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살리는 우리말 몸으로 익힌 말 시는 언어의 예술 인가? 아니다. 언어 가 아니고 말 이다. 시는 가장 싱싱하게 살아있는 말로 쓰는 예술 이다. 어떤 말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 인가? 싱싱하게 살아있는 말, 곧 시가 될 수 있는 말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깨끗한 우리말일 것. 중국글자말이나 일본글자말, 일본말법으로 된 말, 서양말이나 서양말법으로 된 말 - 이 따위들은 시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원칙이 어디까지나 그렇다. 만약 어떤 시에 이런 깨끗하지 못한 말이 한두 개 들어 있다면 그 시의 값은 그만큼 낮아진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우리가 날마다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말일 것. 깨끗한 우리말이라도 벌써 죽어버린 옛말은 시가 될 수 없다. 나날의 삶에서 누구나 써서 정감이 가고, 그래서 삶의 때가 묻고 냄새가 나는 말일수록 시가 되기에 알맞은 말이다. 셋째는 꼭 하고 싶은 절실한 말일 것. 따라서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고, 알맹이만 있어야 한다. 저 혼자 무엇에 취해서 수다를 떠는 말,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말, 멋을 부리는 말 - 이런 말은 모두 시가 될 수 없거나, 되어도 시시한 시 일 뿐이다. 참아도 참아도 기어코 터져 나오는 말, 지워도 지워도 끝내 남는 말, 이런 말이 시가 된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맞는 말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써온 말,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배우고 형제자매끼리 이웃끼리 나누면서 살아온 말이다. 책에서 배운 유식해 보이는 말이나 문학작품이라는 글에서 읽은 시같은 느낌 이 드는 근사한 말, 멋이 있어 보이는 말이 결코 아니고, 무식한 시골 사람들이 써온 말, 어린이들도 잘 아는 말이다. 머리로 논리로 배운 말이 아니고 느낌으로 몸으로 익힌 말이다. 그렇다. 시골 농사꾼들의 말, 어린이의 말, 이것이 가장 훌룡한 시가 될 수 있는 말이고, 앞으로 우리말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이 말을 제쳐 놓고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시골말과 어린이말이 우리 시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알아 보자. 우리 시에 나타난 시골말 요즘 우리 문단에서 일제 말기에 평안북도 시골말로 구수한 시를 썼던 백석의 시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 백석의 시 한 편을 들어 본다. 제목은 <마을은 맨천 구신이 되서>다. 맨천 은 맨 온통 이란 말이고, 구신 은 귀신 이란 말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아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 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흔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세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빠져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에 연자간에는 또 여자당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가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보다시피 이렇게 온통 시골말로 되어 있다. 백석의 시는 시골말만을 모아 놓은 것 같아 나 같은 사람도 모르는 말이 많이 나오니, 요즘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은 더구나 읽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시골말을 아무 뜻도 없이 그저 모아 놓기만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보여 주거나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시골말을 살려 놓고 있어서, 백석의 시를 읽으면 우리말이 이렇게 풍성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내가 우리말을 너무 모르고 있구나, 우리가 너무 우리말은 돌보지 않고 한자말과 교과서 같은 데서나 나오는 표준말로만 글을 써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최남선 때부터 거의 모든 시인들이 일본말을 잘못 직역해 놓은 괴상한 말로 시를 써 와서 그런 시만 읽어 온 때문이다. 