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살리는 우리말
몸으로 익힌 말
시는 언어의 예술 인가? 아니다. 언어 가 아니고 말 이다. 시는 가장 싱싱하게 살아있는 말로 쓰는 예술 이다. 어떤 말이 싱싱하게 살아 있는 말 인가? 싱싱하게 살아있는 말, 곧 시가 될 수 있는 말은 다음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깨끗한 우리말일 것. 중국글자말이나 일본글자말, 일본말법으로 된 말, 서양말이나 서양말법으로 된 말 - 이 따위들은 시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원칙이 어디까지나 그렇다. 만약 어떤 시에 이런 깨끗하지 못한 말이 한두 개 들어 있다면 그 시의 값은 그만큼 낮아진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는 우리가 날마다 입으로 지껄이고 있는 말일 것. 깨끗한 우리말이라도 벌써 죽어버린 옛말은 시가 될 수 없다. 나날의 삶에서 누구나 써서 정감이 가고, 그래서 삶의 때가 묻고 냄새가 나는 말일수록 시가 되기에 알맞은 말이다. 셋째는 꼭 하고 싶은 절실한 말일 것. 따라서 군더더기가 없어야 하고, 알맹이만 있어야 한다. 저 혼자 무엇에 취해서 수다를 떠는 말, 무엇을 자랑하고 싶어하는 말, 멋을 부리는 말 - 이런 말은 모두 시가 될 수 없거나, 되어도 시시한 시 일 뿐이다. 참아도 참아도 기어코 터져 나오는 말, 지워도 지워도 끝내 남는 말, 이런 말이 시가 된다. 이 세 가지 조건에 맞는 말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 옛날부터 써온 말, 우리가 어렸을 때 어머니 아버지한테서 배우고 형제자매끼리 이웃끼리 나누면서 살아온 말이다. 책에서 배운 유식해 보이는 말이나 문학작품이라는 글에서 읽은 시같은 느낌 이 드는 근사한 말, 멋이 있어 보이는 말이 결코 아니고, 무식한 시골 사람들이 써온 말, 어린이들도 잘 아는 말이다. 머리로 논리로 배운 말이 아니고 느낌으로 몸으로 익힌 말이다. 그렇다. 시골 농사꾼들의 말, 어린이의 말, 이것이 가장 훌룡한 시가 될 수 있는 말이고, 앞으로 우리말이 아무리 변한다고 하더라도 이 말을 제쳐 놓고 시를 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시골말과 어린이말이 우리 시에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알아 보자.
우리 시에 나타난 시골말
요즘 우리 문단에서 일제 말기에 평안북도 시골말로 구수한 시를 썼던 백석의 시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여기 백석의 시 한 편을 들어 본다. 제목은 <마을은 맨천 구신이 되서>다. 맨천 은 맨 온통 이란 말이고, 구신 은 귀신 이란 말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아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 구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뜨막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장군
얼흔이 나서 뒤울안으로 가면 뒤울안에는 곱세녕 아래 털능구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빠져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에 연자간에는 또 여자당구신
나는 고만 디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가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구신
마을은 온데간데 구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보다시피 이렇게 온통 시골말로 되어 있다. 백석의 시는 시골말만을 모아 놓은 것 같아 나 같은 사람도 모르는 말이 많이 나오니, 요즘 젊은이들이나 학생들은 더구나 읽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러나 시골말을 아무 뜻도 없이 그저 모아 놓기만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을 보여 주거나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시골말을 살려 놓고 있어서, 백석의 시를 읽으면 우리말이 이렇게 풍성하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내가 우리말을 너무 모르고 있구나, 우리가 너무 우리말은 돌보지 않고 한자말과 교과서 같은 데서나 나오는 표준말로만 글을 써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된 것이 바로 최남선 때부터 거의 모든 시인들이 일본말을 잘못 직역해 놓은 괴상한 말로 시를 써 와서 그런 시만 읽어 온 때문이다. 더구나 해방이 되고부터는 나라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서 끔찍한 전쟁까지 치르는 통에 지난날 그나마 우리말을 얼마쯤이라도 살려서 쓰던 많은 문인들을 잃어 버리고, 그들이 남겨 놓은 작품조차 읽을 수 없게 되어 거의 반세기 동안을 우리들은 주로 서양사람들의 글을 옮겨 놓은 괴상한 글만을 읽어 왔으니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백석은 남에서 북으로 넘어간 사람이 아니고 해방 때부터 북에서 산 사람이지만, 북쪽의 시인이라고 해서 일제시대에 썼던 그의 시조차 못 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 와서 갑자기 읽게 되니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시를 해방 때부터 모든 학생들이 학교에서 읽고 우리말을 익히고 우리 정서를 이어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가장 우리 것답고 우리 마음에 가까운 것을 도리어 서양 것보다 어 낯설게 대한다면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겠는가. 백석의 시를 한 편만 더 들겠다. 모닥불 이란 제목이다.
