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상옥편"(1920~2004) 시조 시인. 호는 초정. 경남 충무 출생. 학교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고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냄. 광복 후 부산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상경하여 표구사 아자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음. 16세 때에 시조 "청자부"로 가람 이병기를 놀라게 한 바 있으며 한국 현대 시조를 꽃피운 공로자 중의 하나로 "백모란" "이조의 흙" 등 많은 시조 작품이 있다. 알같이 생긴 연적 조선 시대 자기 중에 그 생김새의 종류가 많기로는 아마 연적을 두고 달리 당할 것이 없을 것이다. 사각형, 육각형, 팔각형, 원형, 그 둥근 가운데도 떡 모양이 있고, 또 중심이 뚫린 환형, 곧 또아리 모양이 있다. 물형으론 복숭아 모양, 고기 모양, 새 모양, 두꺼비 모양, 그 밖에도 지붕 모양, 초롱 모양, 부채 모양, 무릎 모양 등, 별의별 것이 다 있다. 골동을 수집함에 있어서도 벽이 있어, 어느 분은 병만을 모으고, 어느 분은 사발이나 대적 같은 주방 그릇들을 모으고, 또 어느 분은 문방구, 그 문방구 중에도 필통이나 연적만을 따로 모으는 기호가들이 더러 있다. 내게도 네모꼴에 청화로 보상화문을 그린 것이 하나 있고, 원형에 호접 한 쌍을 역시 청화로 그린 것이 있다. 이들 둘이 다 연대도 얕고, 그나마 네모 꼴은 입이 깨어져 도무지 실용으론 쓸모가 없다. 그래서 이미 한쪽에 밀쳐 두었다가, 마침내 조그만, 신라의 도금불 하나를 구해서 그 위에 올려놓았더니 아주 안성맞춤 잘 어울린다. 이제는 그 아무짝에도 쓸모 없던 연적이 불상 받침으로서 더욱 값진 구실을 하게 되었다. 신라의 쇠붙이와 조선 시대의 질그릇! 이것이 천여 년을 격한 오늘, 외로운 문인의 서실에 와서 그 연분의 기나긴 실끝이 이토록 맺어질 줄이야! 이리하여 이 신라불은 조선조의 꽃무늬를 깔고 나의 방 안을 항시 지켜 주고 있는 것이다. 호접 무늬 있는 것은 빛깔은 그리 좋지 않지만, 금 간 데 하나 없이 완전하다. 이것은 몇 해 전 어느 골동 가게에서 거저 얻은 것인데, 노상 책상에 놓였다가 벼루에 물방울을 떨구는 제 본디의 타고난 구실을 아직도 그냥 되풀이하고 있다. 요 며칠 전, 어느 고물 가게를 지나다가 나는 또 담청을 곁들인 무릎 모양의 백자 연적을 하나 샀다. 그러나 이도 입이 깨어졌다. 이것을 때우려는데 그 조그마한 입을 때우는 품삯이 이 몸뚱이 전체를 산 값보다 더하다. 얼른 생각하면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사람도 만약 입이 없고 몸만 있다면 폐물이 되고 말 것이니, 연적 또한 이와 마찬가지리라. 그러나 때우는 데는 먼저 몸에 밴 때를 뽑아야 한다 하기에, 때를 뽑으려고 탈지면에 과산화수소를 묻혀 환부를 온통 싸 두었었다. 과산화수소는 환부를 소독하는 약이지만, 자기의 상처에서 때를 뽑는 데도 그만이다. 나의 이러한 거동을 보고 있던 아내와 아이들은 킥킥거리고 웃는다. 꼬마놈은 방 안에서 병원 냄새가 난다고 야단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탈지면을 들어 보고 마음을 죄어도 때는 좀처럼 빠지지 않더니 하루는 거짓말같이 말갛게 때가 빠졌다. 이것을 맑은 물에 헹구어 내어 화대로 쓰는 소반 위에 올려놓았었다. 소반의 검은 칠 빛과 이 담백의 연적 빛이 서로 대조되어 더욱 희고 더욱 검게 보인다. 더구나 형광등 불빛 아래 이 볼록한 무릎 모양의 연적을 보고 있노라면, 홀연히 어느 끝없는 환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윽고 곁에 앉았던 딸애가, '사람의 발자국이 아직 한 번도 닿지 아니한 어느 먼 심산 유곡, 그 깊숙한 숲 속에 이름 모를 백조가 있어, 그가 품었다가 놓아두고 간 신비한 알과 같다.'