더구나 해방이 되고부터는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끔찍한 전쟁까지 치르는 통에 지난날 그나마 우리말을 얼마쯤이라도 살려서 쓰던 많은 문인들을 잃어 버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작품조차 읽을 수 없게 되어 거의 반세기 동안을 우리들은 주로 서양사람들의 글을 옮겨 놓은 괴상한 글만을 읽어 왔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백석은 남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이 아니고 해방 때부터 북에서 산 사람이지만, 북쪽의 시인이라고 해서 일제시대에 썼던 그의 시조차 못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읽게 되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를 해방 때부터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읽고 우리말을 익히고 우리 정서를 이어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가장 우리 것답고 우리 마음에 가까운 것을 도리어 서양 것보다 어 낯설게 대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백석의 시를 한 편만 더 들겠다. 모닥불 이란 제목이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니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기왓장도 닭의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나무로 불을 피우는 아궁이를 보기가 쉽지 않고, 추운 날 들판에서 일하다가 검불을 끌어 보아 모닥불을 피워서 손을 쬐는 일은 더구나 겪어 보기 어려워, 요즘 학생들은 모닥불이란 말조차 모를 것 같고, 이런 시의 맛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도 서울이고 어느 도시고 시장 한쪽 길바닥에 과일이며 나물들을 펴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겨울이면 이른 아침 길가에 판자쪽이며 나뭇잎들은 태우면서 손을 녹이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으니, 이렇게 불을 피워서 쬐는 생활은 앞으로 세월이 더 지난다고 해도 아주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시대가 달라지고 생활이 바뀌면 말도 옛날에 쓰던 말이 조금씩 사라지고 새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활 따라 말이 달라지더라도 지금까지 쓰던 말을 아주 버리고는 낯설고 엉뚱한 새 말을 지어낼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지금까지 써오던 말을 잘 살려서 쓰는 것이 슬기롭다. 그래서 새 말이 되더라도 우리말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조금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해야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늦기는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말, 잊어 버린 우리말을 다시 찾아야 되겠고, 시골말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있다. 백석이 이렇게 우리말을 놀라울 만큼 잘 살려 놓은 시를 썼지만, 그이도 글만 쓴 시인이라 농사꾼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그려 보인 시는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백석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때, 우리말과 우리 글을 잃어 버리고 빼앗기고 해서 우리 겨레가 살아남기조차 어렵게 되었을 때, 아주 땅에 묻히고 말았을 우리말을 가장 잘 살려 놓은 시로 높이 보아야 할 것이다. 시집을 많이 읽은 사람은 어려운 한자말이나 보통사람들이 쓰지 않는 서양말을 쓰면 근사해 보이고 새로운 시의 맛이 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자말이나 서양말, 외국말법보다는 오히려 우리 시골말, 시골에 남아 있는 사투리를 쓰면 시가 살아나고 새로워 보인다. 시골말, 시골 사투리가 가장 깨끗한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백석의 시가 이제 와서 높이 평가받게 되는 까닭이 이러하다. 아이들의 시도 마찬가지다. 구름 구름이 햇님을 꼭 안고 놔 주지 않았다. 그런데 햇님이 가랑이 쌔로 윽찌로 빠자 나왔다. - 63.10.31. 상주청리 3학년 박선용 감나무 감나무가 웃고 있는가비라 팔랑팔랑 웃고 있는가비라 - 67.5.23. 경주 2년 정경자 복숭아꽃 복숭아꽃은 날마다 방글방글 웃는 빛이 가지다. - 70.4.30. 안동 대곡분교 3년 이창순 이슬 이슬이 쬐꼼한 게 나와 있다. 내가 이슬이라면 좋겠다 하니 이슬이 나보고 그면 니가 내고 내가 니고 한다. - 70.6.18. 안동 대곡분교 2년 김을자 이 네편의 시에서 밑줄을 그어 놓은 말이 그 지방에서 쓰는 말이다. 이 말들을 모두 표준말이라고 하는 서울말로 고쳐 쓴다면 어찌 되겠는가? 첫시의 경우는 시의 맛이 반쯤 줄어들 것이고, 그외 세시의 경우에는 시의 맛을 거의 잃어 버릴 것이다. 사투리라고 하는 시골말은 지난날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그 어린이들 자신의 말이었다. 요즘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어 시골말이 많이 쫓겨나고, 그래서 온 나라의 말이 틀에 박혀 버렸지만, 그래도 시골에는 시골마다 조금씩 다른 말을 쓰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들에게 시를 쓰게 할 때는 자기들의 생활말인 사투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살려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어린이들에게 시골말, 곧 사투리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시를 못 쓰게 하는 노릇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중고등학생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골말을 쓰면 효과가 있다고 해서 실제로는 쓰지 않는데 일부러 시골말을 쓴 것같이 해 놓는다면 어찌 될까? 