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상옥편"(1920~2004) 시조 시인. 호는 초정. 경남 충무 출생. 학교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고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냄. 광복 후 부산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상경하여 표구사 아자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음. 16세 때에 시조 "청자부"로 가람 이병기를 놀라게 한 바 있으며 한국 현대 시조를 꽃피운 공로자 중의 하나로 "백모란" "이조의 흙" 등 많은 시조 작품이 있다. 백자 이제 학이 받쳐 든 술잔 여기 술잔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술잔은 적어도 백유여 년을 창공에 높이 떠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언제까지나 떠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정말 술잔이 창공에 떠서 물 흐르듯 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떠 있는 바에야 어찌하랴. 일찍이 이 땅에 한 무명 도공이 있어, 그 도공의 슬기가 능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술잔은 정작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는 그 무명 도공이 나고 살고 또 죽고, 그리고 죽어서 묻혀 있을 그 어느 외딴 산골짜기의 흙임에 틀림없다. 종생토록 고된 노역으로만 다루어진, 그 곰의 발같이 생긴 무디고 억센 손, 그 손으로 이 흙을 빚어 구워 낸 것이 바로 이 백옥보다 흰 술잔이다. 아니, 차라리 희다못해 눈이 시리도록 연푸른 술잔이다. 이러한 도자기의 빛을 애도가들은 영청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연 그냥 희거나 그냥 푸른빛이 아니라, 오직 푸르름의 잠영, 푸르름의 그리메가 다시 그늘져 비쳐지는 빛이다! 이렇게 희고 푸른 영청 빛을 살리자면 어떻게 하랴? 그것은 파란 하늘빛이 노상 서리고 배어 있을 저 동방의 서조, 학의 날개를 새길 수밖엔 없다. 드디어 도공은, 아니 그 이름 없는 명장은 잔받침에 두 마리 학을 새겼다. 목과 부리는 입체적인 도법, 날개는 음양각에 투각까지 겸했다. 그 솜씨도 자못 빼어나 학과 같이 청수하다. 암놈은 목을 휘어 수놈의 다리 위에 얹고, 수놈은 또 암놈의 뻗은 다리 위에 그렇게 서로 목을 휘었다. 아예 인위란 모르고 오히려 한 자연으로 살아 온 도공, 그는 그가 태어난 골짜기의 흙을 파서 그 골짜기의 물로 빚고, 그 골짜기의 나무를 찍어 구워 낸 것이기에, 정녕 미도 미한 줄 모를 만큼 그저 그대로 자연스럽다. 그가 언제 미를 배웠으며 또 미를 익혔으랴. 그러나, 어찌 미를 모르고서 이같이 지묘한 의장을 구상해 내었을까? 인색한 일인들은 이를 그냥 '우연의 소산'이라 한다. 설령 우연이라면, 그 우연은 누가 닦고 누가 가꾼 우연이란 말인가? 받침으로 새겨진 학은 또 그냥 있지 않다. 좌우에서 마주 보며 활짝 죽지를 펴고 있다. 그리고 또, 펴고만 있지 않고 저 끝없는 창공을 향하여 하냥 날고 있다. 이렇게 날고 있는 두 마리 학의 날개는 말할 것도 없이 오직 한 개의 술잔을 받쳐 들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이 술잔은, 가령 술상 위에 놓였거나, 또 누가 들어서 뉘게 권작하거나 해도, 이미 학은 받침하고 있는 바에는 분명히 어느 심령의 하늘을 날고 있다 하리라. 예로부터 학은 십장생의 하나, 학이 하늘로부터 술을 실어 온다면, 아니, 어떠한 술이라도 이 잔에 한 번 담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장수를 축복하는 불로의 선주! 또 하늘로부터 술을 긷는다면, 이 술잔은 그대로 끝없는 설화의 샘을 길어 올리는 선녀들의 두레박! 이미 내게는 이 술잔으로 장수를 빌어 드릴 어버이도 없고, 나 또한 일적불음이라 대작할 친구도 없다. 그러면서 연전에 이것을 사서 내내 수장하고 있다. 문갑 위에 놓인 이 술잔은 이제 술을 마시는 연모가 아니다. 갈수록 속진에 물들어 가는 마음, 이제 그런 마음을 세례하는 하나의 조촐한 정기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먹는 게 퇴직금이구만유 지금으로부터 약 십년전. 제 부모님께서는 아현동에서 중국집을 하고 계셨습니다. 자장면 집은 신속배달이 생명이고 철가방이 마스코트이기에 저희도 '철가방'을 우대했습니다. 많은 철가방이 거쳐갔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날으는 철가방', '환상의 철가방', '전천후 철가방', '오토매틱 철가방', 그리고 우리집 '홍보석'의 최장수 철가방이자 마지막 철가방인 대경이 형을 떠올리며 자칭 '영업부장' 타칭 '터미네이터 철가방'인 대경이 형에 대해 몇 자 쓸까 합니다. 형의 고향은 어머니의 고향인 충남 당진이었습니다. 먼 친척뻘이라 했는데 촌수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사돈의 육촌 정도는 되었겠지요. 