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이삭주이 책을, 이것저것 주워 읽어 온 데서나 또 번역을 해 온 가운데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상스레 뇌리에 남아 있는 말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술인이나 그 밖의 사람이 종신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에 관한 것들이 그것이다. 오랜 동안 병석에서 심신이 쇠약해진 환자이고 보면 방 안의 채광이 너무 밝아도 정신적 피로를 가져오기 쉽다. 이럴 때는 창문의 차광막을 내리어 채광을 조절하게 된다. 괴테가 종신하는 마당에도 이렇듯 커튼이 내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꾸만 의식이 흐려져 가고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문득 자기의 주변이 점점 어두워져 오는 것만 같아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더 들어오게!' 이렇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일렀던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대시인의 임종을 대시인다운 임종의 말로 미화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 들어오게!'를 '좀더 빛을! 좀더 빛을!'으로, 평범한 아무렇지도 않은 산문조의 말을 운문 격조로 다듬어 고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어느 외국의 평론가도 꼬집어댄 바 있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 비슷한 종신의 장면으로는 O. 헨리의 경우를 또 들 수 있다. 그는 한평생을 두고 뉴욕시를 그렇게도 좋아한 사람이 또 없었을 만큼 사랑했다. 그러한 그가 임종이 가까워 오자 조용히, '차광막을 올려요. 뉴욕 시를 내다보게. 어두운 데서는 죽고 싶지가 않아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괴테의 경우처럼 O. 헨리의 임종 장면에도 차광막이 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끌어올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O. 헨리의 경우는 대시인이 아닌 산문가다운 격조로 임종의 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두 작가가 다 같이 죽음에 임하는 자세가 초연하고 드디어 오고야 말 것이 왔다는 달관의 경지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탐험가 스코트의 마지막 일기를 보면 감히 범인들이 침범하지 못할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엿볼 수 있다. 1911년 아문센은 스코트를 앞지르기 위해 북극으로 탐험길을 떠나는 것으로 위장하고 실은 남극으로 향했던 것이다. 스코트가 사력을 다해 간신히 남극의 극지에 도달했을 땐 그의 눈앞에는 노르웨이의 깃발이 휘날리며 서 있었다. 순간 모든 걸 알게 된 스코트에게는 좌절감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영하 37도의 눈보라 속으로 죽음의 귀로에 접어들었다. 일행 4명 중에서 오트스란 대원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일행의 행진을 지체시킬까 염려하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노라, 한 마디 남기고는 텐트 밖으로 세 사람도 북극의 미이라가 됐지만 그들 누구도 당황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한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 보려 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몸이 점점 약해져만 가고 있다. 최후가 머지않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상 더 일기를 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스코트는 조용히 붓을 놓았다. 이것은 달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력을 보여 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의 하나이다. 초년에는 귀족처럼 화려한 생활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렘브란트는 부인을 잃은 뒤를 이어 재물까지 잃어버리고는 구걸하다시피 하는 생활의 구렁창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림에 대한 정열만이 사랑과 재산을 앗아간 그의 여생을 지탱해 주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극에서 극으로의 희비고락에 찬 일생을 마치는 마당에 그는 '공허하고도 또 공허하다. 모두가 공허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가 살아 온 인생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내재성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우선 외적인 생활과 싸웠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새로이 구축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발견했을 땐 세상은 모두가 '공허'한 것으로 느껴졌으리라고 본다. 