다음은 어느 고등학생이 낸 시집에 들어 있는 시다. 일제 방죽 방죽을 싼 것은 조선놈인데 원북리 사람들 일제 방죽이라 부른다. 앞 시절, 일제 치하게 치를 떨던 시절 우리 라부지덜은 강제 노동에 끌려사 물만 먹은 힘으루 조선 할부지덜이 싼 방죽을 우리들은 일제 방죽이라 부른다. 여기 나오는 할부지덜과 힘으루 는 아직도 시골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런에 이 시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무슨 까닭인가? 이 시는 고등학생이 썼고, 시에 나오는 말도 고등학생인 자신이 한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일제 치하 란 유식한 말을 섰고, 부른다 고 하는 일본말을 직역해 좋은 말을 썼다. 일제 방죽이라고 말한다 고 해야 우리말이 된다. 사람들이 방죽을 보고 일제 방죽아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유식한 말을 쓰고 오염된 말을 쓰는 학생이 할아버지들(할부지들)이라고 하지 않고, 힘으로 라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지도 않는 농사꾼 어른들이 하는 말인 할부지덜 힘으루 를 같은 글에 섞어서 써 놓았으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고, 어른들 말을 흉내낸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국민학교 1학년 아이들도 할아버지들 아버지들 로 쓰고, 힘으로 라쓰지, -덜 -으루 로는 쓰지 않는다. 더구나 유식하고 오염된 글말을 하면서 이런 사투리를 썼으니 이것은 정직한 자기표현이라 볼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조선 놈 더 나은 놈 이라고 해 놓은 말에서 더 분명해 진다. 대관절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할아버지뻘되는 어른들을 이렇게 놈 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시는 시인들이 쓴 시를 흉내낸 것이다. 유식한 말을 쓴 것도, 일본말법으로 된 말을 쓴 것도, 그러면서 일부러 무식한 농사꾼처럼 보이려는 시골말을 쓴 것도, 할아버지뻘되는 어른들을 마구잡이로 놈 이라고 한 것도 모조리 어른 시인들의 흉내를 낸 것이다. 내가 보기로 오늘날 중고등학생들이 쓴 시가 거의 모두 어른들이 쓴 시를 흉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워낙 시를 흉내내기로 배운 때문이다. 시를 흉내내기로만 썼으니 어떻게 진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시골말이고 사투리고 그것을 시로 쓸 수 있다면 우리말을 살리고 시를 살리는 일이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시 자신의 말로 써야 하는 것이지 머리고, 논리로, 어른들 흉내로 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말을 살린다고 해서 저도 쓰지 않는 말, 자기 몸에서 우러나지도 않은 말을 순수한 토박이 말 이라고 해서 쓰기보다는, 차라리 누구나 잘 알고 있고, 누구든지 쓸 수 있으면서 다만 그것이 쉬운 말이라고 해서 버려둔 말을 쓰는 것이 열배도 낫고 백 배도 더 옳은 일이다. 보기를 들면 매일 을 쓰지 말고 날마다 를 쓰고, 출발한다 를 쓰지 말고 나선다 를 쓰고, 비애 를 쓰지 말고 슬픔을 쓰고, 미소한다 고 할 것이 아니라 웃는다 고 하고, 여명 이 아니라 새벽 을 쓰는 따위로 말이다. 우리말과 우리 시는 이렇게 해야 살아난다. 앞에서 시골말투성이로 된 백석의 시를 든 것도 그런 시를 흉내내라고 해서 든 것이 아니다. 그런 시는 흉내를 낼 수도 없다. 다만 지난날 우리말의 세계가 얼마나 풍성하고 재미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 사실 우리 시의 역사에서 뛰어났다고 하는 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는 시를 모두 깨끗한 우리말로 되어 있다는 것은, 시골 사람들만 알고 있는 말이 아니라 시골 사람들도 잘 알고 있어서 누구나 친숙하게 느끼는 말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시골 사람들도 잘 알 수 있는 깨끗한 우리말로 되어 있는 훌룡한 시는, 보기를 들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김소월의 금잔디 산 , 정지용의 고향 , 심훈의 그날이 오면 , 문익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 .. 이밖에도 더 많이 들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시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겨레의 말로 썼기에 온 겨레의 가슴을 울리는 명시가 된 것이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낚시의 즐거움 3 어느 낚시터고 고기가 잘 나오는 자리란 몇몇 군데로 정해져 있고 정해진 자리엔 으레 주인이 있기 마련이다. 자리 주인이 나오지 않았을 땐 좋지만 낚는 도중에 그 주인이 나타나면 멋적다. 그러니 아예 그런 자리는 넘겨다보지 않고 숫제 새 자리를 찾는 수밖에 없다. 