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이향녕편" 법학자. 소설가. 충남 아산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문교부 차관, 홍익대 총장 역임. 30년대에 '금성'에 단편 소설을 발표한 바 있는 이향녕은 춘원 이광수에 사사하기도 했다. 1959년 장편 소설"교육 가족"을 발표했고, 뒤이어 장편 "창산곡"을 발표했다. 그러나 그는 소설가로서보다는 법학 교수로, 변호사로 더욱 유명한 인물이었다. 깨어진 그릇 광복 전에, 나는 경남에서 군수 노릇을 한 일이 있다. 광복이 되자 나는 그것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소나마 속죄가 될까 하여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교육에 종사한다는 것이 전비에 대한 속죄가 되는지에 관해선 지금도 의심을 가지고 있다. 교육은 가장 신성한 사업이다. 그런 사업에 죄 있는 사람이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속죄를 한답시고 교육계에 들어온 것이 교육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나 하고 반성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속죄의 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국민 학교 평교사 되기를 바랐다. 기왕 교육계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기초가 되는 일부터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국민 학교의 평교사가 되겠다는 나의 꿈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국민 학교 교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까닭이었다. 도청에서는, 차라리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는 중학교의 교사가 되라고 권했다. 나는 한사코 국민 학교에 보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자격 없는 사람을 발령할 수는 없다고 했다. 다만 교장은 관리직이므로 나의 경력을 참작하여 발령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동래군의 어느 국민 학교 교장이 되었다. 내가 그 학교에 부임한 것은 1945년 12월 초순, 날씨가 퍽 쌀쌀했다. 광복을 맞은 지 4개월이나 되었지만 아직도 교장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은 교장이 온다는 바람에 무척도 좋아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택이 학교 안에 있어서, 이삿짐을 운동장가에다 풀어 놓았다. 그리고, 사람을 사서 짐을 나를 작정이었다. 그랬더니, 상급반 아이들이 달려들어 이삿짐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모두 사택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궤짝을 열어 보니 사기 그릇은 거의 다 깨져 있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남의 소중한 그릇을 다 깨어 놓았는가? 나는 아이들을 몹시 미웠다. 그리고, 이 철부지들을 어떻게 상대하며 살아갈까, 차라리 중학교로 갈걸 하고 후회도 했다. 그 날, 나는 깨어진 그릇들을 바라보며 우울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 나는 무거운 걸음으로 사택을 나왔다. 사택을 막 나오는데 꼬마들이 달려와, "교장 선생님, 교장 선생님."하며 매달렸다. 남루한 옷, 제대로 씻지 못한 얼굴과 손, 그들은 나의 모처럼의 새 단장을 마구 더럽혔다. 나는 또 기분이 나빴다. 이렇게 버릇 없는 놈들이 어디 있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하며, 국민 학교에 온 것을 또 한 번 후회했다. 조회가 시작되었다. 나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정중한 어조로 일장 훈시를 했다. 그리고 엄숙한 표정을 지어 나의 위엄을 떨쳐 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이들은 줄이 엉망인데다가 제멋대로 떠들고 주저앉고 옆 사람을 쿡쿡 찌르고, 무질서하기가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이런 무질서 속에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질까, 교육의 길은 이렇게 험난한 것인가, 나의 뜻은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서글픈 생각이 가슴 속에 꽉 차 왔다. 나는 조회가 끝나자 산길을 혼자 걸었다. 잠시도 학교에 있기가 싫었다. 