고 하며, 제법 그럴싸한 환상의 날개를 펼쳐, 그 비경에 혼자 찾아든 양 조용히 경이의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아내는 독백으로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뇌며 혀를 차면서도, 한편으론 딸의 환상에 또한 딸애처럼 경이의 눈빛으로 못내 흐뭇해했다. 사실, 이 연적은 구만리 장천을 난다는 저 대붕의 알은 아니라 해도, 거위나 백조의 알보다는 조금 크고, 타조의 알보다는 약간 작은 것이다. 눈도 코도 없이 다만 물을 머금고 물을 배앝는 두 개의 구멍이 있을 뿐, 이 수수께끼 같은 단순한 형태, 그러나 이는 다름 아닌 지난날의 어느 도공이 그 천명에 순종하던 마음을 태반으로 하여 낳은 한 개 무념의 알, 백자 연적일 따름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민간요법이 사람잡네 - 한승섭(남,서울시 동작구 본동) 제 고향은 충남 온양의 외곽으로 과수원만 쭉 붙어 있는 조그만 마을입니다. 땅은 넓지만 집은 몇 채 없고, 이웃간에 담도 없이 지내는 사랑의 동네입니다. 그곳에서 아주 옛날 있었던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옛날, 진짜 뭘 잘 모르던 시절, 시골에서 있었던 엄청나고 어이없는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절대로 흉내내지 말라는 말씀을 먼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집엔 매일 새벽 5시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동네 아저씨가 한 분 계셨습니다. 우리집 대청마루에 걸터앉아서 하는 말도 일년 365일 똑같습니다. 컴컴한 꼭두새벽에 남의 집 마루에 걸터앉아서 하시는 첫 말씀은 이랬습니다. "흠, 흠, 자남...? 자는겨...?" 그 소리에 우리 식구들이 일어나 아침을 맞이 합니다. 새벽부터 술 한잔 하러 건너오시는 거예요. "한잔 혀" "흠, 흠. 식전부터 과헌디..." 그리고는 동네 한바퀴를 두루 살펴 보러 나갑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 5시에 아저씨가 오셨는데 그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다리는 양쪽으로 쭉 벌리고 어기적어기적 걸었으며 얼굴은 벌레 씹은 표정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로더군요. "치질이 아주 심해져서 걷지도 못하니... 워쩐디야." "술을 그렇게 좋아하니 치질이 낫겄나... 쯧쯔." 아무튼 마을 사람들은 서로 걱정하면서 그 고약한 병을 고치는데 특효라고 저마다 한가지씩 민간요법을 내놓았습니다. 첫 번째 요법은 목에 띠없는 지렁이를 설탕과 함께 재워서 공복에 한 수저씩 먹으면 직빵이라는 순덕이 아버지 처방이었습니다. 그날부터 그 아저씨는 열일을 제쳐놓고 시궁창에서 살았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 동네 또랑이란 또랑은 죄다 뒤집어졌고, 하수도 또한 모조리 파헤쳐져서 동네가 완전히 시궁창 동네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정성이 부족했는지 그 목에 띠없는 지렁이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비슷한 것 몇 마리를 정성스럽게 설탕에 재웠습니다. 그리고는 잡수셨죠. 그러나 효험이 있을리가 있남유. 엉터리 민간요법 덕에 동네만 시궁창 됐다니께유. 아저씬 두 번째 요법을 써야만 했습니다. 이번 민간요법 아이디어는 더 황당 했습니다. 그곳(항문)에 양잿물을 주사하면 감쪽같이 낫는다는 피난엄마의 처방이었습니다. 아저씨는 양잿물을 갖고 와서 제 어머니께 사정사정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간호사 교육을 받은 분이라 절대로 안된다고 거절하였습니다. "양잿물은 독이여, 그걸 주사 논다구? 그건 안돼유." 그러나 아저씨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께서 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주사를 집어 들면서 아저씨께 말씀하셨습니다. "아저씨 죽으면 전 몰라유. 