말이 쉽지 새 자리를 찾는 일이란 도시 수월한 노릇이 아니라는 걸 낚시꾼이라면 너무나도 잘 아는 사실이다. 모처럼 공휴일을 즐기려던 것이 대개는 새 자리 찾기로 황금의 하루를 낭비하기가 일쑤다. 이런 사실을 마음에 다짐하고 난 후라야 이 어려운 작업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맡겨 두다시피 한 고기를 낚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찾아서 낚는데서 낚시의 참다운 즐거움과 참맛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이런 마음의 자세는 어느 정도 돼 있지만 모처럼 그것이 돼 주지를 않는다. 하나 뜻대로 돼 주지가 않는 데에 실은 낚시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어느 자리에선 매일 정해 놓고 서너 치짜리가 3, 40수씩 무슨 정리처럼 꼬박꼬박 나오기로 돼 있다면 실로 매력이 없는 낚시일 것이다. 낚싯대를 들어 나마나 서너 치짜리밖에 나오지 않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력이 없다기보다도 싱거울 것이다. 사실 그 누구도 앉아 보지 않았던 새 자리에서 상상했던 대로 척척 낚아 질 때처럼 자기만의 황홀을 느끼는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낚시가 다른 오락이나 스포츠보다도 영속적인 매력을 안겨 주는 것도 그것이 무궁무진한 근원을 지니고 있어서이다. 모든 사물이 그렇듯이, 좋은 자리란 우연히 얻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좋은 판단과 시간을 투자한 개척적인 노력에서만 이루어지는 총화일 것이다. 4 낚시에 들린 상태를 가리켜 무슨 일이든 낚시를 하듯 하면 안 될 일이 없을 거라고 한다. 무엇에 들린다거나 심취한다는 그 자체는 확실히 즐거운 일이다. 낚시꾼치고 다소 차이가 있을망정 흘리거나 빠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홀리고 들리거나 또 홀리게 하고 들리게 하는 데가 또 하나의 낚시의 무진한 묘미이고 매력인 것이다. 찌는 듯 무더운 여름날의 대낚시나 한겨울의 삼봉낚시라도 낚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꾼'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다. 새벽에 낚싯대를 둘러메고 떠나가는 마당이야말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가슴이 부풀 대로 부푼 순간이다. 그리고 자신이 마음먹었단 장소에라도 뜻대로 가 앉게 되어 여건들이 착착 들어맞는 날이면 기분은 더할 나위 없다. 게다가 기대한 대고 낚아질 때는 옆에 벼락이 둘러 떨어져도 모를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여느 때 끼니가 좀 늦어질라치면 아우성이고 으르렁대던 사람도 이쯤되면 적어도 한두 끼니는 무난히 걸러 넘긴다. 이런 걸 두고 몰입 혹은 무아삼매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가난한 나라 사람일수록 서민적인 오락의 빈곤이 따르고 심지어는 낚시는 한가한 층이 즐기는 것이고 노인네나 소일풀이로 하는 소외된 놀음으로 여기는 편견이 아직도 더러는 잔존하고 있다.이것은 실은 꽤 실질적인 면을 추궁하면서도 되려 실질적이 못 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로만 여겨진다. 많은 투자가 필요한 승마나 골프는 하나의 떳떳한 스포츠로 보면서도 헐값으로 누구나가 즐길 수 있는 낚시를 꼬집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현대 생활이 긴장을 낳고 복잡해지는 사회일수록 거기서 오는 피로와 병폐를 푸는 작업, 레크리에이션이란 행위가 절실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영국 사람 같은, 우리들보다도 더 실질적인 국민도 낚시를 더 많이 즐기는 것인지 모르겠다. "필드 앤드 스트림"을 보면 영국에서는 해마다 전국 낚시 대회가 국가적인 규모로 열리는데 이 날의 대낚시 대회에는 전국에서 등록된 직업 선수 1천 3백 명 내외가 출전을 하고 더비 데이 못지 않게 벌판에 갑작스런 텐트 도시가 생기고 각종 낚시 연장의 바겐세일, 전국 낚시 상점들의 특제품 전시회, 정부 지정 복권 매매소, 음식점, 술집 등 수십만의 인파와 차량으로 성시를 이룬다. 그리고 영국에는 낚시를 직업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 정도는 영국의 보통 공무원 정도이고 그 수효는 1천 명 이상이라고 했다. 이 선수들은 주로 거의 매주일마다 있는 지방 대회에 출전함으로써 수입을 올리고 있다.이들 낚시는 강낚시이고 미끼는 구더기, 그것도 노랑, 빨강, 하양, 그리고 돼지(꼬리난 구더기)등 다섯 가지를 보통 쓰고 있다. 낚싯대는 플라스틱 제품이 많으나 소위 일류 선수들은 일본에서 수입해 온 참대 대낚을 쓰고 있다. 여하튼 1년에 한 번씩 가을에 열리는 이 전국 낚시 대회는 대회일을 며칠 앞두고서부터 즐거운 축제일처럼 낚시 동호인들은 들뜬다. 막상 대회일이 닥치면 각 지방에서 선출되어 출전한 선수들은 선수대로 몇만 달러의 상금으로 가슴이 부풀고 또 낚시 상인들은 1년 중의 최고의 매상을 올리나 그렇고 또 낚시 애호가나 관광객들은 복권으로 해서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영국이란 나라는 이래서 우리들보다 즐거운 고장이 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5 중국의 문필가 김성탄의 글을 읽으면 여름날의 무더위를 두고 묘사한 재미스런 장면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 그래서 여름 낚시를 하면서 가끔 생각나는 것이 그의 글이다. '여름날 삼복 거리에 돗자리는 축축하고 파리 떼가 얼굴 근처를 날아다니나 아무리 쫓아도 달아나질 않는다. 