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당신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4 - 짐 캐츠카트 에얼 나이팅게일의 한마디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72년에 그의 말이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을 당시, 나는 리틀콕 주택 공사의 직원이었다. 어느날, 내가 할 일도 없이 책상 앞에 앉아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매일 남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한다면, 여러분은 오년 내로 전국에서 손꼽히는 전문가가 될 것입니다."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이런 질문이 펑하고 터져 나왔다. "하루에 한 시간씩 공부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그런데 지금 나는 정부의 회계사로 하루에 자유시간이 여덟시간이나 되니까 다음주 목요일쯤 세상을 휘어잡을 수 있겠네.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뭐지?"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몰랐다! 그것은 정말 마음을 심란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가령 여러분이 향후 5년내로 뛰어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지금 정신차리지 않겠는가? 나는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서 여러 주일 동안 머리카락을 쥐어 뜯으며 그 대답을 찾았고, 마침내 내가 무엇보다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성장을 돕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이팅게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나는 지난 18년 동안 하루 24시간 동안 그 일을 해왔다. 당신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5 - 짐 캐츠카트 어느날 나는 애틀란타의 리츠 칼튼 호텔의 체육관에서 기구운동울 하고 있었다. 마침, 내 맞은편에 있던 사내는 '우람한 근육'의 표본과도 같았다. 내가 트레이너의 지시에 따라 가볍게 몸을 푸는 정도의 운동을 하는데 반해, 그는 육체미 대회에 출전할 선수처럼 진지하고 심각하게 '진짜 운동'으로 땀을 흘렸다.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트레이너가 지시한 운동량은 얼마나 됩니까?" 나는 대답했다. "약 삼십 분 정도 입니다." "나는 두시간을 계속 하는데." 그리고 그는 운동을 멈추지 않은 채, 자신의 역도와 달리기 최고 기록을 비롯하여 차종과 집 평수, 직업과 최근에 달성한 사업적인 성공에 대해서 줄줄이 늘어놓았다. 나는 다 들은 다음에 이렇게 물었다. "잠깐만요! 언제쯤 당신은 이미 승리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오?" "당신은 평생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해 왔잖습니까. 당신이 이미 승리자라는 사실을 언제 깨닫겠느냐구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군요." 그리고 그는 말을 돌려 현재 추진하고 있는 사업상의 거래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사내는 내 질문을 감조차 잡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나중에 경주를 멈추고 내 질문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삶의 핵심을 찌르는 것임을 깨닫게 되리라. 그는 외면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내면적으로 극히 불행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굳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지 않을 테니까
Board 추천글 2022.11.23 風文 R 1389
