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성시(門前成市) 門:문 문. 前:앞 전. 成:이룰 성. 市:저자/도시/시가 시. [유사어] 문전여시(門前如市). 문정여시(門庭如市). [반의어]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문전작라(門前雀羅). [출전]《漢書》〈孫寶傳〉〈鄭崇傳〉 문 앞이 저자(市]를 이룬다는 뜻으로, 권세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붐빈다는 말. 전한(前漢) 말, 11대 황제인 애제(哀帝:B.C. 6~1) 때의 일이다. 애제가 즉위하자 조정의 실권은 대사마(大司馬:국방 장관) 왕망[王莽:훗날 전한을 멸하고 신(新)나라를 세움]을 포함한 왕씨 일족으로부터 역시 외척인 부씨(傅氏:애제의 할머니), 정씨(丁氏:어머니) 두 가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당시 20세인 애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동(美童)과 동성연애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충신들은 간했으나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다. 그중 상서 복야(尙書僕射:장관) 정숭(鄭崇)은 거듭 간하다가 애제에게 미움만 사고 말았다. 그 무렵, 조창(趙昌)이라는 상서령(尙書令)이 있었는데 그는 전형적인 아첨배로 왕실과 인척간인 정숭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애제에게 이렇게 고했다.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정숭의 집 ‘문 앞이 저자를 이루고 있사온데[門前成市]’ 이는 심상치 않은 일이오니 엄중히 문초하시오소서.”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물었다. “듣자니, 그대의 ‘문전은 저자와 같다[君門如市]’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오?” “예, 폐하. ‘시의 문전은 저자와 같사오나[臣門如市]’ 신의 마음은 물같이 깨끗하옵니다. 황공하오나 한 번 더 조사해 주시 오소서.” 그러나 애제는 정숭의 소청을 묵살한 패 옥에 가뒀다. 그러자 사례(司隷)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讒言)을 공박하고 정숭을 변호했으나 애제는 손보를 삭탈관직(削奪官職)하고 서인(庶人)으로 내쳤다. 그리고 정숭은 그 후 옥에서 죽고 말았다. [주] 삭탈 관직 : 죄 지은 벼슬아치의 벼슬과 품계[品階:직품(職品)과 관계(官階)]를 빼앗고 사판(仕版:벼슬아치의 명부)에서 깎아 버림.
Board 고사성어 2023.01.06 風文 R 1110
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태길편" 김태길(1920~2009) 철학자. 수필가. 충북 중원 출생. 서울대 철학과 및 대학원 졸업.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원 졸업. 철학 박사. 연세대. 서울대 교수 역임. 학자 특유의 논리적인 필치로 수필을 쓴 인물. 수필집으로 "웃는 갈대" "빛이 그리운 생각들" "흐르지 않는 세월" 등이 있고 "윤리와 정치" "한국 대학생의 가치관" "새 인간상의 정초" 등 저서가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사람은 가끔 자기 스스로를 차분히 안으로 정리할 필요를 느낀다. 나는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느 곳에 어떠한 자세로 서 있는가? 나는 유언 무언 중에 나 자신 또는 남에게 약속한 바를 어느 정도까지 충실하게 실천해 왔는가? 나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길을 것을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대답함으로써 스스로를 안으로 정돈할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리하는 방법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반성의 자세로 글을 쓰는 일일 것이다. 마음의 바닥을 흐르는 갖가지 상념을 어떤 형식으로든 거짓없이 종이 위에 옮겨 놓은 글은, 자기 자신을 비추어 주는 자화상이다. 이 자화상은 우리가 자기의 현재를 살피고 앞으로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울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것은 자기의 과거와 현재를 기록하고 장래를 위하여 인생의 이정표를 세우는 알뜰한 작업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엉클어지고 흐트러진 감정을 가라앉힘으로써 다시 고요한 자신으로 돌아오는 묘방이기도 한다. 만일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이 있거든 그것을 종이 위에 적어 보라. 다음 순간, 그 분노와 슬픔과 괴로움은 하나의 객관적인 사실로 떠오르고,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게 될 것이다. 안으로 자기를 정돈하기 위하여 쓰는 글은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아무도 나의 붓대의 길을 가로막거니 간섭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고 싶은 바를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할 수 있는 일, 따라서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다.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은 본래 상품이나 매명을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읽기 위한 것이요, 간혹 자기와 절실히 가까운 벗을 독자로 예상할 경우도 없지 않으나, 본래 저속한 이해와는 관계가 없는 풍류가들의 예술이다. 따라서, 그것은 고상한 취미의 하나로 헤아려진다. 모든 진실에는 아름다움이 있다. 스스로의 내면을 속임 없이 솔직하게 그린 글에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감동이 있다. 이런 글을 혼자 고요히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복된 일일까. 그러나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누구에겐가 읽히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가까운 벗에게 보인다. 벗도 칭찬을 한다. "이만하면 어디다 발표해도 손색이 없겠다."하고 격려하기도 한다. 세상에 욕심이 없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칭찬과 격려를 듣고도 자기의 글을 '발표'하고 싶은 생각이 일지 않을 만큼 욕심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노트 한구석에 적었던 글을 원고 용지에 옮기고 그것을 어느 잡지사에 보내기로 용기를 낸다. 