초등학교 6년을 하루는 결서, 하루는 조퇴, 다음날은 가정학습, 그 다음날은 야외학습하며 3년도 채 안 다니고 졸업을 한 나름대로 '수재'였습니다. 어쨌든 형은 첫날부터 수상했습니다. 가게로 막 들어선 형을 본 순간 전 '민속씨름'선수인 줄 알았습니다. 형은 신장 185센티미터에 9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를 자랑하는 나이트클럽 어깨를 연상케 했습니다. 우선 요기부터 시켰습니다. 어머니 말처럼 사람 구하기 힘든 때에 그야말로 극비리에 스카우트 해온(물론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귀한분 이었으니까요. 형은 슬쩍 본 주방장 아저씨는 볶음밥 곱빼기, 왕특자장면, 군만두 3인분을 내놓았습니다. "쩝쩝, 후루룩." 정말 잘 먹더군요. 열심히 먹고 있는 형에게 주방장 아저씨가 "어때 자장면 맛이 괜찮으냐?" 하며 은근히 자기자랑 비슷한 질문을 하더군요. 한입 가득 자장면을 씹고 있던 형은 알사탕만한 큰 눈을 껌벅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리고는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글씨유, 모르겠구만유. 자장면이 자장면 맛이지, 괜찮은 건 또 뭐래유?" 여하튼 다음날부터 형은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카운터에서 전화받으랴 계산하랴 바쁜 어머니에게 형은 철가방을 들고 그 느린 말투로 "아줌니이-, 지 수진부동산 댕겨 오께유." 하며 배달을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아줌니이-, 지 수진부동산 댕겨 왔구만유." 하는 겁니다. 처음 몇 번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계속 그러자 어머니가 "대경아, 이제 어디 간다고 또 왔다고 그런 말 안해도 돼. 그냥 갔다와." 하자 형은 큰 눈을 껌벅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글씨유, 뭔 말인지 모르겠그만유. 사람이 나가면 나간다, 들어오면 들어온다, 말을 해야지, 어찌 그런대유, 휙 나가고 휙 들어오는 그런 경우가 어딨대유. 진 그리는 못하는구만유." 어쨌든 너무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형은 기운이 넘쳐 일도 잘했습니다. 완행열차 추풍령고개 넘어가듯 말은 느렸지만, 몸은 불곰이었지만, 동작은 물찬 제비였습니다. 가랑이 사이로 비파 소리가 나도록 부지런히 움직였고, 철가방을 들고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휙- 하는 바람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기운좋게 일 잘하니 먹는 것도 대단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돼지고기 두 근 정도는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는 식으로 먹었습니다. 하루는 점심으로 볶은밥 4인분을 먹고 있던 형에게 "대경아, 그렇게 많이 먹고도 소화가 되니?" 하며 어머니가 묻자 형는 숟가락을 내려 놓더군요. 그리고 또 큰 눈을 껌벅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아줌니이-, 물어볼 게 있구만유." "뭔데." "저기유, 여기 퇴직금 주남유?" "애는 중국집에 퇴직금이 어딨어." 어머니가 대답하자 형은 물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더니 물컵을 턱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거봐유, 안 주는 거 맞쥬. 내 다 알쥬." 하고는 목을 곧게 세우고 눈에 힘을 주며 비장한 목소리로 "나유, 서울 올라올 때 우리 엄니가 그랬슈, 즉 먹는 게 퇴직금이다 이 말이쥬. 어때요, 내 말이 맞쥬?" 하고는 남은 볶음밥을 마저 먹더군요. 그 뒤로 어머니는 대경이 형이 뭘 먹든 얼마나 먹든 신경 안 쓰셨지요. 어느 날 텔레비젼에서 권투 중계를 하더군요. 주방 식구들은 서로 내기를 걸었지요. 주방장 보조인 김씨 아저씨가 야 대경아, 흰 빤스 입은 애가 이길 것 같냐? 파란 빤스 입은 애가 이길 것 같냐? 며 대경이 형에게 묻더군요. 전 형이 이번에는 또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했습니다.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던 형 왈, "글씨유, 몰라유. 내가 그걸 어찌 안대유." 김씨 아저씨가 재차 "임마 그래도 예상은 할 수 있잖아. 예측도 못하냐?" 하자 형은 바쁘게 씹던 사과를 꿀꺽 삼키더니 큰 눈을 껌벅거리며 또 뭔가를 깊이 생각하더군요. 이윽고, "글씨유, 지가 볼 때는유 많이 맞은 놈은 아플 거고, 때린 놈은 지치겠쥬." 하는 겁니다. 어는 월말 수금문제로 형은 또 한번 웃기더군요. "수금 왜 못했니?" 라는 어머니 물음에 형은 말하더군요. "글씨유, 안 주네유." "달라고 했어?" "했는디, 돈이 없대유." "그럼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물어봐야지." "글씨유, 곧 주겠쥬." "참 답답해라."