다기망양(多岐亡羊) 多:많을 다. 岐:가닥나뉠 기. 亡:잃을 망. 羊:양 양. [동의어] 망양지탄(亡羊之歎). [유사어] 독서망양(讀書亡羊). [출전]《列子》〈說符篇〉 달아난 양을 찾는데 길이 여러 갈래로 갈려서 양을 잃었다는 뜻. 곧 ① 학문의 길이 다방면으로 갈려 진리를 찾기 어려움의 비유. ② 방침이 많아 갈 바를 모름.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주장했던 양자[楊子:이름은 주(朱), B.C.395?~335?]와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양자의 이웃집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집 사람들은 물론 양자네 집 하인들까지 청해서 양을 찾아 나섰다. 하도 소란스러워서 양자가 물었다. “양 한 마리 찾는데 왜 그리 많은 사람이 나섰느냐?” 양자의 하인이 대답했다. “예, 양이 달아난 그 쪽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모두들 지쳐서 돌아왔다. “그래, 양은 찾았느냐?” “갈림길이 하도 많아서 그냥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양을 못 찾았단 말이냐?” “예, 갈림길에 또 갈림길이 있는지라 양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통 알 길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듣자 양자는 우울한 얼굴로 그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안했다. 제자들이 그 까닭을 물어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한 현명한 제자가 선배를 찾아가 사실을 말하고 스승인 양자가 침묵하는 까닭을 물었다. 그 선배는 이렇게 대답했다. “선생님은 ‘큰길에는 갈림길이 많기 때문에 양을 잃어버리고 학자는 다방면으로 배우기 때문에 본성을 잃는다. 학문이란 원래 근본은 하나였는데 그 끝에 와서 이같이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없다’라고 생각하시고 그렇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하시는 것이라네.”
Board 고사성어 2022.11.23 風文 R 844
심심하다 ‘심심한 사과’에 ‘난 하나도 안 심심해!’라 하여 일어난 소란이 일주일이 넘었으니 차분히 따져보자. 한심해할 일만은 아니고, 도리어 인간이 말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가는지 보여준다는 점에서 손뼉 칠 일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도 그랬다. 악한 게 쌓일수록 결국 좋은 시절이 온다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그러니 이 어둠을 참고 견디라는 말로 들렸다. 아뿔싸, 다른 뜻의 ‘구축’이 있었고, 정반대의 뜻이었다. 나쁜 게 좋은 걸 몰아낸다! 모든 존재가 그렇듯, 단어도 홀로 있으면 의미가 미분화 상태이다. 일정한 맥락 속에 놓일 때 비로소 꽃이 핀다. 생소한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배경지식을 동원해 그 뜻을 추적한다. 우리의 ‘해석’ 행위는 계산기처럼 각 단어의 의미를 미리 정확히 알고 나서 이들을 합해나가는 게 아니다. 경험, 상상, 추리를 바탕으로 한 도약에 가깝다. 넘겨짚기, 또는 눈치로 때려 맞추기랄까? 예컨대, ‘우리 팀이 3연패를 달성했다’와 ‘우리 팀이 7연패에 빠졌다’에 쓰인 ‘연패’가 앞뒤 맥락이나 선수들의 표정으로 보아 전혀 다른 상황일 듯하고, 웃으며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라고 할 때와 고개를 숙이며 ‘이번 사태에 사의를 표합니다’라고 할 때의 ‘사의’가 다른 뜻이라고 추측한다. 어휘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지만, 맥락과 상황이 던지는 작은 실마리로 의미를 추리하는 탐정의 마음이 작동하는 것이다. 거기엔 실패도 있고, 오역도 있고, 도약도 있는 거다. 우리 정신은 이 세계를 향해 영원히 열려 있다. ‘평어’를 쓰기로 함 ‘할까? 말까?’ 방학 내내 오락가락했다. 출석을 부를 때 ‘예’가 아닌 ‘응, 어’로 대답하는 놀이만으로도 학생들은 안절부절못했는데, 이런 전면적 실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 반발심에 튕겨나가거나 나를 ‘또라이’로 여길지도 모르지. 그래도 하자! 오늘부터 수업시간에 ‘평어’를 쓰기로 한다. <예의 있는 반말>이란 책에서 제안하는 원리는 간단하다. 첫째, 모든 호칭은 이름만 부르는 것으로 통일. 뒤에 따로 뭘 붙이지 않는다. ‘철수야, 철수씨, 철수님’이 아니라 ‘철수’라 한다. 학생들도 나를 ‘선생님’이 아니라 ‘진해!’라 부르면 된다(아, 떨려). 둘째, 모든 존대법을 걷어내고 반말로만 대화하기. 학생들은 나에게 ‘숙제가 뭐야?’라 할 것이다(아, 무서워). 존대법(높임법)은 모든 문장에 상대나 언급되는 대상이 나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반드시 표시하라는 규칙이다. 평어는 존댓말과 반말이라는 수직구조를 허물 것이다. 평어를 쓰려니 바꿀 게 한둘이 아니다. 무엇보다 수업방식을 ‘강의’가 아닌 ‘대화’로 바꿔야 한다. 혼자 떠들면, 그건 선생이 반말로 수업하는 것밖에 안 된다. 학생들의 평어를 들어야 하니, 나는 말을 줄이고 학생들과 대화를 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혼란과 모색, 초월을 겪는지 보고 싶다. 평어 사용은 우리가 동료로서 갖춰야 할 친밀감과 함께 적절한 거리 확보를 통한 평등의 감각을 느껴보자는 거다. 위계적 문법체계를 의지적으로 내려놓았을 때 우리 안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실패도 좋다. 