이 때 별안간 천둥이 우르르 진동을 치더니 이윽고 처마 끝에서 폭포처럼 빗물일 쏟아져 내린다. 이래서 성화스럽던 파리 떼는 자취를 감추어 이 때야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 또한 유쾌한 이 아닐소냐.' 김성탄은 꽤는 가난해서 줄곧 방 안에서 여름 무더위와 싸우는 그런 생활이었으리라. 낚시는 봄, 여름, 가을, 그 어느 계절이고 그것대로 독자적인 맛이 있다. 봄은 봄대로 곡우를 전후해서 산란기를 맞아 신록과 더불어 겨우 내 집 안에 갇혔던 울적을 향기로 씻을 수 있으니 즐겁고, 하지를 지난 무더운 여름은 여름대로 깊은 수심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강바람과 들바람을 쐬니 또 즐겁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은 푸른 하늘과 황금 물결 치는 오곡의 벌판과 울긋불긋 곱게 물든 산야에서 샛바람을 맞는 마음도 또한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낚시 계절 중에서도 여름은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저절로 땀이 흘러내리는데 어떻게 뙤약볕 밑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느냐고 대뜸 반문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낚시를 드리우고 우선 웃도리와 바지를 훨훨 벗어 던진다. 이렇게 해서 팬티 바람이 되어 맨발을 물에 담그어 보라. 그리고서는 양산을 딱 버텨 놓으면 그만이다. 모자도 삿갓도 소용없다. 몸에는 다만 팬티가 한 장 걸쳐 있을 뿐 어느덧 양산 밑으로는 신선이 오락가락한다. 수면을 타고 불어 오는 미풍은 오히려 간지럽기까지 하다. 이쯤 되면 세상엔 부러운 것이 없을 지경이다. 탑탑한 방 안에서 인공적으로 내는 선풍기의 바람을 나는 병적으로 싫어한다. 에어컨디셔너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피서를 제대로 즐길 수 없는 서민들에게는 양산 밑으로 신선이 노니는 여름 낚시는 안성맞춤이다. 하루쯤 이렇게 낚시를 즐기고 나면 며칠은 더위를 모르고 지나게 된다. 별로 땀도 나지 않는다. 왠지 모르지만 몸까지 가벼워진다. 이것은 또한 겨우내 감기를 막아 주는 약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내 경험으로도 여름 낚시만 잘하면 감기는 모르고 지냈으니까. 그러나 여름 낚시는 감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런 이점은 어디까지나 부산물에 지나지 않고 낚시의 본뜻은 생활에 즐거움을 실어다 주는데 있을 것이다. 김성탄도 일찍이 이 신선 놀이의 맛을 알았더라면 이러 시시한 글이 아니라 멋진 통쾌한 글이, 혹은 "낚시의 즐거움"이란 제명으로 더욱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만남의 길 위에서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제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아름다운 축복이며 의미 있는 선물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진정 당신과의 만남으로 저의 삶은 새로운 노래로 피어오르며 이웃과의 만남이 피워 내는 새로운 꽃들이 저의 정원에 가득함을 감사드립니다 만남의 길 위에서 가장 곁에 있는 저의 가족들을 사랑하고 멀리 있어도 마음으로 함께하는 벗과 친지들을 그리워하며 저의 편견과 불친절과 무관심으로 어느새 멀어져 간 이웃들을 뉘우침의 눈물 속에 기억합니다 깊게 뿌리내리는 만남이든지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만남이든지 모든 만남은 제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주는 거울이 되며 인생의 사계절을 가르쳐주는 지혜서입니다 사람들의 서로 다른 모습들만큼이나 다양하게 열려 오는 만남의 길 위에서 사랑과 인내와 정성을 다하신 주님 나무랄 데 없는 의인뿐 아니라 가장 멸시받는 죄인들에게조차 성급한 판단과 처벌의 돌팔매질보다는 자비와 연민으로 다가가셨던 주님 당신의 그 모습을 생각하면 사랑하는 일에서도 늘 계산이 앞서고 까다롭게 따지려드는 저의 옹졸함이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습관적으로 남을 먼저 판단하고 늘상 이웃 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이기적인 태도로 슬픔과 상처를 이웃에게 더 많이 주었으며 용서하는 일에는 굼뜨기 그지없었음을 용서하십시오 때로는 만남에서 오는 축복보다 작은 근심과 두려움을 더 많이 헤아리며 남을 의심하는 겁쟁이임을 용서하십시오 앞으로도 멀리 가야 할 만남의 길 위에서 저의 비겁한 경계심을 무너뜨리고 당신처럼 겸허하고 자유로운 기쁨의 순례자가 되게 해주십시오 반갑고 기쁘게 다가오는 만남뿐 아니라 성가시고 부담스런 만남까지도 사랑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깊고 높은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저는 비록 완벽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좋은 사람으로 좋은 만남을 이루며 살고 싶습니다 많이 사랑할수록 더 맑게 흐르는 주님의 바다를 향해 저도 이웃을 더 많이 사랑하며 쉬임없이 흘러가는 작지만 아름다운 시냇물이 되고 싶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2.12.08 風文 R 554
