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Une Vie:1883) - 모파상 (2/2)
어느 날 저녁 이상하게 흥분한 백작 부인은 줄리앙이 말리는 데도 불구하고 연상 박차를 가해서 말을 몰았다. 그러나 갑자기 말이 우뚝 서서 땅을 차며 입에서 거품을 내뿜었다.
"조심하지 않고 뭐야, 질베르트!"
걱정이 된 백작이 큰 소리로 나무랐다. 부인은 백작의 말에 도전하는 듯이 오히려 사납게 채찍으로 양쪽 귀 사이를 쳤다. 훌쩍 뛰어오른 말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들을 달렸다. 백작은 나직히 신음 소리를 내더니 자기 말의 목을 안는 것처럼 몸을 굽히고 전력을 다해서 말을 앞으로 내몰았다. 말은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모양은 마치 거인이 말을 다리 사이에 끼고 날아가는 것 같이 보였다. 두 마리 말은 쏜살 같이 달려 잠시 동안에 목장 저쪽에 조그맣게 되고 마침내 지평선 넘머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잔과 줄리앙이 그 뒤를 쫓았다. 15분쯤 달리더니 되돌아오는 백작 부부의 모습이 보였다. 이윽고 네 사람이 만났다. 백작은 새빨개진 얼굴에 땀을 뻘뻘 흘리며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부인은 새파랗게 굳어진 얼굴이 괴로워 보였다. 잔은 백작이 그의 부인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백작 부인은 그 후 한 달 동안 일찍이 본 적이 없을 만큼 쾌활했다. 항상 소리내어 웃으며 충동적인 애정을 가지고 잔을 포옹했다. 무언지 신비스럽고 황홀한 상태가 백작 부인에게 찾아든 것 같았다. 백작 역시 무척 행복한 듯이 아내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아내의 손과 옷자락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줄리앙도 또한 아주 딴사람처럼 쾌활하고 상냥해졌다. 마치 두 집의 친밀이 곧 각자의 평화와 기쁨의 원천인 듯했다. 그 해 봄은 유난히 더 일찍 왔다. 어느 날 아침 잔은 조그만 흰 말을 타고 들로 나갔다. 줄리앙은 아침 일찍부터 어딘가 가고 없었다. 잔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옛날 줄리앙과 사랑을 속삭이던 숲 속으로 들어갔다. 막 좁은 길을 들어서려는 순간이었다. 잔은 그 길 막다른 데 있는 나무에 매어둔 두 마리의 말을 보았다. 분명히 줄리앙과 백작 부인의 말이었다. 여자 장갑 한짝과 채찍 두 개가 풀 위에 떨어져 있었다. 잔은 말에서 뛰어내려 나무줄기에 기대섰다. 바로 옆 풀 속에서 두 마리 산새가 날아 앉았다. 한 마리가 열심히 쭉지를 펴고 몸을 떨면서 상대방 둘레를 훌훌 날다가 머리를 살짝 숙이고는 울고 있더니 별안간 두 마리가 한데 어울렸다.