증말 몰라유." "죽어도 지가 죽는 구먼유." 아저씨는 얘기하시며 궤타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불보듯 뻔했습니다. 양잿물을 투입하는 순간, '윽' 하는 비명과 함께 양팔은 허공을 저었고, 두 다리는 사시나무 떨 듯했으며, 순식간에 벌어진 입에선 신음소리가 흘렀습니다. 그리고 두 눈은 초점을 흐린 채 흰자위가 점점 넓어만 갔습니다. 그 아저씨 엉덩이가 궁금하지유? 말두 마유, 가관이유 가관, 아니 가관두 아녀유. 그 아저씨 엉덩이께가 글쎄 시장바닥으로 변했다니께유. 그후로 아저씨는 목발로 허리 아래를 지탱하며 다녔습니다. 그래두 워쩐대유 새벽은 오는디... 지의 집에 와야쥬. 이 소리를 꼭 해야만 직성이 풀리나 봐유. "흠, 흠, 자남. 자는 겨?" 왠만하면 나아질 법도 한데 그놈의 치질은 더욱 악화만 되었습니다. 그날도 새벽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저녁 해는 뉘엿뉘엿 평온한 마을 뒷산으로 숨어가고 숨러가고 있었습니다. 그 저녁 무렵. 깔린 땅꺼미를 걷기라도 하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앰블런스 한 대가 아저씨 집앞에 섰습니다. 이유는 그 다음 요법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세 번째 요법은(낚시를 환장하게 좋아하는 덕배삼촌 처방이어유) 요강에 물과 카바이트를 넣으면 부글부글 끓으며 연기가 발생합니다. 가스지요. 그 김을 쏘이면 치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뚝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엉터리 처방이건만 아저씨는 또 실행에 옮겼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요강에 걸터앉았습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무료했겠습니까? 아저씨는 하염없이 앉았다가 무심코 담배 한 대를 물었습니다. 담배를 다 피운 뒤 진짜 무심코 아저씨는 그놈의 담배 꽁초를 엉덩이 한쪽을 슬며시 들고 던져 넣었는데, 그 순간 쾅 하는 폭발소리와 함께 요강은 산산조각이 났고 아저씨는 넋놓고 있다가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온양 그 산골에 앰블런스가 나타난거지요. 그 아저씨 엉덩이가 또 궁금하시지유? 물어보나 마나유. 아주 절단나 버렸데유. 온양 온천 장날에 어떤 이가 그러더구만유. 볼장 다 봤다고... 그 이후 한참 동안은 '흠, 흠, 자남.'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1.09 風文 R 480
반근착절(盤根錯節) 盤:서릴/쟁반 반. 根:뿌리 근. 錯:섞일 착. 節:마디 절. [출전]《後漢書》〈虞?傳〉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라는 뜻으로, 얼크러져 해결하기 매우 어려운 사건의 비유. 후한(後漢) 6대 황제인 안제(安帝: 106~125)때의 일이다. 안제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모후(母后)인 태후(太后)가 수렴 청정(垂簾聽政)을 하고 태후의 오빠인 등즐(鄧?)이 대장군이 되어 병권을 장악했다. 그 무렵, 서북 변경은 티베트계(系) 유목 민족인 강족(羌族)의 침략이 잦았다. 그러나 등즐은 국비 부족을 이유로 양주(凉州:감숙성)를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낭중(郎中) 벼슬에 있는 우허(虞?)가 반대하고 나섰다. “함곡관(函谷關)의 서쪽은 장군을 내고 동쪽은 재상을 낸다고 했습니다. 예로부터 양주는 많은 열사와 무인을 배출한 곳인데 그런 땅을 강족에게 내준다는 것은 당치 않은 일입니다.” 중신들도 모두 우허와 뜻을 같이했다. 이 때부터 우허를 미워하는 등즐은 때마침 조가현(朝歌縣:안휘성 내)의 현령이 비적(匪賊)에게 살해되자 우허를 후임으로 정하고 비적 토벌을 명했다. 친구들이 모여 걱정했으나 우허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서린 뿌리와 얼크러진 마디[盤根錯節]’에 부딪쳐 보지 않고서야 어찌 칼날의 예리함을 알 수 있겠는가.” 현지에 도착한 우허는 우선 전과자들을 모아 적진에 침투시킨 다음 갖가지 계책으로 비적을 토벌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01.09 風文 R 834
