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연현편" (1920~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손수건의 사상 남녀를 가리지 않고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쩌다가 손수건을 빠뜨리고 나오는 날이면, 육체의 어느 한 부분을 떼어 놓고 나온 것처럼 어색하거나 꼭 입어야 될 의류의 하나를 빠뜨리고 나온 것처럼 허전해진다. 그만치 손수건은 인간에게 있어 없지 못할 일상적인 생활용품의 하나이다. 한글 학회 발행의 우리말 사전을 보면, 손수건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작은 수건'으로 되어 있고, 문세영 씨 사전을 보면, '땀을 씻는 작은 수건, 손을 씻는 작은 헝겊'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주로 손수건의 형태와 위치에 대한 설명이고, 후자는 주로 그 용도에 대한 설명으로 볼 것이다. 이 두 개의 설명에서 우리는 손수건이란, 첫째 작은 헝겊으로 된 수건이며, 둘째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며, 셋째 손이나 땀을 씻는 데 사용되는 물건임을 알 수 있다. 손수건은 작은 것이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라는 것은 손수건의 어떤 희생을 이미 암시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작다는 것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이 두 가지 조건은, 물론 손수건의 용도에서 원인된 것이다. 땀이나 손을 씻는 데 반드시 커다란 수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런 성질의 용도에는 작은 수건으로서 충분하다.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기에도 작은 것이 더욱 타당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손수건은 무엇 때문에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할까? 그것은 손수건의 용도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손수건의 용도는 반드시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그 전부는 아니다. 길에 가다가 흙이나 먼지가 묻는다든지, 음식을 먹은 다음, 혹은 화장을 고칠 때, 또는 작은 상처가 났을 때, 손수건은 가장 편리하게 이용될 수 있다. 이 때문에 손수건은 항상 몸에 지니는 작은 소지품이 되는 동안에, 손수건은 스스로 다른 특성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 사람의 소지품 가운데는 자기를 표현하는 물건이 있다. 인장과 지환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전자는 각자의 권리를 표시하는 표현이요, 후자는 각자의 약속을 표시하는 표현이다. 재산의 소유권이 인장으로써 변동되고, 약혼이나 결혼이 지환으로써 표시되는 것은 그러한 일례이다. 이를테면 전자가 인간의 법적 표현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정신적 표현으로서 다 같이 자기 표현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으로서의 소지품은 대개 작은 물체로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게 그 일반적인 습관이다. 자기를 표현해 주고 있는 물체는 이미 단순한 물질이거나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소지품은 항상 자기를 아끼는 마음처럼 귀중히 취급되고 언제나 자기와 함께 있어야만 안심이 된다. 그러는 데에는 늘 몸에 지니는 것이 상책이며, 늘 몸에 지니는 데에는 작은 것이라야만 편리하다. 손수건은 이와 같은 자기 표현의 물체와 같은 조건을 갖추고 나타남으로써 그 최초의 용도와는 다른 자기 표현의 직능을 갖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몸차림을 한 여성이 조심성스럽게 손수건을 만지거나 그것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항상 엉뚱한 생각을 갖게 된다. 그것은 그 손수건이 그 여인의 손이나 땀을 씻는 물건으로서가 아니라 그 여인의 감정의 역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수건으로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용도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러한 때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손수건의 용도에 대한 영상은 슬픈 소식을 듣고 남몰래 돌아앉아 흘리는 눈물을 씻는 것, 기차나 배를 타고 멀리 떠나는 안타까운 사람을 보낼 때, 또는 그와 같이 멀리서 오는 그리운 사람을 맞이할 때 안타깝고 그리운 마음으로 손수건을 흔드는 모습... 손수건은 손이나 땀을 씻는 것보다는 이러한 때 더욱 절실히 사용되어 온 것은 아니었던가? 손이나 땀을 씻는 것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생리적 육체적 외부적 용도라면 이러한 것은 그에 대해 인간의 심리적 내부적 용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손수건의 용도는 손수건이 인장이나 지환과 같이 자기 표현의 한 직능을 가진 것임을 말하는 것이 된다.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그 작은 헝겊이. 손수건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 정신적 내부적 용도에서 바라본다면 손수건과 가장 깊은 관련을 가진 것은 눈물과 이별, 또는 눈물과 상봉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손수건은 눈물을 씻기 위한 것이거나, 그렇기 않으면 이별할 때의 안타까운 심정을, 또는 상봉의 즐거움을 알리는 신호의 표지이다. 그리고, 어느 편이냐 하면, 손수건은 즐거운 눈물보다는 슬픈 눈물을 닦는 경우가 더 많고, 상봉의 즐거운 신호로서보다는 이별의 슬픈 신호로서 사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손수건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손수건은 슬픈 눈물을 상징해 준다고 볼 수도 있다.