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자 형은 눈을 껌벅거리며 또 뭔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렇지유. 답답하쥬. 지는 환장하겠슈..." 사건도 많았지요. 어느 겨울날 배달을 나간 형이 빙판에 미끄러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깨진 그릇과 짬뽕국물이 질질 흐르는 철가방을 들고 절뚝거리는 형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형 미끄러졌구나. 많이 다쳤어?" "아녀, 내가 미끄러진 게 아녀. 오토바이가 미끄러졌다니께..." "조심하지 그랬어." "나야 조심하지. 근디 오토바이는 조심 안혔어. 그러니 오토바이가 미끄러졌지. 나야 잘못 없어." 형은 말하면서 행주로 철가방을 닦더군요. 그러다가 형도 선을 볼 나이가 되어서 어머니가 미장원 아가씨를 소개시켜주었지요. 그런데 나간지 한시간도 채 안되어 형이 들어오더군요. 전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냐고 하며 형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한참을 끙끙 앓던 형이 말하더군요. "아, 글씨. 다방에서 코피 마시는데, 코피 좋아하냐구 가시나가 묻잖여. 그래서'시키니까 마시지유.' 혔지. 그리그 오늘 어떻게 할 거냐구 묻잖여. 그래서 '나가봐야 알쥬.' 혔지 한참을 있다가 '점심은 어떻게 하죠?' 하길래 '배고프믄 묵쥬.' 혔지. 그러니까 이 가시나가 톡 쏘잖여, '오늘 여기 왜 나왔어요?' 하고 말여. 그래서 '선 보러 가라 해서 왔지유.' 혔지 그러더니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살거냐고 묻길래 '결혼혀봐야 알쥬.' 그랬지. 그러니까 코맹맹이 소리로 '실례했어요.' 하고 나가잖여. 햐튼 서울 아들은 싸가지가 없어." 휴... 저는 그냥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요. 시간은 잘도 흘러 저희 중국집도 남에게 처분했지요. 형은 그간 모은 돈을 갖고 당진으로 내려갔습니다. 논밭도 많이 장만하고 소, 돼지, 개, 닭도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재작년 가을에는 결혼도 했고, 올초에 아들을 낳았다고 집으로 전화를 했더군요. 어머니가 애는 이쁘고 건강하냐고 묻자, 형은 이러더랍니다. "글씨유, 잘 몰라유. 지 눈엔 이쁜데, 아줌니가 봐야 이쁜지 안 이쁜지 알지, 그걸 어떻게 아남유. 그럼 들어가시유..."
Board 삶 속 글 2023.01.08 風文 R 480
미생지신(尾生之信) 尾:꼬리 미. 生:날 생. 之:갈 지(…의). 信:믿을 신. [동의어] 포주지신(抱柱之信). [출전]《史記》〈蘇秦列傳〉.《莊者》〈盜?篇〉 미생의 믿음이란 뜻. 곧 ① 약속을 굳게 지킴의 비유. ②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었다. 어느 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전국 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소왕(昭王)을 설파할 때 신의 있는 사나이의 본보기로 미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같은 전국 시대를 살다간 장자(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장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장자》〈도척편〉에서 근엄 그 자체인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의 입을 통해 미생을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Board 고사성어 2023.01.08 風文 R 848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조연현편" (1920~1981) 평론가. 경남 함안 출생. 혜화 전문 수료. 한양대 문리대학장, 문인 협회 이사장 역임. 초기에는 시를 쓰기도 하였으나 광복 후에는 평론과 수필을 주로 썼다. 청년 문학가 협회를 결성하여 좌익을 분쇄하는 데 앞장선 바 있으며 순수 문학의 옹호에 공적을 세웠다. 후기에는 현대 문학사의 정립에 힘썼으며 엄청난 양의 평론을 통하여 정력적인 평론가로 정평을 얻었다. 친절한 사람들 1971년 여름, 나는 더블린에서 개최된 세계 팬 대회에 참석하게 된 기회에, 약 40일 동안 세계 몇몇 나라를 여행한 일이 있었다. 다 알다시피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신생 공화국인 에이레의 수도다. 갈 때에는 자유 중국의 타이베이로 해서 홍콩, 이탈리아의 로마, 프랑스의 파리에 들렀고, 올 때에는 미국에 들러 뉴욕, 워싱턴, 볼티모어, 시카고를 돌아 보고, 일본의 도쿄를 거쳤다. 