헛스윙, 헛웃음, 헛기침의 쓸모 ‘헛걸음’ ‘헛소리’ 따위에 붙는 접두사 ‘헛-’은 한자 ‘빌 허(虛)’에서 왔다. 사전에선 ‘이유 없다’거나 ‘보람 없다’는 뜻이 덧붙는다고 새기고 있는데, ‘가짜, 잘못, 거짓’의 뉘앙스가 더 강하다. ‘나이를 헛먹다, 헛것을 보다, 헛똑똑이’ 같은 말이 그렇다. 매사를 투입 대비 산출로 생각하는 것이 이 시대의 행동강령이다. 적게 투입하고도 목표를 달성하면 박수를 받는다. ‘헛-’이 붙은 말들은 비능률, 비생산적인 상황을 지목한다. ‘헛-’이 빠지면 실속 있고 원하던 게 이뤄진 것이겠지. 힘을 썼으면 그에 맞는 성과를 얻어야 하리. ‘헛심(힘)’ 쓸 바엔 차라리 가만히 있으라. 눈에 보이는 성과(아웃풋)가 없는 일은 헛수고. 장사도 그렇고 배움도 그렇다. 돈 안 되는 일은 그만둬. 하지만 헛짓이 쓸모없지만은 않다. 헛기침은 민망함을 표시하거나 눈치주기의 용도로 요긴하다. 스산한 세상에서 헛웃음이라도 웃어야지. 상대의 턱에 주먹을 날리는 것보다 헛주먹질이 멀리 보면 낫다. 입덧이 심한 임신부의 헛구역질은 고통스러운데 그 고통의 시간이 흘러 아이가 태어난다. 3할대 야구선수도 얼마나 많은 헛스윙을 했겠는가. 우리 대부분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며 산다. 헛물만 켜는 경우가 허다하다. 삶은 헛바퀴 돌듯 하고, 걸음을 헛디뎌 넘어진다. 그래도 지금 당장의 헛고생이 어떻게 굴절되어 나에게 쌓일지 모른다. 풍진세상에 살지만, 그래도 더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은 꼭 온다는 헛꿈이라도 꿔야 견디지. 그러니 헛되어 보이는 일도 잠자코 할 수밖에.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헛꽃도 예쁘다. 김진해 |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경희대 교수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상옥편"(1920~2004) 시조 시인. 호는 초정. 경남 충무 출생. 학교 교육은 별로 받지 않았고 인쇄소 문선공 등으로 소년기를 보냄. 광복 후 부산 등지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상경하여 표구사 아자방을 경영하기도 하였음. 16세 때에 시조 "청자부"로 가람 이병기를 놀라게 한 바 있으며 한국 현대 시조를 꽃피운 공로자 중의 하나로 "백모란" "이조의 흙" 등 많은 시조 작품이 있다. 백자 이제 학이 받쳐 든 술잔 여기 술잔이 하나 있다. 그러나, 이 술잔은 적어도 백유여 년을 창공에 높이 떠 물 흐르듯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언제까지나 떠서 흐르고 있을 것이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정말 술잔이 창공에 떠서 물 흐르듯 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떠 있는 바에야 어찌하랴. 일찍이 이 땅에 한 무명 도공이 있어, 그 도공의 슬기가 능히 이러한 이적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내 눈앞에 선연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술잔은 정작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이는 그 무명 도공이 나고 살고 또 죽고, 그리고 죽어서 묻혀 있을 그 어느 외딴 산골짜기의 흙임에 틀림없다. 