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아 온 것은 한국 사람들의 오랜 풍습은 아니었던가? 손수건을 눈물 또는 이별의 상징으로 보는 동안, 그러한 손수건은 항상 여성적인 속성이지 남성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사내 대장부' 라는 말을 쓴다. 이 말은 여성처럼 함부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 남성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러므로 '여인과 눈물'은 자연스럽게 관련이 되지마는, '남자와 눈물'은 아무래도 긍정적인 자연적 상태는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별 역시 그렇다. 이별이란 말이 헤어진다는 사실의 설명으로서보다는 헤어지는 슬픈 감정을 강조하는 의미가 더 중요한 것이라면, 눈물과 직결되는 이별은 여성적 속성이다.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남성의 모습이 보기 흉하고, 역두나 부두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남성이 주책머리 없게 보이는 반면에, 돌아앉아 눈물을 씻는 여인의 모습이나, 손수건을 흔드는 여인의 모양이 제 격에 맞게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손수건은 아무래도 남성에게보다는 여성에게 더 어울리는 소지품인가? 남녀를 불문하고, 손수건은 필요불가결의 일상적인 소지품의 하나이다. 누구나 그가 가진 손수건으로써 자기의 손이나 땀을 씻는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 손수건에 숨겨진 자기의 감정적 이력을 생각하게 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까? 남성은 아예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남성적인 것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손수건을 꺼낼 때마다 그 손수건에 아로새겨진 자기의 눈물과 이별을 계산해 보는 여인은 과연 얼마나 될까? 매일같이 빨아서 깨끗한 수건을 갖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수건에 대한 위생은 그 속에 새겨진 자기의 슬픈 눈물과 이별을 깨끗한 손수건처럼 잊어버리고 싶은 데서일까? 수건은 나에게는 항상 여인의 마음의 비밀처럼 느껴진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취사병이 뭐길래 - 송현탁(남.광주 광산구 지정동)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일입니다. 국가이 부름을 받고 빡빡머리로 신병훈련소에 처음 입대했을 때부터 단체생활이란 얼마나 중요하며 개인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도 많은 전우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제가 한사람 편해보겠다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우리 소대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생과 아픔을 안겨다 주었던지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지난날 함께 근무했던 우리 중대원들이 이 방송을 듣고 게신다면 굳이 부대를 밝히지 않아도 금방 기억하시고 배꼽을 잡으며 웃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훈련소에서는 우수한 병사 그리고 또한 특등사수로 인정받는 모범훈련병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십시요. 그렇다면 왜 많은 중대원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놀림감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겠습니다. 훈련소 교육기간중 취사장 사역병으로 두세 번 나가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취사병을 볼 때면 취사장 군기가 너무나 엄했고 짠밥을 만지는 취사병들이 항상 지저분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취사장에서 일을 해 보니 정말 가족적이고 마음 또한 편안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자유시간 넉넉하고 물사정 또한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취사장에서 근무하고 싶은 욕심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여 함께 일하던 취사병에게 살며시 물어봤습니다. "취사장에서 근무하려면 어떠한 자격과 기술이 필요합니까?" 이에 취사병 왈, 논산훈련소에서 조리사 주특기(752)를 받으면 어느 부대를 가든 취사병으로 일할 수 있지만, 여기처럼 예하부대 출신은 주특기 무조건 1로 시작되기 때문에 취사장 근무가능성은 희박하고 사회에서 요리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부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히면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확률이 크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의 주특기는 일빵빵(100)소총수. 드디어 6주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자대배치 받아 중대장님께 신고식하던 날, 중대장님께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하시기에 저는 서슴지 않고 "중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취사장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경력이 있냐고 묻길래 대답했죠. "예, 있습니다." "어디에서?" "중국집에서 철가방 생활 2년 했습니다." 중대장님은 저의 대답에 웃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취사장 T.O가 없으니 3소대로 가서 근무하라며 3소대장님께 인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취사장 근무에 대한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취사병에게 들었던 말대로 고문관이 되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무슨 일이든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몰아쳐도 이를 악물고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꿈이 실현될 때까지 충실한 고문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제식훈련 때의 일입니다. 