"참 그래 봄이니까"
중얼거리는 동안에 문득 어떠한 의혹이 잔의 머리에서 번쩍였다. 잔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정신 없이 말을 몰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은 어린애에게 뛰어가서 몇 번이나 키스를 했다. 잔의 그 가슴 속에는 이미 질투도 증오도 없었다. 다만 살을 찌르는 듯한 고독감과 모든 인간에 대한 불신에 괴로워할 따름이었다. 또 다시 봄은 돌아왔다. 지난 1년 동안 잔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그것은 어머니 아델라이드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남작 부부는 딸과 함께 따뜻한 계절을 보내기 위해 5월 20일 루앙에서 레페플에 왔었다. 어머니 모습을 대하는 순간 잔은 깜짝 놀랐다 지난 6개월 동안 남작 부인은 10년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토실토실하던 볼이 자주빛이 되고 눈은 빛이 사라졌으며 숨을 쉬기도 괴로워했다. 줄리앙까지도 그 변화에 놀랄 지경이었다. 그 날은 도리어 보통 때보다도 몸이 좋은 편이었다. 점심 때에는 수프와 달걀을 두개나 먹고 평상시처럼 플라타너스 우거진 오솔길을 산책했다. 그런데 별안간 길에 쓰러져서 그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 밤 잔은 싸늘한 어머니 손을 쥔 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잔의 희망에 따라 어머니의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릴 때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잔은 어머니가 운명하기 전에 예전 편지를 다 꺼내서 읽으며 울고 있던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소녀 시절 이래 할머니나 친구들한테서 받은 것이었다. 잔은 아직 그대로 있는 어머니 편지 상자 쪽으로 눈을 돌린 다음 일어나서 그것을 끌어내렸다. 갑자기 읽고 싶어진 것이다. 할아버지나 할머니 편지는 다 쓸데없는 그러나 열렬한 사랑의 편지였다. 사소한 집안 일들이 세밀히 적혀 있었다. 그런데 다른 뭉치를 풀어서 읽기 시작한 잔은 넋을 잃었다. '소생은 이제는 그대의 애무 없이는 지낼 수 없습니다. 미칠 듯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 밤 그가 나가는 대로 곧 와 주십시오. 한 시간은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소생은 그대를 열애하고 있습니다' '허무하게 그대를 요구하면서 괴로운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남편이 있는 당신을 생각하며 창문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격정을 느꼈습니다...' 폴덴느마르 그 이름은 아버지가 지금도 폴 그놈이라고 부르면서 얘기하는 사람인데 그의 아내와 어머니는 제일 친한 사란이었다. 잔은 별안간 그 편지들을 집어 던지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심정을 느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잔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까지 실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이윽고 잔은 더럽게 느껴지기만 하는 편지들을 난로 속에 집어 넣어 버렸다.
남작은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후에 루앙으로 돌아갔다. 어린아이 폴이 병이 났다. 잔은 열 이틀 동안 한잠도 못자고 거의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지냈다. 폴은 나았으나 잔은 앞으로도 아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죄이는 것만 같았다. 아이가 하나 더 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딸을 이 생각은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로잘리의 사건이 있은 후로 잔은 줄리앙과 별거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남편에게는 정부가 있었다. 잔은 남편의 애무를 받기가 몸서리나도록 싫었다. 어느 날 잔은 아베 피코 신부를 찾아갔다. 수줍은 낯으로 하소연을 하고 있으니 신부는 싱글싱글 웃었다.
"잘 알겠습니다. 부인께서는 아직 젊으시고 몸도 건강하시지요. 잘 알겠어요. 줄리앙 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신부가 자상하게 마음을 써 주었지만 잔은 부끄러운 나머지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불안한 1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줄리앙이 이상한 주름을 입가에 띄면서 아내를 바라보았다. 식사가 끝나고 산책을 하는 동안 줄리앙은 아내의 귓전에 속삭였다.
"이제 아마 우리는 화해를 한 것 같군. 나로선 마침 잘 되었어"
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가 모든 인간으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는 것 같은 슬픔의 가슴을 억눌렀다. 오열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잔은 남편의 가슴에 쓰러지면서 울었다. 놀란 줄리앙은 아내가 아직도 자기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잔의 목덜미에 키스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옛날 관계로 돌아갔다. 남편은 그 일을 의무처럼 해치웠으나 잔은 가슴이 느글거리는 것 같은 느낌을 참고 견디었다. 이번에 임신한다면 그것을 최후로 영원히 줄리앙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잔은 남편의 애무가 그 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남편에게 그런 얘기를 했더니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임신시키지 않기 위해서지"
"어머나 왜 애가 싫어요?"
"체! 하나면 그만이야 귀찮기도 하고 돈도 들고..."
다시 잔은 신부한테 갔다. 신부는 마치 단식한 사나이의 식욕과도 같은 호기심으로 꼬치꼬치 캐묻더니 한참 생각한 끝에 말했다.