종생토록 고된 노역으로만 다루어진, 그 곰의 발같이 생긴 무디고 억센 손, 그 손으로 이 흙을 빚어 구워 낸 것이 바로 이 백옥보다 흰 술잔이다. 아니, 차라리 희다못해 눈이 시리도록 연푸른 술잔이다. 이러한 도자기의 빛을 애도가들은 영청이라 일컫기도 한다. 과연 그냥 희거나 그냥 푸른빛이 아니라, 오직 푸르름의 잠영, 푸르름의 그리메가 다시 그늘져 비쳐지는 빛이다! 이렇게 희고 푸른 영청 빛을 살리자면 어떻게 하랴? 그것은 파란 하늘빛이 노상 서리고 배어 있을 저 동방의 서조, 학의 날개를 새길 수밖엔 없다. 드디어 도공은, 아니 그 이름 없는 명장은 잔받침에 두 마리 학을 새겼다. 목과 부리는 입체적인 도법, 날개는 음양각에 투각까지 겸했다. 그 솜씨도 자못 빼어나 학과 같이 청수하다. 암놈은 목을 휘어 수놈의 다리 위에 얹고, 수놈은 또 암놈의 뻗은 다리 위에 그렇게 서로 목을 휘었다. 아예 인위란 모르고 오히려 한 자연으로 살아 온 도공, 그는 그가 태어난 골짜기의 흙을 파서 그 골짜기의 물로 빚고, 그 골짜기의 나무를 찍어 구워 낸 것이기에, 정녕 미도 미한 줄 모를 만큼 그저 그대로 자연스럽다. 그가 언제 미를 배웠으며 또 미를 익혔으랴. 그러나, 어찌 미를 모르고서 이같이 지묘한 의장을 구상해 내었을까? 인색한 일인들은 이를 그냥 '우연의 소산'이라 한다. 설령 우연이라면, 그 우연은 누가 닦고 누가 가꾼 우연이란 말인가? 받침으로 새겨진 학은 또 그냥 있지 않다. 좌우에서 마주 보며 활짝 죽지를 펴고 있다. 그리고 또, 펴고만 있지 않고 저 끝없는 창공을 향하여 하냥 날고 있다. 이렇게 날고 있는 두 마리 학의 날개는 말할 것도 없이 오직 한 개의 술잔을 받쳐 들기 위함이다. 그러기에 이 술잔은, 가령 술상 위에 놓였거나, 또 누가 들어서 뉘게 권작하거나 해도, 이미 학은 받침하고 있는 바에는 분명히 어느 심령의 하늘을 날고 있다 하리라. 예로부터 학은 십장생의 하나, 학이 하늘로부터 술을 실어 온다면, 아니, 어떠한 술이라도 이 잔에 한 번 담기기만 한다면, 그것은 그대로 장수를 축복하는 불로의 선주! 또 하늘로부터 술을 긷는다면, 이 술잔은 그대로 끝없는 설화의 샘을 길어 올리는 선녀들의 두레박! 이미 내게는 이 술잔으로 장수를 빌어 드릴 어버이도 없고, 나 또한 일적불음이라 대작할 친구도 없다. 그러면서 연전에 이것을 사서 내내 수장하고 있다. 문갑 위에 놓인 이 술잔은 이제 술을 마시는 연모가 아니다. 갈수록 속진에 물들어 가는 마음, 이제 그런 마음을 세례하는 하나의 조촐한 정기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먹는 게 퇴직금이구만유 지금으로부터 약 십년전. 제 부모님께서는 아현동에서 중국집을 하고 계셨습니다. 자장면 집은 신속배달이 생명이고 철가방이 마스코트이기에 저희도 '철가방'을 우대했습니다. 많은 철가방이 거쳐갔지만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날으는 철가방', '환상의 철가방', '전천후 철가방', '오토매틱 철가방', 그리고 우리집 '홍보석'의 최장수 철가방이자 마지막 철가방인 대경이 형을 떠올리며 자칭 '영업부장' 타칭 '터미네이터 철가방'인 대경이 형에 대해 몇 자 쓸까 합니다. 형의 고향은 어머니의 고향인 충남 당진이었습니다. 먼 친척뻘이라 했는데 촌수는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아마 사돈의 육촌 정도는 되었겠지요. 초등학교 6년을 하루는 결서, 하루는 조퇴, 다음날은 가정학습, 그 다음날은 야외학습하며 3년도 채 안 다니고 졸업을 한 나름대로 '수재'였습니다. 어쨌든 형은 첫날부터 수상했습니다. 가게로 막 들어선 형을 본 순간 전 '민속씨름'선수인 줄 알았습니다. 형은 신장 185센티미터에 9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를 자랑하는 나이트클럽 어깨를 연상케 했습니다. 우선 요기부터 시켰습니다. 어머니 말처럼 사람 구하기 힘든 때에 그야말로 극비리에 스카우트 해온(물론 농사를 짓고 있었지만) 귀한분 이었으니까요. 형은 슬쩍 본 주방장 아저씨는 볶음밥 곱빼기, 왕특자장면, 군만두 3인분을 내놓았습니다. "쩝쩝, 후루룩." 정말 잘 먹더군요. 