동병상련(同病相憐) 同:한가지 동. 病:앓을 병. 相:서로 상. 憐:불쌍히 여길 련. [유사어] 동우상구(同優相救), 동주상구(同舟相救), 동기상구(同氣相救), 동악상조(同惡相助),동류상구(同類相救), 오월동주(吳越同舟), 유유상종(類類相從). [참조] 와신상담(臥薪賞膽).[출전]《吳越春秋》〈闔閭內傳〉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엽게 여긴다는 뜻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딱하게 여겨 동정하고 돕는다는 말. 전국시대인 기원전 515년, 오(吳)나라의 공자 광(光)은 사촌 동생인 오왕 요(僚)를 시해한 뒤 오왕 합려(闔閭)라 일컫고, 자객을 천거하는 등 반란에 적극 협조한 오자서(伍子胥)를 중용했다. 오자서는 7년 전 초나라의 태자 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태자태부(太子太傅)로 있던 아버지와 역시 관리였던 맏형이 처형당하자 복수의 화신이 되어 오나라로 피신해 온 망명객이었다. 그가 반란에 적극 협조한 것도 실은 유능한 광(합려)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부형(父兄)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초나라 공략의 길이 열릴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 해 또 비무기의 모함으로 아버지를 잃은 백비(伯?)가 오나라로 피신해 오자 오자서는 그를 오왕 합려에게 천거하여 대부(大夫) 벼슬에 오르게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오자서는 대부 피리(被離)에게 힐난을 받았다. “백비의 눈길은 매와 같고 걸음걸이는 호랑이와 같으니[鷹視虎步], 이는 필시 살인할 악상(惡相)이오. 그런데 귀공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인물을 천거하였소?” 피리의 말이 끝나자 오자서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별다른 까닭은 없소이다. 하상가(河上歌)에도 ‘동병상련’ 동우상구(同憂相救)란 말이 있듯이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백비를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지요.” 그로부터 9년 후 합려가 초나라를 공략, 대승함으로써 오자서와 백비는 마침내 부형의 원수를 갚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오자서는 불행히도 피리의 예언대로 월(越)나라에 매수된 백비의 모함에 빠져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주] 오자서 : 춘추 시대의 초(楚)나라 사람. 이름은 원(員). 초나라의 태자소부(太子少傅) 비무기(費無忌)의 모함으로 아버지 오사(吳奢)와 형 오상(伍尙)이 초나라 평왕(平王)에게 처형당하자 오나라로 망명함. 9년 후 오왕 합려를 도와 초나라의 도읍 영으로 쳐들어가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꺼내어 300대나 매질하고 나서야 원한을 풀었다고 함. [참조] 일모도원(日暮途遠).
Board 고사성어 2022.12.08 風文 R 812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썼다고 하는 신시와 우리 나라에서가장 훌룡한 시를 썼다고 모두가 말하는 두 사람이 쓴 시를 들어 시와 삶과 말의 문제를 생각해 보았다. 이제 다음에는 오늘날 씌어 나오는 시에서 우리말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피기로 하겠다. 여기 들어 놓은 시 구절들은 모두 신문에 발표된 시에서 따온 것이다. 문제가 되는 말에는 밑줄을 그은 다음에 묶음표를 해서 바람직한 우리말을 적어 놓았는데, 내가 바로잡아 놓은 말보다 더 좋은 우리말이 있는 경우도 나올 듯하다. 어머니는 꽝꽝 언 대지 안에 (땅) 사랑을 품고 키우는 나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 이것은 시의 제목인데, 제목이든지 본문이든지 내 느낌으로는 우리 어머니 라야 우리말답고 우리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것은 옛날 사람이 가졌던 느낌 이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다. 또 모두가 우리말을 이렇게 쓰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 한다 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변명은 될 수 없다. 사실은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집 우리 고향 우리 학교 를 죄다 나의.. 로 쓰기 시작해서 끊임없이 우리말을 더럽히는 데 앞장선 것은 바로 문학작품을 쓰는 시인과 소설가들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글말에 중독이 되어있지 않는 사람은 우리... 를 쓰고 있으니 마땅히 우리말을 살려야 한다. 우수의 바람..(근심) 봄이면 모든 것이 거듭나기를 기원한다(빈다) 뒤척이는 몸짓으로 그리운 언어를 띄우거나 (말) 비상하는 기쁨으로 (날아오르는, 솟구치는) 살아 있음을 노래하는 아침은 한잔의 생처럼 (시제목) 아침은 산사에서 마시는 (산속 절) 한잔의 생수처럼 온다.(샘물) 생처럼 이라 썼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산사 라고 더러 쓰는데, 우리 글자로 쓰면 무슨 말인지 모르게 되고, 또 귀로 들어도 모른다. 귀로 들어서 알 수 없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산속 절 하든지 그냥 절 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푸른 치마자락으로 몸을 가리우고 (가리고) 굽이치는 바다 깊은 해심의 속살이 보인다.