"수단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부인이 임신했다고 믿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엔 정말 임신하실 걸요"
잔은 눈 속까지 새빨개지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만일 제 말을 믿지 않는다면...?"
"이웃에 소문을 내십시오. 결국은 주인께서도 믿을 테니까"
사제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결과는 사제의 예상대로 되었다. 잔은 임신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미칠 것 같은 환희에 넘쳐 어머니를 여윈 슬픔을 겨우 잊을 수가 있었다. 9월 하순에 아베 피코 사제가 새삼스러운 태도로 찾아왔다. 고르데빌의 수도원장으로 영전하게 되어 후임의 젊은 사제를 소개했다. 아베톨비악은 마르고 키가 작은데다 눈이 침울해 보여서 대단히 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신임 사제는 준엄하고 매서운 개혁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경멸 인간 만사에 대한 혐오 무경험에서 오는 옹졸함 이러한 모든 것이 그를 순교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사제는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다. 절교하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격해서 성욕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마을 사람들은 서로 아니꼬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었다. 사제는 차츰 밀렵자를 쫓아다니는 산지기처럼 정부들끼리 밀회하는 것을 감시하고 방해를 놓고 해서 젊은 사람들은 아무도 미사에 나가지 않게 되고 말았다. 줄리앙은 거의 매일 푸르빌 백작 집에 출입했다. 이제는 줄리앙 없이 지낼 수 없게 된 백작과 함께 사냥을 하기도 하고 백작 부인과 승마를 하기도 했다. 남작은 11월 중순경에 다시 잔의 집으로 돌아왔다. 골수에 사무친 슬픔 때문에 더 늙고 수척했다. 겨울도 다갈 무렵의 어느 날, 아베 톨비악 사제가 찾아왔다. 그는 줄리앙과 질베르트와의 정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 부인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가요?"
"사제님께선 어떻게 하면 좋다고 생각하세요?"
"한사코 이 죄를 막아야 합니다"
잔은 눈믈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제 남편은 제 말 같은 건 들어 주지 않아요. 심부름하는 계집애를 상대해서 저를 배신할 일도 있답니다. 전 도저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요"
"부인께선 그러고도 한 사람의 아내라고 생각하시는가요? 신앙이 있는 여성이신가요? 눈앞에선 죄를 저지르는 걸 보고서 모른척 하시다니 비겁한 마음이 부인께 지혜를 주고 있습니다. 부인은 천주님의 은총을 받을 만한 분인 못되는 줄 압니다"
"아, 사제님! 부디 저를 저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푸르빌 씨의 눈을 뜨게 하십시오. 이 관계를 끊는 것이 그분의 할 일이거든요"
잔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아녜요. 그러다간 그가 두 사람 다 죽이고 말아요!"
"그렇다면 부인은 언제까지라도 치욕과 죄악 속에 머무르는 수밖에 없군요. 저는 이 이상 이런 데 있을 수가 없소"
사제는 잔을 저주하는 듯 들고 있던 우산을 쳐들고 잔뜩 화를 낸 채 돌아갔다.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말을 타고 다니는 산책 도중에 늘상 사제의 모습을 보았다. 어떤 때는 들녘 끝이나 낭떠러지 위에 검은 점처럼 보일 때도 있고 때로는 두 사람이 들어가려고 하는 계곡에서 기도책을 탐독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윽고 봄이 왔다. 나뭇잎들이 아직 투명해 보일 정도고 들은 축축했기 때문에 질베르트와 줄리앙은 대개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에 숨곤 했다. 막사는 작년 가을 이래 보코트의 언덕 위에 방치되어 있었다. 낭떠러지에서 5백 미터쯤 떨어져 있고 계곡의 가파른 비탈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온종일 맹렬한 바람이 불어대는 어느 날이었다. 잔이 날로 옆에서 책을 읽고 있노라니 푸르빌 백작이 허둥지둥 찾아왔다. 안색이 몹시 창백해서 빨간 수염이 마치 불꽃처럼 보였다. 핏기 어린 눈은 사고력을 잃은 듯이 자꾸 움직였다. 백작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질베르트가 여기 와 있겠죠"
잔은 놀라서 대답했다.