그것이 바로 그릇된 길로의 첫걸음이라는 것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면서, 활자의 매력에 휘감기고 마는 것이다. 잡지나 신문은 항상 필자를 구하기에 바쁘다. 한두 번 글을 발표한 사람들의 이름은 곧 기자들의 수첩에 등록된다. 조만간 청탁서가 날아오고 기자의 방문을 받는다. 자진 투고자로부터 청탁을 받는 신분으로의 변화는 결코 불쾌한 체험이 아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청탁을 수락하고, 정성을 다하여 원고를 만들어 보낸다. 청탁을 받는 일이 점차 잦아진다. 이젠 글을 씀으로써 자아가 안으로 정돈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밖으로 흐트러짐을 깨닫는다. 안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생각을 정열에 못 이겨 종이 위에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괴지 않은 생각을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눌려 짜낸다. 자연히 글의 질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 써야 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먼길을 내 집까지 찾아온 사람에 대한 인사를 생각하고, 내가 과거에 진 신세를 생각하며, 또는 청탁을 전문으로 삼는 기자의 말솜씨에 넘어가다 보면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 쓰겠다고 한번 말만 떨어뜨리고 나면 곧 채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돈빚에 몰려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글빚에 몰리는 사람의 괴로운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글을 쓴다는 것이 즐거운 작업이나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하나의 고역으로 전락한다. 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어야 한다. 그리고 체험과 사색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만약, 글은 읽을 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체험하고 사색할 시간의 여유를 가지도록 하라.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만 알을 꺼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따라서, 한동안 붓두껍을 덮어 두는 것이 때로는 극히 필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안으로부터 넘쳐흐를 때, 그 때에 비로소 붓을 들어야 한다. 일단 붓을 들면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할 것이다. 거짓없이 성실하게, 그리고 사실에 어긋남이 없도록 써야 한다. 잔재주를 부려서는 안될 것이고, 조금 아는 것을 많이 아는 것처럼 속여서도 안 될 것이며, 일부의 사실을 전체의 사실처럼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글이 가장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지는 예는 인기를 노리고 붓대를 놀리는 경우에서 흔히 발견된다. 자극을 갈망하는 독자나 신기한 것을 환영하는 독자의 심리에 영합하는 것은 하나의 타락임을 지나서 이미 죄악이다. 글 쓰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또 하나의 잘못은 현학의 허세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일이다. 현학적 표현은 사상의 유치함을 입증할 뿐 아니라, 사람됨의 허영스러움을 증명하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여러 사람의 칭찬을 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읽고 알 수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즐거운 작업이어야 하며, 진실의 표명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우선 필요한 것은 나의 자아를 안으로 깊고, 크게 성장시키는 일이다.
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한방에 보내자 - 송근준(남.인천 서구 가정동) 때는 바야흐로 단기 4309년 여름이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늘 칠판 모퉁이에 단기 년, 월, 일을 쓰셨습니다. 단군의 자손이 단기를 모르면 단군의 자손이 될 자격이 없다고 하시며 우리 민족의 유구한 우수성을 역설하시는 분으로 별명은 '단군선생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지금의 초등학교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변기이겠지만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그때만해도 재래식 변기(일명:푸세식)이었습니다. 지저분하지만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요즘의 정화조 통위에 볼일을 보는 구멍을 몇 개 뚫고 그 사이를 판막이로 막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밑은 모두 하나가 되는 거지요. 그리고 벽 뒤쪽에는 변을 푸는 곳이 있는 그런 화장실입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점심 시간이었습니다. 화장실, 아니 그땐 변소라고 했으니까 현장감을 더하기 위해 변소라 하겠습니다. 변소 뒤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별명이 땜통이라는 친구가 "똥통에 쥐가 있다."라고 하여 변통을 보았더니 여름장마가 지나간 후라 충만한 변통 안에서는 쥐 한마리가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부에서 '쥐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쥐 잡는 날'을 지정할 만큼 쥐는 곧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변통 안의 쥐를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큰 벽돌을 온힘을 다해 들고와 큰 목소리로 "한방에 보내자."하며 변통안에 사정없이 투하하였습니다.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완전히 크림슨 타이드 영화에서 잠수함이 폭발하는 것 같은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로 "사격중지, 사격중지, 아니 폭격중지."