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의멸친(大義滅親) 大:클 대. 義:옳을 의. 滅:멸할 멸. 親:친할?육친 친. [출전]《春秋左氏傳》〈隱公三?四年條〉 대의를 위해서는 친족도 멸한다는 뜻으로, 국가나 사회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의 정도 돌보지 않는다는 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환왕(桓王) 원년(元年:B.C.719)의 일이다. 위(衛)나라에서는 공자(公子) 주우가 환공(桓公)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후의 자리에 올랐다. 환공과 주우는 이복 형제간으로서 둘다 후궁의 소생이었다. 선군(先君) 장공(莊公) 때부터 충의지사로 이름난 대부 석작(石?)은 일찍이 주우에게 역심(逆心)이 있음을 알고 아들인 석후(石厚)에게 주우와 절교하라고 했으나 듣지 않았다. 석작은 환공의 시대가 되자 은퇴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석작이 우려했던 주우의 반역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반역은 일단 성공했으나 백성과 귀족들로부터의 반응이 좋지 않자 석후는 아버지 석작에게 그에 대한 해결책을 물었다. 석작은 이렇게 대답했다. “역시 천하의 종실(宗室)인 주왕실을 예방하여 천자(天子)를 배알(拜謁)하고 승인을 받는 게 좋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천자를 배알할 수 있을까요?” “먼저 주왕실과 각별한 사이인 진(陳)나라 진공(陳公)을 통해서 청원하도록 해라. 그러면 진공께서 선처해 주실 것이다.” 이리하여 주우와 석후가 진나라로 떠나자 석작은 진공에게 밀사를 보내어 이렇게 고하도록 일렀다. “바라옵건대, 주군(主君)을 시해한 주우와 석후를 잡아 죽여 대의를 바로잡아 주시 오소서.” 진나라에서는 그들 두 사람을 잡아 가둔 다음 위나라에서 파견한 입회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2.12.01 風文 R 801
질척거리다 보통은 장애인을 향해 ‘당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묻는다. 장애학자 마이클 올리버는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라고 제안한다. 장애는 개인이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걸 알게 하는 질문이다. 10월19일 문화체육관광위 국정감사 자리. 며칠 전 정무위에서 국회의원 윤창현씨가 쓴 ‘질척거린다’는 표현에 국민권익위원장 전현희씨는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했다. 이 말에 의문을 품게 된 국회의원 배현진씨는 국감장에서 국립국어원장 장소원씨를 불러 세웠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진흙이나 반죽 따위가 물기가 매우 많아 차지고 진 느낌이 자꾸 들다’라고 풀이되어 있는데, ‘이 이상의 사전적 의미가 있냐?’고 묻더라. 사전에 그런 뜻이 없으니 국가사전을 옹위해야 하는 국어원장 입장에선 당연히 ‘없다’고 하더군. 사전이 뭐라 하든, 말은 쉼 없이 움직인다. 누구의 승인도 필요 없다. 이미 인터넷엔 ‘질척거리는 남자나 여자’를 싫어한다는 글이 수북하다. 비슷한 뜻의 ‘질퍽거린다’는 말도 진흙이나 반죽 말고 사람에게도 쓰인다. 엄마를 좋아하는 우리 딸은 외출하면서 한 번이면 될 인사를 아쉬운 듯 몇 번씩 되풀이한다. ‘그만 질척거리고 어서 가’라는 핀잔을 듣고서야 새초롬해져서 간다. 나도 가끔 아내에게 귀찮게 굴어 이 소리를 듣는다. 달리 물었어야 했다. “왜 진흙이나 반죽의 상태를 뜻하는 말을 ‘사람’에게 썼을까?” 혹은 “이 말을 사람에게 쓰면 어떤 뜻을 갖게 되나?”. 그랬다면 국어원장도 단답형이 아닌 사회적 맥락 속에서 그 말이 획득한 의미에 대해 자신의 식견을 펼쳤을 텐데. 나는 ‘질척거린다’는 말을 들으면 수치스럽다. 마약 김밥 ‘똥통 학교’란 말을 아시리라. 어느 학교가 똥통 학교라며 여기서 쑤군, 저기서 쏙닥거린다. 취사선택의 폭을 넓힌다는 고교 다양화 정책으로 특목고, 자사고, 특성화고, 일반고로 나뉜 학교는 더욱 서열화했다. 묘책이 있다. ‘똥통’이란 말이 학생들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고 서열화를 강화하기 때문에 앞으로 ‘똥통’이란 말을 쓰지 못하게 하는 건 어떤가? ‘벼락부자’란 말을 자꾸 쓰면 벼락에 대한 ‘겁대가리’를 상실하여 ‘진짜 벼락’을 맞겠다며 먹구름을 쫓아다니는 부자들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다. 