우향우 하면 좌향좌로, 좌향좌 하면 우향우로, 뒤로 돌아 하면 거꾸로 돌고... 등등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 했습니다. 이종환씨! 이건 정말 어렵데요. 한번 몸에 배어 익숙해진 것이어서 생각대로 잘 되지 않더라구요. 그때마다 저는 빳다를 맞고 기합을 받지만 기합을 받을 적마다 머릿속 깊이 한 번 더 새겨둡니다. '취사병으로 가는 그날까지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육체는 고달파도 '조금만 참아다오'를 스스로 다지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어쩌다 잘못하여 저도 모르게 같은 방향으로 따라서 움직일 때면 소대장님께서 칭찬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거야.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저의 실수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소대장님의 칭찬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뜻한바 계획대로 고문관의 자세로 돌아갔지요. 이렇듯 남모르는 저의 실수 아닌 실수로 우리 중대에서 유별나게 우리 소대원들만이 제식훈련, 총검술, 태권도 등 반복되는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했지만 군 정신이 강한 저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과는 항상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는지 하루일과 후에는 매일 꼭 한 사람씩 저에게 붙여주면서 모든 기본동작을 책임지고 가르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과 후에 하는 훈련은 제가 어느 정도 하는 척합니다. 왜냐? 소대장님이나 중대장님 안 계실 때 얻어맞고 얼차례 받는 건 순전히 다 공짜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잘해요. 이 고참들이 때리는 것은 정말로 무식합니다. 그리고 국방부 등록된 기합이란 기합은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저에게 다 실험을 하거든요. 그렇지만 다음날 교육시간에는 마찬가지로 반대로만 합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총검술, 태권도시범 등 순서와는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열심히 하면 저를 지켜보는 중대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바다가 되고 너무나 좋아들하지만 저는 그 뒤에 있을 육체적인 고통과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돌 생각을 하면 등에서 땀도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사격장에서는 어쩐 줄 아세요. 내 표지판에는 한 발도 쏘지않고 옆사람 표진판에 다 쏴버리고, 그렇잖으면 허공을 향해 무작정 발사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사격장에서도 정신통일이란 구호와 함께 사격 끝날 때까지 체력단련을 없이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아예 저에게 실탄을 지급해 주지도 않는 겁니다. 왜냐? 저같은 꼴통에게는 실탄이 아깝다는 것이지요.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저를 행정반으로 부르시길래 저는 생각했지요. '와! 이제 드디어 취사장으로 가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착각의 기쁨은 잠시 중대장님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무슨 애가 그 모양이냐? 나 9년째 군대생활하지만 너같은 저능아는 처음 본다. 너 학교 어디까지 나왔나?" "네, 고등학교까지밖에 못 나왔습니다." "그럼, 그 머리로 대학갈 생각도 했나?" "아닙니다." "그럼, 고등학교는 앞문으로 나왔나? 뒷문으로 나왔나?" "네, 우리 학교는 정문 하나밖에 없어서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그럼 학년 전체에서 석차는 어느 정도였나?" "네, 아마 제 뒤로 두 명이나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사실은 10위권에서 놀았거든요.) "임마, 그게 무슨 자랑이냐?" 그러시며 지휘봉으로 제 머리통을 때리지만 평상시 얼마나 원산폭격을 많이 했던지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군요. 그래도 고향이 같은 선임하사께서는 제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던지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못난 것도 죄냐? 너무 걱정말고 내무생활 착실히 하고 사고만 내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없으니 내무반에 돌아가 푹 쉬어라." 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얻어 고문관의 길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분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취사장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동안 받은 설움과 얻어맞고 기합받았던 것이 너무나 아까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시간이 4개월쯤 지났을까, 중대장님께서 소대장과 고참들에게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 송이병은 구제불능인 것 같으니 더 이상 애써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말고 내무생활이나 잘하게끔 다독거리며 잘못한다고 해서 구타나 체벌 같은 짓은 절대 삼가라구." 아니! 맑은 대낮에 무슨 대포 날아가는 소리입니까? 