모닥불
새끼오리도 헌신짝도 소똥도 갓신창도 개니빠니도 너울쪽도 짚검불도 가락잎도 머리카락도 헌겊조각도 기왓장도 닭의짖도 개터럭도 타는 모닥불
재당도 초시도 문장늙은이도 더부살이 아이도 새사위도 갓사둔도 나그네도 주인도 할아버지도 손자도 땜쟁이도 큰개도 강아지도 모두 모닥불을 쪼인다.
모닥불은 어려서 우리 할아버지가 어미아비 없는 서러운 아이로 불상하니도 몽둥발이가 된 슬픈 역사가 있다. 이제는 시골에서도 나무로 불을 피우는 아궁이를 보기가 쉽지 않고, 추운 날 들판에서 일하다가 검불을 끌어 보아 모닥불을 피워서 손을 쬐는 일은 더구나 겪어 보기 어려워, 요즘 학생들은 모닥불이란 말조차 모를 것 같고, 이런 시의 맛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날도 서울이고 어느 도시고 시장 한쪽 길바닥에 과일이며 나물들을 펴 놓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겨울이면 이른 아침 길가에 판자쪽이며 나뭇잎들은 태우면서 손을 녹이는 것을 가끔 볼 수 있으니, 이렇게 불을 피워서 쬐는 생활은 앞으로 세월이 더 지난다고 해도 아주 없어지지는 않으리라. 시대가 달라지고 생활이 바뀌면 말도 옛날에 쓰던 말이 조금씩 사라지고 새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활 따라 말이 달라지더라도 지금까지 쓰던 말을 아주 버리고는 낯설고 엉뚱한 새 말을 지어낼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지금까지 써오던 말을 잘 살려서 쓰는 것이 슬기롭다. 그래서 새 말이 되더라도 우리말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조금 고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렇게 해야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제대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늦기는 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잃어버린 우리말, 잊어 버린 우리말을 다시 찾아야 되겠고, 시골말 공부를 많이 할 필요가 있다. 백석이 이렇게 우리말을 놀라울 만큼 잘 살려 놓은 시를 썼지만, 그이도 글만 쓴 시인이라 농사꾼들이 일을 하는 모습을 그려 보인 시는 한 편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백석의 시는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때, 우리말과 우리 글을 잃어 버리고 빼앗기고 해서 우리 겨레가 살아남기조차 어렵게 되었을 때, 아주 땅에 묻히고 말았을 우리말을 가장 잘 살려 놓은 시로 높이 보아야 할 것이다. 시집을 많이 읽은 사람은 어려운 한자말이나 보통사람들이 쓰지 않는 서양말을 쓰면 근사해 보이고 새로운 시의 맛이 난다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시를 모르기 때문이다. 한자말이나 서양말, 외국말법보다는 오히려 우리 시골말, 시골에 남아 있는 사투리를 쓰면 시가 살아나고 새로워 보인다. 시골말, 시골 사투리가 가장 깨끗한 우리말이기 때문이다. 백석의 시가 이제 와서 높이 평가받게 되는 까닭이 이러하다. 아이들의 시도 마찬가지다.
구름
구름이
햇님을 꼭 안고
놔 주지 않았다.
그런데 햇님이
가랑이 쌔로
윽찌로
빠자 나왔다.
- 63.10.31. 상주청리 3학년 박선용
감나무
감나무가 웃고 있는가비라
팔랑팔랑 웃고 있는가비라
- 67.5.23. 경주 2년 정경자
복숭아꽃
복숭아꽃은
날마다 방글방글 웃는 빛이 가지다.
- 70.4.30. 안동 대곡분교 3년 이창순
이슬
이슬이 쬐꼼한 게
나와 있다.
내가 이슬이라면 좋겠다 하니
이슬이 나보고
그면 니가 내고
내가 니고
한다.
- 70.6.18. 안동 대곡분교 2년 김을자
이 네편의 시에서 밑줄을 그어 놓은 말이 그 지방에서 쓰는 말이다. 이 말들을 모두 표준말이라고 하는 서울말로 고쳐 쓴다면 어찌 되겠는가? 첫시의 경우는 시의 맛이 반쯤 줄어들 것이고, 그외 세시의 경우에는 시의 맛을 거의 잃어 버릴 것이다. 사투리라고 하는 시골말은 지난날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그 어린이들 자신의 말이었다. 요즘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널리 보급되어 시골말이 많이 쫓겨나고, 그래서 온 나라의 말이 틀에 박혀 버렸지만, 그래도 시골에는 시골마다 조금씩 다른 말을 쓰고 있다. 따라서 어린이들에게 시를 쓰게 할 때는 자기들의 생활말인 사투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살려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 어린이들에게 시골말, 곧 사투리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시를 못 쓰게 하는 노릇이 된다고 보아야 한다. 중고등학생도 어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시골말을 쓰면 효과가 있다고 해서 실제로는 쓰지 않는데 일부러 시골말을 쓴 것같이 해 놓는다면 어찌 될까? 다음은 어느 고등학생이 낸 시집에 들어 있는 시다.