도처에서 행해지는 ‘폭탄 세일’과 ‘총알 배송’은 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약화해 최근의 한반도 긴장 고조의 심리적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얼마 전, 식품 이름에 마약 등의 표현을 넣지 못하게 하는 ‘식품 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발의됐다. 매일 먹는 음식에 ‘마약’을 쓰면, 사람들(특히, 사리분별 못 하는 청소년들)이 마약에 대한 경각심을 잃고 쉽게 진짜 마약에 손을 댈지 모른다는 주장이 먹혔다. ‘중독될 만큼 맛있다’는 비유적 뜻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마약을 기호식품이나 식품첨가제로 인식하게 할 수 있다는 것. 외국에서는 인터넷에 마약이란 단어를 노출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니, 우리 사회는 그간 너무 헐렁했어! ‘마약 김밥’이여, 이젠 안녕. 말은 생각에 영향을 미친다. 세상을 재해석하고 재구성한다. 하지만 이렇게 직선적이고 단순하지는 않다. ‘마약 김밥’을 못 쓰게 한다고 마약 사범이 줄어들진 않는다. 세상이 져야 할 책임을 말에 떠넘기지 말라.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2부 - 시를 어떻게 쓸까 꾸며 쓰는 버릇 어떻게 고칠까(1/2) 이번에는 시를 어떻게 써야 하나 하는 문제를 학생들이 쓴 시를 몇 편 보면서 생각하기로 한다. 다음은 어느 학교 문예반에서 나온 문집 가운데 실려 있는, 여고 1학년생의 시다. 친구 새벽 별보다 더 청량한 너의 눈은 시원한 시냇물보다 더 맑은 너의 음성은 넓은 대지에 떨쳐진 푸른 너의 얼굴은 어느덧 다소곳이 앉아 슬픔을 머금고 장미빛 붉은 여운만을 남긴 채 소리없이 자꾸만 자꾸만 멀어진다. 마지막 남은 한 떨기 작은 꽃잎처럼.. 이 시는 친구의 모습을 잔뜩 아름다운 말로 그려 놓았다. 그런데도 그 친구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아름다운 말로 그려 놓았다 라는 느낌은 가슴에 와닿는 감동이 아니고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 놓았구나 하는 느낌이다. 이래서 이 작품은 제대로 된 시가 아니다. 말을 그럴 듯하게 꾸며 썼다고 했는데, 우선 이 작품에 나온 한자말이나 잘못 쓴 말부터 살펴보자. - 청량한 입으로 소리내었을 때, 울림이 좋은 말이다.그러나 무슨 말인가? 귀로 들었을 때 쉽게 알 수 있는 말, 아이들도 다 알고 있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더구나 이런 내용을 쓴 시라면 글에서만 나오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밝은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런데 셋째줄에 맑은 이 나와 있다. 이 셋째줄의 맑은 은 음성 곧 목소리를 말한 것이니 고운 하면 될 것이다. - 음성 이 말도 목소리 라 하면 된다. 어린 아이들도 다 알고 쓰는 말이 가장 깨긋한 우리말이고, 시가 될 수 있는 좋은 말이다. - 대지 이것은 땅 이라 써야 한다. 땅을 대지 라고 해야 할 까닭이 없다. 있다면 그것은 어른들(남의 나라 글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글을 흉내내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고, 겉멋 부리고 허세 피우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대지 는 우리말이 아니다. 만약에 땅 이라 쓰면 뭔가 보잘것 없고 빈약해 보이는 말 같고 대지라 하면 그럴싸해 보이고 시가 될 것 같은 말로 느껴진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좋은 시를 쓸 수 없다는 것을 잘라 말하고 싶다. - 넓은 땅에 떨쳐진 푸른 너의 얼굴은 이게 무슨 말인가? 얼굴이 땅에 떨쳐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다. 떨쳐진 (떨친다)이란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잘못 쓴 것이다. - 여운 이 말은 울림 이라 하면 그만이다. - 마지막 남은 한 떨기 작은 꽃잎처럼.. 이것은 말이 틀렸다. 꽃잎 은 떨기 라 하지 않는다. 한 떨기 라 했다면 꽃처럼 이라고 써야지. 이렇게 엉뚱한 말을 쓴 것도 말을 말로서만 만들어 썼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우선 한 차례 말을 우리 것으로 깨끗이 다듬어 놓고 (말을 잘못 써서 무슨 말을 해 놓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어쩔수 없이 그래도 두고) 다시 한 번 읽어 보자. 그러면 훨씬 쉽게 읽힐 것이다. 그런데 낱말만 다듬어 놓았다고 해서 이 시가 썩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낱말과 낱말들이 모여서 이뤄진 문장이 원체 공중에 둥 떠 있는 말이 되어 있기때문이다. 