그 중, 자유 중국과 일본은 우리 나라에서 퍽 가까운 거리에 있고, 또 같은 아시아 국가들일 뿐만 아니라, 전에도 가 본 일이 있기 때문에, 해외 여행이라는 데서 오는 흥분이나 불안은 느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나라들에 대해선 적잖은 흥분과 불안을 함께 느꼈다. 아니, 흥분보다 불안이 앞섰다고 하는 거시 옳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불안을 느낀 데엔 몇 가지 까닭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 때문이었다. 외국을 여행할 때에는 그 나라의 말을 잘 할 수 있거나 혹은 비교적 널리 쓰이는 외국어를 한둘쯤 알아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질 텐데, 나는 외국어에 익숙하지 못하다. 따라서, 자연히 벙어리 여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건강 때문이었다. 기후와 음식이 다른 여러 나라를 한 달 이상이나 여행한다는 것은 웬만큼 건강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잘 앓는 병약한 내가 어떻게 감당할까 싶었다. 다음은 경제적인 이유에서였다. 안락한 호텔에 들고, 영양 많은 음식을 사 먹으며 여행할 만큼 충분한 여비가 준비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헐한 호텔과 값싼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40일 동안이나 낯선 여러 나라와 도시를 큰 불편 없이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대해 준 여러 나라 사람들의 친절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마치고 통관 구역에 들어가, 짐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호텔 걱정을 하고 있었다. 홍콩에서 비행기 회사측에 로마의 호텔 예약을 부탁했었는데, 내가 홍콩을 떠날 때, 아직 로마에서 연락이 없으니 호텔 예약은 안 된 것으로 알고 떠나라는 전화를 받았었기 때문에, 나의 호텔 걱정은 퍽 큰 것이었다. 그 때, 내 앞에 와서 '미스터 조'냐고 묻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로마의 세관원이었다. 그렇다고 하니까, 편지 한 통을 내주었다. 우표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은 아마 로마에 사는 사람이 인편으로 보낸 것인 듯한데, 생전 처음 와 보는 낯선 이국 땅,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로마에서 나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필시 잘못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뜯어 보았다. 그러나, 누가 생각이나 했으랴. 그것은 내가 탄 비행기 회사의 로마 지사로부터 나에게 온 것으로, 호텔이 예약되었으니 그리 가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홍콩을 떠난 후에 호텔이 예약되었기 때문에, 내가 로마에 내려 비행장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이것을 알리려고 비행기 회사측에서 온갖 비상수단을 다 썼을 것으로 추축되었다. 비행장의 출입국 수속이 진행되는 장소는 출입금지 구역이므로, 허가된 사람이 아니고는 출입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자기 나라를 찾아온 한 외국인에게 편지 한 통을 전하기 위하여 회사측과 세관측이 합동 작전을 벌인 셈이다. 다음은 그 호텔까지 가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할 수 없이 아까 그 세관원에게 떠듬떠듬 그 방법을 물었다. 그는 어디서 로마 시내의 지도를 한 장 가지고 오더니, 내가 가야 할 호텔의 위치에다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그리고는 1. 비행장에서는 택시를 타지 말아라, 2. 테르미니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라, 3. 테르미니 역에서 호텔까지는 택시를 타라 하고 적어 주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는 영어를 퍽 잘 하는 것 같은데도, '택시를 타지 말아라' 같은 말은 '노 택시'와 같은 식으로 적었다. 이는 자기를 표준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내가 잘 짐작할 수 있도록만 적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나는 그가 준 지도와 쪽지를 가지고 호텔까지 잘 갈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택시를 타면 호텔까지 더 수월하게 갈 수 있을 텐데, 왜 그 세관원은 택시를 못 타게 했을까? 나는 그 까닭을 곧 알 수 있었다. 비행장에서 시내까지는 거리가 퍽 멀고, 택시 요금도 매우 비싸기 때문이었다. 