아무 희망도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산길을 걸어 어느새 범어사 경내에 들어섰다. 갑자기 청정한 기운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나는 문득 나의 과거가 회상되었다. 동족을 괴롭힌 죄 많은 인생, 나는 큰 반역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래도 용서되어 새로이 인생을 출발할 수 있게 된 나에게 무슨 불평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교육의 길이 험난하면 할수록 나의 속죄의 길은 넓혀진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삿짐을 굴리던 어린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들이 오지 않았더라면 그릇을 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스승이 되어 부임하는 마당에 그들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고독한 사람이겠는가? 천진 무구한 그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 아닌가? 나는 어린이들의 호의가 뼈아프도록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또 내 새 단장을 더럽힌 꼬마들을 생각했다. 그들이 달려들어 나의 새옷을 더럽혔다는 것은 내가 결코 제외된 인간이 아니란 뜻이다. 때낀 얼굴과 손, 나는 갑자기 달려가 그들을 덥석 껴안아 주고 싶었다. 나의 훈시를 듣는 어린이들이 만일 일사 불란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처음 보는 나를 무섭게 알고 경계하는 뜻이 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무질서를 탓한 건, 나에게 대한 그들의 친근감의 표현을 내가 오독한 데 기인한 것이다. 그들의 무질서한 모습들이 정답게 다가왔다. 나는 급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또, 코를 흘리는 꼬마들이 달려들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그 중 한 놈을 덥석 껴안아 주었다. 그 후 나는, 나의 그릇을 깬 그 어린 손, 나의 옷을 더럽힌 그 코흘리개들의 때 낀 손, 그리고 무질서로써 나를 따르던 그들의 눈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만족과 사랑을 느끼었고, 날마다 희열에 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매, 이제 내가 교육의 길에 들어선 지 20년, 나는 때때로 그 깨어진 그릇, 그 때 낀 어린 손들을 생각한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사랑의 길 위에서 -고 이광재 디모테오 신부님께 한번도 당신을 만난 적이 없지만 당신을 생각하면 목이 메이고 동해의 바닷바람, 가을바람이 가슴을 적십니다 당신의 그 온전한 봉헌은 우리를 울게 합니다 1909년 6월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1936년 3월 사제로 서품되시고 1950년 10월 41세로 생을 마치실 때까지 당신의 매일은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타오른 불꽃이었으며 그분의 수난에 동참한 거룩한 미사였습니다 참혹한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안전지대로 가지 않고 죽음이 더 가까운 위험지대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신부님 어리석게도 그것은 오직 사랑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단 한 명의 신자를 위해서도 사제는 희생할 의무가 있다며 스스로 피 흘려 제물되신 신부님 "교회의 앞날을 위해 나보다 더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 하나라도 더 구해야 한다"며 목숨을 걸고 그들의 월남길을 돕는 길잡이로 온갖 고초를 겪으시다가 마침내 체포되어 죽임을 당하신 분 감옥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으시고 어둠과 악취뿐인 방공호 속에서 총을 맞고 숨져 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보다 이웃을 더 많이 생각했던 당신은 진정 또 하나의 예수였습니다 죽어 가는 동료들의 신음소리 들릴 때마다 "응, 내가 가지요. 