흔히 쓰는 투의 말로, 개념으로 된 말로 씌어 있는 것이다. - 새벽 별보다 더 맑은 눈 시냇물보다 더 고운 목소리 이런 것은 유행하는 노래말이지 시가 될 말은 아니다. 이런 말을 또 괜히 어려운 한자말이나 글말로 바꾸어 놓는다고 해서 그 바탕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말의 속임수가 될 뿐이지. 여기에다 틀린 말을 써 놓은 것이며, 이 모든 말의 허방이 뿌리도 향기도 없는 종이꽃을 손으로 만들려고 한 데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한다. 친구든지 무엇이든지 대상을 아름답게만 그려야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아름답게만 그리려고 할 때 도리어 그것은 거짓이 되기 예사다. 사실을 정직하게, 또렷하게 잡아 보여야 시가 되는 것이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동리편" 김동리(1913~1995) 소설가. 본명은 시종, 경북 경주 출생. 경신 고보 중퇴, 서라벌 예술대학장. 한양대 예술대학장 역임. 일찍이 민족 진영의 문학을 대표하여 좌익을 분쇄한 바 있고 순수 문학의 옹호자로서 전후 문단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왔다. "황토기" "등신불" "까치 소리" 등 문제 소설의 작가이다. 만월 나는 지금 보름달 아래 서 있다. 한 깊은 사람들은 그믐달을 좋아하고, 꿈 많은 사람들은 초승달을 사랑하지만, 보름달은 뭐 싱겁고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맞는다던가? 한이 깊은 사람, 꿈이 많은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아무래도 싱겁고 평범한 사람이 더 흔할 게고, 그래서 그런지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다. 그리고 나도 물론 그 중의 한 사람이다.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이 싱겁고 평범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잘 모른다. 그러나, 보름달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예외없이 싱겁고 평범하게 마련이라면, 나는 내가 그렇게 싱겁고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새벽달의 기억은 언제나 한기와 더불어 온다. 나는 어려서 과식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 하얗게 깔린 서릿발을 밟고 새벽달을 쳐다보는 것은, 으레 옷매무시도 허술한 채, 변소 걸음을 할 때였다. 그리고, 그럴 때 바라보는 새벽달은, 내가 맨발로 밟고 있는 서릿발보다도 더 차고 날카롭게 내 가슴에 와 닿곤 했었다. 따라서, 그것은 나에게 있어 달의 일종이라기보다는 서슬 푸른 비수나, 심장에 닿은 얼음 조각에 가까웠다고나 할까? 게다가, 나는 잠이 많아서, 내가 새벽달을 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선잠이 깨었을 때다. 이것도 내가 새벽달을 사귀기 어려워하는 조건의 하나일 것이다. 새벽달보다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한결 더 친할 수 있다. 개나리꽃, 복숭아꽃, 살구꽃, 벚꽃들이 어우러질 무렵의 초승달이나 으스름달이란, 그 연연하고 맑은 봄 밤의 혼령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소식의, 봄 저녁 한 시각은 천 냥에 값하나니, 꽃에는 맑은 향기, 달에는 그늘. 이라고 한 시구 그대로다. 어느 것이 달빛인지 어느 것이 꽃빛인지 분간할 수도 없이 서로 어리고 서려 있는 봄 밤의 정취란, 참으로 흘러가는 생명이 한스러움을 느끼게 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단들 초승달로 보름달을 겨룰 수 있으랴? 그것은 안 되리라. 마침 어우러져 피어 있는 개나리꽃, 복숭아꽃, 벚꽃들이 아니라면, 그 연한 빛깔과 맑은 향기가 아니라면, 그 보드라운 숨결 같은 미풍이 아니라면, 초승달 혼자서야 무슨 그리 위력을 나타낼 수 있으랴? 그렇다면, 이미 여건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초승달이 아닌가? 보름달은 이와 달라 벚꽃, 살구꽃이 어우러진 봄밤이나, 녹음과 물로 덮인 여름밤이나, 만산에 수를 놓은 가을밤이나, 천지가 눈에 싸인 겨울밤이나, 그 어느 때고 그 어디서고 거의 여건을 타지 않는다. 아무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로서 족하다. 