"아아뇨! 오늘은 통 안 보이셨는 걸요"
그러자 백작은 두 다리가 잘리기라도 한 듯이 털썩 주저 앉아 모자를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를 씻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내밀며 입을 딱 벌리고 무언가 무서운 괴로움을 호소할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갑자기 그만두고서 상대방을 우두커니 보고 있더니 혼자 입 속으로 무슨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뛰어나갔다. 잔은 그 뒤를 쫓았다. 공포에 싸여 쥐어짜는 듯한 가슴을 안고 그러나 거인의 발걸음을 따를 수가 없었다. 백작은 출렁거리는 바닷물이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를 다라 한사코 달렸다. 사나운 소낙비가 퍼붓고 바람은 윙윙 소리를 내며 초목과 곡식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보코트 언덕이 보였다. 양이 없는 우리 한쪽에 양치는 사람의 이동식 막사가 있고 말뚝에 말 두 마리가 매어 있었다. 백작은 당에 엎드려 그 막사 옆으로 접근해 갔다. 두 마리의 말은 백작의 모습을 보자 몸부림쳤다. 백작은 손에 쥐고 있던 단도로 고삐를 끊었다. 말은 바람과 함께 뛰어갔다. 백작은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켜 문 틈에 눈을 딱 붙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백작은 진흙투성이가 되어서 일어났다. 이어 밖에서 대문 빗장을 힘껏 밀어 넣자 두 손에 막대기를 쥐고 흔들어 댔다. 그러다가 그는 상체를 구부리고 죽을 힘을 다해서 황소처럼 끌기 시작했다. 오두막 안에서는 주먹으로 판자를 두들기며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비탈의 절벽까지 오자 꼭 쥐고 있던 두 손을 놓아버렸다. 오두막은 비탈을 구르기 시작했다. 맹렬한 기세로 제 무게 대문에 더 속력이 가해지며 살아 있는 것처럼 뛰고 부딪치고 하면서 굴러갔다. 안에서는 무서운 비명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마지막 움푹 팬 곳에서 한바탕 곡선을 그리며 훌쩍 뛰어오른 그 다음 순간 깊숙한 땅에 여지없이 떨어져 마치 달걀처럼 부서져 버렸다. 끔직한 두 시체가 그 속에 깔려 있었다. 남자의 이마에는 구멍이 뚫리고 얼굴은 형편 없이 깨져서 모습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여자는 턱이 빠져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부러진 손발이 뼈가 없는 것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참사를 폭풍우를 피하려고 뛰어들어 간 오두막이 거센바람에 뒤집혀 추락한 것으로 생각했다. 바로 그 날 밤 잔은 죽은 아이를 낳았다. 계집애였다. 잔은 석 달 동안이나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몹시 몸이 쇠약하고 조그마한 소리만 들어도 기절을 할 지경이었다. 잔에게는 오직 폴이 전부였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되어 아브르의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집 안에는 그래도 평화와 사랑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이제는 남작도 남작 부인의 동생으로 늙은 독신인 리존도 리페플에 와서 같이 지내고 있었는데 폴은 세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어리광을 부리며 자라났다. 폴이 열 다섯 살이 된 시월 어느 날 아침 그는 세 사람의 전송을 받으며 마차를 타고 아브르로 출발했다. 그는 생후 처음 가족의 손을 떠나 중학교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날 밤 레페플에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흐느끼는 어머니의 울음 소리가 어둠 속을 달렸다. 그러나 폴은 이윽고 이틀만에 한 번씩 만나러 오는 어머니가 그다지 반갑지 않게 되었다. 어머니보다도 처음 사귄 친구들과 놀고 싶었던 것이다. 학교측에서도 면회를 금했다. 잔은 하는 수 없이 폴이 돌아올 휴일을 고대하며 살아야 했다. 폴은 키가 후리후리하고 금발의 아주 훌륭한 남자가 되었다. 그러나 도무지 공부를 하지 않았다. 낙제를 두 번씩이나 하고 겨우 수사과에 올라 갔을 때는 벌써 스무 살이되었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휴일에 어머니에게로 돌아오는 습관을 차츰 게을리 하게 되고 어떻게든지 구실을 붙여서 돌아오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어느 날 아침에는 초라한 옷을 입은 유태인 노인 하나가 잔에게 면회를 청했다.