교실은 딴딴한 댐을 무너뜨릴 못과 망치를 만드는 실험실이자 엉뚱한 짓을 결행하는 아지트이니.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소설쓰기 - 소설을 어떻게 쓸까 글재주를 부리지 말고 고등학생들은 어떤 형태(종류)의 글을 써야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두가지로 나올수 있다. 그중 하나는 국민학교 때의 글쓰기를 그대로 연장, 발전시켜서 글의 갈래를 좀더 자세하게 나누어 서사문, 사생문, 기사문, 감상문, 기행문, 설명문, 광고문, 논설문, 조사보고문, 편지글, 일기글, 시, 극본.. 따위로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학작품의 갈래를 따라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을 쓰는 것이다. 이 둘 중 어느것이 옳은가? 교육과정과 교과서에서는 어떤 글을 쓰게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실제로 써놓은 학생들의 글 - 어쩌다가 신문이나 잡지에 나오는 학생들의 글을 보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대답 중 두 번째인 문학작품을 쓰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어제 오늘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벌써 수십 년 전부터 이어 온, 어른들 글 흉내내는 중고등학생들의 글쓰기 전통이다. 최근 어느 문화재단에서 청소년 문예작품을 현상으로 공모하면서 작품의 갈래를 시와 소설로 현상해 놓았고, 또 전국규모의 어느 문학단체에서도 청소년을 상대로 시와 소설을 현상모집하는 광고문을 낸 것을 보아도 30년 전이나 40년 전이나 학생들의 글쓰기 틀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전체로 보면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교과 공부에서 글쓰기란 것이 가장 천대받는 공부로 되어 있어서 거의 내버려둔 상태라 하겠다. 여기에다가 얼마 전부터는 이 글 첫머리에서 말한 두 가지 대답 중 첫째 대답에 나오는 여러 가지 글의 갈래에서 유독 논리만을 강조하는 논설문 쓰기가 점수따기 공부의 수단으로 별난 관심거리가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논리로 쓴 글이 학생들이 자기를 표현한 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아무튼 학생들이 쓰고 있는 문예작품이란 것이 어떤 글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에 드는 글은 어느 여고 1학년 학생이 쓴 콩트 인데 어느 학생신문에 발표되었던 것이다. 콩트 는 단편소설보다 더 짧은 소설이다. 그 녀석 며칠전부터 나를 따라 다니며 지겹게 주위를 빙빙 돌던 그 녀석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이고 피곤했다. 우리 동네 녀석이 분명한데 날 점찍어 놨는지 자꾸 내 주위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 집 식구들은 무척이나 더위를 타서 여름만 되면 집안의 모든 문을 열어 놓고 살다시피 한다. 그 바람에 녀석은 열려진 문 틈으로 힐끔힐끔 대문안을 훔쳐보더니만 이젠 아예 본격적으로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말이나 욕설을 퍼붓고 괴상한 행동을 해도 그 녀석을 잘 참고 견디어 냈으며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계속 따라 다녔다. 그 녀석은 외모가 늘씬했고 눈매는 날카로왔으며 행동도 매우 민첩했다. 길고 쭉 뻗은 다리로 담벼락에 기댈 때에는 그의 매력이 한층 더 살아났다. 지구 끝까지라도 따라 다닐 심산인 듯,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그 인내심 또한 대단했다. 그날도 무척 무더운 하루였다. 일찍 잠자리에 들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문단속을 했다. 너무도 무서운 집념으로 달려드는 녀석이기에 마음만 먹으면 내 방까지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그것은 신경쇠약 내지는 과대망상일런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녀석에게 나는 지쳐 있었고, 아니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으니까. 꿈나라 열차를 타려고 막 표를 끊는 순간 내 귀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일거라는 짐작과 함께 허겁지겁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떨리는 손으로 불을 켜는 순간, 그 녀석과 창문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혹시나 가 역시나 였다 대단한 녀석이었다. 