산도 물도 수풀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라도 좋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한 것이다. 보름달은 온밤 있어 또한 좋다. 초승달은 저녁에만, 그믐달은 새벽에만 잠깐씩 비치다 말지만,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로 하여금 온밤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보름달은 온밤을 꽉 차게 지켜 줄 뿐 아니라, 제 자신 한 쪽도 귀도 떨어지지 않고, 한쪽 모서리도 이울지 않은 꽉 찬 얼굴인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좋은 시간은 짧을수록 값지며, 덜 찬 것은 더 차기를 앞에 두었으니 더욱 귀하지 않으냐고 하지만, 필경 이것은 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행운이 비운을 낳고 비운이 행운을 낳는다고 해서, 행운보다 비운을 원할 사람이 있을까? 나는 초승달이나 그믐달같이 불완전한 것, 단편적인 것, 나아가서는 첨단적이며 야박한 것 따위들에 만족할 수는 없다.나는 보름달의 꽉 차고 온전한 둥근 얼굴에서 고전적인 완전미와 조화적인 충족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예술에 있어서도 불완전하며 단편적이며 말초적인 것을 높이 사지 않는다. 그것이 설령 기발하고 예리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완전성과, 거기서 빚어지는 무게와 높이와 깊이와 넓이에 견줄 수는 없으리라. 사람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을까? 보름달같이 꽉 차고 온전히 둥근 눈의 소유자를 나는 좋아한다. 흰자위가 많고 동자가 뱅뱅 도는 사람을 대할 때 나는 절로 내 마음을 무장하게 된다. 보름달같이 맑고 둥근 눈동자가 눈 한가운데 그득하게 자리잡고 있는 사람, 누구를 바라볼 때나 무슨 물건을 살필 때, 눈동자를 자꾸 굴리거나 시선이 자꾸 옆으로 비껴지지 않고, 아무런 사심도 편견도 없이 정면을 지그시 바라보는 사람, 기발하기보다는 정대한 사람, 나는 이러한 사람을 깊이 믿으며 존경하는 것이다. 보름달은 지금 바야흐로 하늘 가운데 와 있다. 천심에서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시간은 더욱 길며 여유 있게 느껴지는 것이 또한 보름달의 미덕이기도 하다. 나는 여기서 다릿목 정자까지 더 거닐며 많은 시간을 보름달과 사귀고자 한다.
내 마음이 강해야 내 소원도 이루어진다 -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기도하는 법 - <이 이야기, 저 이야기> 중에서 어느날 할아버지는 손녀딸의 방을 지나다가, 어린 손녀가 이상할 만큼 열렬하게 알파벳을 암송하는 것을 들었다. "얘야, 지금 뭘 하는 거니?" 그가 물었다. "기도를 하고 있어요." 어린 손녀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밤에는 제대로 된 기도 말을 떠올릴 수 없어서 모든 문자를 말하는 거예요. 주님이 나를 대신해서 그 문자를 조합하실 거예요. 그분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시나까요." 신에게 요청하라 1 - 작자 미상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는 하나의 꿈을 품었다. 그녀는 상급자에게 그것을 털어놓았다. "저는 동전 세 닢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하여 고아원을 짓고 싶습니다." 상급자가 부드럽게 질책했다. "테레사 수녀, 동전 세닢으로는 고아원을 지을 수 없어요. 그 돈으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알고 있어요." 테레사 수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지만 신과 함께라면 삼 페니로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팀 피어링 우리의 역사는 영적인 에너지의 무한한 권능을 꾸밈없이 보여준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그 에너지를 향해 몸을 돌리고 요청하는 것이다. 성서에도 있잖은가.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신은 기다리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그저 약간의 도움만 요청한다면, 그것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은 요청하지도 않은 채 포기한다. 신에게 요청하라 2 - 피터 렌겔 1976년 캘리포니아 북부의 트리니티 알프스 산의 캠프에서 상담원으로 일하는 중에 나는 '요청'하는 중요성에 대한 교훈을 배웠다. 