이와는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임종에 인생을 말한 작가가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헵벨이다.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느 작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빈과 갖은 고난 속에서 작품 제작에 목숨을 걸었건만 늘 거지와 같은 구차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만년에야 "니벨룽겐"(1862)이란 대작으로 실러 상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미 종신이 가까웠던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술이 있을 때는 술잔이 없고 술잔이 있을 때는 술이 없더라!'고. 그처럼 인생의 무상과 부조리를 실감하고 개탄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희극은 끝났다!' 이것은 일생이 불운으로 가득 찬, 단 한 번만 있었던 결혼의 기회마저 잃어버린, 그런 생애를 마치는 마당에 친지 하나 없이 외로이 가는 베토벤의 마지막 말이었다. 느끼는 자는 울고 깨달은 자는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베토벤의 '희극'은 그가 가장 잘 웃는 최후의 웃음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임종의 짧은 말들은 무엇인가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는 바 크다고 여겨진다. 그것들은 여유 있게 도사리고 앉아 금언이나 좌우명을 쓰는 마음과는 달리 인생이 종착하는 자리에서 우연이 아니라 그들에게 한평생 축적되었던 체험적 진실의 토로이기에 더욱 의의가 크다. 이러한 말들이 지니는 무게는 금언이나 좌우명보다도 우리들을 한층 일깨워 주는 힘이 크고, 또 이러한 말들을 수집 연구해서 집대성하는 일도 결코 무의미한 노력은 아닐 것이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마지막 기도 -요산 김정한 선생님 고별식에서 기도하는 이에게 항상 산이 되어 오시는 생명의 주님 산이 좋아 그 이름도 산이라 하고 한평생 고고한 지혜의 산으로 살다 이제 마침내 깊고 그윽한 산이 되어 여기 누으신 분 요산, 요셉 선생님을 흠도 티도 없는 당신의 그 나라에 받아 주십시오 낙엽 타는 향기 속에 저무는 11월 그분이 이승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함께 괴로워하셨던 주님 임종의 머리맡에서 함께 기도하던 저희에게 소리의 언어 대신 침묵의 눈물로 마지막 작별을 고하던 고인의 미처 쏟아내지 못한 눈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회한도 받아 주십시오 이별의 슬픔 속에 할말을 잃은 이들에게 끝없는 강이 되어 오시는 구원의 주님 길고 긴 낙동강을 고향의 벗으로 한평생을 정의의 강이 되어 살았기에 그만큼 괴로움도 길었던 당신의 사람 거룩한 의인 성요셉처럼 어떤 시련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로 의연하고 꿋꿋하게 진리와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이 시대의 의인, 요셉 선생님을 아름다운 하늘나라에 받아주십시오 어둠이 없는 빛의 나라 미움이 없는 사랑의 나라 절망이 없는 희망의 나라에서 편히 쉬게 하여 주십시오 지상에 두고 가는 가족, 친지들과 더 깊이 결합하여 함께 머무는 환한 빛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진정 당신이 계시기에 죽음이 끝이 아님을 오늘 더욱 새롭게 알아들으며 별처럼 빛나던 당신의 사람 저희의 가장 소중했던 한 분을 이제 영원히 당신께 봉헌합니다 (1996)
Board 삶 속 글 2022.12.10 風文 R 445
득록망촉(得롱望蜀) 得:얻을 득. 롱:땅 이름 롱. 望:바랄 망. 蜀:나라 이름 촉. [준말] 망촉(望蜀). [동의어] 평롱망촉(平롱望蜀), 망촉지탄(望蜀之歎). [유사어] 계학지욕(谿壑之慾), 차청차규(借廳借閨), 거어지탄(車魚之歎),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 [참조]계륵(谿肋). [출전]《後漢書》〈光武記〉〈獻帝記〉.《三國志》〈魏志〉 농을 얻고 나니 촉을 갖고 싶다는 뜻. 곧 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② 한 가지 소원을 이룬 다음 또다시 다른 소원을 이루고자 함을 비유. ③ 만족할 줄 모름의 비유. ①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롱書:감숙성)에 외효, 촉(蜀: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유분자.유양.이헌.공손술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32), 광무제외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아들 외구순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롱望蜀].’”