이 밀폐된 공간으로 침입할 수 있었다니... 내가 놀라는 바람에 그 녀석은 얼른 저만치 물러나 책상앞에 늘씬한 다리로 걸터앉았다. 나는 그 쭉 뻗은 다리에 조금은 호기심도 생겼지만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함이라도 지르면 녀석이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덤벼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녀석은 내가 고함을 치지 않는 것에 대해 저으기 안심하는 눈치였다. 난 머리를 급속도로 회전시켰다. 이제까지 나를 그토록 따라다녔고 이렇게 내 방까지 들어왔으니 결코 쉽게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이리 저리 궁리를 하는 사이, 그 녀석이 나를 어떻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등골이 오싹했다. 과연 그 녀석은 맛있는 고기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슬금슬금 다가왔다. 큰일이다. 워낙 민첩한 놈이라 내가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 같다. 나는 방을 둘러보며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내 방에는 신변을 보호할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없었다. 놈이 다가옴에 따라 나도 재빨리 일어서서 한쪽 구석으로 갔다. 그런데 역시 그 녀석은 상당히 민첩했다.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그 녀석이 휙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순간, 가장 두껍고 무거운 국어대사전이 눈에 띄었다. 나는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대사전을 꺼내 그 녀석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피가 튀었다. 그 녀석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살인했다는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통쾌감을 느꼈다. 나는 시체를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지긋지긋한 놈을 죽였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나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힘껏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 엄마! 나 모기 잡았어! ------------------------------------------------------------------------ 이것은 모기 이야기고 모기를 잡은 이야기다. 그런데 처음부터 마지막 한 줄 앞까지 읽는 동안에 아무도 이 이야기가 모기에 대해서 썼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아무래도 이상한데? 꿈을 꾼 이야기인가? 이제 곧 무슨 말인가 알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지막까지 읽게 되는데, 결국 마지막에 나오는 말 한 마디에서, 자기를 따라다니면서 언제나 가까이 하려 하고 그래서 나중에는 서로 맞서 노려본 끝에 그만 죽여 버린 상대가 모기였다는것을 알게 된다. 이런! 모기 이야기였구나, 하고 그 뜻밖의 결과에 놀라는 다음 순간은 웃음이 나오고 어이가 없다는 느낌도 따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만든 기술로서는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읽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끌어갔고, 그 마지막 판에서 관심을 더욱 모아서는 깜짝 놀라게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글을 읽은 다음에 우리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모기에 시달리는 한 사람의 모습인가? 모기란 곤충의 지독스러움인가? 그 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뜻밖의 일에 머리를 한 대 맞았다는 느낌뿐이다. 이 글을 읽고나서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는 독자 앞에서 글을 쓴 사람은 좋아라 웃는다. 그것 봐. 내 글재주가 어때? 용용 속았지? 하고. 과연 이런 것이 소설일까? 그러나 뜻밖의 일에 놀라게 하는 것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온갖 기술 가운데 하나가 될 수는 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소설이 될 수 없다. 