그 세관원은 나에게, 호텔까지 가는 방법만이 아니라, 경비를 절약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준 것이다. 나는 이 일로 해서 기분이 매우 좋았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친절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영상이 선명하다. 이러한 친절은 물론 이탈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더블린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회의장에서는 통역해 주는 분도 있고, 우리 대표 중에 외국어를 썩 잘하는 분도 있고 해서 별 불편이 없었으나, 혼자 거리에 나가거나 또는 개인적인 용무를 보거나 할 땐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땐 어디선가 학생들이 몰려와 친절하게 도와 주었다. 어떤 때는 내가 가려는 목적지까지 동행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물건 사는 일까지도 도와 주었다. 나는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더블린의 그 친절한 학생들을 생각한다. 나의 눈앞에 떠오르는 더블린은 언제나, 명랑한 얼굴과 따뜻한 마음으로 나를 대해 주던 그 어린 학생들의 모습으로 꾸며질 것이다. 시카고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혼자 비행장에 내렸는데, 아무리 찾아 보아도 마중 나오기로 된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것은 전보 연락이 잘못된 까닭이었다. 나는 낯선 비행장 한구석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때었다. 은발의 한 노신사가 다가와 쉬운 말로 사정을 묻고, 그 무거운 짐을 함께 들자고 하면서 목적지까지 친절히 안내해 주었다. 노인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 죄스러웠으나 어찌할 수 없는 처지었다. 나는 아마도 시카고란 말을 들으면 그 은발의 노신사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혹은 미국의 어느 은발의 노신사를 만나면 시카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파리에서는 언어가 더욱 통하지 않아 버스나 지하철을 잘못 탄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파리의 시민들은 친절히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시간을 좀 허비하는 일은 있었지만, 목적지를 못 찾아 크게 낭패를 본 일은 없었다. 파리는 예술의 도시라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보다도, 친절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란 생각이 늘 앞선다. 이 밖에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즐거운 여행을 한 경험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나에게 친절을 베풀어 준 사람들은 반드시 그 나라의 관리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인사들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그리고 이름 없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그러했고, 특히 어린 학생들이 그렇게 친절했다. 그들의 조그만 호의나 친절은 나에게 인간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해 주었고, 그들이 사는 나라나 도시에 대한 좋은 인상을 깊게 심어 주었다.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외국 사람들이 근래에 부쩍 늘어나고 있다. 그 중에는 물론 우리말을 잘하고 우리 나라의 지리에 밝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마 대개는 우리말을 못 하고 우리 나라 지리에 어두운 사람들일 것이다. 어쩌면 나와 같은 불리한 조건으로 우리 나라에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나라의 모든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름없이 외국인에게 친절히 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외국인을 친절히 대하자는 말을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인정의 아름다움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민 외교의 한 구실까지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국 사람에 대한 친절은 경우에 따라선 나라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라고까지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친절은 외국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게 된다. 