜻과 연관시켜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지막하다’도 ‘낮다’는 뜻을 떠올려 ‘낮으막하다’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말들은 ‘느지막’ ‘나지막’이라는 어근에 ‘-하다’가 붙어 생긴 말로 ‘느지막하다’ ‘나지막하다’가 맞는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느지막’과 ‘느즈막’, ‘나지막’과 ‘나즈막’이 헷갈릴 수 있다. ‘으’가 ‘이’로 바뀌는 전설모음화 현상으로 설명하는 이도 있으나 뚜렷하지는 않다. 비슷한 형태의 말 중에 ‘큼지막하다’ ‘높지막하다’를 생각하면 쉽다. ‘-즈막하다’로 끝나는 말은 표준어에는 없다. 따라서 ‘느지막한 출근’ ‘나지막한 목소리’ 등과 같이 써야 한다. ‘-하다’가 붙는 말이기 때문에 부사형에는 ‘히’가 붙어 ‘느지막히’ ‘나지막히’가 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느지막이’ ‘나지막이’가 맞다. 마찬가지로 ‘큼지막’ ‘높지막’에도 ‘이’가 붙어 ‘큼지막이’ ‘높지막이’가 된다. ‘늘그막’이라는 말도 ‘늙다’는 뜻 때문에 ‘늙으막’이라고 혼동하기 쉬우나 ‘늘그막’이 바른 표현이다. 흔히 ‘널찍하다’와 비슷한 뜻으로 ‘널찌막하다’ 라는 표현도 많이 쓰는데 ‘널찌막하다’는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임수민 KBS 아나운서
Board 말글 2024.06.24 風文 R 1057
칠보지재(七步之才) 七:일곱 칠. 步:걸음 보. 之:갈 지(…의). 才:재주 재. [동의어] 칠보재(七步才), 칠보시(七步詩). [유사어] 의마지재(倚馬之才), 오보시(五步詩). [출전]《世說新語》〈文學篇〉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지을 수 있는 재주라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글재주를 이르는 말. 삼국 시대의 영웅이었던 위와(魏王) 조조(曹操)는 문장 출신이었지만 건안(建安) 문학의 융성을 가져왔을 정도로 시문을 애호하여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 영향을 받아서인지 맏아들인 비(丕:186~226)와 셋째 아들인 식(植)도 글재주가 출중했다. 특히 식의 시재(詩才)는 당대의 대가들로부터도 칭송이 자자했다. 그래서 식을 더욱 총애하게 된 조조는 한때 비를 제쳐놓고 식으로 하여금 후사(後嗣)를 잇게 할 생각까지 했었다. 비는 어릴 때부터 식의 글재주를 늘 시기해 오던 차에 후사 문제까지 불리하게 돌아간 적도 있고 해서 식에 대한 증오심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조조가 죽은 뒤 위왕을 세습한 비는 후한(後漢)의 헌제(獻帝:189~226)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220~226)라 일컫고 국호를 위(魏)라고 했다. 어느 날, 문제는 동아왕(東阿王)으로 책봉된 조식을 불러 이렇게 하명했다. “일곱 걸음을 옮기는 사이에 시를 짓도록 하라. 짓지 못할 땐 중벌을 번치 못할 것이니라.” 조식은 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읊었다. 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으니 [煮豆燃豆(자두연두기)] 가마솥 속에 있는 콩이 우는구나 [豆在釜中泣(두재부중읍)] 본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건만 [本是同根生(본시동근생)] 어찌하여 이다지도 급히 삶아 대는가 [相煎何太急(상전하태급)] ‘부모를 같이하는 친형제간인데 어째서 이다지도 심히 핍박(逼迫)하는가’라는 뜻의 칠보시(七步詩)를 듣자 문제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주] 이후 ‘자두연두기’ 약하여 ‘자두연기’는 ‘형제 혹은 동족간의 싸움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음.
Board 고사성어 2024.06.21 風文 R 352
‘치맥’ ‘치느님’ 많은 사람들이 ‘치킨’을 무척 좋아한다. ‘치맥’과 ‘치느님’이라는 말이 새로 만들어져 쓰일 정도이다. ‘치맥(치킨과 맥주)’은 ‘치킨’과 ‘맥주’을 줄인 말이고, ‘치느님(치킨을 하느님처럼 숭배하는 일)’은 ‘치킨’과 ‘하느님’을 합성한 말이다. 그런데 둘 모두 우리말의 어법에 다소 어긋난다. ‘치맥’은 ‘치킨’과 ‘맥주’ 각각의 첫 음절을 따서 만든 준말이다. 이런 준말을 ‘두자어’라 한다. 우리말에서는 일반적으로 한자어 각각의 첫 음절을 따서 두자어를 만든다. ‘노동조합(勞動組合)’에서 ‘노조’라는 두자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뜻글자인 한자로 이루어진 한자어에서 첫 음절을 따서 만들어 냈기 때문에 두자어의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치킨’은 한자어가 아닌 외래어이다. 그 의미도 쉽게 짐작할 수 없다. ‘프로필 사진(profile寫眞)’의 두자어인 ‘프사’도 그런 예이다. ‘치느님’은 ‘치킨’의 앞부분인 ‘치’와 ‘하느님’의 뒷부분인 ‘느님’을 합성하여 만든 말이다. 이런 말을 ‘혼성어’라 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는 이런 방식의 합성 자체가 자연스럽지 않다. 이는 영어권에서 유래한 합성 방식이다. ‘스모크(smoke)’의 앞부분과 ‘포그(fog)’의 뒷부분을 합성한 ‘스모그(smog)’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말에서는 이러한 합성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 또한 짐작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최근 ‘고기느님(고기+하느님)’ ‘유느님(유재석+느님)’의 ‘~느님’류 혼성어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새말의 의미를 쉽게 짐작할 수 있어 사람들 간에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원활하려면 우리말의 어법을 고려해 새말을 만드는 게 좋겠다. 박용찬 대구대 국어교육과 부교수
Board 말글 2024.06.21 風文 R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