내가 도와 드리지요" "물을 떠다 드릴텐데 일어날 수가 없군요"하고 극심한 고통중에서도 이웃을 향해 사랑의 헛소리를 되풀이하셨던 신부님 앉지 않고 꿇어서 고해성사를 들으시고 잠시 머물던 나그네와 헤어질 때도 이승에서의 마지막을 예감하고 강복을 주시며 눈물 흘리셨던 신부님 당신은 진정 위대한 성자 잊혀짐을 두려워 않는 겸손한 성자였음을 이제 우리는 다시 압니다 이웃을 살리는 사랑의 길이 되어 당신은 오래 전 우리 곁을 떠나셨지만 죽음보다 강한 그 믿음, 그 사랑은 당신이 목숨 바쳐 사랑했던 한국 교회 안에, 우리 가슴 안에 더 깊이 뿌리내려 열매 맺고 있음을 하늘나라에서 기뻐해 주십시오 맡겨진 양떼를 돌보는 선한 목자로서 11년 동안 밤낮으로 애쓰시던 이곳, 양양성당에 와서 우리는 당신의 손때 묻은 기도서와 남루한 제의를 만져보며 사랑의 숨결을 느껴 봅니다 당신의 시신이 묻힌 원산 가깝고도 먼 북녘 땅을 바라보며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이 찬미했던 주님을 우리도 새롭게 찬미하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갈라져서 상처가 많은 우리 겨레의 화해의 일치를 도와 주십시오 우리의 처음과 마지막 행동이 당신처럼 두려움 없는 사랑일 수 있도록 더 깊고 큰 믿음을 뿌리내리게 해주십시오 (1996)
Board 삶 속 글 2022.12.12 風文 R 544
등용문(登龍門) 登:오를 등. 龍:용 룡. 門:문 문. [반의어] 점액(點額). 용문점액(龍門點額). [출전]《後漢書》〈李應傳〉 용문에 오른다는 뜻. 곧 ① 입신 출세의 관문을 일컫는 말. ② 영달의 비유. ③ 주요한 시험의 비유. ④ 유력자를 만나는 일. 용문(龍門)은 황하(黃河) 상류의 산서성(山西省)과 섬서성(陝西省)의 경계에 있는 협곡의 이름인데 이곳을 흐르는 여울은 어찌나 세차고 빠른지 큰 물고기도 여간해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오르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다. 따라서 ‘용문에 오른다’는 것은 극한의 난관을 돌파하고 약진의 기회를 얻는다는 말인데 중국에서는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입신 출세의 제일보라는 뜻으로 ‘등용문’이라 했다. ‘등용문’에 반대되는 말을 ‘점액(點額)’이라 한다. ‘점(點)’은 ‘상처를 입는다’는 뜻이고 ‘액(額)’은 이마인데 용문에 오르려고 급류에 도전하다가 바위에 이마를 부딪쳐 상처를 입고 하류로 떠내려가는 물고기를 말한다. 즉 출세 경쟁에서의 패배자, 중요 시험에서의 낙방자를 가리킨다. 후한(後漢) 말, 환제(桓帝:146~167)때 정의파 관료의 지도적 인물에 이응[李應:자는 원례(元禮)]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청주자사(靑州刺史), 촉군태수(蜀郡太守), 탁료장군(度遼將軍)을 거쳐 하남윤(河南尹:하남 지방의 장관)으로 승진했을 때 환관의 미움을 받아 투옥 당했다. 그러나 그 후 유력자의 추천으로 사예교위(司隸校尉:경찰청장)가 되어 악랄한 환관 세력과 맞서 싸웠다. 그러자 그의 명성은 나날이 올라갔다. 태학(太學)의 청년 학생들은 그를 경모하여 ‘천하의 본보기는 이원례’라 평했으며 신진 관료들도 그의 추천을 받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알고, 이를 ‘등용문’이라 일컬었다. [주] 황하 : 청해성(靑海省)의 암네 마친 산맥에서 발원하여 황토 고원을 침식하면서 동쪽의 발해만(渤海灣)으로 흘러 들어감. 중국에서 두 번째로 긴 강. 길이 4100Km. 황하(黃河)의 큰 지류인 위수(渭水) 유역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임.
Board 고사성어 2022.12.12 風文 R 987
맞춤법·표준어 제정, 국가 독점?…오늘도 ‘손사래’ 오늘도 뭉그적거리다 마을버스를 놓쳤다. 처마 밑 길냥이를 찾지 말았어야 했다. 언덕 위로 내달리는 버스를 쫓아가며 “여기요!” “버스!”를 외쳤지만, 무정한 버스는 못 들은 척했다. 2년 전 ‘국가 사전 폐기론’이란 자못 다부진 제목의 칼럼을 썼다. 올봄엔 <표준국어대사전> 전면 개정 소식을 듣고 ‘국가 사전을 다시?’라는 제목으로 무려 세 편의 칼럼을 썼더랬다. 줄곧 국가는 사전 편찬에서 손을 떼라는 얘기였다. 토론회를 제안했다. 국립국어원, 사전 편찬가, 글로 밥벌이하는 사람들, 시민들이 모여 말을 나누고 싶었다. 드디어 12월15일(목) 오후 2시 한겨레신문사 청암홀에서 ‘국가 사전과 언어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학술발표회가 열린다. 앞의 세 부류의 분들은 모셨다. 시민들만 오시면 된다. 관심 있는 분들은 자리가 없어지기 전에 서둘러 오시길(공교롭게도 다음날(12월16일) 한국사전학회에서 ‘규범 사전의 성격과 역할’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가 열린다). 국가가 성문화된 철자법(맞춤법)을 제정하고, 표준어를 선정하고(=비표준어를 지정하고), 사전 편찬마저 독점적으로 차지한 상황은 세계적으로 매우 이례적이고 괴이하다. 국가가 말의 규범(어문규범)을 독점하고 어떤 말이 맞고 틀렸는지 채점해주는 체계 속에서 언어민주주의는 요원하다. 이 체계를 바꿔야 한다. <표준사전>을 아무리 ‘현대적으로, 쌈박하게’ 바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전 개정 작업은 이미 진행 중.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기다. 하지만 계속 흔들다 보면 혹시 모르지, 정류장을 좀 벗어나 멈춰 서는 버스기사를 만나게 될지도.