친구 마릴린과 함께 나는 10여 명의 십대 소년 소녀를 이끌고 2주일간 '야생 체험 현장 학습'을 나갔다. 이레째 되던 밤, 우리는 낯선 산악 지역에 캠프를 쳤다. 벌써 여러 날 동안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한 터였다. 그날 밤, 예상치 않은 여름 눈보라가 몰아닥쳤고 우리는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 부둥켜안은 채 밤을 샜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도 눈보라는 잦아들기는커녕, 한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기세가 심해졌다. 이제 모든 길의 흔적은 사라졌다. 주변의 산이나 지형도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에 지도를 읽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식량까지 바닥난 상태였다. 바로 그날이 우리의 '식량 사냥' 예정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두려웠다. 아니, 사실 꼼짝할 수 없을 만큼 겁에 질렸다. 나는 일행의 안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느꼈다. 날씨가 좋아지지 않았다면, 이미 젖은 의복과 슬리핑백으로 체온을 유지하지 못하고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잃을 될 것이 뻔했다. 어쩌면 얼어 죽울 수도 있었다. 나는 전날 지났던 산 정상 주변의 쉼터를 떠올렸다. 그래서 마릴린에게 아이들을 남겨 두고 3미터 높이로 쌓인 눈과 매서운 눈보라 속으로 나섰다. 나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마침내 산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쉼터를 찾을 만큼 주변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오직 나 하나만 의지하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내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나는 절망에 젖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올렸다. 앞을 볼 수 있을 만큼만 눈보라가 걷히게 해 달라고 주님에게 간청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 내 머리 속에는 우리의 죽음을 머릿기사로 한 신문 기사가 생생하게 떠올랐고, 눈물이 절로 솟았다. 나는 일행에게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찾을 결심을 했다. 그리고 막 산 정상에서 내려가는데, 내 두 다리가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냥 괜히 산의 뒤쪽으로 이끌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한 자락을 돌자마자, 나는 발밑에서 쉼터의 방향을 알리는 작은 흔적을 발견했다. 나는 환희의 함성을 울렸고, 이제 살 길이 생겼다는 소식을 안고 일행에게 돌아갔다.
Board 추천글 2022.11.30 風文 R 1494
당랑거철(螳螂拒轍) 螳:버마재비 당. 螂:버마재비 랑. 拒:막을 거. 轍:수레바퀴 자국 철. [동의어] 당랑지부(螳螂之斧), 당랑당거철(螳螂當車轍), 당랑지력(螳螂之力). [유사어] 당랑규선(螳螂窺蟬). [출전]《韓語外傳》<卷八>,《文選》 사마귀[螳螂]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가로막는다는 뜻. 곧 ① 허세. ② 미약한 제 분수도 모르고 강적에게 항거하거나 덤벼드는 무모한 행동의 비유. ①《한시외전(韓時外傳)》〈권팔(卷八)〉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춘추 시대, 제(齊)나라 장공(莊公:B.C.794~731)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장공이 수레를 타고 사냥터로 가던 도중 웬 벌레 한 마리가 앞발을 ‘도끼처럼 휘두르며[螳螂之斧]’ 수레바퀴를 칠 듯이 덤벼드는 것을 보았다. “허, 맹랑한 놈이군. 저건 무슨 벌레인고?” 장공이 묻자 수레를 호종하던 신하가 대답했다. “사마귀라는 벌레이옵니다. 앞으로 나아갈 줄만 알지 물러설 줄은 모르는 놈이 온데, 제 힘도 생각지 않고 강적에게 마구 덤벼드는 버릇이 있사옵니다.” 장공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렇게 말했다. “저 벌레가 인간이라면 틀림없이 천하 무적의 용사가 되었을 것이다. 