(한가운데) 가린다 란 말은 가리운다 고 쓰는 것은 잘못되었다. 해심 은 바다 가운데 란 뜻의 한문글자말인데, 우리 글자로 쓰면 무슨 말인지 알기 힘든다. 이런 말은 쓸 필요가 없다. 그 앞에 또 바다 란 말이 나왔으니 한 가운데 로만 쓰면 될것이다. 정오의(한낮) 햇살이 용해되어 (녹아서) 투명해질수록 (환히 비칠수록) 뜨거운 한 잔의 커피를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은 예쁘고 작은 스푼으로 (숟가락) 커피와 프림 설탕을 담아 앞에 예쁘고 작은이 나와 있으니 양숟가락 이니 차숟가락 이니 오목숟가락이니 할 필요도 없다. 나도 예수처럼 자유에의 깃발 펄럭이며 (자유의) 내 낡은 수첩 속에 서투른 시의 제목으로 녹두꽃 사내 라 이름하고 널 지우려 했다. (이름 적고) 이름한다 , 이름하고 이런 말은 없다. 이것은 아주 일본말을 직역한 것이다. 황혼을 등지고서 (저녁 어스름) 차가운 손 흔들며 별들이 비행하는 불멸의 시간 속에 (날아가는 영원의) 불멸 보다는 영원 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잔설도 사그라진 황량한 강변을 본다. (남은눈, 쓸쓸한 강가) 강변 이란 말은 아주 널리 써서 우리말로 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강가 가 더 낫다고 본다. 눈끝엔 절단된 산맥 성큼성큼 매달린다. (끊어진 산줄기) 새들이 돌아온다 사계의 저녁이다 (사철) 가출했던 마음이여 전우를 맞았는지 (집 나갔던, 천둥비) 가슴 한켠 둥지에로 돌아와 잠드는 새 (둥지로) 일몰을 배웅하는 (저물녁, 저문날, 지는해) 낮은 처마 연기 자락 겨울철 피난살이 후조의 날개짓에 (철새) 숨죽인 천삼백리 강 식탁 위를 채우리 (밥상) 육백년 한을 접어서 침묵으로 앉았다.(말없이) 세월의 뼈마디를 침묵으로 딛고 서서 (말없이) 여명의 날개 자르고 (새벽) 추락하는 벼랑 저 끝 (떨어지는) 일곱 문 반짜리 내 유년이 잠겨있는 (어릴적) 텔레비전 화면 속 녹이 슨 갈대밭에 폐수를 배경으로 실루엣만 날아간다. (버린 물 그위로 그림자만) 전생의 이름표를 들고 꿈길 향해 달려오네 (꿈길로) 이 밖에도 얼마든지 보기를 들 수 있지만 이쯤 해두기로 한다. 내가 보기로 우리 나라의 시인들은 우리말에 너무 관심이 없고 감각이 무디다. 문학이라면 말을 다루는 예술이고 말로 빚어내는 예술인데, 더구나 시는 말을 고르고 다듬는 일에 그 어떤 글쓰기보다 힘들여야 하는데, 시인들이 이렇게 어설픈 남의 글자말, 일본말법 따위를 일부러 자랑스럽게 쓰면서 살아 있는 우리말을 버리고 있으니, 이 사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늘날 시인들은 새벽이란 말을 쓰면 시가 안 되고 반드시 여명 이라고 해야 시가 되는 줄 안다. 저녁무렵 이라든지 저물녘 저녁어스름 땅거미 이렇게 얼마든지 좋은 우리말을 안 쓰고 비애 환희 우수 이런 따위 한자말이라야 시가 된다고 알고 있다. 이것이 모두 어제 오늘 갑자기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김소월이나 정지용같은 그 유명시인 때부터, 아니 맨 처음 일본시와 서양시를 따라 쓰기 시작했던 최남선때부터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제시대에는 잘못된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아서 우리말이 많이 살아 있는데, 갈수록 나빠져서 오늘날에는 시가 우리말을 죽이는 주범이 되고, 말자랑, 말치장, 말장난의 글쓰기가 되어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 가는가? 원인은 환하다. 시인들이 모두 삶을 등지고 방안에 앉아 머리만 가지고 시를 쓰기 때문이다. 시가 병든 것은 시인이 병든 까닭이요, 시가 죽은 것은 시인이 죽은 것이다. 어른들의 잘못된 시 쓰기는 아이들의 시 쓰기 교육도 그릇되게 하고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초등 학생이고 중고등학생이고 모두가 어른들이 쓰는 시나 동시를 흉내내어 쓴다. 어른들의 흉내를 내도록 하는 것이 시쓰기 지도가 되어 있느니 기가 막힌다. 어른들의 시 쓰기가 제대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흉내내기를 가르친다면 절대로 시가 쓰일 수가 없고 도리어 시를 쓰는 마음을 죽여 버리는 것인데, 잘못된 말로 써 놓은 시를 그대로 따라서 쓰도록 하고 있으니 무슨 시가 되겠는가? 이래서 아이들이 써 놓은 시란 것도 말의 오염이 될 대로 되어간다. 초등 학생들은 동시란 것을 쓰면서 흉내와 말장난을 하고, 중고등학생이나 청소년들도 유식한 말이나 근사한 외국말법으로 글장난하는 짓을 시 쓰기로 알고 있다. 학생들이 시를 살리고 말을 살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어른들 따라가는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어른들의 글에서 말을 배우지 말아야 한다. 도리어 저보다 더 어린 아이들한테서 말을 배우고, 더 어렸을 적에 익힌 말을 살려서 쓰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시가 된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낚시의 즐거움 1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즐거웠던 날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고 생각해 본다. 헤아릴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물론 그 즐거움에도 크거나 작거나 하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런 세분과 아이는 차치하고 개괄적으로 생각해 볼 때 내 경우엔 그 즐거웠던 나날은 낚시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만큼 내 생활의 즐거움은 낚시질하는 행위가 실어다 준 것이 된다. 