무엇을 어떻게 쓸까 - 이오덕 3부 국어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국어 공부, 어떻게 해 왔나(1/2) 우리가 지금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고 눈으로 읽고 글자로 쓰고 있는 우리말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아 내려면 그 방법이 여러 가지 있을 터이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 공부란 것을 어떻게 해왔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대단히 좋은 방법이다. 그 까닭은, 우리가 말하고 읽고 쓰고 있는 말이 결국 국어 공부를 해서 익힌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국어 공부란 것을 대충 살펴보기로 한다. 국어 공부는 국어 교과서로 하도록 되어 있다. 교과서에 나오는 글을 읽고 쓰고 외우고, 교과서에서 하라는 문제를 푸는 것이 국어 공부의 거의 전부다. 따라서 국어 공부를 어떻게 해왔는가를 알려면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글이 어떤 말로 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국민학교 1학년 국어책(1-1 말하기 듣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온다. - 때와 장소에 맞게 말하여 봅시다. - 몸짓과 표정으로 생각을 나타내어 봅시다. - 친구가 말한 것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비교하며 들어 봅시다. 여기 이렇게 나오는 장소 표정 비교한다 와 같은 말들은 중고등학교 학생이라면 날마다 보통으로 쓰는 말이라 여길 터이지만, 이제 막 학교에 들어온 초등학생들에게는 어렵고 맞지 않는 말이다. 장소 는 곳 이라고 해야 되고, 표정 은 낯빛 이라든지, 이 글에서는 얼굴 이라고만 해도 된다. 비교하며 는 견주며 나 대어보며 라 해야 된다. 표정 이란 말은 또 여기서는 잘못 쓴 말이기도 하다. 몸짓 도 표정인데 몸짓과 표정으로 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어쩌면 이런 의문이 생길 것 같다. 좀 어려운 말을 배우도록 하는 것이 국어 공부가 아닌가 하고. 사실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어려운 말과 글을 가르치는 것을 국어 수업이라고 생각해 왔고, 학생들은 모두가 어려운 말 배우는 것을 국어 공부라 알고 있고, 그래서 모든 어른들이 국어 공부라면 당연히 어려운 한자말과 그 한자말로 된 문장을 읽어서 풀어 내는 공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이다. 이래서 우리말이 한자말, 곧 중국글자말에 밀려나서 버려지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이다. 장소 보다 곳 이 낫고, 표정 보다 낯빛 이 더 깨끗한 우리말이고, 비교한다 보다 견준다 든지 대 본다 가 더 좋은 우리말이 되는 것은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농민과 노동자뿐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도 신문기자도 학자도 대학교수도 문필가도 마찬가지다. 그러면 국어 시간에 교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하나? 우리말을 배워야 한다. 벌써 어른들이 모두 쓰고 있어 안배울 수 없다면 장소 표정 비교 란 한자말도 익혀야 하겠지. 그러나 이런 말을 배우기에 앞서,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집에서나 마을에서 듣고 배워서 알고 있는 말들 - 이곳, 저곳, 그곳 이라든가, 얼굴 이라든가 대 보다 견준다 라는 말들 -을 다시 글자로 읽게 하고 글로 쓸 수도 있게 하여 자기가 어려서 부모와 이웃 사람들한테서 듣고 배운 말이 무식한 사람들이나 쓰는 부끄러운 말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써야 할 우리말이란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그리고 낯빛 이란 말을 새로 배워서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요즘은 아이고 어른이고 모조리 비교한다 비해서 비교적 이렇게만 쓰는데, 이것은 우리말을 가르치도록 하지 않는 잘못된 국어 교과서 때문이다. 