이 글은 마지막에 가서 뜻밖의 일에 놀랐다는 것 밖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이 글을 끝가지 읽게 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좀 참고 읽었다. 무슨 말인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으니 참고 읽을 수 밖에 없다. 학생이 쓴 소설이니까 하고, 읽어 가면 뭔가 알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좀더 순진한 학생이라면 아마도 이런 글을 끝까지 읽지는 않을 것 같다. 대체 무엇을 썼는지도 알 수 없는 글을 무슨 까닭으로 자꾸 읽어야 하는가? 그러니까 마지막에 가서 모기 이야기란 것이 밝혀지고, 그래서 지금까지 읽은 글을 헛 읽었다고 깨달은 것은 속았구나! 하는 깨달음인 것이다. 글쓴이가 읽은 사람 앞에서 웃는 얼굴로 나타나는 것은 잘도 속아 넘어 갔지 하는 웃음이다. 본래 소설이란 것이 독자를 감쪽같이 속이는 글쓰기 기술이라고 한다면 여기서 더 할말이 없다. 그러나 소설이 사람을 속이는 글이 되어서 되겠는가? 소설은 어디까지나 참을, 진실을 이야기하는 글이어야 한다. 이 그 녀석 이란 글은 모기 이야기를 쓴 것이니까 모기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모기란 말이 없고, 그래서 읽는 사람들이 모기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그녀석 을 아주 사람같이 여기게 하는 것은 좋다. 다만 이럴 때 그 녀석 을 도무지 모기로는 볼 수 없는 말로 많이 적어 놓았다.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1부 산문을 어떻게 쓸까 소설쓰기 - 소설을 어떻게 쓸까 글재주를 부리지 말고 (2/2) 그런 대문을 좀 들어보자. - 녀석은 열려진 문 틈으로 힐끔힐끔 대문 안을 훔쳐보더니만.. - 내가 어떤 말이나 욕설을 퍼붇고 괴상한 행동을 해도 그 녀석은 잘 참고.. - 그 녀석의 눈매는 날카로왔으며.. - 길고 쭉 뻗은 다리로 담벼락에 기댈 때는 그의 매력이 한층 살아났다. - 나는 그 쭉 뻗은 다리에 조금은 호기심도 생겼지만... - 고함이라도 지르면 녀석이 자기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덤벼들지도 모를일이었다. - 그녀석이 휙 나에게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대문들에서 더러 좀 불려서 말했다든지, 또 일부러 모기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익살스런 말로 의인화해서 쓴 것이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의 거의 모두가 모기가 하는 짓이라고는 할 수가 없을 만큼, 또는 모기를 보고 자연스럽게 느낀 말이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멋대로 쓴 말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마지막에 가서 나는 혼비백산하여 재빨리 대사전을 꺼내 그 녀석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하고 쓴 말을 보면, 모기가 달려들어 혼비백산한다는 것도 우습지만, 모기가 달려 들었는데 대사전을 꺼내 모기를 힘껏 내리쳤다는 말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대관절 왜 이렇게 썼는가? 모기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래서 엉뚱한 큰 사건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다. 그래야 마지막에 가서 놀랄 것이기 때문이다. 왜 놀라게 하려 했나? 그것밖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학생들이 이런 따위로 지어내는 이야기, 창작이라는 글쓰기를 아주 좋지 않게 본다. 학생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면 그것은 진실이 되지 못하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거짓이 된다. 그리고 학생들은 체험을 쓰면 자기표현이 다 되는 것이어서, 이야기를 지어 만들 필요가 없다. 학생들이 이야기를 만들어 쓰는 것은 어른들의 글을 흉내내기 때문이고, 그런 흉내내기를 문예지도 선생님들이 글쓰기 지도기술로 알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그 녀석 이란 글만 해도 그렇다. 뭣 때문에 이런 글을 썼는가? 이렇게 쓰지 말고, 모기 이야기라면 정말 자기가 어느 여름날 하룻밤을 모기에 시달리고 모기에 물렸던 이야기를 정직하게, 사실 그대로 자세하게 써야 한다. 그렇게 써야 바른 글쓰기 공부가 되고, 그런 글쓰기를 해야 나중에 소설가가 되더라도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학생때부터 소설가 흉내를 내어 제멋대로 된 말로 독자들을 웃기고 놀라게만 하려고 아무 책임도 없는 말을 마구잡이로 써서는 절대로 제대로 된 소설을 쓸 수 없다. 