언제나 쪼인타로 다리 다 망가뜨려놓고 이제 와서 포기하시다니, 좀 늦은감은 있으나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구 하나 저에게 관여하는 사람 없고, 꼴통과 고문관이라는 별을 갖고 다닌 채 쓰레기 소각장이나 화장실 청소, 하수구 정비, 울타리 보수 등 자고로 부대의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 환경파수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가시밭 같은 4개월의 고문관 생활로 생각지도 않았던 환경미화원으로 발탁이 되다니 기대에는 어긋났지만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국방부 시계는 돌고돌아 저에게 일계급 진급이란 소식이 전해습니다. 군생활 열심히 한 동료전우나 군생활이 전혀 도움이 안된 저에게도 똑같은 날 중대장님 앞에 일병으로 진급했다는 신고식을 떳떳이 할 수 있게끔 공정한 심사를 해 주신 대한민국 국방부 인사과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일병으로 진급은 됐어도 환경파수꾼에 대한 변화는 없던 차에 행정반 마이크에서 위대한 송일병을 찾는 안내방송을 듣고 뛰어갔는데 선임하사이신 인사계님께서 대희보를 제게 주셨습니다. "송일병, 취사장 허병장이 제대특명을 받아 며칠 후면 전역을 하게 됐으니 취사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아니! 이게 무슨 주택복권 당첨된 소리입니까.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했느데.... 저는 겸손한 자세로 대답했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내무반으로 돌아가 따블백을 챙겨 취사반으로 가는 저의 발걸음는 마치 자유를 찾은 한 마리의 새였습니다. 그리고 취사장 근무 첫날부터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취침점호와는 관계없이 일찍 잠을 잘 수 있다. 둘째, 불침번이나 외곽 근무는 일체사절이다. 셋째, 아침점호나 구호, 아울러 교육훈련까지 전부 열외다. 이종환 최유라씨, 취사장 끗발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취사장 쫄따구라고 해서 소대 고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터치했다간 배식시간에 그 결과는 그대로 불을 보듯 뻔하게 나타나게 되니까 말입니다. 특히 고깃국 배식시간엔 두말할 것도 없지요. 그 동안 저에게 못할 짓 많이 한 고참들 고깃국 나오면 항상 위에 둥둥 떠있는 기름덩어리만 한국자 떠주고,저를 불쌍히 여겨 인간답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고참들에게는 국자를 깊이 넣어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왕건더기를 듬뿍 담아 주는 편파적인 배식을 계속했었습니다.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취사장에 들어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송일병 할 만하나?" "예." "너의 예전 모습은 이게 아니었잖아?" "뭐가요?" "그놈, 참 기특하게도 사람 많이 변했네." 이러시며 만족한 웃음을 흘리시며 나가시더군요. 한 번 고문관은 영원한 고문관이 아닙니다. 일단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피나는 인내와 끈질긴 노력을 했을 뿐이고 대한민국 군인이었기에 후퇴를 안했을 따름입니다.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전우들이여! 지금쯤은 일반 예비군들로서 사회에서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하고 있겠지만 이 사람 또한 농촌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는 예비군 여러분! 요즈음 부정부패로 사회에 크나큰 사건들을 접하고 볼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질 때가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군대시절 한심스러웠던 저의 모습을 다시금 상상하며 스트레스를 확확 풀어 보십시오.
Board 삶 속 글 2023.01.06 風文 R 533
문전성시(門前成市) 門:문 문. 前:앞 전. 成:이룰 성. 市:저자/도시/시가 시. [유사어] 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문전작라(門前雀羅). [출전]《漢書》〈孫寶傳〉〈鄭崇傳〉 문 앞이 저자(市]를 이룬다는 뜻으로, 권세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빈다는 말.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B.C. 6~1)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정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국방 장관) 왕망[王莽:훗날 전한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움]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애제의 할머니), 정씨(丁氏:어머니)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충신들은 간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중 상서 복야(尙書僕射:장관)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사온데[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오소서.”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시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 오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의 소청을 묵살한 패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례(司隷)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정숭을 변호했으나 애제는 손보를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주] 삭탈 관직 : 죄 지은 벼슬아치의 벼슬과 품계[品階: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빼앗고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깎아 버림.