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년(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을 이루었다. ② 광무제 때로부터 약 200년 후인 후한 헌제(獻帝:189~226)말, 즉 삼국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의 일이다. 헌제 20년(220), 촉을 차지한 유비(劉備)가 강남의 손권(孫權)과 천하 대사를 논하고 있을 때 조조(曹操)는 단숨에 한중(漢中:섬서성 서남쪽 한강 북안의 땅)을 석권하고 농땅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명장(名將) 사마의[司馬懿:자(字)는 중달(仲達),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의 할아버지]가 진언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격하면 유비의 촉도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 바라지 않소.” 이리하여 거기서 진격을 멈춘 조조는 헌제 23년(223), 한중으로 진격해 온 유비의 촉군(蜀軍)과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계륵(鷄肋)’이란 말을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시를 살리는 우리말 우리 시에 나타난 어린이 말 이 자리에서는 어른들이 쓰는 시(어린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쓰는 동시 가 아니고 어른들이 읽는 것으로 쓰는 시)에 나타난 어린이의 말(어린이들이 나날이 쓰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어른들이 읽는 시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말로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까닭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의 본질이 어린이처럼 깨끗한 마음으로 쓰는 것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우리 어른들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외국에서 들어온 글을 숭상하고 그 글말을 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것을 특별한 권리로 삼아, 일하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을 부리고 아이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개화 이후에는 우리 문인들이 우리말로 글을 쓰고 시인들이 우리 시를 썼다고 하지만, 남의 나라 글자라고 할 밖에 없는 한문글자와 그 글자로 된 말이며, 일본말법을 마구 그대로 써 왔기에 아이들이 읽을 수 없고 읽어도 알 수 없는 글이 너무 많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들에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이 가끔 나온다.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른들에게 읽히기 위해서 썼는데도 그 마음이 어린이와 다름없는 상태여서 저절로 어린이가 하는 말로 시를 쓰게 된 것이다. 이런 작품을 몇 편만 보기로 하자. 빗소리 - 주요한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 비는 뜰 위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이즈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위에 창 밖에 지붕에 남 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1924) 밤에 오든지 낮에 오든지 봄에 오는 비가 들려주는 소리를 오늘날에는 어른들조차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소리로 반가운 자연의 소리로 받아 들일 수 없도록, 자연이고 사람이고 달라지고 병들어 버렸다. 그러니 이런 시의 맛을 요즘 학생들이 어느 정도로 알 수 있을까 싶어 슬퍼진다. 어쨌든 자연의 소리에 감동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은혜로움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어른이고 어린이고 다를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말도 이런 시에서 티없이 깨끗하게 씌어졌다고 본다. 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1922)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시다. 소월은 이 시를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시로 쓴 것이지, 특별히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쓴 것이 아니다. 어른이 그 심정을 그대로 쏟아 놓았는데도 그것이 그대로 어린이들까지 자기들이 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는 시, 가장 바람직한 시의 모습을 여기서도 보게 된다. 강변 이란 말을 썼는데, 본래 우리말로는 강가 이다. 