비록 미물이지만 그 용기가 가상하니, 수레를 돌려 피해가도록 하라.” [주]《한시외전》에서의 ‘당랑지부(螳螂之斧)’는 사마귀가 먹이를 공격할 때에 앞발을 머리 위로 추켜든 모습이 마치 도끼를 휘두르는 모습과 흡사한데서 온 말이나 ‘당랑거철’과 같은 뜻으로 쓰임. ②《문선(文選)》에 보면 ‘당랑거철’은 삼국 시대(三國時代)로 접어들기 직전, 진림(陳琳)이란 사람이 유비(劉備) 등 군웅(群雄)에게 띄운 격문(檄文)에도 나온다. “조조(曺操)는 이미 덕을 잃은 만큼 의지할 인물이 못된다. 그러니 모두 원소(袁紹)와 더불어 천하의 대의를 도모함이 마땅할 것이다. ……지금 열악한 조조의 군사는 마치 ‘사마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앞발을 휘두르며 거대한 수레바퀴를 막으려 하는 것[螳螂拒轍]’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Board 고사성어 2022.11.30 風文 R 810
거짓말과 개소리 거짓말하는 사람과 참말 하는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진실(사실)과 연루돼 있다는 점. 거짓말쟁이도 진실에 신경 쓴다. 사실에 반하는 거짓말로 상대방을 속이려면 불가피하게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개소리에 대하여>). 돈을 훔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려면 자신이 돈을 훔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하듯이. 개소리는 다르다. 개소리는 그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입맛에 따라, 이익에 맞춰 튀어나오는 말이다. 그의 말 속에는 진실도 없고 거짓도 없다. 그저 ‘속셈’만 있을 뿐. 타인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아는 척, 가진 척, 센 척’ 했던가. 아이 앞의 어른, 학생 앞의 선생, 카메라 앞의 정치인은 뭐가 진실인지 모르면서도 마치 고매한 견해를 가진 듯 떠들어야 하는 경우가 잦다. 이때 흔히 나오는 말이 개소리다. 허풍, 흰소리, 허튼소리, 빈말이라고도 할까. 동조세력이 있다면 가속이 붙어 순식간에 세상을 처리 불가능한 말의 쓰레기장으로 만든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에서 김은혜 홍보수석은 그나마 진실에 관심을 가졌다. 15시간 동안의 침묵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거기에 맞서 어떻게 그럴듯한 거짓말을 만들지를 고심한 시간이었을 테니. 지금은? 잘 모르지만, 거짓말쟁이보다 개소리쟁이들이 판치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녕 진실에 관심이 없다면, 차라리 말년 병장처럼 해롭지 않은 일로 무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지. ‘손을 벨’ 정도로 군복 줄을 잡거나, ‘파리가 미끄러지도록’ 군화에 광을 내다보면 시간이 잘 간다. 그러는 게 해로운 개소리를 싸지르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혼잣말의 비밀 ‘늙으면 애가 된다’는 얘기는 ‘말’에도 그대로 쓸 수 있다. 노인은 혼잣말을 쓰면서 애가 된다. 노인의 혼잣말은 노년의 외로움과는 상관없다. 나처럼 현실에 안주하며 편하게 사는 자들의 입에서도 혼잣말이 줄줄 새어나오는 걸 보면. 아이는 사람 대하듯 사물을 대한다. 사람처럼 사물에도 마음이 있다고 여긴다. 혼자인데도 사물과 대화하며 쉼 없이 쫑알거린다. 노인도 아이처럼 사물에 말을 거니 혼잣말이 늘 수밖에. 낡은 집 벽에 난 금을 보면서 ‘조금만 더 버텨줘’라 하고,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에 ‘이제 그만 좀 울어’라 한다. 게다가 혼잣말은 늘 반말로 하게 되는데, 감탄사나 신음소리를 닮았다. ‘쯧쯧, 저러면 안되지’ ‘젊은이가 고생이 많군’ ‘벌써 가을이네’ ‘이놈의 세상, 뒷걸음질만 치는군’ 겉으론 말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가깝다. 실제로 생각은 말을 능가한다. 말의 검문을 받지 않고도 생각할 수 있다. ‘가을바람, 빨래, 춤….’ 뭐든 생각해 보라. 말이 없어도 특유의 느낌, 소리, 색깔, 장면, 움직임이 떠오른다. ‘연필’이나 ‘양말’, ‘짜장면’ 같은 사물도 고유한 생김새가 떠오르고 그걸로 뭔가를 하는(쓰거나 신거나 후루룩 먹는) 장면이 함께 떠오른다. 감각만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말의 끈을 놓지 못한다. 인간은 처음부터 사회적(대화적, 상호적)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열쇠가 말이기라도 하듯이. 혼잣말은 사람이 아무리 혼자 있어도 사회 속에 있다는 걸 확인해준다. ‘개인과 사회’가 아니라, ‘사회 속 개인’이란 걸.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