여기서 다시 첫머리에 말해 놓은 중고등학생들, 또는 청소년들이 써야 할 글의 종류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면, 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은 두 가지 대답 중 어디까지나 첫째에서 들어 놓은 여러 가지 글의 형태를 고루 쓰는 공부를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끝으로, 다듬어서 써야 할 말이나 잘못된 표현을 들어본다. - 주의 (둘레) - 접근하려는 (가까이 하려는) - 열려진 문틈으로 (열린 문으로) - 이젠 아예 본격적으로 (이젠 아주) - 외모 (겉모습) - 민첩했다 (재빨랐다) - 심산 (속셈) - 포기하지 (버리지) - 인내심 (참을성) - 무서운 집념으로 달려드는 (끈덕지게 들러붙는) - 신경쇠약 내지는 과대망상일런지도 모르지만 (신경쇠약이나 헝풍생각일는지도 모르지만) - 불을 켜는 순간, 그 녀석과 창문이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불을 켜자, 그 녀석과 창문이 보였다) - 밀폐된 공간으로 (꽉 닫힌 방으로) - 자기 신변에 (제 몸에) - 난 머리를 급속도로 회전시켰다 (나는 곧 알아차렸다) - 그야말로 순간이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 혼비백산하여 (혼이 빠지게 놀라, 혼쭐나게 놀라) 공연히 불려서 말하거나 사실과 맞지 않는 표현은 앞에서도 들어 놓았다. 모기이야기라면 어려운 말이나 멋이 있어 보이는 말재주 같은 것은 도무지 필요가 없겠는데, 이런 글이 된 것은 결국 독자들을 감쪽같이 속여서 놀라게 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무슨 글을 쓰든지 글을 쓸 때는 언제나 그 글이 읽는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글이 사회에서 가지는 가치란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학생들이 쓰는 글은 어른들이 쓰는 글과 같은 수준의 글을 쓰기 위한 연습의 과정으로 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글은 어른들이 흉내내어 쓸 수도 없는, 그 자체로 훌룡한 가치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목숨과 삶이 어른들의 그것과 똑같이 소중하듯이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써야 살아 있는 글이 씌어지는 것이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노천명편" 노천명(1912~1957}) 여류 시인. 황해도 장연 출생. 이화 여전 영문과 졸업. 현대시다운 시를 쓴 최초의 여류 시인으로 지목된다. 초기에는 고독과 애수의 주정적인 시 세계를 보여 주었고, 후기에는 도시적 취향의 고독 속에 침잠하여 현실과 유리된 생활을 하다가 독신으로 병사하였다. 향토 유정기 밤기차가 가는 소리는 흔히 기인 여행과 고향을 생각하게 해 준다. 고향이 그리울 때면 정거장 대합실에 가서 자기 고향 이름을 외치는 스피커 소리를 듣고 온다는 다쿠보쿠도 나만큼이나 고향을 못 잊어 했던가 보다. 아버지가 손수 심으신 아라사 버들이 개울가에 하늘을 찌를 듯이 늘어서 있고 뒤 울 안에는 사과꽃이 피는 우리집, 눈 내리는 밤처럼 꿈을 지니고 터키 보석 모양 찬란했다. 눈이 오면 아버지는 노루 사냥을 가신다고 곧 잘 산으로 가셨다. 우리들은 곳간에서 강낭콩을 꺼내다가 먹으며 늦도록 사랑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수염 텁석부리 영감에게 나가 으레 옛날 얘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면 영감은, "어제 장마당에 가서 다 팔구 와서 없어." "아이 그렁 말구 어서 하나만." "이거 또 성황났군. 그렇게 얘길 좋아하면 이 댐에 시집갈 때 가마 뒤에 범이 따라간단다." "그래두 괜찮아, 그럼 박 첨지더러 쫓으라지, 미섭나 뭐." 램프 불 밑에서 듣는 얘기는 재미있었다. 이런 밤이면 어머니는 엿을 녹이고 광에서 연시를 꺼내다 사랑으로 내보내 주셨다. 고향과 하께 그리운 여인이다. 내 어머니처럼 그렇게 고운 이를 나는 오늘까지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늘 "옥루몽"을 즐겨 읽으셨다. 읽으시곤 또 읽으시고 읽을수록 맛이 난다고 하셨다. 백지로 책 뚜껑을 한 이 다섯 길의 책을 나는 어머니의 기념으로 두어뒀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장마다 어머니의 손때가 묻었을 이 책을 꺼내서 본다. 어머니의 책 보시는 음성이 어찌 좋던지 어려서 나는 어머니의 이 책 보시는 소리를 들으며 늘상 잠이 들었다. 이 고장 아낙네들은 머리를 얹는 것이 풍습이다. 공단결 같은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누어 땋아서는 끝에다 새빨간 댕기를 물려 머리를 얹고서 하얀 수건을 쓰고 그 밖으로 댕기를 살풋 내놓는다. 이런 모양을 한 고향의 여인들이 나는 가끔 그립다. 서울 번화한 거리에서도 이따금 이런 여인이 보고 싶다. 뒤는 산이 둘려 있고 앞엔 바다가 시원하게 내다보였다. 여기서 윤선을 타면 진남포로, 평양으로 간다고 했다. 해변에는 갈밭이 있어 사람의 키보다 더 큰 갈대들이 우거지고 그 위엔 낭떠러지 험한 절벽이 깎은 듯이 서 있었다. 