그런데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경북의 깊은 산골에서고 조그만 냇라를 갱변 갱빈 이라 했고, 이 갱변 갱빈 이란 말이 시골말로 널리 쓰고 있으니 우리말로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강변 이란 말을 썼다고 탓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바닷가 라고 할 것을 해변 해변가 라 써도 좋다고 할 수는 없다. 호수 - 정지용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1930) 지는 해 - 정지용 우리 오빠 가신 곳은 해님 지는 서해 건너 멀리 멀리 가셨다네. 웬일인가 저 하늘이 핏빛보담 무섭구나! 날리 났다. 불이 났다. 앞의 시 호수 는 어린이들에게 주려고 쓴 동시가 아니고, 발표한 잡지도 어른들이 읽는 것이었다. 그러나 초등학교 낮은 학년 어린이들도 읽으면 오리들이 물 위에 떠 다니면서 목을 감고 놀고 있는 모양을 그려 보며 좋아할 것 같다. 뒤의 시 지는 해 는 어린이들에게 주기 위해서 쓴 동요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리 오빠 라 하여 시인이 어린 아이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읽으면 시인이 짐짓 어린이로 꾸며 보여서 어린 아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다. 아주 완전히 어린이가 되어 살아 잇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요를 쓴 어른과 글 속의 어린이가 따로 떨어져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시를 읽으면 그 옛날 거의 저녁마다 볼 수 있었던 새빨갛게 타오르던 노을과 그 노을 저쪽으로 지던 해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더구나 이 동요시에는, 숱한 우리 젊은이들이 서쪽 바다 건너 전쟁터에 끌려가던 중일전쟁이 터졌을 무렵의 불안한 세상 형편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느껴진다. 지금까지 든 네 편 가운데서 빗소리 는 들은 것을, 호수 와 지는 해 는 본 것을, 엄마야 누나야 는 보고 들은 것을 가지고 쓴 것이지만 모두 자연을 글감으로 하였다. 본 것이든 들은 것이든 자연을 노래한 시에서 이와같이 어른과 어린이의 세계가 하나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겨울 물오리 - 이원수 얼음 어는 강물이 춥지도 않니? 동동동 떠다니는 물오리들아 얼음장 위에서도 맨발로 노는 아장아장 물오리 새야 나도 이젠 찬바람 무섭지 않다. 오리들아, 이 강에서 같이 살자. (1981) 이 시는, 어른들이 읽는 수필이나 논문도 썼지만 평생을 주로 동시와 동화와 소년소설을 쓰다가 돌아가신 지은이가 일흔의 나이로 병상에 누워서 마지막으로 써서 남긴 작품이다. 지은이가 어떤 사람인가를 모르고 작품만 보아도 어린이들이 읽는 동시구나 하고 모두 말할 것이다. 그렇게 보아도 좋다. 그러나 잘 살펴서 읽으면 이 시에는 어린이들이 아직은 느낄 수 없는 깊은 세계가 담겨 있다. 지은이의 작품 세계와 살아간 길을 대강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에서, 고향의 봄 으로 시작하여 55년 동안 이원수 문학이 걸어온 길이 마지막으로 이르게 된 자리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이 시는 작곡이 되어서 유치원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고 있는데, 이렇게 깊고 넓은 뜻을 담아 놓은 시가 유치원 어린이들도 즐겨 부르는 노래로 되어 있다는 것은 참 희한한 일이다. 물론 어린이들은 어린이의 정도에서 읽고 노래하면 그만이고, 그래서 차츰 자라나 먼 훗날 이 시를 다시 읽고 새로운 뜻을 깨닫게 되면 평생을 이 노래로 함께 자라고 살아가게 되는 셈이니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이 시는 아동문학작가가 썼지만, 지은이가 쓴 많은 동시가 그랬던 것같이, 지은이가 짐짓 어린이로 되어 어린이 짓을 해 보인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자기 자신을 노래한 것이 그대로 어린이의 노래로 되었고, 시인의 세계와 어린이의 세계가 아주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시에서는 자연과 사람이 또 하나로 되어 있다. 자연이 사람이고 사람이 곧 자연이 되어 모든 문제를 해결해 놓았다. 이것이 모두 깨끗한 우리말, 어린이 말을 시의 가장 좋은 표현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그놈을 잡으려 나처럼 글재주가 무딘 사람은 대수롭지 않은 번역을 한 줄 하는 데도 민망할 정도로 연방 우리말 사전을 뒤적인다. 그럴 것이 목적한 단어를 찾다가 낯선 낱말이라도 눈에 띄면 그것에 정신이 팔리다가는 또 다른 어휘를 발견하면 그것에로 달아난다. 이처럼 '도리기'란 말을 찾다가 '되리'란 말에 눈을 팔듯이 연줄연줄 따라가다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버리곤 한다. 이렇게 흘러 버린 시간이 수없으리라. 이 수없는 시간을 나는 아깝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영어를 우리말로 옮기노라면 우리말 사전과 싸우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가 당장에는 용처가 없지만 앞날을 위해서 눈에 띄는 낯선 말이면 무작정 적어 두는 버릇이 생겼다. 