"마님께 보여 드릴 쪽지를 가져 왔습죠"
노인은 대 묻은 쌈지 속에서 한 장의 쪽지를 꺼내어 잔에게 주었다. 그것은 폴의 사인이 들어 있는 차용 증서였다. 잔은 전신이 떨렸다. 폴은 학교를 무단 결석하고 불량 소년들과 함께 도박장에 출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즉시 아브르로 향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이미 한 달이나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교장이 잔의 사인이 있는 편지 네 통과 의사의진단서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다만 놀랄 따름이었다. 그날 밤 그들은 읍내 여관에서 자고 이튿날 경찰의 손을 빌려 시중에 숨어 있는 여자한테서 폴을 찾아 냈다. 그들은 이 젊은이를 데리고 레페플로 돌아왔다. 잔은 도중 내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고 있었으나 폴은 실로 태연한 낯으로 창밖 경치를 내다보고 있었다. 폴은 시골에서 번들번들 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배를 타고 아브르로 도망쳐 버렸다. 경찰이 아무리 찾아보아도 다시는 폴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전 여자 역시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잔은 어느덧 백발이 되었다. '사랑하는 어머니 아무 걱정 말아 주십시오. 저는 지금 런던에 있습니다.그런데 너무도 옹색해서 먹을 것조차 없는 날도 있습니다. 저와 같이 있는 여자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니 아버지 유산에서 1만 5천 프랑만 미리 쓰게 해 주십시오. 얼마 후에 저도 성년이 되니까요...' 절망 속에서 허덕이고 있던 잔은 편지를 보냈다는 사실만 가지고도 아들의 행동을 용서하고 돈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아들과 함께 있는 여자에 대한 증오는 악착스러우리 만큼 큰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다섯 달 동안 또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년에 달한 아들의 대리인이 느닷없이 나타나 아버지의 유산 상속을 청구했다. 12만 프랑을 받은 폴은 그 후 여섯 달 동안에 간단한 편지 네 통을 냈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날아든 절망적인 편지가 세 사람을 놀라게 했다. '어머님 저는 지금 막다른 데까지 왔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도와 주시지 않는다면 저는 자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폴의 편지는 또 8만 5천 프랑을 청구해 온 것이다. 토지를 저당해서 돈을 보내 주었더니 1년쯤 있다 "폴드라마르 주식회사"라는 기선 회사가 파산했다는 통지가 왔다. 결손은 23만 5천 프랑이었다. 남작은 저택과 두 농장을 저당에 넣고 최후의 수속을 하고 있는 동안 갑자기 졸도로 세상을 떠났다. 이어 겨울이 다간 어느 날 리종 이모가 기관지염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잔은 이제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아무것도 괴로워할 것 없이 자기도 죽어버리고 싶다고 빌면서 묘지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 어느 건장한 농촌 여자 하나가 잔을 번쩍 안아 들고 집으로 데려왔다.
"당신은 누구지...?"
밤중에 눈을 뜬 잔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면이 있는 그 얼굴을 쳐다보면서 물어 보았다.
"가엾은 잔 부인! 저를 몰라보시는가요?"
"앗, 로잘리!"
잔은 정신없이 로잘리를 얼싸안고 키스했다. 두 사람은 서로 끌어안은 채 언제까지나 흐느껴 울고 있었다. 로잘리도 이미 남편이 죽고 줄리앙의 아들은 장가를 들여서 훌륭한 일꾼이 되어 있었다. 로잘리는 집을 아들 내외에 넘기고 외로운 잔을 돌보아 주기 위해서 24년만에 레페플에 돌아온 것이다. 잔은 얼마 남지 않은 재산을 정리하고 오랫동안 정든 저택을 팔아서 조그마한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로잘리는 여러 가지로 잔을 위로하고 시중해 주었다. 사실 잔은 이제 아주 늙어 버렸고 슬픔에 지쳐 소생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왜 나는 남처럼 사랑을 받지 못했을까? 왜 나는 조용한 행복마저도 은혜받지 못했을까?"