열심히 먹고 있는 형에게 주방장 아저씨가 "어때 자장면 맛이 괜찮으냐?" 하며 은근히 자기자랑 비슷한 질문을 하더군요. 한입 가득 자장면을 씹고 있던 형은 알사탕만한 큰 눈을 껌벅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리고는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글씨유, 모르겠구만유. 자장면이 자장면 맛이지, 괜찮은 건 또 뭐래유?" 여하튼 다음날부터 형은 배달을 시작했습니다. 카운터에서 전화받으랴 계산하랴 바쁜 어머니에게 형은 철가방을 들고 그 느린 말투로 "아줌니이-, 지 수진부동산 댕겨 오께유." 하며 배달을 나가는 겁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아줌니이-, 지 수진부동산 댕겨 왔구만유." 하는 겁니다. 처음 몇 번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계속 그러자 어머니가 "대경아, 이제 어디 간다고 또 왔다고 그런 말 안해도 돼. 그냥 갔다와." 하자 형은 큰 눈을 껌벅이며 무언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글씨유, 뭔 말인지 모르겠그만유. 사람이 나가면 나간다, 들어오면 들어온다, 말을 해야지, 어찌 그런대유, 휙 나가고 휙 들어오는 그런 경우가 어딨대유. 진 그리는 못하는구만유." 어쨌든 너무 순진하고 때묻지 않은 형은 기운이 넘쳐 일도 잘했습니다. 완행열차 추풍령고개 넘어가듯 말은 느렸지만, 몸은 불곰이었지만, 동작은 물찬 제비였습니다. 가랑이 사이로 비파 소리가 나도록 부지런히 움직였고, 철가방을 들고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휙- 하는 바람소리가 날 정도였습니다. 기운좋게 일 잘하니 먹는 것도 대단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돼지고기 두 근 정도는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는 식으로 먹었습니다. 하루는 점심으로 볶은밥 4인분을 먹고 있던 형에게 "대경아, 그렇게 많이 먹고도 소화가 되니?" 하며 어머니가 묻자 형는 숟가락을 내려 놓더군요. 그리고 또 큰 눈을 껌벅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더니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아줌니이-, 물어볼 게 있구만유." "뭔데." "저기유, 여기 퇴직금 주남유?" "애는 중국집에 퇴직금이 어딨어." 어머니가 대답하자 형은 물컵에 물을 따라 벌컥벌컥 마시더니 물컵을 턱 소리나게 내려놓고는 "거봐유, 안 주는 거 맞쥬. 내 다 알쥬." 하고는 목을 곧게 세우고 눈에 힘을 주며 비장한 목소리로 "나유, 서울 올라올 때 우리 엄니가 그랬슈, 즉 먹는 게 퇴직금이다 이 말이쥬. 어때요, 내 말이 맞쥬?" 하고는 남은 볶음밥을 마저 먹더군요. 그 뒤로 어머니는 대경이 형이 뭘 먹든 얼마나 먹든 신경 안 쓰셨지요. 어느 날 텔레비젼에서 권투 중계를 하더군요. 주방 식구들은 서로 내기를 걸었지요. 주방장 보조인 김씨 아저씨가 야 대경아, 흰 빤스 입은 애가 이길 것 같냐? 파란 빤스 입은 애가 이길 것 같냐? 며 대경이 형에게 묻더군요. 전 형이 이번에는 또 뭐라고 대답할까 궁금했습니다. 사과를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던 형 왈, "글씨유, 몰라유. 내가 그걸 어찌 안대유." 김씨 아저씨가 재차 "임마 그래도 예상은 할 수 있잖아. 예측도 못하냐?" 하자 형은 바쁘게 씹던 사과를 꿀꺽 삼키더니 큰 눈을 껌벅거리며 또 뭔가를 깊이 생각하더군요. 이윽고, "글씨유, 지가 볼 때는유 많이 맞은 놈은 아플 거고, 때린 놈은 지치겠쥬." 하는 겁니다. 어는 월말 수금문제로 형은 또 한번 웃기더군요. "수금 왜 못했니?" 라는 어머니 물음에 형은 말하더군요. "글씨유, 안 주네유." "달라고 했어?" "했는디, 돈이 없대유." "그럼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물어봐야지." "글씨유, 곧 주겠쥬." "참 답답해라."