Board 고사성어 2023.01.06 風文 R 1110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것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장래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이기도 한다. 만일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니 간섭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이나 매명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실히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한 이해와는 관계가 없는 풍류가들의 예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한 취미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해도 손색이 없겠다."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에 보내기로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면서, 활자의 매력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나 신문은 항상 필자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들의 수첩에 등록된다. 조만간 청탁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로부터 청탁을 받는 신분으로의 변화는 결코 불쾌한 체험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하고, 정성을 다하여 원고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가 안으로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을 전문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으로 전락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다. 현학적 표현은 사상의 유치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한방에 보내자 - 송근준(남.인천 서구 가정동) 때는 바야흐로 단기 4309년 여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늘 칠판 모퉁이에 단기 년, 월, 일을 쓰셨습니다. 단군의 자손이 단기를 모르면 단군의 자손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며 우리 민족의 유구한 우수성을 역설하시는 분으로 별명은 '단군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의 초등학교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변기이겠지만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그때만해도 재래식 변기(일명:푸세식)이었습니다. 지저분하지만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요즘의 정화조 통위에 볼일을 보는 구멍을 몇 개 뚫고 그 사이를 판막이로 막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밑은 모두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리고 벽 뒤쪽에는 변을 푸는 곳이 있는 그런 화장실입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점심 시간이었습니다. 화장실, 아니 그땐 변소라고 했으니까 현장감을 더하기 위해 변소라 하겠습니다. 변소 뒤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별명이 땜통이라는 친구가 "똥통에 쥐가 있다."라고 하여 변통을 보았더니 여름장마가 지나간 후라 충만한 변통 안에서는 쥐 한마리가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쥐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쥐 잡는 날'을 지정할 만큼 쥐는 곧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변통 안의 쥐를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큰 벽돌을 온힘을 다해 들고와 큰 목소리로 "한방에 보내자."하며 변통안에 사정없이 투하하였습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크림슨 타이드 영화에서 잠수함이 폭발하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로 "사격중지, 사격중지, 아니 폭격중지."하는 소리, 아니 절규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마침 사격과 폭격을 중지하고 변통을 보았더니 정말 쥐는 사살되었는지 사격중지라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아 아무 생각없이 오후 수업을 하기위하여 입실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단군선생님께서는 수업을 들어오시지 않는 겁니다. 그럭저럭 한 시간을 꽁으로 먹고 오후 2시간째 수업을 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군선생님께서 새옷으로 단장을 하고 들어오셔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한방에 보내자고 한 놈 나와!"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친구들이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머리에 털나고 똥벼락 맞았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밑에서 똥분수를 맞는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사격중지, 아니 폭격중지를 외쳤는데도." 말끝을 흐리시더니 다시 완전히 이성을 잃어신 것 같은 얼굴로 "한 방에 보내자고 한 놈 나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변통에 융단폭격을 할 때 단군선생님이 변소에서 볼일을 보시면서 봉변을 당하시던 장면과 "한방에 보내자."라고 한 것이 저라는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스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손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 어린 저로서도 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성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믿었던 융단폭격의 참전 전우들의 눈동자가 무거운 침묵과 함께 모두 저를 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땐 정말 쥐구멍이 아니라 변통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수하여 광명 찾을 걸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땐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라는 속담이 진짜더라구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저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쥐를 한방에 보내자고 한 것이지 선생님을 한방에 보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용기있게 말하자 선생님께서는 "내가 빗발치는 파편을 그 좁은 공산에서 다 피했지만 그 한방에 완전히 폭탄 맞은 꼴 되었다. 이놈아!"하고 말씀하신 후 혼내줄 명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고의성은 아니라는 것을 아셨던지 조금은 이성을 찾은 얼굴로 "앞으로 똥통에 돌을 던지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하신 후 수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단군선생님께서는 6.25 당시 중위로 참전하여 군용어를 잘 쓰시는 편이었습니다.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계실 때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격중지, 폭격중지를 외롭게 연발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단군선생님의 명복을 방송을 통해 빌었으면 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1.05 風文 R 516
문경지교(刎頸之交) 刎:목 찌를 문. 頸:목 경. 之:갈 지(…의). 交:사귈/벗 교. [동의어] 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 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참조] 완벽(完璧). [출전]《史記》〈廉頗藺相如列傳〉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 또 그런 벗.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목현(繆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태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됐다.그리고 3년 후(B.C. 280), 소양왕과 혜문왕을 욕보이려는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그에게 망신을 주었다. 인상여는 그 공으로 종일품(從一品)의 상경(上卿)에 올랐다.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 테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 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 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로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로 소양왕이지요.” “나는 그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위기를 생각하고 염파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윗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粗負荊:사죄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끓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문경지교’를 맺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01.05 風文 R 8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