잔은 자신의 불행한 일생을 돌이켜 생각하면서 힘없는 한숨을 내쉬는 날이 계속되었다. 돈을 보내 주면서 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귀여운 내 아들아 나는 네가 내 곁으로 돌아오도록 간청하려고 생각한 것이다. 나는 늙고 병들고 일년 내내 하녀 하나밖에 없이 혼자 지내고 있다는 것을 생각 좀 해다오. 나는 지금 큰 길가의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단다. 참 슬픈 일이다. 그러나 너만 있어 준다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너밖에는 없으면서도 칠 년 동안이나 너를 못 만나 보고 있으니...네 어미는 얼마나 불행했었는지 얼마나 내 마음을 네게 의지해 왔었는지 너는 도저히 모를 것이다. 너는 나의 생명이었다. 나의 꿈, 오직 내 하나의 희망, 내 하나의 사랑이었다. 그런데도 너는 나를 배반했고 또 나를 버리고 말았구나 아아! 돌아와다오. 나의 귀여운 폴아 돌아와서 네 어미에게 키스해다오. 절망의 팔을 내밀고 있는 네 늙은 어미의 곁으로 돌아와 다오. 잔'
'그리운 어머님, 진작 편지를 드리지 않은 것은 파리에 소용없는 여행을 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 자신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찾아뵈어야만 했기 때문에 저는 현재 몹시 불행한 처지에 빠져서 대단히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 처는 사흘 전에 계집애를 낳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동전 한푼도 없습니다. 애는 문지기가 간신히 키우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어린애를 길러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죽지나 않을까 하고 염려가 됩니다. 어머님이 맡아 주실 수는 없을까요? 정말이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유모에게 맡기자니 돈도 없으니 말입니다. 이 편지를 받으시는대로 곧 회신을 바랍니다. 어머님을 사랑하고 있는 아들 폴'
잔은 의자에 맥없이 앉아서 로잘리를 불렀다.
"제가 아이를 맡지요. 부인 아무래도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 로잘리가 말문을 열었다.
"그렇게 해 줘, 로잘리"
"그리고 공증인한테 갑시다. 아드님 결혼 수속을 해야 해요. 만약에 그 여자가 죽는다면 어린애의 훗날을 생각해서라도..."
로잘리는 그 날 밤 곧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사흘만에 돌아왔다.
"그래 어땠어?"
잔은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젯밤에 죽었어요. 결혼식은 올렸답니다. 아드님은 장례식을 마치고 오실 거에요. 이게 손녀입니다"
이불에 싸여 보이지 않는 갓난애를 내밀었다. 잔은 '폴'하고 중얼거릴 뿐 입을 다물었다. 잔은 허공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갑자기 포근한 온기가 생명의 체온이 잔의 옷을 통해서 다리로 전해 오고 살 속까지 스며들어 왔다. 그것은 무릎 위에서 잠들고 있는 어린 것의 체온이었다. 그리고 무한한 감동이 잔의 온 몸에 파고들었다. 잔은 왈칵 아직 보지 못했던 어린 것의 얼굴을 덮은 헝겊을 벗겨 버렸다. 자식의 딸 그러자 이 연약한 것이 불안에 싸인 채 심한 광선을 받고 입을 움직거리면서 파란 눈을 떴을 때 잔은 품 안에 들어올리고는 꼭 껴안고 빗발 같은 키스를 퍼부었다. 그러나 로잘리는 무뚝뚝하면서도 즐거운 낯으로 그것을 말렸다.
"자, 자. 부인, 그만 좀 두세요, 그러시다가는 울려요"
로잘리는 아마 자기 자신의 생각에 대답하려 하는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즐거운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