아래는 퍼어런 물이 있는데 여름이면 이 곳 큰애기들은 갈밭을 헤치고 이 물을 찾아와 멱을 감았다. 물 속에서 헤엄을 치고 놀다가는 산으로 기어올라간다. 절벽을 더듬어 올라가노라면 바위 속에서 부엉이 집을 보게 되고 산개나리꽃을 꺾게 된다. 산개나리를 한아름 꺾어 안고는 배를 타고 대처로 공부를 간다고 작은 소녀는 꿈이 많았다. 내가 사는 데서 한 20리를 걸어가면 읍이 있다. 고모님 댁이 거기 있고, 또 성당이 거기 있어서 가톨릭 신자인 우리집에선 큰 미사가 있을 때면 읍엘 들어가야 했다. 달구지를 타거나 걷거나 하는데, 고모집엘 갔다 올 때면 고모가 언제나 당아니(거위) 알을 꽃바구니에 하나 가득 담아 달구지 위에다 올려 놔 주는 것이었다. 흔들거리는 달구지 위에서 이 당아니 알이 깨어질까 봐 몹시 조심이 됐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달구지에 쪼그리고 앉아서, 눈 덮이는 좌우의 산과 촌락들을 보며 어린 나는 말이 없었다. 고향을 버린 지도 20여 년, 낯선 타관이 이제 고향처럼 되어 버리고 그리운 고향은 멀리 두고 그리게 되었다. 나는 고향에 돌아간 기약이 없다. 앞마당엔 아라사 버들이 높게 서 있는 집, 거기엔 어머니가 계셨고 아버지가 계셨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당신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2 - 헬리스 브리지 몇 년 전, 한 신사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존재가 되어서 무엇을 하갰습니까?" 나는 대답했다 "나는 하루하루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믿겠습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으로 그 매일을 만들어 갈 거예요." 그리고 그 이후, 나는 그렇게 해왔다. 팀 피어링 당신이 밖으로 나가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 서 있는 이 시점에서 또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오직 행동뿐이다. 당신 자신을 목표를 향해 매진하도록 하는 육체적인 일뿐이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작은 의식을 치른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질문한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가? 내가 오늘 전심전력으로 할 일이 무엇인가?" 두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 이보다 더 절박한 부름이 있을까?" "이 일에 대한 나의 집중도는 어느 수준인가? 내 삶은 균형이 잡혀 있는가? 내가 충분히 열과 성을 쏟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수박 겉핥기로 끝날 것인가?" 당신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 3 - 짐 캐츠카트 내 평생 가장 자극적인 질문은 이것이었다. "내 이상형에 도달하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은 여러분을 자신의 가장 고상하고 존경할 만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도록 자극한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기 시작하라, "나의 가정 칭찬할 만한 부분을 최대한 발전시키고, 가장 재능 있는 부분을 살리고, 가장 잘하는 분야를 개척하려면,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질문은 여러분의 사고의 축을 바꿔 놓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하고, 조금 더 넓게 보고, 조금 더 타인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 때문이다. 팀 시워드라는 사내가 있었다. 그는 '타이디 카'라는 자동차 판매 회사에서 일했는데, 내 강연을 다 들은 후에 성공의 요령을 물어 왔다. 나는 그에게 일체의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앞서 말한 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실천한 결과, 직장에서 승승장구했다. '타이티 카'의 국제 판매 회의가 개최되던 날, 나는 만찬의 사회를 봤다. 맨 처음 데니스 웨이들 리가 무게를 잡으며 연설했다. 그리고 나는 마이크를 사장에게 넘겼다. 사장이 입을 열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저쪽에 있는 흰색 코버트를 차지할 사람을 발표하겠습니다. 저 차는 국제 판매 경연 대회에서 영예의 우승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올해 경연은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만, 일등은 이등보다 무려 삼백 대나 더 많은 차를 팔았습니다. 