하는 소리, 아니 절규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마침 사격과 폭격을 중지하고 변통을 보았더니 정말 쥐는 사살되었는지 사격중지라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아 아무 생각없이 오후 수업을 하기위하여 입실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단군선생님께서는 수업을 들어오시지 않는 겁니다. 그럭저럭 한 시간을 꽁으로 먹고 오후 2시간째 수업을 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단군선생님께서 새옷으로 단장을 하고 들어오셔서 대뜸 하시는 말씀이 "한방에 보내자고 한 놈 나와!"하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저희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 친구들이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내가 머리에 털나고 똥벼락 맞았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밑에서 똥분수를 맞는다는 얘기는 처음이다. 그렇게 사격중지, 아니 폭격중지를 외쳤는데도." 말끝을 흐리시더니 다시 완전히 이성을 잃어신 것 같은 얼굴로 "한 방에 보내자고 한 놈 나와."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변통에 융단폭격을 할 때 단군선생님이 변소에서 볼일을 보시면서 봉변을 당하시던 장면과 "한방에 보내자."라고 한 것이 저라는 생각이 뇌리를 강하게 스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손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때 어린 저로서도 뒤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성이 조금은 있었습니다.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믿었던 융단폭격의 참전 전우들의 눈동자가 무거운 침묵과 함께 모두 저를 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땐 정말 쥐구멍이 아니라 변통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자수하여 광명 찾을 걸하는 생각은 했지만 그땐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런데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라는 속담이 진짜더라구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저는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는 쥐를 한방에 보내자고 한 것이지 선생님을 한방에 보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용기있게 말하자 선생님께서는 "내가 빗발치는 파편을 그 좁은 공산에서 다 피했지만 그 한방에 완전히 폭탄 맞은 꼴 되었다. 이놈아!"하고 말씀하신 후 혼내줄 명분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고의성은 아니라는 것을 아셨던지 조금은 이성을 찾은 얼굴로 "앞으로 똥통에 돌을 던지는 놈은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하신 후 수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단군선생님께서는 6.25 당시 중위로 참전하여 군용어를 잘 쓰시는 편이었습니다. 변소에서 볼일을 보고 계실 때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사격중지, 폭격중지를 외롭게 연발하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단군선생님의 명복을 방송을 통해 빌었으면 합니다.
Board 삶 속 글 2023.01.05 風文 R 504
문경지교(刎頸之交) 刎:목 찌를 문. 頸:목 경. 之:갈 지(…의). 交:사귈/벗 교. [동의어] 문경지계(刎頸之契). [유사어] 관포지교(管鮑之交). 금란지계(金蘭之契). 단금지계(斷金之契). [참조] 완벽(完璧). [출전]《史記》〈廉頗藺相如列傳〉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 또 그런 벗.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신하 목현(繆賢)의 식객에 인상여(藺相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 명옥(名玉)인 화씨지벽(和氏之璧)을 원상태로 가지고 돌아온 공으로 일약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됐다.그리고 3년 후(B.C. 280), 소양왕과 혜문왕을 욕보이려는 소양왕을 가로막고 나서서 오히려 그에게 망신을 주었다. 인상여는 그 공으로 종일품(從一品)의 상경(上卿)에 올랐다.그리하여 인상여의 지위는 조나라의 명장으로 유명한 염파(廉頗)보다 더 높아졌다. 그러자 염파는 분개하여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싸움터를 누비며 성(城)을 쳐 빼앗고 들에서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다. 그런데 입밖에 놀린 것이 없는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다니…‥. 내 어찌 그런 놈 밑에 있을 수 있겠는가. 언제든 그 놈을 만나면 망신을 주고 말 테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했다. 그는 병을 핑계 대고 조정에도 나가지 않았으며, 길에서도 저 멀리 염파가 보이면 옆길로 돌아가곤 했다. 이 같은 인상여의 비겁한 행동에 실망한 부하가 작별 인사를 하로 왔다. 그러자 인상여는 그를 만류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염파 장군과 진나라 소양왕과 어느 쪽이 더 무섭다고 생각하는가?” “그야 물로 소양왕이지요.” “나는 그 소양왕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신하들 앞에서 혼내 준 사람이야. 그런 내가 어찌 염파장군을 두려워하겠는가? 생각해 보면 알겠지만 강국인 진나라가 쳐들어오지 않는 것은 염파장군과 내가 버티고 있기 때문일세. 이 두 호랑이가 싸우면 결국 모두 죽게 돼. 그래서 나라의 위기를 생각하고 염파장군을 피하는 거야.” 이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다. 그는 곧 ‘윗통을 벗은 다음 태형(笞刑)에 쓰이는 형장(荊杖)을 짊어지고[肉粗負荊:사죄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무릎을 끓었다. “내가 미욱해서 대감의 높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어서 나에게 벌을 주시오.” 염파는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날부터 두 사람은 ‘문경지교’를 맺었다고 한다.
Board 고사성어 2023.01.05 風文 R 866