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자 형은 눈을 껌벅거리며 또 뭔가를 생각하더군요. "그렇지유. 답답하쥬. 지는 환장하겠슈..." 사건도 많았지요. 어느 겨울날 배달을 나간 형이 빙판에 미끄러지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깨진 그릇과 짬뽕국물이 질질 흐르는 철가방을 들고 절뚝거리는 형에게 제가 물었습니다. "형 미끄러졌구나. 많이 다쳤어?" "아녀, 내가 미끄러진 게 아녀. 오토바이가 미끄러졌다니께..." "조심하지 그랬어." "나야 조심하지. 근디 오토바이는 조심 안혔어. 그러니 오토바이가 미끄러졌지. 나야 잘못 없어." 형은 말하면서 행주로 철가방을 닦더군요. 그러다가 형도 선을 볼 나이가 되어서 어머니가 미장원 아가씨를 소개시켜주었지요. 그런데 나간지 한시간도 채 안되어 형이 들어오더군요. 전 왜 이렇게 일찍 들어왔냐고 하며 형의 안색을 살폈습니다. 한참을 끙끙 앓던 형이 말하더군요. "아, 글씨. 다방에서 코피 마시는데, 코피 좋아하냐구 가시나가 묻잖여. 그래서'시키니까 마시지유.' 혔지. 그리그 오늘 어떻게 할 거냐구 묻잖여. 그래서 '나가봐야 알쥬.' 혔지 한참을 있다가 '점심은 어떻게 하죠?' 하길래 '배고프믄 묵쥬.' 혔지. 그러니까 이 가시나가 톡 쏘잖여, '오늘 여기 왜 나왔어요?' 하고 말여. 그래서 '선 보러 가라 해서 왔지유.' 혔지 그러더니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살거냐고 묻길래 '결혼혀봐야 알쥬.' 그랬지. 그러니까 코맹맹이 소리로 '실례했어요.' 하고 나가잖여. 햐튼 서울 아들은 싸가지가 없어." 휴... 저는 그냥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요. 시간은 잘도 흘러 저희 중국집도 남에게 처분했지요. 형은 그간 모은 돈을 갖고 당진으로 내려갔습니다. 논밭도 많이 장만하고 소, 돼지, 개, 닭도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재작년 가을에는 결혼도 했고, 올초에 아들을 낳았다고 집으로 전화를 했더군요. 어머니가 애는 이쁘고 건강하냐고 묻자, 형은 이러더랍니다. "글씨유, 잘 몰라유. 지 눈엔 이쁜데, 아줌니가 봐야 이쁜지 안 이쁜지 알지, 그걸 어떻게 아남유. 그럼 들어가시유..."
Board 삶 속 글 2023.01.08 風文 R 463
미생지신(尾生之信) 尾:꼬리 미. 生:날 생. 之:갈 지(…의). 信:믿을 신. [동의어] 포주지신(抱柱之信). [출전]《史記》〈蘇秦列傳〉.《莊者》〈盜?篇〉 미생의 믿음이란 뜻. 곧 ① 약속을 굳게 지킴의 비유. ② 고지식하여 융통성이 없음의 비유. 춘추 시대, 노(魯)나라에 미생(尾生:尾生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는 사나이었다. 어느 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하고 말았다. 전국 시대, 종횡가로 유명한 소진(蘇秦)은 연(燕)나라 소왕(昭王)을 설파할 때 신의 있는 사나이의 본보기로 미생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같은 전국 시대를 살다간 장자(莊子)의 견해는 그와 반대로 부정적이었다. 장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장자》〈도척편〉에서 근엄 그 자체인 공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의 입을 통해 미생을 이렇게 비평하고 있다. “이런 인간은 책형(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당한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 아니면 쪽박을 들고 빌어먹는 거지와 마찬가지다. 쓸데없는 명목에 구애되어 소중한 목숨을 소홀히 하는 인간은 진정한 삶의 길을 모르는 놈이다.”
Board 고사성어 2023.01.08 風文 R 8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