그리고 실제로 낚싯줄을 물에 드리우고 있지 않더라도 낚싯대나 낚시 연장을 매만질 때가 하루 중에서 즐거운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가난한 묵객은 시름이 있거나 무료할 땐 벼루에다 연적의 물을 부어 먹을 벅벅 갈아 거기에서 안겨 오는 향기로움으로 인생을 달랬다고 한다. 참으로 운치를 담은 경지라 하겠다. 낚싯대를 닦고 매만지는 심정도 이와 상통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낚싯대를 매만지는 것은 반드시 앞으로 고기 수확에 더 큰 기대를 거는 데서가 아니라 세상의 번거로움을 잠시나마 잊고 묵연히 수면을 바라보고 있는 낚시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하루에 한동안이나마 생활의 실무에서 휴식을 주는 시간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낚싯대를 매만지면서 무료를 끄며 일요일을 기다리는 마음이란 이야말로 하루하루가 흐뭇해진다. 즐거움은 반드시 큰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즐거움은 크면 클수록 오히려 지속이 안 되거나 반비례되는 일이 따를 가능성이 짙다. 조그만 은은한 즐거움이야말로 영속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는 까닭인지 모른다. 낚시에는 은근한 정미와 조그만 즐거움이 있는 대신 큰 즐거움이 따르지 않는 것은 곧 영속적인 의미가 내재하고 있어서이리라. 언젠가 어느 낚시인의 글에서 읽은 한 대목이다. 낚시 시즌이 지나고 한참 지루한 겨울 한밤중의 일이다. 가족들이 모두 고이 잠든 방 안에서 주인공은 낚싯대를 꺼내 홀연히 휘둘러 고기를 낚아 본다. 그의 얼굴에서는 회심의 미소가 흐른다. 이 때 밖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낚시의 즐거움이고 낚시꾼의 즐거움의 표현일 것이다. 2 낚시꾼에겐 물은 향수와도 같다. 물만 보아도 낚시꾼에겐 저절로 미소가 안겨 온다. 이것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그리는 마음에서이리라. 논바닥에 고인 하잘것없는 물이건, 벌판 한구석에 웅크린 웅덩이건 물이면 그저 좋다. 하물며 호연한 물바다를 보았을 땐 더 말할 나위가 있으랴. 저도 모르게 미소가 새어나오고 속이 후련해진다. 이건 낚시꾼이면 누구나 느껴지는 감회이고 또 낚시꾼만이 누릴 수 있는 흥취일 것이다. 그러나 기실 따지고 보면 물이 그립다는 그 자체는 물과 불가분의 사이인 물고기를 그리는 심정일 것이다. 고기가 살지 않는 물은 나무 없는 산처럼 낚시꾼에겐 무의미하니까. 해발 1천 미터 이상 높이의 고원에 가로놓인 장진호는 묘묘한 바다나 다름없다. 추운 지대이고 워낙 물이 깊어서인지 물고기가 놀지 않는다. 물빛이 짙다못해 검다. 고기가 놀지 않는 물은 사수나 다름없이 매력이 없고 그 검은 물은 두렵기만 하다. 바라보이는 물은 다 아름답고 시원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물을 좋아하는 낚시꾼이라도 붉은 불이나 더러운 물보다는 물의 본연의 자세인 맑은 운치를 아쉬워하게 된다. 고름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듯한 물이야말로 눈을 감으면 낚시꾼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마음의 소우주인 것이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들음의 길 위에서 어제보다는 좀더 잘 들으라고 저희에게 또 한번 새날의 창문을 열어 주시는 주님 자신의 안뜰을 고요히 들여다보기보다는 항상 바깥일에 바삐 쫓기며 많은 말을 하고 매일을 살아가는 모습 듣는 일에는 정성이 부족한 채 `대충` `건성` `빨리` 해치우려는 저희의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끼리 정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기보다는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자기말만 되풀이하느라 참된 대화가 되지 못하고 독백으로 머무를 때도 많습니다 - 우린 참 들을 줄 몰라 - 왜 이리 참을성이 없지? - 같은 말을 쓰면서도 통교가 안되다니 잘 듣지 못함을 반성하고 나서도 돌아서면 이내 무디어지는 저희의 어리석음과 습관적인 잘못은 언제야 끝이 날까요 정확히 듣지 못해 약속이 어긋나고 감정과 편견에 치우쳐 오해가 깊어질 때마다 사람들은 저마다 쓸쓸함을 삼키는 외딴 섬으로 서게 됩니다 잘 들어야만 사랑이 이루어짐을 들음의 삶으로써 보여 주신 주님 오늘도 아침의 나팔꽃처럼 활짝 열린 가슴과 귀로 저희가 진정 주님의 말씀을 잘 듣게 하여 주소서 언어로 몸짓으로 마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이웃의 언어에 민감히 귀기울일 줄 알게 하소서 말하기 전에 듣기를 먼저 배우는 겸손한 어린이의 모습으로 현재의 순간이 마지막인 듯이 성실을 다하는 수행자의 모습으로 들음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는 들음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잘 들어서 지혜 더욱 밝아지고 잘 들어서 사랑 또한 깊어지는 복된 사람 평범하지만 들꽃 향기 풍기는 아름다운 들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Board 삶 속 글 2022.12.07 風文 R 6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