우리 모두 우리 나라를 찾는 외국 사람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운 인정을 베풀어 줌으로써 세계에 우리 나라의 인상을 감명 깊은 것으로 심어 주어야겠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춘발이를 구하라! 지난 어린 한 시절의 추억을 고백함에 있어 이 방송으로 자칫 개인의 명예가 훼손되는 일이 있다 하여도, 어디까지나 시효가 지난 사건으로 이해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 방송으로 오래 전부터 연락이 두절된 친구들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초등학교 3학년 시절로 기억됩니다. 그 시절엔 어느 곳이나 비슷했습니다만, 제 고향인 안동에서는 특히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예절교육이 대단했습니다. 학교에서의 선생님은 곧 염라대왕이요, 저승사자였습니다. 물론 모든 선생님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기억 속의 수많은 선생님들 중 그 시절부터 유행했던 '슈퍼맨' '베트맨' 보다도 더 대단하셨던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별명이 임꺽정이었는데 처음엔 이름이 비슷해서 붙였지만, 서서히 그 명성이 이름을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3학년 2학기가 되던 때 별안간 우리반의 담임이셨던 우영방(우리의 영원한 우방- 실제 이름임) 선생님이 개인사정으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임꺽정 선생님이 저희반의 담임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하늘이 우리반을 버린 것입니다. 대책회의는 반장을 중심으로 무수한 의견이 제시되어 반 전체가 참가하는 투표에 부치게 되었습니다. 결과는 '수업거부!' 제가 다닌 초등학교는 대학부속 초등학교로 사립의 교육분위기가 매우 강했으며, 당시에 이미 선거와 교내 서클 등이 장려되어 일반화 되어 있었고, 학교 일정및 행사는 학생들의 의견과 투표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임꺽정 선생님은 별명 그대로 임꺽정 그 자체였습니다. 이런 우리의 사정을 아셨는지 2학기가 시작되던 첫날이었습니다. "만나서 반갑다. 내일 임시시험을 보겠다. 이제까지 너희들의 영원한 우방이었던 우선생님의 노고에 흠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히기 바란다. 만약 80점 이하인 경우는 '개별면담'을 하겠다." 우린 순식간 분열되고 있었습니다. 완전한 공중분해였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우려했던 '개별면담.' 결코 들어서도 보아서도 안될, 그 전설적인 '개별면담'을 그것도 2학기가 시작되는 첫날에 듣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선배들이 이슬 같은 눈물로 대신했다는 전설. 교내에 구전되어 온 '영남선'의 전설 주에 가장 비인간적인 무시무시한 전설이 바로 임꺽정의 '개별면담'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없엇습니다. 집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는 방법 이외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결과는 물론 저는 80점 이상으로 '개별면담'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가장 친한 친구인 박충신(별명 춘발)이는 50점으로 '특별면담' 코스까지 가야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춘발이는 거의 삶을 포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방법을 찾아야 했스빈다. 교통사고로 위장하여 장기 입원하는 방법,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로 장기 결석하는 방법, 전학가는 방법 등 많은 의견이 있었지만 실행가능한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지난해 임꺽정 선생님의 '개별면담'에서 면죄를 받은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쁜 시험성적으로 아버지로부터 이미 종아리를 맞은 후 '개별면담'을 하게 되었고, 종아리의 멍자국을 본 임꺽정 선생님은 너그러이 대화로 면담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3, 4 명이 더 모여 '춘구위(춘발이 구제 위원회)'가 발족되었습니다. 방법을 찾아보니 간단했습니다. 싸리비를 꺽고, 적당한 몽둥이를 구해 우리집으로 모였습니다. 