교과서에서 쫓겨난 대 본다 견준다 란 우리말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차츰 죽어가고 있다. 내 생각에는 초등학교 1학년뿐 아니라 중고등학생들, 대학생들, 그리고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어른들까지도 누구 키가 더 큰가, 어디 한 번 대 보자 란 동요부터 새로 읽어서 우리말을 배워야 되지 않겠나 싶다. 글을 쓰는 어른들은 거의 모두 내 말을 비웃겠지만 나는 결코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 다음 낱말을 사용해서 짧은 글을 지어 봅시다. (초등학교 1-1 쓰기) - 문장을 바꾸어 봅시다. (같은책) 여기 나온 사용해서 도 써서 로, 문장 도 글 로 해서, 이런 쉬운 우리말부터 먼저 읽고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그림의 내용과 우리가 겪은 내용을 관련지어 써 봅시다. (국민하교 1-2쓰기) 여기서는 내용 과 관련지어 가 문제다. 이런 말을 안 쓰고도 얼마든지 된다. 이 지시문은 그림을 보고, 자기가 겪었던 일을 생각해서 써 봅시다. 고 하는 것이 훨씬 더 알기 쉽다. 이번에는 6학년 책을 보자. -말소리의 바뀜에 주의해서 정확하게 발음하여 보자. (6-1 말하기, 듣기) 이것을 쉬운 우리말법으로 고치면 다음과 같이 된다. 말소리가 바뀌는 데 주의해서 바르게 읽어 보자. - 길게 소리나는 글자의 발음에 주의하면서 위의 문장을 정확하게 읽어보자.(같은 책) 이것은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 좋다. 길게 소리나는 글자의 발음에 주의하면서 위의 문장을 정확하게 읽어 보자. (같은 책) 여기 나오는 확인하여 보자 는 공연히 어렵게 쓴 말이다. 알아 보자 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감동적인 부분을 찾아가면 글을 읽어 보자. (6-2읽기) 이렇게 무슨 -적 라는 말은 일본글을 따라서 쓴 말이다. 감동을 받는 하든지 감동스런 이라고 쓰면 된다. 그런데 이 지시문에서, 글을 읽을 때 어떤 부분이 감동을 주는가 하고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면서 읽으라는 말은 잘못되었다. 글을 그런 태도로 읽어서는 영 재미가 없고, 그렇게 읽어서는 안 되고, 또 아무도 그런 태도로 읽지는 않는다. 빈 마음으로 읽는 가운데 들어오는 감동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따라서 이 지시문은 이렇게 고쳐야 할 것이다. 읽고 난 다음에 감동을 받은 대문이 어디인지 말해 보세요. - 우리 글자를 처음부터 한글 이라고 불렀던 것은 아니다. 한글이 만들어진 당시에는 훈민정음 이라 하였고, 이를 줄여서 정음 이라고도 하였다. 또 그후에는 언문, 암클 등으로 부르기도 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서 한글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6-2 읽기) 이 글에 불렀던 부르기도 부르게 란 말이 나오는데, 이런 말은 모두 말했던 말하기도 말하게 라고 고쳐야 한다. 여기서 부른다는 말은 한글을 두고 하는 말인데, 어떤 사람이든지 한글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지 한글아! 하고 한글을 부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른다는 말을 잘못 쓰는 것도 일제시대부터 일본말을 따라가 우리 글을 잘못 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부른다는 말보자 불린다 는 말을 또 더 많이 쓰고 있다. 