일제 방죽
방죽을 싼 것은 조선놈인데
원북리 사람들 일제 방죽이라 부른다.
앞 시절, 일제 치하게 치를 떨던 시절
우리 라부지덜은 강제 노동에 끌려사
물만 먹은 힘으루
조선 할부지덜이 싼 방죽을
우리들은 일제 방죽이라 부른다.
여기 나오는 할부지덜과 힘으루 는 아직도 시골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런에 이 시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 아닌 것으로 느껴진다. 무슨 까닭인가? 이 시는 고등학생이 썼고, 시에 나오는 말도 고등학생인 자신이 한 말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일제 치하 란 유식한 말을 섰고, 부른다 고 하는 일본말을 직역해 좋은 말을 썼다. 일제 방죽이라고 말한다 고 해야 우리말이 된다. 사람들이 방죽을 보고 일제 방죽아 하고 부르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니까. 이렇게 유식한 말을 쓰고 오염된 말을 쓰는 학생이 할아버지들(할부지들)이라고 하지 않고, 힘으로 라 하지 않고, 학교에 다니지도 않는 농사꾼 어른들이 하는 말인 할부지덜 힘으루 를 같은 글에 섞어서 써 놓았으니 자연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고, 어른들 말을 흉내낸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는 국민학교 1학년 아이들도 할아버지들 아버지들 로 쓰고, 힘으로 라쓰지, -덜 -으루 로는 쓰지 않는다. 더구나 유식하고 오염된 글말을 하면서 이런 사투리를 썼으니 이것은 정직한 자기표현이라 볼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조선 놈 더 나은 놈 이라고 해 놓은 말에서 더 분명해 진다. 대관절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할아버지뻘되는 어른들을 이렇게 놈 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은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시는 시인들이 쓴 시를 흉내낸 것이다. 유식한 말을 쓴 것도, 일본말법으로 된 말을 쓴 것도, 그러면서 일부러 무식한 농사꾼처럼 보이려는 시골말을 쓴 것도, 할아버지뻘되는 어른들을 마구잡이로 놈 이라고 한 것도 모조리 어른 시인들의 흉내를 낸 것이다.
내가 보기로 오늘날 중고등학생들이 쓴 시가 거의 모두 어른들이 쓴 시를 흉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된 까닭은 워낙 시를 흉내내기로 배운 때문이다. 시를 흉내내기로만 썼으니 어떻게 진짜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시골말이고 사투리고 그것을 시로 쓸 수 있다면 우리말을 살리고 시를 살리는 일이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시 자신의 말로 써야 하는 것이지 머리고, 논리로, 어른들 흉내로 쓸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말을 살린다고 해서 저도 쓰지 않는 말, 자기 몸에서 우러나지도 않은 말을 순수한 토박이 말 이라고 해서 쓰기보다는, 차라리 누구나 잘 알고 있고, 누구든지 쓸 수 있으면서 다만 그것이 쉬운 말이라고 해서 버려둔 말을 쓰는 것이 열배도 낫고 백 배도 더 옳은 일이다. 보기를 들면 매일 을 쓰지 말고 날마다 를 쓰고, 출발한다 를 쓰지 말고 나선다 를 쓰고, 비애 를 쓰지 말고 슬픔을 쓰고, 미소한다 고 할 것이 아니라 웃는다 고 하고, 여명 이 아니라 새벽 을 쓰는 따위로 말이다. 우리말과 우리 시는 이렇게 해야 살아난다.
앞에서 시골말투성이로 된 백석의 시를 든 것도 그런 시를 흉내내라고 해서 든 것이 아니다. 그런 시는 흉내를 낼 수도 없다. 다만 지난날 우리말의 세계가 얼마나 풍성하고 재미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 사실 우리 시의 역사에서 뛰어났다고 하는 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애송되고 있는 시를 모두 깨끗한 우리말로 되어 있다는 것은, 시골 사람들만 알고 있는 말이 아니라 시골 사람들도 잘 알고 있어서 누구나 친숙하게 느끼는 말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와같이 시골 사람들도 잘 알 수 있는 깨끗한 우리말로 되어 있는 훌룡한 시는, 보기를 들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김소월의 금잔디 산 , 정지용의 고향 , 심훈의 그날이 오면 , 문익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 .. 이밖에도 더 많이 들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시들은 모두 살아 있는 겨레의 말로 썼기에 온 겨레의 가슴을 울리는 명시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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