이등과 삼등은 한 대 차이, 삼등과 사등은 자동차 반대 차이입니다. 올해의 일등은 미시건 베이 시티 대리점의 팀 시워드입니다." 좌중은 흥분의 도가니로 떠들썩했다. 팀은 동료의 무등을 타고 홀 중앙에 있는 코보트의 옆으로 옮겨졌다. 나는 소란을 가리앉히며 사람들 사이를 뚫고 가서 그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물었다. "우숭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저는 겨우 19살의 나이로 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당시 사회 생활이 전혀 없었던 저는 집에서 나 자신에게 자문했습니다. 나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싶다. 그럴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유니폼을 말끔하게 다려 입고, 서류를 잘 정리하고, 모든 고객의 개개인에게 가장 좋은 판매법을 찾았고, 자동차 한 대를 팔 때마다 최선을 다하고, 나의 하루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기 의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나 자신에게 이상형이 되기 위한 방법을 질문했습니다. 그렇게 향상된 매일이 모여 충실한 일년이 되었고, 이제 나는 세계적인 판매원이 되어 이 자리에 서게 된 겁니다." "정말 비범하시군요." 내가 감탄했다. 그는 말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집에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습니다. '세계적인 판매원은 어떻게 뉴올리언즈의 국제 회의에 참석할까?' 나는 국제적인 판매원이라면 일등석 편도 항공권을 예약하리라 추측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아니, 당신의 우승을 모르는 상황에서 일등석 편도 항공권을 샀다는 말입니까?" "내가 비행기를 타고 집에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까?" "아니오, 물론 그럴 필요가 없지요. 당신에게는 코버트가 있으니까요."
Board 추천글 2022.11.22 風文 R 2259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 能:능할 능. 書:글 서. 不:아니 불. 擇:가릴 택. 筆:붓 필. [출전]《唐書》〈歐陽詢傳〉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 곧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데 종이나 붓 따위의 재료 또는 도구를 가리는 사람이라면 서화의 달인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 당나라는 중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의 하나였다. 당시 서예의 달인으로는 당초 사대가(唐初四大家)로 꼽혔던 우세남(虞世南),저수량,유공권(柳公權),구양순(歐陽詢)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의 서체를 배워 독특하고 힘찬 솔경체(率更體)를 이룬 구양순이 유명한데 그는 글씨를 쓸 때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저수량은 붓이나 먹이 좋지 않으면 글씨를 쓰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물었다. “내 글씨와 구양순의 글씨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소?” 우세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구양순은 ‘붓이나 종이를 가리지 않으면서도[不擇筆紙]’ 마음대로 글씨를 쓸 수 있었다[能書]고 하오. 그러니 그대는 아무래도 구양순을 따르지 못할 것 같소.” 이 말에는 저수량도 두 손을 들었다고 한다. 또 ‘능서불택필’은 ①《왕긍당필진(王肯堂筆塵)》과 ②주현종(周顯宗)의 《논서(論書)》에 각각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①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지만 이 속설은 구양순까지이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붓이나 종이를 문젯거리로 삼게 되었다.” ②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니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통설이라고 할 수 없다.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제외한 해서(楷書)/전서(篆書)/예서(隸書)를 쓰는 경우는 붓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에 붓을 가리지 않을 수 없다.”
Board 고사성어 2022.11.22 風文 R 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