이 밖에 당시 는 그때 로 써야 하겠고, 등으로 는 따위로 라고 해야 될 것이다. - 한글이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우리말을 있었지만, 그 말을 적는 우리 고유의 글자는 없었다. (같은 책) 같은 움직임을 나타내는 말이라도 한글을 만들기 라 하지 않고 한글이 만들어지기 라고 하여 움직임을 입는 꼴로 쓰는 것, 이것이 또 일본말법 따라가는 짓이다. 교과서까지 이렇게 되어 있으니 우리말이 병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고유의 는 아무 소용이 없는 말이니 없애는 것이 훨씬 좋다.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원응서편" 원응서(1914~1973) 번역 문학가, 평양 출생, 일본 리쿄 대학 영미 학부 졸업. 문예지 '문학' 주간 역임. 원응서는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의 체험에서 우러난 통찰 깊은 수필들이 몇 편 전해져 그의 진가를 보여 준다. 평범한 듯하면서도 인생에 대한 관조와 애정이 곁들여 있어 독자들에게 수필 문학의 묘미를 느끼게 해 준다. 이삭주이 책을, 이것저것 주워 읽어 온 데서나 또 번역을 해 온 가운데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이상스레 뇌리에 남아 있는 말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술인이나 그 밖의 사람이 종신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에 관한 것들이 그것이다. 오랜 동안 병석에서 심신이 쇠약해진 환자이고 보면 방 안의 채광이 너무 밝아도 정신적 피로를 가져오기 쉽다. 이럴 때는 창문의 차광막을 내리어 채광을 조절하게 된다. 괴테가 종신하는 마당에도 이렇듯 커튼이 내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꾸만 의식이 흐려져 가고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그는 문득 자기의 주변이 점점 어두워져 오는 것만 같아졌을 것이다. 이윽고 그는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더 들어오게!' 이렇게 주위의 사람들에게 일렀던 것이다. 후세의 사람들은 대시인의 임종을 대시인다운 임종의 말로 미화시킨 것으로 보여진다. '커튼을 좀 올려요. 빛이 좀 들어오게!'를 '좀더 빛을! 좀더 빛을!'으로, 평범한 아무렇지도 않은 산문조의 말을 운문 격조로 다듬어 고친 것이 아닐까, 이것은 어느 외국의 평론가도 꼬집어댄 바 있는 얘기이기도 하지만, 이 비슷한 종신의 장면으로는 O. 헨리의 경우를 또 들 수 있다. 그는 한평생을 두고 뉴욕시를 그렇게도 좋아한 사람이 또 없었을 만큼 사랑했다. 그러한 그가 임종이 가까워 오자 조용히, '차광막을 올려요. 뉴욕 시를 내다보게. 어두운 데서는 죽고 싶지가 않아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괴테의 경우처럼 O. 헨리의 임종 장면에도 차광막이 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마지막으로 그것을 끌어올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O. 헨리의 경우는 대시인이 아닌 산문가다운 격조로 임종의 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점은 두 작가가 다 같이 죽음에 임하는 자세가 초연하고 드디어 오고야 말 것이 왔다는 달관의 경지에 서 있었다는 것이다. 탐험가 스코트의 마지막 일기를 보면 감히 범인들이 침범하지 못할 인간의 숭고한 존엄성을 엿볼 수 있다. 1911년 아문센은 스코트를 앞지르기 위해 북극으로 탐험길을 떠나는 것으로 위장하고 실은 남극으로 향했던 것이다. 스코트가 사력을 다해 간신히 남극의 극지에 도달했을 땐 그의 눈앞에는 노르웨이의 깃발이 휘날리며 서 있었다. 순간 모든 걸 알게 된 스코트에게는 좌절감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그는 대원들을 이끌고 영하 37도의 눈보라 속으로 죽음의 귀로에 접어들었다. 