그리고 춘발이를 패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무리 때려도 멍이 들지 않았습니다. 춘발이는 어금니를 물고 참았습니다만, 조금 빨간색으로 상기될 뿐 자국이 남지 않았습니다. 춘발이는 가끔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참아야 했습니다. 1시간이 지나고 2시간이 지나도 멍자국은 남지 않기에, 우리는 좀 비위생적인 방법이지만 멍자국이 남아야 할 춘발이의 종아리를 빨기 시작했습니다. '쪽쪽' 소리가 날 정도로 빨고 또 빨았습니다. 때리고 빨고, 또 때리고 빨고, 하지만 결국 멍자국은 생기지 않았고,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춘발이는 우리의 의리에 울었고, 아파서 울었습니다. 다음날 결전의 면담이 춘발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결국 춘발이는 복날 끌려가는 뭐 마냥 그렇게 끌려갔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임꺽정 선생님의 눈이 커지면서 부들부들 떨고 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춘발이의 종아리가 온통 피멍으로 얼룩져 있는 것입니다. 전날 '춘구위'가 춘발이를 위해 실시했던 공작이 하루가 지난 당일날 표면화되면서 서서히 그 결과를 보이기 시작하였던 것인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건은 심상치 않았습니다. 춘발이의 종아리는 단순히 멍자국을 넘어서 무슨 전쟁에서 입은 상처같았습니다. 임꺽정 선생님의 첫말씀이 "춘발이, 니네 부모가 친 부모 맞나? 혹시 웬수지간 아이가?" 학교가 온통 난리가 났습니다. 양호실로... 교무실로... 한동안 떠들썩하더니, 결국 일은 더욱 커졌습니다. "공범자 나와! 아니, 주범자 나와!" 의리없는 놈. 집으로 전화해서 부모와 면담을 하겠다는 임꺽정 선생님의 말에 춘발이는 자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날 냉장고에서 열이 나도록, 장마에 먼지 나도록 특별면담 코스를 거쳐야 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동창들과 함께 자리를 하는 자리에서 앞의 사건으로 혼절이 되도록 웃어 봅니다만, 춘발이라는 친구는 4학년 그때 서울로 전학을 간 뒤 소식을 알 수 없답니다. 그리고 임꺽정 선생님은 현재 저희 고향인 모초등학교에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십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1.07 風文 R 557
미봉(彌縫) 彌:더할/많을 미. 縫:꿰맬 봉. [유사어] 고식(姑息). 임시변통(臨時變通). [출전]《春秋左氏傳》〈桓公五年條〉 빈 구석이나 잘못된 것을 그때 그때 임시 변통으로 이리저리 주선해서 꾸며 댐. 춘추 시대인 주(周)나라 환왕(桓王) 13년(B.C. 707)의 일이다. 환왕은 명목상의 천자국(天子國)으로 전락한 주나라의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정(鄭)나라를 치기로 했다. 당시 정나라 장공(莊公)은 날로 강성해지는 국력을 배경으로 천자인 환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환왕은 우선 장공으로부터 왕실 경사(卿士)로서의 정치상 실권을 박탈했다. 이 조치에 분개한 장공이 조현(朝見:신하가 임금을 뵙는 일)을 중단하자 환왕은 이를 구실로 징벌군을 일으키고 제후(諸侯)들에게 참전을 명했다. 왕명을 받고 괵/채(蔡)/위(衛)/진(陳)나라 군사가 모이자 환왕은 자신이 총사령관이 되어 정나라를 징벌하러 나섰다. 이런 일이 곧 천자(天子)의 자장 격지(自將擊之)는 춘추 시대 240여년 동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윽고 정나라의 수갈(繡葛:하남성 내)에 도착한 왕군(王軍)은 장공의 군사와 대치했다. 공자(公子)인 원(元)은 장공에게 진언했다. “지금 좌군(左軍)에 속해 있는 진나라 군사는 국내 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전의(戰意)를 잃고 있습니다. 하오니 먼저 진나라 군사부터 공격하면 반드시 패주할 것입니다. 그러면 환왕이 지휘하는 중군(中軍)을 혼란에 빠질 것이며 경사(卿士)인 괵공이 이끄는 채/위나라의 우군(右軍)도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할 것입니다. 이 때 중군을 치면 승리는 틀림없습니다.” 장공의 원의 진언에 따라 원형(圓形)의 진(陣)을 쳤는데 이는 병거(兵車:군사를 실은 수레)를 앞세우고 보병(步兵)을 뒤따르게 하는 군진(軍陣)으로서 병거와 병거 사이에는 보병으로 ‘미봉’했다. 원이 진언한 전략은 적중하여 왕군은 대패하고 환왕은 어깨에 화살을 맞은 채 물러가고 말았다. [주] 자장격지(自將擊之) : 남을 시키지 않고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움.
Board 고사성어 2023.01.07 風文 R 10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