이렇게 해서 적고 적어 둔 것이 어느새 두툼한 노트로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무료한 때면 이 노트를 꺼내 가지고, 어허 이런 어휘도 있었던가, 저런 말도 있었던가고 사뭇 감탄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겉장이 낡고 닳아 새것으로 씌우고 모자라진 데는 손질을 하느라고 화초를 가꾸듯이 매만지기도 했다. 이렇듯 노트는 거의 내 머리맡에서 떠나지 않게 되었고 손땟국이 흐르게 되었다. 몇 번이나 겉장을 갈았는지 모른다. 이런 노트를 나는 잃어버렸다. 사변 때 모든 책과 함께. 잃은 책은 그때그때 사정이 닿는 대로 제일 필요한 것부터 다시 사들일 수 있지만 노트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뿐 아니라 다시는 노트를 만들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를 일이다. 무던히나 열을 쏟았고 정을 부었던 때문인지 모르겠고 이제는 그럴 겨를과 일이 없어서인지 모른다. 그러나 사변으로부터 거의 20년이 가까워 오는 지금에도 문득문득 생각에 떠오르는 것이 노트다. 번역을 하다 우리말이 막힐 때가 더욱 그렇다. 그것이 지금 곁에 있어도 별도움은 안 될 것이지만, 정확히 따지고 보면 거기 적힌 어휘들이라야 대개는 지금에는 눈에 익은 것이 많고 나머지는 별로 쓰이지 않는 말들이다. 거기에는 놀란흙, 자드락, 어리, 버덩, 도리기, 좀 쑥스런 말이지만 '되리'등이 있을 것이고 번역에 필요한 거의 같은 성질의 낱말들을 정리해 놓은-대번, 문득, 별안간, 갑자기, 대뜸, 금세, 고대, 퍼뜩. 또 다른 종류의 계열로는-결국, 필경, 종당, 필시, 나중에, 결말에, 종국에. 그리고--종종, 가끔, 때때로, 어쩌다 등 이런 것들이었으리라. 후자에 속하는 이러한 일상적 용어들의 집합은 같은 뜻의 '결국'이라는 낱말이라도 다양성 있게 쓰이는 영어에 대처하는 데 편의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취해진, 동의어를 모은 소사전의 구실을 해 주는 것이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노트이건만 그것은 날이 갈수록 눈앞에 자꾸 확대되어 오곤 한다. 무료할 때가 더욱 그렇다. 그리고 2,3월 이맘때면 더더구나 거기 적혀 있었던 낱말 하나가 머리를 뱅뱅 돌면서도 생각이 떠오르지를 않아서다. 겨울철 삼림 속에, 내린 눈이 쌓이고 쌓였다가 봄이 되어 낮에 볕을 받아 오후엔 건등이 녹아 내리며 물이 돈다. 하지만 밤에 접어들어 다시 기온이 내려가 물이 돌던 눈의 건등은 얼음으로 변한다. 발로 짚으면 물 위의 살얼음처럼 바삭 하고 꺼져 내린다. 영어로는 crust라고 한다. 이 눈 건등의 얼음진 것을 한 마디의 낱말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분명히 노트에는 적혀 있었다. 한 5, 6년 전 어떤 수기를 번역하다가 이 crust가 나왔다. 아무리 생각을 해내려고 애를 쓰고 사전을 뒤적여 보았으나 허사였다. 할 수 없이 눈얼음이라고 번역했다. 말이면 다 말은 아니다. 이것은 얼토당토 않은 궁여지책에서 나온 넋두리에 불과하다. 나는 얼마 전부터 하루에 단 1분씩이라도 "우리말 큰사전"을 샅샅이 잡아 나가기로 했다. 저 노트에 적었던 그놈을 잡기 위해서다. 그놈을 잡으려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르지만.
Board 삶 속 글 2022.12.10 風文 R 682
동호지필(董狐之筆) 董:동독할 동. 狐:여우 호. 之:갈 지(…의). 筆:붓 필. [동의어] 태사지간(太史之簡). [출전]《春秋左氏傳》〈宣公二年條〉 ‘동호의 직필(直筆)’이라는 뜻. 곧 ① 정직한 기록. 기록을 맡은이가 직필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을 이름. ②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적어 역사에 남기는 일. 춘추 시대, 진(晉)나라에 있었던 일이다. 대신인 조천(趙穿)이 무도한 영공(靈公)을 시해했다. 당시 재상격인 정경(正卿) 조순(趙盾)은 영공이 시해되기 며칠 전에 그의 해학을 피해 망명 길에 올랐으나 국경을 넘기 직전에 이 소식을 듣고 도읍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사관(史官)인 동호(董狐)가 공식 기록에 이렇게 적었다. ‘조순, 그 군주를 시해하다.’ 조순이 이 기록을 보고 항의하자 동고는 이렇게 말했다. “물론, 대감이 분명히 하수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감은 당시 국내에 있었고, 또 도읍으로 돌아와서도 범인을 처벌하거나 처벌하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감은 공식적으로는 시해자(弑害者)가 되는 것입니다.” 조순은 그것을 도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뒤집어쓰고 말았다. 훗날 공자는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동호는 훌륭한 사관이었다. 법을 지켜 올곧게 직필했다. 조선자(趙宣子:조순)도 훌륭한 대신이었다. 법을 바로잡기 위해 오명을 감수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경을 넘어 외국에 있었더라면 책임은 면했을 텐데…….”
Board 고사성어 2022.12.10 風文 R 1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