일행 4명 중에서 오트스란 대원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자 일행의 행진을 지체시킬까 염려하고 잠시 밖에 나갔다 오겠노라, 한 마디 남기고는 텐트 밖으로 세 사람도 북극의 미이라가 됐지만 그들 누구도 당황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한 기색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는 끝까지 싸워 보려 했지만 걷잡을 수 없이 몸이 점점 약해져만 가고 있다. 최후가 머지않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이상 더 일기를 쓰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고 스코트는 조용히 붓을 놓았다. 이것은 달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위대한 정신력을 보여 준 잊혀지지 않는 장면의 하나이다. 초년에는 귀족처럼 화려한 생활 속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렘브란트는 부인을 잃은 뒤를 이어 재물까지 잃어버리고는 구걸하다시피 하는 생활의 구렁창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림에 대한 정열만이 사랑과 재산을 앗아간 그의 여생을 지탱해 주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극에서 극으로의 희비고락에 찬 일생을 마치는 마당에 그는 '공허하고도 또 공허하다. 모두가 공허하다!'라고 했다. 이것은 그가 살아 온 인생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내재성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우선 외적인 생활과 싸웠고 자기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새로이 구축하기 위해 온몸으로 싸웠다. 그리고 자신의 내적인 세계를 발견했을 땐 세상은 모두가 '공허'한 것으로 느껴졌으리라고 본다. 이와는 좀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임종에 인생을 말한 작가가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헵벨이다. 미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어느 작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극빈과 갖은 고난 속에서 작품 제작에 목숨을 걸었건만 늘 거지와 같은 구차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 그러다가 만년에야 "니벨룽겐"(1862)이란 대작으로 실러 상을 받게 되었을 때는 이미 종신이 가까웠던 것이다.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깨달은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술이 있을 때는 술잔이 없고 술잔이 있을 때는 술이 없더라!'고. 그처럼 인생의 무상과 부조리를 실감하고 개탄한 작가도 없을 것이다. '희극은 끝났다!' 이것은 일생이 불운으로 가득 찬, 단 한 번만 있었던 결혼의 기회마저 잃어버린, 그런 생애를 마치는 마당에 친지 하나 없이 외로이 가는 베토벤의 마지막 말이었다. 느끼는 자는 울고 깨달은 자는 웃는다는 말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베토벤의 '희극'은 그가 가장 잘 웃는 최후의 웃음인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임종의 짧은 말들은 무엇인가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그것들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를 시사해 주는 바 크다고 여겨진다. 그것들은 여유 있게 도사리고 앉아 금언이나 좌우명을 쓰는 마음과는 달리 인생이 종착하는 자리에서 우연이 아니라 그들에게 한평생 축적되었던 체험적 진실의 토로이기에 더욱 의의가 크다. 이러한 말들이 지니는 무게는 금언이나 좌우명보다도 우리들을 한층 일깨워 주는 힘이 크고, 또 이러한 말들을 수집 연구해서 집대성하는 일도 결코 무의미한 노력은 아닐 것이다.
사랑할 땐 별이 되고 - 이해인 - 기도 시 마지막 기도 -요산 김정한 선생님 고별식에서 기도하는 이에게 항상 산이 되어 오시는 생명의 주님 산이 좋아 그 이름도 산이라 하고 한평생 고고한 지혜의 산으로 살다 이제 마침내 깊고 그윽한 산이 되어 여기 누으신 분 요산, 요셉 선생님을 흠도 티도 없는 당신의 그 나라에 받아 주십시오 낙엽 타는 향기 속에 저무는 11월 그분이 이승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함께 괴로워하셨던 주님 임종의 머리맡에서 함께 기도하던 저희에게 소리의 언어 대신 침묵의 눈물로 마지막 작별을 고하던 고인의 미처 쏟아내지 못한 눈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회한도 받아 주십시오 이별의 슬픔 속에 할말을 잃은 이들에게 끝없는 강이 되어 오시는 구원의 주님 길고 긴 낙동강을 고향의 벗으로 한평생을 정의의 강이 되어 살았기에 그만큼 괴로움도 길었던 당신의 사람 거룩한 의인 성요셉처럼 어떤 시련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믿음과 인내와 용기로 의연하고 꿋꿋하게 진리와 평화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이 시대의 의인, 요셉 선생님을 아름다운 하늘나라에 받아주십시오 어둠이 없는 빛의 나라 미움이 없는 사랑의 나라 절망이 없는 희망의 나라에서 편히 쉬게 하여 주십시오 지상에 두고 가는 가족, 친지들과 더 깊이 결합하여 함께 머무는 환한 빛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진정 당신이 계시기에 죽음이 끝이 아님을 오늘 더욱 새롭게 알아들으며 별처럼 빛나던 당신의 사람 저희의 가장 소중했던 한 분을 이제 영원히 당신께 봉헌합니다 (1996)
Board 삶 속 글 2022.12.10 風文 R 435
득록망촉(得롱望蜀) 得:얻을 득. 롱:땅 이름 롱. 望:바랄 망. 蜀:나라 이름 촉. [준말] 망촉(望蜀). [동의어] 평롱망촉(平롱望蜀), 망촉지탄(望蜀之歎). [유사어] 계학지욕(谿壑之慾), 차청차규(借廳借閨), 거어지탄(車魚之歎),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 [참조]계륵(谿肋). [출전]《後漢書》〈光武記〉〈獻帝記〉.《三國志》〈魏志〉 농을 얻고 나니 촉을 갖고 싶다는 뜻. 곧 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이르는 말. ② 한 가지 소원을 이룬 다음 또다시 다른 소원을 이루고자 함을 비유. ③ 만족할 줄 모름의 비유. ①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劉秀)가 처음으로 낙양에 입성하여 이를 도읍으로 삼았을 무렵(A.D. 26)의 일이다. 당시 전한의 도읍 장안을 점거한 적미지적(赤眉之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농서(롱書:감숙성)에 외효, 촉(蜀:사천성)에 공손술(公孫述), 수양:하남성)에 유영(劉永), 노강(盧江:안휘성)에 이헌(李憲), 임치(臨淄:산동성)에 장보(張步)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중 유분자.유양.이헌.공손술 등은 저마다 황제를 일컫는 세력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외효와 공손술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무제에게 토벌되었다. 외효는 광무제와 수호(修好)하고 서주 상장군(西州上將軍)이란 칭호까지 받았으나 광무제의 세력이 커지자 촉 땅의 공손술과 손잡고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성(成)나라를 세우고 황제를 참칭(僭稱)하는 공손술은 외효의 사신을 냉대하여 그냥 돌려보냈다. 이에 실망한 외효는 생각을 바꾸어 광무제와 수호를 강화하려 했으나 광무제가 신하가 될 것을 강요하므로 외효의 양다리 외교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건무(建武) 9년(32), 광무제외 대립 상태에 있던 외효가 병으로 죽자 이듬해 그의 아들 외구순이 항복했다. 따라서 농서 역시 광무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만족할 줄 모른다더니 이미 ‘농을 얻고도 다시 촉을 바라는구나[得롱望蜀].’” 그로부터 4년 후인 건무 13년(37), 광무제는 대군을 이끌고 촉을 쳐 격파하고 천하 평정의 숙원을 이루었다. ② 광무제 때로부터 약 200년 후인 후한 헌제(獻帝:189~226)말, 즉 삼국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의 일이다. 헌제 20년(220), 촉을 차지한 유비(劉備)가 강남의 손권(孫權)과 천하 대사를 논하고 있을 때 조조(曹操)는 단숨에 한중(漢中:섬서성 서남쪽 한강 북안의 땅)을 석권하고 농땅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조조의 명장(名將) 사마의[司馬懿:자(字)는 중달(仲達),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의 할아버지]가 진언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격하면 유비의 촉도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만족할 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 바라지 않소.” 이리하여 거기서 진격을 멈춘 조조는 헌제 23년(223), 한중으로 진격해 온 유비의 촉군(蜀軍)과 수개월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다가 결국 ‘계륵(鷄肋)’이란 말을 남기고 철수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